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창조사학 특강] (5) 우리에게 공자는 누구인가

은바리라이프 2008. 2. 11. 17:38
[창조사학 특강] (5) 우리에게 공자는 누구인가

[2001.01.27 10:39]   모바일로 기사 보내기


필자가 중국의 유적과 유물들을 돌아보고 고고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과 만나 대담하면서 놀란 것은 중국 대륙의 역사가 동이족과 하화족의 경쟁과 협력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었다.현재 중화 사상을 이끌고 있는 하화족을 중국인들은 화하(華夏)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본래 황하의 상류 지역에 있는 임분(臨汾)에서 살았다.동이족에 속하는 소호(少昊)족은 산동의 곡부를 중심으로 살았고 그 수가 하화보다 월등하게 많았으나 하화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으며 살았다.동이족의 정신적 중심은 산동의 태산이었고 그 정상에 있는 천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살았다.

하화의 첫 지도자는 요(堯)였다.그는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만한 인재를 얻지 못하여 동이족의 순(舜)에게 뒤를 부탁했다.그러나 순은 다시 하화에서 우(禹)라는 인물을 찾아 자리를 넘겨 주었고 우는 동방 군장들의 협력을 얻어 황하의 치수에 성공하였으며 하화는 임분에서 화산(華山) 지역으로 진출했다.그러나 우는 선임자들과는 달리 전자제를 시작하여 그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는데 14대에 이르러 걸(桀)이라는 폭군이 나타났으며 동이족의 탕(湯)이 걸을 제거하고 은(殷)을 세웠다.은나라는 정인이라는 기도집단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 국사를 결정하는 신정국가였다.그러나 탕도 역시 전자제를 답습했다.은의 30대 주(紂)는 우상을 섬기고 무도하므로 하화의 발(發)이 은을 멸망시키고 자기 나라를 세웠는데 그가 주(周)의 무왕이었다.

주의 무왕은 신정국가였던 은을 멸망시켰으므로 그 명분을 찾기위해 신앙의 자유를 선언했다.즉 조상 귀신을 모시는 종묘와 땅과 농사의 신을 섬기는 사직을 모든 지방 관청에 만들게 하고 왕궁에도 그것을 세웠던 것이다.은이 멸망할 때 두 명의 지사가 있었다.그 중의 하나는 조선으로 가서 요동 지역의 땅을 얻어 살았던 기자였고 또 하나는 무왕에게서 은나라 도읍 근처의 땅을 봉지로 받아 은의 유민들과 함께 살았던 미자인데 그 땅을 송(宋)이라 했다.공자의 증조부 공방숙은 바로 그 송나라 사람이었다.그래서 공자는 죽기 7일전에 “나의 조상은 본래 은나라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다.그의 조상은 신정국가였던 은나라 사람이었으며 동이족이었던 것이다.

귀신의 나라였던 주가 멸망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졌을 때 공자가 태어났다.그 사상의 기본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이었다.그는 요순과 하,은,주에 이르는 역사 ‘상서(尙書)’를 기록하고 신앙 부흥운동을 주도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 진시황제였다.그는 동이족의 신임을 얻기 위해 태산에 제사를 드리려고 나섰다가 동이족 창해역사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그는 동이족 포섭을 단념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3년 후인 BC 215년에 만리장성 공사를 시작한다.처음 장성의 위치는 난하의 서쪽이었다.이는 동쪽의 조선을 막아 놓고 산동의 동이족을 박해하려는 계략이었다.그리고 그 3년후인 BC 212년에 동이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공자의 사상을 박해하는 것이다.그는 상서를 비롯한 공자의 책을 모두 거두어 불태웠고 그 제자 460명을 땅에 묻어 죽였다.

시황제의 아들 호해를 제거하고 진을 멸망시킨 사람은 역시 하화족 사람인 한(漢)의 유방(劉邦)이었다.그는 동이족의 지지를 얻기위해 멸실된 공자의 학문을 복원하겠다고 선언했으나 그것이 본심은 아니었다.그는 살아남은 공자의 제자들을 모으게 하여 상서를 비롯한 공자의 책들을 기억나는대로 복원하게 했으나 하화의 나라였던 주나라의 통치이념을 그 책에 주입하고 종묘와 사직을 계속하게 한 것이다.동이족이고 신앙인이었던 공자가 주나라의 통치이념을 사모하고 귀신 섬기기를 권하는 자로 전락해버린 것이다.공자 시대에는 종이가 없어서 대나무를 깎아서 글을 썼고 올챙이 모양의 과두문자를 썼다.그러나 한나라가 만든 공자의 책은 종이에 예서로 쓴 것이므로 그것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 하고 그것을 만든 학자들을 ‘어용(御用)학자’라고 하는 것이다.그러나 놀랍게도 이들 어용학자들 가운데 ‘양심선언’을 한 사람이 있었다.그는 논어의 술이(述而)편을 기록하면서 목숨을 걸고 진실한 한마디를 써서 남겼던 것이다.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 怪力亂神)…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한 적이 없었다’

이 한마디로 공자가 귀신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후세에 증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이렇듯 동방의 로마와 같았던 대제국 한나라에서 가짜 공자가 만들어지고 그를 조작된 국가적 우상으로 만들고 있던 무제 때에 공자의 집벽에 숨겨 두었던 진짜 ‘고문상서’가 발견되었다.그러나 무제는 어용학자들에 명하여 고문상서를 폐기시켜 버렸다.후에 다시 양심적인 학자들이 고문상서를 복원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이들을 고문학파라고 한다.그러나 결국 그들은 황제의 박해를 받아 소멸되었고 고문상서는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날조된 상서 즉 오늘날의 서전(書傳)만 남아 있게 된 것이다.고문상서를 폐기한 무제는 동이족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그는 장성을 넘어가 기자조선을 공격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위만조선을 점령하고 한4군을 설치했다.한4군이 있었던 자리는 한반도가 아니라 난하와 요하 사이의 땅 요서지방에 있었다고 윤내현 박사는 그의 저서 ‘고조선 연구’에서 고증하고 있다.

당시 조선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왕도 없고 단군(壇君)이라는 제사장만 있던 평화의 나라였다.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보면 조선의 정부 조직에 곡(穀),명(命),병(病),형(刑),선악(善惡)을 주관하는 부서가 있었으나 병(兵)을 담당하는 국방부가 없다.조선은 중국의 동부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72개의 거수국을 거느리는 방대한 영토에서 살았으나 왕과 군대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이다.그 조선이 한 무제의 공격을 받자 마침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BC 57년에는 신라,BC 37년에는 고구려,그리고 BC 18년에는 백제 등 왕국을 세우기 시작했고 바다건너 일본 열도에도 왜국을 경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