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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필로의 성서해석

은바리라이프 2014. 6. 10. 22:28

알렉산드리아 필로의 성서해석

 

천사무엘(한남대, 구약학)

 

1. 들어가는 말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는 성서시대의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제 2 성전시대 가장 큰 디아스포라 집단이었던 이 공동체는 그리스-로마 문화를 그들의 전승에 접목시키면서 헬라주의적 유대교(Hellenistic Judaism)를 형성시켰고, 예루살렘을 중심한 팔레스틴 유대교(Palestinian Judaism)와 함께 당시 유대교의 두 축을 이루었다. 이들의 사상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 영향을 주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형성을 가능케 했다.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주전 3세기에, 오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고, 역사가 데메트리우스(Demetrius)와 비극작가 에스겔(Ezekiel the tragedian), 아르타파누스(Artapanus) 등의 작품이 나왔다. 주전 2세기에는 아리스테아스(Aristeas)의 편지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등의 문학이 쓰여졌으며, 주전 1세기와 주후 1세기에는 필로(주전 약 20/15년-주후 약 50년)의 많은 저서들과 솔로몬의 지혜서, 마카비 3서, 마카비 4서 등이 나왔다. 이 중 필로는 가장 방대한 저작물을 남겼으며, 이는 알렉산드리아 유대교의 사상적, 문학적, 종교적 활동의 절정으로 여겨진다.

필로는 헬라주의적 유대교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지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그는 부유한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헬라식 교육과 유대식 교육을 모두 받은 엘리트였고, 주후 39/40년에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단을 이끌고 로마의 가이우스 칼리귤라(Gaius Caligula) 황제를 방문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했다는 것 정도이다. 그의 저작물들은 그가 헬라철학과 문학에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였지만, 유대교에 매우 충실하였고 오경해석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 연구는 필로의 성서해석의 방법과 이유를 고찰하는 것이다. 필로는 어떻게 성서를 해석했는가? 그는 왜 이러한 방법으로 경전을 이해했는가? 그의 성서해석에 나타나 있는 신학사상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가?

본 논문의 연구대상이 되는 필로의 성서해석문서들은 그 형태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오경의 내용을 재언하면서 해설한 것인데, 모세 율법의 해설(The Exposition of the Laws of Moses)에 포함된 책들(On the Creation; on Abraham; on Joseph; on the Decalogue; on the Special Laws 1-4; on the Virtues; on Rewards and Punishments)과 모세의 생애(On the Life of Moses)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성서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인데, 창세기 2-41장의 주요 부분을 다룬 창세기의 알레고리적 주석(The Allegorical Commentary on Genesis)과, 창세기 및 출애굽기에 대한 질의응답(Questions and Answers on Genesis and Exodus) 등이다. 본 연구는 이 두 형태의 성서해석 중 알레고리적 해석에 중점을 둔다. 왜냐하면 이것은 필로의 대표적인 성서해석방법일 뿐만 아니라 그의 성서해석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2. 필로 연구의 최근 동향

 

필로에 관한 최근 연구는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필로를 해석하는 경우이다. 라이제강(H. Leisegang)은 필로를 헬라의 신비주의와 신비종교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리하여 필로를 유대인으로서가 아니라 유대의 옷을 입고 있는 헬라의 신비주의자로 여기고자 했다. 그러나 라이젠슈타인(R. Reitzenstein)은 이집트의 신비종교적 관점에서 필로를 이해하고자 했다.

