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전쟁개념과 마태복음 10:34-39을 중심으로
1. 서론
21세기에 진입한 세계는 온통 전쟁의 소문으로 가득하다. 21세기의 초두는 희망과 화해의 지구촌이 아니라 힘과 보복의 현장이 되어 얼룩져 가고 있다, 최근에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듯하다. 지난 세기에 일어났던 세계 제1, 2차 대전으로부터 시작된 전 세계적 갈등 양상은 우리 시대에 들어와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전쟁과 갈등을 혐오하고 평화를 부르짖는 사람들 또한 많아지게 되었다. 나아가 많은 기독교 단체들은 반전 평화운동을 전개하며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는 세계를 향해 평화를 외치고 있다.
우리시대의 현실은 비단 전쟁이 아니어도 곳곳에서 무서운 파괴의 조짐들이 보인다. 첨단과학의 발달과 장미빛 문화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가정과 개인이 사정없이 망가져 가고 있다. 과거에 가졌던 가족 및 혈연의 절대적 끈이 더 이상 그 의미를 지속시키지 못할 만큼 되었다는 탄식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 성도들은 평화에 관한 전반적 이해를 어떻게 해야할까?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인간의 경험이나 욕망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그 근본적인 가르침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와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현실을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성경의 교훈 가운데서 그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세속적 평화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 평화의 개념을 혼돈하거나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을 평화의 사도로 묘사한다. 그 말을 어떤 의미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일면 옳을 수도 있지만 일면 틀릴 수도 있다. 이는 성경이 예수님을 평화를 사랑하는 존재로서 뿐 아니라 무서운 심판자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단순히 세상에 평화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라고 스스로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를 믿으면 모든 갈등양상이 사라지고 평안을 얻게 되며, 이 세상에서 큰 복을 받게 된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와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만일 성경의 교훈들 중에 한 쪽 부분만을 강조해 가르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평화’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들과 더불어 그와 반대되는 개념인 전쟁을 중심으로 갈등, 불화 등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 글의 전개는 <평화(peace)의 일반적 개념>, <전쟁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성경에 나타나는 전쟁 이해>에 관해 살펴본 후 <마태복음 10:34-39에서의 교훈>을 통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일반적인 삶에 있어서 평화여부에 대해 정리함으로써 결론적인 언급을 하고자 한다.
<PEACE>라는 영어단어에 해당되는 우리말의 뜻은 전쟁의 반대말이며 동시에 갈등, 불화, 불안 등의 반대말이기도 하다. 구약성경 히브리어에서는 평화라는 뜻으로 ‘샬롬’()이 사용되며 신약성경 헬라어에서는 주로 ‘에이레네’()가 사용되고 있다. 영어에서는 주로 peace로표현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들이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평화, 화평, 평안, 평강 등의 다양한 용어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 언어에서는실질적 의미상 서로 차이나는 개념으로 각 단어들을 구분할 수 있다. 평화는 주로 전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며 화평은 가정이나 이웃과의 관계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된다. 평안이란 말은 개인의 심적 상태를 일컫는 말로 이해할 수 있으며, 평강이라는 단어는 평안과 동의어로서 거의 사어(死語)가 되었다.
