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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①

은바리라이프 2019. 5. 2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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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예정론 연구 ①

( 역사적 배경 연구를 중심으로)





2000. 3. 30. 발표자: 신원균 강도사



서론.



우리는 종교개혁의 교회역사 이후에 오늘날 교회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는 커다란 특징을 언급해 보면 베트너의 "개혁교회의 목사 및 교사들 대부분이 이 교리를(예정론) 담대하게 고백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비(非)성경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자들이 많음을 보는 동시에 칼빈주의를 주저하지 않고 기탄 없이 말하는 자들을 만나기가 어렵다"라는 말처럼 정통적 개혁신앙에 대해서 담대하게 드러내는 형편을 좀처럼 찾아보기가 어려운 형편을 맞이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지금 우리의 형편은 베트너가 톱레이디(Toplady)가 영국 교회의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면서 "교역자치고 칼빈의 예정교리를 설교하지 않는 자가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현대 교회는 대체로 종교개혁의 원리를 버린 셈이다. 따라서 「이가봇」 즉 「영광이 떠났다」(삼상4:21)가 우리의 설교단과 교회 정문의 대부분에 쓰여졌다"라는 지적이 오늘날 우리의 형편이라고 제시한 것이 더욱 정확하게 맞을 것이다.1)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신앙인 들이 칼빈주의를 낡고 진부하고 극단적이며, 고리타분한 것으로 대부분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장로교 안에서조차도 이미 암암리에 철저한 칼빈주의의 신학적 내용들이 오늘날 사회와 교회와 성도에게 부적당하다고 인정하고 있기에 이런 베트너의 지적은 우리의 형편을 더욱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칼빈주의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가운데서 외면 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 예정론은 더욱 그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즉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예정론을 설교하고 가르치게 되면 많은 성도들이 당황하고 거북스러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누구든지 다 예수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가르침에만 귀를 기울여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고 또한 어떤 사람을 영원히 버리셨다고 하는 말씀을 듣게 된다면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본 논고는 이처럼 예정론의 내용이 크게 혼탁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실정을 감안하여 바로 예정론의 설명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선 교리사적으로 예정론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즉 역사 속에서 예정론이 어떤 이단들과 가장 심각하게 논쟁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형편은 이와 같은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확인하며, 둘째로 이 이단들 중에서는 가장 심각한 영향을 끼쳤던 알미니안적 예정론을 살펴보면서 칼빈주의 예정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이 알미니안적 예정론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예정론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언급해 보면서 예정론의 연구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본론.



1. 예정론의 이해와 접근 방식



먼저 예정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규칙과 질서가 반드시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유한(有限)한 인간이 무한(無限)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접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헛된 호기심이나 상상으로 접근하면서 이해하고자 했을 때는 깊은 어두움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칼빈은 이런 질서와 규칙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예정론을 탐구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거룩한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태연하고 자신 만만하게 이 곳에 뛰어들어가는 사람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며, 미로 속에 들어가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주께서 깊이 감추어 두시기로 정하신 일을 사람이 마음대로 생각하거나, 가장 영원하고 숭고한 지혜를 사람이 억지로 풀어내려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기를 원하시며, 경외함으로써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는 그의 비밀의 뜻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셨다. 즉 우리에게 관계되며 유익하리라고 생각하신 범위 내에서 말씀 가운데 드러내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2)



이처럼 칼빈은 예정론이란 주제를 접근하는데 있어서는 겸손과 경외감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 가르쳐 주신 것만을 알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칼빈의 자세에 대해서 베트너는 "칼빈은 성경이 인도하는 곳까지만 갔고 성경이 머무는 곳에서는 머물렀다. 그가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은 넘어가지 않으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주저하지 않고 수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선언(宣言)은 결정적이며 적극적이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칼빈의 신앙적 정신은 개혁신앙의 모든 내용을 접근하는 기본정신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질서와 규칙은 매우 중요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생각과 말과 행동하는 모든 것을 오직 「성경신앙」을 통해서만 하고자 하는 정신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마음과 귀를 열고 듣는 것을 우리는 허락해야 한다. 다만 제한 조건은, 주께서 입을 여시지 않을 때에는 신자도 즉시 모든 탐구의 길을 닫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침착한 태도의 한도는, 배울 때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그치실 때에는 우리도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3)라고 지적하면서 이 질서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예정론을 가장 바르게 이해는 열쇠가 됨을 제시해 주고 있다. 



