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초기 근대 철학의 새로운 착상과 그 신학적 유용성
역사학자들은 오늘날 대략 1500년과 프랑스 혁명 사이의 시기를 그 다음 시대인 “근대주의”(Moderne)와 구별해서 “초기 근대”(frühe Neuzeit)라고 부른다. 이러한 시기 구분이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울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많은 이들은 서구 기독교 교회의 분리 시기가, 또한 그런 결과에 연유해서 발생한 종교전쟁의 시기가 중세기의 끝맺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지 아마 17세기가 근대사를 기원적으로 구분할 때 가장 심층적인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서구 기독교 교회의 분리로 인해서 발생한 종교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7세기 중엽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 시대에 일어난 수많은 철학적 착상들 중에서 특히 두 가지만이 정말 기원적 사건으로 부각되었다. 그 이외의 명제들은 다소간에 이것에 좌우되었다. 데카르트를 통한 형이상학의 갱신이 그 하나이며, 죤 로크가 기초한 철학적 경험주의를 통한 형이상학의 갱신이 다른 하나이다. 그 여파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 이 두 가지 착상에 집중됨으로써 결국 초기 근대 철학의 다른 중요한 명제들은 그저 상대적인 관련 가운데서만 논란의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자면 대단히 중요한 조직적 사상가라 할 수 있는 토마스 홉스나 헨리 모어, 그리고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쯔가 그들이며, 또한 경험주의적 착상에서 그 여파를 일으킨 데빗 흄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전체 철학사적인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와 로크를 통해서 제시된 이 두 가지 새로운 철학의 새로운 착상에 근거해서 위에서 거론된 사상가들을 정리해 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1. 데카르트(1596-1650)를 통해서 제시된 철학적 신학의 갱신과 그 후속 문제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출발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 인물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그에 앞서 쿠자누스를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시도했던 것처럼 형이상학에 새로운 토대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적 토대가 그 뒤를 이은 철학적 발전에서 단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이래로 독일 철학사의 시각은 데카르트를 그 누구보다도 칸트와 그의 인식론적인 주관주의의 선구자로 보았다. 막스 프리쉬아이젠-쾰러(Max Frischeisen-Köhler)와 윌리 무그(Willy Moog)에 따르면 수학적 박물학에 기울어진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은 “구성하는 사유의 주권에 대한 의식”에 기인한다. “이 사유하는 주관은 스스로 자유와 자기 세계로부터 새로운 문화 질서를 건설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서만 현실성과 진리의 확고한 거점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나(Ich)로부터 세계를 다스리는 힘을 갖는다.” 이러한 해석은 최소한 헤겔의 철학사 강의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거기서 데카르트는 “피히테 처럼 수순한 인식의 중심점을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이 언급되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것이 바로 모든 철학의 절대적인 기초라고 말한다.”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이런 해석은 본질적으로 마틴 하이덱거의 데카르트像을 그 기초로 한다. 하이덱거는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을 역사적으로 해설하면서 모든 확실성의 기초를 검토한 후에 존재인식에 대한 근대의 오해가 바로 “주관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에 대한 해석이 범한 오류는 그가 집필한 두 번째 명상(Meditation)에서 거론된 코기토 숨(cogito sum)의 체계적 기능이 잘못 평가된 데 있다. 요컨데 데카르트 자신은 철학의 원리에서(Ⅰ,7) 설명하기를 에고 코기토, 에르고 숨(ego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가장 우선적이고 확실한 모든 인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모든 다른 인식의 기반이 요긴하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데카르트가 1635년에 쓴 명상들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는 하나님 인식이 모든 다른 개념 형성의 기초이며, 따라서 모든 다른 인식의 기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명상에서 가리키는 바는 우리의 내부에서 발견되는 무한자의 관념이 모든 유한한 것을, 또한 각기의 나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토대를 설정하는 기능에 대해 사유하는 나의 자기 확실성에 대한 두 번째 명제 보다 고차원의 인식 토대로 지양되고 있다. 불프강 휘베너(Wolfgang Hübener)는 데카르트에 대한 프랑스의 새로운 연구와 연관해서, 특별히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와 연관해서 데카르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는데, 이는 옳은 말이다. “인간 중심적 거점을 수미일관하게 주장하는 첫 대표자로서 그에게는 모든 과학의 확실성과 진리가 참된 하나님에 대한 오직 그 한 가지의 인식에 달려 있다는 그의 명제를 단지 핑개나 아니면 세계관적 가장(假裝)이라고 누가 간주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끼어들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명상은 “신중심적 형이상학 논문이다...., 그 논문은 그 제목에서 볼 수 있는대로 이미 하나님의 실존과 영혼의 불멸성을 다루고 있다.” 두 번째 명상에 나오는 그 유명한 에고 코기토, 에르고 숨 명제는 신관을 무한자를 직관함으로써 그 토대를 세워보려는 여정의 초보일 뿐이다. 이 직관은 세 번째 명상에 따르면 장-룩 마리옹(Jean-Luc Marion)이 강조했듯이 (칸트의 생각처럼) 에고(Ego)의 초월적 토대이다. 어거스틴은 이미 사유하는 나(Ich)의 자기 확실성을 견인한 바 있는데, 이로 인해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된 셈이다. 그러나 이 길은 나의 자기 이해만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데서도 실제로 그 토대다. 고유한 나를 포함해서 모든 유한자들은 무한자의 제한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무한자의 특징을 완전함의 개념을 통해서 그것에 대한 토대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모든 제한적인 것들은 사실적 내용에 “더 많은” 것(plus realitatis)을 포한한 것보다 덜 완전하다.(Med. Ⅲ, 24). 무한자를 완전한 것과 연결시킴으로써 데카르트는 모든 다른 인식을 가능하게하는 무한자에 대한 직관이 모든 다른 사물의 토대인 하나님에 대한 의식과 일치한다고 보게 되었다.
이것이 아마도 전반적으로 명상들의 핵심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코기토 숨은 이미 어거스틴이 고대 회의주의에 맞서 제기한 논증을 짧은 양식으로 요약한 것이다. 즉 내가 나를 기만함으로써 존재한다는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에 맞서서 말이다. 이미 얀센주의자들의 지도자로서 데카르트를 비판했던 앙똬르 아르노(Antoine Arnaud)는 두 번째 명상에 나오는 코기토 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했다. 이 사상은 어거스틴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서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데카르트가 이 명제를 “자기의 전체 철학을 기초하는 것”이라는 큰 몸짓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상이 어거스틴으로부터 근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데카르트나 그 시대의 학자들에게는 알려져 있던 바였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교양에 속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깜빠넬라(Tommaso Campanella)에게는 분명했는데, 그는 1634년 로마에서 파리로 망명한 후에 데카르트와 똑같이 메르센느(Mersenne)를 중심으로 한 모임에 참가했으며, 그를 추종했고, 그를 모든 지식의 토대로 삼은 인물이었다. 데카르트는 아르노에 대한 답변에서 약간 빈정대는 투로 이르기를 깜빠넬라가 “성 어거스틴의 권위에 의지해서” 메르센느를 감싸고 있다고 말했다. 마리옹은 데카르트가 코기토 숨의 전거(典據)와 원천을 어거스틴에게 두고 있지 않는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그 사상을 다르게 사용했기 때문인다. 말하자면 영혼의 실체성을 주장하는 토대로 삼았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자기의 사상을 확실성을 찾고자 하는 단초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또한 “가장 우선적이고 확실한 모든 인식”으로 간주했더라도(Princ. Ⅰ,7) 그가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그의 독창성은 분명히 코기토 에르고 숨에 놓인 게 아니다.
