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사학 특강] (6) 동방의 로마 한(漢) 제국 |
[2001.01.29 10:47] | ||
유방이 세운 한(漢)제국은 흔히 동방의 로마로 불리워진다.패현 출신의 유방(劉邦)이 경쟁자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웠던 BC 206년은 로마의 푸블리코스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마지막 도전을 격파하고 대 제국의 터를 닦고 있을 때였다.로마의 지배층은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그리스의 인본주의 문화를 그대로 도입하여 ‘팍스 로마나’의 기반으로 삼았는데 한나라의 유방도 귀신을 섬기는 주나라의 인본주의적 통치이념을 그대로 물려받아 대 제국을 건설했다.그 로마는 처음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다가 나중에 오히려 기독교를 발판으로 하여 동방 진출을 도모했다.그러나 로마의 이 동방정책은 결국 제국의 몰락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그와 마찬가지로 한 제국은 공자의 ‘경천애인’ 사상을 제국주의적 통치 이념에 맞도록 개작하여 제국의 문화적 바탕으로 만들고 산동 지역의 동이족을 제압한 후에 장성을 넘어 동방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동방을 넘보던 한 제국의 정책은 오히려 자국의 몰락을 자초하고 말았다. 한 제국의 동방 진출에 강력하게 제동을 걸었던 것은 동이족의 최전방에 위치했던 훈육족이었다.한에서는 이 훈육을 비하하여 흉노(匈奴)라고 불렀다.유목민 출신의 기마민족이었던 훈육은 한 제국을 뿌리째 뒤흔들 정도로 강력하여 무제의 고손이 되는 원제는 후궁 왕소군을 훈육의 호한야 선우에게 바쳐야 했을 정도였다.한 제국이 외척의 발호로 점점 몰락하고 있을 때에 그 외척 중에 왕망(王莽)이라는 야심가가 나타난다.왕망의 부친 왕만은 원제의 외삼촌이었다.능란한 처세와 자기관리로 28세에 대사마에 오른 왕망은 고구려 등 동방의 군장들에게 밀서를 돌려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지원해주면 왕의 인수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의 사가들이 밀서의 내용을 바꿔 말한 것이다.당시 동방의 군장들은 이미 왕이었고 특별히 한나라에서 보내는 왕의 인수를 탐낼 까닭이 없었다.왕망은 산동성 동이족의 지지를 얻게 위해 동방의 군장들이 마음에 들어할 조건 즉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을 지지해주면 공자의 진본 상서를 복원할 것이며 귀신 섬기는 일을 폐지하고 다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약속했을 것이다.그러나 마침내 황제가 되어 AD 8년 신(新)이라는 제국을 세운 왕망은 약속을 어기고 동방의 군장들을 왕에서 제후로 강등시켰기 때문에 군장들이 분개했다고 한서는 쓰고 있다.그러나 왕망은 더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격분한 훈육이 먼저 신을 공격했고 왕망이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고구려군은 오히려 서쪽 변경까지 출병하여 왕망군을 위협했다. 왕망이 동방 군장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산동성 일대의 동이족이 마침내 그를 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군복이 비슷한 정부군과 구별하기 위해 눈썹을 진흙으로 칠하여 적미군(赤眉軍)이라 했는데 한서는 산동성 낭야현의 양조장 주인 여모(呂母)라는 여자가 자신의 아들이 억울하게 죽은 원수를 갚기 위해 도당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그러나 그들의 군복이 정부군과 비슷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는 번숭, 봉안,서선,사록 등 동이족의 지도자들이 관군을 포함한 30만의 대군을 정식으로 거병한 것이다.그들의 진중에서 무당이 북을 치며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이는 동이족의 군대가 하나님께 기도드린 것을 그런 식으로 비하해서 기록했을 것이다. 동이족의 적미군 외에 또 한 무리의 반란군이 있었다.한 황실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유현(劉玄)과 유수(劉秀)가 녹림산의 도둑떼 왕광,왕봉 등과 손을 잡고 결성한 녹림군(綠林軍)인데 그 수가 5만 정도 되었다. 이들 중 유수는 그 야망은 컸으나 매우 야비한 인물이었다.녹림군 1만명과 함께 곤양성까지 진출했던 유수는 40만이 넘는 정부군의 포위를 뚫고 겨우 13기로 남문을 탈출하여 다시 3천명의 군사를 모아 정부군을 대파하였다고 후한서는 찬양하고 있다.겨우 13기로 탈출한 유수가 어떻게 40만이 넘는 정부군을 대파할 수 있었을까? 이는 적미군의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수는 낙양으로 가는 적미군과 함께 가지 않고 대표로 내세운 유현을 낙양으로 먼저 가게 한 후 자신은 말머리를 돌려 한단으로 향했던 것이다. AD 23년 유현이 먼저 장안에 도착했을 때에는 왕망은 이미 자객에게 살해당한 뒤였다.토벌의 대상을 잃은 유현은 제위에 올라 주야로 대연을 베풀었고 본래가 도둑떼였던 녹림군은 닥치는대로 장안을 약탈했다.그래서 나중에 장안에 들어선 동이족의 적미군이 장안에 들어섰을 때에는 30만 대군을 먹일 식량이 없었다.적미군은 유현을 잡아서 죽였으나 AD 26년 정월,마침내 장안에는 식량이 떨어졌다.더 이상 장안에서 가질 것도 없고 버틸 수도 없게 된 적미군은 마침내 다시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굶주린 배를 움켜쥔채 산동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철수하는 적미군을 공격한 사람이 바로 한단에 가 있던 유수였다.은혜를 원수로 갚는 유수의 공격을 받아서 적미군은 궤멸되었고 그 지도자들은 모두 자결하거나 잡혀서 주살되었다.이 유수가 다시 한(漢)을 계승하여 광무제(光武帝)라 하였고 사가들은 그 나라를 후한이라고 한다. 광무제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즉시 동이족을 박해하기 시작했다.그는 경지와 호적의 재조사를 명령하고 반역자 다섯명이 그 동료 한명을 죽이면 동료를 죽인 다섯명은 모두 무죄가 되게 하는 제도를 반포하여 동이족 내부에 분열을 획책했다.그는 또 반역의 기미가 보이는 고관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처형했다.대사도 구양흡의 가문은 8대에 걸친 박사의 가문이고 오랫동안 상서(尙書)를 연구하고 가르쳐온 집안이었다.광무제는 그가 여남군 태수였을 때 경지 측량을 잘못 보고하여 부당 이득을 착복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그를 위해 탄원하는 제자가 1천명이나 되었고 대신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들까지 있었으나 광무제는 그를 옥사하게 했다.이런 공포 정치 속에서 동이족의 일부는 마침내 동방으로 귀환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그들 중 하나가 AD 42년 동료들과 함께 가락국 김해에 상륙한 소호의 직계 자손 수로(首露)라는 사람이었다. /김 성 일(작가·한세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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