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9) 이스마엘의 출산은 하나님의 뜻 | ||||
이스마엘은 내어쫓기기 위해 태어난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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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불신앙'이라는 것이 창세기 16장에 대한 공통된 견해인 것 같아서, 처음부터 '과연 그러한가'를 살펴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먼저 본문을 아무 선입관 없이 면밀히 살펴 내용을 이해하고, 그러면서 당시의 배경과 인물의 처지와 심정 등을 폭넓게 짚어 보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언약)으로 돌아가 그 말씀의 범위 안에서 종합하여 결론지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먼저 본문을 평이하게 살펴보고 다음에 내용을 분석하는 방향으로 가보겠습니다. 사라의 제안을 수용하는 아브람(창16:1~3) 가나안 땅에 들어온지 10년이 되도록 자녀를 낳지 못한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이 아직 남자 구실을 할 수 있을 때 다른 여자에게서라도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자기 몸종 하갈과 동침할 것을 제안합니다. 자신이 아브라함의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야 오죽하겠습니까마는, 늙어가는 남편을 보면서 더 늦기 전에 씨받이라도 해서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심산이겠지요. 아브람은 사래의 권고대로 하갈을 첩으로 삼아 동침합니다. 아브람이 75세 때에 가나안에 들어 왔으니 지금은 85세고 아내 사라는 75세입니다. 잉태한 하갈의 도망(창16:4~6) 아브람이 젊은 하갈과 동침하자 그녀는 곧 아이를 갖습니다. 사래의 몸종인 하갈은 주인의 아이를 갖게 되자 자기 여주인을 멸시하였다고 하는데, 아마 사래가 잉태하지 못하는 석녀인데 자기는 주인의 아이를 가졌으니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한 것처럼 사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 같습니다(삼상1:5~6). 사래는 자식을 낳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몸종 하갈을 남편의 품에 주었으면서도 마음이 괴로웠던 터에, 이제 몸종에게 멸시까지 당하자 남편을 원망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아브람이 하갈에게 "비록 아이를 가졌더라도 여전히 당신의 종이니 당신 뜻대로 하라"고 하자, 사래는 하갈을 학대합니다. 이 학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종을 때려서 며칠 있다가 죽으면 주인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성경의 규례가 있을 정도니까 아마 심한 체형을 가한 것 같고, 하갈이 도망할 마음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출21:20~21). 감찰하시는 하나님(창16:7~14) 하갈이 도망하여 술길 샘물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납니다. 가데스 인근의 술길 샘물이라면 애굽 바로 위의 광야 지역인데, 아브람이 우거하는 곳은 헤브론이니까 그녀는 애굽으로 도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하갈이 "여주인을 피해 도망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하나님의 사자는 "네 주인에게 가서 수하에 복종하라. 네 자손이 번성하여 셀 수 없이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며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의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하갈은 자기를 위해 나타나 위로와 축복의 말씀을 주신데 너무 감격하여,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샘을 '브엘라헤로이'라고 이름 짓고 헤브론의 사래에게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이스마엘에 대해 "그가 들나귀 같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이 그를 칠 것이며,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 것"이라고 난해한 말을 합니다. '들나귀'란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처럼 거칠고 속박 받지 않으려는 속성을 나타내고, '동방'이란 이방인의 땅이나 이스라엘의 대적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어로 많이 쓰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은 아무의 속박도 받지 않으려는 거친 사람으로 화목의 길을 모르고 칼을 의지하고 살아갈 것이고, 이스라엘의 대적이 될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스마엘 출산(창16:15~16) 하갈은 돌아와서 아들을 낳고, 아브람이 '이스마엘'이라고 이름을 지어 줍니다. 아마도 하갈이 브엘라헤로이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던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아브람은 그녀에게 들은 대로 이름을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 나이가 86세였습니다. 100세 이상을 살던 때이긴 하지만 늦둥이를 두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 왜 문제인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지 10년이 지났고 그들의 나이가 85세와 75세 노인인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175세를 살았지만 그 당시에는 30세 전후에 첫 아이를 낳았고 아버지 데라도 70세에 단산한 것(창11:12~26)을 염두에 둔다면, 사라의 초조함과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아브람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앞의 15장에서 "네 후손이 하늘의 별 같으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또, "이 가나안 땅을 주려고 너를 불렀다"는 말씀을 믿게 해달라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몸소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는 언약 의식까지 하셔서 믿게 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낳은 아브람은 책망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책망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기에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브람은 자신의 미래를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것은 "네 몸에서 날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만 나날이 늙어가는 자신들을 보면서 마냥 평안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사래의 제안 이스마엘의 출산을 생각해낸 쪽은 사래입니다. 사래가 제안을 하였고 아브람이 허락했습니다. 