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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은바리라이프 2007. 11. 30. 15:32

방언

dldks1013 2007.11.18 23:46

답변 11| 조회 424

방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가요??

제가 방언을 하는 것은 아니구요...

 

다른분이 저를 기도해주실때 방언이 나오고 그에대한 뜻풀이가 나오는데

 

그것이 그 기도하시는 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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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방언

scs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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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9 00:18

사실 방언에 관해서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나오는 방언과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일을 살펴보면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일—하나님으로부터인가?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증명되는 영의 침례가 오늘날의 참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오순절 교회 교역자인 ‘마빈 A. 힉스’의 주장입니다.

 

“방언을 말한다는 기본 교리는 비성경적이며 그릇된 것이다”라고 ‘달라스’ 제일 침례 교회 ‘W. A. 크리스웰’ 박사는 반박합니다. 그는 이렇게 부언합니다.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면 나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다.”

 

방언에 대한 이러한 찬반의 논쟁을 보고 아마 당신은 이렇게 궁금히 여길 것입니다. ‘성경은 방언의 선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일부입니까?’ 그 대답을 얻는 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방언의 선물이 주어진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방언의 선물이 주어진 이유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2:2-4에서 방언의 선물을 포함한 기적의 선물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구‘유대’인 숭배 제도로부터 새로 설립된 그리스도인 회중에게로 옮겨졌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제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옮겨졌다는 사실은 제 1세기 후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일부 사도들이 아직 생존해 있는 동안 온전히 확립되었습니다.

 

그 방언의 선물이 또 다른 목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기원 33년 승천하시기 직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 1:8)

 

제자들의 이 작은 집단에는 지상 모든 곳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약속이 참되게도, 약 열흘 후, 오순절 축제의 날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인 약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그 결과는? 그들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임명받은 증거 사업을 즉시 수행하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사도 2:1-4.

 

그 제자들이 오순절 축제 때에 ‘예루살렘’에서 증거하자, 이를 들은 먼 지방에서 온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사도 2:8-11)

 

여기에 언급된 방언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아니라, 잘 알려진 언어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선물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즉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영을 주실 것이라는 목적과 일치하게 사용되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는 사실로 볼 때 그 목적을 명백히 이루었습니다.—사도 2:41.

성령이 부어질 때에 방언의 선물이 수반되었다는 또 다른 사례는 사도행전 10:44-46에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 기록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영이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에게 임하자, 그들도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였음에 유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목격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하면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그러므로 ‘베드로’에 따르면, 그 때 주어진 방언의 선물은 몇년전 오순절날 받았던 것과 동일한 선물, 즉 외국어를 말하는 기적의 능력이었습니다.

 

성서는 ‘고넬료’와 그의 가족에게 주어진 방언의 선물이 ‘베드로’와 그와 동행한 사람들로 이제 하나님께서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회중으로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확신케 하였음을 알려줍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회중을 사용하고 계셨습니다.—사도 11:15-18.

 

‘그러나 고린도 전서 14:2의 ‘바울’의 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고 어떤 사람은 질문합니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먼저, ‘바울’은 여기에서 개인적인 기도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중 집회에서의 방언의 사용을 논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 14:23 참조) 더우기 ‘바울’의 말은 방언의 선물이 주어진 목적과 그 선물이 주어진 데 대한 사도행전의 묘사와 온전히 일치합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전체를 읽어 보면,
(1) 관련된 방언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언어였으며,
(2) 그 선물은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2절 전체를 읽어 보도록 합시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방언”으로 번역된 희랍어 ‘글로사’는 사도행전 2:4, 11에 사용된 단어와 동일합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알려진 언어에 적용된 것이 분명합니다. “듣는”으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말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고 듣는 것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13, 16 및 17절을 살펴볼 때 이 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러한 말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또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 22-25 참조)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간단히 말하여,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사람에게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외국어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참석한 아무도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고 통역도 없다면, 방언을 말하는 그 사람은 그 언어를 통역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여 다른 사람들을,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을 세워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통역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성서가 말한 바와 같이, 잠잠히 있는 것이 더 잘하는 것입니다.—고린도 전 14:28.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사람 안에 ‘성령의 임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방언과 같은 선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방언의 선물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일부인가?

