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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②

은바리라이프 2019. 5. 2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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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②

( 교리적 연구를 중심으로)





2000. 5. 4. 발표자: 신원균 강도사



서론



우리는 지난주에 예정론의 역사적인 성격을 함께 고찰해 보면서 예정론에 대한 이해가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았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예정론을 가르치는 목회자가 희귀하고 또한 예정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려고 할 때 수많은 핍박과 조롱을 감수해야 때에 이 예정론에 대한 연구는 더욱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역사적 개혁교회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예정론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게 되면 교회는 온통 인본주의적인 성격으로 변질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중요성을 기초로 하면서 이제 예정론에 대한 두 번째 연구를 시작하고자 한다. 본 논고에서는 도르트 신조에 나타난 예정론의 성격을 자세하게 고찰하면서 전체 개혁신학에서 확립한 예정론의 교리적인 특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본론



1. 도르트 신조에 나타난 예정론의 형태.

1) 본문 요약

가장 핵심적인 논점의 요약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개혁파의 입장
항론파의 입장

ⓐ항: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하여 저주 아래 놓여 있으며

ⓑ항: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으니

ⓒ항: 인간이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이 복음을 주시는데

ⓓ항: 그들에게 주어진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되는 것이다.

ⓔ항: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이 불신앙의 원인과 그 죄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그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로서 다음과 같다(엡2:8)

ⓕ항: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의 선물을 받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항: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 영원부터 중보자로 또한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서 세우신 그 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라 은혜로 인하여 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이 되었다.

ⓘ항: 이 선택에는 다양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에게 관한 하나의 동일한 작정이 있을 뿐이다. 

ⓙ항: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것은 그 선택의 선행 조건이나 원인 등으로서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예지적인 믿음이나 그 믿음에 대한 순종, 거룩함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착한 성품이나 기질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 따라서 선택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모든 선행의 기초를 이루게 되는 것이며, 선택받음으로 인하여 믿음과 거룩함과 그 밖의 구원의 은사를 얻게 되어 결국은 그 열매로서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항: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 은혜로운 선택의 유일한 원인이 되는데, 

ⓛ항: 그가 행하신 선택은 중단되거나 변하거나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다. 또한 택함 받은 자는 버림받거나 그 수가 감소될 수도 없는 것이다.

ⓜ항: 구원의 확신에 대한 정도와 그 방법은 다양할 수 있긴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 불변한 택정함의 확신을 얻는 것은 --- 그것은 성령의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바 구원받는 자의 확실한 열매를 잘 지켜 나감으로 이루어진다. 

ⓝ항: 이 선택을 잘 깨닫고 확신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 겸손해지며, 자비로우심을 경외하며, 나태한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며, 세속적인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며, 그 뜨거운 사랑에 감사하게 된다. 


ⓐ항: 하나님의 뜻은 전체적이므로 이 선택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할 뿐, 그 외의 다른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항: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 따라서 선택은 불완전하고 취소될 수 있으며 미결정적이고 조건적이든지, 또는 완전하고 취소될 수 없으며 결정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항: 오히려 모든 가능한 조건들로부터(이 중에는 율법의 행위들이 포함되는데) 또는 모든 사물의 질서로부터 믿음의 행위를 주셨다는 뜻이다. 

ⓓ항: 믿음에 이르도록 선택을 받는 조건에 있어서는 먼저 인간은 영생을 얻는데 합당한 올바른 본성을 가지며 경건과 겸손과 온유한 성품을 가져야 하는데, 마치 선택은 이러한 성품들에 의존해 있는 것과 같다. 



ⓔ항: 비결정적인 상태로 택함을 받았다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예지된 믿음과 회심, 거룩함, 경건한 등의 생활 등을 이미 시작했거나 얼마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선행(先行)으로서 요구되는 조건이다. 그런데 이 조건은 완전히 선택될 사람들에게 보여질 일이며, 이러한 요소가 없다면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선택은 일어날 수 없다. 



ⓕ항: 하나님의 작정에도 불구하고 택함받은 사람들 중의 얼마는 여전히 멸망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그러하다. 



ⓖ항: 선택받은 자의 열매나 자각(自覺)이 없으며, 더욱이 이에 대한 확실성도 없고 다만 가변적이며 불명확한 조건이 있을 따름이다. 



ⓗ항: 그 누구도 --- 저주를 받게 하지도 않으셨고 ---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사귐에서 벗어나도록 하지도 않으셨다.



ⓘ항: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보다는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낫고 가치 있기 때문이다. 




개혁파의 입장

ⓞ항: 또한 구약과 신약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보여졌듯이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에서 시간과 장소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 그 거룩한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북돋우고 위로해 주시기 위하여 일어남을 알 수 있다.

ⓟ항: 그 외의 사람들은 --- 스스로 파멸에 빠져 구원의 믿음과 회개하는 은총을 받지 못한 채, 그들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자조하여 끝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이는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지은 모든 죄악으로 인한 결과이다.

ⓠ항: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이 방법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 인내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이를 행하되 풍성한 은혜를 기다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비록 그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돌아와서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고 사망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거룩함과 온전한 신앙에 이르기가 어렵다.

ⓡ항: 그러므로 믿는 자의 자녀는 그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운 계약으로 인하여 그 부모의 믿음을 따라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부모들은 --- 자녀들이 택함 받아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항: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엄한 유기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대답할 수 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9:20).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2) 개혁파의 평가

개혁파의 입장에 반(反)예정론적인 자세를 가진 항론파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평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즉 도르트 신조의 최종 합의된 본문 조항에 나타난 평가와 당시 총회에 참석한 개혁신학자들 중에서 지역별로 평가한 입장을 세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합의된 조항의 평가

①항: 첫 번째 정리된 내용은 구원의 대상에 대한 입장으로 항론파의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개혁파는 "영원 전부터 특정한 수를 택하여 뽑으셔서"라고 증거 하면서 성경에서는 제한된 특정의 대상을 구별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요17:6),(행13:48),(엡1:4).



②항: 본 항에서는 항론파가 선택의 종류를 다양하게(불완전한 것, 완전한 것) 나누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하면서 성경에서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오직 제한적으로 선택한 특정한 사람들만이 구원의 과정을 성취해 가는 것으로 확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구원의 과정을 뒤바꾸는 것은 "구원의 보배로운 줄을 끊어 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해 주고 있다.



③항: 본 항에 있어서 항론파들은 구원의 성격에 대해서 제한된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을 부정하며 또한 일반적인 선택도 믿음의 행위에 의한 구원임을 즉 조건에 의한 구원임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 개혁파는 이들의 이런 논점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치명적으로 손상을 입게 되었다고 오히려 역설하고 있다. 즉 디모데 후서의 말씀을 증거로 해서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라고 제시하면서 구원의 성격은 절대적인 은혜의 성격임을 증거하고 있다.



④항: 본 항에서는 위 항의 구원의 성격에 있어서 그 근거를 항론파가 본성과 경건과 겸손과 성품에서 찾으며 선택은 이런 조건들에 의존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개혁파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즉 이런 입장은 펠라기우스의 입장임을 지적하고 오히려 성경은 에베소서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라는 말씀처럼 구원은 오직 은혜와 선물의 성격임을 다시 확증해 주고 있다.