2.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위치와 역사적 가치



1) 예정론의 위치



우리는 먼저 예정론이 개혁신학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오늘날은 거의 모든 복음주의 교회에서 예정론이 무시되고 가르쳐지지 않고 있는데 과연 역사적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는 예정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베트너는 먼저 예정론의 위치를 제시하기에 앞서서 주의해야 할 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예정론이 지극히 위대하고 복된 성경의 진리요 모든 교파의 근본적인 교리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개혁주의 신앙의 전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카이퍼의 말과 같이 예정론이나 성경의 권위에서 칼빈주의의 특성을 발견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 이 교리가 다른 진리와의 필연적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단독으로 표시된다면 필경 이 교리의 효과는 과장되고 또한 그 체계는 왜곡되어 잘못 전달될 수밖에 없다. 어떤 원리의 서술이 참이 되려면 그것이 그 소속 체계의 다른 모든 요소와 조화를 이루면서 제시되어야 한다". 



위의 베트너의 지적을 보게 되면 예정론이 비록 개혁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것 자체만이 개혁신학을 대변하는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개혁신학은 더 풍부한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주제만을 강조하게 되다 보면 다른 중요한 주제들이 축소되거나 소멸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주제와 함께 조화를 잘 맞추어서 제시해야 개혁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바른 위치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조화를 가장 잘 이루어 제시된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구조와 내용임을 더불어서 지적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베트너의 이런 지적을 통해서 소위 「칼빈주의」 또는 「개혁파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풍부한 하나님의 진리체계와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트너가 지적하고 있는 이런 칼빈주의 체계가 왜 중요한가를 핫지(A.A. Hodge)의 지적을 통해서도 더욱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이단들이 모든 기회에 나타나서, 성경을 곡해하며, 말씀의 어떤 부분을 과장하고 다른 중요한 부분을 버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거짓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경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정확히 정리해서 잘못된 것을 밝히고, 모든 거짓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성경 전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의 전체 내용을 그 중요성에 따라서 잘 정리하므로 써 말씀의 어떤 부분이 부당하게 축소되거나 또는 제거되거나, 과장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4)



베트너는 이 진리의 체계와 관련하여 계속해서 지적하기를 이제 이런 진리의 체계를 간직하고 세워 가려고 할 때마다 이런 체계를 공격하고 무너뜨리려고 하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해서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그는 이미 자신의 본 책이 "특정한 한 교파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총괄적으로 알미니안주의를 그 적수로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한 진리 체계가 가장 심각하게 도전 받고 또한 위협받는 형태는 역사적으로 알미니안주의였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베트너가 이토록 알미니안주의의 심각성을 문제삼고 있는 것은 후에도 제시되겠지만 이들은 예정을 아주 부정하지는 않고 「예지예정」이란 형태로 바꾸어서 자신들도 마치 예정론을 믿는 자들처럼 제시해 왔기 때문에 성경적인 예정론의 내용인 「예정예지」의 내용이 이들에 의해서 가장 심각하게 변질되어 왔기 때문에 예정론의 언급에 있어서 알미니안주의의 문제점을 함께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베트너의 지적은 오늘날도 신학적으로 우리 장로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을 생각할 때, 예정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알아 가는 것이 성경적인 바른 예정론의 형태인지를 더욱 고민하며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예정론의 역사적 가치



