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판넨베르크

4장 기독교 사상과 스토아 철학의 관계

은바리라이프 2018. 1. 9. 11:39

4장
기독교 사상과 스토아 철학의 관계

1. 스토아 학파의 출발점과 그 개요

스토아라는 말은 폴리그노트라는 벽화로 장식된 아덴의 (스토아 포이킬레) “채색 강당”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강당에서 스토아 학자들이 강의했다.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4세기 말경에 페니키아 출신으로서 사이프러스의 키티온에서 온 젊은 제논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논이 자기 학파를 설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마 에피큐로스의 아테네 이주(BC. 307/06)였던 것 처럼 보인다. 에피큐로스의 학설은 인간 삶의 목표에 흥미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또한 이 세계를 우연의 장으로 간주한 삶의 예술이었다. 제논은 이 두 주장에 대해서 격분했다. 왜냐하면 로고스 때문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는 점을 에피큐로스가 완전히 간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논은 인간과 인간의 생활태도에 대한 질문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했다. 


윤리학의 주제는 스토아 철학의 시초에서도 역시 철학함의 출발점이었다. 인간은 자기의 생활태도의 근거를 에피큐로스의 자연주의와는 달리 코스모스를 제어하는, 그리고 자신의 단일성에 토대를 놓는 로고스의 기능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토아 철학은 “있는 그대로의 삶”(kata tén physin zén)을 삶의 이상이라고 널리 선전했다. 이렇듯 윤리학과 물리학을 한 묶음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스토아 철학에서 사상의 조직적인 일치인 체계(System)가 획득해야만 했던 그 의미를 가리킨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적대자들이 제기한 독단론의 비난이 이런 일을 준비했다. 에피큐로스나 그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고대 스토아 학파가 형성되던 국면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 사유의 비판적, 의심스러운 요소들을 전면으로 밀어낸 플라톤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로고스 사상과 그 완성은 스토아 철학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스토아 철학은 의식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Heraklit von Ephesos)와 조화를 이루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6세기에 로고스를 “만물의 군림자”라고 했다.(fg. 72, 또한 50과 2를 참조할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마 대립하는 현상이 상호적으로 제한받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칠현금과 활처럼 서로 긴장된 통일이” 뒤섞여서 그 대립이 극복되도록 제한받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로고스는 이런 대립을 일치시키고, 그래서 세계 질서에 토대를 놓는다. “세계 질서는, 모든 존재를 위한 그 질서는 어떤 신이나 인간이 창조한 게 아니라, 늘 그렇게 있었으며, 현재도 그렇게 있고, 영원히 살아있는 불이 될 것이다. 적당하게 타다가 적당하게 꺼져버릴 것이다.”(fg. 30). 

헤라클레이토스를 포함해서 스토아 학자들은 인간에 의해서 코스모스에 놓인 질서가 이성적으로 지각되는 것을 로고스의 덕분으로 생각했다. 아테네 풍의 사상가들에게는 기원전 5세기 이래로, 즉 파르메니데스의 영향력이 여전하던 아낙사고라스 이래로 누스(Nus, 이성)의 개념이 전면에 드러나 있었다. 특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이런 표상은 이제 로고스 개념에 의해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스가 참된 현실성, 그리고 상존자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와 병렬되어 있다면, 로고스(헬라어 legein에서 왔는데 '모으다'는 뜻)라는 단어는 영적인 활동을 가리켰다. 이런 활동은 “상이한 직각 대상, 표상, 인상을 ‘모으고’, 연결하고, 그리고 ‘총계한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전체에 대한 판단과 이해를 획득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로써 스토아 철학자들의 중심 노력이 실현된다. 전체(코스모스)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그 고유한 현존의 근거를 얻기 위한 그 철학자들의 목표다. 초기 헬레니즘의 정치적 혼란 시기에, 그리고 폴리스의 해체 시기에 개체들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놓은 한 현존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개별화된 현존 앞에서 살아가는 태도의 거를 코스모스의 질서에서 획득한다. 따라서 체계는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이런 기본적 사유 틀은 스토아 철학의 모든 부분들 가운데 관철되어 있다. 논리학, 물리학, 윤리학에서. 이 세 관점에 대해서 스토아 학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로고스가 허락한 전체의 단일성과 상관성이다. 
