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유다 시대는 외세에서 독립하기 위한 혁명 운동 시대와 독립 왕조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1) 마카비 혁명 시대 (B.C. 166-143)
2) 하스몬 왕조 시대 (B.C. 142-63)
- 독립유다 시대는 셀류쿠스 왕조가 유대 지역을 헬라화하려고 하자 반대하여 일어난 유대인의 독립운동에서 시작되었다.
-> 약 23년 간의 혁명 기간을 마치고, 유대인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하스몬 왕조를 세우고 난 이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점령당한 B.C. 166-63년까지의 약 100년 기간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 이 시기는 신약 시대에서 발견하는 바와 같이 정치적 성향이 매우 강한 유대교 분파들이 생겨난 때라고 할 수 있다.
- 이 시대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
-> 그러기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구약의 말라기에서 바로 마태복음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 분들이 많다.
- 그러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의 400년 공백이 있는 중간시대를 바로 이해해야 복음서에 빈번히 등장하는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이 시대는 크게 헬라주의의 셀류쿠스 왕조에 대항하는 마카비 혁명이 전개되는 시대와,혁명이 성공하고 세운 유대인의 독립국가인 하스몬 왕조시대로 구분된다.
1) 마카비 혁명 시대 (B.C. 166-143)
- 셀류쿠스 왕조의 탄압
-> 헬라정부였던 셀류쿠스 왕조는 유대 지역에 헬라 문화를 강제 이식시키기 위해 유대 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정책을 폈다.
- 이런 탄압정책은 팔레스틴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 하지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N. Epiphanes. B.C.175-163)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발에도 개의치 않고 많은 관리들을 팔레스틴에 파견하여 계속 유대인들을 탄압했고,반대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도 서슴지 않았다.
-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번제 제단을 헐고 그 자리에 이방신을 섬기는 헬라 제단을 만들었다.
- 맛다디아(B.C. 167-166)의 의거와 하시딤
-> 왕의 대리인이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모데인(Modein)지역을 방문해서 이 지역의 제사장이었던 맛다디아에게 헬라식 희생 제사를 지내라고 요구했다.
-> 그러나 마타디아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아들들과 함께 왕의 대리자와 부하들을 살해하고 북동쪽에 있는 고프나 산지로 도망을 갔다.
- 이를 계기로 해서 셀류쿠스 왕조의 정책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런 저항운동의 중심에는 헬라화에 반대하는 종교적 운동을 하던 ‘하시딤(Hasidim)’,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 이들 하시딤들은 안티오쿠스 4세의 잔인한 종교탄압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으로 보고,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향한 진노를 풀고 구원의 날을 내려주도록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 반란을 주도한 마타디아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유대인들과 함께 셀류쿠스 왕조에 대한 항전을 시작했는데,이러한 소식은 팔레스틴 지역에 퍼져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초기 유대 독립 전쟁의 발단이다.
- 맛다디아는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셀류쿠스 왕조의 군대를 괴롭혔다.
-> 그리고 그들은 셀류쿠스 왕조가 곳곳에 만들어 놓은 우상들을 파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변절한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했고 무너진 회당을 다시 건축하였다.
- 마카비(Judas’ Maccabeus BC 166-160) 혁명
-> 맛다디아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B.C. 166년에 죽자,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는 셀류쿠스 왕조에 대한 유대의 독립 투쟁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 마카비는 소규모의 게릴라전을 지양하고 셀류쿠스 정부군에 대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 B.C. l64년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시리아인들에 의해 더렵혀진 성전을 탈환하여 율법의 규례대로 정화시켰다.
-> 이것을 가리켜 유대 역사에서 ‘마카비 혁명’이라고 한다.
- 마카비는 성전을 정화한 뒤 새롭게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하고 8일간의 봉헌 축제를 지냈다.
-> 이것이 하누카(Hanukkah)라고 하는 히브리 ‘빛의 축제’(the Festival of Lights)의 시초가 되었다.
-> 이렇게 해서 성전은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모독 당한지 3년 만에 다시 회복되었다.
