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철학 주제의 영속성을 위한 기독교의 기여
기독교 신학은 철학적 사유를 받아들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기 입장에서 철학적인 의식을 변화시켰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현실성(Wirklichkeit)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또한 세계와 그 신적인 근원의 현실성을, 그리고 인간의 현실성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 얻어진 분명한 전망은 기독교 신학만이 아니라 철학적 숙고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그 철학적 주제의 뿌리가 기독교적이라는 점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랬다. 이 주제들은 보편적인 경험 의식에서 곧바로 영속적인 부분이 되었다. 이런 부분에는 세계와 그 모든 부분들의 우연성이, 또한 인간 인격에 대한 일련의 전망이, 특별히 그 인간존재가 포함된다. 더 나아가 선회가 불가능한, 미래를 향해서만 열려 있는 과정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발견도 포함되며, 또한 무한자를 세계의 신적인 근원에 대한 본질 규정이라는 적극적인 평가도 포함된다. 그런데 기독교의 성육신 신앙은 결국 포함되지 않지만, 특별히 그 신앙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이해와 사랑과 사죄 개념에서 작용한 일련의 활동은 이런 부분에 포함된다. 이런 모든 경우에서 기독교와 조우하는 주제들이 완전히 졸지에 인간 의식 속으로 새롭게 등장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이런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기독교 이전의 뿌리로 소급되는 용어학적 前역사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각기의 주제는 기독교의 영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각인되었다.
1. 세계와 모든 유한자의 우연성
그리스 고전주의는 신들의 지배 하에 있는 새로운 질서의 설립을, 또한 그 세계의 설립을 제우스의 탓으로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현존을 시간적으로 무한하다고 생각했다.(Hesiod Theogonie 73f.).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코스모스는 늘 그렇게 존속했으며, 또한 늘 존속할 것이다. “신들 중의 어느 누구나 어느 인간도 세계 질서를, 즉 모든 것을 위한 그 질서를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과거에도 있었으며, 현재에도 존재하며,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적당하게 빛을 내다가 적당하게 꺼지곤 하는 영원히 살아있는 불이다.”(fg. 30). 이런 사상은 나중에 세계를 시간적인 과정에 정위시키는 불로서의 로고스에 대한, 그리고 순환적으로 세계를 태우는 것에 대한 학설에서 표현되었는데, 이 학설은 헤라클레이토스와 관계된 것이며, 스토아적인 것이다. 세계를 태울 때마다 코스모스는 갱신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록 코스모스가 공간적으로 한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상존한다. 플라톤만이 티마이오스에서 코스모스의 시작을 생각했다. 그러나 질료적인 세계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코스모스로 특징화된 질서에 대한 그 형태에 관해서 생각했다. 이것은 물론 신화의 언어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원래 고유하지 않은, 비유적인 대화 방식이 핵심이라는 주장이 이런 질문에 대한 중기 플라톤의 학습에서 관철되었다는 사실은 정당하다.
성서에 토대를 둔 기독교의 창조 신앙은 여기서 현실성 이해의 뿌리를 지향하는 변혁을 끌어냈다. 이런 변혁의 전체 외연이 기독교 사상에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세계가 전체의 모든 개개 사건 안에서 창조자의 의지에 종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의 질서 안에서 다른 사건과 한결같이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개개 사건이 유일회적이라고 간주되었다. 어거스틴은 창조의 유일회성을 구원의 유일회성과 한 묶음으로 봄으로써 이 문제를 다루었다. 세계의 시간적인 시작과 상응하는 것은 시간적 마지막의 가능성만이 아니다. 시작에서 마지막으로 가는 유일회적인, 소급될 수 없는 길에서 시간 사건의 모든 유일회성도 상응한다. 그리스도는 단 한번 죽었으며, 그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종극적으로 물리쳤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부활한 뒤에 주님과 함께 할 것이며, 더 이상 죽을 몸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De civ. Dei Ⅻ,13).
만물이 창조자의 권능에 의존한다는 사상은 후기 기독교 신학에서 우연성 개념을 통해서 자리를 잡았다. 이에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뿌리를 둔 개념을 새롭게 각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은 라틴 중세 신학에서 발생했다. 요컨데 13세기 말 둔수 스코투스에게서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렇게 새롭게 각인시키는 작업의 여파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아보려면 우선 이 주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라틴어 번역에는 그리스어 endechómenon에 해당되는 contingens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endechómenon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고 받아들여진 endéchesthai라는 단어의 분사형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본질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태의 개념에 속하는 정의(定義)가 아니라, 그 개념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혹은 그것의 정체성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변화되지 않은 가운데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그 정의이다. endechómenon은 이로써 우연한 것(symbebekós)의 개념과 가깝게 되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의 형이상학에서 뒤의 표현을 택했지, 늘 사물에 속한 것과 대립하는 앞의 표현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의 형이상학에서 endechómenon 개념과 우연성 개념의 상관성을 제시했다. 그는 형상과의 대립적인 의미에서 질료에 대해서 규정하기를, 이런 혹은 저런 규정을 “채용할” 수 있는(endechómene), 그래서 우연한 것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Met 327 a 13-15).