(1) 어거스틴

먼저 초기 기독교의 시대 속에서 예정론이 교회의 신앙 가운데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어거스틴을 언급할 수 있는데 어거스틴 당시의 예정론의 형태는 예정론 자체의 문제보다는 「구원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더 부각됨으로 인해서 예정론의 언급은 구원론의 내용을 제시하고 확증해 가기 위해서 그 속에 스며들거나 또는 기초로 전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좀더 자세히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거스틴 당시에 펠라기우스파를 통해서 성경적인 인간의 죄와 구원문제가 심각하게 변질되었다. 이들은 벌콮의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구원이나 저주로의 예정은 예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절대 예정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점에서 「조건(예지)예정」을 인정하였다"5)라는 지적처럼 구원은 어떤 절대적인 권한에 의해 결정된 예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얻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역시 베트너도 펠라기안파들이 하나님의 특정한 결정이나 계획이 선행하는 사실에 대해서 부정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초대 교회 역사 속에는 벌콮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반(半)펠라기우주의도 성경적인 예정론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가장 큰 세력으로 교회에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어거스틴의 내용을 거부하고 구원에 있어서 신적인 은혜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예지에 근거한 예정론을 거듭 주장했던 것이다.6) 결국 이들의 이런 중간적인 입장은 곧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큰 인기를 얻게 되어 교회는 변질된 예정론의 내용으로 큰 혼란을 격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혼란의 시기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의 주권적 특성에 관한 깊은 성찰로 말미암아, 예정은 결코 인간 행동들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에 의존하지 않으며, 오히려 신적인 예지의 기초라고 제시하면서 「예정예지」의 내용을 확고히 세웠던 것이다.7)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입장을 칼빈은 어거스틴 자신의 말을 빌어서 다음과 같이 확증해 주고 있다.



그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이 오류를 고집하는 것을 비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도가 이 궤변(펠라기우스주의)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인가? 그는 아직 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한 다음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롬9:14)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시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예견하신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과 긍휼을 피난처로 삼았다". 또다른 곳에서는 그는(어거스틴) 선택 이전의 모든 공로를 일체 배격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립하는 하나님의 예지를 변호하는 사람들의 이론은 여기서 확실히 무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창세 이전에 선택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하게 되리라고 예견하셨기 때문이요, 우리를 선하게 만드시려고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라고 말씀하신 분은, 선한 것을 미리 보셨다는 말씀을 결코 하시지 않으시고 계신다.8) 



이처럼 칼빈의 지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어거스틴은 펠라기안파의 주장을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반(半)펠라기안파의 주장까지 철저하게 배격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들을 발견(예지)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는(예정) 것이다"9)라는 어거스틴의 말이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참된 진리의 내용이라고 확증해 주고 있다.10) 



(2) 칼빈

칼빈이 자리하고 있는 시기는 종교개혁 시대이기 때문에 이 종교개혁의 시기에 예정론이 개혁교회에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벌콮의 지적처럼 어거스틴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증되었던 예정론 교리는 중세 1000년 동안 반(半)펠라기안파들에 의해 전체 교회 안에 팽배하였으며 많은 신학자들도 철저한 예정론에 대한 바른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교회의 혼탁함 가운데 종교개혁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교리들이 바른 성경적인 의미로 회복되는 가운데 예정론도 획기적인 회복의 시기를 맞이한다.



우선 루터나 멜랑히톤도 예정론을 받아들였으나 일관적이지 않고 앞에서 제시했던 바른 체계 가운데서 확립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빛을 보았으나 반(半)펠라기안파의 입장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 것을 보게 된다11). 그러나 우리는 칼빈에게서 성경적 예정론의 분명하고 명확한 내용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1552년 피기우스(Albert Pighius/1490-1542)와의 논쟁을 통해서 제시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여"를 작성하면서 예정론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그는 피기우스의 "자유의지에 대하여"란 논고를 논박하면서 피기우스가 중세 반(半)펠라기안파의 입장을 다시 교회 안에 들여놓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선 칼빈은 피기우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각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되어 있는 은혜에 참여하느냐 안 하느냐는 우리들의 자유이다. 누가 선택되고 누가 버림받느냐 하는 것의 신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의 자기의 의지 여하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결정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그밖에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고 단지 각 사람의 개인적 의지에 의하여 이같은 차별이 발생하는 것이다".12) 



칼빈은 이런 피기우스의 논고에 대해서 "광기와 철면피 얼굴을 겸한 사나이 간벤의 아들 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립하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에로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영원한 멸망에로 정하신 바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지를 전복(轉覆)하려고 노력하고 있다"13)라고 평가하면서 이런 입장을 논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특히 칼빈은 피기우스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를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를 파괴하려고 하는 행위에 대해서 이런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얼마 중요한 일인지는 다음의 말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피기우스는 내 이름을 들어서 공격하였으며 또한 내 사타구니를 통해서 경건하고 건전한 교리를 찌르고 쑤셨기 때문에 나는 이 사람의 모독적 광기를 억제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14)