- 한편 유다의 종교적 순수성만이 아니라 정치적 독립을 원했던 마카비(Makkabeus)는 당시 셀류쿠스 왕조의 내분(內分)을 유도하여 점차 정치적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 마카비는 BC 162년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고, 모데인 남동쪽에 있는 엘라사에서 셀류쿠스 군과 싸우다가 BC 160년 전사했다.
- 마카비의 동생 요나단
-> 마카비를 계승한 그의 막내 동생 요나단은 제사장으로서 헬라주의자였던 알키무스(Alcimus)를 대신하여 당시 최고 종교 지도자가 되었다.
->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최고 실권을 가지는 대제사장이 되었다(B.C. 153).
- 그러나 시리아인들의 음모로 요나단은 살해되었다.(B.C. 142)
-> 요나단이 죽은 후 군사령관과 대제사장의 직분을 계승한 둘째 아들 시몬(Simon)은 시리아군과 정면 대결하기 보다는 주로 외교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로마와 조약을 맺고 원조를 받았다.
- 이로써 시몬은 유대의 독립 투쟁을 다시금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는데,마침내 B.C. 142년에는 유대 지역에 었던 시리아군을 완전히 격퇴하여 실질적인 유대의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
-> 시몬은 유대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여 하스몬 왕조를 세웠다.
-> 하스몬이라는 이름은 맛다디아의 아버지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2) 하스몬 왕조 시대 (B.C. 142-63)
(1) 시몬 (B.C. 142-134)
(2) 요한 힐카누스 (B.C. 135-104)
(3) 아르스토불루스 1세 (B.C. 104-103)
(4) 알렉산더 얀네우스 (B.C. 103-76)
(5) 살로메 알렉산드라 (B.C. 76-67)
(6)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B.C. 67-63)
(1) 시몬 (B.C. 142-134)
- 하스몬 왕조 시대(The Hasmon Dynastic Era)란 일반적으로 둘째 아들 시몬이 군사령관과 대제사장직을 겸직하며 유대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가 된 B.C. 142년 이후로부터 B.C.63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기까지 약 80년간 마카비 가문의 유대 통치 기간을 가리킨다.
->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후 처음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 마카비 형제의 마지막 인물인 시몬은 자신이 여리고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사위 아브보스에 의해 BC 135년 모반을 당해 죽게 된다.
(2) 요한 힐카누스 (B.C. 135-104)
- 시몬의 뒤를 이어 시몬의 장남인 힐카누스(B.C. 134 -105)가 유대의 최고 통치자이며 대제사장이 되었다.
-> 힐카누스는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려는 셀류쿠스 왕조의 마지막 공격을 물리치고, 유대의 통치 영역을 급속히 확대해 나갔다.
-> 힐카누스는 이미 헬라화 되었던 시리아의 속주인 사마리아와 이두매 지역을 정복하여 그 주민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 유대는 힐카누스 때에 이르러 가장 정치적인 자유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 특히 힐카누스는 주화를 발행하여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최초의 군주(君主)가 되었다.
- 하지만 이러한 힐카누스의 유대 통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건한 유대인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중요시하는 힐카누스의 정책은 율법을 바르게 준수하려는 종교적 문제는 등한시했다.
더구나 힐카누스는 왕이란 칭호는 부여받지 않았지만 최고 지도자이면서 대제사장의 직무까지 겸직했기 때문이다.
-> 힐카누스는 약 30년간 유대를 통치하며 헬라문화를 도입했는데, 결국 종교는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반목
-> 이런 힐카누스의 유대 통치에 불만을 품은 무리가 바리새인들(Pharusees)이었다.
- 왜냐하면 원래 대제사장 역할은 제사장 가문들이 반차를 따라 직분을 맡았는데, 하스몬 왕가는 그의 후손들이 이어가며 대제사장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그런데 힐카누스의 이런 정책을 지지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사두개파 사람들(Sadducees)이었다.
- 결국 유대는 마카비 가문의 통치 기간이 계속 되면서 그 통치에 찬성하는 사두개파와 반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생겨나게 되었다.