데카르트 철학의 새로운 착상은 오히려 무한(infinitum)에 대한 직관이 고유한 나(Ich)를 포함한 모든 유한자에 대한 인식의 조건이라는 명제에 놓여 있다. 또한 이것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새로운 논증에 놓여 있는 것인데, 이 논증은 나(Ich)의 확실성이라는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그의 유명한 증명을 나의 확실성(Ichgewißheit)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 대한 의식에서 전제된 무한자 관념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나의 확실성은 이에 대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논증은 모든 유한을 이해하는 조건인 무한자의 초월적 우선권으로부터 출발해서 무한과 완전의 일치에 이르는 길로만 발전해 나갈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런 논증에서 하나님 증명에 대한 스콜라 철학적 전통에서 자기가 빗겨나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철학적 신론의 근거를 세계로부터 하나님의 현존을 증명하는 대안이 아니라,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수행된 것으로서 원인 사슬의 첫 마디를 하나님으로 증명하자는 말인데, 오히려 무한자를 초월적으로 직관하는 방식으로 세워나갔다. 토마스주의자인 카터루스(Caterus)의 비판에 대한 답변에서 데카르트는 자기가 신증명을 의도적으로 “감각 세계의 가시적인 질서나 혹은 활동적인 원인의 연쇄로부터 세워나간 게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증거를 그 어떤 감각적 사물에 대한 증거보다 거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따라서 원인과 활동의 무제한적인 사슬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그 어떤 것이 제일(第一)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데카르트는 원인의 줄에 제일자가 있어야만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주의의 주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 원인의 줄을 무제한적으로 소급해 나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현존적 사물의 실존은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성 토마스의 다섯 가지 신존재증명 방식(S.th. Ⅰ,2,3)이 토대하고 있는 전제에 대한 회의는 이미 빌헬름 옥캄이래로 표명된 바 있다. 옥캄은 원인의 줄로 무제한적으로 소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런 원인의 탓으로 돌렸다. 이 원인은 그 활동의 진작에서 벗어나서 그것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것들이다. 옥캄은 무제한적인 소급의 불가능성을 여전히 원인의 유지에 관련된 것으로 보고 이런 의미에서 신증명의 접합성이 세계 사물의 실존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본 반면에, 데카르트는 위에서 인용되었듯이 원인의 줄로 무제한적으로 소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는 이 논증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위에서 인용된 곳에서 이렇게 계속 언급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 어떤 원인 사슬에 의존되어 있는 현존을 내가 증명해 나가는 과업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겠다. 그것은 아무 것도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할 뿐이다.” 데카르트는 세계로부터 시작하는 전통적 신증명이 무제한적으로 원인의 줄로 소급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유지될 수 없다고 보았다. 데카르트가 정확하게 본 것처럼, 이미 옥캄에 의해서 주장된 이 사실은 관성의 원리와 더불어서 운동에 대한 근대 자연과학적 이해의 기초에서 완전히 확실해졌다.
데카르트는 세 번째 명상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무한자 이념의 신증명을 끌어갔다. 즉 이러한 표상(혹은 “이념”)에서 우리가 우리의 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이념에서 처럼 우리로부터 발생한 이념이 관건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질문이 부정된다면 우리의 영에 주어진 무한자 이념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역시 실제로 우리 외부에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무한자 이념은 우선 근원자와의 인과율적 관련에서 우리 의식을 초월적으로 그 토대를 형성함으로써 신증명이 된다. 바로 다섯 번째 명상이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증명이 된 인과율적 논증을 존재론적 증명을 통해서 보충한다. 이 증명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 생각의 내용으로부터 무한자와 연결된 완전을 뛰어넘어, 그렇게 생각된 하나님의 현존에 직접 이르는 것을 말한다.(Med. Ⅴ,7ff.). 이 경우에 고려되어야 할 사실은 현존이 최고의 완전함과 연루된 것으로 생각되어야지, 무언가 더 부가되어야 할 완전으로 생각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가장 완전한 본질은 그 본질상 ens necessarium(필연적인 존재)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최고로 완전한 본질이라는 사상은 데카르트의 명상에 따르면(Med. Ⅲ,24) 유한자에 대한 모든 인식의 조건인 무한자에 대한 직관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자에 대한 직관에서 최고의 완전자 사상으로의 전환은 데카르트 학파의 논증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 모든 유한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무한자에 대한 직관이 가장 완전한 본질에 대한 사상으로 이론의 여지 없이 전환될 수 있다면, 가장 완전한 것에 대한 사상은 우리의 불완전성에 대한 대상(對像)으로서 우리 자신에게서 발생할 수 있다는 의혹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무한자의 직관에서 데카르트는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직관이 유한한 것에 대한 모든 경험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장 완전한 것이라는 사상에서는 이러한 기조가 유지되지 못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조건으로서 가장 완전한 것을 전제하지 않고도 한정된 완전성으로부터 유한한 것들을 충분히 표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무한자를 아주 정확한 규정으로서 직관한다는 것은 모든 인식에서 구성적인 요소인데, 이러한 직관에서 가장 완전한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가장 완전한 것에 대한 생각은 우리 영이 모든 유한한 것의 불완전성에 대한 대상(對像)을 만들어낸다는 의혹에서 보호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자기 스스로에게서만 가장 완전한 것에 대한 생각은 이런 의혹에서 보호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데카르트의 경우에 무한자의 직관에서 가장 완전한 것에 대한 사상으로은 증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으로서의 무한자에 대한 직관은 거의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된 무한자는 우리가 모든 무한자의 한계설정으로 생각하는 모든 유한자와 대립하여 보다 많은 실제성(plus realitatis)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못한다.(Med. Ⅲ,24). 오히려 무한자의 직관과, 또한 무한자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현존과 비본재 사이의 차이를 초월한다.
그 다음 시대에 가장 완전한 것에 대한 개념에 반대하는 의혹이 거듭해서 제기되었는데, 말하자면 이런 개념을 형성한다는 것은 일종의 투사에 의한 결과일 수 있으며, 자의적으로 우리의 영을 증명하자는 것이지 모든 영적인 행위의 필연적인 전제가 아니라는 의혹이다. 그래서 그 뒤로 계속해서, 특별히 라이프니쯔 같은이들에게서 보는 대로, 완전 사상에서 나온 존재론적 신증명은 우주론적 증명의 한 형식을 통해서 보충되었는데, 그 결과로 가장 완전한 본질의 개념을 사용하도록 그 실질적 기반이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라이프니쯔는 우주론적 논증을 다음과 같이 설계했다. 원인의 연속에서 무한정적으로 소급된다는 논증이 모호하지만 그런 것에 대한 항소 없이, 세계의 우연성은 우연하지 않은, 즉 자기 자신에게서 존재하는 본질을 직접적으로 전제한다고 말이다. 라이프니쯔의 경우에 이런 논증은 충분한 근거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원리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제일원인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이것은 무한하기도 하고 완전하기도 한 그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근거에 대한 再질문이 출발점의 불완전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충분한 근거의 원리는 최고 완전함이라는 사상과 연관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라이프니쯔의 경우에는 최고 완전성이라는 사상이 다시 한번 철학적 신론의 중심으로 돌아간다.
17세기 데카르트를 통한 철학적 신론의 새로운 설정은 신학자들에게서 별로 이렇다할 동의를 얻지 못했다. 신학자들은 로마서 1:20을 통해서 창조의 활동으로부터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을 고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헤어질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둘러댄 구실에 불과했다. 이들은 데카르트 학파가 회의를 통해서 확실성을 찾아보려는 이 시도를 은밀한 무신론이 아닌가 의심스러워했다. 다른 한편으로 데카르트 철학의 추종자들은 즉시 그들의 역학적인 자연철학을 사용해서 성서를 해석하려고 결심했으며, 또한 성서를 새로운 자연과학에 반하는 각도에서 서술하는 것은 영감설에 영향을 받은 저술가들이 시간적으로 한정적인 세계 인식에 성령을 적용시키려는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철학의 흐름을 불신하게 된 추가적 이유가 발생했다. 최소한 성서 영감론을 이렇듯 성령과 연결시켜 보려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런 신학자들은 이런 불신을 받게 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 초에 데카르트는 코기토에 기인한 인간중심적 철학의 창설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의식의 모든 다른 내용에 대한 최고의 조건인 무한자를 직관한다는 새로운 착상으로서 철학적 신론을 갱신한 자로 간주되었다. 17세기에 자기의 공간 철학을 통해서 뉴톤에게 자극을 주었던 헨리 모어(Henry More), 말르브랑슈(Malebranche),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같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 모두는 각각 다른 강조점이 있긴 했지만 데카르트의 새로운 착상을 따랐다. 그들은 물론 피조의 영역에는 두 가지 실제가 있는데, 사고의 사물(res cogitans)과 연장의 사물(res extansa)이라는 명제에 관해서 서로간에 데카르트와 다른 해답에 도달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선 데카르트의 하나님 표상에 담긴 개개 항목들과 또한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이해에 대해서 무언가를 언급해야만 한다.
