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복음서

예수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3(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은바리라이프 2007. 12. 8. 21:29
예수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3(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2. 공생애 초기의 예수님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는데(마2:23, 마21:11, 막1:9,  눅2:39) 갈릴리 지역은 헤롯의 아들 중에 비교적 덜 잔인한 헤롯 안디바스의 행정구역이었다. 나사렛은 므깃도 평원의 북단에 위치한 산간에 위치한 촌으로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 사람에게 평판이 좇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도 므깃도의 주민들은 경건한 유대인 사이에서 평판이 아주 좋지 못했다(요1:46).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마13:55) 목수로서의 삶을 사셨다(막6:3). 당시 목수나 목공업은 고정된 점포를 열고 오가는 손님들이 찾아와 전시된 제품이나 기물을 선택하여 사는 직종이 아니라, 마을이나 인가를 찾아 유동적으로 봉사하여 보수를 받는 일종의 유랑기공이었기에 경제적으로 신분적으로  좋은 직업은 아니었다고 한다.

   성경을 볼 때 목수로서의 삶을 살던 예수님은 삼십 세쯤이 되어 가르치심을 시작하셨다(눅3:23). 가르치심을 시작하시기 전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단강으로 가시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막1:9).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곳은 유대 광야의 동편경계를 이루는 요단강인데 이 지역은 유대적 전통으로 볼 때 엘리야의 승천의 자리로 여겨진다(마3:13-17, 왕하2:5-14).

1)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
   세례요한은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예언된 자로서 죄 사하는 세례를 베풀어 백성들로 하여금 죄 없는 신부로 만들어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신부를 취하게 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성경은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첫 만남을 예수님의 세례시로 기록하고 있지만 아마도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만남은 그 이전일 수 있다.

    마태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실 때 세례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하고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심으로 요한이 허락하여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마3:13-15).

   마태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면 세례요한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이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알았고 이전에 친분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이제 허락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전에도 세례를 받으러 찾아왔었지만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행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이전에 예수님을 성령잉태한 마리아가 세례요한을 잉태한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태중에서 뛰놀았던 사건만 보더라도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세례받기 이전에도 안면이 있었거나 왕래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처음부터 알았을까?


   마태는 세례요한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고 고백하므로 처음부터 예수님이 오실 분이었음을 알지 못하였으나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 깨달아 증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보고 깨달은 세례요한은 처음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하는데 사역의 후반부에 옥에 갇혀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라고 묻는 형편이 된다. 친족이었으며, 왕래와 교분이 있었던(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던 세례요한은 마리아의 문안소리를 듣고 기쁨으로 뛰놀았다. 눅1:44) 세례요한의 인식은 자신의 임무를 잊었을 때 바뀌고 만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인식이 바뀌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세례사건에서의 고백이 그 생애의 끝까지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을 믿기로 한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든 주위 환경으로 인해 퇴색되어 가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경계의 목적으로 또한 거울로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우리들은 아마도 세례요한을 욕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끝까지 믿지 못하고 돌아섰느냐고....
   하지만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심을 고백하며 살고 있지만 과연 2000여년 전으로 돌아가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본체이심을 고백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다시오신다고 약속하셨다.
   또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던 갈릴리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전해준다. 이를 근거로 혹자는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시고 다시 오시리라고 말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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