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칼럼&공부

선한 사마리안(롬79)

은바리라이프 2014. 10. 25. 14:43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뭐였어요? 제가 비유 때 설명해 드렸지요.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요. 율법사가 나오지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이에요. 


율법 대장. 율법사가 와서 묻습니다. 내가 알기론, 율법이 알기로는 영생은 율법을 통하여 뭔가를 열심히 해야 얻는 것이라고 배웠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어? 이렇게 물었어요. 율법이 예수님에게. 은혜에게 묻는 거에요 율법이.

뭘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지? 이 질문은 예수님을 떠났던 부자 청년이 동일하게 했던 질문 이었지요. 뭘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했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냐?


이러저러한거 쭉 얘기해요. 그거 해 그랬어요. 저 어려서부터 다 했어요. 주님이 그럽니다. 그러면 니가 그거 다 했다고 하는데 니가 가지고 있는걸 가난한 이에게 다 주고 와봐 그래요. 거기서 가난한 이가 푸토코스 에요. 푸토코스가 뭐라고 했습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 성령안에서 그거 없으면 나는 죽는 자. 내가 어떤 노력을 해서도 이 가난을 채울 수 없을 때, 페네스 라는건 내가 돈을 벌어서 어떻게 하든 그걸 쪼금이라도 메이크업 할 수 있으면 그건 푸토코스 아니에요. 근데 나에게는 방법이 없는 가난 있지요? 절대적 가난. 이게 푸토코스 란말이에요. 거기에 하나님이 그 단어를 쓰신다니까요. 너 율법 다 지켰다며? 그러면 그 율법은 곧 사랑을 이야기 하는거다. 그러면 그 사랑, 푸토코스한 그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거 주면 그가 살거든! 그럼 니가 다 지켰다고 했으니까 그거 주고 와봐 그랬단 말이에요.


근데 그는 율법을 율법으로 지켰잖아요.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푸토코스한 사람에게 줄게 있다? 없다? 없어요. 그러면 그를 부자 라고 하는거에요. 바늘귀 문으로 못 들어가는 부자.

그러니까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자에요. 그 부자는 바늘귀 문으로 못 들어가. 내가 문인데 못 들어가. 어떻게 나를 쫓아 라고 한거지요. 똑같애요. 


율법교사가 은혜의 주님께 묻습니다. 뭘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율법에 뭐라고 돼 있니? 그랬더니, 얘기 했어요. 사랑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 더 나간 거에요 그 부자의 이야기에서. 이 사랑 이야기 한거에요 하나님이. 너 율법으로 그 사랑 갖고 있어? 그럼 줘봐. 못 줬어요. 여기서는 율법사가 정확히 이야기 합니다. 예 사랑입니다 율법은요. 그래? 그러면 그거 해.

그랬더니 내 이웃이 누굽니까? 가르쳐만 주세요. 사랑 가서 주고 오께요. 그랬단 말이에요.


근데 율법사에요. 그러면 율법사가 가진 사랑은 뭐에요? 베드로식의 사랑이에요. 십자가 이전의 베드로식의 사랑. 내가 목숨걸고 주님을 지키겠습니다의 그 사랑. 그래? 니가 그 사랑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거야? 이 이야기는요 그 부자 청년에게 너 가서 가난한 자 푸토코스에게 니가 가진 사랑 한번 주고 와봐. 이말이랑 똑같은 말이에요. 너 사랑 할 수 있어? 그럼 그거 해! 그랬다니까요. 그랬더니, 그래요? 이웃을 가르쳐 주세요. 여기서 그 율법사가 말하는 이웃은 뭐에요? 푸토코스의 이웃이 아니라 페네스의 이웃 이겠지요. 그냥 진짜 가난한 자. 그 이웃. 그에게는 율법이 해 줄 수 있는게 있잖아요.


