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과 로고스 기독론
(발표: 황동하목사)
Ⅰ. 서 론
저자 요한은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로고스로 지칭하면서, 이 서언을 자기 복음서 첫 머리에 놓았다. 저자는 이것 때문에 한 사색적, 철학적 오역과 같은 두려워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전혀 새로운 무엇을 자신이 선포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이전에 또는 그 당시에 비기독교 저술가들이 로고스에 대해서 가르쳤던 모든 종류의 관념들을 활용할 수가 있었다. 그 이유는 저자가 전달하려는 내용을 분명하게 그의 눈으로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언에 나타나는 성육신과 로고스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또한 그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특별히 우리가 성육신과 로고스의 문제를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요한복음의 종교적 사상적 배경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 연구에 있어서 커다란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은 본 논고에서 다음과 같은 맥락과 순서로 성육신과 로고스의 관계와 의미를 논하고자 한다.
첫째는 당시의 사용되었던 로고스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래서 그 로고스와 요한복음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밝힐 것이다. 두 번째로는 본론으로 들어가서 로고스 기독론에 대한 세례요한의 증거와 로고스 기독론 그리고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인 성육신과 로고스에 대해서 고찰할 것이다. 한편, 이 로고스와 인간 구원과의 관계도 살펴보고자 한다. 끝으로 결론 부분에서는 본 연구에 대한 종합적인 견해를 밝힐 것이며, 더 나아가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성육신과 로고스에 대해서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고찰해 보도록 할 것이다.
Ⅱ. 로고스 개념들의 영향
1. 헬라 세계의 로고스 개념과 영향
철학적 용어인 로고스는 세계 정신이나 우주의 혼과 같이 이해하였다. 로고스는 모든 것과 관계 있는 원리, 즉 우주의 합리적 원리이다. 창조적 에너지이며 생각에 따라서는 모든 존재가 로고스에서 왔다고 해석이 된다.
1) 헤라크리투스(Heraclitus: 535-475 B.C )
헤라크리투스에게서 로고스 개념을 처음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만물유전설(Eternal Fluxion)을 주장하였다. 즉 모든 사물은 어떤 순간에도 영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흐른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로고스는 사람과 세계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과 세계,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이 세계와 천상 세계의 가교(bridge)와 이해의 가능성을 형성하는 연결원리(Connection principle)이며, 개체와 우주와의 통일성의 우주적 법칙(Cosmic Law)이며, 이 로고스가 사람들 안에서 신율(Oracular word)로서 존재하여 서로를 결속시켜 사회를 유지하게 하는 항구적 질서(order)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세계의 탐구는 그들 안에 내재해 있는 로고스를 이해함으로 가능해진다. 종교적 입장에서 볼 때 헤라크리투스의 로고스는 만물에 침투되어 있음으로 범신론적이며, 불과 신을 동일하게 보는 특징이 있다.
2) 플라톤
플라톤은 직접적으로 로고스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은 후기 철학적인 로고스 이론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이데아의 세계는 선이고 물질은 열등하다는 이원론을 발전시켰다.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구조에 의하면 인간의 열등한 육체 안에 갇혀 있는 마음이 신과 합일하려면 사고, 명상 그리고 금욕을 통하여 이데아 세계의 최상층에 있는 최고의 선(The Hightest Good), 목적(The End), 최고의 이데아(The supreme Idea)를 찾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한다. 무지는 죄악이며 구원은 지식을 통해서 얻는다는 이 철학은 후에 필로에게 영향을 주어 선의 하나님과 열등의 물질 창조사이에 로고스라는 중보자를 도입케 하여 그의 로고스론을 발전시켰으며 영지주의에 영향을 끼쳐 지식에 의한 구원과 왜곡된 기독론을 발생시켰을 것이다.
3) 스토아 학파
스토아 학파의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시대로부터 희랍 철학의 특성이었던 이원론에 대한 반론으로 발전되어졌다. 스토아 학파는 마음과 물질을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둘 다 같은 본질과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똑같은 것을 그저 다른 것으론 본 것일 뿐이라고 보았다. 비록 그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약간의 생각을 빌려 왔다 할지라도 그들은 헤라클레토스의 가르침을 형이상학의 기초로 삼았다. 로고스라는 이 단어는 그 시대의 문학으로 다시 돌아왔다. 로고스는 스토아 학파의 하나님이며 물질적인 세계의 사람의 영혼에 거주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 로고스는 내적 합리적 자질을 의미하는 내재적 이성과 내적 이성과 사상을 표현하는 언어(speech, word)인 이중성(duality)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로고스는 세계혼인 신(God)이면서 세계 정신의 표현인 우주이다. 그들의 신관은 범신론(Pantheism)이며 로고스에 다른 신은 없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는 우주안에 있는 모든 합리성의 원리이며 물질속에 스며들어 작용함으로서 세계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역할도 한다. 따라서 이 로고스 개념은 초월성과 내재성의 통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 개념은 그 이전의 경우보다 요한 복음서안의 로고스 개념과 더 밀접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 중심 배경으로 삼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서 안의 로고스는 진정 “자기 땅에” 왔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일관된 주제이다.
4) 필로(Philo, B.C 20 - A.D 54)
요한복음서의 저자와 거의 동시대 헬라주의적 유대주의 종교 철학자 필로는 그의 저서에서 로고스를 1,300회 이상 사용하고 있다. 그는 유대교와 헬라철학을 연결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로고스 배경에는 유대교적 맥락과 헬라주의적인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 그가 전 생애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지냈다는 사실은 그의 저작에서 발견하는 일종의 종교적 고찰이 동시대의 특징적인 모습이었다는 것을 거의 확실히 한다. 그의 전승자들의 저작이 마지막 부분까지 사라졌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성서 속에서 희랍의 전체적인 철학적 교훈, 물리학, 심리학, 윤리학을 찾고자 한 이러한 전승자들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알기 위해서 또한 그의 작품을 철저히 검토해야 한다.
