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 |
2006/12/27, 조회 : 1,620, 추천 : 0 |
사진: 유향(왼쪽)과 유황
여러 해 전 필자가 사역하던 한인교회에서 성탄절에 벌어진 해프닝 한 토막.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촌극 도중 긴 망토 등을 걸쳐 입은 동방박사 역의 세 개구장이들이 나와 아기예수 앞에 엄숙하게 경배하는데 그들의 헌정사가 이랬다.
"저는 헌금을 바칩니다!" "저는 유황을 바칩니다!" "저는 물약을 바칩니다!"
한 녀석씩 소리치며 경배할 때마다 온 회중의 폭소가 터진 건 물론이다. 왜들 웃는지 정작 본인들은 영문을 모른 채였다. 확인해본 적은 없으나 당초 지도교사들이 일부러 웃기려고 그렇게 가르친 건 분명 아니었을 터. 다만 연습 때 왜 발음교정이 안됐는지가 의문이다. 아이들이 교사들에게 잘못 들었던지 서투른 한글 발음 때문이든지 아니면 양쪽 다 였는지 모른다.
더 놀라운 사실은 현재 한인 목회자들도 이런 유의 실수를 한다는 것. 예컨대 최근 최소한 두 명의 뉴욕 한인 목회자 설교 테입에서 박사들의 세 가지 예물 중 황금 다음 유향을 '유황'이라고 또렷이(?) 발음하고 있었다. 태연자약하게 말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한 술 더 떠 아예 [유향=유황]으로 굳게 믿는다. 그래서 몸엔 좋지만 코엔 썩은 계란 냄새가 난다는 유황온천 얘기까지 꺼내곤 한다. 그러면서 박사들이 "가장 귀한 예물"을 담은 보배합을 열어 아기 예수께 바쳤다고 거듭거듭 강조하는데 그래 과연 박사들이 썩은 달걀냄새 나는 노란 유황돌을 '가장 귀한 것'이라고 아기왕께 감히 바쳤겠는가? 유황돌이 그렇게도 귀했는가.
도대체 유향인가, 유황인가? 이것은 상식 문제요 더 나아가 국어/독해력/과학(생물학,화학)/수사학/성경신학에도 얽힌 문제다. 그냥 웃어 넘길 수도 있는 단순한 실수 같지만, 목회자/설교자 자질 문제로까지 연결될 수 있을 만큼 심각함도 엿보인다.
뭘 그런 걸 갖고 이렇게까지 꼭 비화시켜야겠냐고? [그 분들의 인격을 폄하하겠다는 건 아니다. 단지 실례를 드는 것이다.] 만약 필자가 독자의 교회에서 목회자 청빙 테스트 설교 도중 그런 실수를 했다면 즉시로 낙방할 수도 있는 문제다! 청빙위원 장로님들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 "저,저,저런! 저 분, 신학공부나 제대로 하셨을까?"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애교스런 실수로만 봐 주면 다행이지만. 그러고도 [유향=유황]의 화학등식은 수십, 수 백 교인들을 오도하면서 일파만파로 계속 보급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부주의, 비정확성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가볍게만 봐 넘길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여기 제기되는, 국어학 내지 수사학적 이슈는 뭘까? 발음이 비슷하고 글자 모양이 비슷하여 혼동될 수 있는, 매우 비슷한 또 다른 한자어가 더 있을 수도 있음을 괘념치 않거나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거나 결과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소치다. 또 들은 대로 배운 대로 옮기는 관습 탓이랄 수도 있다. 남들이 '유황'이라고 하니까 그대로 받아들여 여과도 확인과정도 없이 귓속에 머리 속 잠재의식 속에 들여박혀 깊숙이 자리잡힌 것이다. 조금만 틈을 내어 두 눈 똑바로 뜨고 눈의 초점을 맞춰 마태복음 2장 등 성경본문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두 가지가 서로 다르다는 진리가 쉽게 발견된다.
그런데도 거의 무의식 중에 성경본문보다는 들은 것, 배운 것, 건성으로 익힌 것들을 더 의존하는 것이다. 그런 걸 일종의 설화신앙, 전설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그 설교자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성령께서 계시처럼 눈을 번쩍 밝혀주시길 빈다. 필자의 이 글을 읽는다면 더 빠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실은 바로 이것이 필자가 관련 글 한 편을 쓰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한인교회 주일학교 학생들도 설령 '헌금/유황/물약'으로 발음하는 예는 있을지 몰라도 영어로는 gold/frankincense/myrrh를 쉽게 나열한다. gold/sulphur/myrrh라고 하는 어린이는 없다. 설교자 상식이 주일학교 학생/교사만 못하다면 어떻게 되나? 웃음거리 밖에 더 되겠는가..알고나면 얼굴이 뜨뜻해지거나 자칫 소름끼칠 노릇인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런 유의 실수를 전혀 할 가능성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한인 설교자 전체의 위상을 위해서라도 이런 상식 차원의 실수는 함께 피하도록 힘써야겠다.
