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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은바리라이프 2014. 9. 10. 10:10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목창균



Ⅰ. 들머리

19세기 신학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구획지어진 19세기의 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799년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 출판으로 부터 제1자 세계 대전에 이르는 기간의 신학을 의미한다. 이는 형식과 내용 특히 신학 방법론에서 그 전과 후의 정통주의 및 신정통주의 신학과 뚜렷히 구분된다. 이러한 19세기 신학은 여러 부류로 세분될 수 있으나, 구라파, 특히 독일 신학계를 주도한 신학사조를 흔히 자유주의 신학, 신개신교 신학 혹은 현대주의 신학이라 한다. 이것은 1920년대까지 유럽 신학계를 그리고 1930년대까지 미국 신학계를 주도했다.

자유주의 혹은 현대주의는 그 안에 다양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의미는 “제한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사상 체계나 입장을 절대시하거나 그것에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정신은 개방된 마음 관용 진리에 대한 겸허하고 헌신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19세기의 모든 사상 즉 종교를 비롯한 과학, 철학, 경제, 정치 등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종교적 자유주의는 현대의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시대 정신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거나 재진술함으로써 기독교를 변호하려한 노력이었다. 19세기 들어 개신교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현대에서 종교가 어떻게 가능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였다. 이것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며 종교와 신학의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론의 가능성 문제 및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문제가 주 관심사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특정 신앙고백이나 신조에 종속되지 않고 종교개혁 신앙을 그 시대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였다. 그러나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경험이나 정황 (context)에 둠으로써 인간 중심의 신학이 되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이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일어났는지 무엇을 주장하며 어떻게 발전하고 쇠퇴했는지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는 무엇인지를 해명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Ⅱ.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배경

사상은 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어떠한 배경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된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에 대한 개신교의 응답인 동시에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개신교는 18세기에 여러 측면으로 변화를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100년전쟁, 영국 시민 전쟁,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 전쟁과 같은 수많은 갈등과 투쟁이 일어났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가 출현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며, 사회 계급이 발생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여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와 조화하여 또는 계몽주의의 관점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려 했다. 계몽주의는 17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며 전 유럽 사상의 주류를 형성했던 사조로서 개인의 자유와 이성의 능력을 무한히 신뢰하고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 외에도 경건주의와 19세기 초의 독일 낭만주의가 자유주의 신학 형성에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으며 자유주의 신학이 성장하고 발육한 토양이 되었다.



1. 계몽주의

버나드 램 (Bernard Ramm)교수는 [현대 신학에서의 긴장들 (Tensions in Contemporay Theology)] 이란 책에 수록된 그의 논문에서 계몽주의가 현대 정신과 신학에 미친 영향으로 일곱가지를 지적했다. 역사주의 과학주의 비평주의 합리주의 관용주의 낙관주의 및 칸트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은 계몽주의의 강조점인 동시에 특징들이다. 필자는 램의 글에 기초하여 이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끼친 영향을 간략히 살펴 보고자 한다.

역사주의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만을 진리로 인정하려는 사상이다. 이것은 성서의 역사적 자료에 대한 신뢰성과 사실성에 대해 계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자유주의의 발생을 촉진했다. 이것들은 사회 윤리 및 영적 가치를 결정하는 지금까지의 삶의 양태와 가치 기준을 변화시켰으며 성서적인 세계관과 과학적인 세계관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성서의 기록과 현대 과학이 충돌할 때 성서보다. 과학을 선호했다. 따라서 창조와 타락에 대한 성서의 이야기는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자연세계에 대한 과학의 탐구 결과를 수용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탐구 방법을 신뢰하여 성서와 종교 연구에 사용했다.