1. 데카르트는 이미 빌헬름 옥캄이 그랬던 것처럼 전능 표상을 무한하고 완전한 하나님 사상과 연결시켰다. 데카르트가 옥캄의 작품에서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물론 불분명하다. 이 경우에는 데카르트를 옥캄과 묶어주는 하나님의 무제한적인 전능 사상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주장, 즉 다른 명제가 있는데, 그것은 곧 신적인 본질의 단순성에는 의지와 지성 사이에 그 어떤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중세기 심리학이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벌인 이런 논란은 스피노자의 경우에 인격적 하나님 표상에 대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2. 데카르트의 불변성 사상은 하나님의 완전성과 밀착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이런 표상은 무제한적인 전능과 더불어서 데카르트 학파의 자연철학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획득했다. 그 표상은 1944년에 빛을 본 철학의 원리나 특히 이미 30년대 초에 집필되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 출판된 작품인 레 몽드(Le Monde, 세계)에 들어 있었다.
한편으로 데카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피조된 사물은 그 현존에 대해서, 그러나 그 현존에서 지속한다는 점에서 창조자의 전능에 완전히 의존적이다. 더욱이 현존하는 매 순간에 그렇다.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가 시간을 순간의 연속으로 본 원자론적 표상에 걸맞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불변성 때문에 모든 사물을 자신이 창조했던 그것대로 정확하게 유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 시의 상태를 보존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맡겨져 있는 그 많은 것들에서 결코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피조된 사물과 작용을 향해 잇달아 소급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통한 사물의 유지는 그 사물이 각각의 상태에서 하나님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데카르트의 관성의 원리는 바로 이것에 기인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사물은 다른 것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한 자기의 입장에서 각기의 상태를, 즉 운동의 상태나 고요의 상태를 유지한다.(Princ. Ⅱ,37). 모든 변화는 사물의 작용에서 잇달아 나온다. 사물은 운동 안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 피조되었으며, 그리고 충돌이 일어나면 자신의 운동하려는 동인을 잇달아 위탁해버리거나 억제해버린다.
데카르트의 경우에 역학적 힘을 통해서 움직인 자연상(像)은 이런 방식으로 발생했다. 데카르트는 이 자연상을 이미 1633년 레 몽드에서 구상했다. 이 작품은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재판소 설치건으로 인해서 데카르트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하고 1664년에야 빛을 보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이런 진술에 따르면 하나님은 처음에 질서가 잡힌 코스모스를 창조한 게 아니라 카오스를 창조했다. 그 카오스에서 이제 일종의 질서가 스스로 발전되는데, 우주의 질료가 나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이런 질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하늘의 형체와 태양계는 순수 역학법칙에 따라서 이러한 나선운동으로부터 생성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불변성 때문에 이런 과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비록 그가 바로 자기의 불변성을 통해서 매 순간 각각의 사물을 유지하고, 매 순간의 그 상태에 머물도록 하지만 말이다.
이삭 뉴톤은 이러한 데카르트 식의 세계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연사건의 운동 과정에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뉴톤은 이미 헨리 모어가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세계상이 무신론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위험성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를 반대하여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일종의 대안적 기본 구상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뉴톤의 의도와 달리 일세기 동안 순수 역학적 자연 묘사의 기본으로 간주되었다. 뉴톤 스스로 이와 달리 비역학적으로 작용하는 힘을, 중력처럼, 모든 운동력의 (vis impressa 종류에 따른) 궁극적 근거로 제시하고자 했다. 또한 그것을 하나님이 피조의 세계를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표현이라고 간주했다. 우리의 이성적 영혼이 우리의 몸을 움직이는 것과 같은 종류의 유비에 따라서 그렇게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공간적으로 자기의 모든 피조물에게 현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뉴톤은 1706년에 집필한 광학(Optik)에서 공간을 sensorium Dei(하나님의 감각중추)라고 했다.
하나님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뉴톤의 기본 구도는 영혼과 육체의 상호 작용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이 후세에 남긴 핵심 문제였다. 데카르트는 오직 그분만이 홀로 독립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Princ.Ⅰ,51) 피조적 실체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요컨데 substantia corporea(육체적 실체)와 mens, sive substantia cogitans(정신, 곧 사유적 실체)가 그것이다.(Ⅰ,52). 전자의 특성은 연장(延長, extensio)에 있으며, 후자의 특성은 연장이 아닌 cogitatio(사유)에 있다.(Ⅰ,52). 데카르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육체와 영혼의 결합은 외부적 연계의 성격만을 갖는다. 그리고 영혼이 실체로서 독자성을 갖는다는 것은 여섯 번째 명상에서 이러한 것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토대였다. 이 불멸성은 분리되지 않은 영혼의 단순성에서 생긴다.
레스 엑스텐자(res extensa)와 레스 코기탄스(rescogitans)라는 두 실체의 이원론에서는 어떻게 이들의 공동작용이 표상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잇달아 발생하는 직접적인 작용을 표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육체적 운동이 영혼을 분명하게 표상하도록 강요하고 있지만 말이다.”(Princ. Ⅳ,197). 육체와 영혼의 공동작용에 대한 질문에서 데카르트에게서 영향을 받은 후대의 사상가들은 상이한 해답을 찾아냈다. 말르브랑슈(Nicholas de Malebranche, 1715년 졸)는 육체적인 측면에서 변화가 이루어질 때 이에 적합한 영혼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또한 그것이 역으로도 작용한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를, 육체와 영혼을 공동으로 묶어낸 장본인인 하나님 안에서 찾았다. 한 실체의 변화는 다른 실체가 이에 어울릴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킨다. 비록 이 양자 사이에 대립적인 작용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 기초 구상은 기회원인론(Okkasionalismus)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말르브랑슈는 이 명제를 이미 1674년 진리에 대한 연구에서 제기했다. 스피노자(1677년 졸)는 이보다 몇 년 앞서 실체의 단일성론을 통해서 이 문제의 다른 해결책을 발전시켰다. 데카르트에 의해서 채택된 두 실체, 즉 레스 코기탄스와 레스 엑스텐자의 대립은, 또한 이로 인해서 공동 작용이 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스피노자가 이 양자를 불가분의 속성으로, 즉 하나님의 속성으로 간주함으로써 극복되었다. 이런 견해를 보면 이제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데카르트와 그렇게 소원한 관계는 아닌 게 분명하다. 그는 이제 정말 철저한 데카르트주의자로 자임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철학의 원리라는 책에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실체의 개념을 어떤 사물의 개념으로 엄격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사물은 “자기 실존에서 어떤 다른 사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인데, 이 실체를 “오직 유일한 것으로, 즉 하나님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눈여겨 본 것 처럼 모든 다른 것들은 오직 하나님의 조력자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체라는 이름은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마땅하지 나머지 사물에게 같은 의미로, 즉 univoce(포괄적으로) 돌아가면 안된다....”(Princ. Ⅰ,51).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을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지만 일종의 적응하는 리얼리티나 “실체”를 결정하게 하는 속성으로 파악했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이 양자의 속성을 불가분의 실체, 즉 하나님의 속성으로 간주했다. 여기서부터 이제 사유나 연장에 해당되는 무한성만 이해되는 게 아니라, 이 양자의 상호적 짝지음이 이해된다. 왜냐하면 육체와 영혼은 분명히 이 두 측면과, 또한 똑같은 사안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유한한 현상을 그저 간단히 무한한 하나님과 등치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현상을 하나이며 무한한 실체의 유한한 “Modi"(양식)이라고 간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은 범신론적이거나 혹은 무신론적인 철학으로서 숫한 도전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은 후에 헤겔이 옳게 말했듯이 그의 철학은 오히려 無우주론적인 철학으로 불려진 게 틀림 없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하나님의 존재와 논쟁을 벌인 게 아니라 하나님 말고도 세계와 세계사물이 고유하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피조물의 (물론 한계가 있긴 하지만) 독자적 현존을 창조 행위의 내적인 목표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성서의 창조 신앙과 일치될 수는 없었다. 