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사학 특강] (2)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
[2001.01.19 10:22] | ||
누가 ‘우리 것’을 말살했는가 ‘우리 것’을 찾는 일에 나서기 전에 우선 짚어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어떻게 해서 없어졌으며 누가 그것을 없앴느냐 하는 것을 따져 두는 일이다.필자는 학생 시절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많은 나라들이 그 나라의 자랑스러운 고대사를 가지고 있는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송두리째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그 이전에도 역사를 기록하여 남겨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삼국유사는 고조선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고기’(古記)를 인용하였는데 이는 민간 사서들이 말하는 신지유기 또는 배달유기 같은 고조선의 역사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또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 유기(留記)가 있고 백제에도 서기(書記)라는 사서가 있었다고 되어 있으며 신라의 진흥왕은 대아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들 사서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도대체 누가 이 방대한 사서들을 다 없애버렸을까.필자도 처음에는 다른 학자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대사를 없애버린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소행으로 추측했다.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러워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그들이 공격해 왔을 때 역사서를 가져갔거나 다 태워서 없애버린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고대의 사관들도 그것이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여러 사본을 만들어 분산 보관했을 것이다.그러나 우리의 고대사를 없앤 자들은 그것을 철저하게도 다 뒤져내어 깡그리 말살해 버렸다.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의 서고에 남겨진 사본은 하나도 없다.만일 우리 고대사를 없앤 자들이 외국인들이었다면 그들이 우리 국내에 분산 보관되어 있는 사서들을 그토록 철저하게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누가 그들에게 모든 사본이 숨겨져 있는 곳을 다 가르쳐 주었을까.그런 생각을 하다가 필자는 삼국사기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세히 읽어 보았다. “진흥왕 6년(BC 545) 7월에 이찬 이사부는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라는 것은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잘하고 못한 일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온데 사기를 수찬해 놓지 아니하오면 후대에 무엇으로서 사실을 볼 수 있겠습니까,하니 왕은 그렇다 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들을 모아 국사를 수찬하였다” 여기서 이찬 이사부라는 사람은 당시에 병부령 즉 군부의 수장이었다.그리고 왕이 국사 수찬의 책임을 맡긴 거칠부 역시 이사부 수하의 무장이었던 것이다.왜 국사 편찬의 일을 군부의 수장이 건의했으며 또 무장인 거칠부가 그것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일까.선대의 법흥왕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그가 죽은 후 조카인 진흥왕이 7세에 즉위했는데 진흥왕 6년이라면 그가 13세 되던 해였다.당시 왕의 나이가 적어 모후 즉 법흥왕의 딸인 식도부인이 섭정을 했다고 되어 있다.이것은 당시의 상황에 뭔가 수상한 기미가 있었음을 시사해준다.즉 신라 군부세력의 수장인 병부령 이사부는 13세의 진흥왕을 대신하여 섭정하고 있던 왕태후에게 압력을 가해 국사를 고쳐쓰게 하고 그 일을 자기 부하인 거칠부에게 수행하게 했다는 혐의가 보이는 것이다. 그들 군부세력은 왜 사관들이 담당하는 국사에 손을 대려고 했을까.BC 545년이면 신라가 금관 가야를 쳐서 멸망시킨지 13년째 되는 해이다.신라의 제5대 파사왕 때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가야의 수로왕을 매우 존경하여 그를 모셔다가 국정의 자문을 받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신라가 그 가야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이유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이 있다.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당시 신라를 괴롭히던 고구려에 대한 비난보다도 가야에 대한 적대적인 표현이 자주 나온다.신라의 군부는 가야에 대한 배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사에 손질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라의 체제와 문화를 그대로 물려받았던 고려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는 신라의 ‘국사’를 근간으로 해서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 기록을 잘 읽어보면 신라와 가야에 관계된 부분에 대한 가필과 조작은 누구라도 무장들의 거친 솜씨를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치졸하다.필자는 본고에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상세히 거론할 계획이다.필자는 신라의 군부가 가야 문제 외에도 고구려나 백제와 왜국 등 다른 인접국과의 관계도 그들이 계획하는 일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미리 여러 군데를 날조했을 것으로 본다.그리고 신라 조정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자기네 ‘국사’와 다른 ‘고구려유기’와 ‘백제서기’의 상당 부분을 삭제하거나 없애버렸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 삼국사기를 기록한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평장사(平章事) 즉 토벌사령관이었다.당시 묘청은 고조선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칭제건원’을 하자고 주장했던 민족주의자였다.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은 묘청의 난을 평정한 지 10년 후였으니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김부식은 아예 그 이념적 화근을 뽑아버리려고 삼국사기에서 고대사를 없애버렸던 것이다.그러나 몽골의 침략을 받아 50년 이상 지배를 당하고 있던 시대에 삼국유사를 집필한 김견명은 피폐해가는 민족 정신을 아쉬워하며 그 앞부분에 고대사의 일부를 언급해 놓았다.어쨌든 필자가 추리해본 결과로는 우리의 고대사를 없애버린 장본인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그들 자신이 했기때문에 그토록 철저하게 모든 사본을 찾아내어 모조리 없애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그러니 우리가 지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같이 흩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네 응득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연고라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서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렘 13:24-26) /김성일<작가·한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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