해석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책자에는 이런 사태가 뒤바뀌었다. symbebekós라는 표현은 여기서 결코 각인된 전문용어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이 소책자에는 가능성 개념이 “존재할 수 있는”(endéchesthai einai) 것과 연결된다.(Herm 13,22 a 15). 요컨데 필연성과 대립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후에 “우연한”(kontingent)라고 불려진 이 단어는 가능성이라는 말과 일치하는걸까?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현실적인 것이 가능한 것보다 상위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늘 무언가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Met 1047 a 21f.). 존재하지만(existiert) 없을(nicht-sein) 수도 있는 가능한 것(Mögliche)은 사실상 우연한 것들과 일치한다. 이와 반대로 우연한 것은 없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있는 것들의 실존적 사실성을 통해서 단순히 추상적으로 가능한 것들과 구별된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구별을 완성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우연성과 가능성의 개념이 축소되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기독교의 중세기는 우연성을 질료 개념과 가능성-내-존재(In-Möglichkeit-Sein)에 병렬화 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의지의 자유라는 주제와 관련시킴으로써 뛰어넘었다. 만약 의지가 마주오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이 선택의 사실적인 결과는 우연한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학을 주석하면서 선택 행위에서 생기는 것을 우연한 것의 한 종류라고 설명했다. 그는 물론 선택 행위를 이런 우연한 것이라고 일컫지 않았다. 하나님의 의지를 가리켜 그는 우연한 것과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차이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성 개념을 신학적으로 가치전도 시키는 일에서 결정적인 순간은 둔스 스코투스가 우연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근원적으로 야기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함으로써 실행되었다. 그의 대답은 자유롭게 행위하는 원인만이 우연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연의 필연성에서 작용하는 모든 것은 그런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 효과를 야기시키며, 따라서 그것은 실제적으로는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둔스 스코투스는 이런 점에서 우연이 있다는 사실은 만물의 제일 원인자가 자연의 필연성에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우연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요컨데 자유로운 원인으로서 자기 뜻을 통해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이미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제일 원인자가 자연이 필연성에서 모든 것을 생산해낸다면 세상에는 도대체 우연이라는 것은 일어날 수가 없다.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사물의 가능성이 그 현존보다 앞서게 된다. 그 현존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즉 세계는 실제적인 모습으로 되기 전에 이미 존재할 수 있었다.
우연성 개념에 대한 가치를 전환한다는 것은 우연한 소여(所與)가 이제 더 이상 질료의 불규정성에 기초하고 있는 게 아니라 세계와 그 모든 부분들의 창조적인 근거라 할 신적 의지의 자유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둔스 스코투스는 이런 질문이 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와의 대립을 전반적으로 의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의 특징은 더 이상 필연성이 아니라 자유다. 그리고 창조적인 하나님의 자유는 자연의 필연성이 제기하는 강요로부터 인간이 자유할 수 있는 근거와 조건이다. 즉 인간도 역시 분명히 제한적으로만 우연하게 행위할 수 있으며, 자기 의지의 창조적 자유를 통해서 우연한 활동을 야기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우연성의 개념은 아주 명백하게 가능성 개념과 구별된다. 즉 선택하는 자의 논리적 가능성은 의지의 선택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의 결정은 이런 관계에서 우연하게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택의 가능성에 대한 지식에서 연역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통해서 야기된 것도 역시 우연한 것이다. 이렇게 야기된 것은 사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실제적인 것이 비록 다르게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우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피조된 현존에 해당된다. 이로써 모든 피조적인 현실성은 우연하며, 그 현존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인 의지에 덕을 보고 있다.
피조된 모든 현실성이 우연하다는 이 사상은 최근 시대에도 역시 당연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상은 17세기 이래로 인간 의식 가운데서 자연법적 질서를 통해서 모든 사건의 법칙이라는 인상 뒤로 물러났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모든 개개의 자연법칙과 자연법칙적인 질서는 완전히 조건적인 상태에 멀물러 있다. 이런 상태는 그 적용성에 대한 시작과 마지막 조건들의 소여성이 이와의 관계에서 우연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우연한 조건들을 여전히 그런 조건 뒤에 놓여 있는 절대의 내적 필연성에 대한 표현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만이 스피노자와 더불어 자연의 현실성에는 그 어떤 우연성이 있을 수 없으며, 또한 모든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연한 소여성에 대한 인상이 자연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지식을 표현하는 것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20세기의 자연과학에서는 사건의 우연성에 대한 전망이 훨씬 강하게 부각되었다. 요컨데 양자물리학적인 개체 사건이라는 관점에서도 그렇고, 또한 격동적이며 혼란한 과정에 나타나는 불안정성의 경우에도 그렇다. 그뿐만 아니라 시간의 진행이 거꾸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개개 사건은 전형적인 속성과 진행 형식의 반복에 상관 없이 긍극적으로 유일회적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법적으로 규칙화된 과정의 처음과 끝의 조건만 우연하게 아니라, 우연성이 사건의 후속에서 관찰될 수 있는 규칙성에 상관 없이 모든 사건의 근본적인 색인이라는 것이다. 규칙적인 반복성의 등장은 이로써 우연한 소여성이 된다. 이는 흡사 성서적 진술에(창세기8:22) 따르면 자연 질서의 신빙성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배열에 기인한다는 것과 같다.
