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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성화론

은바리라이프 2014. 1. 17. 16:24

개혁주의 성화론


I. 성화란 무엇인가?

1) 정의: 성화(聖化, sanctification)란 우리의 책임있는 참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의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시어 우리가 주님을 즐거워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신 사역이다.(Anthony A. Hoekema).
2) 칭의와 성화: 구원의 두 측면 객관적(칭의) + 주관적(성화)은 불가분의 관계임.
3) 죄책과 오염: 죄는 원죄로 말미암는 죄책(guilt)와 오염(pollution)으로 구성되는데, 칭의(稱義)에 의하여 죄책은 즉각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죄로 말미암은 오염(汚染)은 성화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해결하심.


II. 성화 교리의 중요성

1) 구원은 믿는 순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이후 신자의 소명은 거룩한 생활이다.
2) 성화 없이는 인생의 제일 가는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3) 성화 없이 신자는 행복할 수 없는데, 이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4) 성화의 진보가 없는 삶은 실제적인 무신론의 삶이다.


III. 성화의 핵심인‘거룩'(holiness)

1) 거룩(Holiness)의 성경적인 표현: 구약에서는 '카도쉬', 신약에서는 '하기오스'인데, 하나님과 관련해서 객관적인 의미로는 (1)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초월성, (2) 모든 도덕적 피조물 위에 뛰어난 도덕적 완전성을 의미한다. 
2) 이것이 우리에게 적용된 주관적인 의미로는, (1) 현재의 이 죄된 행위로부터의 구별이며, (2)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성별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거룩’은 죄짓지 않고 사는 도덕적인 생활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영적 성별이며,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바쳐짐이다.(엡5:25-26) 
3) 거룩해지는 길: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통해서 거룩해져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거룩하게 된다.(롬6:4-5). 그리스도와 연합된 가운데 우리의 성화는 진보한다. 이 점은 고린도전서에서도 잘 나타난다.(고전1:30).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화를 가져오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우리의 성화이시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성화되는 과정에 있다. 이처럼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주도적인 사역으로 이루어진다.
4)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 그러나 이 연합은 원리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으나 실제적인 연합은 그 정도가 각각 다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보다 더 완정하고 충분한 연합을 통하여 성화되어 간다’


IV. 성화에 대한 입장

1. 어거스틴(A. Augustine):

1) 교회 역사에 나타난 성화의 교리의 틀을 마련한 교부는 어거스틴이었다. 그의 신학의 화두는 ‘은총'(gratia)이었다. 그는 신자의 즉각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을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라는 주제 아래서 보았다. 성화에 있어서 인간이 성령의 사역에 협력한다는 것은 인정했으나, 그것까지도 전적으로 은총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과격한 견해는 당시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2)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원죄,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인간성의 전적인 부패를 믿었던 그는 그러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은 끊임없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뿐이라고 믿었으며, 성화는 바로 이러한 생명을 주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행위라고 믿었다.

3) 성화에 대한 그의 이러한 견해는 성화를 하늘로부터 오는 신비한 은총의 에너지로 이해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은총의 에너지는 교회의 성례전을 통하여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인간에게 부어지며, 이것을 베풀 권한이 오직 교회에 있다는 교리로 흘러가 버렸다.

4) 어거스틴은 그의 개인적인 경건과 신앙의 체험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이 성결하게 되는 요인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 을 지적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성화의 은총을 형이상학적이고 물리학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신자의 성화를 위하여 (1) 복음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의 위대성과 (2) 성령의 주도적인 성화 사역에 협력하여야 할  인간의 책임이 곧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2. 중세 카톨릭

1) 그 후 어거스틴의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거치면서 더욱 정교하게 발전하였고, 이 발전과정 속에서 성화의 은총적이고 에너지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이것이 교회의 성례전적인 시행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분여 된다는 교리가 확고해졌다.

2) 그들의 교리는 트렌트공의회의 선언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되었는데, 정상적인 인간성을 죄와 불가분의 관계이고, 인간의 공로만을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자를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초자연적인 은총이 필요한데, 이것은 인간이 아미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본성에 선물로서 더해지는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보다 초자연적인 존재로 승화되며 이로써 하나님을 이해하고 교제하며, 그에게서 오는 복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구원의 은총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보았다.

3) 성화 역시 이라한 신학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즉, 죄인을 성화시키는 은총의 에너지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자원으로 삼아서 교회의 분여를 통하여 성례전이라는 수단을 통로로 죄인들에게 주입되는데, 이것을 통해서 신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게 되고 여기서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고 보았다. 이러한 원리를 통해 주어지는 은총적인 에너지의 분여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의하여만 중지되며, 다른 죄들로 말미암는 장애는 성례전과 다른 참회의 제도, 보속 등을 통하여 제거된다고 믿었다.