필로의 로고스 개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다.
첫째 로고스의 인격이 모호하다. 그의 창조적 로고스는 창조자가 사용한 창조적 능력으로서의 도구이다. 비록 그가 로고스에게 하나님의 형상, 중보자, 대제사장, 하나님이 장자, 천사장, 두 번째 하나님, 왕 등의 인격적 명칭을 부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분히 구약의 인물들과 알레고리적 동일시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 로고스의 선재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비록 πρεσβυτατος(가장 오래된 최연장자의)라는 형용사를 그것에게 붙인다 해도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선재는 아니다.
셋째 요한복음이 서언은 로고스에서 생명과 빛 사이에 연결의 교리가 있다. 그러나 필로에게서는 구원론이 없기 때문에 그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넷째 필로에게는 성육신의 교리가 없다. 그것에 관한 그의 사고가 희랍적인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무한하고 불변하는 하나님과 물질적인 세계와의 연결을 로고스로 보았다. 이것은 요한의 첫 문제에 대한 필로의 답이었다. 그러나 요한의 해답이 훨씬 더 충분하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필로는 그 자신의 원리에 의해서 그 문제의 그리스도인적인 해답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세 종류의 삶이 있는데 첫째는 πρός θεόν이고, 둘째는 προσ Γεϒεοιν(탄생:birth)이며, 셋째는 첫째와 둘째의 혼합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ζωή πρός θεόν은 우리에게 전승되지도 않았고, 멀리서부터 오지도 않았다. 요한의 이성은 필로의 로고스 개념이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라는 요한의 진술은 필로가 사색을 통해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간격을 성육신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헬라세계의 로고스 개념과 영향을 살펴보았다.
클라인에흐트(H. kleinecht)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요한의 로고스 개념에 헬라적 영향을 반대한다. 첫째 헬라 로고스는 사물 자체의 내적 법칙을 감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계시이며 언제나 사물 자체를 지향하나 요한의 로고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지향하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게 되었다(요1:14 "And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 둘째 헬라 로고스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중보자가 아니다. 셋째 이 로고스의 사역이 역사적으로나 시기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끊임없이 활동하고 창조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결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영원한 과정이다. 넷째 스토아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서 이 로고스는 세계가 되었고 세계이다 라고 설명한다. 한편, 필로와 비교 할 때, 요한의 로고스는 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요1:1), 곧 구약에서 말하는 야웨 하나님(요12:41-42)이며,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인격자(요1:1,2;17:5)이고, 피조된 창조자가 아니라 자존자로서 창조자(요1:1-3;8:58)이다.
2. 유대적 로고스 개념과 영향
요한의 중요한 사상적 배경이 예수시대의 팔레스틴 유대교(Palestinian Judaism)라는 견해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또한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의 발견 이래로 이 견해는 더욱 확고해졌다. 유대교는 단일 체제와 거리가 있고 오히려 그것의 다양함은 요한 사상의 다른 측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요한복음서의 서언에 나타난 로고스의 유대적 배경을 살피기 위해서 구약의 로고스, 랍비문학이 멤라(Memra), 유대의 지혜문학, 쿰란 종파(Qumran Sectarian)들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 요한의 로고스와 구약성서
요한복음서에는 다른 복음서들이 지닌 것보다는 많지 않지만 나름대로의 많은 문제들을 제기한다. 요한이 구약성서를 인용할 경우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증거본문(prooftexts)으로 구약을 사용하는 경우도 비교적 드물다. 요한은 구약성서를 인용할 경우 일정하게 칠십인역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약의 로고스 배경으로서 하나님의 말씀(הוהי רבד)을 들 수 있다. 히브리 언어에 있어서 말은 일, 사건, 행동을 의미한다. 즉 말과 행동이 결코 다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특징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그의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창1:3,6,9; 시33:6-9; 136:5; 사42:5; 45:18).
요한은 서문에서 창세기 1장의 분위기에서 기록을 하고 있지만 구약의 말씀(하나님의 발언)에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다. 요한복음 서언의 로고스 찬양시의 형태는 지혜문학에서 발견되는 지혜찬양시와 유사하다.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도 서로 병행된다. 슈나켄부르그(R. Schnackenburg)는 요한복음 서언의 로고스 찬양시의 주요 내용을 선재, 성육 그리고 거부로 보며, 이것은 지혜문학의 지혜개념과 병행됨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복음 로고스 개념의 진정한 배경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릴 마이어(A. grillmeier)는 구약성서의 지혜와 요한복음서의 로고스가 많은 특징을 공유한다고 보고 이 둘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양자는 태초부터 존재하며(잠언8:22; 집회서24; 요1:1), 하나님과 함께 있을 뿐만 아니라(잠언8:23-25; 집회서24:4; LXX;요1:1) 사람에게로 와서(잠8:31; 집회서24: 7-12; LXX; 요1:14) 그들 중에 거한다는 것이다(집회서42:8; LXX; 요1:14). 그러나 이러한 문학적 의존성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서가 “지혜”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로고스”를 선택한 것은 헬라어와 히브리어(σοφια- המכה)들이 여성형이고 그것은 영지주의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아직 우리는 지혜문학의 지혜와 요한복음서의 로고스와는 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지혜문학의 지혜는 요한의 로고스와는 달리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분명하지 않다. 또한 지혜서의 지혜는 요한복음서처럼 하나님으로 불려지지도 않는다. 여기서 요한의 독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2) 랍비의 유대교((Rabbinic Judaism)
유대교는 구약성서의 토대를 둔 것이지만 이것은 1세기 동안에 여러 모양으로 발전하여, 한편으로는 묵시문학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랍비적인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아마도 묵시문학은 구약성서 중에서 예언자적인 것을 계승했고, 랍비적 사상은 법적인 것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율법과 예언서들을 서로 떼어놓을 수 없듯이 묵시문학과 랍비문학도 분류시킬 수 없을 것이다.