비평주의는 모든 사실과 자료들의 확실성을 의심해 보거나 분석 또는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성서 역시 재검사의 대상이 되었으며 고등비평이란 이름 아래 성서 비평이 시작되었다. 성서 비평은 기독교가 계몽시대의 새로운 학문과 학문방법에 적응해 보려는 시도였다

합리주의는 이성의 완전한 능력을 강조하여 이성을 최종적인 권위와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고 이성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 역시 이성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태도이다. 이 결과로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기적 등에 대한 교리들이 문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 파울루스 (Paulus)는 기적에 관한 성서의 기록들을 저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했다. 예수가 물 위로 걸어가신 것은 제자들이 잘못 본 것으로 부활은 예수가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 소생한 것으로 승천 기사는 예수가 정말 죽기 전에 한 고별 인사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 합리주의를 신학에 도입하여 합리주의적 종교를 만든 것이 자연신론자들이다. 18세기의 자연신론과 자연종교는 종교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축소시킴으로써 합리주의와 기독교 신앙 사이의 타협을 모색했다.

관용주의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지 않고 계속성의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주의가 인간과 자연세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인간과 하나님의 연속성과 기독교와 타종교의 공통성을 주장하고 기독교를 다른 종교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도록 했다.

낙관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미래를 신뢰하여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며 세계가 계속적으로 좋아지고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이것은 당시의 평화적인 분위기 급속한 산업화 민주적인 정치 구조 역사의 진행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 과학에 대한 신뢰 등에 기인되었다. 이런 낙관적 정신에 근거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원죄교리를 거부하고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계몽시대의 대표적인 사상은 칸트의 비판철학이다. 칸트는 초자연적인 종교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단지 이성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종교만을 논함으로 종교를 도덕화시켰다. 이러한 칸트의 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할 정도로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트뢸치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자유주의 신학이 종교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은 칸트의 영향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계몽주의의 영향은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성경의 권위와 기적의 가능성 문제 그리고 자연 종교의 발전이 그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 과학의 발전 및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연구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최고의 권위로 믿는 정통주의적 성서관에 의문을 제기했다. 성서의 권위가 문제시 되자 그 변호자들은 진리의 보증으로 기적에 호소했던 반면 계몽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일상 사건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는 기적의 가능성을 자연질서의 규칙성에 대한 과학적 발견에 근거하여 부정했다. 이런 결과로 기독교 정통주의에 반대되는 자연신론과 자연종교와 같은 합리주의적 종교가 계몽시대에 발전하게 되었으나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에 계시나 복음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상실하게 되었다.



2. 경건주의

18세기와 19세기 개신교 교회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또 다른 사상 운동이 경건주의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생명력 있는 신앙을 상실하고 형식과 교리화되었다. 성서의 권위가 약화된 반면 세례단, 설교단, 고백실 등이 무언의 우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경건주의이다. 경건주의는 사상의 체계라기 보다 감정의 체계이며, 신학적 분위기와 종교적 부흥운동이라 할 수 있다.

독일 경건주의의 창시자 스페너 (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자신의 집에서 기도와 성서 연구 및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자유스런 토론을 병행하는 모임을 가지는 한편 [복음적 교회의 개혁을 위한 열망 (An Earnest Desire for a Reform, Pleasing to God, of the True Evangelical Churches)] 이란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성서의 진지한 연구 평신도의 교회 행정 참여 기독교인의 실천적 삶이 교리 지식에 대한 본질적인 보층물이라는 것. 이단자들에 대한 관대한 취급 대신 혹독한 공격과 처벌을 할것 대학에서의 기도와 경건 생활, 수사학적 설교를, 순수하고 신앙심 있는 설교로 대치할 것 등을 제의했다. 이러한 스페너의 호소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하나의 운동이 되었다. 스페너의 사후에는 프랑케 (August Hermann Franke, 1663-1727), 진젠도르프 (Graf Nicholas Zinzendorf, 1700-1760)등이 지도자가 되었으며, 프러시아 왕 프레드릭 Ⅲ세가 경건주의를 적극 돕고 1694년에 할레 (Halle)대학을 설립함에 따라 이 대학이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 후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세력이 약화되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신경건주의가 일어 났으며 멘켄 (Gottfried Menken, 1768-1831)등이 이를 대변했다.