굿인어프(E. R. Goodenough) 역시 신비종교적 관점에서 필로를 해석했다. 그는, 필로가 헬라의 신비종교를 비판했지만, 유대교를 헬라주의적 신비종교로 변형시켰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변형은 필로가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니라, 필로 이전부터 헬라주의적 유대교, 특히 이집트의 유대교에서 시도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샌드멜(S. Sandmel)은 그의 스승인 굿인어프의 견해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필로가 유대교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즉, 필로의 사상은 유대교의 주류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marginal)에 속한다는 것이다.그러나 볼프슨(H. A. Wolfson)은 필로가 단지 용어만 헬라종교에서 빌려왔을 뿐, 유대교의 신앙이나 종교적 개념을 바꾸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둘째는, 철학적 관점이다. 볼프슨에 의하면, 필로부터 스피노자까지, 기독교, 회교, 유대교를 포함하는 중세철학은 헬라철학과 성서의 계시를 조화하려는 시도였고, 필로는 이러한 유형의 철학적 흐름을 시작한 사람이며, 중세철학은 필로철학의 역사이다. 필로를 위대한 철학자로 묘사하면서 볼프슨은, 필로의 저작에 나타나 있는 종교철학을 체계화하고자 했으며, 필로의 사상을,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통한 바리새파 유대교의 철학적 발전으로 여겼다. 그러나 볼프슨이 재구성한 필로의 사상은 필로 자신이 의도한 것보다 더 체계적이고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딜른(J. Dillon)은 필로의 사상을 중기 플라톤주의로 분류했다. 그에 의하면, 필로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스토아주의와 피타고라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필로를 중기 플라톤주의자로 부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플라톤주의 학파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딜른과 함께 필로를 연구한 윈스턴(D. Winston) 역시 필로의 철학사상은 중기 플라톤주의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필로는 플라톤주의를 참된 철학이라 여겼고, 이것을 전통적인 유대사상에 동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러한 철학적 개념들을 성서해석에 도입했다고 한다. 루니아(D. Runia)도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면서, 필로를 플라톤적 성서주석가 (a Platonizing expositor of scripture)로 여기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필로가 중기 플라톤주의 사상을 활용하면서 성서를 주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셋째는, 영지주의적 관점이다. 요나스(H. Jonas)는 필로의 사상을 영지주의(Gnosticism)로 이해했다. 그에 의하면, 필로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우주라는 한계적 영역과 신이라는 초월적 영역을 구분하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따르면서 하나님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대비시켰다. 그는 이러한 이원론이 하늘과 땅, 영혼과 육체에 대한 필로의 개념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그러나 피어슨(B. Pearson)은 필로가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았거나 영지주의 사상에 의존하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그에 의하면, 필로의 사상에는 영지주의적 사고와 유사한 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필로는 결코 영지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초기 영지주의가 구약성서를 비롯한 유대전승에 의존했다고 한다. 따라서 피어슨은 필로의 사상을 영지주의 이전(pre-Gnosticism)의 범주에 포함시킬 것을 제안한다.

넷째는, 최근의 연구경향인데, 필로를 성서주석가(biblical exegete)로 이해하려는 관점이다. 보르겐(P. Borgen)은 필로를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에서 활동한 오경 해석가들 중의 하나로 여긴다. 그에 의하면, 필로는 헬라의 종교철학과 교육 그리고 이방종교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체계를 세우는 철학가가 아니었으며, 성서를 당시 상황에 맞게 해석한 성서주석가였고 그의 활동 무대는 유대회당이었다. 니키프로베츠키(V. Nikiprowetzky) 역시 필로를 유대회당에서 활동한 성서주석가로 여긴다. 그는 필로가 오경을 헬라사고에 맞게 해석하고자 했으며, 성서에 있는 보다 깊은 의미를 밝히기 위하여 헬라철학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필로의 성서주석들은 "주석"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며, 필로에 관한 연구는 그의 주석을 분석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주석가로서의 필로를 위해하기 위하여 해머튼-켈리(R. G. Hamerton-Kelly)와 함께 연구한 맥(B. Mack)은 필로의 작품들에 나타난 주석전승들을 찾고자 했다. 그에 의하면, 필로는 전통적인 주석방법과 다양한 자료들을 사용했으며, 그의 저작물들은 알렉산드리아 유대 회당 공동체에서 발전된 주석전승의 역사를 반영한다. 그는 필로의 성서주석을 이 역사의 마지막 단계로 간주한다. 같은 맥락에서, 토빈(T. H. Tobin)은 창세기 1-2장에 관한 필로의 해석을 분석하면서, 필로에 영향을 주었던 주석전승들과 필로 자신의 해석을 추적하고자 했다. 그에 의하면, 창세기의 인간창조에 관한 필로의 해석에는 크게 두가지 유형의 해석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중기 플라톤주의에서 발전된 플라톤적 세상 창조 해석과 필로 자신의 영혼에 관한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코헨(N. G. Cohen)은 필로의 주요 작품들이 유대적 미드라쉬 전승의 주류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녀는 필로의 미드라쉬와 팔레스틴의 랍비적 미드라쉬 전승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상당히 많은 공통점들도 있으며, 성서에 대한 필로의 태도는 후대 랍비들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녀는 필로의 작품들을 초기 미드라쉬 작품들 중의 하나로 여겼고, 필로를 당시 정통 유대교(normative Judaism)의 대표적인 알렉산드리아판으로 여겼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필로에 대한 최근 연구는 그를 성서해석자로서 고찰하는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즉, 중기 플라톤주의적 배경과 유대교적 배경 속에서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성서해석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러한 해석이 알렉산드리아 유대교뿐만 아니라 팔레스틴 유대교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추적하려는 것이다. 본 글은 이러한 연구동향을 반영하면서 필로의 성서해석의 방법과 목적을 고찰하고자 한다.