⑤항: 본 항에서는 구원의 내용들에 대한 언급으로서 항론파들은 믿음과 이 믿음에의 순종, 거룩함, 경건함, 견인 등은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선택에 이르는 조건이라고 증거 하는데 개혁파에서는 이런 가르침은 성경과 모순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즉 에베소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라는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선택은 거룩함에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부르심이지(목적) 거룩하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조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선택의 열매로서 거룩함이지 조건에 의한 선택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⑥항: 본 항은 구원의 확실성 즉 성도의 견인 에 대한 언급으로서 항론파들은 "구원받은 자도 여전히 멸망할 수 있다"라고 언급하지만 개혁파는 이들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즉 이런 주장에 의해서 하나님이 증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변덕스러운 분"으로 묘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성도의 궁극적인 위로"를 무너뜨렸다고 반문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 6:39)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선택은 완전히 확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⑦항: 본 항은 위 항의 내용과 연결해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내용을 증거하고 있는데, 항론파들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증거 하는 개혁파는 이들의 "불확실한 확실성"이란 말 자체가 모순된 말이라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다. 왜냐하면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라는 말씀처럼 성경에서는 성도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음이 명백히 증거 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 외에도 우리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라는 말씀을 통해서 성도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것으로 큰 소망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⑧항: 본 항에서는 1항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즉 구원의 대상에 대해서 어떤 누구도 멸망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고 항론파들은 주장하지만 개혁파는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13:11), (롬9:18), (마11:25-26)라는 말씀들을 통해서 대상은 분명히 제한되어 구별되어 있음을 확증해 주고 있다. 



⑨항: 마지막 항은 선택의 실제적인 결과, 즉 구원받고, 받지 못하는 현상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에 대해서 그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가치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항론파들은 주장하지만 개혁파는 "여호와께서 오직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14-15)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인간의 어떤 가치에 의해서 구원의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과 의지에 속한 것이 유일한 원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1) 



(2) 각 지역별 평가

① 네덜란드 입장2)



ⓐ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의 입장



그는 예정(선택과 유기포함)은 두 가지가 아니라 단일한 예정임을 증거하고 있으며, 신자들을 구원하는 첫 기초(원인)는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과 하나님의 선택이 그 원인이요 구원뿐만 아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믿는 모든 신앙의 기초라고 증거하고 있다. 또한 구원에 이르는 인간의 예정은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하고 그 자체가 역시 절대자유롭고 참되고 은혜로우신 주의 기뻐하심에 따라 그의 영광의 찬양을 위해서 온 인류 중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능력 있게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결정이다라고 증거하고 있다.3) 그리고 선택의 원인에 대해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선택의 추진하거나 움직이는 원인은 오직 전적으로 자유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기뻐하심이요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요 하나님밖에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증거하고 있다.4)



그리고 선택의 열매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도 그는 "그리스도로 선물하시는 은혜, 소명, 양자로 삼음, 견인의 은혜는 어떤 수단으로서 구원 자체에 선행한다. 즉 이 신앙과 그와 같은 순종, 그 안에서의 견인은 택함을 받을 자들 안에 있는 선택을 위해서 미리 예견된 어떤 조건이 아니요, 역시 그것 없이 그런 일이 없는 원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선택의 고유한 역사(열매)이다"라고 증거하고 있다.5)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한 번 주어진 택자들의 신앙은 그들을 보존하는 하나님의 진리와 능력 때문에 그들 안에서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 비록 어떤 때에 그것이 적어지거나 커질지라도, 그것 자체가 잃어버릴 수 있고, 잃어 버렸어도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6). 



다음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구원받은 선택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견인할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참된 신자들에게 견인에 대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약속으로부터(렘32:40, 요4:14), 그리고 택자들에게 고유한 신앙의 특별한 느낌으로부터(딛1:1, 살후3:2), 구원의 날까지 우리의 기업의 보증에 대한 인치심으로서의 성령으로부터(엡1:13-14), 진지한 기쁨과 선행들과 믿음과 사랑의 성찰로부터(벧후1:10) 확신하기 때문이다"7)



ⓑ 루베르투스(Sibrandus Lubbertus), 폴리안더(Johannes Polyander), 티시우스(Antonius Thysius), 발레우스(Antonius Walleus)의 입장. 



먼저 선택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특별한 사람들의 선택의 원인은, 그것에 의해서 오직 스스로 행하시는 주께서 하나의 원인이나 조건, 혹은 어떤 능력이나 가치로서 앞서서 있어야 할 신앙이나 순종, 완전성을 고려함이 없이 저보다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주고자 하셨던,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의논과 그의 뜻의 기뻐하심이다"8). 



그리고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사람들의 선택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의 결정으로서 다시 부름을 받거나 깨어질 수 없다. 그 때문에 택자들의 수는 그렇게 확실하고 명백하여 증가되거나 감소될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소수이고 다수의 유기자들에 비해 적은 무리일지라도, 성경에는 셀 수 없다고 언급되고 있다"9)



또한 유기자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운명에 합당하고 정당한 원인 이외에 다르게 아무도 내버려두지 않으실 지라도, 택자들도 그들의 선택 전에 주 앞에서 비참성의 같은 상태에 있었던 대로, 어떠한 이와도 결합되지 않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와 주께서 원하시고 자신의 백성과 관련된 자신의 능력 이외에, 왜 주께서 저들보다 이들을 버리실 만한 다른 원인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유기자들을 어떤 진노의 단계로 심판하셨던 원인은 정당하게 그들의 불복종과 불신앙에 있도록 하였다"10) 



② 독일

ⓐ 헷센(Hessen)의 입장11) 



우선 구원에 이르는 선택의 결정에 세 가지 내용을 포함시켜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첫째로 타락한 인간들 중에서 그 수가 하나님께만 알려진 확실히 정한 사람들을 그의 뜻의 자비로우신 성향에 따라 그의 영광의 찬양을 위해서 스스로 긍휼히 여기시고 또한 그들을 자신이 내던져진 그 안에서 일반적인 비참으로부터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둘째로 선택의 의미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지극히 높은 축복으로 영생과 영화와 구원에 이르도록 정한 것이며, 셋째로 그것을 통하여 의도된 목적에 이르도록 하는 어떤 수단들에 대한 묘사와 정하심이 능력 있게 택한 자들에게 주셔서 그들이 그 수단들을 통해서 실패함이 없이 영원한 축복에 이르도록 하는 수단들에 대한 결정이다. 그리고 성경에 따라 영생에 이르는 선택은 하나님의 의지의 기뻐하심에 따라, 순수한 은혜로부터 친히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타락한 인류로부터 긍휼히 여기시고 그 같은 자들을 죄의 일반적인 곤고함과 그 부패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고 그 수단들을 그가 택자들에게 능력으로 선물하시는 확실히 정한 수단들을 통하여 미리 정한 목적인 영생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고 실패 없이 이끄시고자 하셔서, 영생에 이르기로 완전히 택한 바 된 모든 이들이 영원 전부터 수단들을 통하여 때가 되어 같은 것에 필연적으로 그리고 실패함이 없이 이르게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이다"12)