경건주의의 특징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강조했다. 의인 중생 성화를 교리로만 취급하지 않고 실제로 체험해야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며 지식보다. 오히려 실천에서 존재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둘째 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 행함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다고 비판 받을 정도로 선행을 강조했다. 셋째 개인주의에 기초하여 종교의 개인화를 목적으로 삼았다. 경건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은 세계를 기독교화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넷째 강력한 헌신생활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중시하는 친교의 원리를 강조했다. 지역교회 제도와 그 원리와는 달리 교회를 경건한 무리의 모임으로 간주하고 하나님과의 내적인 연합과 중생의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은둔하여 함께 더불어 사는 특수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했다.

경건주의는 형식화된 정통주의 기독교에 생명력을 회복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으나 자신의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쏟는 개인주의적 신앙이 그 근본적인 결점이었다. 경건주의는 칸트 헤르더 슐라이에르마허 헤겔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9세기의 개신교 사상의 재구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자유주의 신학이 주관주의적이며 경험적이며 윤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경건주의의 영향이라 하겠다



3. 낭만주의

18세기를 지배하던 합리주의와 기계론적 우주관을 거부하는 또 다른 흐름이 있었다. 1790년대 루소와 레씽에 의해 독일에서 시작되어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술 문학 과학 등 여러방면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낭만주의가 그것이다. 낭만주의 운동은 형태와 동기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란 말 역시 너무 자유스럽게 사용되므로 통일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헤론 (Alasdair I. C. Heron)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인공적인 것 보다 자연적인 것을 강요된 것보다. 자발적인 것을 차가운 합리성보다. 경험과 감정을 외적이며 형식적인 것보다. 내적이며 상상적인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웰치 (Claude Welch)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자유와 역동주의의 이름으로 형식주의와 구조주의에 저항한 것이며 개체성 감정의 직접성 및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독일 낭만주의는 루소와 레씽에 의해 시작되어 헤르더 (Herder)와 쉴러 (Schiller)에 의해 육성되고 노발리스 (Novalis), 슐레겔 (F. Schlegel)형제, 피히테 (Fichte)등에 의해 개화되었다. 낭만주의는 헤겔 쉐링 등과 같은 철학자와 슐라이에르마허 코러리지 (Coleridge), 뉴우맨 (Newman)같은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Ⅲ.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현대 정신은 18세기 유럽의 지성계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것은 과학적이며, 낙관적인 세계관을 형성했으며, 과학적 경험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가 그 특징이었다. 이 현대적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이는 성서의 역사적 확실성과 그 가치를 비롯한 전통적인 신학의 모든 전제들을 문제시하고, 집중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나 신학은 이런 도전에 의해 무력해지고 고립화되어 그 토대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19세기초의 신학적 과제는 기독교 신앙의 활력을 회복하고, 창조적인 미래를 위한 신학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즉 현대 세계에 존립할 수 있는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디에서 그 토대를 발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 슐라이에르마허 (1768-1834)였다. 그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문제 삼고, 그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1799년에 출판된 그의 처녀작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에게 보내는 [종교론 (On Religion: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은 이론의 여지 없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언서로 간주되었으며 하루밤 사이에 슐라이에르마허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것은 경건주의를 배경으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해 종교가 현대에서 어떻게 존립 가능한가를 해명한 종교 변증서이다. 계몽주의의 종교연구는 그 본질을 종교 현상에서 발견하려함으로써 종교를 도덕으로 환원하거나 철학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종교는 19세기초 독일 낭만파 지성인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계몽주의의 종교관의 비판을 출발점으로 종교의 직접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이며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는 견해이다. 따라서 도덕화되고 이성화되었던 계몽주의 시대의 종교관에 반기를 들고 직관과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주장하여 종교의 독자성을 확보한 것이 그의 공헌으로 평가된다

