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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8장 10-22절, 로마서 8장 33-39절, 요한복음 17장 11-19절

은바리라이프 2008. 1. 21. 20:00
세기 28장 10-22절, 로마서 8장 33-39절, 요한복음 17장 11-19절
(2007년 5월 20일) 문동수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둘은 쌍둥이인데, 에서는 형이고 야곱은 동생이었습니다. 두 형제는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둘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이 둘이 싸우는 통에 임신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는 하나님께 뱃 속에서 아이들이 싸우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야웨 하나님께서는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드디어 출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생 야곱은 형의 뒷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두 형제의 뱃속에서의 싸움은 앞으로 있을 일에 비하면 전주곡에 불과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에서가 허기가 져서 들에서 돌아와 보니,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만 먹자고 제안합니다. 그냥 줄만도 한데, 야곱은 팥죽을 줄테니 장자권을 팔라고 합니다. 에서는 너무 배가 고파서 그까짓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냐며 팥죽을 먹기 위해 장자권을 팝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 이삭이 많이 늙었습니다. 이삭은 언제 죽을지 몰라 죽기 전에 장손에게 축복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불러 복을 빌어 줄테니 사냥을 해서 맛있는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명하십니다. 에서는 축복을 받기 위해 사냥을 하러 산으로 갔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이야기를 엄마가 듣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큰 아들보다도 작은 아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염소를 잡고 별미를 만들어서 야곱에게 주고 야곱은 형을 대신해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서 형은 무척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피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야곱이 형을 피해 피신을 하면서 베델이라는 곳에서 노숙을 하면서 꿈을 꾼 이야기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축복’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서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고, 에서는 축복을 차 버렸기 때문에 바보같은 사람이라는 해석을 해 왔습니다. 이런 해석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도덕과 윤리를 헌신짝 내버리듯이 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야곱은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 형제애까지 팔아가면서 하나님의 복을 가로채어 버렸습니다. 이런 해석으로 인해 정통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를 위해서라면 어떤 피해라고 감수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해석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천륜과 인륜을 저버리는 사람에게 복을 주는 분이 과연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천륜과 인륜을 저버리는 사람에게 복을 주지 않습니다. 천륜과 인륜을 저버리는 사람에게 복을 준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일 것입니다. 둘째, ‘그렇게 해서 받은 복이 과연 복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고 받은 복이, 복이 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저주에 가까울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이런 해석이 한국기독교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해석에 대해 진보적인 사람들은 심증만 있을 뿐 어떤 대꾸도 하고 있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성서는 수많은 상징 언어들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역사적으로 해석을 할 때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성서는 절대로 역사적인 사실들을 나열해 놓은 역사책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아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역사적으로 사실도 아니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이야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권력자와 착취를 당하는 사람,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 부자와 가난한자, 장애가 없는 사람과 장애인, 백인과 흑인, 남자와 여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성서는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했느냐!’ ‘안 했느냐!’도 여기에서는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냥 차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가 출발점입니다. 

야곱의 장자권 쟁탈전은 가난한 자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 힘없는 자는 인간답게 살 권리도 없다는 것에 대한 저항입니다. 힘이 없어서, 그래서 형의 뒷꿈치를 잡고 나왔던 야곱은 복을 받을 권리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야곱은 그런 사회에 대해 혁명을 꾀한 사람입니다. 27장 42절에 에서는 야곱을 죽여 없애 버릴 것이라고 다짐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복을 빌어 준다는 것이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힘 있는 자만, 부자만, 백인만, 남자만 대접을 받는 사회에서 그 힘을 빼앗아 버리는 혁명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야곱이 복을 받게 된 이유는 이삭이 복을 빌어 주어서가 아닙니다. 이삭이 빌어 주는 복은 기껏해야 물질적인 것에 불과하고, 권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이 아닙니다. 독이 될 수도 있는 복입니다. 야곱이 받았던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편중되어 있는 권력과 부에 저항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받았던 복은 이삭이 빌어 주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이삭과 에서가 독점하고 있는 복에 대해 저항함으로 받을 수 있는 복이었습니다. 

