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역사서

민족을 구한 왕후 에스더 1-9

은바리라이프 2019. 2. 13. 12:59




구미정 (기사입력: 2010/01/22 13:44)

1


마침내 유다 나라가 망했다. 훌다의 예언이 적중하고야 말았다. 요시야의 종교개혁도 급변하는 세계 정세의 흐름에 떠밀린 유다의 운명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 기울여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주께로 돌이킨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열왕기하 23:25)고 성서기자가 입에 침이 마르게 극찬한 왕이건만, 요시야의 말로는 지극히 허무했다. 그는 이집트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뜬금없이 웬 이집트인가? 당시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유다를 괴롭혀온 최초의 세계제국 앗시리아가 신흥제국 바벨론에게 패망하던 무렵이다. 기원전 612년,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어 하란으로 수도를 옮기자, 동맹국인 이집트의 느고 2세가 앗시리아를 돕기 위해 북진했다. 아마도 느고는 바벨론 제국을 견제할 요량으로 앗시리아와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앗시리아로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땅을 거쳐야 하는 게 문제였다. 이스라엘로서는 눈엣가시인 앗시리아가 망하기만을 노심초사 바라는 터에, 그 앗시리아를 돕겠다고 나선 이집트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이 이집트 군대가 지나가는 길목인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요시야가 사망하자, 유다의 운명은 급속도로 패망을 향해 치닫게 된다.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요시야의 아들들이 (맏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왕위에 오르지만,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완전히 멸망당하는 참극이 벌어지고야 만다. 시드기야가 다스리던, 기원전 587년의 일이다. 
이후 시대를 소위 ‘포로기’라 부르는 이유는, 바벨론 제국이 예루살렘의 지배 계층이었던 왕족, 귀족, 사제, 지식인, 기술자 등을 포로로 붙잡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본토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이나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게 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비하면,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극히 소수이기 때문에, 이 시기를 ‘포로기’라 부르는 데는 무리가 있다. 하여, 포로 축에도 못 낄 만큼 평범한 민초들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를 그저 ‘식민지 시대’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기’라는 명칭이 자연스럽게 통용된 데는, 현재 남아 있는 문서들이 모두 포로로 끌려간 식자층의 산물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명칭이야 어떻든지 간에, 여기서는 다만, 그 막강한 바벨론 제국도 페르시아 제국에게 패망하였다는 점만 기억하도록 하자.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330년에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당한다. 역시 권력 무상!)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이른바 다문화 포용정책을 편 것 같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왔던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자유와 언어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 시절에 당했던 신사참배니 창씨개명이니 하는 엄청난 수모와 치욕을 생각한다면, 고레스의 융화정책이 얼마나 통이 큰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심지어 그는 유대인 포로들의 본국 송환을 추진하기도 했다.(BC 538년) 

이제 드디어 아하수에로 왕이 등장할 차례다. 페르시아 제국의 제5대 왕으로, 기원전 485년부터 465년까지 다스렸다. ‘위대하다’는 뜻의 이름마따나, 당시 그가 다스린 땅은 인도에서 구스(에티오피아)까지 127도였다고 한다. 헬라식 이름인 ‘크세르크세르’(Xerxes)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이제부터 우리가 살펴볼 <에스더기>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다. 
사실 <에스더기>는, 이를테면, 얼마 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었던 TV 드라마 <선덕여왕>과 비슷하다. 내용 면에서가 아니라 역사성 면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고서, 그것이 마치 실제 역사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사람이 없듯이, <에스더기>도 장르상 ‘단편소설’에 속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궁켈(H. Gunkel)같은 학자는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에스더기>를 ‘역사소설’로 분류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전한 공상소설로 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하수에로 왕이 180일 동안 계속 잔치를 벌였다는 대목도 그렇고(에스더기 1:4), 왕후로 간택되기 위해 궁에 들어간 처녀들이 1년 내내 몸매 관리를 했다는 얘기도 그렇고(에스더기 2:12), 하만이 세운 교수대의 높이가 25미터나 된다는 것도 그렇고(에스더기 5:14), 대제국 페르시아 안에서 소수민족인 유대인들이 7만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몰살했다는 기록도 그렇고(에스더기 9:16), 너무 많은 부분이 ‘픽션’(fiction)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모르드개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붙잡혀 온 인물이라는데(에스더기 2:6), 그러면 도대체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다는 소린가? 급기야 역사적으로 아하수에로의 왕후 명단에서 에스더나 와스디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지적에 이르면, <에스더기>의 역사성은 의심 받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구미정 (기사입력: 2010/02/08 13:07)
  2

◇구스타프 도레, <아하수에로 왕의 명열에 불순종한 왕후 와스디>, 판화
정경에서 <에스더기>의 위치는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역시 이 책을 맹렬히 거부했다고 한다. 역사적인 기술로 유효하지 못할 뿐더러, 전체 내용에서 하나님에 대한 말이 한마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적으로 지키는 3대 공식 축제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외에 관습적으로 지키는 비공식 축제인 부림절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정경으로 채택되었을 확률이 높다. 
부림절이란, <에스더기>에 따르면, 아하수에로 왕의 충복으로 있던 하만이 유대인들을 몰살시킬 날을 잡기 위해 주사위의 일종인 ‘부르’를 던진 데서 유래되었다. 