신약성서의 묵시문학은 대개가 미래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예컨대 요한 계시록이 천상의 예배를 생생하게 그대로 묘사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미래적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계시의 베일을 벗겨준다는 점과 예수를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로 표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요한이 유대교 묵시 문학적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는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가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철저하게 수정하면서 받아들였다는 바렛트의 주장도 타당한 것이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랍비들의 사상은 이미 구전의 상태로 존재했었다. 이것은 사회적 규범과 윤리로서, 혹은 종교 의식과 구약 성서의 주석으로 대중들 속에 널리 퍼져 있었던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이 요한복음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율법에도 기록되었으니”(요8:17).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요7:49)라는 표현은 그 당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그리고 피고인이 재판장 앞에 설 때 발언할 권리가 있다는 것과 죄의 성립을 반드시 두 사람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형사법(요8:17)에 관한 사실은 그 당시 유행했던 랍비적 해석 방법이다.
또한 안식일 준수와 할례를 중시하는 규례(요7:22)와 안식일날 자리를 들고 가면 죄가 된다는 사실(요5:10)에 대한 저자의 랍비적 율법 해석 방법이었다. 위의 사실로 볼 때 묵시문학과 랍비 유대교는 요한복음 서언의 배경으로서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간과할 경우 중요한 것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유대교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라는 사실을 우리는 더욱 주목해야 한다.
3) 쿰란 문서(Qumran texts)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들이 발견되기 전까지 팔레스틴에서의 유대교 종파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다. 쿤(K. G. Kuhn)은 “이러한 새로운 본문들 속에서, 우리들은 요한복음의 원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원래의 상황은 영지주의적 구조를 가진 팔레스틴의 유대교의 종파적 경건성이다” 라고 주장한다. 브라운은 이 관계가 보다 자세하게 규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요한복음서와 쿰란 문서는 다같이 이원론의 배경이 있다. 여기서 “이원론이라는 말은 수정된 이원론(modified dualism)이다. 즉 우주는 두 개의 상반된 요소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데 그들은 모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브라운의 이원론에 대한 비교를 통하여 요한의 서언과 쿰란문서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첫째 쿰란 문서는 창조에 관하여 성서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쿰란 문서는 선한 세력을 지배하는 영과 악한 세력을 지배하는 영이 다같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요한복음 서언은 침묵을 지킨다.
둘째 쿰란 문서는 요한복음 서언과 같이 빛과 어두움, 진리와 패역의 대립이 있고 각각 인격을 가진 영도자가 있어 그 양 세력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빛의 세력의 영도자가 그리스도 곧 창조된 일이 없는 “말씀” 자체이시다. 쿰란 문서에 있는 빛의 영도자는 창조된 “빛의 천사”로 나타난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어두움에 대하여 자주 말하며 마귀 혹은 사탄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쿰란 문서는 어두움의 세력의 영도자, 어두움의 세력의 땅, 또는 어두움의 세력의 천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셋째 그 두 세력의 투쟁에 관해서도 양자가 거의 같은 사상을 가지며 결국은 빛이 승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리스도가 빛의 세력의 영도자로서 이미 어두움을 이기시고, 참 빛임을 밝히고 있다. 쿰란 문서에 의하면 승리는 아직 미래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넷째 쿰란문서에 의하면 이 두 세력의 사람들은 각각 어느 편에 속하여 빛의 아들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두움의 아들 노릇을 한다. 이것은 운명이어서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같이 말하고 있으나,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 마음대로 한편을 택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도 역사의 사람들이 빛과 어두움 중의 어느 한편을 자유로 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섯째 쿰란 문서와 요한복음은 거의 같은 모양으로 선한 사람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을 빛의 세력에 들게 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의 견해가 매우 다르다. 즉 쿰란 사회에 있어서는 그 사회가 가르치는 교훈을 받아들이고 복종하는데 있다면, 요한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다고 가르친다.
킴멜(W.G. Kűmmel)은 요한복음과 쿰란문서의 유사성들이 존재하는 것과, 요한복음의 곳곳에서 보이는 표현들이 다른 곳보다 오직 쿰란에서만 발견된다고 하는 것(μαρτυρεἰν τᾐ ἀληθείᾳ 요5:33, “진리에 대한 증거” IQS 8:6)을 지적하며,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쿰란 문서들과 요한 복음 사이의 행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도 발견되며, 특히 묵시 문학에서 발견되었고, 또한 개념적으로 복잡한 이원론은 두 문서들에 있어서 전혀 다르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요한복음의 신비주의적인 기독론과, 그것과 관련된 영지주의화한 이야기들. 즉 “위로부터의 오심”과 “위로부터 탄생하심”에 대한 이야기나, ελω ειμι 진술들은 쿰란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요한복음과 쿰란 공동체가 공통된 배경을 갖고 있지만 쿰란의 사상 세계가 요한의 사상 형태의 원래적인 배경일 수는 없다는 정도로 조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요한의 로고스와의 관계
우리는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의 이해를 위하여 헬라 세계와 유대적 로고스(רבדּ)개념의 영향을 살펴보았다.
