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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극(樂劇) 자료실

은바리라이프 2007. 11. 26. 17:57
악극(樂劇) 자료실

2007/11/25 17:09

http://blog.naver.com/kwank99/30024658336

 악극(樂劇.Musikdrama)

   경음악이 주가 되고 무용이 곁들여지는 연극양식. 바그너에 의하여 창시된 오페라 양식이다. 독일의 오페라는 바그너에 의하여 새로운 형태를 얻게 되었는데, 그 새로운 형식을 일반 오페라와 구별할 때 이렇게 부른다. 바그너는 종래의 오페라 형식에 반대하여 ‘전체예술작품’을 제창하고, 오페라는 단순히 음악ㆍ연극ㆍ조형예술 등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드라마를 실현하는 데 있어 다른 모든 예술이 이를 거들어주어야 하며 그것이 참된 예술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대본의 가치가 존중되고 극적 내용이 강한 것, 고도의 사상성을 가진 것이 선택되었다. 또 종래의 아리아 편중의 번호오페라의 방법을 버리고 음악 전체가 단락감을 피해 무한히 계속되는 무한선율양식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라이트모티프(示導動機)가 쓰이는 것이 특징이며 이것은 음악적 동기를 단어와 같이 일정한 의미를 갖게 한 것으로, 이로 인하여 음악이 항상 극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진행된다.

  이 밖에 가곡풍의 멜로디나 레치타티보는 배제되고 대사의 억양을 음악의 흐름 속에 이입시키는 방법에 의해 음악적 표현능력과 언어를 융합시키려고 하였다. 또 관현악의 표현 범위도 확대되고 편성도 커지는 경향이 있다. 바그너 이후, R.슈트라우스나 H.피츠너의 오페라도 이렇게 불리는 일이 많다.

【연혁】

  일명 가극(歌劇)이라고도 불린다. 서양의 오페라도 가극이라고 불러왔지만 우리의 악(가)극은 오페라와 전혀 다르다. 아마도 미국에 번성한 뮤지컬과 비슷한 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뮤지컬과도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나는 연극형식으로서, 조금 낮추어서 정의한다면 통속적인 경음악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타락한 신파극이 파생시킨 우리 나라의 악극은 1920년대 말엽에 생겨났다. 그런데 악극이 발생한 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무대 메커니즘의 낙후와 흥행을 위한 대중영합의 막간 쇼에서 비롯되었다. 즉, 1920년대만 하더라도 극장시설도 부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대전환이 매우 완만하였으므로 기다리는 관객의 지루함을 없애 주고 분위기를 돋우는 막간쇼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주연 여배우들이 나와서 노래도 부르고 코미디언과 우스갯말도 주고받았다. 나중에는 여가수가 등장하고 막간전문의 코미디언도 나오게 되었다. 연극의 막과 막 사이에 곁들여진 노래라든가 촌극ㆍ재담 등이 악극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악극을 전문으로 하는 [예원좌(藝苑座)]ㆍ[배구자악극단(裵龜子樂劇團)] 같은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둘째, 음반의 발전과도 관계가 있었다. 즉, 1930년대 초에 음반회사가 생기면서 음반의 다량판매를 위해서 인기 있는 무대배우를 가수로 써서 음반을 제작하였고, 나중에는 가수를 무대에 내세워서 인기배우를 만들기도 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음반회사 지원의 악극단이 생겨나기도 한 것이다. 가령, OKㆍ빅타ㆍ콜롬비아 같은 음반회사들이 만든 [OK악극단]ㆍ[콜롬비아악극단]ㆍ[빅타가극단]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셋째, 일본의 다카라쓰카소녀가극(寶塚少女歌劇)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즉, 1930년대를 전후해서 우리 나라 음반회사들은 음반제작을 위하여 가수들을 데리고 일본에 자주 갔고, 거기에서 다카라쓰카소녀가극을 자주 보았다. 또, [다카라쓰카소녀가극단]이 내한공연을 가짐으로써 악극의 싹이 돋을 수가 있었으며, 동시에 그것을 모방한 [배구자악극단] 같은 것이 생겨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번성기】

  악극단의 시초는 1929년 일본에서 다카라쓰카소녀가극을 오랫동안 구경한 권삼천(權三川)이 [삼천가극단]을 조직한 것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무용가 배구자가 일본에서 악극단을 조직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 원산과 함흥에서 [해송가극단(海松歌劇團)]과 [오양가극단(五洋歌劇團)]이 연이어 생겨났다.