3. 필로와 성서

 

필로는 구약성서를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 생각했다. 그는 성서의 말씀이 철학자들의 저서들처럼 저자(들)에 의하여 쓰여진 것으로 여겼다. 또한, 성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포되었으며(Mut. Nom.125), 어떠한 오류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Abr. 258). 그는 오경, 예언서, 그리고 시편과 그 밖의 다른 책들이 성서를 구성한다고 보았다(Vita Cont. 3.25). 여기에서 다른 책들이란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로 그 범위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생각하는 정경의 범위는 일반적으로 알렉산드리아 유대교 정경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필로는 구약성서 중 오경을, 다른 책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권위를 가진 책으로 여겼고,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의 성서해석문서들에서 인용되거나 다루어지고 있는 성서의 내용을 보면, 그가 오경에 얼마나 특별한 관심을 가졌는가를 보여준다. 예를 들자면, 필로의 작품들에 대한 로브 고전 시리즈(Loeb Classical Library)의 색인목록은 68 페이지를 오경에 그리고 6페이지를 나머지 구약의 책들에 할애하고 있다. 또한, 낙스에 의하면, 필로의 문서들에 나타난, 오경과 나머지 구약의 책들에 대한 인용 비율은 2,000대 50이다.

필로가 오경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당시 오경의 저자로 여겨졌던 모세라는 인물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필로는 모세를 율법의 수여자(lawgiver), 대제사장, 예언자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플라톤 철학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철학자-왕(ideal philosopher-king)으로 여겼다. 또한, 모세의 율법은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자연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법과 같은 것이며, 당시 있던 어떠한 이상적인 철학적 법보다 앞선 것으로 여겼다. 모세는 첫 번째 율법의 수여자일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위대한 철학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로에게 있어서, 모세는 성서의 저자들 중 가장 권위가 있는 인물이었으며, 그를 통하여 주어진 오경의 권위 역시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필로의 저작물들이 오경에 집중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오경은 당시 유대교 회당의 안식일 예배에서 매번 일정 부분씩 읽혀지고 가르쳐졌다. 그러나 예언서는 그렇지 아니했다. 필로의 오경해석은 설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회당예배에서 사용되기 위하여 쓰여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로의 성서해석이 알렉산드리아 유대 회당에서 발전된 주석전승을 반영한다는 최근 연구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필로가 사용한 성서는 칠십인역 헬라어 성서(LXX)였다. 그는 칠십인역 성서가 히브리어 성서의 정확한 번역이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겼다. 그는 칠십인역을 만든 사람들은 단순한 번역자가 아니라 성서의 저자들처럼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예언자들이라 생각했다(Vita Mos, 2, 7, 37). 그들이 사용한 헬라어 단어들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선택된 것이기 때문에 히브리어 본문의 의미를 정확히 나타낸다고 보았다(Vita Mos, 2, 7, 40). 즉, 칠십인역 성서는 히브리어 성서와 똑같은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로가 사용한 칠십인역 성서가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그가 인용하는 성서본문은 다른 어떤 칠십인역 성서와도 약간씩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필로가 칠십인역 성서를 본문으로 삼은 이유 중의 하나는, 히브리어 성서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으며, 설령 있었다 해도 그의 성서연구를 위해서 활용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쓸모 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 1:2의 히브리어 본문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인데, 칠십인역은 "땅은 볼 수 없었고 무질서했으며(the earth was invisible and unorderly)"이다. 필로는 칠십인역에 근거하여 창조때 첫째날의 땅은 현재의 땅이 아니며,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풀이했다(Op 29). 또한, 성서에 나오는 지역이나 인물의 이름들에 대한 어원론적(etymological) 풀이의 많은 실례들 역시 그가 히브리어를 알았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4. 필로와 알레고리적 성서해석

