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자모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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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57) 예수의 표상인 아담
성경의 첫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베레쉬트’입니다. 이 ‘베레쉬트’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시간의 시작, 혹은 어떤 장소의 처음’, ‘머리’를 가리키는 것인데, 성경은 현대 히브리 문법이 생겨나기 이전에 그 히브리
알파벳이 가진 원의로 조합된 단어들로 기록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단어들을 하나하나 파자해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는 지금의 현대 히브리어가 아니라 원 시나이어와 깊은 연관이 있
는 고대 히브리어이기 때문에 현대 히브리어로만은 그 깊은 의미를 다 이해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 ‘베레쉬트’라는 단어를 파자해 보면, 자음 베ㅇㅣㅌ(성전, 집)+레쉬(시작, 머리)+알ㅤㄹㅔㅍ(하나님, 사람)+쉰(되새김, 분석)+요드(편손)+타우(완성의 표)의 합성어입니다. 즉, 베레쉬트라는 것은 ‘성전의 시작(머리)인 하나님을 잘 설명함으로 해서 시
간 안의 존재들에게 손을 펴서 넘겨주는 완성의 표’라는 의미를 그 안에 함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리로 읽어내면 ‘베레쉬트’(태초에)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며 역사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58) 한사람이 죽이고 한사람(그 한 사람의 그 아들)이 살리고
넷째 유다는 히브리어 ‘야다’에서 온 말인데 그 단어를 파자해보면 ‘손을 펴서 아랫말로 넘겨주다’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찬양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보고, 듣고, 연합되어, 그 아들을 넘겨주는 행위가 곧 하나님의 일을 찬양하
는 것이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뱀에 불과한 자신(가룟 유다)을 위해 아들이 뱀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오른손의 아들(베냐민 지파의 바울)로 거듭나게 되는 그 삶을 그대로 살며 넘겨주는 것이 찬양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로마서(63) 결국 모든 것이 하나이다
죽음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무트’는 파자를 하면 ‘진리, 이루었다’입니다. 진리가 이루어지면 ‘나’가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숨을 놓으시며 ‘다 이루었다, 무트’라고 말씀을 하신 후 돌아가신 것입니다. 진리가 예수의 죽음으로 완성이 되
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곧 사는 것입니다. 생명입니다. 영생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 장인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로마서(64) 산 자에게만 들리는 소리 ‘에바다’
전에도 한 번 설명해 드린 적이 있지만 ‘태초에’라고 번역이 된 그 ‘베레쉬트’라는 단어를 파자해 보면, 자음 베ㅤㅇㅣㅌ(성전, 집)+레쉬(시작, 머리)+알ㅤㄹㅔㅍ(하나님, 소, 사람)+쉰(되새김, 분석)+요드(편 손)+타우(완성의 표)의 합성어입니다. 즉, ‘베레
쉬트’라는 것은 ‘성전의 시작(머리)인 하나님을 잘 설명함으로 해서 시간 안의 존재들에게 손을 펴서 넘겨주는 완성의 표’라는 의미를 그 안에 함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성전이신 하나님은 이 땅의 보이는 성전을 모형으로 주어
서 설명해야 하잖아요? 그 역할을 하늘과 땅이라는 현상계가 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축약하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성막과 성전인 것이고요.
그 땅이라는 단어 ‘에레츠’도 파자를 하면 ‘하나님, 시작, 덫’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건지시기 위해 그물을 던지기 시작하셨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이 땅은 하나님이 쳐 놓은 그물이라는 말입니다. 그 땅이라는 그물에 모든 존재
가 다 걸려 있습니다.