이에 대한 의미를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각 단어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평화라는 단어는 전쟁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즉 평화라 하게 되면 전쟁이 없는 상태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평화에 대한 개념은 국가나 사회 조직 등으로 부터 발생하는 폭력적 갈등이나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평화라 하면 전쟁이나 갈등 및 분쟁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일컫게 되는 것이다. 인간역사 가운데는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전쟁에는 일반적으로 정복전쟁, 보복전쟁, 방어전쟁, 정당전쟁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항상 승리자의 입장이나 논리에서 정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전쟁은 대개 소수 지도자들에 의해 결행되었으며, 그 의사에 참여하지 않은 절대다수의 희생이 요구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게 될 뿐 아니라 부모나 남편 등 가족을 잃거나 신체적 상처를 입게 됨으로써 치유될 수 없는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전쟁은 필히 인간의 생명과 신체적 희생, 그리고 기존 시설의 파괴를 담보로 하는 특성을 띠게 되는데, 그런 전쟁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평화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평은 가까운 주변에 갈등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비조직적인 모임에서 유지되는 관계개념이다. 가정의 화평이라든지 친구 및 이웃 사이의 화평 등이 곧 그것이다. 가족이나 친구, 이웃 사이에 불화가 있게 되면 화평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있게 주시해야할 점은 국가나 사회의 평화가 반드시 가정이나 이웃의 화평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울러 국가적, 사회적 평화가 없는 상태에서도 가족과 이웃의 화평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죽음, 심각한 신체적 손상 등이 일반적인 견지에서 치유 불가능한 상처로 이야기 될 수 있다면, 가정이나 이웃 간의 불화에 대해서는 항상 치유를 통한 관계 회복이 가능하다는 특색이 있다. 거기에는 항상 생명을 포함한 물질적 보상에 관한 조건이 없는 용서와 화해의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평안이나 평강 등은 개별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없는 심적인 상태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즉 평안이란 개인이 가지는 마음의 평정을 의미하며 불안감이나 갈등, 걱정, 염려 등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전쟁이나 이웃과의 갈등 등 외부적 불안 요인이나 환경적 불안정의 상태가 인간의 내면적 평안을 앗아가게 된다. 그러나 개인이 소유하는 마음의 평안은 국가적 평화와 무관할 수 있으며 가족이나 이웃의 화평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 국가가 살상을 매개로 한 전쟁 중에도 개별적 심적 평안을 가질 수 있으며, 이웃과 외적인 불화가 존재한다 해도 그것을 무시하고 심적인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평화와 화평의 개념이 어떤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면 평안은 개인의 심리적인 개념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평화나 화평은 외부적 여건에 의해 직접 제공되거나 박탈당하기도 하지만 평안은 외부적 요인과는 무관하게 개인의 삶속에 존재하거나 소멸될 수도 있는 성격을지닌다.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어 ‘샬롬’과 헬라어 ‘에이레네’는 한글성경에서 평화, 화평, 평안, 평강 등으로 특별한 구분없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구약의 ‘샬롬’은 신약의 ‘에이레네’에 예속된 개념으로서 사실상 동일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로 인해서만 얻어질수 있는 ‘평화’인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샬롬과 에이레네를 구분 짓기도 한다. 즉 구약의 샬롬은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한 평화의 개념이라면 신약의 샬롬은 내면적 평안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적 해석은 옳지 않다. 샬롬을 정치적 의미에서 해석을 하고, 에이레네를 단순히 내면적 평안을 말하는 것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구약의 샬롬이 하나님의 은혜로서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평안의 개념이라면 신약의 에이레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서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평안의 개념이다.
예를들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외부적 평화나 화평을 상실했을 때 조차도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샬롬)이 있었던 것이다. 욥이 자녀들과 건강, 재산, 명예, 지위 등 모든 것을 한꺼번에 상실 당하고, 호세아가 견디기 어려운 가정의 불화를 경험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으로 인한 진정한 평안을 누렸다.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등 모든 선지자들이 고난을 겪었지만 그들 역시 외부적 평화나 화평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렸던 것이다. 그 모든 평안은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얻어지는 것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시대의 여러 성도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도 시대의 고난받은 여러 신앙의 선배들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세례요한이 처참한 죽음을 당했고 스테반이 돌에 맞아 사형에 처해졌으며 야고보가 칼로 처형을 당했다. 베드로나 바울, 요한 등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으며 사도시대 교회들이 받은 박해는 엄청났지만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있었던 것이다. 그 평안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진정한 평안이었다.