ⓑ 브레멘(Bremen)의 입장13)



신적인 선택의 결정은, 하나님께서 그의 특별한 긍휼과 영광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전 인류의 부패된 자들 중에서 확실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동일한 자들을 그의 은혜의 교통을 위해서 능력으로 부르시며 외롭게 하시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안에서 영화롭게 하시기로, 영원 전부터 세상의 기초 전에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그 유일한 기뻐하심으로 결정하셨던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게 선택에 대한 명확하고 완전하며 전적으로 유일한 결정이다. 이 결정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만큼 전적으로 자유롭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진노를 유화하시는 중보자요 인간의 화해 자로 삼으셨을 때, 전적으로 외로우시며, 두 분의 의도가 즉 구원의 은총과 영광을 주기 위함인 대로 전적으로 자비로우시다.14)



선택은 우리가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채택되거나 혹은 능력 있게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하게 살고 영원한 영광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얻을 것임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다. 또한 이 생에서 이런 선택의 열매는 확실하고 커서, 우리가 소명과 칭의 후에 우리 안에서 느껴지고 이 곤비한 생에서도 확고한 것이다. 죽음 후에는 더하고 영광의 부활 후에는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하다.15)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기 전에 죽은 신자들의 자녀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자들을 사랑하시는 동일한 기뻐하심으로부터 그들도 사랑하신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그들도 언약에 근거하여 거룩하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들은 거룩한 세례에 의해서 환영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한다.16)



그의 의와 그의 능력을 찬양하도록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영원 전에 인류 중에서 타락한 어떤 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그들의 죄와 진노 가운데 내버리시고 진노하실 것을 결정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신구약의 시대를 통하여 영원하고 불변하며 완전하고 전적이며 유일한 결정이라 하며, 특히 유기에 대한 결정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저주를 받은 모든 이들은 모두가 함께 공의로이 그 죄들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가치한 자들 중에서 어떤 정한 사람들을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부르시는 원인은 그의 의지의 긍휼이시다. 부름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그의 의로운 판단과 그의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의지에 따라 내버리시기로 결정하신 자들이다.17)



2. 웨스트민스터에 나타난 예정론의 형태.

1) 정의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한 때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 바,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 않게 작정해 놓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며, 피조물들의 의지를 침해하시는 이도 아니시다. 제 2원인들의 자유나 우발성을 제거시키지 않고, 오히려 확립하시는 분이시다(3장 1절).

하나님께서는 장차 일어날 듯한 혹은 일어날 일을 무엇이든지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것을 작정하실 때, 그것이 장차 있을 것으로 예지(豫知)하셨거나, 또는 그 가정된 조건들에 근거하여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예지 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작정하신 것은 아니다.(3장2절)





본 항에서는 첫째로 예정의 주체는 영원 전에 자신의 뜻 가운데서 변함 없이 정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럴 때 죄와의 관계와 또한 피조물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체적 자리를 핫지(A.A. Hodge)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총괄적인 목적은, 그 전체에나 그 어느 구성 요소에나,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 목적이 포함하지 않으며 결정하지 않는 사건들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그와 같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최고 주권적인 목적이며, 오직 '그의 뜻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의존할 뿐이다. -- 하나님의 총괄적인 목적에는 원인과 조건들을 포함하며 결정할 뿐 아니라, 그 조건들에 의존하는 사건도 포함된다. 하나님의 작정은 사건들의 의미 있는 성격과 그 상호관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결정한다"18)



그리고 이어서 고백되는 『예정예지』에 대한 내용은 다분히 알미니안주의의 『예지예정』에 대한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즉 알미니안 자들은 하나님이 자유 행동을 확실히 예지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행동들을 결정하신다는 것은 부인한다. 그러나 개혁파는 하나님이 자유 행동을 장차 있도록 결정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확실히 장차 있으리라는 것을 예지하신다고 주장하게 된다.19)



2) 목적과 확실성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3장3절)

이 천사들과 사람들은 이와 같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리고 변치 않게 계획되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들의 수효는 확실하고 확정적이므로, 그것은 더하거나 뺄 수가 없다.(3장4절)



본 항에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궁극적인 목적 또는 동기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 최종적인 목적은 인간의 공로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의 찬란한 은혜에 찬양이 돌아가게 하시려는 것으로 확정짓고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선택의 확실성에 대한 강조로서 선택자들의 불변적인 숫자의 확정성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3) 선택의 원인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창세 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 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으며, 그리고 모두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셨다. 그러나 믿음, 또는 선한 행위, 또는 그들 안에 있는 인내, 또는 피조물들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것들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저희들을 선택하게 하는 조건들이나 원인이 아니다.



본 항에서는 알미니안과 계속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선택의 원인에 대한 내용이 명확히 정리되고 있다. 즉 선택의 원인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신 뜻에 기초한 은혜와 사랑에서 나온 것이며 그 목적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향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믿음, 경건, 거룩함 등도 절대로 조건이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핫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알미니안파는 확실히 예지된 믿음과 회개를 조건으로 그 개인들을 선택해서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은 그의 최고 주권이 기뻐하시는 대로 어떤 개인들을 선택하셔서 영생과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과 조건을 얻게 하신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믿고 회개하도록 선택하시는 것이지 그들이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다"20)



4) 수단과 방법까지도 예정(선택의 열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사(意思)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들을 미리 정하셨다. 그러므로 선택 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으며, 때를 따라서 역사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 함을 받으며, 양자되며, 성화되며,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능력으로 보호된다. 오직 택함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거나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받거나, 양자 되거나, 성화 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3장 6절).



본 항에서는 예정의 범위에 대한 고백으로서 예정은 예정의 내용을 성취해 가는 모든 수단과 방법들까지도 예정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은 이미 도르트 신조에 있어서도 항론파들이 믿음을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여러 가지 구원의 열매들을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조건이라고 계속 제시했던 내용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 고백서에서도 도르트의 입장에 따라서 수단과 방법도 선택의 내용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선택의 열매로서의 특징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핫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결정은 영원하고 총괄적인 의도지만, 거기 포함된 여러 가지 요소들은 필연적으로 각각 서로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성취하시려는 목적들을 정하실 때에, 동시에 그 목적을 위한 수단들을 정하신다. 개개의 목적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총괄적 목적은 필연적 논리적 순서로 개개의 목적을 위한 수단들보다 먼저 있으며 그 수단들의 방향을 정한다".21)



5) 유기의 원인과 목적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 위에 행사하시는 그의 주권적인 능력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는 바, 택함 받은 자 이외의 나머지 인류에게는 그 자신의 뜻을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서 그들의 죄를 인하여 그들을 버려두시고, 그리고 그들이 치욕과 진노를 당하도록 작정하시기를 기뻐하셨으니, 이는 그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미케 하려 하심이다(3장7절).