박사들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유황을 소돔/고모라에 가서 가져왔을 리도 없고, 아기예수의 몸에 좋다고 '유황'을 보여드리면서 유황오리나 유황온천의 장점을 홍보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유향과 유황을 결코 혼동하지 말 일이다. 제발 유향을 유황으로, 반대로 유황을 유향으로 착각하지 말자. 노파심적 발언이지만, 그런 설교자가 아직도 흔하기에 하는 소리다.
설교자들이여. 망신 당하지 않으려면 이 기회에 좀 철저히 확인해 두자. 유향(乳香/frankincense)은 식물성이고 유황(硫黃/sulphur/brimstone)은 엄연히 광물질이다. 둘 다 냄새가 나긴 나는데 전자는 향긋한 냄새를, 후자는 좀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전자는 귀한 약재/향품의 일종이고 후자는 소돔과 고모라 위를 소금 치듯 초 치듯 양념(?)했던 저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둘다 냄새가 난다는 것 외에도 공교롭게 유향과 유황은 둘다 몸에 좋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혼동을 자아내며 실제로 그 때문에 혼동하는 설교자가 있다!] 그런데 전자는 고대로부터 몸에 유익하다고 소문이 나 있으나 후자는 고대에 훈증 표백용으로 쓰다가 나중엔 의약과 흑색 화약으로 널리 쓰였다. 유향 못지 않게 유황도 인간 내부 체질에 좋다는 것은 화학이 발달한 근대에 와서 더 많이 밝혀져왔다.
그래도 혼동이 되는가? 그렇다면 "유향은 향내가 나고, 유황은 고린내가 난다"고 기억하면 쉽지 않을까. 또 성경에서 유향은 거의 다 좋은 경우에, 유황은 모두 나쁜 경우에 언급됐다. 어찌 보면 상반되는 개념인 것이다. 고대의 소돔과 고모라에 가까운 사해바다는 롯의 아내로 유명한 소금은 물론, 유황이 풍부하다. 또 악의 세력의 종착지인 불못도 유황이 타는 곳이다(계21:8).
유황은 분자기호 'S', 분자번호 '16'으로 표시되는 광물질로 고체 상태에서는 레몬 같은 연노랑빛 결정체이고 녹으면 피 같이 붉은 액체로 변하고, 태우면 파란 불꽃을 낸다. 살아있는 세포 안에도 함유돼 있는 생명에 필수적인 요소이면서도 다량이 살충제에 쓰일 만큼 독성이 강하다.
반면, 유향(olibanum, frankincense)은 사전에 따르면, 감람과에 속하는 작은 관목인 유향나무(Boswellia thurifera로 추정)에 상처를 내어 흐르는 우유빛 수액을 송진처럼 건조시킨 것이다. 의약적 기능이 탁월하다. 약성은 온화하고 독이 없으며 맵고 쓰다. 주성분은 수지(樹脂). 독성이 있는 유황과는 천지차인 것이다. 유향은 불에 사르면 달콤하고도 매콤한 향내가 난다. 유황의 계란 썩는 냄새와는 하늘땅 차이다! 고대 이스라엘 근역의 지방 길레아드는 유향으로 유명했다(창 37:25, 렘8:22,46:11). 유향은 당대의 중요한 의약 중의 하나였다. 아울러 성소와 성전에서 쓰이는 소중하고 진귀한 향품으로 쓰였다. 왕께 바칠 만큼 고귀한 향재였다. 생각해 보라. 성소/성전에서 썩은 달걀 냄새나는 유황을 태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유향=유황] 등식파 설교자들은 이 기회에 그 혼동을 영원히 종식시킬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내년 성탄절에는 유향을 '유황'으로 발음하거나 [유향=유황]의 황당한 화학등식을 설파하거나 유황온천을 언급하는 한인 설교자가 한 명도 없길 학수고대하면서..