 

필로에 의하면, 거의 모든 성서본문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Abr. 36, 200). 즉, 문자적 의미와 알레고리적 의미이다. 문자적 의미는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알레고리적 의미는 숨겨져 있는 것으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다. 전자는 본문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후자는 인간의 영적인 생각을 통하여 찾을 수 있는 신비한 것이다. 따라서 후자는 영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육적인 모양이 없는 것도 사유할 수 있는 철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Abr. 29, 147; 41, 236). 즉, 성서의 알레고리적 의미는 지성을 소유한 소수를 위한 것이며, 지성적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이성적 영혼의 소유자들만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Plant. 36).

필로는 성서본문에 담겨져 있는 문자적 의미와 알레고리적 의미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항상은 아니지만, 이 두 가지의 의미가 육체와 영혼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았다(Migr. Abr, 93). 또한, 이 두 의미를 밝히는 성서해석가들은 모두 참된 경건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알레고리적 의미를 더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했고, 영원불변한 진리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비밀을 밝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필로의 이러한 사고는 육체와 영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감각과 이성 등으로 구분하여 후자를 더 가치있게 여기는 플라톤 철학적 이원론을 반영한 것이다(Vita Cont, 78). 필로는 플라톤 철학적 사고에 의존하면서, 현재의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지성의 세계를 완전히 형성한 뒤에 창조되었으며, 후자는 전자를 만들기 위한 모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했다(Op. Mund, 16). 이것은 보이는 육체가 있기 전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 먼저 있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을 나타낸다. 따라서 필로에게 있어서, 문자적 의미는 성서의 육체에 해당되며, 알레고리적 의미는 성서의 영혼에 해당된다(Vita Cont, 78). 그러나 여기에서 필로가 생각하는, 문자적 의미로서의 육체에 대한 개념은 플라톤 철학의 그것보다 더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문자적 의미를 쓸모없거나 거짓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타당성이 있는, 필요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Cof, 190). 문자적 의미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했다는 것이다(Jos, 28).

필로가 알레고리적 해석을 추구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성서의 문자적인 의미에만 국한할 경우 거기에 나타나는 많은 모순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성서는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다"(민 23:19)고 말하면서 왜 신인동형론적(anthropomorphic)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는가? 가인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위대한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한 일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성서의 권위와 아브라함의 위대성의 문제는 어떻게 되며, 성서는 교육과 훈계의 내용으로 적합한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필로는 알레고리적 해석에 의존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헬라철학적 사고를 가진 청중 혹은 독자들에게 성서에 쓰여진 모든 내용은 심오하고 가치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필로는 문자주의자(literalist)는 아니었지만, 성서본문에 대한 근본주의자(textual fundamentalist)였다고 할 수 있다.

알레고리적 해석은 필로가 처음 고안한 것은 아니다. 필로 이전에 헬라문화와 유대전통에서도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먼저, 헬라문화에서 알레고리적 해석은 스토아 철학자들에 의하여 선호되었다. 그들은 호머의 이야기들을 해석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등장인물들의 폭력성이나 성적인 비윤리성 등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교훈을 주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또한, 이름에 대한 어원론적 분석을 통하여 알레고리적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필로와는 달리, 알레고리적 해석을 신의 계시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그들이 해석했던 본문도 영원불변의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지식의 원시적 형태로서 이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철학자들의 지식보다 저등한 것으로 여겼다.