본 항의 유기자의 선택 원인과 그 목적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다. 먼저 그 원인은 선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되어진 것이며 그 목적도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움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죄의 책임에 대한 어려운 점이 있다. 그렇지만 웨스티민스터의 입장은 철저하게 유기의 원인을 단순히 인간의 죄책에만 두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의지와 뜻에 두고 있으며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에 의해서 죄의 조성자가 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죄인들 자신의 죄책으로 인해서 멸망하도록 하셨음을 조화롭게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런 유기의 작정에 대한 내용이 오늘날에 와서는 많이 퇴색되어 '선택은 하나님께서 작성하셨으나 유기는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라는 "일방예정"으로 소개되기도 하며, 또한 유기의 원인은 '단지 인간 자신이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뿐이다'라고 하면서 유기의 원인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지 않고 단순히 인간의 죄에만 돌리려는 형태로 제시되기 한다. 이런 내용은 정통적으로 개혁파에서 제시했던 유기의 원인과 다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칼빈은 유기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기도 하다.



인간은 창조된 바 최초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 타락하였음으로 그 멸망의 원인은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상황에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묘하신 뜻으로 말미암아 이같이 스스로 초래한 파멸이 인류 및 아담의 모든 자손에게 있어서 예외 없이 겸손의 이유가 되도록 작정하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인간이 타락한 것은 인가 자신의 의지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22)



6) 예정론의 실천적 효과



아주 신비한 이 예정의 교리는 특별히 신중하고 조심성 있게 다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그의 뜻에 유의하고, 그리고 거기에 순종하여 그들이 받은 유효한 부르심에 대한 확신감으로, 그들의 영원한 선택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되면 이 교리는 복음을 성실하게 순종하는 모든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찬미와, 경의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해 주며, 또한 겸허와 근면과 풍성한 위로를 허락해 줄 것이다(3장8절).



본 항에서는 예정론의 실천적인 효과에 대해서 다양하게 정리를 해 주고 있다. 먼저는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할 수 있게 하며 또한 겸손함을 갖게 하여 감사를 드리며, 근면함을 주게 되고 마지막으로 가장 심한 핍박과 고난 중에서도 실제적인 위로와 격려를 얻게 하는 것으로 고백되어지고 있다. 



3. 반대자들의 대표적인 주제들.

다음으로는 예정론을 다루는데 있어서 늘 공통적으로 반대되는 반론들의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아래의 주제들은 현재도 역사적 개혁신학의 예정론을 세워 가려고 할 때 가장 방해가 되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정립을 해야 할 것이다. 



1) 선택 교리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

본 주제에 대해서 가장 대표적인 표현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고 그를 노엽게 한 일도 없는데, 무슨 권리로 그들에 대해서 노하시는가? 원하시는 대로 사람을 멸망에 내어 주신다는 것은 재판장의 합법적인 선고라기보다는 폭군의 변덕과 같다고 의문을 갖는다"23). 이런 질문은 오늘날도 예정론과 관련해서 가장 심각하게 도전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절대적인 결정권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에 대해서 칼빈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최고의 표준"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뜻의 원인을 추구하는 것은 심히 악한 짓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그러해야 마땅한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은 의의 최고 표준이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일은 그가 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무엇이든지 의(義)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묻는다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왜 그것을 원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이 질문은 하나님의 뜻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높은 어떤 것을 찾으려는 것이며, 그것을 찾아 볼 수 없다"24) 



이와 같은 칼빈의 지적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비록 그 결정이 인간의 이해로 모두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인간이 보기에 불합리해 보여도 여전히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이기 때문에 가장 의롭고 공의와 정직을 가지며, 또한 아무 허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완전성의 최고 표준이 되며, 모든 법의 법이 됨을 깨닫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는 답변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25)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의 호기심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으로서 칼빈은 다음의 성경구절의 내용을 최고의 답변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20),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2) 선택 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한다.

본 주제와 관련해서 반대자들이 제시하는 내용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정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은 일들을 왜 사람들에게 죄로서 전가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해야 좋은가? 그것은 전연 불가능한 일이므로 해보아도 무익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원인이 하나님의 예정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26). 이와 같은 반대자들의 논점은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현재 악한 일을 하고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피할 수 없이 하는 일 때문에 벌을 받아서는 안되다는 주장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면 어떻게 죄인들의 죄와 상관이 없는가? 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이와 같은 반대자들의 주장은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인 관점에 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이 주제는 개혁교회 역사 속에서도 가장 첨예하게 논쟁이 되어 왔던 주제이기도 하였다. 즉 이미 어거스틴 당시에도 죄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 논쟁이 정리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이미 이 논쟁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죄와 상관이 없다고만 말해도 비성경적인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죄를 주관하신다고만 해도 비성경적이라고 정리를 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의 조성자는 아니지만 죄에 대한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결정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양쪽의 내용을 가장 조화롭게 정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는 장차 있을 일을 모두 예견하시는 것이 그의 지혜의 일부분인 것과 같이,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27). 이런 칼빈의 입장의 어거스틴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것으로서 죄의 문제를 단순히 "허용"의 개념으로 피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의지로 작정하시고 주관하신다고 확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단순히 허용적 개념으로 이 어려움을 피해가려고 하는 태도는 "매우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짓으로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망대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고 단지 우발적인 사건들을 기다리고 있는 분으로,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실제적으로 인간 의지에 의해서 좌우되는 형태로 전락시키게 된다"28)고 지적하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칼빈은 3중적인 사역으로 풀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그는 같은 한 사건 안에서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각각 동시에 사역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 말은 한 동일한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고 사탄과 사람도 나름대로의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인간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이 해결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과 사탄과 인간은 사역하는 목적과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일이 진행되어지면서도 각각의 책임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칼빈은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동일한 이 일을, 사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들거나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로 만드는 일이 없이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같이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우선 행동의 목적을 생각하고 다음에 행동하는 방법을 생각한다면, 해결은 쉽다. 주의 목적은 재난으로 자기의 종의 인내심을 단련하려는 것이었고, 사탄은 욥을 절망 상태에 몰아 넣으려고 애썼고, 갈대아 사람들은 법과 공의를 어기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아 이익을 보려고 했다. 목적이 아주 다른 것이 벌써 행동의 특색을 뚜렷이 나타낸다. 방법도 거기 못지 않게 다르다. 즉 주께서는 자기의 종을 사탄이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시며, 심부름꾼으로서 갈대아 사람들을 택하여 사탄의 지배 하에 넘겨주신다. 사탄은 독을 묻힌 창으로 갈대아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자극하여 그 악행을 실천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범죄로 돌진해서 온 지체를 죄로 물들이며 더럽힌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사람들 위에 사탄이 지배력을, 즉 악한 지배력을 행사할 때에, 사탄이 그들 속에서 역사 한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독자적인 방법으로 역사 하신다. 그러므로 같은 행위를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에게 돌리는 데는 조금도 모순이 없으며, 목적과 방법을 구별할 때에 하나님의 의가 아무 흠 없이 빛나며, 사탄과 사람의 추악한 행동이 그들의 사악함을 폭로한다.29)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역에 대한 관점은 역사적 개혁신학의 예정론에 대한 핵심적인 이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45:7) 라는 말씀을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30)31) 



3) 선택 교리는 고결하게 살려는 열의를 전적으로 말살한다.

