성경주석강해/모세오경

창세기 16장 아브라함의 나이가 주는 교훈은?

은바리라이프 2008. 4. 22. 20:32
창세기 16장 아브라함의 나이가 주는 교훈은?
  글쓴이 : 배목사     날짜 : 07-08-21 02:07     조회 :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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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은 하갈이 아브라함의 첩이 되어 잉태하면서부터 아브라함의 가정에 일어나는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10년(3절)이 지나 86세가 다 되었는데도 하나님이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창12:12)는 약속이 이루어지기는커녕 당장 그 민족의 씨앗이 될 자식 하나도 얻지 못하자 사라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첩으로 드려 보내 후손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결코 인위적인 방법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아브라함 부부의 인간적인 고뇌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드리겠다는 충정은 충분히 이해되나,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불신앙의 죄를 범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조급하게 행하는 자에게 항상 실패와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그들은 그 후 부터 분쟁의 늪에서 해매야 했으며 종국에는 첩의 몸을 빌어난 자식(이스마엘)이 아랍 민족의 시조(12절-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가 됨으로써 오늘날 중동문제의 뿌리 깊은 원인을 마련하고 말았다. 하나님이 가라는 곳까지 가고 머물라는 것이 곧 빛나는 신앙 자세이리라. 한 마디로 ‘go-stop'을 잘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본 장과 다음 장에 계속해서 나오는 아브라함의 나이를 통해서 의문을 가져봄직한 문제에 대해 잠깐 상고해보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75세(창12:4)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는 남편 보다 10살(창17:17)이 아래다. 100세에 이삭을 낳을 때 사라는 90세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고 10년(3절)이나 지나 더욱 고령이 되었지만 자식을 볼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지자 인위적인 방법으로 아내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잉태한다. 그래서 86세(16:16)에 이스마엘을 낳는다. 이것이 16장 마지막 절(16절)의 기록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17장) 1절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언약을 세워 아브라함으로 심히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16장과 17장 사이는 자그마치 13년간의 공백이 있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행적을 성경은 일일이 모두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브라함을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이 이처럼 오랫동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의아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조금만 세밀히 읽어보면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의문을 품고 그것을 깊이 묵상하다보면 뜻밖의 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의문’이 없으면 ‘대답’도 찾을 수 없듯이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신앙적 의문을 가지고 깊이 상고하면 할수록 은혜의 깊은 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2000년 교회사나 일반 역사 가운데서도 수많은 현자들은 ‘묻고 또 물어’ 세상의 진리와 이치를 깨달아간 것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우리들도 ‘바이블 동서남북 성경 틀 세우기’를 통하여 성경 전체의 흐름을 파악한 다음에는 계속 말씀 속으로 들어가서 성령께 묻고 물어 더 깊은 깨달음의 바다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거기에 더 친밀한 하나님과의 동행이 있기 때문이다.

16장과 17장 사이의 13년간의 공백, 하나님이 기다리고 기다리셨다가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장구한 구원사역을 시작하셨는데 어찌 13년간이나 방치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계획 없이 일하시지도, 당신의 계획을 잊어버리시지도 않는 분이시다. 그런데 3년도 아니고 13년간이나 어떻게 아브라함을 방치한 듯이 보일까?

16장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생각이 가능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86세라는 노년에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첩에게서 낳던지 누구에게서 낳던지 아브라함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으매 틀림없다. 당시 고대 근동의 풍습상 자식 없이 인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로 생각했는지를 잘 안다면 아브라함이 늙으막에 얻은 아들은 귀하디귀할 수밖에 없다. 늙어서 세상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점점 식어가면서 늙으막에 얻은 이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전부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노는 즐거움에 빠져 하나님을 잊고 산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라는 ‘세상 재미’에 빠져 하나님을 방치한 것이다.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13년간이란 긴 시간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기다시다가 더 이상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개입하신 것이고 아브라함이 아련히 잊었던 언약을 다시 떠올리고 구속사역에 동참하라고 촉고하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13년간이라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공백은 그가 두 번씩이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고 거짓말한 잘못 보다 더 큰 죄악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가 늘 당신과 ‘동행’하기를 애쓰는 것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도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만 아브라함처럼 세상 재미에 빠져 하나님을  뒷방 늙은이처럼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쯤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