  지방의 가극단들은 어떠한 작품을 공연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삼천가극단]과 [배구자악극단]은 가극 또는 가무극으로서 대체로 작자를 알 수 없는 <크로다이크칼멘> <돈과 벙거지> 등과 대표 권삼천이 쓴 <헷소문> <우수한 가극>과 신불출(申不出) 작 <경성행진곡>, 문수일(文秀一) 작 <여배우>, 김영환(金永煥) 작 <부자와 양반>, 작자미상의 <복수의 칼> <파계> <멍텅구리 미인탐방> 등 소극 및 애정물을 무대에 올렸다. 이들에 이어 1938년에 단성사(團成社) 직속으로 [화랑악극단]이 홍토무 작 <고도의 비극>, 신불출 작 <십만불> 등으로 창단되었고, 그것이 곧 해체되면서 악극단 도원경이 창립되었다. 이들의 창립공연작품은 홍개명(洪開明)의 <금색의 꿈> <월야곡>과 이서구(李瑞求)의 희가극 <청춘호텔>, 뮤지컬코미디 <신혼강짜소동> 등이었다.

  이듬해에 [빅타가극단]이 생겨났고, 1940년에는 김용환ㆍ고복수(高福壽) 등에 의해서 [반도악극단]이 발족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인천에 [김희좌악극단]이 생겨서 인천을 본거로 활동하였고, 중앙에 [조선악극단]ㆍ[콜롬비아악극단]ㆍ[황금악극단] 등이 속속 생겨나서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였다.

  역시 악극단이 크게 번성한 것은 1940년대에 들어서였고, 이 시기에는 앞에 열거한 악극단 외에도 [신향악극단(新響樂劇團)]ㆍ[나미라가극단(羅美羅歌劇團)](콜롬비아악극단의 개칭)ㆍ[성보악극대(城寶樂劇隊)]ㆍ[신세계]ㆍ[김길자악극부(金吉子樂劇部)]ㆍ[경성악극단]ㆍ[선일악극단]ㆍ[동아여자악극단]ㆍ[약초가극단(若草歌劇團)]ㆍ[제일악극대]ㆍ[신협악극대(新協樂劇隊)] 등 20여 개에 육박하는 많은 악극단들이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1940년대 초엽이라면 일본군국주의가 모든 예술을 심하게 통제하고 어용화하던 때였다. 바로 그러한 예술의 암흑시대였기 때문에 극히 통속적인 저질악극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악극의 찬란한 융성은 광복 직후로도 이어졌다. 광복 직후의 정치ㆍ사회ㆍ경제 상황도 혼란과 무질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복이 되자 악극단은 우후죽순처럼 더욱 많이 생겨났다. 즉, 기존악극단들과 함께 [백조악극단]ㆍ[태평양악극단]ㆍ[무궁화악극단]ㆍ[새별악극단]ㆍ[대도회악극단]ㆍ[청춘부대악극단]ㆍ[장미악극단]ㆍ[현대악극단]ㆍ[KPK악극단] 등이 새로 탄생되었다. 그야말로 악극의 전성시대였다.

【쇠퇴기】

  악극인들은 가극협의회까지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고, 악극경연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악극에는 상당수의 순수연극인도 참여하였고, 박노홍(朴魯洪)ㆍ김화랑(金火浪)ㆍ김상화(金尙火) 등 전문작가도 등장하게 되었다. 6ㆍ25전쟁 후에도 악극은 여전히 기세를 떨쳤고, [대도회악극단]ㆍ[창공악극단]ㆍ[별]ㆍ[가협(歌協)]ㆍ[프린스악극단]ㆍ[은향악극단] 등이 다시 생겨났다.

  이렇게 번창하던 악극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역시 수복 후부터였고, 박노홍ㆍ김석민(金石民) 등이 임화수(林和秀)의 도움으로 악극재건에 몸부림쳤지만 시대의 추세를 어쩔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악극이 구태를 벗지 못하고 답보하는 상태에서 영화라든가 방송 등 대중문화가 급속히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 악극인들은 미련을 못 버리고 5ㆍ16군사정변 후에는 한국연예협회를 형성하여 그 정신을 존속시킨 가운데, 1966년 악극협의회를 다시 만들어 매년 한번씩 공연을 가지다가 1972년 5월 명보극장에서 박호(朴虎) 주재로 반공악극 <북에는 태양이 없다>의 공연을 끝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대중연극의 한 장르로 존속해 오던 악극이 약 40여년 만에 일단 무대에서 사라지고 현대쇼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악극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1990년대 중반에는 대중연극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만큼 번창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식 뮤지컬의 영향도 있지만 그보다도 복고풍 상업연극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연극계에서는 그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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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악극의 흥망사> -김성우: [한국일보](1993. 12. 20)