2. 개인의 중요성
개인이 경험의 소여성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늦어도 별명이 생긴 이래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개인은 처음부터 철학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이 이 개인을 보편으로 가는 매개 안에서만, 즉 보편 개념이나 보편 규칙의 경우로만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한계 안에 있는 고전주의적 헬라철학은 보편적인 것과 전형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식을 구체적인 이것이라 할 개체를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개인을 보편의 매개로 파악하면 결국 전형적인 것을 개인보다 상위로 놓게 된다. 모색된 개인에 속한 아종(亞種)이 발견될 때까지 개인을 보편 개념의 세분화로 규정하는 플라톤의 방식은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본질개념의 유(類)개념에서는 소용이 없다. 한 유나 혹은 같은 유에 속한 개인에게는 다시 그와 똑같이 특별한 이데아가 없다. 유개념 자체는 atomon, 즉 개인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 유개념이 현실화되는 개개의 경우는 에이도스가 현실화된 질료가 상이하게 나타난 부분들에서만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곧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것만이 고유한 의미에서 실체라는 그의 생각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후기 헬레니즘에서는 여러 측면에서 개인이 보다 강하게 강조되었다. 즉 중기 스토아 철학과 중기 플라토니즘, 그리고 알렉산드로스(Alexander von Aphrodisias)에게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유의 개체는 그 질료에 따라서만 구별된다는 표상은 다음과 같은 포르퓌리오스의 명제가 나오고서야 극복되었다. 모든 개인은 그에게만 있는 속성과의 연결을 통해서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
그렇지만 개인에 대한 고전 그리스 철학의 평가에는 여전히 한계가 설정되어 있었다. 개인에 대해서 내려진 그 한계가 분명했다. 플라톤은 영혼 불멸론을 통해서 인간이 지상적 삶을 뛰어넘어 구원과 멸망에 관계된 작용을 하며 그런 영원에 참여한다고 개방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영혼은 불분명한 많은 재생 표상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육체를 갖고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현존의 인격성과 일치될 수 없었다. 개별적인 영혼은 플라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 방식으로 개인적이다. 그러나 그 생명은 개체적으로 지상에서 살아가는 현존의 긴장을 뛰어넘는다. 이 현존의 개인적 인격이 무상하다는 플파톤의 시각은 결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보다 덜 강하지 않다.
우선적으로 기독교가 유일회적으로 지상에서 현존하는 개체 인격 안에서 인간을 확실하게 규정하려는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이미 포로기 이후 유대교의 종교적 개인주의를 통해서 준비된 바였다.(에스겔18:4이하, 20). 이렇게 인간을 개인으로 보려는 사상의 출발점은 예수의 사신(使信, Botschaft)에서 그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 잃어버린 개별적 인간을 찾아오시어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신다고 선포했다.(누가복음15:4-32).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나선다는 것은 구원에 대한 희망의 종말론적인 전망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구원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주어지는 무상하지 않은 생명을 가리킨다.(마가복음 12:26이하). 기독교의 구원 사신은 유일회적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현존으로 하여금 영생에 참여할 수 있는 희망을 품게한다. 그 인간은 몸과 영혼이 하나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이와 걸맞도록 초대 기독교 신학은 영혼을 몸과 영혼으로 창조된 인간의 구성 요소로 파악했으며, 이렇게 규정된 영혼의 불사성에 대한 사상을 몸의 부활과 연결시켰다. 이로써 이제 영원에 참여함으로써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표상이 개인화 된 것이다. 요컨데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유일회적으로 이 땅에서 현존하는 개인과 관련된 것이다. 이 지상적 현존은 이제 영원에 참여해야만 한다. 비록 그 현존이 영원성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구체적인 몸이다.(고린도전서 15:53).
이처럼 기독교는 개인적으로 지상에서 살아가야 할 인간 현존에 영원한 의미를 제공했다. 당연히 이 지상적 삶에서 각기의 모든 인간들이 영원한 구원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멸망당하는가가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유일회적으로 지상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현존이 영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부여받게 된 새로운 무게는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그 품격에 대한 사상을 기독교적으로 심화시킴으로써 나타났다. 키케로는 인간의 품격(dignitas)을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는 이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면,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품격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개개인들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그 토대를 두었다. 창세기 9:6에 따르면 개개인들의 생명은 신성불가침이다. 우선적으로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적 동기를 이어가면서 하나님과의 일치로 인해서 주어지는 생명과 자유라는 시각에서 인간의 품격을 개인에게 속한 신성불가침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서 분명히 기독교 사상에서 그 의미가 심화된 위격(person) 개념은 이런 관련성 가운데 놓여있다. 이러한 심화를 통해서 위격 존재는 개인의 품격에 대한 총괄 개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위격 개념의 시작은 극장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라틴적인 것에 놓여 있다. 이것은 물론 그리스적인 것에서도 비슷하다. 위격은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기해야 할 역할이다. 여기서부터 어느 주가 연기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역할”에 말이 위탁된다. 여기 모든 곳에서 바로 그 개인이 이러한 것으로 특징화되는 게 아니라 완성되어야 할 사회적, 혹은 정치적 기능이 특징화된다. 우선적으로 로마의 법적 언어에서 위격이라는 말은 “임의의 개인을 위한 일반적 표시”가 되었다. 요컨데 몹시 추상적인 의미에서 마치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 자로 생각되었다는 말이다.