이 기회에..그밖에도 성탄절과 연관된 전통과 성경 본문과의 차이점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예수님의 진짜 탄일은 겨울도 아니고 12월25일도 아니었다. 12월설의 유래는 4세기 고대 교회가 로마 당대의 모든 이교도 명절을 총집대성/종합한 덕분이다. 무리하게 모든 이교 관습을 한꺼번에 수용하고 잠재우려다 보니.. 벤저민 브리튼의 명작 '캐럴의 제전'(A Ceremony of Carols) 등 수많은 캐럴들이 매섭게 추운 겨울추위를 배경으로 했다. 하지만 겨울철엔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떼를 거느릴 수가 없다. 겨울밤엔 추워서 목자들이 밖에서 양떼를 지킬 수가 없다. 양떼와 목자가 함께 얼어죽는다! 이스라엘 왕들이 여름궁과 겨울궁을 짓고 겨울궁 안에서도 화롯불을 지펴놓고 있었다는 사실로 실감할 수 있다(아모스3:15, 예레미아 36:22). 추운 한겨울에 갓난아기를 차디찬 구유 안에 누일 엄마는 없을 것이다.
루카복음 3:23에 따르면, 주님이 침례(세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공사역에 갓 투신할 무렵이 30세쯤(30회 생일쯤!)이었으므로 주님의 생일은 추운 겨울이기보다 오히려 강물에 드나들기 좋은 여름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주님이 추운 겨울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셨다면 정말 견디시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성탄일은 겨울이었을 리가 없고 여름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도 왜 신학적/역사적 탐문 없이 굳이 '겨울'로 고집하는 걸까? 순전히 고대 이교도들을 우격다짐으로 교회 안에 끌어들이려다보니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인 영향이다.
예수님이 나신 곳은 마굿간(stable)이 아니다! 마굿간은 단지 '구유'란 말 때문에 폭넓게 유포된 착각이요 혼동이다. 마굿간은 당대의 왕궁 부근에서만 왕의 통신(파발마)용, 병거/군마용으로 쓰였을 뿐이다. 마굿간이 있다면 그곳은 군 요새가 있기 쉬웠다. 모든 고고학자들은 아기예수가 태어나신 곳이 마굿간이었을 가능성을 부인한다. 또 주님 나신 곳은 '말구유'도 아니다. 오직 구유일 뿐. 그 구유가 양의 밥통인지 나귀 밥통인지 소 밥통인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양떼의 밥통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예수님이 태어난 그 밤은 우리가 상상하는 "고요한" 밤이기 보다 시끄러운 밤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로마제국 모든 식민지에 흩어져있던 유대인 가족들이 저마다 센서스를 위해 고향으로 몰려들었기에 마을여관이 만원사례였으니 그들이 포도주를 나누며 밤새 나누는 얘기가 시끄럽지 않았을까? 주님은 시끌벅적한 세상, 누추한 곳에 호젓이 나셨다.
동방박사들은 '세'(3) 사람이 아니었다. 세 가지 예물을 드렸기에 그렇게 추정할 뿐 성경엔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다. 또 박사들은 전설과는 달리 '왕'들이었는지 아닌지 모른다. 단순히 점성가란 설도 있다. 카톨릭 전설과는 달리 박사들의 이름도 알 길이 없다. 캐럴 '동방박사 세 사람'은 가사 첫 줄부터가 틀린 것이다. 수많은 캐럴들이 성경본문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던 카톨릭, 영국 성공회 등에서 왔다.
박사들이 경배한 분은 아기야 아기지만 구유 위에 누인 갓난아기가 아닌, 집에서 엄마 마리아 곁에 놀던 최소한 2살 정도의 어린이 예수였다. 헤로드 왕이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을 학살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처음에 한 명이었다. 두 날개를 펼치고 공중에 뜬 채로가 아니라, 목자들 바로 곁, 즉 땅 위에 서서 소식을 전했다(루카2:8~9). 그 형상은 번개빛 같은 주의 영광이 둘려있었다(마28:3). 목자들이 크게 놀랐을 것이다.
소식을 전하는 천사는 일반적으로 날개가 없다. 날개 있는 천사라곤 3쌍을 가진 세라핌(스랍천사들), 2쌍을 가진 최고의 천사 케루빔(그룹천사들) 밖엔 없다. 성탄소식을 전한 천사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특성상 가브리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성경엔 그런 기록은 없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하고 찬양한 천군도 그 천사와 "함께 있었다"고 했다. 따라서 이들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며 찬양한 게 아니라 땅 위에서 찬양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루카2:15). 그러니 목자들의 놀라움이 어땠겠는가?
탄생 주변에서 행해진 찬양은 전부 음악이나 노래가 아니었다. 혹 음악이 곁들여졌는지는 모르나 성경엔 그런 기록이 없다. 천군천사의 찬양도 단지 '찬송'일 뿐 음악연주나 노래를 했다고 하지를 않는다. 마리아의 찬양(루카1:46~55), 자카리아의 예언(1:68~79), 시메온의 찬양(2:28~32)도 그랬다.