따라서 a)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에서는(논리학) 개체 인식이 자기 자신만을 향할 때는 불확실하다. 따라서 철인은 동의(synkatáthesis)를 자기가 만난 사람들의 생각만이 아니라 개별화된 지각으로도 되돌려야 한다. 그가 모든 다른 것들과의 조화를 확인할 때 까지 그렇게 해야한다. 즉 스토아 철학자는 지각된 일을 실제적으로 이해하는 것(katáthesis)에 대해서 언급하게 된다. 영혼을 지배하는 로고스를 통해서 개체에 대해 논박의 여지가 없는 확실성이 인식과의 연관 가운데서 발생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상관적인, 조직적인 인식의 확실성은 b) 코스모스가 로고스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일종의 체계라는 사실에 그 토대가 놓여 있다. 여기서 이 로고스는 개인들을 연관시켜나감으로써 인간 영혼으로 하여금 인식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로고스는 사물의 본성에 이미 주어진 것만을 향해서, 즉 모든 존재자들의 밀착된(geschlossen) 연관만을 향해서 성취해나간다. 이 연관의 밀착성은 heimarmene, 즉 운명에 대한 스토아 학설을 통해서 심도 있게 다루어졌다. 이것은 모든 개체들이 자기에게 할당된 자리를 코스모스의 틀에서 취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koiné physis는 개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사응하며, 따라서 자신의 특별한 본성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상응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로고스의 몫을 통해서 “자기 본성상 세계의 본질을 성취해 나가는 그 본질이을 따르게 된다. 여기서 세계의 본질은 그러한 형태를 얻게 된다.” 이로써 스토아 철학의 물리학으로부터 c) 윤리학으로 넘어가게 된다. 
스토아 철학의 윤리적 원칙은 (크뤼십포스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살아야” 한다.(homologouménos tè physei zèn). 이를 통해서 인간의 생활 태도는 코스모스의 질서에 상응하게 되고, 인간의 현존을 관리하고 생명을 통일시키는 로고스에 상응하게 된다. 인간은 다양한 인상과 사물에 현혹당해서 그것에 빠져들면 안되고, 오히려 로고스를 통해서 안정적으로 되며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인간은 흥분을 제어해야만 한다. 이것은 덕을 통해서 발생하며, 또한 그 안에 덕의 본질이 있다. 따라서 윤리적 과업은 로고스를 통해서 야기된 모든 개체의 연관성을 통해서 생명의 단일성과 정체성을 목표로 삼음으로써 아주 정확하게 인식론과 물리학과 일치한다. 

2. 기독교 신학과 스토아 철학
플라토니즘과는 달리 기독교와 스토아 철학의 관계에는 우선 간과될 수 없는, 근본적인 대립이 개재해 있었다. 즉 이 대립은 성서의 하나님이 세계에 초월해 있다는 사실에서 주어졌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신적인 것이 코스모스 안에 완전하게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신성의 총괄개념은 코스모스를 완전히 지배하는 로고스이며, 프뉴마이며, 코스모스의 영혼이다. 그리고 세계에 내재하고 세계를 일치시키는 신성은 세계를 소생시키고 주기적으로 태워버리는 불 속에서 질료적으로 나타난다. 교부들 중에서는 오직 터툴리안이 하나님은 현실성이라고 한다면 물체임에 틀림 없다는 이런 공격적인 논증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 이외의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는 물질 세계를 초월해서 독자적으로, 순수하게 영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는 플라톤의 학설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비육체성을 고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인간론에서도 역시 기독교 신학은 스토아 철학과 근본적인 대립을 맛보았다. 왜냐하면 이 철학은 영혼의 불가사성에 대해서 논란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토아 철학의 유물론이 불어온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들은 이 세상의 현존을 초월하는 생명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물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몇몇 기독교 신학자들은 (세계가 불에서 사라진 다음에 또 다시 일어나는) 사물의 회귀에 대한 스토아 학설 가운데서 죽은 자의 부활을 암시적으로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죽은 자의 부활은 기독교가 희망하고 있는 대상이다. 이러한 해석은 우주론적인 순환을 정향하고 있는 스토아 철학의 세계 이해가 늘 새롭게 반복되는 만물의 회귀를 가리키고 있는 반면에 단지 유일회적인 반족으로 회귀한다는 사상을 가리키는 게 틀림 없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러한 순환적 표상은 생명이 죽은 자의 부활로 단 한번 회귀한다는 기독교 희망과 일치될 수 없다고 말이다. 