3. 전쟁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
전쟁이 과연 악이냐,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는 선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는 이미 끊임없는 문제가 되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의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기도 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 자체가 전쟁의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속성을 결정짓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전쟁에 관한 다양한 주장들을 우선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전쟁을 꼭 필요한 것으로 주장하는 전쟁 예찬론자들이 있다. 그들은 전쟁이 인간사회에 전체적 유익을 가져다 준다고 여기며, 필요에 따라서는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국가간 질서유지와 역사에 있어서 발전적 정리를 위해서는 전쟁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참 기독교인들 가운데 전쟁예찬론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적 현실에서는 기독교가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하는 자들 이 많이 있다. 미국의 일부 복음주의 교파들은 최근의 이라크 전쟁이 현대판 십자군 운동이며, 이슬람의 사악한 계획을 파괴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의(大義)와 미국의 대의가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도 약소국을 침범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세운 예들은 얼마든지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특히 기독교 선교제국주의적 사고와 함께 일어난 양상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 전쟁을 통한 엄청난 유익이 있을 것으로 믿었으며 전쟁에서의 승리는 신의 은총이자 선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지난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것으로 비쳐졌을 때, 그들은 즉시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에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즉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므로 이라크 전쟁 역시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전쟁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 전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믿는다면 전쟁 예찬론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유형의 전쟁은 곧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의로운 전쟁(just-war) 혹은 정당전쟁(正堂戰爭)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악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부득불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정당전쟁의 개념은 성경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자들은 정당전쟁을 지지해 왔다.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존 칼빈 등은 모두 정당전쟁을 인정했었다. 그들이 정당전쟁을 인정한 것은 시대적 특수환경으로 말미암은 성경해석의 오류로 인한 것이다.
최근의 이라크 전쟁에서도 미국은 정당전쟁을 천명했었다. 일부 이슬람 세력이 미국에 9.11테러를 감행함으로써 미국과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저히 묵과해서는 안되는 사건이므로 그것을 응징하는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즉 미국과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세력을 응징하는 것은 세계평화를 유지해야할 책임있는 국가로서 마땅히 치루어야 할 정당한 전쟁행위라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전통과 사상에서 그 정당전쟁의 근거를 찾으려 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근거를 구약성경과 역사적 기독교 전통에 두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없이 많은 전쟁을 했으며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 유명한 신학자들과 훌륭한 신앙인들이 정당전쟁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정당전쟁을 지지했던 이들이 특정한 시대에 살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성경의 교훈은 결코 우리 시대에 있어서 정당전쟁을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반전 평화주의(pacifism)적 견해이다. 반전 평화주의자들은 가급적이면 전쟁을 피해야 하며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의로운 전쟁론과 유사한 이론으로서 정당한 명분이 없는 전쟁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방어전쟁은 불가피한 전쟁이므로 인정할 수 있다는 모호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재세례파 교인들, 특히 메노나이트에서는 그런 견해를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 물론 현대 기독교의 일반적 경향은 반전 평화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주로 개인적 인권에 초점을 맞추어 평화를 설명하고 있다. 결국 전쟁은 패권주의에 기인하며 기독교 신앙인들이 가진 구약성경의 여호와 신앙에 대한 왜곡된 신앙적 사고 때문에 전쟁을 지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쟁불가론이 있다. 실제로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필자는 모든 전쟁은 원리적으로 보아 어떤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불가피한 전쟁이 많이 있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착하고 훌륭한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지 않느냐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전쟁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전쟁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인간의 죄로부터 발생하는 악이다. 따라서 인간 역사 가운데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한편 전쟁을 통해 과학의 발달이나 세계의 질서가 잡혀가는 부분들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전쟁의 긍정적인 면이라거나 순기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범죄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사악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살인이나 간음을 일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자들은 살인이나 간음을 행하면서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범죄적 행위를 두고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4. 성경에 나타나는 전쟁에 관한 이해
1) 구약성경과 전쟁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여호와는 과연 전쟁의 하나님이신가? 어떤 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당시 고대 근동의 다른 이방민족이 가졌던 전쟁에 관한 견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고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에 대한 정복전쟁을 한 적이 없다. 정복전쟁으로 비쳐질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던 때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애굽과 바로(Pharaoh)를 심판하신 사실을 두고 성경은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전쟁과 결부시켜 이해할 일은 아니다. 여호수아 이후 사사시대에 있었던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에 대해 성경이 ‘정복’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그 의미상으로 볼 때 사실은 회복전쟁이었다. 다시 말해 그 전쟁은 일반적인 개념에서 말하는 정복전쟁과는 다른 전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가나안 땅을 회복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정복전쟁을 하지 않는다. 나아가 그 전쟁은 단순한 방어전쟁의 성격과도 다르다. 이스라엘의 모든 전쟁은 이른바 ‘순결 보존전쟁’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방민족의 전통이나 습성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순결 보존전쟁이었던 것이다. 오실 메시아를 예비하는 민족으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땅을 순결하게 보존하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전쟁목적이었으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려 하거나 넓힌 적이 없다. 