진짜 세상의 구제, 세상의 사랑, 세상의 관심, 율법이 줄 수 있는거, 줄 수 있다니까요. 누가 이웃 입니까? 그랬어요. 그때 주님이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주는 거지요.


이 비유의 주인공인 사마리아인 이라는 단어의 의미. 이거부터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마리테스는 히브리어 쇼므론에서 온 단어거든요. 근데 사마르가 기본형인데 그 단어가 깨어 있는 자, 파수꾼, 울타리를 치는 자에요. 울타리가 뭐냐면 예루살렘 성벽 있지요? 안과 밖을 나누는거 거든요, 구별짓는 자. 좋은 의미에요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 사마리아인이 누굽니까? 앗수르에게 북이스라엘이 멸망 돼 가지고 피가 섞여 버렸지요? 유대주의 에게 유대주의 밖에 이방적인 것, 이것 아닌 어떤 것의 피가 수혈된 거에요. 근데 누가? 유대인이 이걸 보고 개라 그랬다니까요. 좋은 거에요? 나쁜 거에요? 좋은거라구요 이게 성경에서는. 그래서 항상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대조 되어 나오는 거에요. 그리고 항상 개라고 욕 먹는다니까요. 그래서 거기로 지나다니지도 않아요 유대인들은. 어떻게 율법주의가 진리의 땅을 지나다니겠어요? 깨어있는 자들의 땅을 지나 다니겠냐구요. 그 얘기 하는 거에요. 사마리아라는 단어 자체가. 


그러니까 그 사마리아인이 등장하는데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 되냐면, 예루살렘에서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간다 그래요. 카타바이노, 예루살렘은 야라와 샬롬의 합성어라 그랬죠. 그러니까 평강, 평화, 에이레네를 가리키는 거에요. 그걸 가르치기 위해 가리킨게 성전 이었죠. 예루살렘 이었죠. 예루살렘이에요 그게.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인 거에요. 그게 내려 왔어요. 어디로? 예리호, 여리고로 내려 왔어요. 예리호는 발광체가 아닌 반사체를 가리키는 거에요. 달, 달, 예리호가. 하나님 이라는 그 분이 있어요.근데 그 분은 피조세계가 담을 수가 없네요. 그래서 그 분이 존재 한다는걸 어떤 존재가 담고 내려왔어. 그 하나님을 담고 내려온 하나님. 그러나 그 분은 아닌데 하나님을 담고 왔어요. 이 분을 알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거야 라고 얘기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분을 보면, 달을 보면 해가 있다라는걸 알듯이. 이 분을 보면 하나님을 아네. 그래서 하나님입니다.

 

예루살렘이 카타바이노, 내려와요. 어디로? 예리호로. 달, 반사체로 내려오는 거에요. 그 발광체는 우리가 감당할 수가 없어. 눈이 멀어 버려요. 저기 있는 그 분! 자- 예루살렘에서 예리호로 어떤 분이 내려 오는 거에요. 거기에서 생기는 일이란 말이에요. 근데. 예리호, 여리고 라는 이름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아주 특이한 사건이 여리고에서 3번 일어납니다.


처음은 당연히 여호수아 2장에 하나님이 시킨말을 그대로 외쳐서 철옹성 같은 성이 안에서 밖으로 무너져버리는 그 사건요. 역사서를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요 보통 성은 밖에서 부수고 들어가기 때문에 밖에서 안으로 넘어 지잖아요? 근데 이 성이 역사서에 안에서 누가 민거처럼 안에서 밖으로 무너졌데요. 누가 밀었을까요? ^^

무너졌어요. 어떻게? 말에 의해 무너져요. 그들이 어떤 행위도 못하게 하세요. 망치질 한번 못하게 하세요. 하나님 힘든데, 안에서 밀기 힘든데, 내가 도와 주께요 라고 깨면 안돼.

그냥 외치는 거에요. 그 말을 외치는 거에요. 그 함성에 무너짐니다.