하나님 이해나 인간론에서 이러한 근본적인 대립이 있었지만 그래도 기독교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의 개개 항목 중에서 상당 부분을 이런 스토아 철학의 표상에 근거해서 발전시킬 수 있었다.
(a) 로고스 개념이 첫 번째로  거론되어야만 한다.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 von Alexandrien)은 로고스 개념을 선재적인 신의 지혜에 대한 성서의 사상과 등가를 이루는 철학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이해와는 달리, 오히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누스 개념과 상응하여 세계를 초월하는 본질로 표상했다. 그뿐만 아니라 로고스는 창조자 하나님과도 구별되었다. 로고스는 이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세계에 현재한다. 
영혼에 내재하는 로고스, 혹은 그런 사상(logos endiáthetos),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말의 “단어”로 표명된, 영혼에서 빠져나온 로고스(logos prophorikós) 사이에 있는 차이점은 근본적으로 인간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로고스의 활동을 고려하여 생겼는데, 이 차이점이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서 특별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스토아 철학은 인간 영혼에 속한 로고스의 두 형식을 구별했는데, 이 구별은 2세기에 기독교 삼위일체론을 진일보 시켰다. 즉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아버지와의 영원한 일치에 현존한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성육신을 통한 로고스의 등장 사이를 구별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 경우에 로고스의 등장은 그리스도의 출현이 유일회적인 사건이었다는 사실에 한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로고스가 “씨앗”의 형태로 창조 시에 활동했다는 것이 그 정점이었다. 이 씨앗은 “전체” 로고스가 성육신 사건에서 “완전하게” 등장할 수 있도록 인류가 준비하는 기능이었다.
(b) 기독교 신학이 스토아 학설과 접촉하고 있는 두 번째 주제는 인간 창조 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한 프뉴마에(창2:7) 대한 표상을 통해서 주어졌다. 그렇지만 성서의 입장에 따르면, 따라서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영은 프뉴마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표상과 달리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초월하는 위상을 갖는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이제 인간은 영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주어진 “은혜”이다. 기독교 신학은 2세기 후반 이래로, 아마 선택받은 이들의 본성에 기초를 둔 프뉴마에 대한 영지주의적 표상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영의 고지(告知)를 구원 질서에 한정시키고, 또한 창조 시에 받은 생명의 숨을 하나님의 영과 구별하려는 경향을 추구했다. 스토아 철학은 인간이 神의 프뉴마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과의 차이점이 더욱 첨예화 되었다. 이것은 영혼이 자연적으로 하나님과 유사하다는 플라톤의 전제에 대한 거부와 상응한다. 
스토아 철학의 프뉴마 표상은 하나님 이해에서도 역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바람의 본성과 영 사이의 유사성이(요한복음3:8) 영에 대한 구약 성서의 표상과 고대 그리스의 프뉴마 표상, 그리고 스토아의 그것과 공통적인 기초에 속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특징을 가장 순수한, 모든 것을 괄통하는 질료라는 스토아적인 의미에서 프뉴마라고 해석했다.(adv. Praxean 7). 오리게네스가 물체의 부분과 복합이 수미일관하다는 점을 암시함으로써 이러한 입장을 우스꽝그럽게 했던 논쟁이 끝난 다음에 기독교 신학에서 신적인 영은 전반적으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하나님 표상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비물체적인 누스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물론 스토아 철학의 프뉴마 표상보다 성서적 영 이해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 이해에서 신인동형동성론적인 rudgia의 발전에 출발점이 되었다. 이런 경향은 하나님의 오성과 의지의 관계에 대한 라틴 스콜라 철학의 심리학적 숙고를 통해서 현안으로 등장했다. 그렇지만 스토아 철학의 프뉴마론은 우주에 대한 경건과의 결합을 통해서, 또한 하나님의 초월에 대한 오인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이라고 표상하는 성서적 입장에 대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실제적인 것들과 신적인 것들이 물체적이라는 생각에서 나타나는 스토아 철학의 유물론이 여기에 연관되었다. 물리학은 스토아 철학의 프뉴마 표상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근대 물리학의 場개념은 이 프뉴마 표상의 유물론적 경향을 벗겨냈다. 또한 이로써 신학은 한편으로는 플라톤의 누스論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면에서 성서의 영(靈) 사상에 접근되어 있는 스토아 철학의 영 표상보다 훨씬 더 영에 대한 성서적 진술에 들어맞는 해석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무한한 장이라는 개념이 전술한대로 자신의 작용 효과가 나타나는 모든 유한한 현상으로 생각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 