다음의 주제는 예정론을 가르치는 것이 사람들에게 나태를 조성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즉 선행에 대한 열심과 노력을 좌절시킨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가르침은 자신의 노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모든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반대자들의 논점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선택된 목적에 대해서,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생활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엡1:4). 만일 선택의 목표가 거룩한 생활에 있다면, 선택은 아무 선행도 하지 않는 구실을 우리에게 준다기보다, 도리어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생활에 집중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며 자극할 것이다. 구원을 얻기에는 선택으로만 충분하다고 해서 선행을 중지하는 것과, 선택을 해 주신 목적인 선의 추구에 몸을 바치는 것, 이 두 가지가 얼마나 서로 다른가를 비교해 보라!32) 



이런 칼빈의 주장은 도르트 총회에서도 가장 논쟁이 되었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은 성도들을 "거룩함으로 이끌기" 위한 예정이라는 내용으로 정리를 해 주고 있다. 즉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그 조건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거룩함"이라는 목적을 향해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라는 말씀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예정론은 우리의 교만이 꺽여지고 제거되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겸손하게 떨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바르게 경외하며 찬양하게 되는 기초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4)선택 교리는 모든 충고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본 주제도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처럼 예정론의 주제에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이 주제와 관련해서도 반대주의자들은 예정론이 경건한 생활에 모든 충고를 불가능하게 하므로 예정론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늘 말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주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그 논점이 집약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도 악에 대한 해결 방식에서 칼빈이 3중 방식의 사역으로 제시했던 내용을 정리하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이 두 가지의 조화를 성경의 증거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즉 성경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께로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신다"(요6:65)라고 증거하고 있지만 또다른 면에서는 "복음을 들어야 한다"(마13:9)라고 충고하면서 양면을 함께 말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 건전하고 엄격한 책망을 의약품처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서 그들 자신이 멸망하지 않도록 또는 그들이 다른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 예지 하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책망이 유익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33)라는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시지만 인간의 의지가 억압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립하시는 방식으로 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자신의 일을 책임 있게 감당해 가야 하는 것을 이해하면 위의 두 가지가 조화 있게 제시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4. 예정론의 실천적 효과들

본 항목에서는 예정론이 단순히 사변적인 내용이 아니라 성도의 전 삶에 실제적인 원리와 기초가 되는 실천적인 것임을 정리하므로 서 예정론을 보다 더 우리의 삶에 가까이 적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 내용은 이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8절에서 언급된 바 있지만 좀 더 자세하게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한다.

예정론의 가장 실천적인 내용은 바로 성도로 하여금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도록 한다는데 있다. 성경은 이 내용과 관련해서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3:14)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예정론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가장 깊이 경외하게 하는 원리가 됨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에서는 에베소서의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5-6)라는 말씀을 통해서 정리하기도 했다. 

칼빈은 이런 예정론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낸다"34). 또한 그는 이 예정론에 대한 무지가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켰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2) 구원의 확신을 심어 준다.

다음으로 예정론에 대한 이해는 성도에게 자신의 구원에 대한 강한 확신을 심어 주기 때문에 구원의 소망과 위로를 갖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웨스트민스터에서는 베드로후서의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1:10)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 예정론이 성도에게 얼마나 큰 구원의 확신을 주게 되는지 제시한 바 있다. 



칼빈은 이 주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의 감화를 체험하는 곳이다. 그리고 공포심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위로를 준다. 불안한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고 도리어 안정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느낀다. 평화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평화로운 것을 제공하신다. 그리고 안식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곧 우리들의 진정한 안식이 되는 것이다"35). 또한 칼빈은 이처럼 귀중한 구원의 확신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악한 것으로서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에 사용하는 가장 중대하고 위험한 유혹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36)라고 말해 주고 있기도 하다.



3) 겸손하게 한다.

예정론을 통해서 계속해서 증거 되고 있는 말씀은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심 가운데서 전적인 은혜와 선물로 거저 주어진 것"(엡1:6, 2:8)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 할 때만이 인간은 자신의 노력과 공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되고 그러므로 겸손함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런 겸손함을 배우게 될 때 진정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는 기초가 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다"37)라고 말하면서 이 교리가 인간을 낮추어 겸손케 하는 기초가 됨을 지적하고 있다. 



4) 근면함을 심어 준다.

이 내용은 이미 베드로후서1:10에서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라는 내용과 에베소서 2:10 "우리는 --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내용을 통해서 확인한 바 있는 것처럼 선택이라는 것은 거룩하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정론 자체에 거룩함으로 세워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예정되었기 때문에 성도는 결코 게을러 질 수 없고 오히려 최고의 노력을 하게 되는 동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에베소서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라는 말씀은 가장 핵심적인 성경의 증거로 늘 제시되고 있다. 



5) 실제적 위로를 제공해 준다.

이 예정론의 교리는 핍박과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실제적으로 위로를 줄 수 있는 교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인간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신 뜻 가운데서 은혜로 선택해 주시고 그 선택하신 자들과 함께 하시고 또한 마지막까지 버림받지 않고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어떤 고난도 문제될 수 없는 정신을 갖게 해 주는 것이다. 이미 칼빈이 당시 핍박받는 교회의 성도들을 변호하고 위로를 주기 위해서 기독교 강요를 작성했던 것처럼 이 예정론은 핍박받는 교회를 위해서 가장 마지막까지 최고의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런 실제적인 위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해 주고 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롬8:33-39) 



6) 선교의 원동력을 제공한다.

본 주제는 예정론을 반대하게 될 때 가장 많이 언급된 내용이기도 하다. 즉 예정론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 사역에 있어서 방해가 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것을 침묵하거나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특히 미국장로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려고 할 때 예정론이 선교사역에 방해가 된다는 사상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급기야는 3장의 예정론 내용을 역사적 개혁신학의 선에서 해석하지 않고 보편구원론적인 개념으로 바꾸게 되었으며 더 나가서 "선교장"이 추가되기 했다. 먼저 3장의 바뀐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관한 교리는 전 인류에 대한 그의 사랑의 교리와 조화되는 것으로 이해하며, 그의 아들의 은사는 모든 세계의 죄를 위한 화해로 이해하며, 그의 구원의 은혜를 구하라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멸망한 사람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은, 하나님은 어느 죄인의 죽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구원을 준비하셨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복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제공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제공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가 범한 죄 이외의 죄 값으로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체의 내용이 알미니안적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기존의 전통적인 해석은 모든 인류가 구원받도록 하는데 있어서 "조화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장"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로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3장의 예정론에 대한 이해를 정확하게 하면 예정론은 복음전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가장 마지막까지 선교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선택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악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일지라도 전도의 손길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굳이 "선교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33개 조항 전체가 이미 예정론을 밑바탕으로 해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예정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모든 장들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과 복음전도에 대한 가장 깊은 초석으로 이미 예정론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5. 예정론과 관련해서 좀더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들.

