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삶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웃음’, 성령으로 태어나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이다. 이삭의 의미는 ‘웃음’으로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셨다. 아브라함이 100세 때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시자 아브라함도 웃고, 사라도 웃었다.
‘100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마주한 면전에서 심중(心中)으로 비웃고, 사라는 장막 뒤에 숨어서 비웃었다. 아브라함은 이때에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노력의 결과물인 이스마엘을 자랑스러워하며 그를 후계자로, 자기 생명으로 여기며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부모의 불신앙 속에서 탄생한 것이 이삭이고, 하나님이 비웃음의 수모를 참으시며 지어주신 이름이 ‘웃음’ 이삭이다. 너희가 나를 비웃었으니 이삭이고, 그 비웃음을 기억하라고 이삭이며, 그 비웃음을 진짜 기쁨, 희락의 웃음으로 바꿔주겠다는 약속이 이삭인 것이다.
이삭은 예수님처럼 불가능한 상태에서 성령에 의해 잉태되고, 예수님이 ‘때가 차매(갈4:4)’ 태어나셨듯 ‘기한에 미쳐(창21:2)’ 탄생했다. 또한, 이삭과 예수님은 각각 이스마엘이라는 율법 아래, 이스라엘과 바리새인의 율법 아래 태어났다. 이삭은 예수님의 모형이면서 성령에 의해 탄생하는 모든 성도들, 모든 약속의 자녀들을 예표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처럼 이삭의 탄생은 단순히 아기가 없던 늙은 노부부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기가 생겨난 정도의 사건이 아니라 구속사 속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속에서 함께 연합하여 출생하게 되는 교회의 탄생에 관한 예표인 것이다.
언약을 따라 태어난 이삭이 젖을 뗄 무렵,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다가 쫓겨났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것은 율법이 은혜를 조롱하는 것과 같으며 율법주의자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욕보인 것과 같은 의미이다. 또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적인 행위의 산물이었다. 이스마엘의 추방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인간적인 행위와 노력의 산물은 반드시 부정된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만 강조하고 있다. 그 은혜를 바르게 깨닫고 붙잡는 자가 구원받는 천국백성이다. 아니,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정해진 천국백성만이 그 은혜를 붙잡게 된다.
모리아산의 제물로 바쳐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자로 성숙되었는지를 시험하신 것이다. 성도의 삶 또한 이처럼 하나님의 시험으로 점철된다. 모든 성도는 아브라함처럼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이삭과 같은 나의 가장 소중한 것, 내 생명과 다름없는 것을 바치는 모리아산의 시험대 위에 반드시 서게 된다. 이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리며, 오직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만이 영생하도록 보존하는 것이다. 출애굽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낮추시고 시험(신8:2)’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광야 40년을 산 것처럼 모든 성도는 광야의 인생 속에서 이같은 시험을 받는다.
이삭은 자신이 매달려 죽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주님처럼 자신을 불태워 죽일 번제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다. 자신이 매달려 죽어야 할 형틀을 직접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 죄인들 대신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예표된 사건이다(고후5:21). 훗날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이삭이 죽기 위해 오르고 있는 모리아산에 지어졌다(대하 3:1).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잡으려고 할 때 아브라함은 120세 가까운 노인이었고, 이삭은 약 20세의 팔팔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를 결박하는 동안에도, 그를 단 위에 올려놓고 칼로 죽이려 할 때도 이삭은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붙잡혀서 제사장의 뜰에서 뺨 맞고 침을 맞을 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모습을 방불케 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여호와 이레’ 하나님은 이삭 대신 친히 준비하신 수양을 잡게 하셨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약속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 양에 의해 죄와 사망에서 건져지게 된다. 이것이 여호와 이레의 참뜻이다. 우리는 그 모리아산에서 칼에 쪼개지고 불에 태워져서 죽어야 할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그 양,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며 십자가 은혜이다.
리브가와 결혼하다
이삭이 장성한 후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을 멀리 밧단아람까지 보내 아들 이삭의 신부를 찾게 했다. 아브라함이 140세, 이삭이 40세 때 일이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가 아니라 ‘그의 고향 그의 족속’ 곧, 하나님 라인의 택한 백성 중에서 이삭의 신부를 찾게 했다. 오직 언약 백성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종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종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처럼 신랑인 이삭의 이름으로 보내지고 있다. 그는 성령께서 택한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듯 신부에게 가서 신랑을 소개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종에게 자신의 좋은 것들을 약대 열 필에 가득 실려 신부에게로 보냈다. 이 모습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부르기 위해 하나님이 보혜사 성령님을 하나님의 좋은 선물과 함께 이 땅으로 보내신 일의 모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마치 아브라함이 보낸 종이 리브가에게 금은 패물과 의복을 선물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것들을 부어주셨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신랑의 전령을 만났고, 이삭의 신부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가 각양 선물들로 신랑의 풍요함과 부유함을 미루어 알게 됐던 것처럼 우리 성도 또한 이 땅에서 보증으로 주어진 성령의 역할로 하늘의 풍요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늘의 풍요는 평강과 모든 진리들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하늘의 선물을 부어주신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신랑, 예수 그리스도가 기다리고 계신 그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그 혼인잔치에의 초대에 모든 것 다 버리고, 부모 형제까지 다 버리고 즉시 따라나서는 리브가가 참 성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신의 부모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주님께 합당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가 영생을 상속하는 것이다(마19:29). 리브가는 이제 ‘자기 의’라는 더러운 옷을 버리고, 신랑의 아버지가 준비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는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삭이 들에서 묵상하며 배회하며 신부 리브가가 도착하기를 애타게 기다리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신부인 교회가 당도할 그날을, 천국에서 열릴 혼인잔치의 그날을 학수고대하고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