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의 교훈(3)
두로(Tyre)의 멸망
“700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카르타고는 넓은 땅과 수많은 섬과 바다를 지배해 왔다. 그에 따라 카르타고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어떤 강대한 제국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방대한 양의 무기와 군선과 코끼리와 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과거의 어떤 제국보다도 용기와 기개가 뛰어났다. 로마의 요구에 굴복하여 모든 무기와 모든 군선을 공출했으면서도 3년 동안이나 로마군의 공격을 견뎌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 도시가 함락되고 완전히 파괴되어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카르타고를 정벌한 로마군 총사령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 B.C185-129) 의 입을 빌려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 1937~)는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 카르타고(Carthago)는 어떤 나라였을까? 그리고 그 당시 강대국이었던 그리이스, 로마와는 어떤 이해관계가 있기에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반목했을까?
카르타고의 유래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카르타고의 ‘본국’은 오늘날 레바논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던 페니키아(베니게)의 여러 도시국가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큰 바다(The Great Sea)라고 불렀던 지중해에 면한 이 땅은 배후가 레바논 산맥으로 막힌 가늘고 긴 해안지대로서 농경 면적은 극도로 좁은 대신 좋은 항구가 많이 있었던 지역입니다.
페니키아인이 ‘바다의 민족’이 된 것은 실로 자연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의 좋은 항구를 찾아내어 그 곳에 몇 개의 도시를 건설하고 오로지 해상 무역에서만 활로를 찾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레바논 산맥이 높은 성벽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배를 만드는데 알맞은 양질의 목재, 백향목을 제공해 주었던 것입니다.
상업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운송수단입니다. 그들은 주어진 양질의 목재를 충분히 활용하여 조선에 힘쓴 결과 순식간에 조선으로 세계 제일의 해양민족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찍부터 바다를 상대로 한 항해술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중해의 끝, 약 3000 km나 떨어진 스페인의 ‘다시스(Tarshish)’라는 도시와 무역을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스페인의 다시스는 먼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 중앙에 있는 키프러스섬(깃딤땅, 구브로섬)을 중간 경유지로 활용하여 이집트, 아시리아(앗수르), 신바빌로니아(바벨론), 그리이스, 이스라엘 등 열국의 중계 무역항과 교역 중심지로 경제적인 부를 쌓아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환경 때문에 지중해를 자기네 바다(內海)처럼 사용하는 해양민족에다가 천부적인 상인 기질이 더하여짐으로써 페니키아인이라 하면 ‘상인’의 대명사로 까지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지중해에 면한 바다를 따라 건설된 페니키아의 도시국가들 중에서 ‘두로’(Tyre) 와 ‘시돈’(Sidon)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데, 초기에는 시돈이 주도권을 잡았다가 후에는 두로가 세력을 확장하여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 지역은 레바논 산맥으로 평원이 매우 좁고 산악지형이 워낙 복잡하다 보니 상호간의 교류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각 도시에
각각 별도의 단일 국가처럼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이들 도시국가중 카르타고의 본국은 바로 ‘두로(Tyre)' 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구약성경 ’에스겔서‘에선 “너와 너의 주민이 바다 가운데 있어 견고하였도다”(겔 26:17) 즉 두로는 매우 강성하여 그 식민지가 지중해 해안과 섬들에 널려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두로 라는 뜻은 ’바위‘라는 의미를 가진 견고한 도시국가로, 해변에서 떨어진 섬에다가 전략상 난공불락의 요새로 건설된 도시국가였습니다.
또한 두로 사람들이 당시 다른 민족들에게 어떻게 보였는가는 에스겔서 26,27,28장에 그들의 교역하는 모습이 “바다의 모든 배와 그 사공들은 네 가운데서 무역하였도다”(겔 27: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로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 가는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시돈 해변에 널려있는 뿔 고동으로 부터 채취한 자색 염료와 규석이 많은 모래를 녹여 만든 유리제품, 금속세공 등으로 수출하다가 레바논 산의 백향목과 잣나무 그리고 이집트 등에서 나오는 밀, 포도주, 말 등 농축산물과 금, 은 등 보석류 광산품의 중계무역과 해운업 등으로 경제적인 부를 늘려갑니다. 후에는 노예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해 갑니다.