바로 이런 점이 스피노자와 데카르트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데카르트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현존을 신적인 전능의 우연한 산물로 간주했다. 이와 달리 스피노자는 브루노(Giordano Bruno) 같은 이의 범신론적 자연철학의 전통에 섰다. 이 범신론적 자연철학은 데카르트의 수학적-역학적 자연 묘사를 매개로 수행되었으며, 1770년 익명으로 출판된 스피노자의 정치 신학론(Tractatus politico-theologicus)에서 진술된 성서비평의 기초를 세웠다. 그의 성서 비평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쯔(1646-1716)의 단자론도 역시 데카르트에 의해서 뒤에 남겨진 문제들에 대한 답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별히 육체(혹은 물체: 역주)와 영혼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이 양자가 하나님과 갖는 관계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말이다. 라이프니쯔는 데카르트에게서 볼 수 있는 철학적 신론의 새로운 착상을 늘 견지하고 있었다. 그가 비록 존재론적 신증명을, 그것은 우리의 영에 토대를 둔 무한자에 대한 (무한자의 완전에 대한) 직관에서 발생하는데, 우주론적인 증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결시켰지만 말이다. 이것은 모든 유한한 현존의 우연성을 자기 스스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에서 종결시킨다는 의미에서 이루어진다. 라이프니쯔는 자신의 고유한 길을 육체적 세계와 영적인 본질 사이의 관계에서 찾으려고 했다. 여기에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그리고 말르브랑슈는 그에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는 우연하게 존재하는 유한한 사물의 독자적인 현존이 거할 자리가 없기 때문에, 따라서 사물의 자유와 창조 사건을 일으킨 하나님의 자유가 거할 자리가 없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었다. 라이프니쯔는 말르브랑슈의 입장도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와 더불어서 한 하나님의 표상을, 그 하나님은 분명히 자기의 창조에 관여해야만 할 자인데, 창조자의 완전성과 조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완전성은 데카르트의 경우에 그의 불변성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라이프니쯔에게도 하나님의 관여 없이 나오는 자연세계의 상(像)이 떠올랐다. 이것은 그의 적수로서 뉴톤의 입장을 방어했던 세뮤얼 클라크(Samuel Clark)와는 반대 되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자연세계는 데카르트의 레스 엑스텐자 개념에 기인할 수 없다고 라이프니즈는 생각했다. 라이프니쯔에 따르면, 그 이외에도 뉴톤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생각과 달리 육체 개념이 연장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는 없다.(Descartes Princ. Ⅱ,4). 뉴톤에 이르러서야 이제 육체는 양이나 질(quantitas materiae)에 대한 특성을 통해서 규정되었다. 뉴톤은 더욱이 양(量)을 육체에 내재하는 힘(vis insita)이라고 아주 정확하게 정의했는데, 이 힘은 관성에서 (변화에 대항함으로서) 나타난다. 라이프니쯔는 육체의 양을 육체에 내재하는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뉴톤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해석은 자연의 전체성론이나 단자론의 토대를 놓았다는데, 이것은 그것들 방식대로 하나님의 원(原)단자에 대한 모사(模寫)이다. 여기서 라이프니쯔는 육체를 단자가 나타나는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레스 코기탄스와 레스 엑스탄자에 대한 데카르트 학파의 이원론을 극복했다. 물론 상호간 정의에(per definitionem) 좌우되지 않음으로써 벌어진 상이한 실체들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데카르트 학파의 난제는 라이프니쯔의 경우에도 역시 단자들이 서로간에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Monad §§63-70) 단지 신적인 원단자에 토대를 둔 세계질서를 반사시키는 것뿐이라는 형식으로 되돌아왔는데(§56), 이 세계질서는 물체의 현상이라는 차원에서 물체 사이의 역학적 관련성을 통해서 명료해진다.(§51f., 또한 §61참조). 라이프니쯔는 이것을 단자의 질서와 물체 현상의 역학 질서 사이에 있는 “예정조화”(prästabilierte harmonie)라고 했다.(§79f.).
라이프니쯔 철학이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피조적인 현실성의 이해에서 神의 의지에 대한 의존성이, 우주의 질서를 신의 지혜 안에 정초하는 것과 상대하여, 철저하게 그 배경에서 등장한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Monad.§46). 이것은 라이프니쯔가 사건의 과정에 대한 신의 관여를 거절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의기투합했으며,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자연질서에 반하는 사건으로서- 기적을 배제해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기적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상,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지혜에 토대를 둔 우주의 질서에서 예견되었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쯔는 1710년 신정론에서(Ⅰ,21) 이르기를, 피조적이며, 또한 유한한 존재의 불가피한 불완전성에 그 토대를 둔 죄와 악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렇지만 라이프니쯔는 상이한 가능성 중에서 선택할 자유가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했다.(Ⅰ,52). 이 자유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예견되었으며, 이런 결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지혜에 토대하고 있는 우주의 질서를 구성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레스 코기탄스와 레스 엑스탄자를 구별하고 있는 데카르트의 난제들은, 또한 그런 구별로 인해서 라이프니쯔에게까지 따라오는 해결책의 상이성들은 모두가 실체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는 데에 달려있다. 이런 존재자들은 다른 실체들에게 (하나님을 제외하고) 의존적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런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실체 개념이 나중에 제시된 해명과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 관계들은 여전히 실체의 우발적인 규정이라고 이해되었다. 역으로 실체 개념 자체가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즉 우발적인 것의 대개념에 의존적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고 말이다. 이런 통찰은 칸트에 의해서 틀이 잡혔다. 이러한 방식에서 우선 질적인 차이가 관계 규정으로 소급되어야만 했는데, 죤 로크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신학은 지금까지의 전체 논의 전개에 직접적으로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비록 창조의 과정에 간섭하는 하나님이 그의 완전성에 일치한다는 논의에 맞닿아 있는, 또한 영혼과 그 영혼이 육체와 갖는 관계에 맞닿아 있는 신학적 관심거리가 있긴 했지만, 그리고 실체와 관계의 관련규정이 변화됨으로써 하나님과 세계의 관련규정이 결과적으로 불가피하게 변화될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신학이 더 이상 고대 교회나 중세교회처럼 철학적 논의의 파트너가 되지 못한다는사실은 초기 근대의 기독교 사상이 취약하다는 반증이다. 물론 헤겔과 쉘링까지는 기독교 신학의 관심이 여전히 철학자들에 의해서 주목을 받았다. 이것은 데카르트, 뉴톤, 말르브랑슈, 라이프니쯔, 그리고 다른 방식이었지만 후기의 칸트와 그의 후계자들이 모두 그랬다. 이런 관점에서 영국의 경험주의는 그 상태가 어떠했을까?
2. 죤 로크와 경험주의
죤 로크(John Locke)는 1632년 한 법률가(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영국 시민전쟁 때 의회군의 장교로 복무한 인물이었다. 로크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다녔고, 1652년 20살이 되었을 때 기독교 대학에 있는 옥스포드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1658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자연과학과 의학 공부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1667년에 런던에 있는 에슐리 경의 비서가 되었는데, 에슐리라는 사람은 나중에 샤프츠베리의 백작이 되었으며 챨스 2세 하에서 수상이 된 인물이다. 로크는 샤프츠베리의 비서로서 왕위 투쟁에 연루되어 1675년 프랑스로 가서 4년 동안 머물렀다. 1679년에서 1683년까지 잠시 런런에 머무는 동안 로크는 다시 한번 홀랜드로 망명을 떠났다. 그곳에 머물다가 그는 1688년이 되서야 빌헬름 폰 오라인과 함께 영국으로 귀국해서 명예 혁명의 지도적 지성인이 되었다. 특히 관용 정신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해석에서 권위자가 되었다. 그는 관용에 대한 첫 번째 문서를 홀랜드에서 썼는데, 조언자인 필립 림보어치에게 헌정했다. 그의 정부론(Treatise on Government)도 그에게 헌정되었다. 이 두 문서는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1690년에는 인간 이해에 관한 에세이(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가 출판되었는데, 이제야 관용에 대한 두 번째 문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서도 로크의 이름으로 나왔다. 관용에 대한 세 번째 문서는 1692년에 출판되었고, 1695년에는 성서에서 구원받은 기독교의 정당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as delivered in the Scriptures)이 뒤따라서 출판되었다. 그 뒤로 로크는 1704년 죽을 때까지 성서주석 연구에 매진했다.
a) 인식론
로크는 이미 대학 시절부터 죤 오웬(John Owen)에게서 관용 정신을 배웠다. 종교와 도덕적 이식의 기초에 대한 질문이 샤프츠베리와 함께 한 초기 시절부터 그의 중요한 관심거리였다. 즉 그가 자기 나름대로 인식 능력을 보다 정확하게 연구해야할 과업에 대해서 신경을 썼던 1670년부터 그랬다. 로크는 에세이에 실린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확해졌다고 썼다. “우리가 본성에 대해서 탐구하기 전에 우리의 능력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우리가 이해해야할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혹은 아니었는지 알아서 정확하게 조치하게 된다.”