 

성서는 제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기적의 선물들이 사실상 단지 일시적인 성질의 것이었음을 알려 줍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리라.]” (고린도 전 13:8)

 

성서는 그 선물이 언제 그칠 것인가에 관하여 알려 줍니까? 그렇습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성령이 부어짐으로 방언의 선물이 수반된, 보고된 사례들을 직접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사도행전 2:1-4, 14; 10:44-48; 19:6을 읽어 보십시오.

 

모든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한 사람 또는 그 이상 함께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8:18(새번역)에 따르면, “사도들이 손을 얹어 성령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사망과 더불어, 방언의 선물을 포함한 영의 선물들이 끝났다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방언의 선물은 그 목적을 달성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회중이 하나님의 은혜와 후원을 받고 있음을 온전히 확립해 주었습니다.

 

그 이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수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좋은 소식”을 가지고 많은 나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골로새 1:23 비교.

 

‘그러나 그 선물들이 그쳤다면, 오늘날의 명백한 현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하고 어떤 사람은 질문할지 모릅니다.

 

“우리도 비슷한 현증이 신비적인 또는 악귀의 영향력 아래 발생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고 ‘파운틴 트러스트’와 영국 복음 교회 협의회의 공동 성명은 시인했습니다.

 

오늘날 방언의 선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명백히, 이것을 시인하는 것은 그 선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5,000,000명의 미국 성인들 가운데, 33‘퍼센트’는 마귀가 인격체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조차 믿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현증들이 무슨 근원에서 오는 것인지를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의 열매로”

 

예수께서는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심으로 참 그리스도인들을 식별할 수 있는 열쇠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마태 7:17)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는 열매 즉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의 그리스도교」(Christianity Today), 1980년 2월 22일호에 발표된 「오늘의 그리스도교」 ‘갤럽’ 조사를 근거로 그러한 성경적 증거들을 살펴보면 밝혀집니다.

 

성경 기록에는 한번도 죄를 승인하거나 습관적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기적의 선물을 준 일이 없습니다. 제 1세기의 그리스도인 ‘고린도’ 회중에 이전에 부도덕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변화하였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성적으로 부도덕한 생활에 탐닉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전 6:9-11)

 

그러나 그 조사에 의하면,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의 19‘퍼센트’가 혼전 성관계를 승인합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셨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다. (요한 17:17)

 

그러나 그 조사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 중 44‘퍼센트’가 가장 중요한 종교적인 전거(典據)로 성서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서 모든 나라의 백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예수께서는 명하셨습니다. (마태 28:19,20) 그분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좋은 소식”이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마태 24:14)

 

참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을 행하는 데 활동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조사에 따르면, 현재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 중 51‘퍼센트’가 최소 일주일에 한 번도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58‘퍼센트’는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도록 돕는 일을 앞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추종자들에 관하여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사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7:16, 새번역)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도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정치 참여에 있어서, 일반 대중의 본을 밀접히 따른다”고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보고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3:35) 사도 요한은 이렇게 부언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느니라.]” (요한 1서 3:11, 12)

 

참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은 인종적, 민족적 또는 사회적인 편견으로 인해 분열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전시에도, 다른 나라에 있는 동료 신자들을 죽이는 일을 거절합니다. 일반 대중이 이렇게 합니까? 방언의 선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합니까?

 

그렇다면, 증거는 무엇을 알려 주는 것입니까? 집단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참 그리스도인들을 식별케 하는 “열매들”을 맺지 못하므로, 방언의 선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그 선물을 받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성경에는 다른 근원에 기인해 있음을 알리는 강력한 경고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 7:22, 23)

 

방언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감정이 격앙된 가운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를 마구 쏟아 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종교적 위선자들이 그러한 “권능”에 예수의 이름을 붙일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물리치셨다.

 

사도 ‘바울’은 ‘능한 일들’과 ‘거짓 표적들’이 “‘사단’의 역사”를 따라 발생할 때가 올 것을 경고하였다.—데살로니가 후 2:9, 10.

 

그러면, 방언의 기적의 선물을 소유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참 추종자들을 식별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식별할 수 있는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열매들”, 즉 성경적 증거들로써 입니다.

