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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성경의 편집 - 참으로 슬픈 탄식..

은바리라이프 2014. 10. 11. 11:38

이인규권사 (대림감리교회, 이단연구가) 

 

입력 : 2013년 04월 26일 (금이인규dsmedic@naver.com


먼저 정확하게 표현하여야할 문제가 있음을 느낍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을 느끼며, 이것이 제가 글을 쓰는 기술이 미숙하기 때문인지, 혹은 목사님이 제 글을 가볍게 읽고 있는지 혹은 성경이 성급하신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전번의 글에서도 저는 가장 보편적인 정통신학적인 견해로서 “유기적염감설”을 말하였는데, 목사님은 제가 축자영감설을 부정하였다고 하면서 기쁘다는 이상한 주장을 말씀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믿으며, 성경무오설을 지지하며, 보수적인 신학으로서 유기적영감설을 지지하는데, 제가 마치 성경의 편집설이나 수정설을 지지하는 것을 착각을 하시고 기쁘다는 이상한 표현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보수적인 개혁주의도 성경이 하나님의 받아쓰기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1) 실망스럽다는 표현에 대해서 : 

제가 실망스럽다고 한 표현은 우연찮게 토론이 시작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토론이 시작되었지만, 유익하였으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단지 실망스럽다고 표현한 것은 목사님이 마가복음 2:16을 인용하면서 성경이 오류 혹은 수정되었다고 말한 것 자체에 있습니다. 단순히 실망스러운 것을 넘어서서, 한국교회에 대한 한탄과 가슴이 저리는 슬픔을 느낍니다. 

제가 처음 쓴 글의 요점은 성경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인위적인 수정이나 첨가가 없었다는 내용이며, 제 글을 읽어 보셨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필사본마다 그 미미한 차이가 있어 왔지만, 전문가들의 본문비평을 거쳐 원문에 충실해지고 있다고 보며, 그러한 과정을 제가 ‘편집’이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맛소라사본의 경우에 사해사본에서 발견된 사본과 1000년의 차이가 나는 10세기의 사본을 비교할 때에 히브리 철자법의 변화 외에 거의 다른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이 인위적인 편집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중립사본이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대문자 사본들도 시간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이 거의 없다는 것은 성경이 편집되지 않았음을 증거하여 줍니다. 저는 이미 이러한 성경사에 대해서 이미 글을 올렸으며, 이것에 대해서는 반박이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습니다. 

목사님이 이 토론을 계속하기 위하여, 또 목사님의 주장을 옳다고 증거하기 위해서는 성경내용이 크게 다르다는 사본적인 증거를 제시하여야만 하며, 오랜 시간을 거쳐서 성경 내용이 바뀐 사본적인 내용을 증거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갑자기 마가복음 2:16을 인용하면서 성경에 오류가 있으며 수정되었으므로 편집되었다는 글을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기록된 성경에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는 토론은 될지언정, 성경자체가 편집되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마가복음 2:16이 수정되고 편집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본에는 이 마가복음 2:16이 다른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본에도 동일한 내용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수정되거나 첨가되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하여 저는 목사님이 왜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이상한 글을 올리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으며, 이것에 대해서 매우 실망하고 있다는 것이며, 저의 생각은 현재에도 그것을 믿음의 차이라고 봅니다. 저의 믿음은 성경에 편집이 없다는 것이며, 목사님의 믿음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웨슬레목사가 자유주의라는 주장: 

먼저 제가 왜 이런 이상한 언어 플레이와 동문서답의 토론을 하여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보수적인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에 대해서 믿음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비난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은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교하시며,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목사님은 혹시 교회에서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며, 오류가 있고 편집되었다고 설교를 하시며. 그런 설교를 듣고 그 교회 교인들은 아멘이라고 화답을 하는지요? 

그리고 웨슬레목사가 자유주의라고 하셨는데, 웨슬레목사가 이중예정론으로 불리는 Hyper-Calvinism를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캘비니즘을 비판하면 자유주의가 되는지요? 그런 주장이라면 장로교가 아닌 교단은 모두 자유주의가 되어야 하는지요? 

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은 19세기의 C. Darwin의 생물학적 진화론의 결과로 나타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고등비평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진 시대 이후의 신학을 의미합니다. 

1700년대의 웨슬레목사가 이중예정론을 비판하였으므로 자유주의라고 정의를 한다는 주장은, 웨슬레목사를 자유주의로 포함시켜서 그 날개 밑으로 숨어보려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웨슬레목사는 “한권의 책의 사람이 되게 하여달라”는 철저한 성서주의에 입각한 분이었습니다. 

