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건국 초기에 <프레리 하이싱>이란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지역의 화란에서 신대륙으로 이민을 와 뉴저지 지역에서 목회를 하다 한가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왜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은 고향을 떠나 이곳 미국에 왔는가?" 그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하다가 <세계선교>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우리는 세계선교에 더욱 헌신해야 한다"고 가는 곳마다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속한 교단 회의에서 그를 목사직에서 사임시켰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으나 무식하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새벽 의 닭 울음소리처럼 <세계선교>를 한번 짧게 외치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길버트 테런트>라는 뉴저지 지역에서 큰 목회를 하던 목사가 <프레리 하이싱> 의 짧은 외침을 들은 후 세계선교의 비전을 품고 '오두막 성서학교(Cabin Bible College)' 를 개설했습니다. 그러나 그 학교로는 목사안수를 주기가 어려워 프린스턴 신학교 외 여러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선풍적인 기독교 부흥운 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여파로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모임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도와 같이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수많은 젊은이들 중에 뉴욕대학을 졸업한 <언더우드>와 드루신학교를 졸업한 <아펜젤러>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일찍이 한국선교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다 <언더우드>는 25세, <아펜젤러>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이 두 젊은 선교사는 1884년 부활절 아침 인천에 상륙하면서 이렇게 약속을 했었습니다. "우리는 장로교의 예수도 전하지 말고, 감리교의 예수도 전하지 말며, 다만 그리스도 예수 한 분만을 전합시다." 두 젊은이가 그리스도 예수 한 분만을 전하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을 때 한국민들은 어 두움 속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도처에 우상이 가득하여 많은 한국민들은 뒷산에 가서는 서낭제를, 길에서는 길산제를, 개천에서는 유황제를, 대문에서는 문간제를, 뒷마당에서는 당산 제를, 부엌에서는 조앙제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이 뜨 거운 심장을 가진 선교사들에 의해 전달되었을 때 한국민들은 드디어 오천 년의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한국 교회는 엄청난 부흥을 이루게 되었고 어떤 선교사의 지적대로 '현대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라마'를 연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상당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에 그런 힘을 주셨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세계선교>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름 모를 무수한 선교사로부터 선교의 빚을 진 한국 교회는 이제는 선교의 빚을 갚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주님의 보좌를 붙잡으며 <성장의 시대>를 달려온 한국 교회! 이제는 한 손으로는 주님의 보좌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고통의 골짜기를 붙잡음으로 <성숙의 시대>를 열어 가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관심은 아들의 관심도 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관심이 <영혼구원>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관심도 <영혼구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 멀리 아프리카, 남태평양, 시베리아 지역의 버려진 영혼이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데 나하고 무슨 상관이있나"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었습니까? 특별한 상관이 없어도 무작정 사랑해 준 것이 아닙니까? 이제 한국 교회는 버려진 영혼을 찾아 나서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양떼를 광야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수많은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진정한 목자는 결코 잃어본 적이 없는 것들을 소유하는 것보다 잃어버 린 것을 발견하는 데서 더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 어머니들, 진정한 목자들, 그리고 모든 성숙한 인격자들은 그 감정을 잘 이해하며 매일 매일 그 감정 에 의해 살고 있습니다. 그처럼 한국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러 오라는 '오라' 구조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가는 '가라'구조의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한세기 동안 '오라'구조의 교회정책을 통해서 한국 교회는 거대화되고 실력자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대형화를 보면서 우리는 일부 과학자들이 말하는 공룡이 사라지던 날을 생각하게 됩니다. 공룡은 필요 이상으로 자꾸만 덩치가 커져 마침내는 자기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고, 중앙의 두뇌 조직이 저 멀고 먼 발가락 끝의 신경조직을 조절할 수 없었고 쓸 데 없이 몇 아름드리의 통나무처럼 커진 꼬리의 뼈와 살과 조직을 살리기 위해 자꾸자꾸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덩치를 먹여 살릴만큼 먹이도 충분치 않았고 그 식물을 받아들여서 소화시켜서 영양분으로 말단까지 공급하는 데도 힘이 들었습니다. 공룡은 이렇게 너무 쓸모 없이 커져서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우리 한국 교회는 양적인 팽창을 위주로 하여 생동력을 상실하기보다 선교의 열정을 팽창시켜 새로운 활력을 교회에 지속적으로 공급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이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팔복'에 관한 설교를 대하고 그의 시 '모래 물거품'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대는 축복의 팔복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만약 그대가 그 꼭대기에 다다르게 된다면 그대는 한가지 소망만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 산을 내려가 가장 깊은 골짜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소망,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 산을 축복의 산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실로 한국 교회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지금까지 놀라운 외적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축복은 받은 축복을 골짜기의 버려진 사람들과 나누고자 할 때 다가옵니다. 우리의 축복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축복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구제와 세계 선교의 비전을 더욱 드높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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