로고스의 출처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스콧트는 필로의 영향에 불트만은 영지주의의 구속자 신화에. 구스리는 유대 사상에 요한의 로고스의 출처를 돌린다. 다드는 로고스의 출처를 구약성서의 고유한 유대적 요소를 지적하면서 그 배경을 헬라적 유대교라고 주장한다. 브라운은 서언의 로고스 개념이 어떠한 희랍 사상에서 연유했다고 보기보다는 성서와 유대의 사상적 근원에서 연유했다고 주장한다. 로고스 개념의 기원과 내용에 유사성이 있으나 오히려 성서와 유대적 로고스의 특징이 강함을 볼 수 있다.
요한 당시 로고스란 말은 유대 사회나 희랍 사회에서 서로 유사점과 상이점을 가지고 그들이 철학 내지 종교적 진리를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를 증거하는 하나의 토양으로서 요한이 사용하였다고 보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사상적 영향을 받아 복음화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할 것 같다. 그것은 요한이 자신의 자료활용과 문학적 기법을 통하여 요한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자신의 의도인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헬라 세계와 유대적 배경에서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로고스의 선재와 성육을 선포하여 자신의 의도를 표현했다.
요한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한가지로 예수는 아버지의 최종적인 통역자라고 주장한다. 요한의 마음에는 예수가 하나님이 최종적이고 완전한 계시였다. 우리는 요한이 로고스라고 표현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진정한 주석을 발견할 수 있다. 위의 설명은 요한이 선택한 로고스의 의미가 다음을 설명하는데 매우 적절함을 보여준다.
첫째, 하나님과 자연의 하나됨.
둘째, 천지 창조에 로고스의 참여.
셋째, 계시의 중재자이신 로고스로서의 예수, 하나님과 함께 태초에 있었던 말씀.
그리고 히브리인에게는 창조와 예언자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표현하였고, 헬라인에게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중재를 제공해 주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인 것을 보여 주었고, ὁ λοϒος σὰρζ ἐϒεϒετο를 긍정하는 역사적 예수와 관련을 맺는다(요1:14).
계시자로 온 예수는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생명의 빛으로 왔다(요1:4-5). 그리고 그 빛은 세상에서 계속적으로 비췸으로(요 1:9), 언제나 진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유대 민족은 구약성서 예언자들을 통한 특별한 계시로 “자기의 백성”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그가 친히 가져온 계시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요1:13).” 그래서 요한은 자연, 역사, 양심에 뿌려진 흩어지고 파괴된 어렴풋한 것들이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의 영광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으로 집중되어 초점이 맞는 것처럼 뚜렸해졌음을 서언과 나머지 복음서에서 계속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경험한 예수를 그의 요한복음 서언에서 간결하고 정확하게 소개하며, 내용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다.
Ⅲ. 성육신과 로고스
1. 로고스 기독론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로고스 이해에서 배제 할 수 없는 사실 중 하나가 요한복음의 저자가 왜 세례요한의 존재를 등장시켰으며, 세례 요한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려 했던 저자의 의도와 세례 요한의 증거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세례요한을 빛에 대한 증거자와 빛에 대한 고백자로 등장시킨다. 저자는 6-8절에서 세례요한은 빛에 대한 증거자로, 사실에 대한 전달자로 등장 시킨다.
모리스는 요한복음에는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이가 일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와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성부) 자신의 증거 (5:31, 34, 37; 8:28)
둘째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 (3:11, 32;8, 14, 18, 37)
셋째 성령의 증거 (15:26-27, 16:14)
넷째 구약성서의 증거 (5:39, 40, 46)
다섯째 예수의 사역과 무리들 (5:17, 35; 10:25; 14:11, 15;24; 12:17)
여섯째 세례 요한의 증거 (1:7-8, 15, 32, 34;3; 26; 5:33)
일곱째 제자들의 증거 (15:27; 19:35; 21:24)
모리스는 이들의 증거에는 진리의 실증이 요구된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서를 읽는 중 결코 기피할 수 없는 의식은 저자가 신뢰하고 있는 사실을 집필했다는 진지한 사실이다. 자신이 집필하고 있는 내용은 모두 충분하고도 우수한 증거가 있음을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위치는 예수의 위치와 비교되면서 등장된다. 세례 요한이 보냄을 받은 사람(ἐϒενετο ἀνθρωπος)으로 6절에서 나타난다. ἐϒενετο는 부정과거형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다. 함께 3절에서는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세례 요한이 지음을 받아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1절의 로고스의<ἠν-being>과 대조되어 그리스도의 영원적 존재에 비해 그의 피조적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그의 존재적 위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신적인 근거가 있었다.
저자 요한의 깊은 사려는 세례 요한이 예수께만 해당되는 위치와 동등히 서 있을 수는 없으나, 그러나 요한의 진정한 위대성이 밝히 드러나야 한다고 하는데 있었다. 결국 그의 사명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근원의 것이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역할은 자신을 부정하면서 예수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공관복음이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증명하여 강조하고 있다면, 저자 요한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입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고백하며 예수가 메시야요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역할을 했다. 그것은 당시 세례요한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과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충분히 메시야로 또는 예언자로 간주될 정도로 예수와 비교가 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그래서 모리스는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이목을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세례 요한의 증거 내용은 이미 그의 역할에서 본 것처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빛’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그 ‘빛’은 선재하신 말씀이며 친히 세상에 오신 성육의 말씀이었다. 그 빛이 세상의 죄를 속하실 구세주이심을 고백하였다. 세례 요한의 증거의 목적은 저자가 요한복음의 집필 목적이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요20:31)이라고 고백한 것과 일치한다. 저자 요한은 세례 요한의 증거의 목적이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요1:7)이라고 단언한다.