더욱이 제가 비판한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그런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해가 되었는지를 목사님에게 묻고 싶습니다, 제가 말한 자유주의는 성경이 인위적으로 수정되고 편집되었다고 주장하며 성경사를 왜곡 시키는 그런 믿음을 말하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믿음을 뜻한다는 것을 정말 모르셨는지요? 

3) 질문에 대한 답변: 

- 질문 1. 디모데후서 저자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했을 때 요한계시록도 포함된 말일까요? 
이때 ‘그러면 당신은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 본단 이야기냐’는 반문은 본문비평학적 견해와 전혀 무관합니다. 디모데후서 저자가 이 말씀을 ‘영감받아’ 기록했을 때에는 요한계시록이 지금처럼 우리의 정경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답변) 점점 더 실망을 갖게 합니다. 디모데후서 저자가 ‘모든 성경’이라고 말한 성경의 범위에는 계시록뿐 아니라 신약자체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디모데후서는 AD 66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며, 현재와 같은 신약성경의 정경화는 그 당시에 없었으며, 적어도 신약의 정경화는 AD393년 히포회의와 AD 397년 키르타고 회의 이후 확정되었으며 계시록은 조금 더 늦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라는 범위는 정경화와 큰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신약이 하나님의 감동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다면, 신약도 후에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에 포함되었다고 답변하고 싶습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사도 베드로는 사도 바울이 쓴 서신문에 대해서 “다른 성경과 같이”라고 인정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문이 곧 신약의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사도요한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우리의 말(사도의 말)을 듣는다고 하였으며, 진리의 영(성령)으로 그것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베드로와 사도요한 외에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하였는지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9). 

사도바울은 우리가(사도가) 전하지 않은 복음이 곧 다른 복음이며,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들이 전한 말’(즉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성도에게는 이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 질문2. ‘예언은....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에서 ‘예언’은 어떤 성서들을 가리킵니까? 현재 카톨릭은 개신교의 정경과는 무관한 외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더 좋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대놓고 우리의 현재 정경 안에 포함되어 있는 야고보서를 향해 노골적으로 “쓰레기”라고 했었습니다. 루터가 볼 때 야고보서는 분명 영감을 받지 않은 책이었다고 생각되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와 아주 흡사한 경향성을 나타내고 있는 마태복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렇다고 해서 루터가 영감설 자체를 부인하는 자였습니까? 

(답변) 제 생각에는 혹시 목사님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 같은지 의아합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1) 

과연 벧후 1:21의 예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저는 바로 앞 20절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벧후 1:20) 

더 명백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른 번역성경을 첨부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언은 성경을 말합니다. 

[공동번역]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표준새번역]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마음대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대인의성경]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예언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KJV] Knowing this first, that no prophecy of the scripture is of any private interpretation. 
[NIV] Above all, you must understand that no prophecy of Scripture came about by the prophet's own interpretation. 

카톨릭이 외경을 정경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더 좋은 믿음’이라고 하셨는지요? 목사님은 자꾸 누워서 침뱉기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토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더욱이 루터 이야기는 왜 질문하였는지 더욱 의문입니다. 루터는 성경 초판에서야고보서에 대해서 (쓰레기라고 한 것이 아니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하였지만, 재판 발행 때는 그러한 평을 쓰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야고보서가 행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인데, 루터 개인의 견해가 영감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목사님은 혹시 루터가 흠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참고삼아 캘빈은 야고보서에 대해서 “이 서신서를 배척할 만한 정당하고 충분한 이유를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서신서의 내용을 온전히 안심하고 받아 들인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참고삼아 웨슬레 목사의 성경관에 대한 주장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는 진실로 모든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을 믿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유대인이나 회교, 또는 비기독교인들과 분명히 구별된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기독교인의 신앙과 생활에 유일하며 최고의 기준임을 믿는다. 그리고 이 점에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과 구별된다” (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성광문화사, 21쪽) 

“만약 성서에 어떤 오류가 있다면 수없이 많을지 모른다. 아니다. 만약 성서에 조그만 오류라도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천개에 이르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책에 거짓말이라도 있다면 그 책은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온 책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성서는 완전 무오한 진리이다” (위 책 21-22쪽) 

4) 이해의 문제 :

목사님은 성경이 “저자 자신의 편집이다”라고 하셨는데, 제가 말한 ‘편집’이라는 의미를 아직도 정확히 이해를 못하는 것 같으며, 혹시 소위 ‘언어플레이’라고 하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서는 저자 자신이 쓴 것이라는 주장은 왜 자꾸 반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든지 성경은 성경저자가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목사님의 그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지 않았고 인간 자신이 쓴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까? 