성경에서 생일축하를 한 때라고는 파라오(창40:20)와 욥의 아들들(욥1:4), 헤로드 아켈라오가 자축(마14:6)한 기록 밖에 없다. 사뭇 이교적이다. 이 이교적 관습이 교묘하게 기독교에 유입돼 해마다 꼭 '아기 예수'의 탄일을 축하하고들 있다. 생일을 축하하더라도 성인이 되어감을 축하하는 것이지 매년 아기 때를 축하하는가? 왜 성인 예수의 생일은 축하하지 않고 유독 아기예수의 탄일만을 축하하는가? 여기 카톨릭의 은근한 어젠다가 있는 것이다. 중세 '성화'들을 보면 알지만 카톨릭은 고래로, 예수가 주로 마리아에게는 아기이기를 바라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런 모습은 묘하게도 아이귑트(에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중국 등의 [여신+아기남신] 신화들과 상통한다.
우리가 매년 성탄절에 부르는 캐럴 가사 다수는 비성경적이다. 대강절/대림절/강림절 찬송가 104장은 구약적이다. 이미 오신 예수를 왜 "오시리라"고만 부르는가? 이미 오신 메시아를 왜 기다리는가? 그래서 유대적/구약적이라는 것이다. '대강절' 개념 자체가 구약적이다. 재림을 기다리는 내용이 아닌 이상. 106장의 '추운 겨울밤' 역시 성경본문과 거리가 멀다. 카톨릭 사제 요제프 모르가 쓴 109장 1절 가사는 성탄 씬에서 요셉은 빠져있다. 마리아를 중시하는 카톨릭적 어젠다의 결과다. 그날 밤은 [영어/독일어 가사처럼]모든 것이 고요하거나 모든 것이 환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끄럽고 캄캄한 땅에 주님은 오셨다. 3절은 성탄 당일에 별이 빛나고 박사들이 온 것처럼 돼있다. 110장 1절도 비슷한 착각을 일으킨다. 112장은 당일밤 천사가 모두 '비파'로 반주를 하며 노래한 것으로 돼있다. 성경본문은 그렇지 않다. 2절처럼 뭇 천사가 '날개'를 펴고 오지 않았다. 케루빔/세라핌 아닌 일반천사는 날개가 없다. 113/114장 2절은 '육축 소리'라 했는데 성경본문엔 '구유'가 언급됐을 뿐이다. 순하신 아기예수라 "우시지 않네"라 했는데 울면 순하지 않은 아기인가? [그러고 보면 110장 1절 가사 '아기 우는 소리'와 좀 모순되지 않은가?] "꼴 위에" 주무신다고 했는데 성경엔 강보에 싸여 뉘였다고만 기록했을 뿐이다. 116,123장은 카톨릭 전승에 따라 박사를 '3명'(116장은 '왕들')으로 단정짓는다. 119장은 탄생장소로 '마굿간'을 전제하고 있다. 3절에 의하면, 영어/한글 공히, 모친께만 순종하신 것으로 돼있다. '부모'여야 하지 않을까? 카톨릭적 어젠다다. 122장: '참 신'과 참 사람이 되시려 동정녀의 몸에 나셨는가? 123장: "양 틈에 자던 목자들"이 아니라 깨어 지키던 목자들이었다(루카2:8)! 잠들면 어떻게 양을 지킬 수 있는가? 2절 영어가사는 동방의 별이 밤낮으로 계속 비췄다고 썼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124장 가사는 '말구유'로 단정한다. 성경엔 '구유'일 뿐이다. 125장은 천사들의 '지극히 높은 곳에서..' '노래'가 하늘에서 들린 것으로 돼있다.
크리스마스 캐럴들의 이같은 비성경적 요소는 성경본문에 어둡던 카톨릭, 카톨릭을 모방한 영국성공회 등의 전통 탓이다. 그밖에도 교회문화 속에 깊이 침투해있는 온갖 성탄절 전통들은 비록 율법적으로 금지할 대상이 아니더라도 성경과는 분리돼야 옳다. 일례로, 크리스마스추리/산타/양말/겨우사리/포인세타/색등 등이 그렇다.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주는지는 몰라도 성경 속 성탄과는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 분위기까지 "거룩히" 여기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갈수록 혼탁해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교회는 세속과 달리, 성경엔 언급이 없는 성탄절 둘레의 '거품'을 걷어내야 더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의 글을 읽고 속 좁은 생각이라고 독자는 평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독자는 성경 있는 대로를 중시하는가, 카톨릭에서 대물림한 전통을 더 중시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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