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원어해설

46-3.사랑은(‘아하브אהב’) 율법의 완성입니다.

은바리라이프 2015. 11. 9. 18:09

46-3.사랑은(‘아하브אהב) 율법의 완성입니다.

 

- 로마서 98.그 사랑 앞에서... 본문기록

 

아무도 그 참말인 진리를 알아듣지 못했고, 그 빛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성전이 서 있던 동산 중앙의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골고다입니다.

골고다는 성전이 서 있던 시온산에 있는 언덕입니다.

주님은 그 동산 중앙에 십자가를 지고 서십니다.

동산 중앙에 선악과나무가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선악과나무가 스스로 죽습니다.

그 언약의 기둥 위에서 인간의 육이 전부 부정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의 육신 안에서. 그리고 그 생명의 진리는 인간 측에서의 무력함이라는 전제를 타고

온전한 은혜로만 택한 백성들의 마음으로 뚫고 들어갑니다.

그 사람은 이제 거짓 증거를 할 수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 증거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이웃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진리는 이런 것입니다.’하고 제대로 전해주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라고 칭찬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측에서의 하나님 사랑, 치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구약을 통해 입증이 되었잖아요?

그들의 하나님 사랑에 대한 열심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죽여 버렸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단 말입니다.

신명기 6장의 그 유명한 ‘쉐마’의 처음이 뭡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냔 말입니다. 이런 딜레마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주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네가 희생제사와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즉 성경과 예수와 성전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것의 진의를 이웃에게 잘 흘려주면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위의 다섯,

즉 하나님 사랑을 완성하는 자가 되는 거야.’

사랑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에서 찾으면 ‘아하브אהב입니다.

그 단어는 성전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혹은 성전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

하늘의 참 성전을 진리로 잘 전해주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사도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분명하게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간 이성의 수준에 맞게 말씀해 주신 것이 진리잖아요?

그 진리를 올바로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전한다는 말이겠지요?

그것이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이고,

그 분을 다른 신으로 섬기지 않는 것이며,

그 분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 분을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로 공경하는 것이고요.

그게 바로 안식이잖아요?

그렇게 십계명의 하나님 사랑의 부분은 창세기에서의 그 ‘안식’으로 이해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안식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그 창세기의 안식은 넷의 마지막 완성으로 주어졌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신약의 그 산에서 다시 넷으로 그 안식을, 그 완성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게 바로 ‘온전’이라고 확인 도장을 찍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으로 완성이 되는데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여

이웃에게 흘려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롬13:10)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니라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 알 수도 없는 존재를 목숨 걸어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건 추측이요, 상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준으로 계시해 주신

그 만큼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역사와 인생과 육신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그 만큼의 분량을 다른 이들에게 소개해 주는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축약이 된 율법이 나중에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 하나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되면 그게 바로 하나님 사랑의 윗 계명의 성취니까요.

(갈5:13~14)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이렇게 온 율법은 이웃 사랑 하나로 축약이 됩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진리의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첨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으면 자유가 뭔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로 방종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이웃에게 흘려주기 위해서는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도들이 그들의 서신 서에서

제발 성도답게 좀 살자’는 식의 권고를 많이 했던 것입니다.

그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진리를 깨달은 성도는 그렇게 사는 것이 즐겁고 기쁘기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나, 헌신이나, 거룩한 삶의 추구 등이 구원의 과정이나 전제나 수단이 될 때는

그러한 것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나 종교행위들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에게서 나올 때에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행복의 재료들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선행이나 착한 삶 등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 해 보세요.

불쌍한 이들을 돕는다거나 힘에 부치는 구제와 선행을 할 때에 그냥 힘들기만 한가요?

아닙니다. 인간은 그러한 행위들을 통하여 위로와 기쁨과 힘을 얻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너무 힘들지 말라고, 너무 외롭지 말라고, 너무 심심해하지 말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주는 자유를 자신이 중독되어 있는 것을 합리화 시키는 데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게 정말 사랑을 전하는 자의 올바른 태도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을 전하는 자의 삶의 자세가 어찌 그렇게 가벼울 수가 있어요?

끊으려 노력하세요.

중독이 주는 쾌락은 잠시지만 그것이 주는 절망과 상심은 훨씬 무서운 것임을 본인들도 알잖아요?

끊고서 자기의 의지를 자랑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게 선물이라니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물며 어떻게 그러한 선물을 자기의 공로로 싸들고 하나님 앞에 가서

‘저 이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하고 상급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주어진 사랑에 근거한 것이라면 다 괜찮습니다.

그땐 성전 안에 들어가서 희생 제사를 드려도 괜찮고 밥 먹을 때마다 정결 예식 행해도 괜찮아요?

그는 그러한 율법적 행위 속에서 진리를 읽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바울도 율법이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있는 자처럼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자처럼 행동해 주며 진리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 모든 것들은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진짜 ‘사랑’으로 수렴이 되는 것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근거한 구제와 헌신과 헌금과 봉사와 선교, 열심히들 하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하세요.

그러면 온 율법이 그 안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사람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말씀으로 오신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