종교론은 젊은 지성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그들이 외면하고 멸시했던 종교에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통주의 교회의 지도자요 슐라이에르마허의 반대자였던 함즈 (Claus Harms, 1778-1885)의 회고록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는 종교론을 읽고 그의 고상한 삶이 태어난 사건으로 간주할 만큼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의 교의학서인 만년의 저서 신앙론 (1821-1822)은 기독교와 신학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을 과거 도식의 단순한 반복으로 생각하지 않고 현대 세계와의 살아있는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교의 신학은 주어진 시대의 기독교 교회에서 널리 유행하는 교리를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정의는 슐라이에르마허가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문제 삼았음을 말해준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적 관심의 방향과 출발점을 자아에로 향했다. 그는 신학의 토대를 신조 교의 또는 성경 본문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경험 또는 기독교인 자기 의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인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 기독교 교의학의 과제이다.”이 같이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의 가능성을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에서 찾았다. 교리적 신조 배후에 있는 살아있는 경험에로 돌아감으로써 신학의 새로운 토대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종교적인 의식에 대한 경험적인 기술이 되었다. 이것은 신학 방법론의 일대 변혁으로 경험주의의 도전에 각성하는 기독교 신앙을 대변한다. 슐라이에마허는 미래의 신학이 단순히 권위에 대한 호소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경험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했다.

이러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은 몇가지 의의를 지닌다. 첫째 그것은 현대 세계의 도전에 대한 최초의 신학적 응답이다. 그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문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재진술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둘째 인간의 경험을 신학의 주된 자료로 받아들임으로써 신학에 새로운 활기와 관심을 불어넣었다. 또한 인간 감정에 나타난 하나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변적인 철학으로부터 신학을 독립시키려고 했다. 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의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셋째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슐라이에르마허는 흔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창건자로 불리어진다. 그러나 후대 신학이 인간 중심적이 되거나 인간학화된 것은 슐라이에르마허의 방법론적 오류에 기인된 바 적지 않다. 그가 신학을 계시의 연구가 아닌 인간의 자기 의식 또는 종교성의 연구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Ⅳ. 자유주의 신학의 조류와 특징

1. 신학 조류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사적으로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하여 리츨 트뢸치 하르낙 등 독일 신학계를 지배해 온 신학 전통을 말한다. 이 자유주의 신학 전통은 대략 다음 세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슐라이에르마허로 대변되는 감정의 신학이다. 슐라이에르라허는 비록 학파를 형성하지는 않았으나 신학적인 면에서 19세기 전체가 그의 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영향은 지대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그의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고 아직도 건재하다. 그의 신학을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신학자들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그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특히 네안더 (A Neander), 니이체 (Karl Immanuel Nitzsch), 슈바이처 (Alexander Schweitzer), 트베스텐 (August Twesten)등의 신학자들과 조정신학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둘째 헤겔 철학에 기반을 둔 역사 비평적 신학 또는 헤겔학파의 신학이다. 칸트 이후 서양철학은 헤겔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본래 철학자였으나 그의 철학이 곧 신학이라 할 정도로 신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철학에 대한 그의 공헌은 특히 역사 철학에서 발견된다. 역사는 그 자체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변증법적으로 진보적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헤겔의 사상을 신학에 도입하여 성서와 기독교의 본질 연구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사용한 학자들이 있다. 헤겔 좌파에 속하는 쉬트라우스 (David Friedrich Strauss, 1803-1874), 바우르 (Ferdinand Christian Baur, 1792-1860), 바이세 (Christian Herrmann Weisse, 1801-1866), 비더만 (A. E. Biedermann, 1819-1885)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현대사상과 과학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여 전통적인 기독교를 포기하거나 수정하려 했다. 특히 그리스도론이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이상적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의 관계 문제를 해명하려고 시도했다. 한편 벨하우젠 (Julius Wellhausen, 1844-1918)은 구약성서 연구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사용했다.