-> 이 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주의를 주장하면서도 형식주의로 흐르게 되자, 사람이 없는 광야 같은 곳에 종교적 공동체를 건설하여 금욕주의와 경건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이들이 에세네파(Essenes) 였다.
-> 세례 요한도 에세네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3) 힐카누스의 맏 아들 유다 / 아리스토불루스 1세 (B.C. 104-103)
- 힐카누스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첫 아들의 이름이 유다였다.
-> 그런데 힐카누스는 유다라는 이름을 헬라식인 아리스토불루스 라고 개명을 했다.
- 힐카누스의 뒤를 이은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B.C. 104-103년 2년 동안 짧게 유대를 다스리다 병이 들어 죽었다.
(4) 알렉산더 얀네우스 (B.C. 103-76)
- 아리스토불루스의 뒤를 이어 유다의 동생인 알렉산더 얀네우스(B.C. 103-76)가 유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 얀네우스는 자신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형의 미망인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와 결혼을 했다.
-> 현실 정치에 민감했던 진보적인 사두개파는 얀네우스를 지지했는데, 보수적인 바리새파와 대립하면서 유대의 내정이 불안하게 되면서 6년간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 내전이 지속되자 바리새인들은 셀류쿠스의 데메트리오스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 셀류쿠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대를 공격해 와서 얀네우스를 완패시켰다.
- 그러자 유대인들은 또 다시 셀류쿠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하스몬 왕가를 지지하며 얀네우스에게 막대한 자금 지원을 했다.
-> 외세를 끌어들이면 반드시 화를 불러들이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 결국 얀네우스가 데메트리오스 3세를 물리쳤는데, 얀네우스는 데메트리오스 3세와 내통하고 반란을 주도하여 외세를 끌어들인 바리새인 800명을 붙잡아 처형을 집행했다.
-> 그는 이 때 800명이 매달린 십자가 앞에서 얀네우스는 그들의 가족들 약 6,000명을 몰살하는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 이와 같은 하스몬 통치자들의 횡포는 많은 유대인들의 불만을 고조시켜 내정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 이것은 그 때 이미 세계 지배를 꿈꾸며 힘을 키워가고 있던 로마로 하여금 보다 쉽게 유대 지역을 정복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5) 살로메 알렉산드라 (B.C. 76-67)
- 얀네우스가 죽자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남편의 뒤를 이어 9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다.
-> 살로메는 두 아들 중 장남인 힐카누스 2세에게 대제사장직을 내렸는데, 이번에는 바리새파의 지지를 받았다.
(6)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B.C. 67-63)
- 살로메가 죽자 힐카누스 2세의 동생인 아리스토불로 2세는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던 형 힐카누스 2세의 실권을 빼앗고 권력을 장악했다.
-> 이 때 도움을 준 사람이 이두매의 안티파터였다.
-> 권력을 장악한 아리스토불루 2세는 사두개파의 지지를 받았고, 실권을 빼앗긴 형 힐카누스 2세는 바리새파의 지지를 받았는데, 형과 동생의 내분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의 내분으로 이어지면 하스몬 왕가의 힘은 계속 약화되었다.
- 로마 제국 폼페이우스 장군의 예루살렘 점령
-> B.C. 64년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시리아를 점령하고 팔레스틴 지역을 위협하자 아리스토불루와 힐카누스는 서로 폼페이우스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실권(失權)한 힐카누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 권력을 잡고 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폼페이우스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자 폼페이우스는 B.C. 63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세웠다.
-> 결국 유다의 독립을 꿈꾸었던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 한편 이 때 이두매 지역의 안티파터가 로마 편에 서서 도움을 주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두매인인 안티파터를 유대를 다스리는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 유대 역사에 있어 하스몬 왕조의 의미
- 처음 마카비 혁명은 셀류쿠스 왕조의 헬라화에 반대하여 종교적 자유를 추구하는 반 헬라화 운동이었다.
->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외세를 몰아내는 정치적 성격으로 변하게 되고 결국은 하스몬 왕조라는 독립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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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카비혁명 하스몬왕조 예수님오시기까지|작성자 작은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