3. 종교개혁자 

a.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 성화에 관한 이해: 그는 이러한 카톨릭의 견해를 철저히 배격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비인격적이고 천적인 신비한 에너지라는 관념도 거부하고, 이것이 교회에 의하여 전유물처럼 시여된다는 관념도 거절하였다. 어거스틴 신학의 화두가 은총이었다면, 그의 신학의 화두는 신앙이었다. 어거스틴이 은총의 빛 아래서 성화를 이해하였다면, 루터는 신앙의 빛 아래서 성화를 설명하였다.

2) 은총과 성화의 관계: 그는 은총이라는 것이 비인격적인 거룩의 에너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 안에서 죄인들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마음을 열고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즉 인간의 공로에 상관없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총애’라고 보았다. 

3) 인격적인 은총의 매개체로서의 말씀: 루터는 성령 안에서 역사 하는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은총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cum verbo) 나타나며, 부차적으로 성례전을 통하여 주어진다. 죄인은 신앙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게 하고, 성령의 지속적인 역사를 가능하게 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죄의 지배와 영향력아래서 우리를 건져냄으로써 우리를 성화시킨다. 

4) 인간의 행위 없이 단지 신앙에 의하여 거룩해진다고 믿었으나, 이 신앙을 통하여 획득하는 구원과 양심의 평안을 얻는 데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거룩하게 되어가도록 죄와 싸워야 한다고 보았다. 비록 완전한 성화에 도달할 수 없지만 신자는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로서의 의무라고 보았다.

b. 존 칼빈(John Calvin)

1)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별개로 보는 구원관을 거절하고, 이 모든 것은 거듭남과 함께 들어가게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계 속에서 보았다. “그러므로 단지 칭의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화를 위해서도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가 모두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2)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의롭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자발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 능력은 없다. 따라서 칼빈은 성화를 단순한 칭의의 신물이라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 자신의 삶을 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비밀스러운 능력으로 생기를 얻어 그가 우리 안에서 사시고 자라나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이 육신을 소생시키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신다”고 보았다.

3) 칼빈은 구원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은 단지 칭의가 아니라 성화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칭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은 성화를 통하여 실현된다. “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의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을 우리와 화해케 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은 우리를 그의 성령의 참여자가 되게 하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한 삶에 이르도록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4) 따라서 칼빈은 성화를 하나님의 선물(gift)인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된 요구라고 보았다. 따라서 성화에는 그리스도도로 말미암는 모든 능력과 은혜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 뿐 만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기울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봉헌하며,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시켜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일치시키고 세상과 죄악에의 욕구를 포기하는 것을 포함한다.

5) 결국 신자는 성화를 통하여 아무 사심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이것은 그가 자신의 불어로 된 저작 속에서 즐겨 사용한 두 단어에 의하여 잘 표현된다. 순전(rondeur et integrite)이 그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내면의 순전(純全)을 얻는 것을 우리 신앙생활의 첫 번째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로써 삶의 변화를 도모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여야 한다. 

6) 이러한 성화는 필연적으로 자기를 드리는 헌신을 통해서 촉진된다. 그래서 칼빈은 이러한 헌신을 성례전적인 자기 봉헌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봉헌은 우리의 전존재와 전소유를 엄숙하게 전체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외경(畏敬)과 떨림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외경은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외경으로부터 나오는 바 자발적인 두려움(voluntary fear)'인데, 이 외경적 두려움(reverential fear)는 주로 하나님의 긍휼과 부성적 사랑에 의하여 고취되고, 이것이 성화의 동기가 된다. 그리고 감사와 외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게 되는데, 성화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하는 신자의 부지런함으로 성령 안에서 촉진된다. 성화의 열망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능가하면 안 된다.

7) 칼빈은 성화 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말할 때 그는 이중적 죽음(duplex mortification)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는 한 편은 ‘우리 주변에 있는 환경적 요소’들과 관계가 있고, 또 한 편은 내면적인 것으로 ‘육적인 이해력과 의지를 죽이는 것’이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중적 교제와 교통(duplex est societas et communicatio mortis Christi)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 교제의 내면적인 것은 죄 된 육체를 죽이는 것(mortification of sinful flesh)이고 외면적인 것은 삶에 있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8) 칼빈은 인간 안에 있는 정욕(concupiscence)은 단순한 욕정(lust)이나 욕망(desire), 욕구(appetite)가 아니다. 정욕은 그러한 것들을 불러일으키는 보다 근본적인 무엇이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이러한 정욕의 덩어리라고 보았다. 따라서 신자는 이러한 본성적인 것들과 싸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의 참 된 삶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기부인이 필요한데, 이는 본성적인 정욕을 죽이는 것과 ‘육체’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충동과 제안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성화에서 하나님을 닮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을 죽이고 대적하여 싸우며 없이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의 악한 본성을 이처럼 거칠게 다루고 우리의 본성적 경향을 대적하도록 스스로 채찍질함으로써만이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자의 표지인 참된 단순성과 고결함에 이를 수 있다.”



- 지은이: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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