주마간산격으로 살펴본다면 보에티우스는 그 다음 시대에 권위적으로 받아들여진 정의(定義)에서 볼 수 있듯이 위격을 그와 똑같이 추상적인 보편 개념으로 생각했다. 그는 위격을 “이성적 개별 본질”이라고 특징화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보에티우스가 이 정의를 기독론적 교의의 기초로, 이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두 본성에서 하나의 위격이 되는데, 그 기초로 설정하려고 했다고 본다면 예수의 인간적 본성이 위격의 단일성에 내재한 신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질문이 곧 제기된다. 레온티오스(Leontios von Byzanz)는 이런 관계를 명시적으로 주제화했으며,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이 로고스의 위격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로고스의 위격이 그 입장에서 삼위일체론적 관계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아버지와 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로고스의 위격 안에 있는 인간 예수의 “엔휘포스타지”(그리스도의 인성이 그의 신적인 위격 내에 존재한다는 뜻, 역주)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참여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위격이 두 본성 안에서 일친한다는 기독론적 교의가 삼위일체론적 위격 개념을 인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엔휘포스타지的” 위격개념만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위격 존재에 따른 규정도 피조물로서의 인간 현존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구성적 관계에 의해서 “이성적인 개별 본질”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리카르트 폰 빅토르(Richard von St. Victor)는 실존개념을 “다른 이로부터 온 존재”(Von-einem-andern-her-Sein)라고 해석했는데, 이런 영향을 받아서 둔스 스코투스는 이런 작업을 벌여나갔다. 이를 통해서 인간을 위격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삼위일체적 위격 개념이 함축적으로 중요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삼위일체론은 첫 번째로 다른 위격과의 관계를 통해서 위격 존재를 구성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서 위격으로 규정되었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된다.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에서만 아버지이며, 역으로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만 아들이다. 인간론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das Ich)는 너와의 관계에서만 나이다. 즉 신的인 너와의 관계에서 우선적으로 피조물의 속성을 갖지만, 똥한 동료적인 너와의 관계에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삼위일체론에는 소위 “대화식의 인격주의”가 기원하고 있다. 이 인격주의는 20세기에 그 누구보다도 마틴 부버(M. Buber)와 페르디난트 에브너(Ferdinand Ebner)를 통해서 확증되었으며, 새로운 철학사의 흐름에서는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Feuerbach)를 뛰어넘어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에게 소급된다. 대화체 인격주의의 명제는 내가 너로부터 구성된다는 명제가 너를 다른 나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타율성에 떨어져버린다는 비판을 극복한다. 말하자면 이제 동료적 너-관계가 창조자의 신적인 너에게 연관되는 인간의 피조성이라는 불빛에서 고려된다면, 또한 삼위칠체론적 위격의 상호적 구성이라는 의미에서 고려된다면 이것이 보호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內주체성은 개별화된 위격에 맞서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위격존재를 규정하는 상관개념이 손상받지 않고 기독교 사상에서 인격성은 늘 자유라고 생각되었다. 타자와, 특히 고유한 위격존재의 신적인 근원과 자유롭게 맞서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유 사상과의 이러한 연결은 기독교 사상에서 이성적인 본질이 자유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다는 사실로 소급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생위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도 역시 자유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을 가리켜 “자유로운 의지로 인간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창조행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위격존재의 구성이 손상당하지 않고 인간은 자기의 현존을 구성하는 사태에서 자유롭게 이런 혹은 저런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이레네우스는 그 뒤의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인류사의 초기에 있던 인간의 자유를 취약한 것으로,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고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도록 규정되었으며, 이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의 아들 관계에 참여함으로써 확고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초기에 취약했던 의지의 자유는 튼실해지며 완성된다.
근대 사상에서는 이 주체성이 인격적 자립에 속한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주변 세계에서 생산적으로 행동한다. 근대의 존재 개념 중에서 극단적이라 할 이런 인간 이해를, 그것은 최초로 인간의 본질을 야기하고 있는데, 고대에 대한 조사도 없이 전제하면 안된다. 근대의 주체성 사상이 말하는 자명성과 대립하는 것은 우선, 휘브리스(Hybris, 교만)에 까지 이르려하는 본능적인 태도는 제외한 채 인식의 의지가 종속되었다는 점인데, 이것은 고전 그리스 철학에서 인간 주체성의 생산적 행위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지리를 수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원칙의 한 예 외가 궤변 철학에서 길을 냈다. 플라톤의 조명론이나 인식사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인식을 수용 사건으로 이해하기 위한 예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수동적인 이성을 인간 영혼의 한 부분으로 간주했다. 인식이 이루어질 때 자기 자신의 참된 것을 가능한 최선으로 순수하고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게 되면 분명히 인간이 창조적으로 인식의 과정에 참여하는 일은 그 내용을 변조시키는 원천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인식 과정에서 인식하는 자의 행위를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공간을 제공하는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은 이 행위를 로고스의 진리와 조화되는 것에만 한정시킨다. 이 로고스의 진리 안에서 이 인식행위는 자신을 그 받아들여지는 인상에 따라 나타낸다. 그리고 이 조화는 그 입장에 따라서 똑같은 로고스의 활동이다. 로고스가 인간 영혼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한에서 말이다.