■로마서(66)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내가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둔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그게 ‘바라크’입니다. 파자 하면 베ㅤㅇㅣㅌ, 로쉬, 카프로 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복은 복인데 ‘알지 못하는 복’입니다. 그러니까 그 복은 알면 복이지만 모르면 저주가 되는 그런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의 실체를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면, 저주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저주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앎이며, 생명이며,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선악과가 먼저 주어졌던 것입니다. 죽어서 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의 그 무화과 잎사귀 옷과 가죽 옷의 이야기가 나온 뒤 바로 이어지는 옷 이야기가 아벨과 셋의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어로 ‘셋’이라는 단어를 파자해 보면 ‘옷 입다’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제대로 완벽하게 차려 입은 옷을 ‘셋’이라 합니다.
거기에서 영어의 ‘suit’가 나온 것입니다. 정장입니다.
■로마서(67) 모든 것이 가짜이고 모든 것이 진짜이다
모세와 선지자, 즉 성경을 그냥 율법으로만 보게 되면 그건 부스러기, 물 없는 빵, 모래가 되어 그를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석이
‘추루, 생수를 내다’임에 반해 ‘부정한 자는 돌로 쳐서 죽여라’에서의 그 돌은 ‘에벤’입니다. 그 단어는 파자를 하면 ‘하나님의 아들, 알렙+벤’입니다. 율법을 예수로 읽어내지 못하면 그 율법이 저주의 돌이 되어 그를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물 없
는 돌인 것입니다. 거기에 맞아 죽는 자들이 부자들입니다.
■로마서(68) 소리를 그리는 자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진리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걸 율법이라고 해요. 크게 포괄적으로 성경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 글자는 아무도 모르는 글자였습니다. 모세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문자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선악구조 속의 인간의 마음에 담길 수 없는 하늘의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을 나타내실 때에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십니다. 그 단어를 한 자 한 자 파자를 하면 ‘내 말(호흡)을 네 말로 쓰자’라는 의미입니다. 모세에게 말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모세의 말을 통해 당신의 말을 설명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입니다.
■로마서(69) 아브라카다브라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그 ‘파리스테미’의 히브리어 단어인 ‘쿰’을 파자해 보면 ‘코프’와 ‘멤’인데 ‘코프’가 ‘파괴하고 다시 세우다’라는 뜻이고 ‘멤’이 ‘물, 말씀’이라는 뜻이므로 ‘쿰’의 원래의 뜻은 ‘말씀으로 파괴하고 다시 세움’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
단어는 ‘콜’이라는 단어에서 오는데 그 단어도 ‘코프’와 ‘라메드’로 파자가 됩니다. 역시 ‘코프’가 ‘파괴하고 다시 세우다’라는 뜻이고 ‘라메드’가 ‘교훈하다, 가르치다’라는 뜻이므로 ‘콜’의 원래의 뜻은 ‘파괴하고 다시 세움을 가르쳐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파괴하고 다시 세우는 것의 의미, 십자가의 의미를 잘 가르치는 것을 ‘콜’, ‘목소리, 소리’라고 하고, 그렇게 말씀으로 가르쳐서 파괴하고 다시 세우게 되면 그걸 ‘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 ‘노모스’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토라’입니다. 그런데 이 ‘토라’는 파자를 하면 ‘타우’와 ‘알렙’입니다. ‘완성된 소’라는 뜻입니다. 그건 다른 말로 ‘완전하신 하나님, 내 안에 완성된 소’입니다. 따라서 ‘율법(토라)’이라는 것은 완
전하신 하나님을 진리로 담고 있는 그릇인 것입니다. 옛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는 ‘소’라는 단어가 세 가지로 쓰입니다.
■로마서(70)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제거
순종’입니다. 그 어구를 히브리어로 보면 ‘솨마 콜’입니다. ‘콜’이라는 단어를 파자하면 ‘부수고 다시 세움’이라는 ‘코프’와 ‘가르치다, 교훈하다’의 ‘라멧’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순종이 뭡니까? 부수고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잘 듣고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솨마’라는 단어가 ‘순종하다, 듣다’라는 단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역설 속에 담아주신 진리를 행함으로 망쳐버리지 말고 듣고 깨달아 그 안에 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걸 진짜 순종이라고 합니다.