그리고 정복전쟁을 통해 승리한 적이 없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 및 순결 보존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은 승리를 볼수 있을 따름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스라엘의 정복전쟁이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보복전쟁이나 방어적인 전쟁을 도우신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이스라엘이 그런 자세로 전쟁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들이 패배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 가운데서, 항상 강대국들이 버티고 있어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집트,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 앗시리아 제국, 신바빌로니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헬라 제국, 로마제국 등 막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들이 항상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들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고통을 당한 적은 있으나 그들의 영토를 빼앗는다거나 그들의 영역을 침범해 승리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런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바라시며 인도하시는 분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은 주변의 모압이나 암몬, 에돔, 아말렉 등 주변 국가들과의 싸움에서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그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는 승리했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는 패배의 쓴맛을 보았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 있느냐 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메시아 사역을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경륜을 세워 가셨으며 주변의 이방인들과는 차별된 순결한 민족으로 이끌어 가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점은 하나님께서 모든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성경에 나타난 ‘여호와는 전쟁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일반적인 관점이 아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한다.
2) 신약시대와 전쟁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전쟁 자체를 거부한다. 당시에도 전투적 개념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력투쟁을 했던 열성당(zealots)이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조직적 투쟁을 벌였으며 AD70년 예루살렘 함락을 앞둔 60년대 후반에는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의 부대와 격렬한 전쟁을 치루었다. 그들은 AD72년 사해부근의 마사다(Mt. Masada) 전투에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소위 ‘의로운 전쟁’을 치루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조차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멸망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를 위해 아무런 전투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전쟁을 위한 모병이 있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며 자원 입대했을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있는 당시의 교회들은 그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국가의 위기 앞에서 몸을 도사린 겁쟁이들이었던가, 아니면 고통받는 민족을 외면한 배신자들이었던가? 당시에는 이미 일부 사도들이 죽었을 것이지만 아직 일부 사도들은 살아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틴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당시 민족적인 전투에 비협조적이었던 사도들이나 성도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이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세상의 어떠한 전쟁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특히 AD60년대 후반의 팔레스틴에서 있었던 전쟁은 정당전쟁이라 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며 그 전쟁에 참여한다 해서 잘못한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터인데도 교회가 침묵했던 의미를 신중히 되새겨 보아야 하는 것이다.
3) 성경의 인물들은 과연 어떤 ‘평화’를 얻었는가?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컫는 평화나 화평을 누리지 못했다. 구약성경의 많은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고통스런 삶을 살았었다. 그들은 실생활 가운데서 도리어 많은 불화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발생하는 불화는 피할 수 없는 내용이다.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의 현장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곳이 곧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억했어야만 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젖과 꿀은 전쟁이 난무하는 땅으로부터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신령한 젖과 꿀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왕국시대에 이르러서도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등 거의 모든 선지자들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에 함몰된 비참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주어지는 진정한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았다.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심지어는 이방국가에 포로로 잡혀가서 사는 동안에도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평강을 누렸던 것이다. 당시의 많은 거짓 지도자들이 권력과 부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가운데 살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신약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세례요한이나 스데반, 야고보, 베드로, 바울 등 사도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그러했다. 신약성경의 인물 중 다수는 그리스도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이웃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현실적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인내를 통해 얻는 참 평안을 소유하고 있었다. 성경속의 믿음의 선배들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알수 없는 진정한 화평과 평안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땅에 대한 기대와 성취가 아니라 천국의 소망으로 인한 것이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전쟁과 불화, 갈등 속에서도 참된 평안을 누렸다. 그들이 그런 평화를 누렸던 것은 결코 현실적 상황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소망이 없음을 확인하는 가운데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기대하면서 참된 마음속 평안을 누렸던 것이다. 이 평화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평화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신앙적인 삶을 고수하고자 할 때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5. 마태복음 10: 34-39을 통한 교훈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곧 평화를 선포하는 사실과 연결지어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고 선포한 천사들의 노래를 우리가 기억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평화에 대해서 많은 약속을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평화를 언약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되는 평화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해석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 주어지는 천국의 영원한 평화이다.