이 외에도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이 예정론을 침묵하거나 또는 이 교리에 위험성이 있다고 해서 이것을 부인하는 행위가 얼마나 악한 행위인지를 날카롭게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는 표현들을 통해서 칼빈이 이 예정론을 바르게 교회 가운데 가르치고 전달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인식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당시 교회를 세우는 기초로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폐해를 없애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들은 예정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는다. 암초를 피하듯이, 그들은 이 문제를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 그러나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일 수 있으며, 알리지 않았어야 좋을 것을 공표 했다고 성령을 비난하고 우습게 여기는 자로 우리는 보여지게 될 것이다. 

불경한 사람들은 예정에 관해서 갑자기 어떤 점을 붙잡고 비난하며 욕하며 떠들어대며 조롱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 그들은 이 예정론 논의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위험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고를 방해하며, 믿음을 흔들며 속마음을 어지럽게 하며 공포심을 불어넣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어거스틴도 예정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난을 여지없이 반박했다. -- 다만 내가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정하기를 바라는 점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주께서 비밀로 그대로 두신 것은 탐색해서는 안 되는 동시에, 공개하신 것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약한 영혼들을 어지럽게 할까 해서 조심하기 때문에 또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정을 아주 묻어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어리석고 사려가 없다고 비난하는 그 교만을 어떤 애매한 구실로 덮을 것인가? 그들의 태도는 마치 자기들이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느끼는 그 위험성을 하나님께서 예견하시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정의 교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교회에 해로운 일을 지각없이 누설하셨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이다.15) 



이처럼 칼빈은 성도들에게 예정론을 가르치지 않거나 또는 어렵다고 해서 이상한 형태로 변질시켜서 가르치는 행위를 분명한 죄악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은 예정론을 가르치는 자가 교회에서 가장 이상한 목사로 취급을 받고 있으니 우리의 신앙내용이 얼마나 종교개혁적인 정신에서 멀어져 있는지를 더욱 느끼게 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칼빈이 이 예정론이 성도의 전체 신앙적 체계 가운데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강조한 말을 지적하면서 본 항을 정리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한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이 원칙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으며, 진정한 겸손을 얼마나 감소시켰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6)



(3) 신앙고백서(도르트 신조)

