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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화(Mediatisierung)에 대하여

은바리라이프 2007. 11. 12. 11:03
미디어화(Mediatisierung)에 대하여

 

요한 페터 리슈카(Johann Peter Lischka)

-- 미디어와 재미디어(Medien und Re-Medien), Bern 1988 중에서

 

커뮤니케이션
대중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이란 매력적인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편으로는 커뮤니케이션되지 않을 수는 없다는 확신이 존재하고 있다. 각 내용들은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에서 원래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어떤 상황으로 이끌려갈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스미디어가 보여지는 대부분의 스타일에서처럼, 커뮤니케이션 도구들로 이야기되는 보통의 대화에서도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서 떠나거나 중도에서 그만두거나 혹은 스위치를 꺼 버리기도 한다.
문제는, 그 다음에 대량으로 주어진 것과 개인(Individuum)적 선호(善好)와의 연쇄적인 충돌 현상이다. 즉, 어디까지 개인과 사회로부터 동의되고 허락되는지, 아니면 거부되는지? 이와 함께 우리는 ‘정선된 프로그램’이라는 표류하는 형식들을 알고 있다. 민주주의 앞에서 굽실거림들속에서 만족해 하는 긍정적인 대중마저도 성가시게 할 정도로 그 ‘정선(精選)된’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에 대해서는 2차대전 후 10년간 미디어의 성립과정에서, 요즘에 사람들이 정선된 것이라고 가리키는 확실한 상투성들(clichés)을 확립했다.
대중소통(mass-communication)은 대중을 통해 스스로 커뮤니케이션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대신 그것은 대중들에 의해서 희망된 것인 척하는, 대중을 향한 커뮤니케이션 임이 더욱 분명하다.

비물질들
다음으로는, 우리의 몸에 너무 가까이 오도록 허락해서 이젠 떼어 버리거나 버려두고는 생각할 수도 없게 된 미디어의 '비물질적 성격'이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고유한 권한들을 미디어에서 이식된 것들로 바꾸어 버렸다. 미디어로부터의 거리 두기가 부족한 이 접근성은, 미디어와 거리를 둔다는 것이나 그 친밀한 관계를 등한시 할 수 있다거나, 그래서 하나의 개념을 추출한다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끔 만든다. 몸과 미디어의 합체라는 이 추세는 아주 강해서, 이상적인 경우에 미디어는 몸의 연장이 되고 (인간) 스스로의 실재성이, 비물질적인 미디어적 실재성으로 드러나게 된다.
미디어는 매개이자 중간자를 일컫는 것이지, 모든 것이 미디어로 빠져드는 유혹을 가리키려는 의미(McLuhan처럼)가 아니다. 나는 이러한 맥락 안에서 미디어를, 매스미디어의 집단으로부터 분명히 분리될 수 있는 개별적인 대중매체(mass-medium)로 정의하며, 그것은 필요할 경우 상대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른 미디어들과 함께 나타나야 한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맥루한은 하나의 주문(呪文)처럼 정의했다. 그래서, 우리는 대상성(Objektalität)의 승리로 어떻게 해보려는 획일화된 분위기 속에서 미디어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대상들 세계의 독립’이라고 오늘날 보드리야르(Baudrillard)가 말하는 그 의미이다. 그는 메시지(message)를 마사지(massage)로 확장시킨 맥루한을 따르고 있으며, 그 마사지라는 것은 대중시대에 언어유희적으로 변형된 것이다. 그 두 단어는 몸을 향한 미디어의 묘한 접근들을 증명하고 있다. 즉, 개인적인 또는 군중의 몸은 집단화되고 그런 추세에서 개인적인 몸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림을 통해서, 결국 매스미디어는 승리를 얻을 것이다.

미디어화(Mediatisierung)
내가 미디어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고찰한 것 외에도 미디어화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미디어가 하나의 진행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쪽으로 논의의 방향을 바꾸어야 되겠다. 매체는 스스로에게 상응하는 특별한 조작과 그때마다의 완성된 형태를 산출하며, 매체와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중간 지점의 생성작용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 중간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이 가까이 있는지 멀리 있는지는 비교해서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송신자도 수신자의 의미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용 방법에 관한 송신자의 성취도가 중요한데, 이것이 바로 미디어화 과정이다.
미디어화는 오랜 시간동안의 궤적 안에서 이미 성취된 하나의 작용이다. 그것은 초창기의 광범위한 수용 또는 길들임과 비교될 수 있다. 길들임과 동시에 미디어들의 목적을 숨기거나 둘러댈 수도 있고 또, 아무런 의도가 없는 체 할 수도 있지만, 미디어화가 진행될수록 더 침윤(浸潤) 또는 은밀히 복종시키기라는 그 목적이 드러나게 된다.
사람들은 길들임과 채찍 또는 명령들, 익숙하지 않은 강요들에 순응해 갔으며 그렇게 미디어화는 외형적으로 하나의 만족과 오락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흥미로써의 미디어화라는 올가미로 둘러싸는 그 의도를 짐작하지 못했다. 미디어의 수용에 있어서 그 은밀한 강요는, 휴식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지 말고 미디어와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라는 식의 선물을 얻기 위한 제안을 통해 이루어진다.

미디어적 실재성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실재성(reality)은 단지 암시(暗示)된 실재성이다. 그것은 모습을 바꿀 수도 있다. 그래서 미디어의 실재성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어떤 전달도 아니며 메시지도 아니다. 왜냐하면, 미디어는 단지 의도된 기의(記意)들 만을 짧게 찍어 내보내기 때문이다. 매끄러운 겉 모습과 착 달라붙은 그 모습들은, 이미지의 들어옴(IN)과 나감(OUT)이라는 선명한 인식의 구분만 유일하게 허락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진실을 되돌려 주기 위해서 미디어는 얼마나 많은 진실들을 삼켜 버렸는가? 미디어는 많은 진실들을 삼켜 버렸고 그럼으로 해서 진실된 모습들을 위한 자리를 아주 적게 허락하고 있다. 자신만의 속도를 통해서 미디어는 그렇게 무시될 만한 다른 진실들을 지속적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미디어는 단지 평범한 일상의 지루함이라는 진실을 계속 배제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성에서 미디어에게는 중요한 그 무엇이 결여되어 있다.

번역 2001 © 오창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