(c) 기독교와 스토아 철학의 이해가 맞닿아 있는 그 다음의 주제는 세상 진행을 관리하는 신의 섭리에 대한 학설이었다. 이 학설은 제논과 크뤼십포스에 의해서 에피큐로스 견해와는 반대로 형성되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환희에 빠져있는 신들이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에피큐로스 철학이 아니라 플라톤의 착상에 근거할 수 있었다. 플라톤은 열 번째 율법서에서 아덴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들은 자신의 소유물을, 즉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모든 죽어야 할 피조물을”(Nomoi 902 b 8f.) 애지중지 돌본다.(899 b 4-905 d 6). 더구나 “만물 중에서 미미한 것들이나 소소한 것들을”(902 e 3)은 물론이고, 또한 그 무엇보다도 인간을(905 d 2) 돌본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서 pronoia(섭리)라는 단어가 아니라 epimélia(관심)이라는 단어를(903 e 3) 사용했다. pronoia라는 표현은 프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 회상기 Memorabilien에(Ⅳ,3,12) 나온다. 그런데 이 개념은 크세노폰에 의해서 우주 사건의 질서에 대한 표상과 묶이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만물이 인간 때문에 창조되었다는 명제와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인간을 목표로 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제논과 크뤼십포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다음에 체계적인 인간 중심주의로 자리를 잡았다. 이 인간 중심주의에 대해서 막스 포렌쯔가 말하기를 “그리스 철학의 영과는 근원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는데, 섭리의 인간 중심주의는 아주 놀랍게도 구약 성서의 창조 신앙(시편8:6,7)과 연관된다. 폴렌쯔는 제논이 ‘이런 형식의“ 섭리 신앙을 아마도 자기 고향인 페니키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스토아 철학의 섭리 사상은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서 채용될 수 있었다. 물론 성서의 세상 초월적인 하나님과 관련되었는데, 이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섭리 사상은 성서에 널리 증거된 하나님의 세계 통치를 특징적으로 설명하는 데 아주 탁월하게 어울린다. 프로노이아 개념은 신약 성서에서는 아직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로 설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때때로 클레멘스 편지에서 발견된다.(24,5). 그리고 2세기 호교론자인 안티오키아의 테오폰필로스는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한 그 토대를 이 개념에서 확보하였다.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같은 이들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에서는 기독교 교리를 조직적으로 제시하는 데 권위적 있는 의미를 획득했다. 요컨데 구원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클레멘스에 따르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구원자에게서 현실화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교회의 교리가 단지 허구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게 뻔하다는 것이다.
섭리론을 조직적으로 형태를 구성함으로써 이미 고대 스토아 철학에서, 특히 운명론적으로 활동하는 필연성(heimarmene)에 대한 표상과 맞물려서 신정론(神正論)의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문제는 에피큐로스와 플라톤과 회의주의의 비판에 의해서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던져졌다. 선한 신성이 모든 개개인들에게 이르기까지 세계 진행을 관리한다면 도대체 이렇게 많은 악의 현존이 어떻게 그 사실과 조화될 수 있는가? 소위 중기 스토아 철학의 학두(學頭)인 로도스의 파나이티오스(Panaitios von Rhodos)는 카르네아데스에 의해서 몹시 인상 깊게 수행된 비판에 대해서 인간 의지의 자주성을 강조함으로써 견제했다. 이것은 도덕적 악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말이다. 그 다음 시대가 되자 이 문제들은, 그리고 그 이외의 문제들은 키케로와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에 의해서 다루어졌다. 기독교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운명신앙을 거부하고, 또한 악의 원인인 인간의 의지적 자유가 도덕적 악과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함으로써 그들의 편을 들수 있었다. 기독교 신학은 세상에 만들고 세상을 관리하는 로고스와 일치하는 헤이마르메네의 운명적 세력을 표상함으로써 이러한 논증에서 세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 스토아 체계보다 훨씬 나은 전제를 제공했다. 
