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모세오경

얍복강에서의 야곱의씨름

은바리라이프 2008. 2. 19. 11:29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창 32:24-25)
우리들은 기도를 강조할 때 야곱의 이야기를 많이 사용한다. 야곱이 열심히 기도를 했다. 심지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정도로 열심히 기도했다. 그 열심 앞에 하나님은 져 주어 응답을 주셨다.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야곱처럼 열심히 기도하여 응답 받자 라는 형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본문은 이런 의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본문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얍복강에서 행해진 야곱의 씨름을 오해하면 성경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집을 부린다. 야곱의 씨름 사건을 잘못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과연 무슨 뜻이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아보자.

 

1. 야곱은 결코 하나님의 사람일 수 없다

야곱은 하나님과 유일하게 직접 싸웠던 사람이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싸우기 전까지의 모습은 어떠했고 어떤 정신이었는가? 야곱은 출생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들고 출생한 자라고 해서 이름이 야곱이라고 붙여질 정도였던 사람이다(창32:26). 그리고 형에게 주어진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쟁취하는 것은 물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인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고야 마는 그런 정신의 소유자였다.
꼭 이런 사람 같다. “나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 혹은 “누구든지 나에게 대드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정신의 소유자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죄악된 인간의 본래 모습이다. 제아무리 구원을 받았고 주의 종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정치적으로 누구든지 자신의 힘 아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과 같은 죄성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다.
이런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런 논리의 정신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일 수 있다. 세상 권력은 힘의 논리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힘의 논리로 설명하는 곳은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힘에 의한 승리를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힘의 논리로 우리들에게 다가오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의 논리로 하나님께 나아간 야곱은 하나님의 적일 수밖에 없다. 즉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야곱이었다.

 

2.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에게 찾아오셨다


야곱은 인간적인 욕망으로 가득했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적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게 찾아오셨다. 야곱이 어느 곳에 가든지 하나님은 끈질기게 찾아오셨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야곱을 못 버리고 끈질기게 찾아오셨는가? 그 이유는 야곱의 아버지인 이삭에게 준 약속 때문이다.
야곱 뿐만 아니라 이삭 역시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주어졌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보호를 받은 것이다. 약속의 자손은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적들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야곱은 이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 이유는 약속의 자손이 갖추어야 할 자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 자질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빼앗고 속이고 훔치는 그런 인생관을 갖고 있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자신이 쟁취하여 얻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들에게도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과 흥정을 해서 쟁취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이 야곱에게 있었고 우리들에게 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씨름을 걸었다. 무엇 때문인가?

 

3.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씨름을 걸다


야곱이 하나님을 상대로 씨름을 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씨름을 걸어오신 것이다. 그 이유는 야곱의 잘못된 생각과 그의 인생관 때문이다. 약속을 의지하지 않고 힘의 논리로 가득한 그에게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음”을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즉 야곱의 열심과 욕심으로는 하나님께서 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라는 측면에서 씨름을 걸어오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들은 야곱과 같은 열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했기에 응답을 주셨다고 해석해 버리면 성경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또 한번의 승리를 안겨 줌으로 야곱의 잘못을 지적하며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야곱과 씨름에 들어갔다. 그 씨름에서 하나님은 실패자로, 야곱은 승리자로 등장한다. 야곱에게 또 한 번의 승리를 안겨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야곱과 씨름을 했다. 하나님은 이같은 야곱의 승리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보여 준다. 인간적 승리의 한계이다.
야곱이 승리할 때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렸다. 야곱의 인간적인 승리의 힘은 순간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환도뼈는 남성의 힘을 지탱해 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 환도뼈가 위골되었으니 남자가 힘을 못쓰게 되었으니 이제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그때 야곱은 깨닫게 되었다. 밤새도록 자신과 싸웠던 대상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야곱은 여기서 모든 것이 무너진 것을 경험한 것이다. 환도뼈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인생관이 무너진 것이다. 그 동안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이었다. 이제 야곱의 적은 고향에서 기다리는 형 에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4. 이제 야곱은 달라졌다


이제 야곱은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지기 싫어하고 복을 쟁취하려는 야곱이 이제 자신의 힘을 무너지게 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야곱은 떠나려는 하나님을 붙들었다. 출생할 때 형의 발꿈치를 잡았던 손으로 이제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며 울었다. 하나님은 이런 야곱의 과거를 깨끗히 씻기 시작한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주시면서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장자가 되었다. 세상의 상식과 힘의 논리로 인한 장자가 아니라 약속에 의한 장자였다.
남의 것을 빼앗고 인간적인 힘의 욕망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새로운 이름인 이스라엘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스라엘이란 이제 사람과 하나님을 모두 다 싸워서 이긴 인물이라는 칭호이다.

 

5. 교회는 야곱식이 아닌 이스라엘식이다

교회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겨서 수적인 증가를 추구하는 것을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잔치를 벌이는 곳은 아니다. 구원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된다. 유형교회인 지상 교회 안에서는 구원받는 무리들이 모이지만 때로는 구원받지 못한 가라지도 모인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유형교회 안에 들어온 무리들의 숫자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고 교회가 성장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인생의 성공 비결을 성도들에게 전수하여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오로지 이런 것밖에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물론 이런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진행된 곳이 교회는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이 세상과 이별 때 다 없어질 것들이다.
그러나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생명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약 속의 한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이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교회를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생명의 풍성함이다. 그리고 섬기는 것과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친히 섬기려 오셨고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

 

5. 맺는 말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도 아니며 성도들의 모습도 아니다. 목회자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다. 경쟁하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듯이 같은 형제 자매가 잘 될 때 배아파하는 것은 절대로 교회의 참모습인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야곱식의 인생관일 뿐이다.
우리들은 야곱식의 경쟁과 욕망의 분출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생관과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이 이스라엘식의 인생관이요, 사고방식이다. 당신은 어떻게 사시려는가? 한번도 양보해 경험이 없고 교회를 위해서 희생과 헌신을 해 본 경험이 없다면 우리들은 어쩌면 우리들의 신앙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음을 알자. 당신은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