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삶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2
애굽 총리가 되다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꾸었다. 일곱 마리 살찐 소를 일곱 마리 흉악한 소가 잡아먹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마른 일곱 이삭이 삼켜 버리는 꿈이었다. 그 꿈은 요셉의 해몽처럼 애굽의 칠년 풍년과 칠년 흉년에 관한 꿈이었다. 과연 멀쩡한 애굽 땅에 갑자기 흉년이 찾아왔다.
애굽의 천재지변을 계기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됐다. 바로는 요셉을 가리켜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것은 비단 요셉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하나님의 신’인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에 의해 이끌리는 자가 성도이기 때문이다. 요셉의 총리 등극은 개인의 영달이나 입신양명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으로 보내고 꺼내오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설명하는 일을 진행해 가실 것인데, 그 과정에서 요셉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애굽이라는 당대 최강대국의 역사가 요셉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 이스라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애굽 만이 아니라 전 역사가 또한 그러하다. 전 세계의 역사가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지고 있다. 알렉산더, 시저, 징기스칸, 나폴레옹, 오바마, 빌 게이츠가 역사의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 세상과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창세 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이들이 모두 올라가면 역사는 폐해지고 세상은 멸해질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그 사실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힘과 능력과 자기 가치 향상을 추구하는 일들의 무상함을 깨달아야 한다. 요셉의 출세와 높아짐을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 그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다
요셉의 권세는 온 애굽 위에 서게 됐다. 바로는 조금 전까지 죄수 신분이었던 요셉을 감옥에서 끌어올려 온 애굽을 총괄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부여했다. 이는 예수님이 사망의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게 되신 일의 모형이다. 바로가 요셉에게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님께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고 하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주셨다. 그 일이 지금 요셉의 일에서 모형으로 우리에게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것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요셉 또한 ‘영혼이 쇠사슬에 들어가는’ 고통스러운 감옥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형통의 삶을 살았다. 이것이 모든 성도들이 가야 하는 십자가의 삶이다. 그 일들을 통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고 섬기고 대신 죽는 십자가의 삶을 성도 또한 사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요셉의 성취를 보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셉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성도 또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높임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한사코 이 나라에서 높아지는 걸 목표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세상의 구세주가 되다
요셉은 온 세상을 구원하는 양식 맡은 자, 양식의 주가 됐다. 그에게 와서 양식을 얻지 않으면 아무도 살 수 없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며, 생명의 떡이다. 그 떡을 먹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요6:51). 그래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이제 만백성이 그에게 와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고, 예수만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요셉에게 사브낫 바네아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사브낫 바네아’는 ‘세상의 구원자’라는 뜻이다. 그는 흉년과 기근에서 멸망하는 세상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자이며, 기근으로 죽게 된 자들에게 구원의 이름, 구세주의 이름이 됐다. 구세주는 곧 메시아, 그리스도이다. ‘사브낫 바네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이름인 것이다. 그에게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 많이 있다는 소식은 큰 기쁨의 소식, 복음이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양식을 팔 때, 그들의 돈을 자루 속에 도로 넣어주는 것은 그 양식이 값으로 살 수 없는 것, 그래서 값없이 거저 주는 것임을 보여주는 그림인 것이다.
요셉은 최고로 존귀한 자가 되어 아스낫이라는 이방의 여자를 취해 아내를 삼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진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방여인 아스낫이 요셉의 아내가 되어 그의 존귀에 동참했다. 아스낫은 감추임, 비밀이라는 뜻이다. 이 비밀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는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이방인 같던 우리에게도 이 비밀이 풍성하게 나타난 것이다(골1:26-27). 요셉의 아내인 아스낫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우리 성도의 모형인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감추인 구원계획 덕분에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죄 속에 살던 이스라엘의 이방인이고, 천국의 외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린 양의 신부가 되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되어 그 분의 존귀에 동참하는 것이다.
요셉은 결혼 후에 온 애굽을 순시한다. 이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교회가 탄생하고(결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성령하나님이 복음을 들고 가시는(순시) 모습을 모형하는 그림이다.
영원한 풍년의 나라
요셉은 그의 삶에 하나님이 동행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의 삶에도 역시 요셉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과 여러 가지 모양의 흉년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업이 망하고 가난해 지는 흉년, 병이 드는 흉년, 출세하고 성공해도 공허한 흉년 등 다양한 흉년이 성도를 엄습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호황을 겪거나 불황을 겪거나 요셉의 삶이 결국 영광으로 끝이 나듯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성도의 인생은 풍년으로, 영광으로 끝이 나게 될 것이다. 성도의 삶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한 걸음씩 전진하며(찰라흐. 형통), 마침내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 영원한 풍년과 호황의 나라.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이나 아픔이 다시 있지 않을 그 나라가 성도의 본향이다. 믿음으로만 보이는 그 나라를 보아야 한다.
조정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