1) 조직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위치

오늘날 개혁신학을 주장하는 학자들 안에서도 예정론의 위치를 "신론"과 "구원론" 중에 어느 쪽에 두는 것이 좀더 바른 개혁신학의 선에 있는 것인가?를 정하는데 있어서 많은 논점들이 있다. 이미 베트너와 같은 신학자도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전개함에 있어서 첫 부분에서 예정론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유의할 만한 일이다. 그는 먼저 기독교 체계의 다른 교리들만 전개시켰고 심지어 당연히 이 교리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일곱 군데에서조차 이것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교리를 충분하게 전개시킴으로써 그 전 체계의 최후를 영광스럽게 장식하였다"38)라고 언급하면서 예정론을 구원론에서 다루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바빙크는 많은 개혁신학자들이 예정론을 신론에서 다루어 왔고 또한 그렇게 신론에서 다루게 될 때 개혁신학의 본질적인 특성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바빙크의 지적을 통해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살펴보면 베트너의 주장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예정론은 비록 기독교 강요에서는 구원론적인 내용에서 포함되어 있으나 칼빈의 신학사상체계를 보게 되면 이미 1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전장에 골고루 이 예정론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구원론에만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오히려 칼빈의 주석을 통해서 보면 예정론이 신론에 더 깊이 기초되어 전신학의 내용의 기초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기 때문에 좀더 깊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런 내용에 대한 역사적인 형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루터는 쯔빙글리나 칼빈과 같이 예정론을 옹호했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 들면서 예정론의 이해가 이신칭의를 강조하면서 구원론에 집중하면서 예정론의 형태가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구원론에서 예정론을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은 결국 하나님에 관한 교리로부터 보다는 사람의 잃어진 상태로부터 예정을 이끌어 내는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39)



이렇듯 점차적으로 루터의 초기 입장과 전체 종교개혁의 입장을 희생시켜 나간데 비해서, 개혁파의 입장은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그의 논의를 단순히 인간학적 근거에만이 아니라, 특히 신론적 근거에 두면서, 즉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그 논의를 이끌어 내면서 예정론과 관련하여 논의하였다. 이점에서 그들은 로마서 9-11장에서 죄론과 은총론에서 시작하여 선택론에로 나아가고, 에베소서1:3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을 그의 출발점으로 삼은 사도 바울의 예를 따라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바울이 선택을 언급하면서 신론에서 구원의 모든 축복을 선택으로부터 이끌어 내었던 것과 같이(롬9:29이하, 엡1:4이하) 개혁신학자들은 신론에서 예정론을 제시하는 구조를 확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40)



곧 신앙의 생활은 참으로 선택론을 고백케 하는 조건이 되나, 선택의 사실은 모든 영적 은사의 원천이요, 모든 축복의 원천과 첫 원인인 것이다. 이것은 칼빈만이 아니라, 해밍(Hamming), 부쳐, 올레비아누스 등의 확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정이 신론의 한 부분인가(선험적 순서), 아니면 구원론의 시작과 중간에서 다루어져야 하는가(후험적 순서) 하는 것이 꼭 원칙상 본질적 차이를 함의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41)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개혁신학자들은 선험적 순서(신론)를 따랐고, 루터파와 알미니안, 그리고 로마카톨릭과 대부분의 근대 교의학자들은, 점차 후험적 순서(구원론)를 취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이 차이는 개혁파가 예정론을 선험적이고, 철학적이며, 결정론적인 신론 개념에서 이끌어 낸 것에 있었다. 특히 칼빈주의자들은 신론과 하나님의 경륜을 가르칠 때마다 성경의 교리 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정신은 더욱 철저하게 구별되어 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차이의 참된 원인은 칼빈주의에게 있어서 예정론이 단지 인간론적이고 구원론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특히 신론적 의미를 갖는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는 사람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예정론의 가장 주된 목적으로 확립되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42)



따라서 조직신학을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 의식보다는 성경의 계시에 더욱 충실하여 우선 순위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주관적인 의식을 우선한다면, 신론이든, 삼위일체든, 인간론이든 모든 교의가 구원론 이후에 자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교의학을 다룰 때에, 진리를 신자들의 의식에 주관적으로 들어온 것인 양 다루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계시한 것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바빙크는 이러한 방법만이 종교적 관심으로서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타당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43)



2)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우리는 도르트 신조의 예정론을 살펴보면 모든 조항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정확한 일치를 본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제 1 조항에 대해서 즉, 항변파의 예지예정은 모든 칼빈주의자들이 거부하는 내용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이 타락전이냐, 타락후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자들이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참여자들의 '타락후 선택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도르트신조의 공식적 입장은 '타락후 선택설'로 종결지어졌다. 그러나 화란의 엄격한 신학교수의 고마루스(F. Gomarus)는 '타락전 선택설'을 고집하였다. 고마루스 외에도 마코비우스(Maccovius)가 있었다. 그리고 남부 화란, 오베리셀(Oversel), 그리고 프리슬란드에서 온 대표자들은 이 문제를 결정치 말고, 양 파 모두를 만족시키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선호했었다. 곧 도르트회의 '타락전 선택설'을 반대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은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이 당시에 참여했던 다른 화란 신학자들은 4명인데, 그 중에서 3명(Johannes Polyander, Antonius Thysius, Antonius Walleus)의 공통된 입장과 이에 서명한 Sibrandus Lubbertus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여기에 F. Gomarus는 서명하지 않은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예정은 주께서 은혜로우신 그의 뜻의 기뻐하심에 따라(엡1:5,11; 롬11:5) 온 인류로부터 죄로 타락하여 이렇게 잃어버렸던 어떤 사람들을(롬9:15,16)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던 영원하고(엡1:4; 마25:34) 완전 자유롭고(롬9:15) 불변한(롬9:11; 롬11:28,29) 하나님의 결정이다."44) 

위에서 언급한 진술을 정리하여 언급하자면, 타락전 선택설은 선택이 타락의 작정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며, 타락의 작정을 예정의 가치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타락후 선택설은 타락이 선택에 앞선다는 것이다.



이들 양 주장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의 강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타락후 선택설'의 강점45)은 이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두 죽게 되었지만, 그 중에, 선택이라는 '은혜'와 나머지는 아담 안에서 그 죄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른다는 '공의'가 타락전 선택설보다 더 강하게 논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성이 잘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주의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전에 아무 계획 없이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그리고는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신 다음에야 선택과 유기를 하셨다는 이론은 전적으로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지와 죄에 대한 작정은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예정의 대상에 대하여 타락의 작정에 선행하는 더 깊은 신적 작정이 있는 것이다. 이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는 것은 타락전 예정론이다.