 

성서를 좀 더 조사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성서의 참 진리를 이해하고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협착한 길로 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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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방언

greatl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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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9 00:36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2~23


성경은 "방언"을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실제적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마 28:19)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명령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나 또는 두가지 정도의 언어밖에 모르는 제자들이 전 세계?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겠는가? 비록 제자들이 총명한 사람들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들 대부분은 교육받지 못한 문맹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가 필요되었다. 이것이 바로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언어를 말하게 하는 초인간적이고 신비스러운 언어의 은사인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7. 이 성경절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 또는 "언어"는 하나의 "표적"으로서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고도 그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전에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언어로 유창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에는 방언을 말한 예가 3번 나온다 (사도행전 2, 10, 19). 이 성경절의 예를 잘 살펴보면 방언의 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1~4


"불"은 능력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방언의 은사를 불의 임함처럼 보여주심으로써, 애굽의 바로 왕 앞에 나아갈 때에 모세가 받았던 그 능력에 (출 4:10~12) 상당하는 능력과, 이사야의 혀에 닿았던 하늘에서 온 숯처럼(사 6:6,7), 그들의 연약한 혀에 하늘의 능력이 내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왜 하나님께서는 방언의 은사를 내리기 위해서 오순절까지 기다리셔야만 하셨을까? 사도행전 2장 5~11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리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의 명절로서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이다. 이 날은 로마 제국의 곳곳에 퍼져있는 모든 진실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택하셔서 방언의 은사를 제자들에게 내리심으로써, 그 곳을 방문중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이 성경 말씀에 따르면 적어도 15개 이상의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에게 내려진 방언의 은사로 인하여, 타지에서 살다가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개심의 경험을 하게 되었고, 오순절을 보낸 후 그들은 제자들이 전한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이 말씀은, 방언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하여 내리는 은사임을 확실하게 증거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 날에 있었던 기적이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 이 은사는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었고, 다른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였다. 이것은 언어의 은사였지, 들음의 은사가 아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 "하늘의 언어"로서 오직 하나님과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11절).


두 번째 예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에게 전도한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44~46. 사도행전 10장 1절에 보면 고넬료는 이태리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역사에 의하면 로마의 시종들은 여러 나라에서부터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언어 장벽이 있었음이 확실하며, 베드로는 아마 통역관을 세워서 통역을 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이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에게 내려졌다. 그 결과, 그 곳에 있던 유대인들과 베드로는 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유대인들이 그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하나님을 높임"의 음성을 들었다고 적고 있다(행 10:46). 후에 베드로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오순절날)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행 11:15) 하였다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통하여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오순절날 받았던 동일한 방언의 은사를 받았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전에 전혀 알지 못하던 다른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방언에 관한 마지막 예로는 바울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전도한 일이다. 사도행전 19:6절에 말하기를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사도였으며, 가장 많이 선교 여행을 하였던 사람이다(고전 14:18). 성령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임하였을 때에 바울은 그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로마 제국에서 쓰이고 있는 언어를 말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야 전도하는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이 성경말씀들을 통하여 방언의 은사는 여러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그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내려진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4장에는 2장에 나오는 오순절과 유사한 장면이 나타나 있지만, 방언의 은사는 내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모였던 장소가 흔들렸으며 사람들은 성령으로 감동되어졌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없었기 때문에, 방언의 은사는 내려지지 않았다. 사도행전 4:31절에 말씀하시기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하늘로부터 성령의 침례가 내려지는 이유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전도하기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고 하신 것이다.

 

위조품을 조심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한번도 방언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침례 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이었으나 그가 방언을 말하였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신약의 27개 책들 중에서 오직 3권만이 방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은 약 39명의 저자로 쓰여졌으나 오직 누가, 바울, 마가만이 방언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곳에 우리의 중요성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감정에만 의지한다면 우리는 진품과 위조품을 구별하지 못하고 헛된 방언을 구하다가 믿음을 잃어버릴 것이다.


진정한 방언의 은사는 복음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강력한 능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언제나 위조품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Glossolalia"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오순절파 교회들에서 방언의 경험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American Heritage 사전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복잡하고 의미 없는 말, 특별히 무아경 또는 정신질환적 증상과 관련된 현상"


이와 반대로 "언어"라는 단어는 "인간이 사용하는 목소리, 주로 성문화된 글씨로 나타내는 소리,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구성된 패턴" 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성경은 방언을 언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Glossolalia"라는 분열된 소리는 "언어"가 아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많이 보아왔다. 전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목사와 그의 아내가 "방언의 팀"을 이루고 있었다. 매주 설교 시간만 되면 목사의 부인은 벌떡 일어서서 그의 손을 하늘로 쳐들고 황홀경에 빠진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부인은 언제나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여 내었다. "한다 칼라 샤미, 한다 칼라 샤미....". 이러한 현상은 나에게 의심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매번 그 부인이 이러한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마다 그의 남편인 목사는 설교를 중지하고 영어로 통역을 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사실은, 그 부인은 계속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남편인 목사가 통역하는 내용은 매번 달라지는 것이었다. 때로는 통역이 부인의 이상한 소리보다 3배 이상 길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기별이 있으면, 왜 처음부터 전체 교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주지 않으실까?' 하고 의아해 하였다.

