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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넨베르크 설교집] 믿음의 기쁨

은바리라이프 2015. 10. 27. 12:35

판넨베르크 설교집

믿음의 기쁨

Wolfhart Pannenberg

Freude des Glaubens

Predigten

München: Claudius Vrelag 2001

<차례>

(구약)

아브라함의 믿음(창 15:1-21)····················

불타는 떨기(출 3:1-10)

유일신 신앙(신 6:4-5)··············································

광야를 건너(신 8:10-19)··········································

기도(시 143)··························································

하나님의 승리를 향한 길(사 40:1-5)············

고난 위로 임하는 빛(사 52:7-10)····························

너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사 52:7-10)········

하나님의 부재와 현재(겔 36:22-28)·········

(신약)

회개하라!(마 3:1-11)·····················

여기 계신 하나님의 나라(마 4:12-17)···················

권위의 근원(마 13:10-17)························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기독교인의 십자가(마 16:24,25)······

영원한 생명(마 25:1-13)······························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들(막 3:20-30)··················

자유와 이성(막 5:1-20)······························

빈 무덤(마가복음 16:1-8)·······························

높은 곳에서 오신 귀한 분(눅 2:8-20)·····························

축복선언(눅 6:20-22)·····································

이웃으로부터의 자유(눅 14:25-33)···················

도미누스 플레비트(눅 19:41-44)························

하나님의 미래와 아기 예수의 오심(눅 21:24-33)··

마음을 드높이(눅 22:14-23)·····················

생명의 의미(요 1:1-5, 9-14, 16)················

와서 보시오!(요 1:45-51)··················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19-24)··················

생명의 밥(요 6:48-51)·················

세상의 빛(요 8:12)············································

고난을 향한 예수님의 길(요 12:20-26)··········

이웃 사랑의 근원(요 15:9-14)·····················

성령의 약속(요 15:26, 16:13-15)····················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요 20:11-18)·········

믿음의 의(롬 3:21-28)···············

세례(롬 6:3-8)·····························

죄로부터의 자유(롬 6:3-11)··························

생명의 영(롬 8:1-11)································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롬 11:32-36)······················

삶의 차안과 피안(롬 11:33-36)·················

기독교인다운 삶의 스타일(고전 9:24-27)··············

교회의 토대(고전 10:14-21)································

그리스도의 몸(고전 12:1-18, 27)·····················

사랑의 능력(고전 13:1-10)································

살아계신 주님(고전 15:1-11)·······················

새로운 인간(1)(고전 15:12-22)······················

새로운 인간(2)(고전 15:45-49)······················

하나님의 영광과 계시(고후 3:12-18)·············

자유를 향한 부르심(고후 3:17)················

예수의 죽음과 사죄(고후 5:19-21)············

성령 충만(엡 5:15-20)······················

승천(골 3:1-3)········································

살펴서 붙들라!(살전 5:21)·························

기도에 대하여(딤전 2:1-6)····························

예수의 복종(히 5:7-9)·································

우리의 희망(히 10:22-23)··························

굳게 지키시오!(계 3:1-6)································

아브라함의 믿음

창 15:1-21

오늘 성서 본문의 첫 단락은 믿음에 대한 성서의 여러 언급 중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야훼를 믿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원형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태도와 연관되어 있는 상황은 인간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거나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규정됩니다. 이 문제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거나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제시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안티테제(반명제)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믿음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와 관련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바빌로니아의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는 사실을 믿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믿음은 결코 예수님의 과거 역사일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역사 안에 들어있는 그리스도 사건을 그 내용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 과거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한 전제이지 믿음의 내용 그 자체는 아닙니다. 신학은 물론 믿음의 이 전제를 지향해야만 합니다. 믿음이 이런 전제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그 기초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믿음의 기초가 말하려는 내용들을 단순히 ‘믿음’의 차원으로만 밀어놓음으로써, 또는 믿음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설명함으로써 이러한 노력을 등한히 하면 안 됩니다. 믿음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그것에 포함되어 나타난 미래를 향한 약속의 기초와 부단히 연관됩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이 약속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우리에게 이 약속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역사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가 아니라 부활에 참여한 자로서 새로운 생명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와 거의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역시 아브라함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었던 기초로서의 그 신앙이 전제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이것은 가나안 땅과 후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약속이 그리스도 사건 가운데서 주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은 고대의 희생 표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앞의 내용에 대한 일종의 해설로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와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대답입니다. 이 계약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 믿음은 하나님의 행위에 아무 것도 부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홀로 우리와 자신의 계약을 맺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희생 제물을 받고 그의 꿈속에서 약속의 땅을 지시하려고 오셨을 때 아브라함은 깊은 잠 속에 빠져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희생 제물의 자리는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 희생 제물의 쪼개진 틈 사이에서 하나님은 삼키는 불로 이러 저리 임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믿음의 기초라 할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와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분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일종의 불길처럼 불(不)가시적인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두려움과 암흑’ 가운데서만 지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흡사 아브라함이 느꼈던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두려움과 암흑 가운데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약속을 말입니다.