아마 사래가 권하지 않았다면 아브람은 그냥 기다렸을 것이고 처음에는 거절도 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사래 이외의 여자를 마음에 두지 않았고, 또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많은 나이에도 자식 없음을 걱정하며 하갈과 동침할 것을 권했을 때에도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승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래가 "하나님께서는 당신 몸에서 난다고 하셨지 내 몸에서 난다고는 하지 않으셨으니, 하갈에게서 자식을 낳아도 문제가 없지 않느냐"고 설득하였을 것이고, 아브람도 여자의 자리까지 내주면서 자식을 낳자는 사라의 강권함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 아내에 대한 말씀이 없으셨기 때문에, 사라가 아닌 하갈에게서 아들을 얻으려고 한 것을 언약을 어겼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심정적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낳으려고 한 아브람 내외를 수용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약속 조항을 어긴 것은 아니기에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13년의 공백은 책망인가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 륙세이었더라.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6:16~17:1) 문제는 이스마엘을 낳을 때의 아브람 나이가 86세이고, 13년 후인 99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은 후 99세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기까지의 13년의 공백과, "내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라"는 말씀이 이스마엘을 낳은데 대한 책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는 관점이 일반적이고, 또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정하기에는 뚜렷한 단서가 없고, 또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가를 알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천사가 나타난 이유 하나님의 사자가 도망하는 하갈에게 나타나 많은 말을 하는데, 그가 개인적인 이유로 왔을 리는 만무하니 무슨 말을 하는지 살펴볼 필요를 느낍니다. 사자는 하갈에게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부르면서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한다는 고백을 받아낸 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또 "네 자손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크게 번성하게 해주겠다.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기 때문이다"라고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천사의 말에 감격한 하갈은 그의 권고대로 돌아와서 사래의 수하에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아서 안된다면 굳이 도망하는 하갈을 달래서 되돌아 오게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도망하게 놔두면 없었던 일처럼 될 것을 굳이 돌아가서 사래의 수하에 복종하라고 권하고,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무책임하게 한 여인을 버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쫓아낼텐데 돌아가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후에 태어난 이삭을 희롱하자 사라는 모자를 쫓아냅니다. 동생을 희롱했다고 해서 이제 어엿한 자식인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는 사라의 태도는 아무리 양보해도 지나칩니다. 그래서 차마 내쫓지 못하고 깊이 고민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말대로 쫓아내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은 부당한 사라를 편들어 주시는 것 같고 스스로 하신 말씀을 번복하시는 것 같아 일관성도 없어 보입니다(창21:9~12).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누구를 편들어 주실 분도 아니고, 말씀을 번복하실 분도 아니심을 믿는 믿음으로 생각을 정리하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쫓아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갈이 도망하도록 그냥 놔두지 않고 다시 돌아가 아이를 낳게 하신 것을 보면,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나야 할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의 출산을 허락하셨다가 이삭이 태어난 후에 그를 내어 쫓으라고 하신 이유가, '이스마엘은 낳아서는 안되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마엘은 내쫓기기 위해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난 다음에 내쫓아낸 이유는, 상속자인 이삭과 비교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낳으라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어쩌면 사라를 충동하여 일을 이렇게 만드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지 않기를 원하셨다면, 도망하는 하갈을 굳이 되돌아 오게 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게 하시고 이삭이 태어난 후 다시 사라를 통해 쫓아내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에 대한 설명 자료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이 부분은 21장에서 살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의 이스마엘 출산이 칭찬할 일은 물론 아니지만, 책망할 일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애매하게 아브람을 책망할 일이 아니라, 이스마엘까지 준비하셔서 미래에 우리의 믿음을 설명하시려는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에 감사하는 것이 오히려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때그때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거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큰 흐름을 보면서 느긋하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7~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4:28~31) 간혹 이스마엘을 쫓아낸 것을 인권 문제와 연결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성경을 그런 쪽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해 세상의 여러 도구를 사용하시고 사람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토기장이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께서 하늘나라를 보여 주시려고 만드신 진노의 그릇을, 하나님의 의도를 놓치고 사람의 안목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소치일 뿐더러 아무 유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1)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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