 

사단이 그리스도인에게 기적을 주는 이유



성경에 계시된 가장 분명한 마지막 시대의 징조 중의 하나는, 모든 영혼들의 운명을 종결지을 최후의 전쟁을 위해서, 사단의 세력이 가시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세상 전체를 자기 진영으로 끌여 들이는 기만적인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 내려갔"다고 기록했다(계 12:12). 지구 역사 전체를 통하여 준비해온 이 마지막 전쟁을 위해서, 사단은 정치적 세력과 종교적 힘을 모두 이용할 것이다. 머리가 비상한 사단은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세워왔다. 그의 최종적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늘에 가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이 계속해서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짓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이 최후의 기만을 위한 그의 전략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모든 교파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며, 둘째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살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행하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감정적 확신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단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던 전통적 견해를 무너뜨리고, 그에 걸맞는 다른 권위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사단은 모든 교파 간에 존재하는 어떠한 종류의 견해 차이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웠는데, 그러한 전략을 통하여 사단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유도하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주님께서 주신 이 경고의 의미를 잘 생각하여 보자. 이 성경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으며 심지어 예언하고 병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엄청난 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런 영적 은사들을 행사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에게 이러한 초자연적 능력을 주어서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하였을까? 그러한 능력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과 사단 이외에는 없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들이 불법의 창시자 사단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예언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기만적인 기적들이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외부적으로 그것들은 정말 참된 은사와 유사하게 보일 것이며, 신앙적 열성이 충만한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요한복음 16:13)라고 하셨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든 진리 또는 모든 것"은 죄를 지적하시는 성령의 사업부터 시작된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어떤 사람도 자신이 율법을 범한 일에 대한 성령의 책망을 받고 십자가로 인하여 용서와 성화의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진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없다. 거짓말, 도둑질, 간음.... 등을 행하면서도 성령 충만함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참람된 요구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1,32. 사도 누가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원칙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행 5:32.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이 성경절들을 통하여 우리는 왜 기적을 행하였던 자들을 예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배척해 버리셨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늘의 능력을 요구하였지만, 하늘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율법을 거절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고, 사단의 속임을 당한 것이었다.


성령의 은사를 구하기 전에,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자신의 성품과 생애 속에 충만하게 맺히고 있는가 생각하여 보자. 성령의 열매들이 충만하게 맺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부인하거나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내려질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사람도 성령의 침례를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을 수 없겠는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그것을 받아서 이기적으로, 무례하게 사용할만큼 변화되지 않은 자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방언이 신앙적인 만족감을 주기 위하여 내려진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사람이 한국 청중들에게 설교하는데, 방언을 사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들에게 설교하는데 통역을 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방언을 하는 사람 자신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듣는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묘한 상황이 성경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는가?


그대는 하나님의 기적을 간구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대는 예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진리와 계명을 사랑하고 순종하는가? 그대 자신의 신앙적인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그대는 자신의 경험을 부인할 만큼 성경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방언은 현대 기독교회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한 은사이다. 만약 그대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느낀다면, 그 은사를 주장하기 전에 기도와 성경연구를 통하여 그 은사의 진실성을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가 있는 것처럼, 거짓 방언과 참 방언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의 진실성은 성경으로 판단되어져야 할 것이다.

 

방언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방언을 성령 받은 표시로 간주하고 있다. 때로는 거짓 방언이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 방언이란 물론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고, 초대교회 시대에 복음 전파를 위한 필수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사요 능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변질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후에는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어 사도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하여 고린도교회에 권면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오늘날 그 방언이 꼭 필요한 것인가? 오늘날의 방언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며 누구나 다 그 방언을 해야 하는가?


