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희 교수의 구약신앙]구약에 나타난 가난한 사람의 경건함 |
차준희 목사(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청빈사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이러한 경건함은 주로 시편에서 많이 언급되었다(시 22:24-26; 72:1-4, 12-14; 140:11-13 등).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어떤 성격을 지칭하는 말일까?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가난한 사람은 ‘특정한 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도시문화와 왕정제도를 반대하는 이스라엘 역사 초기의 유목적인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들이거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귀환한 사람들(골라) 혹은 포로기 이후에 생겨난 엘리트 집단을 가리킬 수 있다. 둘째, 가난한 사람의 경건함은 ‘영성화’(Spiritualisierung)된 표현일 수 있다. 이는 경제적인 위치나 계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자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걸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자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인식을 갖고 있는 자라면 그 또한 이러한 의미의 가난한 자에 속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이시기 때문에, 경건하려면 가난해져야한다는 논리로 발전시키면 문제가 있다. 구약성서는 가난을 이상화(理想化)하지 않을뿐더러, 구약성서 어디에도 가난을 종교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본문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에 나타난 가난한 사람의 경건함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준수해야 했다. 이러한 토라 순종은 경제적으로 손해를 가져오기가 쉬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하고 준수하는 사람은 상행위에서 거짓된 저울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는 그 어떤 이익을 취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경제생활에서 이러한 손해를 감수해야했다. 따라서 가난은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기꺼이 수용하고 감수해야할 몫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신이 잘못해서 혹은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참조. 잠 6:9-11).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가난이라는 이러한 이해는 점점 더 강하게 종말론적인 의미로 발전되었다. 즉 가난한 사람이 현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준수하느라 거짓된 물질을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하지만, 미래에는 이러한 삶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경건하여 가난하게 된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의 보상을 받지만, 경건하지 못한 부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참조. 사 29:19-20; 눅 1:51-53). 예수님도 이러한 사상과 맥을 같이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눅 6:21). 그러나 부자들에게는 아주 매서운 경고를 하셨다: “화 있을 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느니라”(눅 6:24). 사람들은 늘 ‘부정직한 부유함’과 ‘정직한 가난함’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기 마련이다. 구약시대의 한 지혜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의 본을 보여 준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네게 먹이시옵소서”(잠 30:8).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살아있는 동안의 부정직한 부유함의 유혹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죽음이 없이 영생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부유함을 누려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바로 저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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