그러면 하만이라는 작자는 도대체 왜 유대인 몰살 정책을 사주한 것일까? 
그리고 이 숨가쁜 정치적 술수의 한복판에서 에스더의 역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정도 호기심만으로도 벌써 <선덕여왕>에 버금가는 영화 한 편은 너끈히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자, 그럼 이제부터 카메라를 돌려본다. 첫 번째 장면은 호화로운 연회장. 등장인물의 숫자만도 어마어마하니, 이 정도면 블록버스터 되시겠다. 카메라, 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잔치를 벌인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페르시아와 메대의 장수들과 귀족들과 모든 지방 총독들을 다 불러놓고, 왕국의 부요와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벌인 잔치인지라, 장장 180일이나 흥청망청 계속된 초대형 잔치다. 이 기간이 끝나자, 왕은 수산에 있는 백성을,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모두 왕궁 정원 안뜰로 불러들여, 다시 이레 동안 잔치를 베푼다. 이때 정원에 둘러쳐진 휘장의 색깔이며, 대리석 기둥에 그것을 매단 끈의 색깔이며,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바닥, 금과 은을 입힌 의자, 그리고 금잔으로 되어 있는 술잔 및 술의 종류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성서를 참고하시라.(에스더기 1:6~7) 나중에 영화화할 것을 고려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세세한 묘사에 혀가 내둘릴 정도다. 
이 대목에서 아리따운 왕후 와스디가 등장해주어야 한다.(그래야 영화가 지루하지 않다.) <에스더기>에서 웬 와스디냐고? 에스더가 등장하려면 아직 멀었다.(본래 주인공은 무대에 늦게 나타나는 법이다.) 에스더는 와스디 왕후가 폐위된 다음에 대타로 왕후에 오른 셈이니, <에스더기>를 제대로 읽으려면 와스디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에스더의 그 유명한 대사, “죽으면 죽으리라”(에스더기 4:16)라는 말이 실감나게 이해된다. 
이레째 되는 잔칫날, 거나하게 술을 마신 왕은 기분이 좋아지자, 자기 수하의 일곱 내시들에게 명하기를, 와스디 왕후를 모셔오라고 한다. 무슨 정사를 의논한다든가(물론 가부장제가 지엄한 그 당시에 ‘수염도 안 난’ 여인네와 정사를 논의한다는 것이 가당찮기는 하지만), 급하게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할 게 있어서 부르는 것이 아니다. 성서는 어찌 그리 아하수에로 왕의 속내를 시시콜콜 다 아는지, 친절하게도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 “왕후가 미인이므로, 왕은 왕후의 아름다움을 백성과 대신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에스더기 1:11) 아하, 그러니까, 왕후의 관까지 쓰고 성장 차림으로 오라고 부른 이유가 고작해야 와스디의 외모를 과시하고 싶었던 거로구나. 
때마침 와스디 왕후도 내로라하는 세도가들의 부인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말하자면, 놀고 있던 게 아니라, 나름대로 일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그 일을 중단하고 오란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앞서 성서가 아하수에로 왕의 속내를 그리 소상히 밝혀줄 만큼 친절했다면, 이 부분에서도 동일한 친절을 베풀어주면 좋으련만, 어쩐 일인지 성서 기자는 와스디에게서 말과 생각을 제거한다. “왕후는 … 듣고는 … 거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화가 몹시 났다. 마음 속에서 분노가 불같이 치밀어 올랐다.”(에스더기 1:12) 
‘들었다’와 ‘거절하였다’, 두 동사 사이를 잇는 와스디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이런 것 아니었을까? “지금 미인대회를 열자는 겐가? 왕후인 나를 한낱 인형 취급하다니…. 여봐라, 가서 왕께 고하여라. 나는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노라고. 나는 왕의 노리개나 장식품이 아니고, 페르시아의 국모니라.” 써놓고 보니, 마지막 문장에서 살짝 ‘명성왕후’ 필이 나는 게 좀 ‘오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와스디는 적어도 지조 면에서는 명성왕후를 닮은 게 분명해 보인다. 
여성에게 ‘인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을 그 시절에, 이렇듯 자기주장이 강한 여자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와스디의 태도는 아하수에로 왕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얼굴 좀 반반하다고 예뻐해 주었더니, 감히 나한테 기어오르고 도전한단 말인지?’ 왕은 법에 밝은 측근 전문가들을 소집하여 왕후 문제를 논의한다. 늘 왕과 직접 대면하여 의견을 나누는, 높은 벼슬의 일곱 대신들도 부른다. 참, 할 일도 되게 없는 인간이다. 



3

구미정 (기사입력: 2010/02/25 14:41)