2번째가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엘리사가 여리고에서 쓴물을 소금, 언약이지요, 소금을 쳐서 단물로 만들어요, 진리로 만들어 내지요. 언약으로 말씀을 보게 되면 아- 이게 단물 이구나! 율법이 진리가 되는게 여리고에요. 


신약에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누구를 만나요? 소경 바디메오를 만나요. 바는 아들이에요. 바라바 하면, 아버지 아들, 가짜 아버지 아들이에요 그거는. 진짜 아버지의 아들이 와서 가짜 아버지 아들 대신 죽는거에요. 그래서 바라바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죽는거지요. 바가 아버지에요. 디메오는 더러움, 어두움,이런 뜻이에요. 더러움의 아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내가 더러움 이라는걸 알아요. 그래서 내가 그 분의 긍휼의 여기심을 못 받으면 나는 죽는다는걸 알아요. 그래서 바디메오가 뭐라고 그러냐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래요. 내 눈 좀 띠어 주세요가 아니에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 당신의 긍휼이 없으면 나는 죽습니다.라고 더러움의 아들이 이야기 하니까 그의 눈이 떠지는 거에요. 그래서 호라오 하게 되는거지요. 여리고는 그런거에요.


자- 하늘의 샬롬이, 예루살렘이 이땅에 그걸 가르치기 위해 카타바이노, 내려옵니다. 뭘로? 예리호로 내려와요. 반사체로 내려오는 거에요. 예수님의 성육신 생각하면 돼요. 내려오는데 그걸 어떤 이는 알아보고 어떤 이는 못 알아보는 이야기에요. 이거는 우리의 이야기로 제가 설명해 드렸지만 똑같이 예수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라니까요. 한 번 보세요. 그 예루살렘이라는 어떤 사람이 예리호로 내려오는데 강도가 나타납니다. 자- 강도는 뭐지요? 수없이 들었으니까 이제 알지요? 율법주의의 바리새인, 제사장 이런 사람들이에요. 한 군데 찾아 드리죠.



호세아서 6장 9절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 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혔느니라.


이스라엘집이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이 강도떼 제사장들이 사람을 오히려 죽이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옛성전을 하나님이 강도의 굴혈이라고 부른거죠.



요한복음 1장 1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다.


자- 다른데, 알라코덴, 반대편에서 넘어가다, 이게 나타나다에요. 예수님은 문으로 밖에서 들어가지요? 그래서 그들을 건져내야 되니까. 그죠? 근데 다른데서 나타나는 자는 누구에요? 안에서 나오는 놈들이에요. 담치기가 아니라.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자, 제사장 밖에 없어요, 레위인 하고 제사장 밖에 못 들어간다니까. 그 들이 뭐라고 그래요? 절도며 강도라 그래요. 그리고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전부 절도며 강도다 그러죠? 또 예수님 보다 먼저 온게 뭐에요? 율법. 절도며 강도. 


하나님이 진리를 담아 이 땅에 내려오셨는데 율법주의 제사장 바리새인들이 그 하늘의 진리를 두들겨 패서 완전히 죽여 버려요. 거기서 거반 죽었다라는게 그냥 죽었다에요. 근데 왜 거반 죽었다고 그러냐면 죽었는데, 아주 죽지 않은거, 이상한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부활을 전제로한 죽음이라는 뜻이에요. 거반 죽은거. 거기를 레위인과 제사장, 아니나 다를까. 이 둘이 지나갑니다. 근데 절대로 거들떠 보질 않아요. 왜? 율법주의는 진리를 거들떠 보지 않습니다. 너무 나약해 보여. 너무 인간의 자존심을 묵살하는것 같애. 거들떠 보지도 않아요. 