■로마서(73) 사망이 선물이고 사망이 영생이다
그런데 그 ‘무트’
라는 단어를 파자해 보면 ‘말씀이 완성되다’라는 뜻입니다. 계명으로 주신 말씀이 인간에게 제 역할을 다해서 그 역할이 완성이 되면 ‘무트’, 곧 ‘죽음’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의 육신적 죽음이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76) 비진리라는 기생충의 숙주조정, 치사율 100%
창세기를 보면 인간을 ‘아담’이라고 부르지요? 그 단어는 아담이라는 첫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모든 보편의 인간을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그 아담이라는 단어를 파자하면 ‘하나님이 구분하신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을 무엇으로 만듭니까? ‘아다마’로 만듭니다. 그 단어는 ‘땅, 흙’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파자를 하면 ‘하나님의 구별된 진리를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아담’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담’이라는 완성품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성취된다는 것임과 동시에
그 ‘아담’의 창조 목적 또한 ‘하나님의 구별된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로마서(80) 날파리 신앙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시지요? 거기에서 그 ‘염려(메림나오, 메로스)’라는 단어는 ‘율법적 염려, 율법적 근심’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키’라고 번역이 된 ‘헬리키아’는 ‘성숙’이라는 의미
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규빗이라고 번역이 된 ‘페퀴스’는 히브리어 ‘아마’를 헬라어로 옮긴 것인데 그 ‘아마’를 파자 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페퀴스’ 바로 뒤에 ‘에이스(하나)’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 둘을 합하면 ‘하나인 하나님의 진리’
가 됩니다.
그걸 모두 합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너희들의 율법적 염려와 수고로 그 하나인 진리의 말씀에 어떤 성숙을 더 보탤 수 있느냐?’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더 이상 거들먹거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날 파리들이 아무리 7의 기간 동안 열심히 날아다닌다 해도 그들은 향방 없이 날아다니다가 7의 때에 멸망해 버리는 저주의 날 파리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날개로 어디를 향해 그렇게 열심히들 날아가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목적지 확인을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83) 율법을 먹고 의를 낳는 사람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히브리어 자음 22자의 자음 값을 제 나름대로 다시 찾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문자 고고학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히브리어 문자 파자가 이단들에게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
배경이 없는 이들이 단순히 문자만을 배우고 연구해서 그 문자의 자음 값만을 가지고 구약의 모세 오경을 자기 마음대로 풀어 함부로 성경을 왜곡해버린 경우를 문자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너무나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중세 유대 신비주의자들인 카발라 들입니다. 그들은 히브리 자음 값과 그 자음에 매겨진 숫자들을 가지고 제 멋대로 성경을 해석해서 세대주의 신학이나 신비주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단들입니다. 결국 그들의 그 문자 해석법은 ‘타로’ 점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토라를 연구하다가 타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점이라는 게 뭡니까?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한 것 아닙니까? 그들의 성경 해석에 관한 열정이 그러한 ‘점’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성경해석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길흉
화복, 그리고 인간의 자기가치 주장과 자존감향상에 초점이 있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원어 연구를 한다는 사람들의 그 학습내용이 대부분 카발라들의 그것에서 흘러나왔고 고작 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까 올바른 신학이 정립되지 않고 진리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상태에서 문자나 원어를 접하게 되면 또 다른 이상한 괴물 같은 신학이 만들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고서적들은 저만치 미루어 두고 성경 안에 있는 단어들로만 성경 원어의 그 문자 값을 하나하나 찾아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원어 성경 연구가 이단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고 해서 그 연구 자체가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란 것을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귀는 항상 진짜 가치 있는 것의 주변에 비슷한 가짜를 마련해서 진짜 가치 있는 것까지 무용하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가 있거든요. 그래서 더 깊이 들어가 보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내백성은 내가 지킨다는 어떤 주군의 심정으로.