세례 요한이 예수보다 먼저 난 자이나 나중 된 자로서 사람들의 이목을 예수에게로 이끌기 위하여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였다. 또한 그는 예수가 생명의 빛이라는 내용을 증거하여 사람들로 예수를 믿게 하려는 목적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과 함께 예수의 선구자(as the precursor of jesus)로서 예수가 세례 요한을 만남으로서 그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 할 수 있었던 사실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2. 로고스 기독론
1) 선재하신 로고스
요 1: 1절과 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그가 없 이는 지은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우리는 본문의 표현에서 로고스의 성격과 활동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는 로고스의 선재(pre-existence)임을 주목해야 된다. 요한복음 1:1의 ‘태초에’(ἐν ἀρχᾐ)는 동절의 주동사(finite verb)인 ἠν(있었다)와 1:3의 ἐϒενετο(되어졌다, 만들어졌다)란 동사와 서로 비교 유추해 볼 때 ἐν ἀρχᾐ ἠν (그는 태초에 계셨다)는 창1:1 ἐν ἀρχᾐ ἐποὶησεν(ποιὲω) (그는 태초에.....을 만들었다)가 함축하고 표현하는 시간을 내포함과 동시에 그 이전의 영원 무궁한 무시간적 시간을 표시한다. 그 이유로는 첫째 요1:1의 ἦν은 무시간적(timeless), 계속적(continous)미완료 과거시제이기 때문이다. 바레트는 ἠν이 지속을 나타내는 이 시제는 3절(창조)와 6절(세례 요한의 등장) 그리고 14절(성육)의 어색한 ἐϒενετο (생겨났다, 있었다)와 대조되며, 또한 이것은 ‘태초’(ἀρχη)라는 말이 시간적인 연속선에서 최초의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의 피안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상근 박사는 ἠν을 존재(ἔστιν)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명명하고 “그는 태초에 벌써 계셨고 계속적으로 계셨다........ 아리우스(Arius)의 주장처럼 성자가 존재하지 아니한 때는 없었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시다.” 라고 주석한다. 테니도 요 1:1의 말씀을 로고스의 영원성, 로고스의 인격성, 로고스의 신성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로고스는 시간의 개념으로 시작점이 끊을 수 없으며 시간을 능가하는 무한계성의 영원성을 주장한다.
저자 요한은 로고스의 선재를 표현하기 위해 서언과 그의 복음 전체에서 존재동사(ἔστιν, ἠν)는 로고스인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준 존재동사(ϒινομαι, ἐϒενετο)는 그와 대비되는 존재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또한 세례 요한이 직무상 예수보다 선구자이지만 존재(being)에 있어서는 예수가 자기보다 앞섬(εμπροσθεν μου ϒεϒονεν)을 주장한다. 로고스의 선재는 본질적으로 요한보다 앞섬으로 그의 본질(nature)에 어울리는 본질적 우월성(essential priority)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저자는 예수가 모든 것 보다 선재 했다는 사실, 예수가 어떤 것 보다 우월하며,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그리고 예수가 신적인 계시의 근원으로, 하나님과 동일시 하고 있다. 우리는 저자가 예수의 선재적 우월성과 대조 될 수 있는 대상을 선정하고 있음을 요한복음 전체에서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첫째 모세에 대하여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이다.
모세의 율법은 예수가 가져온 은혜와 진리에 대조된다(1:17). 모세가 광야에서 준 만나는 하늘로부터 온 참된 떡과 비교된다(6:32,49). 모세는 고발자(5:45)와 기록자(5:46)에 불과함을 말하고 있다. 저자 요한은 모세에 대하여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을 선명하게 할 때, 모세와 예수, 율법과 은혜를 대립시키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는 확실히 새로운 모세가 아니고 선재자임을 말한다.
둘째는 야곱에 대한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이다. 즉 야곱이 주는 물은 시간적이지만, 예수가 주는 물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아브라함에 대한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이다. 이것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 비해 훨씬 종교적 의미가 약화되어 있으나, 아브라함의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됨이 더 강조되어 있다.
넷째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다.