1.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방언은 알지 못하는 소리가 아니라 어떤 외국어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이 언어이며 뜻이 있는 단어로 이루어진 인간의 말을 의미한다. 구약에 방언이라고 언급된 것들은 다 어떤 민족의 언어나 외국어들을 의미했다(창 10:5,20,31; 느 13:24; 단1:4).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제자들이 말한 방언도 다 외국어 방언이었다.


2.  방언의 목적은 무엇인가?

【답】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복음전파를 위해서이다. 즉 언어 문제로 복음전파가 방해를 받을 경우 그 장애를 해결하여 누구나 자기가 익숙한 언어로 복음을 듣도록 도와주는 것이 방언을 주신 목적이다.


3.  그렇다면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답】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이 맨 처음 받은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울이 성령의 은사 중 제일 마지막에 두거나 때로는 생략하기도 했던(롬 12:6~8; 엡 4:7~11) 그러한 방언이었다. 그것은 방언의 은사가 그 당시 그 환경에서 가장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소한 15지역 이상에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향말로 위대한 복음을 듣고 놀라 소리쳤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8)”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을 지내기 위하여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행 2:5)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 시기는 예수의 메시아이심과 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새로운 구원의 도리를 전 세계에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이 있었다. 유대 땅을 떠난 지 오래되고 타향에서 태어난 유대인들(행 2:8)과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언의 이질성은 복음 선포에 큰 장애가 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사도들의 부족을 보충하셨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일생 동안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었던 일을 한 순간에 해 주셨다. 사도들은 저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의 방언을 정확하게 말함으로 이제 해외에 복음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었다. 성령의 충만하심을 힘입어 “하나님의 큰 일(행2:11)”이 그들의 모국어로 강력하게 전파되었다. 그것은 잠시 동안이나마 언어에 있어서 바벨탑 이전의 시대를 회복한 분위기를 맛보게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이었다. 방언의 은사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수한 사정 아래서 주신 특이한 은사였다.


4.   방언의 은사가 사도들이 입에 임했는가, 아니면 청중의 귀에 임했는가?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각각 다른 나라말로 설교를 했는가, 아니면 사도들은 이스라엘 말로 설교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말로 들었는가?

【답】 제자들이 이스라엘 말로 설교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말로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행 2:6)” 들었다고 했으며 제자들이 갈릴리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된 것에 대해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이 갈릴리 사람임을 강조해서 그들이 각각 다른 방언을 말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이 제자들을 “새 술이 취하였다(행 2:13)”고 조롱한 것을 보아서 방언의 주체가 청중이 아니라 제자들임을 알 수 있다.


   베드로 한 사람이 이스라엘 방언으로 설교하면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들의 방언으로 알아듣도록 그들의 귀에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 편리할 텐데 왜 제자들이 각각 다른 말을 하도록 하셨을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주체를 확실히 구분하여,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쪽은 청중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다. 성령의 역사가 누구에게 임했는가를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셨다. 그래서 제자들 자신들이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은사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간접 체험으로가 아니라 직접 체험을 한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인 제자들이 배운 일이 없는 15가지 이상의 방언으로 설교하자 다 놀라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이 확실해졌다. 그러므로 그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다.

 

5.  오순절의 성령 충만이 있을 때 바로 방언 형상이 나타났기 때문에 방언은 성령 충만의 외적증거가 아닌가?

【답】 성경에 보면 성령 충만이 있었으나 방언 현상이 없었던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행4:8; 6:5; 7:55; 9:17; 13:9; 13:52). 오순절에 3천명이 믿었으나 방언을 했다는 말은 없다. 5천명의 회심에도 그런 언급이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바울은 기독교 교리의 정수를 말하면서 로마서에 단 한 번도 방언데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보다 후대에 쓰여진 로마서(12:6~8)와 에베소서(4:11,12)에 기록된 여러 가지 은사 중에는 방언의 은사가 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기도를 가장 만이 드리신 예수께서 방언으로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6.  그렇다면 고넬료 집에서는 왜 방언 현상이 나타났는가? 다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이었으니 헬라어 통역만 있으면 되지 않았겠는가?

【답】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주셨다고 믿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똑같은 성령 충만을 이방인에게도 주셨기 때문이다. 만일 고넬료 집에서 방언 현상이 없었다면 베드로 일행은 그것을 오순절과 똑같은 성령 충만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한 베드로의 보고에서도 명백해진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내리신 성령 충만의 현상이 처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와 똑같은 것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행11:15~17).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 교회의 어떤 제자들 (아마도 이방인)이 방언을 한 것도 똑같은 설명이 적용된다.