(d) 스토아 인식론도역시 기독교 신학에 그 흔적을 남겼다. 특히 신앙과 신앙의 확실성에 대한 이해에서 그렇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서가 그리스인들을 가리켜 신앙을 어떤 토대도 없이 야만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신앙을 잘못 언급한다고 비판했지만 동의(synkatáthesis)에 대한 스토아 학설과 관련해서 신앙의 개념을 자유로운 결정에서 발생하는 승인(prólepsis)이라고, 또한 하나님의 선책에 기초한 자연성이라는 의미에서 신앙을 본질(히브리서 11:1)이라고 해석한 바실레이데스와 반대로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알고 승인하는 것(synkatáthesis)이라고 규정했다. 클레멘스는 이를 통해서 동의(assensus)가 곧 신앙이라는 이해에 토대를 놓은 셈이다. 이런 이해는 기독교 신학에서 나중에 권위를 확보했으며, 결국 바울의 로마서 10:9에서 제시되었다. 바울은 같은 문장에서 신앙을 프로렙시스(승인)라고, 히브리서 11:1에 따라서 희망의 대상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연결된 미래의 구원을 선취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를 둔 희망에서 하나님의 로고스는 우리의 스승이며, 또한 클레멘스에 따르면 신앙의 확신은 바로 이것과 관련된다. 클레멘스의 경우에 고의적인 승인을 강조함으로써 신앙의 동의는 틀림 없이 자발적인 색조를 갖게 되었다. 이 자발적인 색조는 신앙의 동의를 스토아 철학의 동의론과 구별시키는데, 이 스토아 철학에서 동의의 확실성은 개인들의 지각과 판단이 전체 경험에 편입되는데 따라 달라진다. 그렇지만 신앙의 확증에 대한 기독교 교리가 계속적으로 논의되는 역사 속에서, 신앙적 확증이 자라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판단이 경험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되었다. 죤 헨리 뉴맨은 이 문제를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에 대한 매우 놀랍도록 실체적인 접근을 통해서 다루었다.
(e)  단일 문제로서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은 자연적 하나님 인식이나 자연 신학에 대한 학설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에서 특별히 효과가 심대했다. 기원전 2세기에 파나이티오스는 이 학설을 국가 예배의 정치 신학과, 또한 시인들의 신화적 신학과 구별했다. 자연신학 개념은 그 누구보다도 어거스틴을 통해서 기독교 교리와 묶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때까지는 여전히 하나님 인식에 대해서 어떤 특징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 인식은 인간 본성상, 인간의 영혼이 창조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면에서 경험을 통해서, 또는 모든 경험 이전에 주어진 것인데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늦게 자연적인 하나님 인식을 파악하게 된 다리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기본 개념(koinai ennoiai)을 통해서 주어졌는데, 이것을 케케로는 본유(本有)개념(ideae innatae)라고 해석했으며 여기에는 도덕적인 생활 태도의 기본 개념 이외에 신성의 실존과 그를 경배할 의무를 안다는 것이 포함된다. 
한 로고스의 활동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에게서 비슷하게 형성된 공통의 기본 개념이라는 학설은 전체 인류가 기본 법원칙을 안다는 총괄개념이 곧 자연법이라고 보는 스토아 학설의 기초다. 자연법 학설은 스토아 철학의 자극에서 시작되어 로마의 법학자들에 의해서, 또한 철학적로는 키케로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자연법이 기독교 사상에 끼친 영향은 바울이 이방인들도 역시 “본성적으로 법대로 행하고”(로마서2:14), 따라서 그들에게는 법의 요청이 마음에 새겨진다고(로마서2:15) 언급한 이래로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구약 성서적 율법의 권위가 자연법적 핵심으로 축소됨으로써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미 이레네우스는 예수가 해석하고 완성시킨 율법의 “자연명령”에 대해서 예수의 오심으로 해체되어버린 구약성서의 제의 법과 사법과는 반대로 언급했다. 자연법은 기독교 신학이나 로마의 법학자들에게 사회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법칙의 기초로 이해되었다. 소유의 불평등과 국가적 권리 체제의 불평등이 사회적으로 유지됨으로써 근원적으로 자유가 깨져버린다는 것은 죄의 결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에른스트 트뢸치에 따르면 기독교적으로 변화된 이런 자연법은 “교회의 고유한 문화 신조”가 되었다. 