마태복음 10:34에서 주님께서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단언하신다. 이는 화평을 잔뜩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칼을 던지는 것과 같은 극적인 언어 사용법이다. 여기서 검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혹은 가정적 불안이나 불화를 넘어선 전쟁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이 단순히 이 세상의 평화를 추구하는 자가 아님을 동시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말씀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어진 평화의 말씀과 충돌한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의미상 완전히 조화된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기 위함이라고 선포하신 메시지는, 기독교의 평화가 나약한 감상주의적 화평이 아니라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절대적인 화평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평을 이 세상에 주어지는 종교적, 정치적 덕목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학자들 가운데는 이 본문의 의미를 영적인 의미로 국한시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반적인 불화를 촉발하시지는 않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실제적인 불화가 발생하며 성도들은 그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위해 예수님의 가정에 대한 이해와 교훈은 어떠했던가 하는 점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가정의 행복에 대해 어떻게 교훈하고 계시는가? 많은 사람들은 윤리적 판단에 따라 예수님이 가정의 행복을 제공할 것이라는 일종의 심리적 전제 아래서 답변을 제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에 대해 효성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효의 개념에 머무를 수는 없다. 복음서에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찾아왔을 때 주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형제냐?’ 라고 하시며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신 기록이 나온다(마12:48-50). 주님께서는 가정의 의미를 혈연적 가족에 국한시키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집단적 의미로 확대 해석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0:35-36에서는 예수님으로 인해 가정에 불화가 생길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물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부부의 사랑과 부모에 대한 공경을 기본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십계명에서도 그렇고 바울 서신들 가운데서도 많이 나타난다(엡6:1-4; 딤전5:4,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가족간, 이웃간, 공동체간, 국가간에 불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예고하고 있다. 이는 가정, 이웃, 사회공동체, 국가가 추구하는 지상의 목적이 주님과 그의 제자들이 추구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마6:33)와 관련된 내용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38절에서 제자들에게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요청하신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16:24-25에서도 동일하게 표현되고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생명의 문제이다. 즉 이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바는 고행이나 절제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생명에 관한 문제이다. 자칫 사람들은 이 말씀을 두고 핍박이나 고행, 절제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의미가 곧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를 죽음이 아니라 고행, 혹은 고난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사실과 대비된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말의 의미는 그것이 곧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나’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공급자임을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극도로 고난 받는 삶을 사셨다. 그는 출생시 부터 국가의 공적 단위에 의한 살해의 대상이 되었으며 한 평생 세상으로부터 멸시받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결국 세상은 그를 죽였으며 그는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세상에 내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나를 좇으라’고 분명히 명령하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배척한 세상을 따를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부터 배척 당하신 주님을 따르라는 명령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미가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모범적으로 따라 오라는 의미인가? 그것은 물론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이해 해야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할 자신의 모습을 예시하며 제자들에게 그런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즉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갈2:22). 주님께서 그런 요구를 하시는 것은 단순한 생활 훈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공급을 위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39절에서는 “자기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위하여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심으로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구원을 약속하고 계신다. 이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말씀이, 생명을 박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 생명을 공급하기 위함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주님께 목숨을 바칠 만큼 충성스럽게 살도록 단순한 충성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니다. 즉 이 말씀은 순교를 각오하는 행동적인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성도의 삶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님을 믿는 성도는 이 세상을 포기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1-4에서, 주님을 따르는 그의 자녀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공급받았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주님을 좇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만 약속된 것이 영원한 하늘의 평강이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되풀이되는 전쟁과 불화로 인한 불안한 상황 가운데서도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평안은 결코 세상이 공급할 수 없다. 나아가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소유한 그 평안을 박탈할 수도 없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고 했다. 이 말씀은 특정시대에 국한되어 주어진 교훈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도 결코 이에 대해 예외일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된 진리를 소유한 성도들은 정반대의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는 세상으로 부터 결코 환영받을 수 없다. 도리어 세상으로 부터의 핍박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에 소망이 없음과 천국에만 소망이 있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부활의 생명을 취하셨다면 우리도 동일한 삶의 의미를 누리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얻어지는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평안은 이 세상의 형편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세상에서 전쟁이 없는 평화나 이웃간 화평, 그리고 심리적인 평안으로 인해 참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없는 말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전쟁, 갈등, 불화나 평화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참된 평안을 현실적으로 누리게 됨을 마태복음의 본문이 잘 교훈해 주고 있다.
