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칼럼&공부

풀과 꽃과 열매

은바리라이프 2015. 4. 24. 15:37

풀은 씨가 없는 육체요, 꽃은 그 씨 없는 풀에 붙었다가 떨어진 어떤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풀은 우리의 육체다, 라고 합니다. 육체는 씨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풀 이렇게 쓰이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씨가 없는 것,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 이렇게 씁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풀이 무화과를 지칭합니다. 당연히 그 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베드로의 그 말은 일차적으로 그 씨를 맺지 못하는 풀에게, 우리에게 씨를 전해주기 위해 그 풀에 붙었다가 장렬히 떨어져 버린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씨를 심는 죽음, 떨어진다, 라는 것은 그 씨를 심는다, 라는 것입니다. 내가 씨를 심으면 상대방에게 내가 부정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진리의 말씀, 그 은혜, 그 사랑이구나, 너의 능력 아니구나’ , 라고 내가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씨를 심는 죽음을 가리킴과 동시에 그 씨를 전해 받은 뒤에 예수 그리스도의 꽃으로의 그 삶과 동일하게 그 씨를 먼지가 풀풀 나는 광야 인, 땅인 라만차, 이 세상에 심고 떠나야 하는 그런 성도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풀의 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광이 풀의 영광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꽃이 떨어지는 순간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풀은 마릅니다. 율법이 죽어서 떨어져 버리면 예수가 나에게서 떨어져 버리면 그렇게 해서 죽으신 것이지, 라고 그 분의 죽음이 나에게 이해가 되면 그 죽음 그 예수는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육신이 부정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의 교제와 소통 속에서는 그 육으로 나타난 것으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그러한 것들이 사실은 없어야 합니다. 잘 안됩니다. 그것이 풀이 마르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았더니 그 풀은 육체는 그것은 아니다, 라고 됩니다. 풀은 떨어지는 것입니다. 꽃이 떨어지면 마릅니다.

그런데 꽃이 다 붙어있습니다. 그 예수가 안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섬김의 대상입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 분이 날 위해 죽으셨다 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은 기특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분은 내 밖에 예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는 직설법 과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요.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은 진리를 깨달은 성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으로 예약이 되어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직설법 과거입니다. 너희는 영화롭게 되었어, 반드시 그렇게 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의롭게 되었다, 라고 하면 좋아하는데, 영화롭게 되었다는 별로 안 좋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거야, 떨어져야 되는 거야 이렇게 되니까요.

 

그래서 본문 29절에서 바울이 삶을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삶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착한 일 많이 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그 삶을 본 받아라, 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아무도 못 구원하고 갔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오셔서 그 때부터 하나씩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