(f) 양심(Gewissen)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해석은 자연법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요컨데 양심이 단지 스토아 철학 때문에 발견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나름대로의 태도에 대한 내적인 증거의 조유를 삶의 태도에서 깨달아가는 것이다. 양심은 오히려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도의 비극 시인들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중기 스토아 철학은 근원적으로 경고하거나 혹은 호소하는 양심의 소리로부터 모든 경험에서 발생하는 의식을 깨달았는데, 이 의식은 도덕적인 태도의 기본 법칙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황 가운데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양심에 대한 신약 성서적 진술이, 즉 로마서2:15, 13:5, 혹은 고린도후서4;2, 디모데전서1:5, 19, 또한 3:9 등이 해석되었다. 여기서 양심의 소리는 스토아 철학의 koinai ennoiai(공동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윤리 규범 의식을 표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근대까지 집요하게 유지되었으며, 양심판단의 역사적인 상대성을 의식적으로 오랫동안 뒤로 물리쳤다. 
(g) 이제 기독교 신학이 스토아 철학과 밀접한 접촉을 가졌던 마지막 부분인 윤리학의 취급에 대해서 언급되어야만 한다. 모든 인간이 도덕적 개본 개념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기원전 2세기에 파나이티오스는 윤리학을 책임론(Pflichtenlehre)라고 제시했다. 이에 기초를 두고 키케로는 케싸르가 죽은 해(기원전44년)에 논문 De officiis를 썼다. 그렇지만 그는 책임개념에 대해서 이미 몇 년 전에 문답집 De finibus bonorum et malorum에서 논쟁을 벌였다. 이 두 문헌은 기독교 신학에서 윤리를 조직적으로 다루는 시초로서 중요하게 되었다. 특히 서방 기독교에서 그렇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von Mailand)는 최초로 윤리학 문제를 독립적으로 다루었는데, 이것은 케케로의 입장에 가까이 섰다. 그렇지만 스토아 철학자와 키케로는 책임 개념(kathékonta)의 폭을 매우 크게 확대시켰다. 여기에는 그 본성상 인간에게 “따라붙는” 모든 행위가 포함되었다. 말하자면 자기 보존, 번식,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같은 것들이다. 이성적인 행위(kathorthómata)는 책임의 전체 주변과 밀접한 동아리를 형성한다. 즉 이성을 통해서 흥분을 감소시키는 행동방식의 동아리를 형성한다는 말인데, 이 행동 방식은 전통적인 덕 개념을 통해서 특징화된 것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이제 honestum(존귀함) 개념을 오는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조건과 관련시켜서 책임 개념을 완전히 비스토아적인 방향으로 전환함으로써 책임 개념을 협의적인 의미에서 도덕적인 책임으로 몰아넣었다. 이 honestum 개념은 키케로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여러 개별적 문제에서 스토아 철학의 이해를 좇았다. 스토아 철학의 세계 경건성이 기독교가 이해한 영과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간에 유효적절한 자극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거리감은 그들이 하나님을 내재(內在)주의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나타나는 그것이다. 전체 기초 설정이 심대하게 다른데도 기독교가 스토아 철학의 통찰을 받아들인 그 외연은 개별적으로 훨씬 현저하다. 중세기 라틴 저술가들에 의해서 유지된 스토아 철학 사상은 문화적 의식이 기독교로부터 벗어날 때도 새로운 방식으로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초기 근대에 발생했다. 

3. 근대가 기독교와 분리하게 된 스토아적 동기의 중요성

르네상스와 휴매니즘은 스토아 철학의 자연 개념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왔다. 요컨데 인간적 자연과 코스모스적 자연 사이에서 스토아 철학이 보여준 상응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스토아 철학의 윤리학과 자연을 따르는 암호는 자신이 스토아 철학자였든지(세네카), 혹은 스토아 학설에 보도했든지(키케로) 이런 고전적인 문필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휴매니스트들에게 호감을 받았다. 여기서 기독교와 분리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기독교적 동기와 스토아 철학을 포함한 그리스-로마 시대의 동기가 새롭게 융합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는 쯔빙글리와 칼빈이 자신들의 섭리론을 다루면서 스토아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루터도 역시 예정론과 라우렌티우스 발라(Laurentius Valla) 시대의 스토아 철학적 결정론에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에 멜랑히톤은 수년 후에 의지의 자유에 대한 키케로의 논증에 근거해서 이런 stoicas disputationes(스토아철학 논쟁)에 참여했다.