알렉산드리아 유대전승에서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은 칠십인역을 번역할때 이미 사용되었다. 즉, 번역자들은 신인동형론적 표현들을 번역하기 위하여 이를 사용하였다. 또한, 주전 2세기에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와 아리스테아스(Aristeas) 역시 구약의 신인동형론적 표현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경향은 필로 당시 팔레스틴 유대교에도 있었고, 유세푸스와 랍비문학에서도 계속되었다. 이것은 필로 당시 성서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이 그 형태나 정도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유대교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필로는 이를 바탕으로 헬라철학을 도입하여 이 해석방법을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5. 알레고리적 해석과 보편주의

 

필로는 성서, 특히 오경이 이상적인 철학적 자연법을 담고 있으며,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포되었다고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내용이며, 성서의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하여, 성서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철학적, 보편적 불변의 진리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는 성서의 인물들이나 사건들의 역사성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에서는 그러한 역사적 내용들을 역사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적 분석으로 여겼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본 사람을 의미하고, 출애굽은 육체로부터 영혼의 벗어남을 뜻하며, 약속의 땅 가나안은 미덕(virtues)의 영역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또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역사적 인물로서의 의미보다는 진리를 추구하며 산 사람들의 전형적인 세 가지 유형으로 이해했다. 즉, 아브라함은 교육을 통해서, 이삭은 타고난 본성을 통해서 그리고 야곱은 실천을 통해서 미덕에 이른 사람의 상징으로 여겼다(Abr. 52). 오경의 이야기, 즉 창조에서부터 노아, 족장시대, 출애굽, 그리고 율법의 계시까지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영적인 완전함을 위해서 경험할 수 있는 영적인 여행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성서의 하나님은 보다 더 추상적이고 보편주의적으로 이해되어, 존재자요 모든 것의 원인자이며, 전인류의 아버지요 통치자이요 구원자로 여겨졌다(Op. Mund. 72, 78, 169). 오경의 율법은 유대종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에 부응하는 보편적인 법이라 생각했다(Mos. 2.17).

필로의 이러한 성서해석의 경향은 오경의 가르침을 헬라주의적 보편성에 편입시킴으로써, 유대종교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상실하게 할 수 있는 위험성도 있었다. 그러나 필로의 의도는 모세와 플라톤을 동등한 철학적 자료 제공자로 여기거나, 성서의 가르침을 헬라문화에 희석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헬라문화를 유대의 종교와 문화에 종속시키면서, 유대화하려는 시도였다. 선과 미덕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서 안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은 결국 유대민족과 그 유산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주변문화를 정복하려는 것이었다. 성서의 특수성의 관점에서 보편적 철학의 내용을 재정립하고, 유대교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오경의 율법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지켜야 하며, 성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정체성을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모든 이방인들이 결국에는 유대종교로 개종할 것이라고 희망했으며(Mos. 2.44), 현재의 유대교에 대한 이방인들의 배척은 유대교가 최고의 미덕을 요구하기 때문이라 주장했다(Spec. Leg. 4.179-81).

알레고리적인 성서해석을 통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미덕과 경건을 찾으려는 필로의 시도는 결국 유대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으며, 문화적인 면에서 유대인들의 우월성을 나타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유대인들이 드리는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는 모든 민족을 대신하는 것이며(Spec. Leg. 1.97, 168-69, 190; Legatio. 306), 유대나라는 모든 나라의 제사장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았다(Spec. Leg. 2.163). 또한, 유대인들의 신학은 최고의 철학이며, 이것은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서 구현되었다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신의 형상을 만들지 않는 유대종교의 전통은 볼 수 없는 참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을 만드는 이방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우월적인 것이라 믿었다(Decal. 52-80). 한마디로, 필로의 알레고리적 해석은 보편주의를 반영하고 있지만, 유대교의 특수성을 유지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6. 알레고리적 해석과 신인동형론

 