타락전 예정론의 강점46)은 타락후 예정론의 "은혜와 공의"에 비하여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있다. 전자와 후자가 모두, 모든 유기자는 자기 자신의 죄가 그의 저주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점에선 의견을 같이하나(인간론), '타락전 선택설'론자는 유기의 궁극적인 원인은 타락에 선행하는 '은밀한 신적 작정'(신론)에 있다고 하는 점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한 신학자들이(쯔빙글리, 칼빈47), 베자, 피스카토르, 퍼킨스, 호민스(Hommins), 보게르만(Bogerman) 등이 때때로 강력한 표현들을 사용했다.48) 최종 목적은 '타락후 선택론의 은혜와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택자에 대한 은혜와 죄인에 대한 공의'는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 후의 대부분의 교회가 신조를 작성함에 있어서는 '은혜'와 '공의'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타락후선택설'이 선호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만이 타락전선택설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49) 이와 같은 차이점을 발견하면서 본 저자는 타락전 선택설이 중심이 되면서 여전히 타락후 선택설의 내용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형식이 낫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결론



우리는 예정론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은 칼빈주의 신학의 출발점은 항상 인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완전하심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베트너의 지적처럼 이 체계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독교 진리의 유일한 체계요, 전 세계에서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가장 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체계라고 확신한다. 또한 워필드의 지적처럼 "가장 논리 정연한 유신론이요, 가장 순수하고 건전한 복음주의요, 최고의 종교개념을 갖고 있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의 장래는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칼빈주의의 손에 달려 있으며 세계에서 기독교가 전진해 가는 만큼 이 교리 체계도 점진적으로 전진해 나갈 것을 우리는 소망할 수 있다.50)



이제 본 예정론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와 교리적인 연구를 마치면서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즉 오늘날 칼빈주의를 자신있게 말하는 자가 많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그 진리의 내용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할지라도 그 참된 진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결코 무너지거나 파괴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뜻하심과 기쁘신 뜻 가운데 오늘도 그 진리를 사랑하는 자를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며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일하실 것이기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다룬 예정론의 논고를 마치면서 김영규교수의 다음과 같은 예정론의 가치에 대한 글을 다시 한번 제시하면서 그 중요성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며 이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예정론을 통하여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였고, 그런 예정론은 보이는교회 안에서 아무도 하나의 지체를 오용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 뿌리가 되었으며, 동시에 잘 믿는 자에게는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오는 교리이다. 특별히 순전히 영적으로 오직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비밀로 남아 있는 예정론 사상은 믿지 않는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진정한 인간 존중의 기틀이 되는 것이요, 가난하고 무시 받는 자에 대해서도 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고, 반면에 보이는 교회의 부패와 사회 부패에 대해서 비판 정신과 혁명정신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 -- 칼빈은 예정론에 의해서 참된 교회를 정의함으로 복음의 순교자들과 나그네된 자들을 변명할 수 있었다. 즉 예정론은 개척하는 교회에 신실과 정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개척된 교회에 내적인 성숙을 가져다준다. 권징에 있어서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고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밑거름이 되게 한다.51)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



Q&A(교수님이 정리하신 내용)



1. 타락전 선택과 타락후 선택에 대한 정리.

타락전 선택과 타락후 선택은 모두 창조론과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의 신적작정 가운데서 (창조, 행위계약, 타락) 등을 결정하시기 전에 선택하셨는가? 아니면 이 결정을 하시고 선택하셨는가? 에 대한 차이인 것이다. 즉 실제적인 창조사건 이후에 선택했는가? 하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오늘날 타락후 선택론의 개념이 이것으로 많이 오해되고 있다) 



이 말은 시간적으로(역사적으로) 창조사건이 일어나기 전 즉 무(無)시간의 상태에 있던 영원 전에 타락전이나 타락후 모두 설명이 되는 것이다. 결국 두 개념 모두 하나님의 신적작정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52) 이것은 모두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서 되어진 일이기 때문에 장소와 시간에 국한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데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원전 신적작정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논쟁의 내용으로 다루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정리해 보면 역사적 순서와 논리적 순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역사적 순서에 있어서는 타락후 선택설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리고 전천년주의자들이 이 입장을 많이 따르게 된다. 다음으로 논리적 순서에 있어서는 타락전 선택설이 더 합리적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천년주의자들이 이 입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미주

1)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7:7-8) 

2) 네덜란드의 입장은 도르트 신조의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도르트 신조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기 때문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네덜란드에서는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와 루베르투스(Sibrandus Lubbertus), 폴리안더(Johannes Polyander), 티시우스(Antonius Thysius), 발레우스(Antonius Walleus) 등과 같은 신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들의 세부적인 입장을 더 깊이 살펴봄으로서 도르트 조항에서 합의된 내용의 성격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J.H. Donner en van S.a. Den Hoorn, Acta of Handelingen der Nationale Synod te Dordrecht ten jare 1618 en 1619(The Leiden Bij D. Donner, 1669), p. 616.(이후 Acta라함) 김영규, 도리트신조 연구, 개혁주의성경연구소, 미간논문, 1988. p. 71에서 재인용. 

4) Ibid. p. 72.

5) Ibid.

6) Ibid.

7) Ibid. 

8) Ibid. p. 41.

9) Ibid.

10) Ibid. p. 42.

11) 헤센의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Georgius Cruciger(1575-1637), Paulus Steinius(1585-1643), Daniel Angelocrator(1569-1635), Rodolphus Goclenius(1547-1628).

12) Acta., pp. 363-369. 김종교, 도르트 신조의 예정론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예정론에 끼친 영향 고찰, 안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pp. 26-27에서 재인용. 

13) 브레멘에서 온 신학자는 다음과 같다. Matthias Martinius(1572-1630), Henricus Isselburg(1577-1628), Ludovicus Crocius(1586-1653)

14) 김영규, 도르트 신조 연구, op. cit., p. 73.

15) Ibid.

16) Ibid.

17) Iibid. pp. 73-74. 이 외의 팔쯔(Paltz)의 신학자들(Abrahamus Scultetus, Paulus Tossanus, Henricus Alting)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 것은 복음을 듣는 모든 이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키고자 하셨다. 복음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공동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순수한 은혜로부터 그가 원하는 신앙의 은사를 주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타락한 인류로부터 어떤 사람들을 자신의 소유처럼 택하셨다. 신앙은 선택의 열매이다. 선택의 원인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았을 때, 그의 자유로우신 의지와 은혜로부터 결정하였던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다. 이런 선택은 확고하여서 성도들이 타락할지라도,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이 누구인지를 안다"(Ibid. pp. 66-67),

18) A.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p. 65.

19) Ibid. p. 66.

20) Ibid. p. 70.

21) Ibid. p. 72.

22) John Calvin,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죤칼빈의 신학논문), 김진수,김기수역, 생명의 말씀사, 1991. p. 374.

23) Inst. 3.23.2.

24) Inst. 3.23.2.

25) (시119: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26) Inst. 3.23.6.

27) Inst. 3.23.7.

28) Inst. 1.18.1.

29) Inst. 2.4.2.

30) (출9:12)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잠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암3:6)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31) 칼빈은 다음과 같이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명확하게 언급해 주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의지가 모든 것들의 첫 그리고 최고의 원인이라고 하나님께서 마귀와 불신자들을 그의 자유의지대로 복종케하실지라도, 하나님이 결코 죄의 원인이라고 부를 수 없고 악의 저자이거나 잘못에 대한 죄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참으로 미워하시고, 인간들 안에 있는 불의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불쾌해 하시기 때문에 진노하실 지라도, 그의 순수한 허락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역시 뜻과 신비한 작정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 일들을 다스리신다. 비록 마귀와 유기자들은 하나님의 배역자들이고 도구들이며 그의 신비한 심판으로 종결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역사 하셔서 어떠한 것도 그들의 타락의 부패성은 축소되지 않도록 하셨다. 이는 비록 그 방식은 종종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을지라도, 그들의 악이 선한 목적에 바르고 정당하게 유익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CO Ⅸ, 713-4). 