기독교 사상에서도 역시 철학 학설을 다른 이유에서 교정함으로써 발생한 비의도적인 부차적 결과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식 과정에서 인식하는 자의 생산성이라는 표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이 일어났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상기론(Anamnesislehre)을 출생 이전의 실존 표상으로부터, 또한 이로써 재육체화론(Wiederverkörperungslehre)의 전체 복합으로부터 해체하기 위해서 전술한대로 mens(영혼)을 모든 풍부한 경험이라고 구상하면서 영혼에 놓여 있는 지식으로 잠정적으로 변형시켰다. 이런 지식은 외적인 이상의 동기를 통해서, 그리고 신적인 진리를 통해서 활동하는 것이다. 이 실제 활동은 여기서 여전히 조명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멘스論은 나중에 인간 영과 선험적 인식에 대한 표상의 선구가 되었으며, 이로써 같은 방향에서 키케로가 받아들인 본유관념(cognitiones innatae)을 강화시켰다. 보다 큰 영향력은 중세기의 기독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적인 누스(이성)를 인간 영혼에 고유한 이성력으로 바꾸어 해석한 것이었다. 大알베르트투스의 경우에 이러한 변역(變譯, Umdeutung)의 근거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주어졌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멸성을 자신의 학설에 따라서 인간영혼에 속하지 않은 활동적인 누스에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활동적인 이성을 인간 영혼을 구성하는 부분이라고 보는 이러한 견해를 통해서 육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개인적 영혼이 불멸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러한 변역의 결과로 인해서 인식 과정에서 영혼의 활동성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나오게 되었다. 옥캄과 그 학파의 인식론은, 특히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철학은 인간의 영이 인식 행위에서 생산적이라는 논점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켰다. 쿠자누스의 경우에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에 상응한다는 생각에서 발생했다. 이로써 이제 인식 과정에서 인간의 영적인 주체성이 근대의 중심부에 자리하게 되었다. 사물에게 이미 주어진 진리에 대한 인간적 경험과의 조화는, 이것은 인식을 이미 주어진 진리로 해석함으로써 고대 인식론에서 확증된 것인데, 이 조화는 인간 영이 바로 그 생산성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신적인 근원과 맺게된 동질성을 통해서, 또한 이로써 인간의 인식이 지향하고 있는 사물의 신적이 근원과 맺게된 동질성을 통해서 그 토대가 잡혔다. 물론 신학적 전제가 떨어져나가 버리면 생산적인 인간 영의 활동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정당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틀림 없이 모호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적 인간 영의 활동은 인간에게 의존적이지 않은 사물을 그 존재의 특성 안에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3. 세계를 역사로 이해하기
인류의 보편사 사상은 빌헬름 딜타이 이래로 늘 기독교적인, 혹은 결국에는 성서적인 (근원적으로는 유대교적인) 영의 산물로 파악되었다. 딜타이는 자신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어거스틴에게서 발견한 대로 이 사상의 근원은 “인류 역사에서 발전하는 교육이 내적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기독교 사상 안에”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곧 이 명제가 계속 확장되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가리켰다. 기독교 사상의 근원은 구약 성서의 유대교적 역사신학에 놓여 있다. 이스라엘의 민족사가 전체 인류에게 확대됨으로써 포로기 이후 시대에 발전된 유대교적 종말론 사상이 기독교의 역사적 사유에 선구가 되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로마서 9-11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선택 행위에 대한 바울의 상론에 등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서 이제 인류의 보편사 사상이 기독교적인 근원을 갖고 있다는 딜타이의 명제는 20세기 중반을 넘어서까지 영향력을 발휘했다.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생각에 따르면 유대인은 “역사의 의미를 하나님의 현현으로 파악한 최초의 민족”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우주적 순환을 신화론적으로 의식하는 방향과는 다른 것이다. 칼 뢰비트도 역시 비록 “무원칙한 질문”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향을 끼친 그의 책 “세계역사와 구원사건”(Weltgeschichte und Heilsgeschehen, 1953)에서 이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이 무원칙한 질문이라는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 사상을 “살려냈다”는 것이며, 또한 역사의 완전한 의미와 무의미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엘리아데와 마찬가지로 뢰비트도 역시 유대교와 기독교에 유래하는 역사의식을 우주적 순환으로 방향을 잡는 것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 방향은 그리스 역사가들의 역사 이해에 의해 각인된 입장을 말한다. 이런 고대의 역사관과는 반대로 기독교 역사관은 “원칙적으로 미래적”이다. “에스카톤(eschaton)은 역사의 진행에서 단지 한 마지막만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분명한 목표를 통해서 그 진행에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을 통해서 규정되는데, 그 하나님은 “처음부터 궁극적 목표에 이르기까지 단일성을 유지시켜 나감으로써 인간 역사에 이 단일성을 제공하는” 분이다.