그런데 사마리아인, 깨어있는 자라는 어떤 이가 오더니 어- 저 죽음이 뭐야? 하고 그리로 가는 거에요. 저 죽음이 뭐야? 그러더니 어- 이게 진리구나 라고 깨달아요, 어떻게 알아요? 기름 포도주 뭡니까? 말씀 이잖아요 성경에서 말하는 포도주는 생명, 기름은 진리, 그걸 그 분의 죽음에 붓는다 그래요. 상처라는 단어가 트라우마 거든요.

 

트라우마는 사실 19세기에 프로이드가 만든, 의미를 부여한 말인데 외상후 스트레스성 장애

19세기에 나오는 단어고, 트라우마는 그냥 상처에요. 어떤 상처냐면? 죽일라고 때린 어떤 사람에 의해 입은 상처를 트라우마라고 해요. 헬라어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죽일라고 한거요. 율법이. 


근데 그 죽음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렇게 되면 진리를 깨달은거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죽음이 내 죽음 이라는걸 아는 거지요 이제. 어- 그 죽음 아니었으면 큰 일 날 뻔 했네 이렇게 된거지요. 그러면 내가 그 예수 죽인거 맞네요. 그래서 자기라는 짐승위에 그를 태우고 그래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들어가실 때 뭐 타고 갔어요? 새끼나귀! 그 짐승을 붉은빛 짐승, 나귀라는 단어 자체가 뜻이 붉은빛 짐승이에요. 근데 붉은빛 짐승, 붉다라는 단어는 성전을 붉게 칠했지요? 그리고 아담이라는 단어가 붉다 라는 뜻이거든요. 흙으로 만든 붉은 흙. 죄에요 죄. 


그래서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리라 라는건, 성전, 인간, 호코스모스 이세상은 죄 덩어리라는 거에요. 거기에 그들을 살릴 예수가 타고 그들이 되어 죽으러 들어가는 거에요. 그래서 이가, 원어에 보면 자기라는 짐승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자기라는 짐승에 그 분을 태우고 가는 거에요 성전으로.

뭐하러? 죽이러. 그 예수가 죽어야 그가 산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죽이러 가는거에요. 마찬가집니다. 성도가 이 땅에 아들로 와요. 아들로 오는데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해요. 어- 나 아니네! 이렇게. 그지요? 예수님이 그대로 보여 주는 거에요. 강도 맞는거에요. 율법에게 죽어 가지고. 


다나토스의 죽음이 그 죽음이라니까요. 거반 죽어. 거반 죽어야 그 사마리아인이 보이는거에요. 율법이 죽어야, 율법이 살아있으면, 자기가 개 취급하던 사마리아인이 다가 왔을때 절대 못 만지게 합니다. 근데 내가 그 율법에 의해 맞아 죽어 트라우마가 생기면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 때 은혜가 그를 만질 수 있다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수님이 진리로 붓지요 우리에게. 그리고 율법, 짐승으로 오신 그 분이 나를 태우고 나를 죽이러 가시는 거에요 , 어디로? 십자가로. 


내 이야기가 예수의 이야기 라니까요. 그러면 그 일을 하러 온 그 예수,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정죄 받은, 카나크리마의 그 예수, 그에게 내려진 정죄라는게 나쁜거에요? 그러면 여러분이 잠시 그 죄인의 과정, 이걸 겪기 위해 정죄되는 그 과정속에서의 그 정죄가 뭐 대단하게 나쁜겁니까? 그래야 여러분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니까요. 그게 아무것도 아니어야.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가서 너도 이같이 해라. 너도 죽을꺼야 이런 뜻이에요. 먼저 그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알아라. 그러면 너도 그렇게 될꺼야. 그러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수 있어요. 그걸 알았는데 정죄가 나에게 뭘 할 수 있냐구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에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되지 않는다 그러는 거에요. 심판의 정죄. 없어지는 거에요 이제. 아예 없어지는 거에요. 왜? 그게 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걸 복음이라고 그래요 여러분. 기쁘세요 그게? 복된 소식인데? 그게 기쁘셔야되요. 그게 예수 믿는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