32) Inst. 3.23.12.

33) Inist. 3.23.14.

34) Inst. 3.21.1.

35) Insrt. 3.24.4.

36) Inst. 3.24.4.

37) Inst. 3.21.1.

38) Loraine Boettner, 칼빈주의 예정론, 김남식, 홍의표역, 베다니, 1996, p. 17., p. 428.

39) 개혁주의 신론, 헤르만 바빙크, 이승구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p. 511-512

40) Ibid. p. 514.

41) Ibid.

42) Ibid. p. 518.

43) Ibid.

44) 김영규, 도르트 신조 연구, op. cit., p. 40.

45) 바빙크가 생각하는 타락후선택설의 강점은 이렇다. "신적 작정들이 통일성만이 아니라 다양성도 나타내며, 이 작정들은 목적론적 순서만이 아니라 인과적 순서도 드러내며, 창조와 타락이 단지 한 목적에 이르는 수단으로 여겨질 수 없으며, 죄는 진보의 요소가 아니라 우주에서의 교란의 요소로 여겨져야 하며, 따라서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으로는 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바빙크, op. cit., p. 563).

46) 바빙크가 생각하는 타락전 선택설의 강점은 이렇다. "신적 작정들이 통일성만이 아니라 다양성도 나타내며, 이 작정들은 목적론적 순서만이 아니라 인과적 순서도 드러내며 창조와 타락이 단지 한 목적에 이르는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하나의 종국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계시며, 우주에의 죄의 유입은 하나님께서 전혀 생각지도 못하셨거나 전혀 돌아보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죄를 의도하셨다는 것, 그리고 창조의 사역은 곧 하나님의 구속 활동에 적용되어져서, 타락 이전, 즉 아담의 창조 때에도 그리스도의 오심이 분명히 고정되어 있었다는 사실들을 강조한다는 데에 있다(Ibid. p. 563)

47) 칼빈은 타락전 선택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킬빈은 종종 타락후 선택론적 추론을 따랐다(Ibid. p.519); 칼빈의 타락전 선택설 입장은 그의 자필로서 기록된 짧고 명료한 예정에 대한 고백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인간의 창조 전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의논에 의하여 온 인류에 대해서 무엇을 행하고자 하시는지를 결정하셨다. 이런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논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자신의 순수한 상태로부터 타락하였고 그의 결함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영원한 죽음의 진노 가운데 몰았다. …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택함을 받았을지라도, 순서에 있어서 주께서 우리를 자신의 것들로 결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는 일보다 앞선다.(Tamtsi in Christo eligimur, ordine illud prius est ut nos Dominus in suis censeat, quam ut faciat Christi membra)" (CO 9권, 713-714). 

그의 타락후 선택론의 입장은 그의 설교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할 때, 그가 다음과 같은 올바른 전제를 세우고 있음에 주목합시다. 즉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악 외에는 어떤 것도 보실 수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발견하실 수 있는 어떤 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에베소서강해, 상권, 존 칼빈, 김동현역(서울: 솔로몬, 1995), p.72)

48) 타락전 선택설의 강력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이들은 정죄 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순수하게 보이는 이들도 유기되고 정죄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들은 죄와 상관없이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 짓는 사실을 의도하셨고, 그것이 발생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들을 부르심에는 신실하게 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표현들이 항론파들에게 오용되었다. 그래서 도르트 회의의 회원들은 그렇게 너무 강력한 어구들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즉 영국, 브레멘, 헤센 등지에서 온 대표자들이 이들 표현들은 정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르트 회의는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비록 전택설이 이 고백서에 나타나 있지는 않아도 정죄 받지도 않은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도 고의로 이 문제를 결정하기를 거부하였고, 전택설과 후택설이 어느 한편을 들기를 거부하였다(바빙크, p.526-527); 루이스 뻘꼽은 도르트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둘 다 타락 후 선택론적인 견해를 표방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의 타락전 선택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뻘꼽이 이러한 표현은 오해일 수 있다. 즉 "간과를 타락 이전에(소극적 유기), 정죄를 타락 이후(적극적 유기)에 놓음으로써 그것들을 분리한다는 점에서 비논리적이라고 언급된다"(조직신학, 상권, p.326)

49. 루이스 뻘꼽은 도르트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다 같이 타락 후 선택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진술했고(조직신학, p. 326; 7항을 보고 이런 결론을 내린 것 같다), 바빙크는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전택설과 후태설 어느 한쪽을 결정하기를 거부하였다고 진술하였다(바빙크, p. 527), 그리고 김영규교수는 바빙크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라 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제3장 6항에서 표현된 것은 분명히 선택의 대상이 타락한 인간으로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곧 타락전 선택설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진술한 것이다.

"선택되어 아담 안에서 타락한 그들은(Wherefore they are elected being fallen in Adam)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고 유효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되매 역사 하시는 그의 영에 의해서 믿음으로 부름을 받으며 의롭게 되고…(As God hath appointed the elect unto glory, so hath he, by the eternal and most free purpose of his will, foreordained all the means thereunto. Wherfore they who elected being fallen in Adam, are redeemed by Christ; are effecually called unto faith in Christ by his Spirit working in due season; are justified, adopted, sanctified, and kept by his power through faith unto salvation. Neither are by other redeemed by Christ, effectually called, justified, andopted, and saved, but the elect only)"란 표현은 인간과 천사들의 수가 가감함이 없이 영생을 위해 예정된 이후 영광을 위한 그 선택에 따라서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들도 예정하였다는 의미에서 진술된 것들이다.

따라서 창조 전에 이미 택자들과 유기자들은 예정되었고 그 수단들도 예정되었으며 이제 6항에 와서 그 수단으로 타락과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이 기술되어 있다면, 분명히 타락전 선택설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와 헤르만바빙크의 신학" 김영규(개성연세미나 여름세미나, 1998), p. 14). 이렇듯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을 보는 시각이 다양할 정도로 그 입장이 분명히 명시되지 않기 때문에 깊은 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오히려 라틴어역에서는 좀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Quapropter electi, postquam(afther) lapsi essent in Adamo, a Christo sunt redempti(살전5:9 10; 딛2:14);…"(개혁교회신앙고백서, 최병섭엮음에서 인용).

50) Loraine Boettner, op. cit., pLoraine Boettner,p. 414-415.

51) 김영규,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개혁 정신(한국 교회가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미간논문, 1998. pp. 48-49.

52) 이것을 김영규 교수는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개념으로 타락전과 타락후를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시간적 개념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창조사건 전에 또는 그 사건 후에 역사적으로 시간과 함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념 모두 영원 전에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고 단지 영원 전에 타락의 결정 전의 인간을 선택하셨는가, 아니면 앞으로 타락의 결정 후의 인간을 선택하셨는가? 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