7.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답】 오순절의 방언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바울의 책망을 받았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오순절의 방언과 같은 성질의 어떤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당시 희랍 신들의 제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황홀 상태에서의 지절거림이었는가 하는 것을 명확히 규명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바울 자신도 거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바울은 한결같이 방언에 대하여 ‘글로싸’란 헬라어를 써서 일단은 구분하는 것을 피했다.


   고린도가 국제 무역도시였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외국어를 연결하여 방언이라고 자랑했는지도 모른다. 또 이교신 제사에 익숙했던 이방인 개종자들이 황홀경에서 나오는 지절거림을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와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하면서 영적인 능력을 과시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방언도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이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에 방언에 대하여 권면한 내용을 보면,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그것이 외국어이든 열광적인 ‘지껄임’이든지 간에 성령의 은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방언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에 예비하리요.....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7,9,19)”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일부 방언 현상을 찬성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방언이든지 간에 그 결과가 걱정스럽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이 성령 충만의 결과가 아님이 확실하므로 바울은 찬성할 수 없었다. 고리도전서 14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바울은 사실상 고린도교회의 일부 방언을 금하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잘라 말했다.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 그것은 그들이 방언은 성령 충만의 결과도 아니며 쓸데없으니 하지 말라는 책망의 완곡한 표현이다.


8.  그렇다면 바울은 왜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했는가?

【답】 그렇다면 왜 바울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5,14,39)” 같은 애매모호한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고린도교회들에 대한 바울의 부모 같은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1년 반이나 머물렀던 사랑하는 교회였다. 에베소에서 3년간 머물면서 바울은 고리도교회의 어지러운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과 슬픔에 잠겨 “많은 눈물로(고후 2:4)” 고린도전서를 기록해 보냈다.

  

   바울은, 그렇지 않아도 분파가 많은 고린도교회에서 자기가 보낸 편지 때문에 연약하고 일시적인 실수를 저질렀던 형제들이 매도되고 정죄될까 두려워했다.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후 2:7)” 하는 것이 바울의 심정이었다. 그는 심지어 편지 보낸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고후 7:8). 그러므로 바울은 엄한 말로 방언을 금지하고 꾸짖고 싶었지만 그의 이런 사랑과 염려 때문에, 또 직접 보지도 않은 방언 같은 미묘한 현상에 대해 직접적인 질책을 하는 것을 피하고 완곡한 표현을 쓴 다음, 그가 직접 가서 그가 들은 말마다 사실 여부를 “확정”하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고후13:1). 바울은 그래서 내가 갈 때까지는 “금하지 말라(고전 14:39)”는 아주 소극적이고 걱정스러운 한 마디를 덧붙인 것이다.


9.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보면 방언은 하나님께서 하는 것이며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장려해야 할 것이 아닌가?

【답】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위의 성경절을 근거로 방언은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에 방언으로 말해야 하나님께서 더 잘 들어주신다고 주장한다. 과연 방언은 하늘의 언어인가? 그렇다면 왜 사람마다 방언이 다른가?


   ①  먼저 고린도전서 14장의 배경부터 살펴보자.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을 왜 기록했는가? 방언을 장려하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방언을 하지 말 것을 권하기 위해서였는가? 분명히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방언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방언의 남발을 염려하고 책망하고 있다. 방언은 다른 사람이 그 뜻을 모르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14장에서 바울은 말한다(고전 14:6~11). 그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요 서로 야만이 되는 것이다(고전 14:11). 만일 온 교회가 모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미쳤다고 할 것이다(고전14:23). 그러므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고 바울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은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성령께서 주시는 참된 방언의 은사를 모독하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지절거리는 방언에 대한 언급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해석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