기독교 이전의 고대인들이 -유대교는 일단 제외하고- 시간을 우주전 순환이라는 의미에서만 경험하고 생각한 반면에 바로 성서의 역사관이 시간의 이해를 미래적 성취를 향하여 나아가는, 직선적이고 불회귀적인 과정으로 부각시켰다는 주장은 지난 십년 어간에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았다. 이 경우에 역사에 대한 생각이 이스라엘에게서 우선적으로 등장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밖에서도 역시 시간 진행의 순환 표상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역사 서술에도 역시 역사적 진보 표상이 있다는 것이다. 고대 동방과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볼 수 있듯이 성서의 역사관과 성서 밖의 역사관 사이의 대립은 그렇게 엄청나게 상위하다고 볼 수 없는데, 어쨌든지 이런 대립은 이런 증명을 통해서 교정되어야 한다. 현실성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에 의한 결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대신에 에릭 푀겔린이 말하는 것처럼 역사 의식이 성장해온 오랜 과정에 대해서, 즉 역사 발생사에 대해서 언급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아데가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역사의 의미”는 유대인들에게서 최초로 발생했다는 점은 확실하다.(위의 각주 35을 보라.). 이 경우에 유대인들에게 인간 행위의 결과가 최우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행위의 총괄개념,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최우선이었다. 하나님의 행동은 자기 피조물의 행동을, 그리고 인간의 행동도 역시 포함하며 관통한다. 이 피조물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도구이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성서의 개념은 인간 행위만이 아니라 이간에게 일어나는 일까지 포괄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해는 이 민족들에게 현실성의 개념이 곧 역사라는 사실을 해명해준다. 늘 거듭해서 잇달아 새롭게 일어나는 사건에서 말이다. 그 사건은 하나님으로부터 사건을 연관시켜 나간다. 이런 경험은 이 章의 첫 절에서 다루어진 견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모든 사건의 우연성을 하나님이 사건에서 활동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말한다. 이제 신적인 일의 연관이라는 관점이 덧붙여지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그의 약속으로부터,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성에서 그 토대가 공고해진다. 이스라엘의 역사 경험은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마도 신적인 선택 사상이라는 가나안 헷족의(hethitisch) 바로 그 역사 의식에서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이 왕조의 미래만이 아니라 전체 민족과 관련되었으며, 또한 이 민족들을 통해서 결국 전체 인류와 관련된다. 이스라엘의 창조 신앙은 전체 인류가 하나님의 역사적 용무의 대상이며, 이스라엘은 민족들에게 공의(公義)를 베푸는 증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었다는 사상의 핵심이 되었다.(이사야42:1, 51:5-7)
기독교의 역사 의식도 역시 하나님의 선택 행위에 대한 신앙에서 발전했다.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선택은 유대 민족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약속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는 세계 민족을 목표로 한다.(갈라디아서 3:15-29). 더군다나 복음서에서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듯이 이스라엘이 시시 때때로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이방인을 포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 계획이라고 본다.(로마서 11:11f., 25). 예수의 부활에 나타난 “둘째” 인간에 대한 바울의 서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죄 행위를 인류사적 전망으로 확대할 수 있도록 그 동기를 부여했다. 이 둘째 인간의 “형상”(形像)은 모든 나머지의 형상을 짊어져야 하는데, 이는 곧 “첫” 인간인 아담의 형상을 따라서 형태를 입었다는 것이며(고린도전서 15:47-49),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많은 이들”의 사죄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쳤다는 것이다.(로마서 5:18,19, 또한 5:10참조). 이레네우스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바울의 진술을(고린도후서 4:4)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창조된 인간의 운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역사를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라고 파악했다. 인류가 그리스도를 향해서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다는 사상은 이미 바울에게서 암시되고 있는 바인데(갈라디아서 4:1-4), 이 사상은 이레네우스에 의해서 계속 발전되어나갔다. 인류가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다는 사상을 딜타이는 인류의 보편사적 이념의 근원이라고 간주하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그리고 어거스틴의 역사신학으로 소급시켰는데(위의 각주 33을 참조할 것), 이 사상은 사실 기독교 사상에서 볼 때 더 오래된 뿌리가 있다.