   우리 나라에 악극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0년대 말엽이다. 악극은 경음악과 노래와 무용이 곁들여진 연극 양식을 말한다. 초기에는 연극 공연의 막간 쇼로 출연배우들의 노래나 만담 등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이 노래와 춤에 촌극을 곁들인 버라이어티쇼로 발전했다가 차츰 연극 속에 노래를 끼워넣으면서 악극의 형식을 갖추어 갔다. 노래는 기성의 대중가요를 부르거나 신곡을 작곡하거나 했다.

  1930년대에는 인기배우를 가수로 키우고 혹은 가수를 인기배우로 만들기 위해 레코드 회사들이 악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우리 고전의 가극화 움직임이 일어나 <춘향전>, <심청전> 등이 악극으로 상연도 되었다.

  1940년대에는 악극이 인기있는 대중극이 되어 20여 개의 악극단이 활동할 만큼 번성했다. 광복 후에는 더욱 많은 악극단이 생겨 전성기를 이루었고 지금도 올드팬들은 [백조악극단], [무궁화악극단] 등의 이름을 기억한다. 악극은 6ㆍ25동란 후 수복하면서부터 기세가 꺾이다가 영화와 방송 등의 발달과 함께 쇠퇴했다. 1960년대에 악극 협의회가 생겨 명맥을 유지하는 듯하더니, 1970년대부터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서양식 뮤지컬이 우리 악극의 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다. 악극은 흥미 위주의 연극이라는 것이 특성이지만, 그래도 많은 배우와 가수를 배출한 공적을 무시하지 못한다. 김정구, 고복수, 이난영, 장세정, 백설희 등이 모두 악극의 무대에 섰던 가수들이다.

  우리 나라 악극의 탄생은 일본의 소녀가극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소녀가극이란 젊은 여성들만으로 쇼나 오페라 등의 음악극을 공연하는 대중적 연극 양식이다. 남성역도 여성이 맡는다. 그 효시가 [다카라쓰카(寶塚.보총)소녀가극단]이다.

  1912년 다카라쓰카 시에서 창단된 이 가극단은 얼마 후 전속배우 양성을 위한 음악학교가 설립되고 이어 3천석 크기 전용극장이 세워졌다. 1940년에 다카라쓰카 가극단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다카라쓰카 음악학교의 학생이 되는 것은 요즘도 이 극단의 소녀팬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예과 1년, 본과 1년의 2년 과정이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며 기율이 엄하다. 성악, 발레, 일본춤 외에 샤미센(三味線, 거문고, 피아노 등 악기와 연극을 가르친다. 이 학교를 마치고 나야 무대에 세워진다. 이 가극단은 4개조로 나뉘어 전국을 순회한다. 도교에서는 1934년에 이 극단이 세운 도호(東寶)극장이 본거지다.

  일본의 소녀가극단으로는 이밖에 [쇼치쿠(松竹)가극단]이 유명하다. 1922년 설립되었다. 일본에서 아직도 뮤지컬이나 신극보다 소녀가극이 인기가 있는 것은, 독특한 레뷔 형식의 공연과 철저한 스타 중심주의 때문이다. 일본 연예계의 여성 스타들은 대부분 이 소녀가극단 출신들이다. 소녀가극단은 국기(國技)인 스모(씨름)와 쌍벽을 이루는 일본 특유의 것으로 80년 전통을 이어왔다.

  우리 나라의 악극은 이 소녀가극에서 힌트를 따왔다고는 해도 단원 구성이나 공연 내용이 다르다. 서양의 뮤지컬과도 같지 않다. 대사를 그대로 노래로 부르는 것도 아니고 대중가요의 가락은 우리만의 것이다. 악극은 한국 고유의 연극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무형문화재다. 이것이 ‘번지없는 주막’처럼 외면당한 채 40여 년의 전통이 단절된 것은 안타깝다. 대중가요로 만드는 연극이 만인을 동관객화(同觀客化)할 것이다. 이것이 악극이다. 악극 속에는 순정이 있다. 관객은 무대의 순정에 굶주려 있다. 악극을 우리의 뮤지컬로 새롭게 키워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