다섯째는 모든 것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다. “위로부터 온 자는 만물 위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만물을 다 그 손안에 가지고 있다.”(34-35) 만물을 소유한 자에 반응(obey)하는 자는, 영생을 가진 자(위로부터 난 자)의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요한의 서언에서 그리고 그의 복음서에서 ‘먼저 계신 자’(1:15), ‘위로부터 온 자’(3:31), ‘위로부터 보냄 받은 자’(1:18)등 다양하게 표현된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이 “요한 공동체를 둘러싼 예수의 권위에 대립되는 모든 것들을 상대화시킨다.”는 달(N.A. dahl)의 주장이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저자 요한이 긴 문장의 논쟁을 구성하는 정당한 근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저자의 선명한 의도(요20: 30-31)에 비추어 볼 때 사람들로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하여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로고스의 인격(The person of The Logos)
고대 희랍철학과 종교에서의 로고스는 분명한 인격적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다. 쿨만(O. Cüllmann)은 고대 희랍철학의 로고스의 비존재성, 비인격성에 대하여 “로고스는 고대 희랍 철학자인 헤라클리투스와 스토아 학파에서 나타난다. 여기서는 우주를 다스리고 동시에 인간 지성안에 현재하는 우주적 법칙이다. 그러므로 그 로고스는 추상(abstraction)이지 인격적 실체(ὺπ ὸστατς :actual being)는 아니다. 그러므로 스토아 학파가 로고스에 관해 태초에 있었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요한의 로고스와 전혀 다른 비인격적, 범신론적(pantheistic) 세계정신을 의미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의 서언에서는 로고스의 인격을 볼 수 있다. 로버트슨은 προς의 의미를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로 정의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대격을 가진 προς는 다른 사람과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동등함과 친밀함을 표현한다”고 해석한다. 이것은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영존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선언한 것은 그의 로고스가 성육 이전에 우주의 원리나 하나님의 사상으로서 무인격이었다가 성육이후에 인격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심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3) 창조자로서의 로고스
필로와 영지주의의 로고스 창조는 헬라주의의 이원론(dualism)에 근거한다. 절대선의 하나님께서 절대 열등물질을 창조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헬라주의는 하나님과 물질 세계의 중보적 창조자로서 로고스를 내세운다. 필로의 로고스는 세계를 창조하였지만 사실상 그 로고스 역시 하나님이 피조물이다. 그의 로고스는 계시와 창조의 중보자, 제2의 하나님(second god), 재판장, 피조된 자로서 모든 만물의 창조자, 천사들 중에 장자권을 가진 천사장, 왕, 선생, 그리고 하나님의 작품들 중에서 첫째이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전한 것으로서 세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로와 요한의 로고스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필로의 로고스는 인격자가 아닌 의인화된 하나님의 원리는 영향력에 불과하다.
그러나 요한의 로고스는 참 하나님이며 선재하시고, 독생하신 하나님(요1:18)인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요12:41-42), 창조자이시다(요1:3). 요한의 로고스는 아버지 하나님과 한 실체를 공유하나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그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이며 그 반대로 하나님의 창조는 요한의 로고스의 창조인 것이다. 요한의 분명한 의도는 말씀이 창조자(행위자)로서 모든 존재의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모든 것의 존재가 가능하기 위하여 말씀에 힘입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성육신과 로고스
요 1: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헬라 사상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필로와 영지주의의 로고스는 성육이 불가능하다.
슈낙켄부르그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이 단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을 서언에서의 로고스 성육사건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불트만도 로고스의 성육(1:14)이 요한복음서의 전체 주제라고 하였다. 그리고 불트만은 요한복음 기자가 동방 영지주의 구원신화의 영향을 받아 자기의 로고스에 적용하였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이 말하는 영지주의의 성육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육이 아니고 위장(disguise)이다. 이 위장은 로고스가 구세주로서 스스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낮은 세계로 내려올 때 암흑의 악마적 세력을 속이고 구원해야 할 인간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위장해서 지상에 내려오는 변장인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수육은 위장이 아닌 참된 성육(ἐν σαρχω σις)이다. 요한은 로고스의 수육에 가장 적합한 ἐϒενετο란 단순과거 동사를 사용한다. 이 단순과거 동사는 기동적(ingressive or inceptive)단순 과거로서 선재하신 로고스(ἦν ὁ λὸϒος)가 하나님과 함께 신적 본질을 공유하면서 인간이 되심(Flesh or man, not a man)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저자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육신을 지니고 오셨다는데 대한 고백을 그리스도교 고유의 것을 구별해 주는 결정적인 기준(standard)으로 제시한다. 예수는 자신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했다면 요한은 예수의 성육을 고백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반 그리스도를 가늠하는 경계선이었다.
이제 우리는 성육신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 성육한 로고스와 임마누엘
요 1: 14. "우리 가운데 계시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이스라엘의 성막을 연상케 한다(출40:34-38; 민9:15-23). 이것은 후에 솔로몬의 성전을 포함하여 구약적 임마누엘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장막은 참 장막의 모형과 그림자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임마누엘이 되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이 친히 오셔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처를 삼겠다고 하셨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장막을 쳤다)”는 말은 하나님이 바로 자기의 거처를 우리 가운데 두셨다는 진정한 의미의 임마누엘을 의미한다. 예수는 자신의 몸이 구약의 성막을 대체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성육은 로고스가 한 사람안에 임재 하거나 한 삶을 충만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출생(1:14;19:26;갈4:4)하여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예수 안에 육체로 거하심이다(골2:9) 그러므로 로고스는 참 신(real God)이며 참 인간(real man)으로서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으로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셨다.
모리스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두 가지 요점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로 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고 하는 경이의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실 때에 인간이 그것에 아무런 참여도 할 몫이 없다고 하는 더욱 경이로운 사실이다.
카알 헨리(carl F. H. henry)도 “요한의 증언에서 신약의 여러 로고스들 보다 우월한 근거로 보는 까닭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동일하게 보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이 선재하신 그리스도이며 영원한 로고스의 수육화라고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2) 은혜와 진리의 소유자로서 성육하신 로고스
요 1: 14.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유대 민족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육신의 영광을 보았다. 성육한 로고스의 영광은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나누었던 것이다(요8:54;17:5,24). 그의 영광을 통하여 그가 아버지의 독생자(μονοϒενὴς)임을 지각하는 것이다. 이상근 박사는 그리스도의 중보적 양면성을 주장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동질이시며 동시에 대인 관계에서는 많은 하나님과의 자녀 중 특수한 아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모리스는 요한이 문자 그대로의 나사렛 예수의 살아계신 인격에 함께 한 영광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주석한다. 다시 말하여 그 영광이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가 보내신 독생자인 예수의 신성이다.
이 독생자이신 로고스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다. 예수는 그 자신이 진리(요14:6)며, 세상에 비치는 참 빛(1:9-8;8:12)으로서 그의 성육을 통하여 은혜와 진리를 인간에게 전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요1:12). 그러므로 요한은 17절에서 그의 이름을 로고스에서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로 변경하고 은혜와 진리는 후자를 통해서 왔다고 말한다.