프랑스 계몽주의에서 출발하는 근대의 역사철학이 역사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세속화에 기인한다는 주장은 뢰비트가 아니라 오히려 딜타이가 처음 제기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인류가 이 역사의 주체로 간주되었다. 말하자면 인류가 역사의 대상(참조되어야 할 주체)일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는 행위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늘 그렇듯이 하나님의 행위를 역사적 단일성의 근거로 표상하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분리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인류의 보편사 주제는 기독교를 통해서 철학 사상에, 그리고 역사 서술에도 중재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개척된 세계와 인간의 현실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의한 결과였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서 부각된 주제에서와 같이 전체 인류를 포괄하는 역사관에도 역시 기독교적 근원이 잊혀져 있던 그곳에서 여전히 그 증거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4. 무한자에 대한 실증적 평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한자는 무규정성이라는 의미에서 질료적 속성을 갖는다(Phys 207 b 35). 이것은 사모스 섬 출신의 멜리소스(Melisos aus Smos)가 받아들인 것처럼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그러니까 신적인 것)가 아니라 크기를 완성하기 위한 질료일 뿐이다. 즉 가능성이 있는 전체이지 현실적인 전체가 아니다.(207 a 21f.). 플라톤도 역시 이와 비슷하게, 질료라는 전문 용어를 아직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존재자의 생성이 무규정성에게 일종의 한계를 설정하는 기준에 달려 있다고 이미 생각했다.(Philebos 26 d 9f.). 무한자는 분명한 기준의 단일성과 관계되어 불분명하게 나타나는 다소(多少)의 이원성이다.(24 b 5). 여기서 말하는 분명한 기준은 다(多)를 소로부터 구분짓는 한계다. 플라톤은 이 기준이 설정되어 존재자가 나타나는 것을 그가 하늘과 땅의 왕이라고 칭한 이성의 탓으로 돌렸다.(28 c 7f.). 실제로 이것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데미우르고스의 창조적 활동에 대한 서술에 상응한다. 그러나 신성은 나름대로 무한자와 달리 확실성과 한계를 통해서 한정하는 원리로 그 특색을 드러내는 게 틀림 없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코스모스의 아르케(arche)를 무진장한 저장품이라는 의미에서 한정이 없고 규정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무진장한 저장품에서 만물이 생산되며, 또한 만물은 다른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아낙사고라스도 역시 神적인 누스를 “전체적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fg. 12)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누스가 이미 철학자들에게는 체계를 세우는 원리로서 무한하게 다향한 질료라는 주장과 맞서 있었지만 말이다. 신적인 근원의 확실성과 한계성이라는 명제는 이에 맞서 파르메니데스에게 소급되는데, 그는 존재를 “주변에 한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Parm fg. 8, 31-33). 그 다음 시대는 신적인 누스를 플라톤의 생각에 따라서 자기를 자기 안에 규정되는 자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Anal. post. 72 b 10)가 가르쳤던 대로, 그것이 한정될 수 없다고 해서 인식이 끝날 수 없다는 이유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자로 보았다. 신적인 자기 인식을 위해서 오리게네스는 여전히 하나님의 한계성과 그의 능력을 주장했다.
그레고리우스(Gregor von Nyssa)는 신관(神觀)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자에 대한 평가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경한 첫 번째 인물이다. 이러한 변경이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플로티노스에 의해서 어느 정도로 탄탄해졌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분명히 신적인 본질의 무한성이라는 명제는 그레고리우스 때문에 (기독교) 신론의 기본 진술이 되었다. 신적인 본질의 무한성은 우리 인간의 인식이 하나님을 인식함으로써 끝날 수 없다는 사실의 토대가 되며, 또한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에게 파악될 수 없다는 사실의 토대가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제일 원인으로서의 원인 없이 존재하지만, 아버지에 의해서 증명된, 즉 아버지에 의해서 야기된 아들은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인 본질일 수 없다는 아리우스의 논증을 막아내는 데 일익을 감당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하나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의 한정 없는 완전성과 유일무이성의 특징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의 무한자보다 큰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하나가 아니라 다수에 속한 각각의 것들은 서로 상대를 한정시킨다.
근대 초기에 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한 생각은 세계에 위탁되었다. 그리고 게오르그 칸토(Georg Cantor)의 집합론을 통해서 실제적인 무한한 것, 혹은 무한(Transfiniten)의 개념이 수학으로 도입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을 유일하게 실제적으로 무한하다고 보는 사상은 데카르트를 통해서 철학적 신학의 토대가 새롭게 놓인 이래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헤겔이 참으로 무한한 것에 대한 개념을 설명함으로써 그렇게 되었는데, 여기서 이 무한한 것은 그 앞에 아무런 대립도 찾아볼 수 없는, 따라서 유한한 것에 대한 고유한 대립으로 점차 생각되어야만 했던 것을 말한다.
5. 기독교적인 성육신 신앙의 성과
어거스틴은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의 학설에 접근해 있다는 점을 주지하면서 한 가지만 점에서만은 한계를 두었다. 즉 플라톤 철학에는 하나님의 인간되심(Menschwerdung)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De civ. Dei Ⅹ, 29). 이 말은 물론 기독교 이전의 고대 철학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형태들에 해당된다. 기독교 중세기에 다시 한번 성육신은 기독교의 초자연적 계시론으로 신학이 유보된 그런 주제로 돌아갔으며, 그래서 신학이 그 어떤 철학적 주제도 생산할 수 없었다. 이것은 비록 다른 전조가 있긴 했지만, 즉 철학적 이성이 종교 전승의 권위로부터 해방되는 전조가 있긴했지만 근대의 초기에 여전한 현상이었다. 18세기에 기독교가 철학적 반영과 해석의 대상이 되자 비로소 이런 사태가 변했으며, 특별히 헤겔의 종교 철학에서 계시, 성육신, 화해 같은 기독교의 기본 개념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헤겔에게서 성육신, 혹은 인간되심이라는 사상은 조직적 기능을 획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간되심은 하나님에 대한 이념을 참게 무한한 분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것에 대립해서 자기 자신에게서만 무한한 게 아니라, 그는 유한한 범위에 한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현재함으로써 정말 무한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 안에 성육신한다는 것은, 그래서 이것이 인류를 위한 성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참된 무한자에 대한 사상이 단지 논리적인 이념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역으로 기도교 성육신 신앙은 정말 무한한 것에 대한 철학적 사상을 위해서 종교적 토대를 놓는다. 이런 사상은 기독교의 성육신 신앙에 포함된 그 진리만을 파악한다.