옥스포드 의 대학생으로서 로크는 이미 데카르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캠프벨 프레이서는 데카르트가 그 어떤 다른 철학자보다 훨신 많은 영향을, 특히 자기관찰 방식으로 로크에게 끼쳤다고 보았다. 물론 로크는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주의적인 수용을 거부했다. 요컨데 우리의 정신(마음) 가운데는 자연에서 고유하게 주어진 관념이, 즉 생득관념(innate ideas)이 있다는 표상을 거부했다는 말이다.(에세이Ⅰ). 더욱이 로크는 데카르트의 이데아 개념을 우리가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표상과 사상에 대한 특징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 의식의 이 모든 내용은 지각이나 그 내용의 반영에 그 근원이 있다. 로크는 이 반영을 우리 자신의 마음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Ⅱ,1,4), 이것은 받아들여진 감각적 인상과 관련되어 있다.(Ⅱ,1,4: reflect on and consider). 그는 다음의 요소들을 이것에 첨가했다. perception(지각), thinking(사유), doubting(의심), believing(믿음), reasoning(증명), knowing(지식), willing(기도).
로크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마음)은 감각적 인상(particular ideas)을 통해서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빈 공간(empty cabinet)이다.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인상에 이름을 붙인다. 그런 다음에 같은 이름을 다른 경우에 사용하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관념이 되게 한다.(Ⅰ,1,15). 이 후자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생래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늘 습득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다음의 문장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우리가 숫자와 수학적 진리를 아는 것에도 해당된다. 셋 더하기 넷은 일곱이다. 모든 어린 아이들은 이런 진리를 우선 학습해야만 한다. 로크는 이런 사실에서 앎의 문제가 생래적지 않다는 증거를 보았다.(Ⅰ,1,16). 이에 반해서 그의 생각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그런 진리에 대해서 늘 변함 없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숙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자기 증거로 긍정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여전히 생래적이라고 할 수 없다.(Ⅰ,1,18; 또한 Ⅳ,2,1 참조).
라이프니쯔는 로크의 이런 논증을 자기 작품에서 비판했다. 이 작품은 매 장절마다 로크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 제목은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인간 오성에 대한 새로운 에세이)이다. 라이프니쯔는 우리의 영혼에 대한 모든 필연적인 이성적 진리를 안다는 것은 생래적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견지하고 있었다. 특히 산술적이고 기하학적인 진리의 앎도 생래적이라고 한다.(Ⅰ,1,5). 그뿐만 아니라 반대 개념처럼 논리적 기본 법칙이나(ebd.18), 전반적인 면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의 일반적 기본개념도(Ⅰ,1,2), 그리고 신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공동적인 앎은 잠재적인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연루되어 있다.(d'une manière virtuelle, 위의 곳). 그리고 라이프니쯔는 비록 진리가 우리 안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어린이는 우선 이런 진리를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명했다.(11). 이런 한에서 그것에 대한 우리의 앎은 사실상 우리의 영이 반영된 탓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크에게서 처럼 받아들여진 감각적 인상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의 반영이다. 라이프니쯔는 이성적 진리에 대한 잠재적 앎(25)이 있다고 말한다. 그 이성적 진리는 의식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유발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오거나(20), 혹은 그 진리를 주의 깊게 살펴봄으로써 우리에게 온다.(Ⅰ,2,1). 라이프니쯔는 이런 방식으로 모든 성숙한 사람들이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기본 진리에 대해서 동의한다는 사실을 로크 보다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물론 로크도 확실한 방식으로 라이프니쯔의 명제를 자기 스스로 만든 반증의 형태에서 이미 먼저 이루어냈었다. 이 반증은 우리가 모든 진리에 대해서 명백한 지식이 아니라 함축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에세이 Ⅰ,1,22). 그렇지만 로크는 여기에 덧붙여서 모든 개개의 사람들의 경우에 수학자의 모든 방정식을 함축적으로 알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모순된다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을 통해서만 다음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그와 같은 전제를 이해하고 확실하게 동의할 수 있다는 사실을. that the mind is capable of understanding and assenting firmly to such propositions). 이 논쟁은 이쪽 편을 들 수도, 그렇다고 저쪽 편을 들 수도 없게 했다.
칸트는 후에 1781년 순수 이성 비판에서 더 이상 생래적인 지식을 언급하지 않고 모든 경험에 선행하는, 그리고 받아들여진 인상을 숙지하는 우리 오성의 기능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양측의 견해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모색했다. 이를 통해서 우리 이성의 생산성은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진리를 인식하는 데서 도출되어 로크에 의해서 부조리하다고 비난받은 전제가, 즉 이러한 모든 진리는 이미 모든 사람의 의식에서 개체적으로 포함된다는 이 전제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앎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분명했다. 우리 이성의 생산력에 대한 강조가 결정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이런 진리를 이해하고 긍정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도 중요한데, 이는 이미 로크의 경우와 비슷하다. 다른 한편으로 칸트도 역시 모든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이성 안에 토대하고 있는 생산력을 이와 비슷한 강도로 감각적 인상의 이해와 관련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로크는 칸트와 비교할 때 그가 말했다시피 우리의 반영을 통해서 감각적 인상을 받아들여 비교적 불분명하게 표현하려는 것 뿐이었다.
로크는 에세이 세 번째 책에서 단순 관념과 복합 관념을 구분했다. 단순 관념은 감각적 성질이다. 예컨데 빛이나 색의 성질(Ⅲ,4,11)인데, 우리 외부의 구체적인 사물(substances)에 대한 관념이기도 하다.(Ⅲ,4,1f.). 로크에 따르면 이러한 단순 관념은 그것이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사물의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것이다.(Ⅱ,30,2). 비록 제1성질과 제2성질의 차이를 눈여겨보아야 하지만 말이다. 제1의 성질은 사물 자체에 해당되는 크기, 다수, 형태, 그리고 운동성의 속성이다.(Ⅱ,8,9). 이에 반해 색, 음, 촉각은 우리의 감각의 제한을 받는다.(Ⅱ,8,14f., 12참조). 근대의 수학적 자연과학은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분에서 현실성을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런 구분은 나중에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 비판은 모든 우리의 인상에 대한 조건을 우리의 주관성을 통해서 강조했으며, 이러한 조건을 제2성질에 재한하지 않았다. 따라서 칸트도 역시 크기, 다수, 형태의 제1성질을, 도한 대상의 주관성이라는 표상을 오성기능으로 파악했다. 이 오성으로 감각적 인상이 충분히 이해된다.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분리”에 대해서 투쟁했다. 이것은 로크가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함으로써 벌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영과 물질이라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그배경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본다. 로크가 이 이원론을 물려받았고, 칸트도 역시 우리 영의 주관성을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物 자체(Ding an sich)와 대립시킴으로써 이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개체 사건의 관계 안에 있는 물질적 과정을 주관성의 문제로 전가시킴으로써 이 이원론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의 시도로 인해서 결국 우리가 받은 인상과 관계되어 있는 우리 영의 주관성은 일반적인 실태(모든 실제의 주관성)가 단지 특별하게 나타난 경우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독일 이상주의는 이와 반대로 물질적 관계를 여전히 영의 불완전한 현상 형식으로 파악했다.