(1959.6.18, 부퍼탈 신학교, 아침기도회)

불타는 떨기

출 3:1-10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초기 역사에서 발생한 하나님 경험을 서술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신 유대인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우리와 연루하게 된 역사입니다. 이 불타는 떨기의 빛은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시는 통로인데, 이 빛은 우리까지도 비춥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런 시각에서 하나님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사건에서 계시된다는 점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래서 현현절 마지막 주일을 맞아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설교 본문으로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망명자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싸움질을 하다가 사람을 때려죽인 다음, 오늘날 요르단 지역인 아카바 만(灣)의 미디안으로 피신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나 또는 (구약성서의 다른 보도에 따르면) 켄 사람들은 유목민이었습니다. 추측컨대 이들은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편입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도 역시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기 전에 유목민 내지는 반(半)유목민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들에게서 피난처를 찾은 것입니다. 모세가 이들에게 순순히 받아들여진 까닭은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가 자기 딸을 모세에게 주어 결국 그의 장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산(山)에서 (산의 신) 야훼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본문의 뒷부분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모세와 그의 백성들은 희생 제물로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출애굽기 18장에 있습니다. 미디안 지역에 있는 이 하나님의 산은 (호렙산, 또는 시나이산이라고 불리는데) 성지였으며, 이 산에 거주하고 있던 신은 모세와 그의 백성들이 그를 알기 전에 이미 미디안 사람들에게 경배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바로 이 신의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드로가 어떻게 이 신에게 희생제물을 가져올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이 하나님과 그의 활동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장인이며 제사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쳤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그는 원래의 목축지 경계를 넘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하나님의 산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어디를 침범했는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이 산에 살고 있던 신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임재에 늘 휩싸입니다. 비록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이 비가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놀라운 게 아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인식된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제 현실성(Wirklichkeit)에 대한 우리의 세속적 관점은 모세에 비해서 훨씬 메말라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개입되어 있는 이러한 가치 있는 것에 대한 감수성이 별로 예민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보나마나 우리는 불타는 가시나무덤불을 아주 이상한 자연현상 정도로만 간주할 것입니다.

빛 현상이 양치기 모세에게 임했습니다. 방목지에서 자라는 떨기 중의 하나가 흡사 불에 타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에 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현상이 모세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에 그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게 완전히 일반적인 진행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역시 이런 현상을 만나게 되면 호기심을 발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자연 현상은 흔하지 않긴 하지만 유일무이한 것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현상에 대한 보도가 허다합니다. 요즘 우리는 이런 현상을 성(聖) 엘모의 불(St. Elmsfeuer)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뇌우 따위가 있을 때 배의 돛대나, 나무, 또는 말의 귀에 나타나는 빛 현상입니다.

이 신기한 빛 현상은 단지 모세가 여기서 만난 고유한 사건의 동기만 유발시켰을 뿐입니다. 즉 모세가 들어간 산의 하나님은 자신을 그에게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모세는 경악했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 장인으로부터 이 산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것이 바로 지금 그가 멋도 모르고 들어간 바로 그 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어라.