◇강릉 오죽헌에 있는 신사임당 영정.
“와스디 왕후가 왕명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를 법대로 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오?” ‘법대로’라는 말은 합리와 정의를 상징하는 수사(修辭)여야 옳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인권이 실종되고, 정이 메마르고, 사랑이 없는 현장에서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말은 때로는 가혹하고, 또 때로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는다. 
므무간이라는 대신이 왕과 다른 대신들 앞에서 대답한다. “와스디 왕후는 임금님께만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께서 다스리시는 각 지방에 있는 모든 신하와 백성에게도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왜? 왕후가 왕의 명령에 불복한 이 일이 온 나라에 알려지면, 여자들이 당장에 “남편들을 업신여기게 될 것”(에스더기 1:17)이기 때문이란다. “페르시아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가 한 일을 알게 되면, 오늘 당장 임금님의 모든 대신에게도 같은 식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러면 멸시와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되풀이될 것입니다.”(에스더기 1:18) 
이런 걸 두고 ‘침소봉대’라고 하던가? 술 취한 남편의 황당한 부름을 거절했기로서니, 뭐 이리 호들갑인가? 그 남편이 하필이면 왕이라서 그럴 게다. 하기야 필부들도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가부장적 교리의 충실한 하수인이 아닌가? 그런 판에 감히 왕후가 왕의 명령을 어겼다면, 이것이야말로 도저히 묵과할 수도 없고, 묵과해서도 안 되는 ‘큰일’에 해당하겠다. 하늘을 떠받들어야 하는 땅이 감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대들었으니, 이참에 강도 높게 응징하여, 다시는 그처럼 우주적 질서를 거스르는 당돌한 여편네가 나오지 않도록 본보기로 삼아야 마땅하겠다. 확실히 제국의 생리는 가부장제의 생리와 나란히 가는 법. 
‘법대로’ 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므무간의 대답인즉, 새로 법을 제정하자는 거다. 아마도 페르시아 역사상 이런 선례가 없었던가보다. 새로 법을 정하되, 절대로 고치지 못하도록 하셔야 할 줄 압니다, 쐐기를 박는 걸 보니, 그 므무간이라는 작자, 평소에 여자들한테 꽤나 맺힌 게 많았던 모양이다. “왕의 칙령이 이 큰 나라 방방곡곡에 선포되면, 낮은 사람이고 높은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여인이 저마다 자기 남편에게 정중하게 대할 것입니다.”(에스더기 1:20)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이 팍 상해 있던 아하수에로가 딱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게다. 왕은 즉시로 모든 지방에 조서를 내린다. “남편이 자기 집을 주관하여야 하며, 남편이 쓰는 말이 그 가정에서 쓰는 일상 언어가 되어야 한다.”(에스더기 1:22) 이 대목에서 왜 갑자기 사도 바울의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도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자는 조용히, 아주 순종하면서 배우십시오.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디모데전서 2:11~12)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십시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하십시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4:34~35) 예수 안에서 누리는 복음의 자유보다도 공동체의 질서가 더 중요했던 바울로서는 어쩔 수 없이 가부장제의 논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자기한계가 있었던 것일까? 아무튼 아하수에로 왕의 칙서와 사도 바울의 편지가 거두절미하고 시공을 초월하여 공명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와스디는 괘씸죄에 걸려 추방당한다. 너그럽게 덮으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덮을 수 있는 해프닝이건만, 이를 ‘사건’으로 확대재생산하여, 와스디에게 선동죄까지 뒤집어씌운 간신배들에 의해 축출 당했다. 우유부단하고 교활한 왕이 귀가 얇은 척 하면서 사실은 남의 손으로 코를 풀고자 획책한 것도 와스디를 출궁(出宮)시키는 데 한몫 했으리라. 요컨대, 와스디는 가부장적 질서의 수호자인 양, 자기네 입맛대로 법과 도덕을 주무르는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감안하면, 우리 역사에도 그런 비슷한 보기가 있었던 것 같다. 장희빈과 인현왕후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난 보기 말고, 은밀하게 숨겨진 보기가 사실상 더 무서운 법인데, 그 대표적인 게 바로 신사임당의 경우가 아닐까 싶다. 5만 원짜리 지폐에 떡하니 도안인물로 들어가 있는 ‘현모양처’ 말이다. 어쩌다가 그토록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꾸렸던 조선의 페미니스트가 ‘만들어진 현모양처’로 둔갑했을까? 누가 왜 그를 현모양처로 만들었을까? 




4


이야기가 잠시 곁길로 새는 감이 있지만, 기왕에 꺼낸 말이니 계속 이어본다. 사실 신사임당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한 여성이 절대 아니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일찍이 세종 때부터 사대부의 혼례를 ‘시집가는 것’으로 규정하는 중국식 친영례(親迎禮)가 도입되어 실시되고 있었지만, 신사임당은 달랐다. 남편 이원수로 하여금 ‘장가’를 오게 만들었다. 그의 부모되는 신명화와 이씨 또한 혼인하고도 16년 동안을 따로 떨어져 살면서 각자 부모를 시봉한 내력이 있으니, 사임당의 주체의식은 그 뿌리가 실로 깊다고 할 것이다. 
사임당은 혼인한 지 19년만에야 시댁에 들어가 산다. 대관령 중턱에서 친정집이 있는 강릉을 바라보며 지은 시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율곡 이이는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서 신사임당을 선비요, 예술가로 묘사한다. 부친의 행장(行狀)은 쓰지 않고 모친의 행장만 쓴 아들은 그 책에서 어머니를 일컬어 단 한 번도 현모양처로 지칭한 적이 없다. 아들에게 어머니는 다만 ‘학문’과 ‘예술’에 힘쓴 여성군자로 기억될 뿐이었다. 
그런 신사임당이 돌연 현모양처의 전형이 된 것은 아마도 우암 송시열의 플롯일 확률이 크다. 송시열은 <사임당이 그린 난초에 발하다>라는 글에서, 사임당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며 “(그림 솜씨를 보니) 율곡 선생을 낳은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임당을 일차적으로 독립적인 한 여성 예술가가 아니라, 율곡의 어머니로 자리매김하고 싶었던 거다. 이어서 그는 이 모자(母子)를 극찬한 뒤, “상곡군(上谷君)의 집안만이 앞에서 홀로 빛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은근히 쐐기를 박는다. 
상곡군이란 주희와 함께 성리학을 집대성한 송나라 정호를 뜻하는데, 그 모친 후씨(候氏)는 후덕하고 집안을 잘 다스린 여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호와 정이라는 걸출한 두 성리학자를 배출한 어머니라는 점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송시열은 중국에는 후씨 부인과 정씨 형제가 있다면, 조선에는 신씨 부인과 율곡이 있다고 맞선 것이다. 이후 송시열을 중심한 서인·노론 계열의 많은 유학자들이 사임당 예찬에 가담하면서, 사임당은 점점 실제 모습과 다르게 현모양처의 이미지로 각인되어갔다. 
그러므로 5만원권 지폐에 굳이 신사임당의 얼굴을 새겨 넣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가 현모양처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당대 현실에 저항하면서 주체적으로 학문의 꽃을 피우고 예술혼을 불살랐기 때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일부 지식인들의 지적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한번 각인되어 수백 년이나 지속된 이미지를 단박에 바꾸기가 어디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보다는 역사적 사실과 달리 구태여 왜곡된 이미지를 고집하는 이들의 마음밭이 더 문제가 아닌가? 신사임당이 의미 있는 것은, 율곡의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한 멋진 삶을 살아낸 조선의 페미니스트여서 그렇다고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게 더 큰 문제일 게다. 
바야흐로 2010년, 대명천지 밝은 이 세상에도 ‘페미니즘’의 ‘페’자 앞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은 터에, 성서의 시대는 오죽했을까? 와스디는 지금도 펄펄 살아 역사하는 안티 페미니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추방당한 것이다. 남편이 주장하면 아내가 따라야 한다는 지엄한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논리에 희생당했다. 현모양처가 아니었어도, 아들 잘 둔 덕에 현모양처로 둔갑하여 살아남은 신사임당과 달리, 와스디는 대통을 이을 아들이 없었기에 추풍낙엽처럼 하릴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냄으로써 미인대회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촉구하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한 이 땅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와스디는 확실히 하나의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다. 물론 그가 그토록 당당하게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앞으로 닥칠 후환이 얼마나 클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설마 이런 일 하나로 폐위라니, 대제국의 통 큰 왕이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스디의 존재는 여성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므무간 같은 남자들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와스디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낸 건,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이 줄어드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남성들의 집단무의식이었다. 
자신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아름다움을 절대 무기화하지 않은 여자 와스디. “아름다움도 권력이다.”라는 구호가 공공연히 유통되는 이 시대에 그의 신념은 얼마나 장하고 기특한가? 사실 아름다움은 총체적인 표현이다. 아름답다는 말은, 말하자면, ‘김밥 할머니’에게 붙여야 제격이다. 평생 김밥 팔아서 모은 쌈짓돈 전액을 대학 장학금으로 내놓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미담’(美談)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형용할 수 없는 깊이에 위치한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기껏해야 외적인 생김새를 지칭하게 된 것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닌가? 