저는 이미 유기적영감설을 말해 왔으며, 유기적영감설(Organic Inspiration)이라는 것은 다시 설명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성경기자들을 도구로서 이용하시되, 인간의 요소를 전혀 배제한 것이 아니라, 그들 성경기자들의 완전하고 독자적인 영감 그대로 사용하면서, 성령께서 감동과 조명으로 역사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런 개념을 편집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이미 충분히 설명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제가 말한 본문비평의 기준에 대해서 ‘가장 오래된 본문’이라는 뜻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으며, 심각한 착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는 가장 오래된 본문은 ‘발견된 사본의 기록된 연대’를 뜻합니다. 가장 오래된 사본이 우선이고, 가장 온전히 보관된 사본이 우선이라는 것이며, 성경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옳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만약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셨다면 목사님에게는 창세기가 가장 진리가 되겠고 계시록은 진리가 빈약한 책이 되겠군요. 

이렇게 의사전달이 안된다면 더 이상 토론이 의미가 없을 것 같으며, 착각을 하셨다면 차후로는 신중을 기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하신 것에 대해서... 

삼상 22:20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대상 18:16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비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사워사는 서기관이 되고 

삼하 8:17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제가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삼상 22:20에서는 아히멜렉의 아들이 아비아달로 기록되어 있고, 대상 18:16에는 아비아달의 아들이 아비멜렉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하 8:17에서는 아비아들의 아들이 아히멜렉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장으로서 세가지의 이름이 혼동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Bruce의 견해입니다. 구약에서도 그 이름이 혼동되어 있다면, 신약에서 그 이름이 혼동되는 것은 오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목사님의 견해보다는 저는 Bruce의 견해를 더 신뢰합니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아비멜렉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공적직함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근거는 삼상21:11에 나타나는 가드의 왕을 시편34편에서는 아비멜렉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삼상 21:11-12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시 34:1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가드왕 아기스가 시편에서 아비멜렉으로 언급되었다는 것은 아이멜렉이 이름이 아니라 직분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도 아비멜렉이 될 수 있으며 아들도 아비멜렉이라고 불리웠기 때문에 혼동이 왔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며, 이미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어느 학자는 한 사람이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류라고 보기 전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Lenski는 다윗이 놉에 갔을 때 아비아달 부자가 모두 함께 그곳에 있었고, 또한 함께 다윗의 무리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 후 아버지 아히멜렉은 사울의 손에 죽고 아들 아비아달이 그 대(代)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본문에서 마가는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자연스럽게 기록하고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저는 역시 목사님의 오류라는 주장보다는 Lenski의 해석을 더 신뢰합니다. 

저는 이러한 난해성경을 많이 알면서도, 정답은 “알 수 없다”는 것이 옳다고 말한 이유는, 여러 가지 견해 중에서 어느 것이 정답인지를 알 수 없다는 뜻이며, 저는 난해한 성경을 수십여년 전부터 흥미를 갖고 공부를 해왔기 때문에 이미 난해한 구절에 대한 주석적인 견해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토론은 본질적인 내용을 지적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상대방의 말꼬리를 지적하는 유치한 수준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또 대제사장과 제사장이 다르다고 하셨는데, priest와 high-priest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정확히 구별하지 않으며 혼동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왕하22:4와 22:8의 힐기야는 대제사장이지만, 22:10, 22:12-14에서 힐기야는 제사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제사장도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보너스로 하나 더 올려 드리면, 여호야다는 대상27:5에서는 대제사장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하22:11에서는 제사장으로 기록되어 있고, 왕하12:7에서 여호야다는 대제사장으로 기록되어 있고, 12:9에서는 제사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Lenski의 해석도 근거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도 “성경이 오류이다”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목사님의 믿음이 될 것이고, 정확한 정답은 알 수 없지만, 몇가지의 성경학자들의 견해들이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저의 믿음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상당히 잘못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산의 정상을 오르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길이 있는 다원주의자는 그의 믿음 때문이며, 천하에 구원 받을만한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을 믿는 유일주의는 그 믿음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결론은 성경말씀이 믿음의 기준이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가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전혀 편집되지 않고 그대로 우리에게 보존되었다는 글을 쓰는 평신도에게 오히려 성경이 편집되었다는 주장을 관찰하기 위하여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하는 주장을 하시는 것은 스스로 무리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신뢰하는 바를 끝까지 옳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리교의 목사님이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도 외면하고, 웨슬레 조직신학도 부정하며, 웨슬레의 주장도 무시하는 이 현실은 기쁜 것이 아니라 매우 슬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