단순 관념을 제1성질과 제2성질로 구분하는 로크의 학설이 그의 철학과 또한 그를 통해 토대가 잡힌 경험주의적 전통에서 해결되기가 가장 어려운 사안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에서 작용하는 복합 관념과 그 의미에 대한 그의 이해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부담이 적다고 보아야 한다. 복합 관념은 예를 들어 일종의 상(像)이나 무지게에 대한 표상이다. 여기서는 더 많은 수의 단순 관념과의 연결이, 즉 무지게의 경우에는 더 많은 색의 연결이 핵심이다.(Ⅲ,4,12). 단순 관념은 그 입장에서 불려진 이름을 통해서(Ⅲ,4,2) 추상적인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로크는 이런 관념을 혼합된 양식(mixed modes)이라고 불렀다.(Ⅲ,5). 왜냐하면 그들은 유와 종 개념으로서, 그리고 추상적 관념으로서 구체적인 소여(所與)와 관련되기 때문이다.(Ⅲ,5,1). 로크의 주장에 따르면 추상적 관념은 제2 감각성질처럼 주관적인 조건에 놓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오성의 자의적 창조이기도 하다.(Ⅲ,5,2f.). 여기서 로크는 유명론자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라이프니쯔는 자의적인 것이 “홀로 언어 안에 있는 것이지 결코 관념 안에 있는게 아니다.”(a.a.O. Ⅲ,4,17)는 주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지만 로크는 추상 관념의 형성에서 이 자의성을 수용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볼 때 자의성은 우리 지식의 형식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관념의 관계로부터 그것의 일치나 불일치에 대해서 지식을 획득한다.(Ⅳ,2,1). 여기서 로크는 직관적 지식, 예컨데 흰색은 검은 색이 아니다, 삼각형은 원이 아니다라는 직관적 지식과 증명 사이를 구분했는데, 이 증명이 이루어질 때 관념들의 관계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다른 관념의 중재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다. 확실성에 대한 로크의 판단에 따르면 증명에 토대를 둔 지식은 우리에게 속한 모든 지식의 확실성과 증거들을 좌우하고 있는 직관적 지식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Ⅳ,2,1). 관념과 연결되어 생긴 지식은 제안(proposition)과 판단에서 나타난다.(Ⅳ,1,2ff.). 그리고 판단의 영역에 진리와 오류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와 같다.(Met. 1027b 18ff., Herm. 17 a 2f.). 로크에 따르면 참 진리(real truth)는 판단에서만 발생하는데, 이 판단은 단순히 관념 사이의 관계에만 관련되는 게 아니라, 관념과 대상, 혹은 실체 사이의 관계에 관련된다.(Ⅳ,5,8).
b) 자연적 인식과의 관계에 놓여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기독교 계시의 신뢰성
로크는 감각적 인상과 그것의 반영에서 발생하는 우리 의식의 모든 내용에 대한 유래를 다루고 있는데, 일단 여기서 로크의 그 조치를 간단히 살핀 다음에 이런 이해가 하나님의 인식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자세하게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로크는 데카르트와 달리 본유관념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에게 신관은 우리 영의 본성을 통해서 간단히 기초가 탄탄해질 수 없었다. 신관은 오히려 우리 의식의 모든 다른 내용처럼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게 틀림 없다. 로크에게는 이 경우에 물론 우선적으로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근본적 경험, 즉 우리 고유의 현존 인식이 핵심이다(Ⅳ,10,2ff.). 로크에 의하면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외부에 있는 사물의 실존에 대해서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므로써 확실해지는 하나님의 실존은 제외하고 말이다(Ⅳ,17,2). 이것은 왜 그런가?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다른 사물의 현존에 대해서 그런 것 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 무엇은 영원성으로부터 존재하는 게 틀림 없다. 왜냐하면 無에서는 無밖에 아무 것도 나올 게 없기 때문이다(Ⅳ,10,8: something must be from eternity, 참조 Ⅳ,10,3). 로크는 시초에 스스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존재하는 게 틀림 없다고 전제함으로써(물론 이 전제를 발전시켜나가지는 않고) 무한의 상환청구권 문제를 통과해나갔다. 라이프니쯔는 우연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추론함으로써 이런 통과를 즉자적으로(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근원에 착근시켰다. 그는 로크의 논증 형식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보일 수 있었는데, 이는 정당하다(a.a.O. Ⅳ,10,6). 말하자면 영원성으로부터 존재하는 그 무엇은 영원한 존재임에 틀림 없다는 로크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로크는 무엇이 영원성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인지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는 (데카르트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일반적인 존재자가 있기 때문에, 물질적 사물과 사유하는 본질이 있기 때문에(Essay Ⅳ,10,9), 그는 결국 영원성으로부터 발생하는 존재는 영(cogitative being, 사유하는 존재)임에 틀림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Ⅳ,10,10). 그 이유는 영만이 우리와 같은 사유하는 존재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존재들의 근원인 영원한 영은 당연히 전능한 게 틀림 없다. 로크는 비슷한 방식으로 전통적 神개념의 기본적인 속성을 일종의 영원한, 즉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그래서 그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영적인 본질에 대한 표상에 근거해서 차례 차례 해명했다. 로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에 대해서 습득해 얻은 지식의 확실성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보다 위대하다고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도 말했다. “I presume I may say, that we more certainly know that there is a God, than that there is anything else without us. 나는 우리가 없이도 무엇인가 있다기 보다는, 한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고 본다"(Ⅳ,10.6).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추론은 우리의 고유한 현존에 대한 증거에 기인하고 있는데, 이 증거는 로크에 따르면 하나님의 실존보다 위대하다. 로크는 바로 이 점을 자기의 자리로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 없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앎을 그 이외의 앎과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습득될 수 있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가 우리를 의식하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우리의 고유한 현존보다 더 확실하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에 접근할 수 없었다.
로크가 이처럼 하나님 인식의 확실성을 강조했다면 자연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을 것이다. 비록 자기 자신이 자연과학자였으며, 자신의 에세이를 끝내기 이년 전에 출판된 뉴톤의 저서 프린피키아(Principia)를 놀라워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까지 않지만 말이다. 로크에 따르면 보편적이고 확실한 진리는 추상적 관념의 상황과 관계 해서만 발생될 수 있다(Ⅳ,12,7). 그 무엇보다도 수학에서 그렇다. 로크는 도덕에서 아주 흡사한 지식을 기대했다(Ⅳ,12,8; 참조 Ⅳ,12,11). 반면에 그는 참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우리가 그것의 참 본질에 대해서 결코 표상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제한받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실험에 근거해서 그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Ⅳ,12,9). 따라서 자연과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 될 수 없다고 한다. natural philosophy is not capable of being made a science(Ⅳ,12,10).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한편으로는 감각과 실험의 증명에 의존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설에 의존하고 있다.(Ⅳ,12,13). 인간은 참된 지식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인해서 전체적인 영역에 대해서 그 개연성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Ⅳ,14,2). 이런 가정은 직관적이거나 실증적인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납득될 수 있는 것과 신앙의 일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Ⅳ,15,3). 그 일은 분명히 확실한 것에 대한 일치(conformity)의 정도에 따라서(참조 Ⅳ,16,12; analogy), 그리고 증인들의 성실성에 따라서 실행된다(Ⅳ,15,4).
개연성 판단에 대한 우리 의존성의 범위는 경험과학에 대한 생각의 다양함, 그리고 다른 이들의 생각을 수용해내야 할 필연성과 맞물려 있다(Ⅳ,16,4). 이로써 우리에게 기적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가, 또한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판단가능성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알려질 수 있는 자리가 주어졌다. 로크는 1702년 자신의 짧은 기적론(Discourse on Miracls)에서 기적의 개념에 대해서 언급했다(publ. 1706). 여기서 이르기를, 기적은 관찰하는 사람의 이해력을 능가하는,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자연의 진행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건이다. “a sensible operation, which, being above the comprehension of the spectator, and in his opinion contrary to the established course of nature, is taken by him to be divine, 관찰자의 이해를 능가하는, 그리고 자연의 확실한 진행에 반대하여 그 사람의 의견에서 현저하게 이루어지는 조작은 그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로크는 자연의 일반적인 진행에 대한 대립을 어거스틴과 유사하게, 그러나 스콜라 철학의 전통과는 달리 관찰자의 한정된 자연 인식에 좌우된다고 상대화 했다. 결국 한 사건이 기적인가 아닌가 하는 그 판단은 비록 그 사건이 다음과 같은 항의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변화될 수 있다는 말이다. “that will be a miracle to one which will not be so to another, 그 사건이 어떤 이에게는 기적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다." 로크에게 기적은 자연법칙을 꿰뚫어버리는 사건은 아니다. 이런 견해는 라이프니쯔와는 반대로 세뮤얼 클라크에 의해서 대변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확실성 때문에 계시에 동의하는 신앙은 원칙상 결코 비합리적이지 않고, 오히려 철저하게 이성적이다. “an assent founded on the highest reason, 최고 이성에 기초한 동의"(Ⅳ,16,14). 물론 이런 동의가 전제하고 있는 바는 실제로 하나님의 계시가 핵심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류와 광신의 위험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전승에서 주장되는 하나님의 계시가 이런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 기준은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참된 하나님의 계시는 창조자가 우리에게 허락한 이성과 어긋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대립할 수 없다. 또한 자연 종교에도 그렇고 도덕적 규칙에도 역시 그렇다. 어떤 주장이나 책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권위를 요청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적 판단의 문제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개연성을 알 수 있는 보다 넓은 영역은 이러한 것으로 인정받은 계시의 권위와 대립적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다(Ⅳ,19,8).