5
여자들은 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예쁘면 다 용서되고, 예쁘면 다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얼굴에 칼을 대고, 몸에 칼을 댄다. 성형중독과 다이어트 부작용에 시달려도 좋다. 제발 예뻐질 수만 있다면! 
그런 판에 고생고생해서 다듬어진 성형미인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타고난 원본미인이라는데, 이 얼마나 감사할 노릇인가? 오죽이나 예뻤으면,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의 아름다움을 백성과 대신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다”(에스더기 1:11)고 할 정도일까? 와스디는, 마음만 먹으면,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처럼 ‘임금 위의 임금’으로 군림하면서 천하를 호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희롱당하거나 농락당하거나 이용당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백스물일곱 지방을 호령하는 페르시아의 제왕이기로소니, 여자 마음 또한 손쉽게 돈이나 권력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황금보화로 장식된 면류관이나 비단금실로 수놓아진 예복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 모든 게 수모와 굴욕의 대가라면…. 와스디는 자존감을 고고하게 지켜냈다는 점에서 실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와스디의 불운이 에스더에게 행운으로 작용한다. 와스디가 쫓겨나고 얼마 있다가, “아하수에로 왕은 와스디 왕후가 생각나고, 왕후가 저지른 일과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기가 조서까지 내린 일이 마음에 걸렸다.”(에스더기 2:1) 잔치도 끝나고 술도 깨고, 그러고 나서 곰곰 생각해 보니까, 자신의 처사가 너무 심했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하지만 대신들이 누구던가? 설령 왕이 와스디 왕후가 그리워 상사병이 났다고 해도, 대번에 환궁시켰다가는 또 “이 나라 여자들이 남편 알기를 우습게 알 것입니다. 통촉하옵소서.” 어쩌고 하면서 호들갑을 떨 위인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신들이 선수를 친다. “각 지방에 관리들을 임명하시고, 아리땁고 젊은 처녀들을 뽑아서, 도성 수산으로 데려오게 하시고, … 임금님 마음에 드는 처녀를 와스디 대신에 왕후로 삼으심이 좋을 듯합니다.”(에스더기 2:3~4) 이에 왕은 “그 제안이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하였다.”(에스더기 2:4)고 한다. 참, 귀도 얇고 줏대도 없는 왕이다. 하기야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되니, 대쪽 같은 성미의 와스디하고는 영 궁합이 안 맞았겠다. 한편, 아하수에로의 이러한 성격 덕분에 뒷날 에스더와 유대 민족이 도리어 이득을 보게 되니, 이 또한 함부로 판단할 일은 못되겠다. 
이 대목에서 모르드개가 등장한다.(거듭 강조하건대, 주인공은 무대에 늦게 오르는 법이다.) 성서는 모르드개가 얼마나 ‘정통’ 유대인인가를 힘주어 말한다.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아버지는 야일이고, 할아버지는 시므이이고, 증조부는 기스이고, … 한마디로,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다. 그렇게 지체 높은 귀족 집안의 자제이기 때문에, 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포로들을 끌고 올 적에 함께 잡혀 왔었다. 모르드개에게는 사촌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몸매도 아름답고 얼굴도 예뻤다.”(에스더기 2:7) 그가 바로 에스더. 일찍 부모를 여읜 처지라, 모르드개가 데려다가 수양딸로 삼았다는 것이다. 
성서가 굳이 에스더의 이름 앞에다가 “하닷사라고도 불린”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인 이유는 뭘까? 본래 이름은 히브리식으로 ‘하닷사’였는데, 바빌론식으로 개명한 것이 아닐까? ‘에스더’(Esther)라는 이름은 바빌론 여신 ‘이슈타르’(Ishtar)와 발음이 비슷하다. 마치 ‘모르드개’(Mordecai)라는 이름에서 바빌론 제국이 섬기는 ‘말둑’(Marduk) 신의 흔적이 엿보이듯이 말이다. 만약에 이 가설이 맞다면, 모르드개는 대단히 권력지향적인 인물일 혐의가 짙다. 그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숨긴 채, 적당한 때에 실세인 하만을 누르고 실권을 장악할 기회를 진득하니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는 의외로 빨리 왔다. 와스디 왕후가 폐위된 것이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궁녀로 들여보낸다. 그러면서 에스더에게 민족과 혈통을 밝히지 말도록 단단히 이른다. 다소 황당한 설정이지만,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 선발 기준이 가문보다도 외모만 따지는 일천한 것이기에 가능한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아마도 모르드개로서는 에스더의 미모를 이용하지 않고는 도저히 “재산도 많고, 아들도 많”(에스더기 5:11)아서 왕이 180일 동안이나 흥청망청 잔치를 벌이고 놀도록 돈줄을 대는 방식으로 권세를 휘두르는 하만을 대적할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을지 모르겠다. 
수산 궁전은 각 지방에서 뽑힌 처녀들로 득실거렸다. 그들은 “정해진 미용법에 따라서, 열두 달 동안 몸을 가꾸었다. 처음 여섯 달 동안은 몰약 기름으로, 다음 여섯 달 동안은 향유와 여러 가지 여성용 화장품으로 몸을 가꾸었다.”(에스더기 2:12) 그렇게 공을 들여 몸단장을 마친 후, 드디어 왕과 합방을 할 적에는, 그동안 머물던 별궁에서 나와 저녁에 대궐로 들어갔다가 이튿날 아침에 다시 별궁으로 돌아가서 기다려야 하는데, “왕이 그를 좋아하여 특별히 지명하여 부르지 않으면, 다시는 왕 앞에 나아갈 수 없었다.”(에스더기 2:14) ''' 

