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원어해설

47.바달( בּךל H914) 로마서 98 사랑안에서.

은바리라이프 2015. 11. 24. 21:14

47.바달( בּךל H914)

 

로마서 98 사랑안에서..말씀 본문기록...

 

(요1:2~5)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그 말씀으로 그 말씀을 담고 - 모든 것이 그 생명을 담고 있는 겁니다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예수안에 만물안에 생명이 있어요.그 걸 그게 먼지를 깨달아 알면 그 것을 빛이라 한다.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호쉐크חשׂף

 어둠은 죄를(ח) 아랫것으로(פּ) 분석하여주는(שׁ) 그 것 

    -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알면 오르אוֹר 빛이라 합니다.

     ; 하나님이(א) 시작하신다.(ר)

        그러므로 이 땅에 빛의 실체는 올 수 없습어요.

        어떻게 우리에게 그 빛을 설명해 주나면 그 아래 어두운 것들,어둠에 속한 아랫것들 속에

        담겨 있는 그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그 것을 빛 이라 합니다.

        그 생명을 빛이라 합니다.

 

말씀은 태초에(베레시트)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신 예수가 ‘베레시트’‘בּראשׂית에 언약된 일곱을 담고 오신 분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실컷 먹이는 그 양식을 담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은 바로 그 말씀을 담은 모형들로 창조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게 3절입니다. 만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로(말씀으로) 창조가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신 예수와 그 말씀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만물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당연하지요. 그 말씀(만물, 예수, 성경)은 전부 하나님이신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그 하늘 아래의 모형들을 어두움(호쉐크(חשׂףH2822)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움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나타난 것을 ‘빛(오르)(216, 오르אוֹר)이라 부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빛과어두움도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선과악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곱 언약을(말) 설명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문자로 주신 것이 계명,율법,레위기,십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모형으로 만들어서 가장 보기 좋은 동산 중앙(그 산)에 두셨습니다.

그게 뭐였습니까?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은 바로 예수 자신인 것이고요.

당연하지요.

그 성전이 말씀을 모형 한 것이고 그 말씀이 예수셨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은 당신을 성전이라고 하실 수밖에요.

그런데 그 계명, 그 성전을 표피적인 것으로만 받아 버리면 그게 곧 뭐였습니까?

죄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명과 성전을 진리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계명과 성전은 무엇입니까?

입니다.

그렇다고 이 역사 속에서 그 빛이 다른 것으로 제시 될 수 있나요?

역시 계명과 성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성도는 그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움을 빛으로 볼 뿐입니다.

어두움이었던 성전이 빛이 되었다고 해서 이 역사 속에서

그 성전이 다른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는 빛도 어두움도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이의 마음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러면 이제 그 사람에게 있어서 어두움과 빛이라는 개념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바달’( בּךל H914)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달’이 되어 (하나로 갖는 것)

‘빛’으로 보여 지는 그것을 하나님이 선(토브ט׀ב(2896)이라 부르십니다.(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니까

어떤 이에게 있어서 그 일곱이라는 말씀은 멸망의 도구가 되는 것이고

어떤 이에게 있어서 그 일곱은 구원의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인데

어떤 이에게는 어두움이요 어떤 이에게는 빛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8:14~15)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피난처,도피성,예수그리스도)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 이니라

그렇지요?

그래서 약속의 땅이라는 가나안에 이방의 일곱(가나안 일곱 족속)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곳에 엉뚱한 일곱으로 완성이 된 자들이 존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 일곱은 열(십계명)이라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레위기의 그 수많은 율법은 전부 열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 열은 곧 일곱을 가르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은 다섯으로 나누어서 주어진다고 했지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인간들이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어떤 영역을 제시하고 그들의 한계를 명확하게

구분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 사랑’에 관한 부분이 하달이 되고, 신약에서는 ‘이웃 사랑’에 관한 부분이

말씀으로 떨어집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사랑’의 다섯만이 주어지는 이유는 인간 측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임을

잘 깨달아 알라고,

한 마디로 실패하라고 주신 것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나서는

모든 시도는 시날에서의 바벨탑 쌓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 아닙니까?

인본주의가 생각하는 하나님 사랑, 내가 열심히 노력하여 하나님처럼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기특한 생각. 그건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