6. 결론
국가간 전쟁, 이웃간의 불화, 개인의 불안 등은 모두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을 두려움으로 몰아간다. 이러한 개념들은 상호연관되는 개념이며 그 의미상 개별적으로 독립적이지 않다. 이 땅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지 않으며 있을 수도 없다. 이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 지구 도처에는 참혹한 전쟁이 지속될 것이며 그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들이 많이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이러한 전쟁과 갈등의 양상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평화는 성경이 말하는 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평화는 일시적인 경험일 따름이다. 그 평화는 도리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모든 전쟁은 인간의 죄와 욕심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참 기독교는 죄에 뿌리를 두고 있는 모든 전쟁을 합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이 정복전쟁이든 보복전쟁이든 방어전쟁이든 혹은 소위 의로운 전쟁이든 마찬가지이다. 설령 전쟁을 일으키는 어느 국가가 스스로 정당전쟁이라 천명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은 그 전쟁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평화운동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의 노력이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지만 그것은 성경자체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다. 기독교에서는 반전평화운동을 하도록 독려하지 않는다.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은 전쟁을 악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전평화운동을 장려하시지도 않았다. 전쟁이 없는 상태가 곧 성경이 일컫는 진정한 평화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전쟁불가를 교훈 한다고 해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평화 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는 천국시민으로서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고 있다(빌3:20). 천국시민은 이 땅의 상황에 따라 평안을 얻거나 잃지 않는다.
진정한 참 평화는 오로지 하늘에만 있다. 지상의 교회는 하늘의 평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은 소망 가운데 그 평화의 맛을 보고 있다. 성경의 인물들은 결코 일반적인 개념에서 말하는 평화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투쟁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비진리에 대항하는 전투적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국가간의 전쟁을 합법화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 정당전쟁을 표방하든지 보복전쟁을 표방하든지, 아니면 정복전쟁을 표방하든지 성경은 모든 전쟁을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나아가 불가피한 방어전쟁이라 할지라도 성경은 그 전쟁을 적법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정당전쟁 혹은 의로운 전쟁(just-war)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혹 우리가 불가피하게 어떤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할지라도 그것은 그 전쟁이 합법성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에 살며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참여할 따름이다. 우리가 성경적 원리에서 보아 비합법적인 그런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면 인간의 한계를 철저하게 느끼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나라를 더욱 소망하게 될 따름이다.
모든 것이 복잡하고 혼란스런 21세기이다. 극도로 이기적인 상태에 접어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가운데서 소중히 인정되어 오던 가족의 의미조차도 더 이상 중요시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로 변해 가고 있다. 그것이 집단 이기주의화 하게 되면 불화를 가져오게 되며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을 몰고 오게 된다. 불화의 소문과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으며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불안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속수무책인 듯한 이 때 우리 성도들은 세상의 상황과 무관하게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세상이 말하는 peace와 성경이 말하는 peace가 동일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요14:27);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기독칼럼·논문·서적 > 기독논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혁주의 성화론 (0) | 2014.01.17 |
---|---|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예정론 연구)-D. M. 로이드 존스 (0) | 2014.01.06 |
웨슬레 신학의 핵심 조종남(전 서울신대 학장) (0) | 2012.10.30 |
본회퍼와 반유대주의 채수일 (0) | 2012.10.23 |
기독교세계관과 신앙교육 (0) | 2012.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