그래서 고대 히브리어 자음 22자를 한자 한자 써 놓고 그 자음이 들어간 단어를 모조리 찾아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인 ‘알레프’의 의미 값을 찾기 위해 성경 전체에서 ‘알레프’가 들어간 단어들을 전부 찾아서 나열해 놓고 한자 한자 파자를 해서 성경이 그 문자로 기록될 당시의 그 의미 값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재정립해 보았습니다. 먼저 그 ‘알레프’라는 문자가 단어의 첫머리에 쓰인 경우를 찾아 보았더니 구약 성경에서만 871개가 나왔습니다. 제게는 신약의 헬라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바꾸어 번역을 해 놓은 히브리어 신약 성경이 있습니다. 그것까지 합해서 ‘알레프’가 첫 글자로 들어간 단어들을 전부 찾아서 정리를 해 보니 수 천 개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자가 단어 중간이나 끝에 사용된 경우까지 다 찾아보
니 엄청난 분량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문자들의 문자 값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니 정말 성경은 하나님이 쓰신 것이 맞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알레프’라는 단어를 어떤 내용으로 쓰고 싶어 하셨는지가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22자의 문자와 그 문자들을 함의하고 있는 단어들을 연구하면서 단어 하나하나가 그 문장의 내용을 담고 있고 그 문장이 그 책의 내용을 전부 설명하고 있으며 그 책은 또 성경 전체의 그 ‘하나’만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또 다시 너무나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서(88) 크로노스의 고난이 카이로스에서의 영광이다
예수님이 크로노스 속에서 고난만 당했잖아요. 심지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다니까요. 그런데 카이로스 속에서는 그것이 영광이었다 그래요. 바울은 15절에서 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라 아들로 만들어내는, 그 양자의 영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아들로 만들어 내는, 창조해 내는 그 진리의 영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 아바 아브, 아람어에요. 아브를, 그 아람어를 여기다 왜 썼겠어요? 아람어는 항상 문자로 파자를 하게 되어 있다고 했지
요. 하나님의 집, 그게 아브, 아바에요 아람어 아바. 그리고는 뒤에 파테르라고 헬라어를 붙여 놨어요. 그 아바 내 안에 들어온 그 하나님의 진리를 이게 아버지구나 라고 알게 된다는 거에요. 부르짓게 된다는 거에요.
■로마서(93) 라만차의 기사들이여 그대들이 승리자다
그리고 부르심 '칼레오'는 히브리어 '카라'에서 온 말인데 파괴하고 다시 세우시는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카라'를 파자하면 '파괴하고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그들은 그것을 '부르심'이라고 읽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로 불러놓고 그 십자가에 끌려오는 자만 하나님께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로마서(94) 어둠의 저편
바알이라는 것은 이방 베니게의 신의 이름이에요.
그런데 베니게의 신의 이름이라고해서 바알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쁜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남편’, ‘주인’이런 뜻이에요.
굳이 파자를 하면 성전으로 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성전으로만 보면 그야말로
베니게의 신 바알이 되는 것이고, 거기서 진리를 알면 그것은 하나님인거에요.
그런데 제불 Zebul이라는 것은 ‘날개로 날다’라는 뜻이에요.
사전에는 ‘파리’이렇게 되어있는데 날개로 나는 것이 파리 밖에 없나요?
