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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희 교수의 구약신앙]구약에 나타난 가난한 사람의 경건함

은바리라이프 2017. 9. 5. 18:36
차준희 교수의 구약신앙]구약에 나타난 가난한 사람의 경건함

차준희 목사(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청빈사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자기백성의 빈곤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
가난의 이해 종말론적 의미로까지 발전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다 듣고 그것을 모두 지켜 행하기만 한다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신 15:4-6). 이 땅에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본심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을 경험해야만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신 15:11). 특히 고대 이스라엘은 왕권을 형성한 이후 도시문화가 발달하면서부터 소유와 경제력이 몇 사람의 손에만 집중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대부분의 주민 층은 가난과 종속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곤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자신들의 유일한 변호자로 믿고 하나님께로 향하였고, 또한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유일한 참된 부(富)이심을 굳게 믿게 되었다. 여기에서 ‘가난한 사람의 경건’이라는 특수한 종류의 경건함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경건함은 주로 시편에서 많이 언급되었다(시 22:24-26; 72:1-4, 12-14; 140:11-13 등).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어떤 성격을 지칭하는 말일까?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가난한 사람은 ‘특정한 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도시문화와 왕정제도를 반대하는 이스라엘 역사 초기의 유목적인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들이거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귀환한 사람들(골라) 혹은 포로기 이후에 생겨난 엘리트 집단을 가리킬 수 있다. 둘째, 가난한 사람의 경건함은 ‘영성화’(Spiritualisierung)된 표현일 수 있다. 이는 경제적인 위치나 계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자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걸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자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인식을 갖고 있는 자라면 그 또한 이러한 의미의 가난한 자에 속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이시기 때문에, 경건하려면 가난해져야한다는 논리로 발전시키면 문제가 있다. 구약성서는 가난을 이상화(理想化)하지 않을뿐더러, 구약성서 어디에도 가난을 종교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본문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에 나타난 가난한 사람의 경건함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준수해야 했다. 이러한 토라 순종은 경제적으로 손해를 가져오기가 쉬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하고 준수하는 사람은 상행위에서 거짓된 저울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는 그 어떤 이익을 취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경제생활에서 이러한 손해를 감수해야했다. 따라서 가난은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기꺼이 수용하고 감수해야할 몫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신이 잘못해서 혹은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참조. 잠 6:9-11).

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가난이라는 이러한 이해는 점점 더 강하게 종말론적인 의미로 발전되었다. 즉 가난한 사람이 현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준수하느라 거짓된 물질을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하지만, 미래에는 이러한 삶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경건하여 가난하게 된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의 보상을 받지만, 경건하지 못한 부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참조. 사 29:19-20; 눅 1:51-53).

예수님도 이러한 사상과 맥을 같이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눅 6:21). 그러나 부자들에게는 아주 매서운 경고를 하셨다: “화 있을 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느니라”(눅 6:24). 사람들은 늘 ‘부정직한 부유함’과 ‘정직한 가난함’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기 마련이다. 구약시대의 한 지혜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의 본을 보여 준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네게 먹이시옵소서”(잠 30:8).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살아있는 동안의 부정직한 부유함의 유혹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죽음이 없이 영생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부유함을 누려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바로 저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