우리의 계시 신앙은 이성과의 전혀 갈등 없는 조화에 대한 요구를 벗어나서 어떤 적극적인 기준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 로크는 1695년 자기의 책 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as delivered in the Scriptures(성서에 근거한 기독교의 타당성)에서 아주 정확하게 표명했다. 여기서 로크는 성서의 구원사를, 그리고 특별히 복음서에 따른 예수의 역사와 사신을 요약했다. 그리고 예수가 스스로 선포한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을 기독교교리의 중심 대상이라고 설명했다(164). 이런 입장은 이미 토마스 홉스가 자신의 레비아탄(Leviathan)에서 밝힌 바 있었다. 그것에 대한 신앙은 역사적일 뿐이지 결코 정당하다고 인정받은 신앙이 아니라는 이 항의에 대해서 로크는 이런 역사적 신앙은 예수가 요구한 회심과 연결된 구원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주장으로 방어했다(165-167). 더욱이 하나님을 향한 이성의 빛을 통해서만, 즉 “자연의 빛”(231f.)을 통해서만 구원의 선물을 희망한 이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물론 전체 인류 안에 있는 이들이다. 로크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계속 이르기를, 그것은 그 도덕적 내용을 통해서 증명되었으며(241), 또한 도덕적 내용이 수반하고 있는 기적을 통해서도 증명되었다고 한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과 그의 승천이 이에 해당된다(245). 이런 설명을 통해서 이제 로크는 계시로서 선포된 교리의 도덕적 내용을 그것을 증명하는 기적과 더불어서 그것을 계시로 받아들이는 실증적 기준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그의 기적론(Discourse of Miracles)에서 매우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where the miracle is admitted, the doctrine cannot be rejected."(기적이 인정된 곳에서는 이 교리는 거부될 수 없다). 로크는 이런 초자연적 표시들을(supernatural signs) 하나님에게서 오는 계시가 어떤 경우에 해당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관점에서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이루어지게 하는 하나님의 수단이라고 보았다. (the only means God is conceived to have to satisfy men, as rational creatures, of the certainty of anything he would reveal, as coming from himself, Works 9,262).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로크가 명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그가 일으킨 기적을 통해서 충분히 행동한다고. 여기서 말하는 기적은 이성과 반대되는 것으로 믿어져야만 할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게 결코 아니다.
경험적 착상을 전개한다는 사실에서 로크와 그의 위대한 후계자인 데빗 흄 사이에 있는 대립은 주로 기적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문제에 한정되지 그 이상은 별로 없다. 흄이 인간 오성을 다룬 그 유명한 글 on Miracles(기적에 대해서)에서(1748) 기적을 받아들이는 모든 주장들은 습관과 경험에 완전히 대립적인 것(most contrary to custom and experience)으로 간주되었다. 로크와 반대로 흄은 기적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자연법칙을 깨어버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기적에 대한 모든 주장의 확실성은 자연사건의 규칙적인 진행과 반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And as a uniform experience amounts to a proof, there is here a direct and full proof ... against the existence of any miracle. 한결같은 경험은 어떤 증거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떤 기적의 실존에 반하는 ... 직접적이고 충분한 증거들이 있다." 흄은 다음과 같이 아주 확실하게 강조했다. 여기서는 이제 목격자들의 확실성에 대한 질문이 문제는 아니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보도된 사실이 이상하면 이상할수록 증거의 정확성이 보장된다는 규칙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크의 합리주의와 매우 동떨어진 견해다. 바로 이 합리주의를 통해서 이성을 이해하는 문제는 우리의 지식 범위가 어떻게 제한받고 있는지 안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흄이 비록 일반적으로 회의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경험의식을 회의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칸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지만 그는 사건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로크에 비해서 훨씬 강하게 신뢰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흄에게 습관(custom)은 모든 인과관계적 연계의 원칙이었다는 사실에서 명백해진다. 기적에 대한 질문에서 영국 경험주의를 대표하는 이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명백해진다. 하나님의 실존을 전제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로크가 그렇게 매달렸던 증거가 흄의 경우에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로크와 달리 경험주의에 토대를 둔 회의는 反종교적인 방향으로 나갔다. 반면에 현실성에 대한 로크의 견해는 현실적인 것이 우리 이성의 이해력를, 그리고 우리 지식의 가능성을 일반적으로 능가하며, 더 나아가서 이성은 종교적 전통이 요구하는 계시에 대한 시금석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각인되었다.
독일 계몽주의에서는 기적의 가능성에 대한 표상이 로크의 경우와는 다르게 형성되었다. 라이프니쯔는 기적을 흄처럼 결정적으로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데카르트와 같은 의미에서 자연사건과 그 법칙성의 질서에 하나님이 관여한다는 것은 창조자의 완전이라는 점에서는 유해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적이 가능하다는 전제에 대해서 매우 삼가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그는 성서에서 주장되고 있듯이 기적의 초자연성을 강조했으며, 로크와 반대로 이런 전제를 이성과 결코 연결된 것으로 보지 않으려고 했다.
c) 로크와 이신론
체베리(Herbert of Cherbury, 1648년 졸)에 따르면 로크의 철학은 영국 이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영국 이신론의 전성기는 1696-1736년에 이르는 40년간이었다. 로크는 이성을 판단의 시금석이 되게 했고, 또한 종교전승의 계시요청을 가능한 전제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신론자들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죤 톨랜드(John Toland)는 자신의 책 Christianity not mysterious(신비적이지 않은 기독교, 1696)에서 로크와는 현저하게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기독교를 반이성적인 것으로부터만이 아니라 모든 초이성적인 것으로부터도 역시 정화시키려고 했다. 이로써 그는 로크에 의해서 전개된 바로 그 이성 개념과는 반대되는 자리에 위치했다. 왜냐하면 로크는 우리의 제한된 이성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초이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성의 본질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시 인식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로크와 달리 이신론자들의 현실적 감정은 인간 지식의 한계를 능가하는 생명 현실성의 기적에 대해서 인간의 지식이 제한받고 있다는 의식이 부족하다.