3) 아버지의 계시자로서 성육하신 로고스
요 1: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 셨느니라."
모리스는 이 문절이 그리스도와 아버지와 지극히 친밀함을 강조함으로써, 실상 전 서언의 절정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석한다. 요한의 로고스는 아버지 품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독생하신 하나님은 아버지의 계시와 관련을 갖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는 계시자로 묘사한다(고후 4:4,6). 히브리서 저자는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그 본체의 형상으로서 아버지의 계시자로 이해한다(히1:3). 요한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광채와는 다른 표현인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명칭으로 하나님의 계시자로 설명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독특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는 독생자만이 아버지의 계시자가 돌 수 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7). 아버지에 관한 완전한 지식은 그의 독특한 관계인 아들에 의해서만 전달된다(요17:6,8).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과 영광의 광채요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다(요14:7,9)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으나 하나님(본체)을 본 자가 없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영광의 광채며 독생하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 그 때마다 하나님을 본 자들은 그들이 본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이 본체의 계시를 받았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버지를 나타낼 때 그분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그로 나타내셨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나 하나님의 사자로 파송을 받았으며 요한의 서언에서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과 아들로 파송을 받았다. 성육한 로고스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존재적으로는, 자기를 보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계시(요14:9)했으며, 자기를 아는 자들에게 그 앎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요14:7;8:19)으로 했으며, 사역적으로는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본 것을 말하고(요18:38), 그와 같이 행하며(요5:19),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말씀들은 제자들에게 줌으로(요17:8,14)서 아버지를 계시하였다.
4. 로고스와 구원과의 관계
요 1: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요1:4, 7, 9, 16-17 참고)".
로고스의 선재 및 성육신의 소재가 표현하려는 내용은 이렇다. 즉, 예수의 인격과 십자가 죽음은 세계 내적 역사의 연관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 내적으로는 도저히 연역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몸소(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세상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세계 내적으로는 연역할 수 없는 이 자유는 마침내 숙명적 관계를 깨뜨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에 관한 언명의 의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위’와 우리의 ‘구원’에 그 궁극적 근거를 제공하려는데 있다.
요한의 구원(영생) 사상은 헬라 철학과 히브리 사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빛(요1:4;8:12;8:15), 진리(요1:14,17;14:6), 지식(요1:10;17:3)과의 관계(거부(요1:11)와 영접(요1:12))속에서 표현되는 특징이 있다.
1) 빛과 구원
요 1: 4.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테니는 빛을 사람들의 영적인 각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리스는 빛과 생명의 원천으로 보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 보다 적격이라고 한다. 그리고 서언은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이 주장하고 있는 것 이상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뒤에서는 구원론적인 측면에서 시작될 것이 서언에서는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시작되며, 서언에서 요한의 사상적 배경은 더 넓은 폭을 보여 준다고 한다.
예수는 빛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근원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이다. 생명은 말씀의 본질적인 힘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지식이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으며, 그들에게 참된 지식을 제공해 주었고, 그들 가운데 비침으로서 그들을 심판 받게 하였다.
2) 지식과 구원
요 1: 10.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한이 믿음의 동의어로서 사용한 언어 중에 지식과 관계된 단어는 ϒινωσχω(요1:10,48; 2:24,25 등등). αχοὺω(요1:37,40; 3:8,29,32 등등). θεωρεω(요2:23; 4:19등등)등을 사용한다. 이들 모두가 믿음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표면적인 믿음이나 신뢰성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요한은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라고 한다. 곧 “아는 것”과 “영생”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는 것”이란 개인적 체험과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포함한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은 지적 인식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그런 연합과 교제 관계를 의미한다. 요한이 믿음과 인식 또는 지식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킴멜은 “지식은 믿음의 결과이고, 믿음은 아는 것의 결과라”고 한다. 그는 지식과 믿음의 병행구절(요11:42과 요17:3, 요8:24과 요8:28, 요14:10과 요14:20)을 설명하면서 요한의 복음은 단순히 지식에만 그치지 않고 인내하는 믿음,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지식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요 15:5-7;15:16-17;요일2:6).
3) 영접과 구원
요 1: 12. "그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요한의 역설적인 표현과 요한의 의도(요20:31)에 의하여 영접에 강조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모리스는 12절 주석에서 중요한 낱말 셋을 지적한다. 여기서 모리스는 ἐδωχεν “주셨다”는 이야기의 결말은 거부의 비극이 아니라 영접의 은혜라고 주석한다. “영접” 곧 예수를 믿는 행위가 저자 요한에게는 영생의 열쇠이다(요3:3-29). “영접”이라는 열쇠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된다. 이러한 보편성 때문에 예수의 사역은 보편세계의 것이며, 땅 끝까지의 무한대의 범위로 지평이 열리게 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를 아버지의 사절로 순종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브라운은 로고스의 거부(요1:9-11)와 로고스의 영접(요1:12-13)의 대립의 강도는 단순히 로고스를 거부한 불신앙인과 로고스를 영접한 신앙인의 대조라기 보다는 예수를 거부한 유대교와 예수를 영접한 요한 공동체의 대립으로 볼 때 더욱 잘 설명되어진다 라고 설명한다.
신약성서는 하나님을 모든 사람의 아버지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자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그들을 위해 공급하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바에 대하여 응답할 때만 참다운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자녀’란 믿는 자이다.