‘날개로 날다’ 그럼 날개로 나는 그 성전, 그게 뭐에요? 성전이에요
■로마서(95) 모든 것이 선물인 이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이 큰 물고기가 탄닌이에요. 이게 계시록에 나오는 용, 옛뱀 이런 뜻이죠. 그 아래의 물에 탄닌, 용 뱀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그 네페쉬 그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라고 하는데 그 종류대
로가 “민”이라는 단어인데 그 앞에 “레”전치사가 붙어 있어요. 그건 항상 -을 위하여 라는 뜻이거든요. 가르치기 위하여, 민은 뭐냐면 그것이 무엇인지, 민이 분리하다 분배하다 라는 뜻이 있어요. 분배하고 분리하고 하는 에피두미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하여 라는 뜻이에요. 각기 나누어서 생물을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럼 종류대로 만들지요 뭐. 그건 파자를 하면 그 나눈다는 것 분배라는 게 뭔지를 가르치기 위해 뭘 만들었나면 그 용이라는 거, 오해 되어진 율법이라는 걸 만들고 그
우글거리는 인간들을 그 안에다가 물에다가 놓아두더라는 거에요. 뭐를 알으라고? 분배하고 나누는 두 마음이, 그 죄가 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여기 있는 큰 뱀 큰 물고기 앞에, 큰 이라는 단어가 “가돌”이라는 단어이거든요. 큰 광명 작은
광명 배웠지요. 그 때 큰, 위대한 이 단어가 가돌이에요. 만약에 이게 나쁜 뱀이라면 “카탄“이라는 단어를 써야 돼요
■로마서(9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데 왜 자꾸 서로를 정죄 하는가
그리고는 그들이 세상의 풍조와 그 바다를 무서워해요. 바다는? 창세기 1장에서 아래 물을 바다라 하자. 라고 ‘얌’이라고 써 놨죠? 그 ‘얌’이라는 단어 자체가 파자하면 진리를 주다. 라는 거예요.
그것으로 진리를 받으면 되요. 자, 그 바다, 그리고 그 광풍, 그 ‘아네모스’, 이 세상의 풍조, 사조, 세상의 그 기대, 그 잣대, 그것이 우리에게 두려움의 무서움의 상태가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죽은 거라는 것입니다
■로마서(98) 그 사랑 앞에서
그 일곱(싸바)이라는 단어는 ‘언약하다, 맹세하다. 실컷 먹이다. 일곱 번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그 언약을 주어 실컷 먹이는 줄 아세요? 그 ‘싸바’라는 단어를 파자해 보면 ‘눈에 보이는 아래의 것으로 성전을 분석하
여 가르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늘 아래의 것들에 생명의 말씀인 진리를 담아 우리에게 언약으로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다섯(하미쉬)은 하나님께서 아래의 물속으로 던져주신 그 모형들을 가지고 차원이 다른 하늘의 것으로 가지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미쉬’라는 단어를 파자하면 ‘진리를 죄로 주어 분석한 것으로 주다’가 되는 것입
니다. 그게 다섯입니다. 그렇게 아래의 물속의 것들로 밤과 낮을 ‘바달’하여 밤과 낮의 구분을 없애버리는 그런 존재들을 ‘별(코카브)’라 한다고 했지요? 그 ‘코카브’가 어디에 등장합니까? ‘넷’의 날에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다섯은 반드시 ‘넷’으로 이웃
에게 전해져야 하겠지요? 그들이 바로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하늘의 별들(코카브)’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넷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래의 다섯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성경에 죄를 갚을 때 ‘다섯’으로 갚으라는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서(99) 완전한 때에 도살할 양으로 죽는 자만 이김으로 살아난다는 불편한 진실
에로스트 바라 엘로힘 에트 솨마임 에트 에레츠 가 뭐냐면, 내가 땅으로 그 하늘들을 만들기 위해, 설명하기 위해, 내가 엘로힘을 담아서 그것으로 너희들에게 창조를 했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거기서도 하늘들, 복수거든요, 그 하늘들은 땅이 뭔
지를 알아 그것을 마음으로 가지면 그들을 하늘들 이라고 그래요. 하늘 이라는 단어 자체가 쉠마임 이잖아요. 그 단어가 파자하면, 하나님이 분석하여 말씀을 주시는데 진리로 준다 라는 뜻이, 하늘이에요.
그걸 반으로 짤라버리면 쉠 하고 마임 이니까, 거기에 물이 있다, 진리가 있다, 그것이 하늘 이란 말이에요.
danatos2013 데니얼님 블로그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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