칼빈을 통해서 참된 성경적인 예정론의 교리가 개혁교회 안에 밝히 드러났고 또한 그 자리를 정립하게 되었는데 교회의 역사는 오래지 않아 또다시 반(半)펠라기안적예정론 때문에 큰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1618-9년에 소집된 도르트 총회의 역사이다. 본 총회는 "도르트 신조" 또는 "칼빈주의 5대 교리"라는 명칭으로 더욱 많이 소개되기도 했다. 이 총회의 교리사적 가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제의 발단은 야콥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예정교리에 '타락전 선택설'을 첨가했던 베자에게 베웠으며, 158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목사가 된 후, 그는 벨직 신앙고백의 개정작업에 참여한 바있는 유니우스(Francis Junius)의 계승자로 1603년에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17) 이런 가운데 자유사상가 더크 쿠른헤르트(D. V. zoon Koornheert)는 개혁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예정론'을 부정하는 일이 일어났다. 따라서 그의 저서를 검사하라는 암스테르담 시장의 요청을 알미니우스가 받았는데, 오히려 알미니우스는 그 내용이 더 설득적이라고 생각하고 보편적 은총과 구원에 있어서의 의지의 작용을 역설하였다. 그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부인하고, 원죄교리를 약화시켰으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벨직 신앙고백서의 수정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철저한 예정론을 고수하고 있던 당시 동료 교수 프란시스 고마루스(F. Gomarus)와 공개적인 논쟁을 하였는데, 사실 고마루스는 알미니우스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사람이었으나 최대의 적수가 되고 만 것이다.18) 이러한 논쟁이 불붙어 가자 그는 정부가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공적으로 논쟁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처럼 알미니우스와 개혁교회와의 논쟁은 1609년 알미니우스가 사망하므로 써 잠시 중단되었다. 그로 인해서 알미니우스 신학은 17세기 초엽에 철저히 개혁교회에 의해서 분석 당했고 그의 주요 저서는 대부분이 출판을 금지 당하게 되었었다. 그 후에 요한 위텐보가르트(John Uytenbogaert)가 이끄는 43명의 알미니우스주의 목사들은 1610년에 희합을 가지고 탄원서 즉 항변서를 작성했고 자신들의 지위를 보호해 줄 것을 홀란드 정부에 요구했다. 아울러 그들은 (당시 화란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벨직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신조가 항변서의 입장을 따르도록 변경해야 한다고 교회에 청원하기까지 했다.19) 이때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5가지로 천명했는데, 그 다섯 가지 내용 중에 비(非)성경적 예정론이 핵심적으로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믿고자 하고 이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전체적이므로 이 선택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할 뿐, 그 외의 다른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 성경이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그 기쁘신 뜻대로 택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뽑으셨다고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가능한 조건들로부터 또는 모든 사물의 질서로부터 믿음의 행위를 주셨다는 뜻이다. -- 믿음에 이르도록 선택을 받는 조건에 있어서는 먼저 인간은 영생을 얻는데 합당한 올바른 본성을 가지며 경건과 겸손과 온유한 성품을 가져야 하는데, 마치 선택은 이러한 성품들에 의존해 있는 것과 같다. --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불완전하고 비(非)결정적인 상태로 택함을 받았다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예지된 믿음과 회심, 거룩함, 경건함 등의 생활 등을 이미 시작했거나 얼마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20)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 구성된 알미니안주의의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에서 평가해 볼 때, 도르트 총회의 평가처럼 이것은 펠라기안주의와 반(半)펠라기안주의의 재현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알미니안주의 신학은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고유의 권한과 능력을 축소시키고 오히려 인간의 자리를 더욱 높이 제시하려고 했던 인간중심적 신학체계를 세우고자 했던 시도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알미니안주의는 당시 17세기에 시작된 사상이 아니라 교회역사의 초기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어 왔던 사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의 예정론에 대한 평가를 확인해 보면서 이들이 정통적으로 가르쳐져 왔던 예정론의 내용을 얼마나 악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도르트 총회의 선언문에서 알미니안주의 자들이 정통적 예정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고 요약해 주는 말에 다음과 같이 잘 제시되어 있다. 



예정론과 여기에 첨가된 몇몇 요소들에 관한 개혁교회의 교리는 그 특징적인 경향에 비춰 볼 때 사람들에게서 모든 경건한 신자의 의무를 무시해 버리고 있으며, 이 세상적인 사단에 의해 조작된 일종의 마취제이다. 또한 이것은 사단의 견고한 요새이며, 여기에서 사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며 실망과 나태함의 화살로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며, 하나님을 죄와 불의의 원인으로 돌리며 또한 하나님을 폭군이요, 위선적인 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 이 예정 교리는 그 어떤 것도 택함 받은 자의 구원을 방해할 수 없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온갖 흉악한 범죄를 마음대로 자행하도록 유도되고 있다.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알미니안주의 자들의 말을 보게 되면 이들이 정통적인 개혁교회의 예정론을 얼마나 싫어하고 거부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특히 "사단에 의해 조작된 일종의 마취제"