4) 그의 이름을 믿는 자와 구원
요 1: 12.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요한은 ‘믿는다’는 말을 사용할 때 98회 모두 동사로만 표현하며 그 표현이 매우 다양하고 그 의미 또한 다양하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모든 계시와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요 17:11 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공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리스는 믿음이 길이라는 것을 중요시하며, 독자들이 그 점을 놓치지 않기를 저자가 원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이 ‘그 이름’을 믿는 자들임을 주목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 이름’은 현대인보다는 고대인들에게 더욱 중요한 뜻을 갖는다. 그들에게 이름은 전 인격을 표시한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믿는 것’은 말씀의 진정한 인격을 신뢰함을 뜻한다. 그 분을 그 분 그대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말씀에 나타내신 대로 믿는 행위이다. 그러한 하나님께 우리의 신뢰를 쏟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인지가 아니라, 그 분을 완전한 인격자로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분을 인격자로 신뢰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분의 소유가 되도록 자신을 내어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요한의 집필동기(요20:31)에서 그리고 요한의 많은 내용을 통하여 요한의 서언과 나머지 복음에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다드는 예수 안에서 아버지를 보는 것과 그의 영광과 진리를 보는 것이 믿음의 한 부분이 아니고 믿음의 그 부분이라고 한다. 클라크는 로고스 교리(logos-doctrine)와 구원의 믿음 교리(doctrine of saving faith)와의 연결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예수가 로고스이고 그는 진리로 가들 채워져 있고, 진리는 예수를 통해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길이고 생명되신 진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Ⅳ. 결 론
우리는 성육신과 로고스를 논하기 위해 지금까지 로고스와 관계된 여러 가지 철학과 신학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고찰해 보았다.
다시한번 정리해 보면 Ⅱ장에서 본인은 로고스의 출처를 살펴보았다. 로고스의 출처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였다. 그콧트는 필로의 영향에, 불트만은 영지주의의 구속자 신화에, 구스리는 유대 사상에 요한의 로고스의 출처를 돌린다. 다드는 로고스의 출처를 구약성서의 고유한 유대적 요소를 지적하면서 그 배경을 헬라적 유대교라 주장한다. 브라운은 서언의 로고스 개념이 어떠한 희랍사상에서 연유한다고 보기보다는 성서와 유대의 사상적 근원에서 연유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유대주의와 헬라주의의 영향이 있었음을 배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요한이 구약성경과 주님의 증거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영향 아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았다는 사실과 요한이 직접 직시한 계시(요1:14, 요일1:1-2)와 부활의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를 로고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요한은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진 로고스의 방을 깨끗이 치워 버리고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예수를 로고스이 방에 가득 채워 사람들에게 소개했던 것이다.
이제 그 로고스의 방의 주인은 헬라적 사상이 아닌 요한 자신의 사상인 것이다. 우리는 로고스의 개념을 위하여 요한의 방에 도착하였다.
그런 후 본인은 Ⅲ장에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서언의 로고스의 내용과 역할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서언과 나머지 복음과의 관계, 그리고 로고스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를 살펴보았다. 또한 각각의 주제(선재, 성육, 영접(구원))들도 살펴보았다. 서언과 나머지 복음과의 관계는 서언의 로고스인 ‘선재’(태초에, 요1:1-2), ‘성육’(육신이 되어, 요1:14), 그리고 ‘영접’(하나님의 자녀, 요1:12-13)이 나머지 복음의 로고스에서도 ‘선재’(하나님과 함께, 요 1:30; 5:18; 10:30; 17:5), 성육(곤하여, 요4:7), 믿는 자(생명, 요3:16; 6:29; 20:31)로 나타낸다. 카힐은 서언의 로고스가 요한복음의 중심이며, 여기로부터 복음서의 모든 의미와 내용이 흘러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서언과 요한복음 나머지 부분에서 기독론의 칭호의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기독론적 구조와 내용, 역할은 일관되어 나타남을 잊어서는 않되겠다.
로고스 기독론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와 세례 요한의 위치가 비교되면서 등장한다. 세례 요한은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를 높이는 증거자(witness)로서 공관복음과 대조되는 특징을 나타낸다. 또한 세례 요한의 증거의 목적과 저자 요한의 집필 목적이 같음을 볼 수 있었다. 모리스의 주장처럼 세례 요한은 저자의 목적에 따라 사람들의 이목을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저자 요한은 눈으로 보았고, 경험한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표현할 때, 예수의 증언, 사도들이 전승, 초대 기독교 문화, 성령의 도움, 세례 요한의 역할을 힘입었다. 로고스의 내용은 선재하신 창조자, 성육하신 계시자(빛, 진리, 은혜)로 이해 할 것을 요구한다. 그 이름을 믿는 자, 그리스도의 인격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권고한다.
결론적으로 성육신은 구원의 전사역과 마찬가지로, 죄로 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쁜 뜻대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은 본질적인 면에서 로고스가 성육신 이전이나 이후에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그가 특수한 성격을 취하셨다는 것은 원래적 본성을 변질시키지 않고 추가적 형식을 획득하셨음을 의미한다. 또한 로고스가 “육”을 취하신 것은 죄의 오염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타락 이래로 연약, 고난, 죽음 아래 매인 인성을 입으신 것은 분명히 비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개혁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성육신과 로고스의 관하여 잘 이해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무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현 시대와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이 일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를 통해서 본인은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고 알게 되었다. 비록 연구하기에는 힘든 작업이었지만 본 연구를 마친 이 시점에서는 굉장히 기쁘다. 아무쪼록 본 기독론을 강의를 통해서 많은 깨달음과 도전을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특별히 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좋은 주제를 주심에 더욱 감사드리며 글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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