6



◇<에스더와 모르드개>, 에르트 드겔더, 1685, 캔버스에 유화 93×148.5㎝, 부다페스트 미술관
꽃다운 나이의 수많은 처녀들이 왕의 하룻밤 노리개로 소비되고 버려졌다. 대개는 아버지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혹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를 진 착한 딸들이었으리라. 꿈인 듯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다시는 불러주지 않는 임금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날밤을 지새운 궁녀들이 얼마나 많은 능소화로 피어났겠는가? 
마침내 에스더의 차례가 되었다. 에스더는 특별히 요란스럽게 치장을 하지 않아도 “누가 보아도, 아리따웠다.”(에스더기 2:15) 예상대로, “모든 처녀들을 제치고 왕의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에스더기 2:17)한 에스더는 드디어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의 자리에 오른다. 
한편, 모르드개는 “대궐 문에서 근무”(에스더기 2:21)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리 높은 벼슬아치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는 문을 지키는 왕의 두 내시 빅단과 데레스가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에스더 왕후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말하자면, 한 건 제대로 올린 것이다. 에스더는 왕에게 이 일을 고하면서 모르드개가 일러주었다는 말을 덧붙인다. 결국 두 사람의 내시는 나무에 매달아 처형당한다. 
그런데 모르드개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공로가 어쩐 일인지 하만에게 돌아간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왕은 하만을 등용하여, 큰 벼슬을 내려줌으로써, 그를 다른 대신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혔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동안 막대한 정치자금을 후원한 하만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그렇다면 타이밍이 왜 하필 그 때여야 했을까? 어쩌면 아하수에로는 모르드개와 하만 사이의 힘겨루기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잔치나 즐기고 여색이나 탐하는 호방한 왕인 양 하지만, 속으로는 강대국의 통치권자로서 전형적인 ‘분할-지배’ 방식을 구사했을 것이다. 피정복민인 소수민족들을 서로 이간질시켜서 상호비방, 상호견제를 통해 충성경쟁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 말이다. 
심지어 왕은 하만이 대궐 문을 드나들 때마다 모두 꿇어 엎드려 절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을 하지도 않았다.”(에스더기 3:2) 이에 하만은 화가 잔뜩 치밀어 올랐는데, “더욱이 모르드개가 어느 민족인지를 알고서는, 모르드개 한 사람만을 죽이는 것은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였다.”(에스더기 3:6) 그래서 페르시아 온 나라에서 모르드개와 같은 겨레인 유다 사람들을 모두 없애기 위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일지, 그 날을 받으려고 주사위의 일종인 ‘부르’를 던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 하만은 도대체 왜 그렇게 유다 민족을 깡그리 몰살하고 싶을 만큼 미워했을까? 유일한 단서는 성서가 그를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유다 사람의 원수 하만”(에스더기 3:1, 10)이라고 소개하는 내용이다. 아각이라는 이름은 사무엘상 15장에 나오는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맞서 싸운 아말렉의 왕이었다.(사무엘상 15:8) 아말렉은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못살게 군 족속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울 왕으로 하여금 아말렉을 치도록 했다고 성서는 말한다. 
당시 이스라엘의 전쟁은 전리품을 얻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신앙을 지키는 것과 연관되기 때문에, 원수를 진멸할 적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죽이되, 특히 그들의 소유를 하나도 남기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사울은 아각 왕을 죽이는 대신에 사로잡고,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사무엘상 15:9)하는 잔꾀를 부렸다. 이에 화가 난 사무엘이 직접 아각을 처형했는데, 이미 아각은 부인과 동침하여 자손을 잉태한 뒤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각의 후손들이 생겨나게 되어, 하만에 이르렀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가 유다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 유다 민족 전체를 몰살하고자 획책한 것은 자기 조상이 당한 일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사실 모르드개는 사울 왕과 똑같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 아닌가 말이다. 
하만은 자기 금고에서 은화 만 달란트를 풀어 왕에게 바치는 대가로, “열두째 달인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유다 사람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으라.”(에스더기 3:13)는 조서를 받아낸다. 그야말로 검은 거래가 아닐 수 없다. 백스물일곱 각 지방에도 각 민족의 말로 조서가 하달되어 법령으로 공포된 날, 왕과 하만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축하연을 즐긴다. 
그러나 이 일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걸치고, 재를 뒤집어 쓴 채로, 대궐 문 밖에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한다. 왕이 내린 조서가 하달된 지방마다, 유다 사람들도 모두 모르드개처럼 굵은 베옷을 걸치고서 재 위에 누워 금식하고 탄식하며 울부짖는 의식을 치른다. 공권력에 의한 민족 말살이라니,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인가? 게다가 그 공권력이란 것이 한 개인의 사적 원한을 보복하는 수단으로 행사되고 있으니, 그 얼마나 가관인가? 