필로는 하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초월자이시고(transcendent), 내재자이시며(immanent), 편재해 계시는 분이시다(omnipresent). 그는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참 존재자이신 하나님을 인간이 완전히 알거나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필로가 묘사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중기 플라톤주의와 신피타고라스학파(Neopythagoreanism)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성서나 랍비 전승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마치 인간처럼 손과 발을 사용하거나 지쳤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한 것처럼 묘사된다. 즉, 성서는 하나님을 신인동형론적 언어로 표현한다. 이러한 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필로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하여 신인동형론적 표현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 4:16의 "가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떠나, 에덴의 반대편 놋 땅에서 살았다"라는 본문을 풀이하면서 필로는 신인동형론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지적한다(Poster. C. 1-12). 하나님은 인간이나 동물처럼 얼굴, 손, 다리, 배 등, 각 기관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고통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가인이 떠난 곳은 어디인가? 가인은 이 우주 밖의 또 다른 어디로 떠났는가? 그는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가? 필로에 의하면 이러한 신인동형론적 표현은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자 뒤에 숨어 있는 깊은 의미, 즉 알레고리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필로는 성서본문에 나타나 있는 문자적 의미와 알레고리적 의미, 둘 다를 받아들였지만, 여기에서는 후자만을 인정한다.

필로에게 있어서 가인은 인간의 영혼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심을 상징한다(Sacr. AC 3). 즉, 창조주를 경외하기 보다는 피조물을 더 좋아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기 보다는 자신에게 돌리려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대표한다(Sacr. AC 72). 또한, 하나님의 얼굴을 벗어났다는 것은 영혼의 눈을 잃어버림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모습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가인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피했는데, 이것은 강압적으로 행한 것보다 더 심각한 죄이며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위법행위라고 풀이한다. 따라서 창세기 4:16절은 하나님을 보기를 원치 않는 죄인의 모습을 묘사하며, 그런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보복과 징벌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신명기 30:20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생명과 번영이 있다고 지적한다.

성서는 왜 신인동형론적 언어를 사용하는가? 필로에 의하면,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을 교훈하기 위함이다. 즉, 신인동형론적으로 생생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 대중들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Deus. 53-55, 63-65).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필로의 반신인동형론적(anti-anthropomorphic) 성서해석은 스토아 학파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불루스를 포함한 알렉산드리아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다. 스토아 학파는 신들에 대한 신인동형론적 묘사를 비판하면서 헬라신화를 재해석했으며, 아리스토불루스도 성서의 신인동형론적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손을 그의 힘으로, 그의 서 계심을 그의 존재와 불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했다(8, 10, 2-15). 같은 맥락에서, 필로 역시 자신의 철학적 사고 때문에 그리고 당시 헬라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하여 반신인동형론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7. 필로의 성서해석의 위치

 

필로의 성서해석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는가?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의 내용은 알렉산드리아 유대교의 주류에 속했는가? 아니면, 소수에게만 호소력이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 필로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유대교의 신앙 그룹들 중 어디에 속했는지를 살펴보자. 보르겐에 의하면, 필로 당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는 적어도 세 그룹으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에 오니아스(Onias)가 세운 성전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 노선을 따르는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마카비 혁명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권이 사독계열에게 반환되지 않고 하스몬가에 의해서 장악되자 예루살렘 성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둘째는 사마리아 사람들이며(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3, 74-79), 셋째는 예루살렘 성전만을 합법적인 예배장소로 인정하는 유대인들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노선을 따르는 유대인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비군사적인 수단으로 싸우려는 그룹과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여 무력혁명을 시도하는 그룹 등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한 필로는 세 번째 그룹의 비군사적인 수단을 선호한 노선에 속해있었다.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는 성서해석의 관점에서도 몇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유대종교에 충실했던 문자주의자들(faithful literalists)과, 오경의 가르침을 비웃는 불신앙적인 문자주의자들(unfaithful literalists), 그리고 문자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는 극단적 알레고리주의자들(extreme allegorists)과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알레고리적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 등인데, 필로는 맨 마지막 그룹에 속한다.