계시 요청을 이성적으로 검사하는 일은 성서의 역사-비평적 연구와 연결되었다. 이것은 이신론의 실증적 의미를 신학사에서 끝장냈다. 그러나 역사 비평은 아주 협소해진 현실성 이해와 연결됨으로써 즉시 부담을 지니게 되었다. 앤토니 콜린스(Anthony Collins)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 말씀의 근원적인 의미에 대해 원시 기독교가 시도한 해석의 차이점을 밝혀내고, 또한 신약적인 예언증명을 연구함으로써 선두에 섰다. 토마스 울스톤(Thomas Woolston)은 성서의 기적 보고를 비판함으로써 여전히 보다 더 확실하게 활동했다. 피너 어넷(Peter Annet)가 1744년 예수의 부활에 대해 맹렬하게 문제를 제기한 문서가 출판되었을 때 영국 이신론 운동의 정점은 당연히 끝나 있었다. 1730년 출판된 매튜 틴댈(Matthew Tindal)의 저서 Christianity as Old as Creation(창조만큼 오래된 기독교)이 바로 이신론의 정점이었다. 이 책에서는 자연종교와 도덕으로 축소된 기독교가 이 책의 부제로 나와 있듯이 a Republication of the Religion of Nature(자연종교의 再版)으로 제시되었다. 이신론의 물결은 그 무엇보다도 기적 개념에 대한 이신론적 근본 비판에 맞선 한권의 책을 통해서 분쇄되었다. 이 책은 죤 로크 사상에 영향을 받아 요셉 버틀러가 집필한 그 유명한 작품 The Analogy of Religion, Natural and Revealed, to the Constitution and Course of Nature, 1736 (자연의 구성과 진행에 대한 종교, 자연, 그리고 계시의 유비)였다. 버틀러는 이 책을 (1725년 이래로) 스텐홉에서 신부로 일하던 때에 썼다. 그는 그 뒤로 1739년에 브리스톨의 주교가 되었고, 1750년에는 듀어헴의 주교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2년 뒤에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연은 성서의 계시에 비해 비밀이 적은 게 아니라는 명제를 통해서 버틀러는 이신론자들의 피상적인 합리주의와 맞섰다. 우리의 자연 인식은 거의 전적으로 개연성 판단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버틀러는 이성과 자연 현실성(Naturwirklichkeit)에 대한 죤 로크의 견해로 돌아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probability is the very guide of life. 개연성이 인생의 실제적인 가이드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릇된 이성개념에 근거하게 되면 그만큼 비이성적인 것으로 보인다. 버틀러에 의하면 신앙을 역사적으로 질문할 때는 분명히 그 어떤 수학적 증명을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외의 모든 것에서도 그런 증명을 포기하는 게 틀림 없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개연성 판단의 기초에 맡겨두는 것이다. 결혼을 결정하는 데서도 그렇다. 버틀러가 암시한 자연과 계시 사이의 인상 깊은 유비의 하나는 기독교의 부활 신앙이다. 나비의 경우에서 보듯이 벌레가 무언가 다른 종류로 변화될 수 있는데도, 죽은 자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는 게 왜 안된다는 말인가? 매우 인상적인 이런 비유는 2세기 반이나 지난 오늘의 시대보다는 1736년에 훨씬 잘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여기서 버틀러가 표현하고 있는 의도는, 즉 자연 이해와 성서 계시를 갈라놓지 않으려는, 그리고 우리의 이성적인 지식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개방성을 유지시키려는 그의 의도는 이런 비유의 자연과학적 정당성 여부보다 훨씬 중요했다. 이것은 버틀러가 영국에서 얻는 큰 업적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그 결과로 흄의 기적 비판은 1748년부터 전혀 거론되지 않게 되었고, 겨우 미미한 인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d) 로크가 남긴 그 이외의 영향
18세기 영국 신학사에 끼친 로크의 중요성에 대해서 바로 앞서 언급했는데, 그것은 사실 금세기까지 그 여파를 끼쳤다. 철학사에서 로크는 영국 경험주의의 창설자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는 경험의식을 기술함으로써 데카르트보다 훨씬 더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런 직접적인 효과가 18세기까지는 국제적으로 훨씬 지대했지만 말이다. 로크의 영향은 금세기의 분석적 언어철학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언어철학이 감각적 논거를 모든 경험의 원천으로 간주하기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흡사 그 영향이 모든 정신적인 노력과 해석에 미리 주어진 것처럼- 로크도 역시 강조하기를 단순관념(simple ideas)과 추상관념(abstract ideas)은 식별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을 명명할 때 필요한 낱말들이 이미 보편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로크는 1807년 정신 현상학이라는 책에서 감각적 의식에 대해 제기한 헤겔의 비판에서 충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모든 관찰 원칙의 “이론 짐지우기”(Theoriebeladenheit) 에 대한 통찰로부터도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 이론 짐지우기는 금세기에 실증주의의 돌진을 분쇄했다. 이제 이미 로크는 특히 그의 에세이 세 번째 책에서 언어분석을 위한 착상을 제시했다. 로크는 그뿐만 아니라 감각적 인상이 가공될 때 일어나는 의식에 대한 조치를 결코 기술해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테마를 선택할 때 데빗 흄은 로크를 뛰어넘어 우리 경험 의식을 기술하는 쪽에서 가장 중요한 일보를 내딛었다. 특히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유사성과 접촉의 규칙에 따라서, 그리고 인과율적 연계의 기초로서 시간에서 잇달아 있어나는 규칙에 따라서 개체적 관념의 연상(聯想)을 연구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자기의식(Ichbewußtsein)은 기억에 보존되어 있는 순간적인 현시점을 묶는(bundle) 것인데, 이 자기의식에 대한 숙고방식을 사용함으로써 흄은 로크에 의해서 상이하게 구별된 입장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는 개체적인 지각이 연계될 때 발생하는 연상의 기계론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물론 근대 감각 생리학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기계론은 전체를 무언가 이차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모든 전체는 지각이나 운동에서 일차적이다. 이 일차적인 것은 어떤 순간에 해체될 수 있지만, 전체에 속해 있는 것이다.
로크는 근대 경험주의의 창설자로서만이 아니라 최소한 정치적 사상가로서도 역시 영향을 끼쳤다. 관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짧은 문서들을 통해서(1689년 이래로) 관용 사상은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이 사상은 지식에 대한 요청을 철학적으로 정화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통치 제도에 대한 그의 두 가지 연구(Two Treatises of Civil Government, 1690)를 통해서 그는 사회계약에 대해 홉스와 반대되는 새로운 이론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근대의 자유개념을 창시하게 되었다. 시민 통치 제도에 대해 연구한 두 논문의 첫 논문에서 로크는 다음과 같은 학설을 비판했다. 즉 단일군주론적 통치 제도는 인간 본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가부장적 가정 체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 논문에서 그는 “자연의 상태”에 대해서 피력했는데, 이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근원적일 뿐만 아니라 매 순간 본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핵심이다. “a state of perfect freedom to order their actions and dispose of their possessions and persons as they think fit, within the bounds of the law of Nature; 자연법의 경계 내에서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재산과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들의 행위에 명령을 내리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 인간 관계에서 볼 수 있는 근원적인 유사와 차이는 이런 것에 기인한다는 것이다.(Ⅱ,2,7). 로크는 전통적인 자연법적 자유 관념을 크게 변화시켰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자연 상태를 인간 역사의 시초에 잃어버린 원상태라고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주장했다. “all men are naturally in that state, and remain so till, by their own consents, they make themselves members of some political society.; 모든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자연상태에 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정치적 집단에 단원이 되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그렇게 자연상태로 있다"(Ⅱ,2,15). 그렇지만 정치 단체에서 활동한다고 해서, 홉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주권자의 통치 하에서 다른 이의 간섭을 받지 않고 보호받기 위해서 근원적인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는 개개 시민의 자유와 소유를 보호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Ⅱ,4,22ff.과 Ⅱ,8,120 참조). 자유개념이 재산과 연결된다는 점이 바로 이 부분에서 나타나는 로크 사상의 특성인데, 이 재산은 국가의 통치 형식과 거의 똑같이 지난날의 자연법 학설에서 사회 발작 내지는 인간 타락의 결과에 해당되는 문제였다. 로크는 재산 개념을 인간의 자유 사상과 결합시킴으로써 그 품격을 높혔다. 이 경우에 재산권에 관한 법은 인간 활동과 관계된다. 근원적인 재산권은 사람의 인격 자체를 말한다. 그리고 그의 몸을 말하며, 또한 그 몸과 밀착되어 있는 “그의 손으로 한 일”(the work of his hands)을 말한다. 인간의 노동과 연결되어 있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재산이다(Ⅱ,5,27). 로크는 자유와 재산을 결함시킴으로써 자연 상태의 근원적인 자유를 여전히 현재에도 존속하는 실질(reality)이라고 주장했으며, 또한 국가의 토대는 시민의 자유권리를 보호하는 과업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로써 로크에게는 스토아 철학의 자연법이 말하는 잃어버린 황금시대는 현재의 실질이다. 비록 지상천국의 색깔이 없고, 폭군에 의해서 통치되지 않는 좋은 정치 질서가 전제되고 있지만 말이다. 로크와 그의 뒤를 이는 사상가들은 이처럼 자연법적인 토대에서 자유개념을 언급하고 있는데, 물론 이런 자유개념은 기독교에 의해서 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독교의 특별한 자유가 더 이상 중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곧 밀턴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개인들이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일치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정치 질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와 상통되는 뜻이다. 로크는 오히려 정치 질서의 토대를 민중의 주권 사상에 착근시키려고 했다. 자유에 대한 그의 기본 생각은 계속적으로 권리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권리와 법칙은 제한이 아니라 자유를 위한 헌법의 조건으로 파악되었다. 법의 목표는 자유를 분쇄하고 제한하는 게 아니라 d지하고 확장시키는 것이다(to preserve and enlarge freedom). 자유는 자의적인 것으로 파악되면 안되고 오히려 인간 이성과의 일치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헌법이 말하는 질서 유지의 권리가 자기를 전개시켜나갈 개인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오늘의 상황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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