이것은 하나님의 현실성이 우리 인간 경험의 세계에 개입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 묘사된 모세의 이 경험이 우리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들과 다르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최소한 자기 인생에서 한번쯤은, 특히 내면적으로 변화가 심한 사춘기에 한번쯤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춘기 무렵에 고도의 감수성을 갖고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젊은이들은 우리 기성세대들과는 다릅니다. 우리 기성세대는 종종 일상의 삶에 고착되어 있어서 현실성에 무감각하게 살아갑니다. 우리 삶을 감싸고 있는 이런 가치 있는 것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갑자기 우리의 내면세계를 밀고 들어오는 경우에 우리는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어라. 우리에게 진정성이 확보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순수 경험을 우리의 삶에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체 삶을 이런 것으로 가득 채우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모세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이런 일이 발생하게 한 조건들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언급하듯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말씀 안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유일회적인 성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명백해지는 사실은 이 이야기가 왜 수 천년에 걸쳐서 거듭해서 사유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요인은 앞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 문장에서 전례 없는 균일화가 이루어집니다. 미디안의 낯선 하나님인 산신(山神)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과 동일시됩니다. 모세는 이집트에 있을 때 자기 민족들에게서 그 하나님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유목민의 성지에 있는 신은 자기 조상의 하나님과 똑같은 그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곧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뒤이어 그에게 엄청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미디안 사람들의 성지에서 조상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요? 모세는 분명히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심사숙고했을 것입니다. 아마 자기 장인과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자기 민족을 끌고 이집트를 떠나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잘 알지 못하는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모세는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그 땅을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에 서술되어 있듯이 불붙는 떨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모세의 전체 인생을 요약한 것입니다. 모세는 정말 매 순간마다 이 말씀을 그렇게 명백하게 들을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이 말씀들이 모세가 걸어온 인생의 길에서 단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다가온 것일까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결과로서 말입니다. 어쨌든지 모세의 경우에 이런 사건은 그가 전체 삶을 통해서 따라야만 했던 하나님의 명령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유대 민족이 이런 이야기를 모든 세대를 통해서 보증하고 유지시켜왔다는 사실은 그 어떤 증명도 필요 없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우리 기독교인에게 무든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대답 외에는 없습니다. 모세가 가시나무덤불에서 만났던 그 산의 신은 바로 예수가 그의 나라가 오신다고 선포한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예수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시키라고 요청함으로써 이제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열정은 산의 신과 상응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첫 계명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아라. 다른 말로 예수는 신명기에 나오는 이 최고의 계명을 이렇게 피력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29). 예수는 이 첫 계명을 완전히 문자적으로, 극단적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활동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이미 현재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현재는, 즉 가시나무덤불의 빛은 변화 산에 올라갔던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을 모세, 그리고 예언자 엘리아와 밀접하게 연결시켜 인식하도록 했습니다. 엘리아는 이 첫 계명을 수호하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투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실에 대한 명백한 인식도 없이 다른 많은 신들을 섬김으로써 이 세상의 선입견과 우리 자신의 흥밋거리에만 연루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세에게 일어났던 것 같이 가시나무덤불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 변형 사건에 있었던 이 빛은, 그리고 성탄절의 별빛과 부활절 아침의 빛은 시간을 넘어서 우리까지 비춥니다. 우리의 마음만 사로잡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까지 변형시킵니다. 이 변형된 생명은 부활한 예수가 죽음을 극복한 바로 그 생명인데, 하나님의 창조사건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예수가 다시 오실 미래에 우리가 얻을 수 있도록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아멘.

(1993.1.31, 그레펠핑에서)