이렇듯, 두로는 국제적인 중계 무역항이고 교역의 중심지로써 이웃 헤브라이인 이스라엘과는 가나안 땅 정착이후 부터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까지는 우호적인 관계였습니다.
다윗왕 시대에는 두로왕 히람이 다윗왕의 궁전을 짓기 위해 백향목과 목수, 석공들을 보냈고(삼하 5:11) 솔로몬왕 때는 레바논산에서 베어온 백향목으로 뗏목을 만들어 백향목과 잣나무의 재목을 실어 지중해 남쪽에 있는 욥바로 보내고 금을 제공하여 성전을 건축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왕상 5:1-10, 9:11) 그리고 두로사람 히람으로 하여금 성전의 놋기둥과 바다, 제사용 기물과 성전기구들을 만드는 데 적극 도왔습니다.(왕상 7:13-47) 이에 대한 보답으로 솔로몬왕은 두로왕 히람에게 갈릴리 20개 성읍을 주었으나 두로왕 히람은 흡족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왕상 9:11-14) 그 후 두로왕 히람은 솔로몬왕이 에돔땅 홍해근처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자 바다에 익숙한 사공을 보내어 오빌의 금을 실어 솔로몬왕에게 가져오도록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왕상 9:26-28)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왕국이 분열된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시대 때 그 당시 국제정치의 꽃인 정략결혼이 솔로몬왕 이후 다시 부활되었습니다. 두로왕 엣바알은 그의 딸 이세벨을 아합과 정략결혼하게 했으며 이세벨은 두로의 우상을 들여와 북이스라엘을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왕상 16:31-33) 이일은 후에 이스라엘에 끼친 신앙적인 폐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앗수르)에, 남왕국 유다는 신바빌로니아(바벨론)에 멸망당하면서 두로에게 세계 문물과 상업의 중심권이 한층 더 집중되어 엄청난 무역흑자를 낳게 됩니다.(겔 26:2)
이러한 과정 중에 이웃나라의 멸망을 슬퍼하고 애도하기는커녕 자기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즐거워하고 있는 두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됩니다.(겔 26:2,14) 그 후 두로는 완전히 망하게 되는데, 일차적으로 신바빌로니아 네부카드네자르2세(Nebuchadnezzar B.C 630-562)에 의해 B.C 585년부터 572년까지 13년 동안 두로를 함락시키지만 요새화된 두로섬 만은 함락시키지 못하게 됩니다. 그 뒤 B.C 323년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323)이 섬이었던 두로를 공격하기 위해 길이 800m 폭 60m의 제방을 쌓아 해안과 연결시켜서 두로섬을 함락시키고 완전히 파괴했다고 합니다.(겔 26:7-14)
그것은 두로가 경제적인 부만을 추구한 결과 받은 인과응보였습니다. 경제적인 부는 누구에게나 선호되며 원하는 것이지만 또한 반대로 주위로부터 선망과 질시를 받고 나중에는 공포와 증오로 확대되게 됩니다. 이렇듯 경제적인 부가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목적이 될 때에 종국에는 그 소유자 자신에게도 화를 가져다줍니다. ‘화’란 에스겔 선지자가 반복해서 전하듯 오만과 불손입니다.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겔 28:16) ....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가 더럽혔음이여..”(겔 28:17)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이미 이 도시국가의 멸망의 징조가 임해 있었던 것입니다. 북부 아프리카로 건너간 카르타고의 건국이 유산을 둘러싼 상속싸움에 기인한다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물론 이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게 된 두로는 해상무역의 거점기지로 도시를 계속 늘려갔고 그 중의 하나가 카르타고 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로의 멸망에 대해 카르타고는 안타깝게도 뼈아픈 교훈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본국인 두로와 똑같이 경제적인 부만을 추구하다가 180여년 (B.C146)뒤에 로마군의 총사령관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에 의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됩니다.(9/22/14 고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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