   ②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의 전반부는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예언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쉽게 말하면 14:2~4에서 방언은 “하나님께 한다”느니 “알아듣는 자가 없다”느니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느니 “자기의 덕을 세운다”느니 하는 말들은 다 방언을 장려하는 말씀이 아니라 예언의 탁월성에 비하여 방언은 큰 유익이 없다는 내용을 부정적으로 하신 말씀이다. 14장 3절의 “그러나”가 그것을 증거한다. “그러나”는 그 위에 나오는 문장이 앞 문장보다 더 긍적적일 경우에는, 그 전 것보다 후의 것이 더 옳다는 것을 나타내는 접속사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4:1~4을 그 원래의 뜻을 풀어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내가 지금부터 예언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말해주겠다. 너희 교회에서 지금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방언이란 원래 사람들, 그 중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쓰는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덕만 세우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냐? 그리고 그것은 성령께서 주신 방언의 원래 목적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예언은 사람에게 알아듣게 말하기 때문에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자기의 덕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③  고린도전서 14:14에는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방언은 영혼의 기도인가? 그렇다면 한국말로 하는 기도보다 방언 기도가 더 응답이 잘되는 영적인 기도인가? 여기의 “영”도 참된 “영적인 기도”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즉 인간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기도라는 뜻이다. 그런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열매가 없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일 리가 없다.


10.  그렇다면 현재 일부교회에서 하고 있는 지절거리는 방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답】 하나님께서는 현대 교회들이 성령의 침례를 받은 증거로 강조하는 방언을 과연 필요로 하시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즐기기 위하여 꼭 방언을 할 줄 알아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비정상적인 방언 현상이 과연 성령 충만의 증거일까?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많은 성경 학도들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지절거리는 방언은 거의 모든 종교에 공통된 원시적인 일반 현상으로서 언어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전혀 언어적 특징이 없는 생명 없는 소리요 허공에다 외치는 공허한 자기 소리일 뿐이다. 모든 은사 중에서 특히 방언의 은사가 가장 모방하기 쉬운 것이었다. 발성기관은 하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방언 현상은 희랍신의 축제나 강신술, 몰몬교, 힌두교, 그리고 이슬람교도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분명한 것이었다. 헛소리로 표현된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뜻있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런 비정상적인 지절거리는 방언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고 분명히 믿을 수 있다. 방언으로 해야만 하나님께서 인상 깊게 들으시며 기도의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큰 오해이며 불신이다. 오늘날의 소위 방언은 통역을 세워도 어지러운 언어의 분열이요 무질서의 표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정상적인 소음 속에 계시지 않는다.


11.  그렇다면 지금은 방언이 필요 없는가?

【답】 지금은 방언이 전혀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여 성령의 은사를 제한시킬 필요는 없다. 오순절과 같은 방언 현상은 특수한 사정과 환경에서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현대의 방언은 삽시간에 전 세계에 퍼져 나가는 신문, 잡지 등 출판물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식간에 온 세상에 전달하는 인터넷이나 라디오나 텔레비전, 수백 개의 언어로 변역된 성경일는지도 모른다. 방언은 모든 영적 은사 중 제일 작은 것이었다. 그것은 영구적인 것도 아니었고 한번 획득하면 계속되는 소유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온 천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확신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수한 환경에서 주어진 특이한 은사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구원의 증거도 아니며 높은 영성의 표현도 아니고 성령 침례의 객관적 표적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교회에서 방언을 해야만 영적으로 축복 받은 것처럼 인식시키고 있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며, 분리와 모방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값싼 표적에만 매달리는 미숙하고 위험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할 염려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12.  방언으로 기도해야 속이 시원하고 오래 기도할 수 있다. 그러니 어쨌든 좋은 것 아닌가?

【답】 하나님께서는 방언 듣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방언이 필요 없으시다. 분명한 한국말을 두고 이상한 ‘지껄임’을 해야 비로소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마도 샤머니즘의 하나님일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신 분이시다. 방언을 가지고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방언에 대한 건전한 인식이 필요하다. 방언이 왜 필요한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위하여 방언의 은사를 주셨는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해야 하는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방언문제로 인한 혼잡을 경험하고 있다.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하면 마치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한 것처럼 간주하기도 하고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방언을 억지로 만들어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가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일이 개인이나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사도 바울이 권면한 다음의 말씀을 주의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www.sostv.net

출처 : www.sos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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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방언

killerq6434

답변채택률 25.5%

2007.11.19 00:51

방언은 성령께서 하나님께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중보를 해주시는 기도입니다.

 

그 뜻은 방언통역과 통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방언은 대화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령께서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시고 또 방언을 통해서 응답을 주실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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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방언

ulsanap

답변채택률 16.9%

2007.11.19 06:20

방언보다 일상적인 기도를 배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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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방언

kksculb2

답변채택률 45.4%

2007.11.19 08:39

 

그것은 모르는 일입니다..^^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고 축복입니다...