유일신 신앙

신 6:4,5

우리가 바로 위에서 읽은 본문 말씀은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두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고백처럼 들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입으로 암송하며 죽어갔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살해당할 때,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갈 때 이 말씀을 외웠습니다.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유대인들이 주변의 여러 제국들에 의해서 간단없이 정복당하는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그들을 단단하게 결속시켰습니다. 영토와 국가 체제 없이 살아야만 했던 그런 고단한 세월 속에서도 말입니다. 이 세월 동안 다른 수많은 민족들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유대민족은 살아남았습니다.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민족 전체가 살아남았습니다.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神)증명이 가능한가에 대한 프리드리히 대제의 질문에 대해서 볼테르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유대민족이라는 존엄! 이 민족은 분명히 고난이 연속되는 역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들의 정체성은 날이 갈수록 명확해졌으며, 전체 인류 앞에서 한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증거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한 하나님은 이 민족을 선택해서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유대인이 아닌 우리와 연결시킬 어떤 자격이 있습니까? 그 말씀이 바로 우리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 유대인의 신앙고백은 우리 기독교와 전혀 다른 자리에 있다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신앙과 전혀 다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야만 할까요? 유대인들과 모슬렘교도들은 초기 기독교 이래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의혹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반(半) 다신론주의자들, 또는 전적인 다신론주의자들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모슬렘교도들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신경을 씁니다. 그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한 하나님을 무언가 다르게 ‘설정’했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한 인간인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차원에서 섬기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우리 기독교인의 세례를 한 하나님에 대한 곡해라고 간주하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본문에 담긴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을 왜곡시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어떤 근거에서 우리와 연결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 말씀에 책임을 져야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언급함으로써만 이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인 이 본문을 자신이 전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첫 계명이며 지고의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이웃 사랑을 두 번째의 계명으로 거론하셨는데, 이것은 중요한 랍비들의 가르침에 걸맞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웃 사랑은 첫 계명보다 하위에 속합니다. 이웃 사랑은 첫 계명 다음으로 제시되는 두 번째 계명이기 때문에 결코 첫 계명의 자리에 들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웃 사랑에서 예수님이 정작 말하고자 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방향을 트는 것은, 즉 그 나라의 도래에 마음을 두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첫 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합니다. 이 사실이 망각되는 곳에서는 인간 사이에 결정적인 요소가 훼손됩니다. 마음이 담긴 위로의 말없이, 또는 신앙의 말없이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데 머물러버리면 인간은 영적으로 궁핍해질 뿐입니다. 하나님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을 하나님에게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동료에게 어떻게 나누어줄 수 있겠습니까? 어거스틴의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속 사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간단히 더불어 사는 것으로 해소시켜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신과 그의 태도는 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한 하나님과 도래하는 그의 나라에 집중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의 태도는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에 상응합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고백은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바로 이 한 하나님을 지향해야 하며, 또한 그 분만을 중심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온전한 이성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마음은 사유의 자리였으니까 말입니다. 만약 인식과 학문이 없다면 결국 하나님에게 아첨만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다해서 그 분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열망을 그 분에게 놓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이스라엘에서 ‘영혼’은 무언가를 강렬하게 필요로 하는 생명으로 이해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성은 하나님을 목표로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불안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멀리해야만 할까요? 우리의 영혼이 찾아야 할 첫 번째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차원에서는 일단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둔다면 이 세상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의 미래에 설정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의 백배를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사람은 앞으로 도래할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마 10:30).

이상한 일이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자신의 하나님과 관련을 맺는 일에 아주 열정적인 자세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그의 민족들로부터 상당한 반대와 적대감을 경험하셨습니다.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그 이외의 모든 요청과 규범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한 하나님(der eine Gott)은 모든 참된 율법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한 분 하나님에게 방해거리가 되는 자기 민족의 여러 전통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나라에 집중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곧 불경한 것으로 비쳤습니다. 즉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전권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비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갈등 가운데서 자기 민족에게 버림받은 분으로, 그리고 로마 사람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린 분으로 고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절의 빛에서 한 하나님에게 참된 명예를 바친 유일한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 첫 계명을 요청 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가 우리에게 현재 함께 하십니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에게 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신에서는 바로 그 한 하나님만이 언급될 뿐이지 유대 민족이나 다른 민족의 전통이나 습관이 언급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 민족들에게도 역시 그들의 하나님으로, 즉 참된 한 하나님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는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방식으로만 아버지를 인식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들과 영 안에서만 한 하나님을 갖고 있습니다. 이 영은 아들에게 충만하게 임했으며 우리로 하여금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인식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의 의미입니다. 모든 사물을 넘어서서 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님에게서만 인식합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하나님과 절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아들에게서 모든 인간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참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최초 기독교인의 이런 신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회당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에 그 어떤 적대감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적대감이 역사의 과정 속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의 최근 상황은 무엇보다도 우리 기독교인의 책임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도 바울과 더불어서 기다리는 바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아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유대의 신앙고백이 한 하나님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결정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비교 불가능한 방식으로 실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부르심이 있습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 6:4,5).