7



◇왕을 알현하기 위하여 화장하고 꾸미고 있는 에스더와 그녀의 뒤에 궁전에서 후궁들을 관리하는 헤게가 있다.(Allivoli 성경에서 ca 1900)
에스더는 자기 수하의 내시 하닥을 통해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충격에 빠진다. 그런데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직접 어전에 나아가서 왕에게 탄원하도록 부탁했다는 말을 듣자, 아연실색하며 몸을 사린다. 에스더가 하닥을 통해 모르드개에게 전한 말은 이랬다. “임금님이 부르시지 않는데, 안뜰로 들어가서 왕에게 다가가는 자는, 남자든지 여자든지 모두 사형으로 다스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법은, 모든 신하들과 왕이 다스리는 모든 지방 백성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임금님이, 금으로 만든 홀을 내밀어서, 목숨을 살려 주실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나를 부르지 않으신 지가 벌써 삼십 일이나 되었습니다.”(에스더기 4:11) 
그 사이 왕은 에스더보다 더 젊고 더 아리따운 후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에스더의 침소를 찾지 않은 지가 벌써 삼십 일이나 되었다. 싫증이 난 것일까? 아예 나의 존재를 잊은 것일까? 조바심과 질투심으로 번민하던 중이다. 하필 이런 때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다. 
에스더는 성격상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여자 같다. 하기야 어릴 때 양친을 잃고 사촌 오빠 밑에서 자라야 했으니,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성격이 소심해지고 위축되었을 것이다. 에스더는 전형적인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려 있지 않은가 싶다. 모르드개의 슬하에 있으면서 그가 하는 말은 늘 그대로 따랐다.(에스더기 2:20)고 하는 것으로 보아, 와스디처럼 왕의 명령을 거역한다든가 자기 소신대로 규칙을 위반한다든가, 그런 일을 할 그릇이 못 되는 것처럼 보인다. 
에스더의 반응에 모르드개는 당황했을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키워서 왕후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았는데, 자기의 부탁을 거절한단 말인가? 모르드개가 자기와 똑같은 피식민지 포로의 신분에 있던 다니엘처럼 그렇게 종교적으로 경건한 부류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적당히 타협하면서 개인의 입신양명을 도모하는 세속적인 인물이라고 본다면, 그로서는 지금이야말로 에스더를 이용해 자기의 입지를 높이는 절호의 찬스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는 에스더의 말을 전하러 온 하닥 일행을 시켜서 에스더에게 이같이 전하라고 보낸다. “왕후께서는 궁궐에 계시다고 하여, 모든 유다 사람이 겪는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때에, 왕후께서 입을 다물고 계시면, 유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라도 도움을 얻어서, 마침내는 구원을 받고 살아날 것이지만, 왕후와 왕후의 집안은 멸망할 것입니다. 왕후께서 이처럼 왕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인지를 누가 압니까?”(에스더기 4:13~14) 
일종의 협박이고 도전이다. 왕후더러 계산을 잘하라는 것이다. 에스더가 곧 하닷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다. 이름을 바꾸었다고 해서 뿌리마저 숨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설령 왕이 왕후를 사랑해서 자신의 칙령을 스스로 위반하는 모험을 감행할 수는 있다. 그렇게 살아난들, 민족의 지지를 상실한 왕후의 정치적 수명이 얼마나 길 것인가? 양귀비도 한철이라 했다. 왕후의 자리를 넘보는 젊고 아리따운 궁녀들은 얼마든지 많다. 그러니 아직 권력이 있을 때, 그리고 유다 민족의 지지를 회복할 기회가 있을 때 잘하라는 암시다.
에스더는 두뇌 회전이 빠른 여자 같다. 지금 여기서 우물쭈물하다가는 모든 걸 잃을 수 있다. 지금은 우유부단할 시기가 아니다. 모 아니면 도! 어차피 호색한인 왕의 사랑을 영원히 독차지할 수 없을 바에야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이 명예로운 왕후로 남는 길 아니겠는가? 이만하면 한 세상 잘 살았다. 가련한 유대인 고아 소녀가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봤으면, 소위 뭇여성들의 로망인 신데렐라의 꿈을 이룬 것 아닌가? 이제 에스더 개인의 삶은 여기서 접어야 한다. 민족을 품자. 잃어버린 야훼 신앙을 회복하자. 에스더가 죽으면, 하닷사가 부활하리니. 
에스더는 하닥에게 이르기를,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라고 말한다. “어서, 수산에 있는 유다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시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게 하십시오. 사흘 동안은 밤낮 먹지도 마시지도 말게 하십시오. 나와 내 시녀들도 그렇게 금식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법을 어기고서라도, 내가 임금님께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죽으렵니다.”(에스더기 4:16) 그러자 모르드개는 나가서, 에스더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여태까지는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말에 절대순종 했다면, 이제는 거꾸로 모르드개가 에스더의 말을 따를 차례다. 
이게 영화라면, 이 부분이 클라이맥스다. 금식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에스더는 왕후의 예복을 차려 입고, 대궐 안뜰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전 안의 왕좌에서 문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던 왕이 에스더를 보자마자, 갑자기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어, 쥐고 있던 금홀을 내미는 게 아닌가? 