셋째 칸트철학에 기반을 둔 리츨학파의 신학과 트뢸치의 종교사학파의 신학이다.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된 경험 신학 전통의 탁월한 해석자요 자유주의 개신교의 왕자로 불리우는 사람이 리츨 (Albrecht Ritschl, 1822-1889)이다. 리츨은 칸트의 추종자로 그의 비판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현상계와 본체계의 구분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한계성 도덕과 종교의 일치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종교를 본질적으로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 역시 리츨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리츨이 형이상학적 신학을 거부하고 경험에 호소한 것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가 신학을 기독교인의 의식이 아닌 역사적 계시에 기초한 것은 중요한 차이점이다. 리츨은 복음이 로마 가톨릭 신비주의 경건주의 낭만주의 등으로 인해 변형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종교 개혁적인 이해로 재해석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의 목적은 종교 개혁자의 길을 통해 신약 성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리츨과 더불어 기독교의 윤리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리츨의 사상은 리츨 학파를 형성하여 헤르만 (Wilhelm Herrmann, 1846-1922), 하르낙 (Adolf von Harnack, 1852-1930), 고트쉬크 (Gottschick), 카텐부쉬 (Kattenbush), 숄츠 (Hermann Scholz)에 의해 계승되었다.

한편 19세기 마지막 10년동안 독일에서 발전한 학파가 종교사학파이다. 이 학파는 세계 모든 종교를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의 발전과정을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 비추어 연구하려 했다. 복음서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요소를 고대근동의 신비 종교로부터 들어온 것이라 하여 제거해 버렸다. 이 학파는 궁켈 (Hermann Gunkel, 1862-1932)이 1888년 출판한 성령의 역사로 부터 시작하여 부세트 (Wilhelm Bousset ), 브레데 (Wilhelm Wrede, 1859-1906), 바이스 (Johannes Weiss, 1863-1918)등이 여기에 속하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트뢸치 (Ernst Troeltsch, 1865-1923)이다.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파생되어 미국 특유의 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성장했다.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파로는 유니태리아니즘 (Unitarianism)과 사회 복음주의 신학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자유주의 신학의 극단적인 형태로서 합리주의적인 해석에 의해 삼위일체론을 거부하고 유일한 신격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채닝 (William Ellery Channing, 1780-1842)이 그 상징적인 인물이며 스튜아르트 (Moses Stuart), 깁스 (Josiah W. Gibbs)등이 이 파에 속한다. 후자는 당시의 낙관적 도덕주의에 기초한 것으로 복음의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여 사회 윤리와 사회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것은 그래든 (Washinngton Gladden)에 의해 시작되어 라우쉔부쉬 (Walter Rauschenbush, 1861-1918)에 의해 미국의 전형적인 종교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밖에 저명한 자유주의 신학자로는 버스넬 (Horace Bushnell, 1802-1876)이 있다.

한편 호오던 (William Hordern)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미국의 자유주의는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극단적 자유주의자인 인문즈의 그룹 윌맨 (A. N. Wilmann), 브라이트맨 (E. S. Brightmann)으로 대표되는 경험적 종교철학 그룹 워터맨 (Leory Watermann)의 예수 운동 및 복음적 자유주의자인 대다수의 자유주의 교인이 그것이다. 복음적 자유주의자로 간주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포스딕 (Jarry Emerson Fosdick), 브라운 (W. A. Brown), 코핀 (H. S. Coffin)등을 들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새로운 신학운동이 일어났다. 유럽의 신정통주의 신학과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이 그것이다. 유럽에서는 제 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그리고 미국에서는 1929년 경제 대 공항 이후로 자유주의 신학은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말미암아 인간 이성의 능력 낙관주의 역사적 진보주의에 대한 신뢰가 파괴됨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그 사상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능력에 너무 낙관적이었다는 것이 위기에 시대에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는 것을 통해 입증되었다. 따라서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하나님 중심주의로의 전환이 신정통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붕괴된 이후에도 그 영향력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인간의 경험을 중시하는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 신학 민중신학 등 급진 신학이 오늘날도 자유주의 신학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신학적 특징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관심은 크게 세가지로 정리 될 수 있다. 신학의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론의 가능성 문제 그리고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가 그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 헤겔, 코러리지 채닝 등 19세기 초의 학자들은 종교의 본질과 신학의 과제를 신학적 토의의 주제로 삼았다. 이들이 제시한 새로운 토대에 기초하여 쉬트라우스 바우어 등 19세기 중엽의 학자들은 그리스도론에 관심을 집중했다. 어떻게 역사적 인물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다. 19세기 말 경에는 기독교와 문화 또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가 신학의 새로운 주제가 되었다. 트뢸치의 종교사학파와 사회 복음의 신학이 이를 입증해 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제에 대한 논의를 통해 여러 갈래로 전개된 자유주의 신학은 어떤 특징과 특색을 지니고 있는가?