우리가 이런 부르심을 들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요구가 아무리 급박하고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이런 한 하나님보다 뒷전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만물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 감사 드려야 할 궁극적인 분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과의 결합은 세상의 모든 허무를 극복하게 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높음이나 깊음도 그렇고, 그 어떤 피조물도, 나아가 죽음도 우리를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첫 번째의 자리에, 지고의 자리에 놓인다면 우리의 삶은 세상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런 변화를 따라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등질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우리가 살아갈 삶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과 더불어서, 그리고 우리의 몸과 더불어서 지나갑니다. 하나님만이 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세상과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고 새롭게 됨으로써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사에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말입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창조자가 자신의 창조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허무 가운데서도,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 삶의 조건과 다른 이와의 관계 가운데서도 단일성을 획득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 평화로부터 오는 생명의 단일성이 자라납니다.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금세기 위대한 사상가였던 프란쯔 로젠쯔바이크(Franz Rosenzweig)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한 하나님을 고백하는 능력에 의해서 모든 곳에서 단일성 모색한다고 말입니다. 유대 민족은 이런 신앙을 통해서 자신들의 단일성만을 확증하는 게 아닙니다. 로젠쯔바이크에 따르면 유대인의 신앙은 이런 민족의 단일성을 뛰어넘어 인류와 세계의 단일성을 현실화하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바로 이런 점에서 화해를 언급해야 합니다. 단일성은 인간 사이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에서 거듭해서 일어나는 틈과 대립을 제거합니다. 하나님의 단일성은 이 세상에서 피안적인 차원에서만 리얼리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에서 아들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화해의 영을 통해서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이 역사는 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워진 인류가 앞으로 나누게 될 친교를 목표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일성과 화해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만물보다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보다 높은 데 계신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1987.11.8,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 예배)

광야를 건너

신 8:10-19

광야는 생명을 위협합니다. 광야는 갈증과 허기로 여행자들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를 거쳐야만 했던 그들의 길에서 철저하게 하나님과 그의 도움만을 의지했습니다. 바위에서 물의 원천을 만드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주시어 양식을 삼게 하신 그 하나님을 말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는 그 광야의 유랑 시절을, 비록 그때가 위기의 시절이었지만, 향수 어린 말로 일컫기를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약혼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시절은 하나님을 향한 모반과 배척의 시절이었으며, 황금 송아지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대로 하여금 결코 안식할 곳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셨습니다. 이 안식할 곳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들의 조상과 맺으셨던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는 약속하신 대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신 대로 이 민족을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신명기 5장에서 설교자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현재의 행복에 머물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잊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광야의 궁핍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 광야에서 구원받은 그 사건을 기억해야만 합니다(신 8:10-19).

우리 인간들은 위기에 처하면 하나님을 찾지만 행복한 시기에는 하나님을 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서 나이가 든 분들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에 교회마다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 민족은, 또는 그들 중에서 살아남은 어떤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서 최악의 재앙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이 재앙은 우리 민족 스스로 잘못해서, 하나님을 기피해서 야기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하나님에게, 그리고 기독교 신앙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다시 비었으며, 더구나 매년마다 그 현상이 훨씬 심각해집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던 위기의 시절은 잊혔습니다. 그리고 지난 십 년 간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대개의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신 8:17).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모든 지상의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가 바로 그런 말씀을 들어야 할 똑같은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행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맘몬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두려운 위협이 즉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고 다른 신들을 따라 가 섬기고 예배한다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다짐해 둔다. 너희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신 8:19). 신명기가 공식적으로 선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말씀은 그대로 적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게 정복당하고 파괴되었습니다. 그 민족의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난 이런 경험, 또는 이와 비슷한 경험 때문에 히브리서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결정적인 안식을 주는 곳이 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고, 또한 하나님이 창조를 끝낸 후에 쉬셨던 것처럼 그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을 구원의 선물로 생각했습니다. 원수 앞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선물 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행복에 겨워 하나님을 늘 망각하고 그의 은총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광야는 연장된다는 뜻입니다. 문화 세계에 있는 풍요로운 삶은 영적인 삶이 위협받는 광야로 변합니다. 거기서 인간의 영혼은 목말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 인간은 허무주의의 광야에, 마음과 이성의 공허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신명기 기자는 하나님과 그의 ‘계명, 법령, 규정’을 잊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인간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 도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윤리에 대한 위임이 주어졌습니다. 이 말은 곧 그것이 결여되는 사태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위임이 오늘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강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허무주의의 광야에는 진리가 없으며, 구속력 있는 가치나 규범도 없습니다. 위인의 용기가 우리를 훨씬 강렬하게 감동시킵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광야 설교자의 용기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광야는 자란다: 광야를 숨기고 있는 자에게 재앙이 내리리라!

오! 위로 오르라, 기품을 가지라!

미덕을 지니라! 유럽인의 기품을!

힘차게 불고, 불어라, 미덕의 풀무여!

오!

다시 한 번 울부짖어라, 도덕적으로 울부짖어라!

도덕적 위인이 광야의 딸들 앞에서 울부짖듯이!

미덕의 포효,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소녀,

모든 유럽인의 열정보다,

모든 유럽인의 갈망보다 더 큰!