멜랑히톤이 키케로의 입장에 근거해서 스토아철학의 숙명론에 반대하고, 또한 그것이 기독교 신학에 끼친 영향을 반대했지만, 그는 바로 키케로의 중재를 통해서 다른 스토아 학설을 수용했는데, 특별히 이성의 “자연적 빛”에 대한 학설인데,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확대된 본유 관념에서 -무엇보다도 윤리학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딜타이에 따르면 이제 멜랑히톤에게는 “18세기에 영국의 이신론자들이나 독일의 합리주의자들이 선포했던 것처럼” 자연신학과 도덕에 대한 학설이 이미 전면에 등장한다. 아직은 원죄론을 뒤로 밀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인간에게 공통되는 본성을 따르는 일이 현재의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데 기본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17세기에 자연법론과 함께 자연적 신인식과 자연적 윤리의 권위에 대한 확신은 종파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된 기독교 교리에 맞서서 근대 사상이 독립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고, 도한 사회의 평화를 뒤흔드는 종파적 대립을 멀리하고 사회를 재건하려는 기초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단서가 될만한 인물은 헤르베르트(Herbert von Cherbury, 1583-1648)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De veritate(진리에 대하여, 1624)에서 인간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그리고 키케로에 따르면 “본유(本有)적인”, 즉 consensus gentium(민족일치)라는 의미에서 모든 민족에게 해당되는 기본 개념을 스토아 철학적인 바탕에서 받아들임으로써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종교적 기본 진리론을 발전시켰다. 하나님의 리얼리티, 하나님을 섬겨야 할 책임, 하나님을 섬기는 핵심이라 할 덕과 경건성의 연결, 모든 과오를 용서받아야 할 필연성, 죽음 이후의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보답. 그는 이 다섯 가지 종교의 기본 진리를 참으로 보편적인 교회의 근본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나중의 이신론과 합리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렇듯 스토아적 동기의 도움으로 윤리학은, 물론 종교도 역시 그 근본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 대한 의존성으로부터 일탈하게 되었으며, 자연 이성의 자율에 토대를 놓게 되었다.
헤르베르트는 그에 앞서 몽떼뉴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보존하고 전개하려는 자연적 본능을 스토아 철학적인 바탕에서 다시 수용했다. 키케로에 의하면 이 자기 보존과 전개를 알므로서 시간 의식이 형성된다.(De fin. Ⅲ,16ff.). 17세기가 끝나갈 무렵 자기 보존 사상은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통해서 유한한 만물에 해당되는 형이상학의 기본 원리로 보편화되었다. 그에 말에 따르면 만물은 애를 쓰며 자기 존재를 고집한다. 스피노자는 상술한 시기인 17세기 끝무렵의 십년 어간에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양식으로 이런 사상을 상당히 강조해나갔다. 이미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인간론은 자기 보존을 추구하는 원리를 모든 인간의 태도에 결정적인 요소라고 간주했다.(Leviathan Ⅰ,14). 또한 그것을 사회계약론의 기초라고 간주했다. 사회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자유롭게 처리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사회적 평화를 통해서 각기 개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정치의 통치질서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 기독교의 자연법론과는 달리 이제부터는 인간의 근원적인 평등과 자유라는 (스토아적인) 이상이 다시 관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자연 상태와 같은 자유가 죄로 인해서 숙명적으로 상실된 게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개인들과 상관 없이 국가 권력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이다. 이 국가 권력은 그것을 통해서 보증된 시민의 자유가 사회 상태의 틀에서 교환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다. 자기 보존의 원리는 근대 사회학과 윤리학이 종교적 전제들로부터 독립하도록 견인했는데, 이러한 견인의 보다 넓은 의미는 결코 과대평가될 수 없다. 인간 실존의 자율과 자기만족성이 차지하고 있는 근대의 위치는 단순한 이성 자율을 뛰어넘어 과대평가되는 바로 그곳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근대 신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논하기 전에 우선 일련의 주제들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 주제들은 우선 기독교에 의한 결과로 발생한 것이며, 또한 순수 철학적 반영이라는 부차적 주제가 된 그것이다. 이런 테마에 대한 면밀한 고찰은 근대 철학이 기독교 전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사실 명료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