라는 표현은 이들의 악함에 대한 최고 절정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도전이 교회를 더욱 혼란하게 한 이유는 위에서 본 것처럼 이들이 겉으로는 예정론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통적으로 개혁교회 안에서 인정해 온 예정론인 「예정예지」의 형태를 주장하지 않고 이것을 변형시켜서 「예지예정」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더욱 깊은 주의와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정론을 말하면서도 알미니안적방식의 예정론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들의 이런 입장을 정통적 교회가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도르트 신경은 벨기에 교회에서 논쟁되어 왔던 다섯 조항에 관한 정통 교리를 분명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선언한 것이며, 동시에 얼마 동안 말썽을 일으켰던 잘못된 주장을 지적하여 이를 배격한 것이다. ---이 도르트 신조는 모든 진리와 공의와 은혜를 거스린 채 사람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말로 현혹시키려는 몇몇 사람들의 잘못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이상과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 즉 개혁교회가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 더 나아가 종교 회의에서는 개혁교회의 참 신앙고백을 중상 모략하고 거짓 증거를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그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상하게 하고 진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적 개혁교회에서는 예정론을 아예 거부하는 펠라기안적 내용이나 또한 예정론을 변형된 형태로 받아들이는 반(半)펠라기안적이며, 알미니안주의적인 내용들 모두를 비(非)성경적인 거짓된 가르침으로 철저하게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격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도르트 신조의 입장은 1647년에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다시 한번 역사적 개혁교회의 참된 신앙 내용으로 즉 사도적인 전통을 따라 이어져 내려온 참된 성경의 내용임을 재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들어오게 되면 도르트 신조에서보다 더 명확하게 예정론에 대한 바른 의미가 확고하게 정립되어 고백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즉 앞에서 베트너의 지적처럼 칼빈주의 안에서 바른 교리적 체계를 가지고 예정론이 전체 교리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그 독특성과 중요성이 정확하게 이 신앙고백서 안에 제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핫지(A. A Hodge)의 지적처럼 철저하게 알미니안주의의 「예지예정」을 배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당시의 왕실파가 칼빈 사상을 버리고 이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당 시대의 주 세력으로 등장한 카톨릭의 신앙표준서들의 신학적 입장은 아르미니우스 사상이다"21)라고 지적하면서 영국에서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고백하면서 얼마나 철저하게 이 알미니안적인 예정론을 배격하려고 했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4) 현대 교회에서의 예정론 가치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예정론의 입장은 17-18세기를 거쳐오면서 또다시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즉 17세기와 18세기 동안에 성장해 나간 모든 소종파들과 종교운동들이 거의 모두가 그 성격상 알미니안주의적 예정론에 그 기초를 마련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에는 자연신론(deism), 퀘이커 사상(Quakersim), 경건주의, 감리교 사상(methodism), 신비주의, 은사운동 등에 다 적용되고 있음을 바빙크는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다.22) 이로 인해서 바빙크의 다음과 같은 지적처럼 19세기에 이르러 서는 정통적인 역사적 개혁교회의 예정론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전의 모든 시기의 모든 개념들이 오늘날의 신학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영원히 시간 이전의 기간이라고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근거에서 예정의 작정을 완전히 부인하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의 작정이 있었고, 준비되어졌다고 여겨서는 안되고, 선택과 유기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예정은 시간 내에서 계시된 영원하고 내재적인 신적 활동과 통치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작정은 역사의 사실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시간과 영원, 하나님과 우주 사이의 모든 구별이 사라지고 유신론이 범신론으로 대치되어졌다.23)



특히 19-20세기에 와서 정통적 개혁교회 예정론을 변질시킨 형태로는 벌콮의 지적처럼 슐라이어막허와 칼 바르트를 들 수 있다. 먼저 벌콮은 슐라이어막허에 의해서 예정론이 다음과 같이 변질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슐라이어막허의 시대 이후로 예정론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변했다. 종교는 절대 의존 감정으로, 즉 모든 인간의 결심과 행동들을 미리 결정하는 불변적인 법칙들과, 이차적인 원인들을 가진 자연질서에 고유한 인과율(cauality)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예정은 자연히 세계 내에서의 보편적 인과 관계나 이러한 선(先)결정(범신론적 운명론)과 동일시되었다"24). 



다음으로는 바르트의 예정론을 지적하고 있는데 벌콮은 비록 바르트가 예정론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의 예정론은 어거스틴과 칼빈의 예정론과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바르트는 이 예정론이 하나님의 선택과 계시, 소명 등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기는 하나 바르트는 예정에서 사람들의 예정된 분리(선택과 유기)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특히 선택을 특별한 선택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25) 



이처럼 바르트는 예정론에 있어서, 그는 선택이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가 선택되었다고 진술하면서, 역사 선상에 나타난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속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대신한 유기의 대상이면서, 선택의 대상이요, 선택의 주체라고 언급한다. 이런 그의 입장은 오토 베버가 요약한 『칼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이란 저서를 보면, 바르트(Barth)는 칼빈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결국 분리시켜 놓았다는 비판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은 없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언급한 표현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선택받은 인간'이라서 인간에게는 첫 번 것 즉 선택과 축복과 생명을 허락하셨고, 자신에게는 둘째 것 즉, 저버림과 형벌과 죽음을 돌리시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본시 택함 받은 자와 저버림 받은 자 사이에는 구별이 없고 불경(不敬)한 자와 믿는 자 사이에 구별이 있다"라고 언급한다.26)