바로 거기에 나는 이미 가 있네, 유럽인으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네, 하나님이 도우시기를!

아멘!

광야는 자란다: 광야를 숨기고 있는 자에게 재앙이 내리리라!

도덕주의의 유럽적 기품은 구약성서에 그 근원이 있습니다. 도덕에 대한 위인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허무주의의 광야는 계속해서 자랍니다. 왜냐하면 니체가 말한 대로 인간은 바로 그 광야를 자기 자신 안에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광야에서 죽은 이후로 말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단지 민족을 향해서 도덕을 설교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도덕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 뒤로 수세기 동안, 그리고 최근 2천년 동안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땅을 빼앗겼으니까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설교자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를 기리고 그에게 감사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분명히 계명을 지킨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즉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참된 생명을, 즉 우리의 기쁨이 되는 그런 생명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죽음의 공포라는 광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생각해야하고,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함께 모임으로써, 또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성만찬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재 함께 하십니다.

전체 예배는 하나님을 새롭게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를 새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 읽기, 설교, 찬송, 모든 예전 등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며, 그가 우리에게 행하신 것과 행하실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찬양과 감사로 이끌어 들입니다. 이 찬양과 감사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겠다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만찬을 시작하시면서 유대인들의 습관에 따라서 하나님에게 감사 드렸습니다. 그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통치의 구원이 이미 개시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의 죽음을 마음에 새기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런 마음을 통해서 그의 공동체에 현재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을 우리에게 보증하며, 또한 그의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안식을 우리에게 보증합니다. 우리는 그 안식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합니다. 이제 우리도 창조자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위로부터 안식을 얻습니다. 이전에 활동했다면 이제 그 활동으로부터의 안식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도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활동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를 죄와 죽음의 광야로부터,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의 광야로부터 구원합니다.

매일 찬양과 감사를 드리면서, 동시에 공동의 예배를 드리고, 특별히 성만찬을 거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그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때까지 광야를 여행하기 위해 필요한 노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식 능력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아멘.

(1994.2.13,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 예배)

기도

시 143:1-12

사랑하는 신학생 여러분,

오늘 이 아침 기도회 시간에 우리는 시편 말씀에 나오는 한 기도를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질문하고자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는 기도가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우리 모두가 종종 경험하는 바이지만, 만약 우리가 한 동안 기도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낯설게 되며, 우리의 삶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우리 인생의 위기를 하나님 앞에 늘어놓아야 하며,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 모든 위기에서 우리를 돕는 하나님께 아뢰어야하고, 그를 신뢰해야합니다. 이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는 그 어떤 강제적인 능력이나 자연법칙만이 아니라 예상할 수 없는 사건이, 즉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그런 사건이 항상 거듭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첫째, 우리가 오늘 이 시편 말씀에서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점은 우리가 어떤 토대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 요청은 하나님의 신실성, 즉 그가 이전에 행하신 구원 행위에 대한 신실성을 기억하게 한다는 바로 그 의미입니다. 올바른 기도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잠겨있을 경우에만 드려질 수 있습니다. 이 구원 역사에 잠긴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독립적인 의지를 거두어들일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게 되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요청은 여전히 하나님이 신실하다는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약속을 받습니다. 구하시오. 그러면 받을 것이오. 두드리시오. 그러면 열릴 것이오.

둘째,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오늘 본문에 따르면 시편 기자의 요청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우에서 볼 때 일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대개 하나님의 대답이 있었습니다. 예언자와 제사장들에 의해 형성된, 소위 구원신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대답을 전혀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다르게 대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통해서, 또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그것을 통해서 답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기자가 요청했을 때 기다려야만 했던 대답입니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셋째,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어둡습니다. 대답해 달라는 우리의 요청에 분명한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신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게서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영, 즉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역사에서 하나가 되는,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서 하나가 되는 이 영은 우리의 발걸음을 옳은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축제를 준비하고 있으며, 그 성령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영은 우리를 자신의 길로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1960.5.9, 부퍼탈 신학교, 아침 기도회)