 

8

한동안 내 발길이 뜸했다고 그새를 못 참아 몸소 나오다니, 왕후의 체통에 이리 경거망동을 일삼아도 되오? 내 왕후를 그리 보지 않았는데, 투기가 보통이 아니구려. 여봐라, 이 일을 ‘법대로’ 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낱낱이 고하여라. … 아하수에로 쪽에서 충분히 이렇게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왕의 마음에 에스더에 대한 사랑이 시나브로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세상에 기적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게 기적이 아닌가 싶다. 
평소의 충동적인 기질대로, “당신에게라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다.”(에스더기 5:3, 6, 7:2)며 설레발을 치는 왕에게 에스더는 당장 속엣말을 털어놓지 않고, 이드거니 대응한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면 안 된다. 반전의 기회를 노리려면 무엇보다도 때를 살피는 지혜가 필요하다. 
에스더는 우선 임금님을 위해 잔치를 차리고 싶은데, 하만과 함께 오시면 좋겠다고 청한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잔치상에서 흥겹게 술을 마시다가, 왕이 또다시 에스더에게 무슨 소청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말하자, 에스더는 시치미를 뗀 채 “내일도 잔치를 차리고 두 분을 모시고 싶습니다, 그 때, 임금님의 분부대로 나의 소원을 임금님께 아뢰겠습니다.”(에스더기 5:8) 다소곳이 말한다. 
하만의 기분은 하늘을 찌를 듯이 ‘업’ 되었다. 퇴청하자마자 아내와 친구들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다. “에스더 왕후께서 차린 잔치에 임금님과 함께 초대받은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네.”(에스더기 5:12) 요컨대, 자기가 페르시아 대제국의 ‘넘버 2’라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흐뭇한데,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 바로 “대궐 문에서 근무하는 모르드개라는 유다 녀석”(에스더기 5:13)이다. 대궐을 드나들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절을 해도, 그 놈만큼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인사도 하지 않으니, 이 수모를 어찌 갚을 것인가? 그 놈만 사라진다면,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시원할 텐데. 아니, 페르시아 땅에 몸 붙여 사는 유다 민족 전체가 사라진다면, 조상 대대로 맺힌 원한이 말끔히 해소될 텐데. 
자고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간신배 곁에는 그런 부류의 인간군상만 모이는 법이다. 아내와 친구들이 하나같이 조언한다. “높이 쉰 자짜리 장대를 세우고, 내일 아침에 그 자를 거기에 달도록 임금님께 말씀을 드리십시오. 그런 다음에, 임금님을 모시고 잔치에 가서 즐기십시오.”(에스더기 5:14) 
한편 그 날 밤, 어쩐 일인지 왕은 잠이 오지를 않아서 궁중실록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대궐 문을 지키던 두 내시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 음모를 모르드개가 알고서 고발했던 사건 기록을 우연히 읽게 된다. 그리고는 정작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상도 내리지 않았던 일을 기억해낸다. 마침 궁전 뜰에는, 밤새 장대 세우는 일을 마치고 일찌감치 입궁한 하만이 서 있었다. 왕이 하만에게 묻는다. “내가 특별히 대우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하여 보시오.”(에스더기 6:6) 
어리석은 인간의 귀는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 법. 하만은 그 ‘특별히 대우하고 싶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허영심 많고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성격 그대로, 임금님께서 높이고 싶은 사람에게 임금님의 옷과 말을 하사하여 거리 퍼레이드를 하게 하시라고 권한다. 그랬더니, 임금 왈, 모르드개에게 그리 해주라는 게 아닌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하며 하얗게 질렸을 하만의 표정이란. 
그 다음은 보지 않아도 알만하다. 하만은 뭐 밟은 얼굴을 해가지고, 에스더가 차린 잔치에 참석한다. 왕이 에스더에게 무슨 청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연거푸 말하자, 에스더는 못 이기는 척 입을 연다. “나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 나의 겨레를 살려 주십시오.”(에스더기 7:3) 어차피 나라 잃은 백성, 모두가 종의 신분으로 전락한들 어떠리. 하지만 민족 멸절이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에스더는 자기의 뜻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온갖 기교를 다 부렸을 것이다. 에스더의 연기가 가장 빛을 발해야 하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 아닌가 말이다. 
결국 에스더에게 설득 당한 왕이, 감히 그런 일을 하려고 마음먹은 자가 누구냐고 묻자, 에스더가 시치미를 떼고 답한다. “그 대적, 그 원수는 바로 이 흉악한 하만입니다.”(에스더기 7:6) 드디어 게임 아웃! 그 다음부터는 역사극이 아니라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왕이 술잔을 탁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하만은 에스더 왕후에게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잠시 찬바람을 쐰 뒤에 왕이 돌아와 보니, 하만이 에스더가 눕는 침상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성질 급한 아하수에로가 오해하기 딱 십상인 포즈다. 아니나 다를까, 왕은 자기가 있는데도 저 놈이 왕후를 범하려고 하는구나, 방방 뛰며 소리친다. 