이와 같은 슐라이어막허와 칼 바르트를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 신학적 성격은 역사적 개혁교회의 성경적 예정론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미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펠라기안파와 반(半)펠라기안파의 신학적 입장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알미니안적인 예정론의 성격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알미니안주의와 칼 바르트의 입장을 거의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재 한국교회의 현장을 생각할 때 칼빈주의적 예정론이 거의 소멸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신비주의를 통한 알미니안적 영향들 때문에 오늘날 성경적 예정은 극단적이고, 무익하며, 교회에서 가르쳐서는 안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론



지금까지 본인은 예정론의 교리사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참되고 바른 성경적 예정론를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질시키려고 했던 펠라기우스도 문제가 되지만 반(半)펠라기우스와 그리고 그 성격을 같이하는 알미니안주의가 더 심각하게 이 예정론를 변질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개혁신학의 예정론을 연구해 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알미니안적 예정론과 개혁신학적 예정론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잘 정립하는 것이 매우 큰 과제로 남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자칫 예정론을 바르게 정립하지 못하면 여전히 알미니안주의의 방식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한국의 모든 교회가 신학적 성격으로 알미니안주의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는 풍토 속에서는 더더욱 이 차이를 명확히 정립하면서 역사적 개혁신학의 예정론을 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은 오늘날 알미니안주의의 예정론 선에서 예정론을 언급하면서 중도적인 선을 표명하고자 하는 많은 주장들이 있지만 이런 입장도 철저하게 배격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예정론의 교리사적인 고찰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참된 성경적 예정론이라고 인정되었던 역사적 개혁신학 안에서의 예정론은 이런 방식을 철저히 거부하고 배격한 방식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처럼 철저하게 역사적 개혁신학의 선에서 예정론을 말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알미니안주의의 예정론 형태가 전교회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말하고 가르치고자 했을 때는 위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희생과 순교의 각오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이런 길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어도 이 길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이 진리의 내용이 참된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분의 진리가 가리워지거나 변질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미주



1) Loraine Boettner, 칼빈주의 예정론, 김남식, 홍의표역, 베다니, 1996, p. 17.

2) Inst 3.21.1.

3) Inst 3.21.3

4) A.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p. 2.

5) Louis Berkhof, 조직신학(上), 권수경, 이상원역(譯),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p. 311.

6) Ibid. p. 312.

7) Ibid.

8) Inst 3.22.8.

9) Inst 3.22.8.

10) 벌콮도 이런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하나님의 예정의 열매인 이 은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선에 따라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요, 인간의 공로에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Louis Berkhof, 기독교교리사, 신복윤역, 성광문화사, 1994. p. 239). 

11) Louis Berkhof, 조직신학상(上), op. cit., p. 312.

12) John Calvin,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죤칼빈의 신학논문), 김진수,김기수역, 생명의 말씀사, 1991. p. 315.

13) Ibid. p. 313.

14) Ibid. "이 이상한 전염병(피기우스의 논고)이 퍼지지 않도록 저들이 좋게 나쁘게 저들 자신과 타인을 기만하고 있는 쓸데없는 반대론을 묶어서 손쉽게 논파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Ibid. p. 314).

15) Inst 3.21.3-4.

16) Inst 3. 21. 1.

17) "네덜란드의 칼빈과 칼빈주의", W. Robert Godfrey저, 칼빈이 서양에 끼친 영향, 스탠포드 리드편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7. p. 122.

18) 성경과 신조, 박해경저, 아가페문화사, 1991. pp. 184-185.

19) 칼빈주의의 5대 강령, 데이비드 스탈리, 커티스 토마스공저, 생명의 말씀사, 1990. p.15.

20) P. Sachff, The Creeds of ChristendomⅢ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Co, 1998). pp. 556-558.

21) A.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p. 17.

22) Herman Bavinck, 개혁주의 신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 514.

23) Ibid. pp. 530-531.

24) Louis Berkhof, 조직신학(上), op. cit., p. 313.

25) Ibid.

26) 오토 베버저,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김광식역,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 107-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