하나님의 승리를 향한 길

사 40:1-5

신구약성서를 총 망라해서 살펴보더라도 오늘 설교의 본문 말씀처럼 역사성이 강하게 내포된 대목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횡단하는 때로부터 시작해서 세례 요한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인도되는 이스라엘의 전체 여정이 제2 이사야가 선포한 오늘의 이 한 말씀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오늘 우리가 함께 축일로 지키고 있는 세례 요한의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2 이사야의 이 말씀이 직접적으로 마태복음(3:3)에서 세례 요한을 지칭하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광야에서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요구가 사해의 광야 공동체를 태동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문은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하나님 통치의 개시를 광야에서 기다리기 위해 앞으로 나설 것을 촉구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역시 광야에 등장했을 때 이 말씀에 의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요한은 오늘의 본문을 쿰란 공동체와는 다르게 이해했다는 말이 됩니다. 말하자면 제2 이사야가 생각했듯이 광야에 하나님의 길을 내야한다는 소리가 외쳐진다고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길을 평탄케 하라고 부르는 분이 광야에 서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구약성서의 헬라어 판에서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과 임박한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를 회개와 세례로서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 광야에 나가서 외치라는 소명을 느꼈던 것입니다.

제2 이사야가 깨달은 이 부르심은 실제로 구약성서로부터 신약성서에 이를 수 있는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 부르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역사의 초기에 당한 위기와 궁핍으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육체와 모든 사람 앞에서 계시되는 시점까지 이를 수 있는 그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런 활 모양의 다리는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재를 감싸 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문화적인 선진 제국의 변방에 놓여있던, 더구나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 머물러 있던 이들의 삶은 분명히 궁핍의 궁핍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준에서 보면 척박했던 팔레스타인 땅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와 궁핍에도 불구하고 이 광야 시대는 하나님과의 첫 일치가 이루어진 시대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별이 빛나는 시기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 광야 시절을 약혼기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은 선진국이 되어야한다는 유혹에 빠져들지 않았고, 오히려 야훼의 도움을 전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궁핍한 시절에 내재할 수 있는 이런 축복에 대해서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그리고 그 직후에 어느 정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정말 살아있다는 것에 관계된 시야가 예민해지는 경험입니다. 전쟁이 막 끝난 1945년은 독일 판 광야시대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광야의 한 복판에서 영적인 각성이 열리는 듯싶었습니다.

광야에서 겪은 생존의 불확실성은 그 때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친교를 나눈 전형적인 시대였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철저하게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만나 사건은 이런 하나님의 도움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광야 한 복판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식은 그들이 매일 배불리 먹는데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삶의 광야가 시작되는 모든 곳마다 하나님의 도움이 이미 자리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오히려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는 굶주림을 면치 못하며, 그곳에서 희생당하기 십상입니다. 기적적인 도움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은 매우 특별합니다.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의 의식 속에서 ‘광야’라는 말은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광야는 자란다: 광야를 숨기고 있는 자에게 재앙이 내리리라!”고 언급함으로써 유명하게 된 이후로 허무주의의 상(像)이 되었습니다. 허무주의의 이러한 정신적인 광야에서부터 어떤 조치 없이 우리가 사뿐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부르시는 분을 따라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를 통과할 수 있도록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한 부르심을, 이것은 곧 오늘 본문의 예언자가 깨달았던 바로 그것인데, 이 부르심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부르심이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길의 방향을 분명하게 잡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광야에서는 일반적으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광야에 뚫린 길의 방향을 지시해주는 이 부르심을 듣게 될 경우에, 그래서 자신을 초월하는 그 독특한 몰아(沒我)적 경험을 하는 경우에 이것은 하나님이 신실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허무주의라는 광야에는 이와 같은 명백한 길의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이 모든 허무주의의 영역에는 방향감각의 상실이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사실 역사상 상당히 많은 이들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게 될 경우에 광야에서 빠져나가야 할 순례자들의 탈출구를 묘연하게 만드는, 그리고 광야에서 배회하다가 파멸하게 만드는 일종의 신기루(Fata morgana)였음이 종종 증명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동구나 서구를 막론하고 이 허무주의의 광야에서 등장한 마술적인 상을 알고 있습니다. 한 개인만이 아니라 전체 민족들이 이러한 신기루를 통해서 파멸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떻게 우리에게 임합니까? 하나님이 소집한 천상회의에서 제2 이사야가 감지한 부르심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부르심이 하늘로부터 감지되고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만이 옳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미 인간에게 경험된 역사는 다시금 새롭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될 수 있습니다. 위에서, 하늘에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부르심으로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전승된 것을 유지해나가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찌꺼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적인 전승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 전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행위는 오늘 우리 시대에 아주 특별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외경상실의 유혹입니다. 흡사 죽어버린 그 무엇인 것처럼 전승된 것들을 계속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나 이 전승된 것은 내일이라도 당장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온 것같이 우리에게 새롭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2 이사야는 광야시대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새롭게 감지했습니다.