 

방언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만....

그분들은 자기가 방언을 하지만..무슨뜻인지는 모릅니다..^^

 

또 어떤분은 방언을 통역하시는 분도 있구요....

 

방언은 자기가 기도하는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함께 기도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게 하는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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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방언

not2bf

답변채택률 13.1%

2007.11.19 10:33

성령을 받았음을 흉내내기 가장 좋은 징표로 방언을 한다고 합니다.

자신도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웅얼거립니다.

이걸 개구리방언[혀가 꼬이면서 하는 기도]이라고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소리를 들으면 미쳤다하지 않겠느냐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3일만에 저 성전을 다시 짓겠다' 라고 말씀하실때 제자들은 38년동안 지어온 성전을

어찌 3일만에 다시 짓겠느냐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나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몸이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하신 말씀에 38년동안 지었던 건물성전이 아닌 자신의 심령성전임을 그때서야 깨달았지요.

이렇듯 예수께서 말씀하실때 하늘나라의 말로 말씀하실때 제자들처럼

땅의 말로 알아듣는 것을 예수님이 방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구리방언도 득이 되는 것이

내안에 나라는 존재이외 다른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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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방언

mhmik

답변채택률 16.3%

2007.11.19 12:21

방언은

 

천성이 교활한 우리 인간들의 본성을 표출하는 현상이랍니다

 

기도를

 

허구헌날 주야장창 하다 보면

 

 기도 제목도 매일 비슷비슷하고 기도하는 말들도 거의 똑 같으니까

 

본인도 맥이 빠지고

 

남들 보기에도 조금 챙피 하잖아요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주절거린 다음에

 

나중에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본인 마음 내키는대로 해석을 해버리는 것이지요

 

 

타종교에도 방언은 다 있습니다

 

특히 방언은 무당을 믿는 종교인들한테서 가장 많이 나타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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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방언

ewsn115566

답변채택률 21.8%

2007.11.19 12:44

길게 말할 것 없이

 

방언 ===> 100% <구라>, <뻥>입니다.

 

아직도 그런 어수룩한 사기술을 구사하는 이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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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방언

pil1269

답변채택률 30.9%

2007.11.19 17:39

     방언의  글,  옮겨놓은  글들이  많네요,,,

사실을  확인하새요,,,

  방언  통역은  하는  사람 마음입니다,,,

통역하시는 곳이  어디예요,    

아직도  가짜에   속아요    ,,,

 

    하나님의  방언은  끝났고요,..

마지막때에  다시  초대교회의  오순절  방언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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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방언

surak1708

답변채택률 0%

2007.11.24 18:48

보통 사투리라고 불리나 이 단어는 다소 규범적인 면에서 보아 비하된 개념이므로 언어학 용어로 쓰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비하여 언어학적인 방언이란 한 언어가 분지적()으로 발달하여 몇몇 개의 지역적으로 다른 언어체계로 분화되었을 때 그 체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영어와 독일어도 더 큰 게르만조어()에서 분지하였으므로 방언이라고 불릴 수 있으며, 한국어에서 분지된 경상도말과 전라도말도 방언이라고 불릴 수 있다. 따라서 언어와 방언은 본질적으로 구별이 없다. 그러나 방언을 언어와 대립된 개념으로 쓰려면, 각각의 방언 사용자들이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때의 언어를 방언이라고 한정시키는 수도 있으나 객관적인 정의는 되지 못한다.

방언이 생기는 까닭은 우선 지역적으로 격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의 화자()와 한 사람의 청자() 간에도 지역적인 차이가 있다. 지역의 차이가 적을수록 방언의 차이가 적으나 이 지역의 차이라는 것이 반드시 지리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정치적 ·문화적인 면도 고려된다.

따라서 지역이 갈라지는 것은 언어 사용자의 이동 등을 통하여 산 ·강 등의 자연장애, 도로 ·해로()가 없어지거나 정치적 ·행정적 구역, 통학구역 ·시장권 ·혼인권, 종파적 구획, 지역사회의 폐쇄성 또는 고립성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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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1

re: 방언

0thwjd0

답변채택률 0%

2007.11.26 19:17

저두 방언을 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시는게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게 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