첫째,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었다. 성서나 신조를 신학의 출발점이나 궁극적 규범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인간의 종교적인 의식을 리츨이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경험을 신학의 근본적 자료로 간주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 중심적이며 주관주의적인 경향을 띄게 되었다.

둘째,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공관복음서의 자료에 근거하여 역사의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와 구분하려 했다. 특히 역사 비평적 신학파는 신앙의 그리스도는 후대 교회가 부가한 비역사적 요소에 근거한 것으로 취급하고 역사적 예수를 회복시키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에 관한 전통적인 교리를 포기하거나 거부했다. 그리스도를 인간의 원형이나 모본 또는 교사로 봄으로써 인간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를 완전한 신의식을 소유한 분으로 그리고 리츨은 탁월한 도덕적 능력을 소유한 분으로 이해했다.

셋째,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무한하고, 완전한 하나님과 유한하고 불완전한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를 주장했으나, 자유주의 신학은 세계 내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신앙과 이성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 하여 종교적 관용의 태도를 취했다.

넷째, 낙관주의적 인간관을 주장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강조한 반면 타락과 원죄 교리를 거부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다섯째, 기독교의 윤리적 사회적 의미를 강조했다. 현재의 세계와 인간의 상황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도덕과 종교의 일치를 주장한 칸트의 영향이며 특히 리츨 학파 종교 사학파 사회 복음주의 신학파에서 현저했다.

여섯째, 현대 과학과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훈을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여 과학의 업적 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접근 수단으로 과학적 탐구 방법을 수용했다. 성서 비평은 기독교를 이러한 학문 방법에 적응시켜 보려는 시도였다



Ⅴ. 마무리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나 경험에 근거하여 수행함으로써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성과 과학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여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을 거부하거나 왜곡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성경의 무오성 부정이 그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는 그릇된 출발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능력이나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잘못된 시작은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자유주의 신학은 복음의 핵심을 상실하고 기독교를 계시종교로 부터 윤리종교로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종교로부터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틸리히가 “유럽에서 개신교는 죽었다. 개신교 신학의 마지막 200년은 본질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외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리츨에서 보듯이 자유주의 신학은 정통주의 신학을 비판점으로 삼아 종교개혁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오히려 종교개혁 전통으로부터 단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건전한 신학은 신학의 네 가지 근원인 성서 전통 이성 및 경험이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다룸에 있어 그것이 성서에서 어떻게 고려되고 있으며 전통에 의해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이성에 의해 어떻게 체계화되고 있으며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인간 경험에 관련되어 있는지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계시와 전통에 대한 재해석을 전제로 현대의 정황에 맞는 신학을 모색하고 있는 오늘의 급진신학은 성서와 전통을 희생시킬 만큼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중시했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와 몰락을 귀감 삼아야 될 것이다.



(주) 1. Stanley N. Gundry, Alan F. Johnson, Tensions in Contemporaary Theology(Chicago:Moody Press, 1976) pp 16-18.

2. Alasdair I. C. Heron, A Century of Protestant Thought(London:Lutterworth Press, 1980), p 12

3. B. A.게리쉬 현대 신학의 태동 (서울 : 대한 기독교서회 1988 pp 1516

4.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The Christian Faith(Philadelphia:Fortress Press, 1976), p 88

5. 윌리암 호오던 프로테스탄트 신학 개요 pp 97103

6. John Dillenberger와 Claude Welch가 지은 Protestant Christianity 211쪽 이하를 참조할 것

7.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The Christian Fait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p 88

8. 목창균 슐라이에르 마허의 신학사상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91 p 88

9. 윌리엄 호오던 프로테스탄트 신학개요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6 pp 97103

10. Welch, p 4

11. John Dillenberger, Claude Welch, Protestant Christianit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8), pp 211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