9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세운 장대에 자기가 매달리는 어이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왕은 하만의 재산을 몰수하여 에스더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관계를 알고 나서는, 자기가 하만에게 주었던 인장 반지를 모르드개에게 넘겨주어 그의 신분을 격상시킨다. 더 나아가 “나의 겨레가 화를 당하는 것을 내가 어찌 나의 눈으로 볼 수 있겠”냐며 읍소하는 에스더를 위해, 새로 조서를 꾸며준다. 그 내용인즉, “어느 성읍에서든지, 다른 민족들이 유다 사람들을 공격하면, 거기에 맞서서, 공격하여 오는 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식과 아내까지도 모두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재산까지 빼앗을 수 있게 한 것”(에스더기 8:11)인데, 유다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날은, 열둘째 날인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이라는 것이다.(에스더기 8:12) 
공교롭게도 하만이 ‘부르’를 던져 유다 민족을 멸절시킬 날로 뽑은 그 날이 유대인들에게 반전의 기회가 된 셈이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한숨이 변하여 웃음이 되었다. 그래서 이 일을 기념하여 축제의 날로 정한 것이 바로 ‘부림절’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대로라면, 당시 13일 하루 동안에 수산 도성에서만 유다 사람들이 하만의 열 아들을 포함하여 원수들을 모조리 살육한 수가 500명이었다고 한다. 그러고도 더 죽이고 싶은 사람들이 남아서, 14일 하루를 특별 허락받아, 300명을 더 죽였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는 14일에 쉬면서 잔치를 벌였지만, 수산에 사는 유대인들은 15일을 잔칫날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을 몰아가는 것은 좋은 독법(讀法)이 아니다. 성경은 그야말로 역사 교과서나 도덕 교과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에스더기>는 페르시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해 도입된 부림절의 기원을 밝히는 문학작품으로서, 식민지 시대의 유대인들이 역사의 어느 한 순간만이라도 마음껏 기를 펴고 해방을 맛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는 책이라는 선에서 읽어내면 족할 것이다. 
성경은 모르드개가 이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하여 두되,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부림절로 지키도록 지시했다고 덧붙인다. 모르드개가 이렇게 전권을 휘두를 수 있게 된 데는 당연히 에스더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에스더가 모르드개와 함께 전권을 가지고 “위로와 격려의 말이 담긴” 편지를 써서 부림절을 확정하였다고 명시한다.(에스더기 9:29~30) 그렇더라도, <에스더기>가 전반적으로 에스더보다는 모르드개를 더 비중 있게 다룬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사족처럼 붙은 10장에 가면, 에스더는 아예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고, 모든 공이 아하수에로와 모르드개에게 돌아가고 있어서, <에스더기>의 실제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가를 되짚어보게 한다. 역시 스케일이 큰 역사 드라마에서는 아무리 여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난들, 그들은 한낱 화려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을 뿐, 결국에는 남자 주인공들의 권력 암투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 얼개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든다. 
하지만 미실이 빠진 <화랑세기>를 상상할 수 없듯이, <에스더기>에서도 와스디와 에스더를 빼면 무슨 재미란 말인가? 왕명을 거역했다 하여 폐위된 와스디의 기억이 생생한 터에, 자기 역시 왕명을 거역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에스더. 그 순간만큼 와스디의 강한 성품이 그리운 때가 없었으리라. 에스더는 와스디의 불운한 그림자를 걷어내고, 겨레와 민족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개인의 안위를 위한 자산이 아니라, 겨레와 민족을 살리는 무기였다. 
끝으로 에스더가 “아비하일의 딸”(에스더기 9:29)임을 기억하자. ‘아비하일’이라는 이름은 ‘내 아버지는 전능하다’는 뜻이다. 에스더에게 육의 아버지는 무력했다. 고통당하는 딸을 내버려둔 채 덜커덕 죽어버린 무능한 아버지다. 그러나 영의 아버지는 다르다. 고통당하는 자식을 끝내 저 홀로 버려두지 않고 구원하신다. 초상날을 잔칫날로 바꾸시는 분, 힘없고 억눌린 포로들에게 해방을 선물하시는 분, 그 하늘 아버지가 참된 아버지이시다. 
‘화석류(化石榴) 나무’라는 뜻의 이름 하닷사. 골짜기 속에 숨어 있는 그 나무는 고난을 상징한다. 언어유희를 해보면, 하닷사라고 불린 에스더는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상징한다고도 풀 수 있겠다. 약자의 고난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성서의 주제는 부림절의 기원 설화에서도 생생하게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민족의 뿌리를 발견하고 개인의 운명을 겨레의 운명과 동일시한 에스더는 오늘도 아름다운 ‘별’이 되어 뭇여성들을 인도한다.(에스더의 이름풀이가 바로 ‘별’이다.) 삶의 자리가 어디든지 간에 늘 겨레와 민족을 생각하라고, 혹시 그대의 손에 권력이 주어져 있다면, 그건 약자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늘이 잠시 빌려준 것이라고, 에스더는 오늘도 핑크빛 노래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