성육신 사상은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 사상을 포함하는데, 이 사상은 화해론이 가리키는 바 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다. 이제는 헤겔이 이 연관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생각을 통해서 화해가 어떻게 철학적 주제로 간주되었는가 하는 그 방식이 중요하다. 요컨데 인간 사이의 화해만이 아니라 절대와 인간의 화해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화해는 바로 인간 상호간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 그 토대가 된다. 헤겔은 인간이 절대와 화해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계가 분열된다는 것을 바로 계몽된 근대 시대의 기호라고 묘사했는데, 이것은 옳다. 이런 진단은 다른 방면에 의해서도 역시 확증되었다. 예를 들어 호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아도르노(Theodor W. Adorno)가 “계몽주의의 변증법”(1944)이라고 묘사한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진단이 옳다면 근대 문화 세계의 실질에는 화해가 객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필요가 인간에 의해서 주체적으로 그렇게 느껴지든지 않든지 상관 없이 말이다. 이런 필요는 유한자의 절대화로 인한 갈등 가운데서 그 토대가 이루어졌다. 절대화된 유한한 법정, 또한 (그런 법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절대와의 관계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기독교의 종교적 내용으로 구성된 화해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헤겔의 시대 분석에 따르면 이것은 구체적으로 “철학의 필요”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이성적 보편성을 매개로 해서 모든 불화와 갈등을 극복하는 철학에 대한(nach) 필요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다음 시대는 헤겔이 제시한 길과는 다른 길이 놓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의해서 분석된 불화의 상황은 근대의 문화 세계에서도 여전히 그 형태만 새롭게 해서 그대로 증명되곤 했다. 이 근대의 문화 세계는 그들의 유래라 할 종교로부터 해방된 세계를 가리킨다.
화해 없이는 그 어떤 참된 자유도 없다. 자기 스스로 절대적으로 자리매김하는 유한자의 자유는 결코 참된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유는 그 모든 형식에서 파멸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유한자의 이러한 절대화를 부각시키는 갈등에서 파생되는 파멸을 말한다. 이것은 정치적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자유에 대해서 헤겔이 단호하게, 그러나 결코 진부하지 않게 가한 비판이다. 이렇게 이해된 자유의 파멸은 단지 이념적으로 숨겨질 뿐이다. 참된 자유는 절대와의 화해에 기인하는데, 이 화해는 자기의 유한한 현존을 절대화하는 망상에서, 그리고 자기의 자유의지로부터 나오는 자기 실현의 노력을 절대화하는 망상에서 유한성과 그것으로 인한 귀결을 대항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다.
참된 자유가 하나님과의 화해에 기인한다는 사실은 특히 헤겔의 세계 역사 철학에서 피력된 그의 생각만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만 할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자유가 기독교의 성과라는 사실에 의한,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의 세계사적 의미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의한 결과이다. 그것은 곧 복음이 말하는 사상이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말로 자유로워질 것이다.”(요한복음 8:36).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린도후서 3:17). 기독교 신학은 이 자유 사상을 선택의 자유와 중재시켰다. 신학이 선거의 자유를 원래의, 여전히 확정되지 않은 자유의 형식으로 파악함으로써 말이다. 즉 인간이 진선(眞善)과, 그것은 그에게도 역시 선한 것인데, 반대되는 것을 결정하는 곳에서 그는 여전히 참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의지가 작용하는 선택은 부자유의 표현일 수 있다. 선과 일치되는 의지만이 참으로 자유하다. 이런 통찰은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과 상응하는데, 그가 말하는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즉 신앙이 그리스도와 연결됨으로써,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그 토대가 잡힌다. 이러한 신앙은 모든 인간적 권위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라는 불빛에서 동료인간을 섬기도록 자유롭게 한다. 헤겔은 기독교의 자유에 대한 이런 종교개혁의 주장을 근대 자유사상의 근원과 기초로 간주했는데, 이는 옳다. 근대의 발전에서 개개인의 자유를 위한 자연법적 기초가 신앙에서 개방된 자유의 종교개혁적 사상 앞에서 유보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정당하다. 즉 근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유사상과 연결되어 있는 파토스는 여전히 그 종교적 근원에서 생명을 유지한다. 자연법적 자유 사상에서 이것은 그렇게 당연하지 않다. 자연법적 자유 사상이 근대 자유 사상의 기독교적 근원을 배경으로 밀어넣었다는 사실은 근대의 문화의식이 기독교로부터 해체되는 과정에 속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세속화라는 이름으로 논의된 과정은 다음 장에서 계속해서 고찰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근대 시대에 신학과 철학의 관계 발전에 대한 사실적인 판단을 위해서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주제는 근대 문화의 공식적인 의식이 기독교적 뿌리로부터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 사상의 파토스가 증명하고 있듯이, 여전히 기독교와의 관계가 상존한다는 사실에 대한 보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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