야곱의 혁명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나라 혁명이라는 것이 늘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늘 실패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혁명이 실패로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돌베게를 베고 자는 야곱의 모습은 실패자의 전형입니다. 그러나 돌베게를 베고 자는 그가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최대의 소망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들을 합니다. 부흥회도 가보고, 기도원에도 가보고, 명상도 해보고, 관상 기도도 해봅니다. 야곱처럼 꿈을 꾸려고도 하고, 모세처럼 산으로 가보기도 하고, 엘리야처럼 동굴에도 가 봅니다. 정말 노력으로만 보면 가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난 곳이 성스러운 곳이지, 성스러운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델이 하나님의 집인 것은 하나님을 거기서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이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현을 제한하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하나님나라 혁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혁명, 혁명 하니까, 총 들고 칼 들고 싸우는 것만 연상하시면 하나님나라 혁명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혁명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에 대한 모든 저항입니다. 철없는 시어머니와 남편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권위적인 시아버지에 대한 저항, 잘못되어 있는 사회적 부조리과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까지 모두 하나님나라 혁명입니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나라 혁명은 자기 자신의 혁명입니다.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혁명을 하는 사람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아니 꿈을 꾸는 것이 하나님나라 혁명입니다. 꿈을 꾸는 것과 하나님나라 혁명을 하는 것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동의어입니다. 구분할 수는 있지만 나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나라 혁명을 했고, 꿈을 꾸었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꿈은 몽상이 아닙니다. 몽상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하나님나라 혁명이 몽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로또 당첨되는 것이 더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 세상에 펼치는 것이 몽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절때로 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실이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의 완성 그것은 몽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꿈입니다. 

또, 꿈은 욕망이 아닙니다. 욕망은 에서가 꾸는 꿈입니다. 대대로 이어져 오는 권력과 부를 자신이 소유하고 싶은, 그래서 절대로 남에게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그것이 욕망입니다. 현대 세계에서는 꿈과 욕망을 더 구분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욕망인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꿈은 세상에 관계된 것입니다. 세상을 땅에만 연결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욕망입니다. 세상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세상이 악한 것은 하늘의 영역이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이 세상을 위해서였습니다. 이 세상 속에 없어진 하늘의 영역을 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꿈은 이 세상 속에 하늘의 영역을 심는 것입니다. 욕망은 이 세상 속에서 땅의 영역만 추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욕망은 이 세상을 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지켜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떠난 구원의 꿈을 꾸는 것은 욕망입니다. 꿈이 아닙니다. 야곱의 소원을 보십시오. 야곱은 아버지의 집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어디입니까? 이삭이 있고, 에서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가 있는 곳입니다. 동시에 권력의 암투가 있는 곳,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 부자만이 잘 사는 곳, 장애인은 설 자리가 없는 곳, 여자는 언제나 착취의 대상이 되는 곳, 바로 그곳이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싶다는 야곱의 소원은 절대로 욕망이 아닙니다. 몽상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이루어진, 이루어질 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우리는 부자가 되는 꿈을 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박사가 되는 꿈을 꿀 수도 있습니다. 사업가가 되는 꿈을 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집을 사는 꿈을 꿀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꿈들을 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꿈들이 몽상이나 욕망에 그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원대한 꿈을 꾸는 우리들은 하나님나라 혁명 안에 있어야 합니다. 부자가 되고, 사업가가 되고, 박사가 되고, 집을 사는 것 등등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나라입니다.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평화와 평등, 자유와 진리를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도 꿈이 있습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름떼 같이 모이는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사랑하는 공동체를 키워나가려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여러 개의 교회를 개척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생태 공동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꿈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작은 운동들을 통해서 한국기독교를 정화해 보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꿈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매일같이 이 꿈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원대하고 좋은 꿈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몽상이거나 욕망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길거리에서 노숙을 할 수도 있습니다. 돌베게를 베고 잘 때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 외롭고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들이라도 우리의 행복을 뺏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꿈과 우리 공동체의 꿈은 결코 좌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고, 또 지금도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승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축복가운데 거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있는 우리는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이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문턱에 진입했습니다. 이 복이 우리들에게 영원히 거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문동수 (dongsu-mo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