필로는 헬라주의적 유대교의 본산지인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를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헬라주의적 유대교의 전통과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성서해석이 당시 알렉산드리아 유대교 공동체의 전체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서의 알레고리적 의미는 철학적 지성을 가진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찾을 수 있는 진리라는 필로 자신의 견해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서해석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음을 암시한다. 즉, 필로의 사상은 헬라주의적 유대교의 주류를 대표하지 않았다는 샌드멜의 주장처럼, 그의 성서해석 역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에서 소수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고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8. 맺는말

 

필로는 알렉산드리아 유대교 회당에서 활동했던 성서주석가였으며, 헬라철학의 개념들을 도입하여 오경을 해석한, 철학적 성서해석가였다. 그는 알레고리적 성서해석을 통하여 유대교와 헬라주의를 조화시키면서, 헬라철학을 유대교 전승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의 성서해석에 반영된 헬라철학은 중기 플라톤주의, 즉 스토아주의 및 신피타고라스주의와 절충된 플라톤주의 사상이다. 또한,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은 중기 플라톤주의자들의 호머해석과 알렉산드리아 유대교의 성서해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의 성서해석에는 전인류를 포용하고자 하는 보편주의가 있지만, 유대교의 정체성과 특수성이 여전히 강조되어 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헬라주의적 사고는 그로 하여금 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반신인동형론적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그의 성서해석은 철학적 사고를 가진 엘리트 지성인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알렉산드리아 유대교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으며, 팔레스틴 유대교 전승과도 공통점들이 많이 있었다.

필로는 헬라주의적 유대교의 성서해석의 절정을 이루었지만, 16세기 아자리아 데이 롯시(Azariah dei Rossi)가 그의 중요성을 재발견할때까지 유대교에서는 잊혀진 인물이었다. 중세때 그의 작품의 일부가 유대인들에 의해서 아랍어나 시리아어로 번역되기는 했지만, 유대교의 주류는 그를 거의 알지 못했었다. 아마도 기독교회가 그의 저서들을 보존하지 않았었다면, 그의 업적은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기독교회가 필로의 저서들을 보존하게 된 이유는 4세기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때문이다. 유세비우스는 언급하기를, 필로의 저서인, 명상의 생활(De Vita Contemplativa)에 언급된 수도사들이 초기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전승이 전하는 것처럼 필로는 로마를 방문한 베드로를 만났고, 삼위체교리를 가르쳤다고 했다(HE 2.16.2-17.2). 불가타 성서를 번역한 제롬 역시 필로를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명단에 포함시켰다(De viris illustribus). 그러나 필로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주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발전된 전설이며, 아마도 클레멘트에게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필로의 삶은 기독교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성서해석의 관점에서 그의 중요성과 그에 대한 연구과제는 적어도 다음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팔레스틴 유대교와 알렉산드리아 유대교의 비교연구를 위해서이다. 필로의 저서들은 후자의 작품들 중 가장 방대한 것이다. 또한, 최근 학자들의 연구는 이 두 유대교를 예리하게 나누는 것보다 상호 관계성과 공통점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로의 저서들은 신구약 중간시대 유대교의 성서해석사를 재구성하고, 제 2 성전시대 말기의 유대문학이 어떻게 랍비문학으로 발전되었는지를 연구하는데 중요하다.

둘째는, 신약성서와의 관련성이다. 최근 신약학자들은 요한복음서의 로고스 사상이나 히브리서의 플라톤주의적 요소, 바울사상의 철학적 배경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필로의 저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같은 연구는 필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더 진전될 수 있으며, 신약의 저자들이 당시 철학사상을 어떻게 도입하여 성서를 해석했는지를 밝히는데 필요하다.

셋째로, 초대교부들의 사상 및 성서해석과의 관계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암브로스 등이 필로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이 어떻게 기독교 사상의 선구자였던 필로의 알레고리적 성서해석과, 로고스, 지혜, 신앙 개념등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발전시켰는지 그리고 비잔틴과 중세시대에 어떻게 이러한 요소들이 계속되었는지를 고찰하는 것은 기독교 성서해석사 및 사상발전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연구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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