이 전승된 것은 완전히 새롭게 위에서 내려온 부르심으로 경험되는데, 이러한 힘은 그것을 담아낸 말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그저 공허하게 드러난 말이 아니라 역사를 형태화한 그 말만이 그런 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소명에 응답함으로써 광야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오직 이런 이유 때문에 광야 시절에 대한 기념과 축제가 유지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광야의 역사는 세기를 거듭해서 소명의 자리였습니다. 항상 거듭해서 새로운 상황 가운데서 새로운 형태를 이루었습니다. 호세아와 예레미야도 이 광야 시절을 배부름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충고의 소재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충고의 능력은 계속적으로 여러 전승 층을 형성했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일어났던 영적 분위기의 상승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가장 궁핍했던 시절에 경험한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기억을 부단히 유지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당시에 우리 삶의 내용으로 다가왔던 것을 신실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이런 자세는 풍요의 시절에도 유효합니다.

제2 이사야는 이것을 다른 상황에서 경험했습니다. 그에게 광야는 유대 백성의 대(大)파국을 통해서 또 다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광야는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들을 고향 땅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분리해버린 상황입니다. 이제 광야에 얽힌 이 고대사는 광야를 가로질러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애를 태우는 이 추방된 사람들에게 또 다시 새로운 부르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땅과 새로운 출발이 약속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광야를 가로질러 왕의 길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개선 행진으로 팔레스타인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바벨론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고향으로의 귀환은 개선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고향 땅을 밟았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와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종살이가 끝나지 않았고, 채무가 면제되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한 위로가 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서 이사야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기를,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기를, 세상 앞에 하나님이 계시되기를 원했습니다.

사해에 모여 있던 경건주의자들과 광야에 나선 세례 요한은 제2 이사야의 이 말씀을 다시금 새롭게 들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외침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로 나갔습니다. 사해의 쿰란 공동체는 율법에 몰두하고, 요한은 하나님의 미래를 선포함으로써 그런 준비를 했습니다.

오직 한 성서 말씀이 한 인간의 모든 삶을 이렇게 철저하게 규정해버리는 일들이 오늘 우리들의 경우에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세례 요한의 삶이 제2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각인되었던 것과 같은 일들이 말입니다. 성서 말씀을 이렇게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따른다는 사실이 아마도 세례 요한 시대에는 그럴 만 했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천부당만부당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세례 요한에게는 제2 이사야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무언가 새로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광야를 가로지르는 관통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다시금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될 수 있을까요?

표면적으로 볼 때 현재 우리는 지난 전쟁 중이나 그 직후 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그런 광야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의 말대로 정신적인 허무주의의 광야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조건이 월등한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이 허무하다는 경험이 우리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실제로 광야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금욕적인 삶을 그대로 모방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가 살았던 방식을 무조건 따라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광야를 가로지르는 길과 그 희망의 길을 건설해야한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2 이사야는 아직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에게 이르러서야 그렇게 이해되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도 역시 이런 부르심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길이 열린다는 하늘의 선포만을 듣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길을 내야한다는 외침을 듣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강력한 명령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조장해 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백성을 위로하는 일, 마지막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 죄책으로부터의 해방, 이런 것들은 우리의 과업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이 승리의 길을 가도록 길을 내는 일은 우리의 과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내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살아가는 바로 그 현장에서 이런 일꾼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대학의 정신적인 삶에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허무주의를 뚫고 나갈 그 길을 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서, 개인적인 삶에서만이 아니라 학문적인 사유와 실천에서 성서의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길을 방해하는 언덕들은 낮아지고 계곡들은 돋우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학문적 영역에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은 현대 정신이 꾸며낸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천착하고 있는 학문 행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과 만나기 위해서 그분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적 유산으로 돌아서는 일은 하나님의 미래로 돌아섬으로써, 그 희망을 붙잡음으로써 바르게 이루어집니다. 이 희망만이 허무주의를 극복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곧 희망의 길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의 앞에 있었던 모든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또한 전체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희망을 향하여 그 길을 예비하는 자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등장도 곤란했을지 모릅니다. 길을 예비하는 자가 없었다면 길 자체인 그분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구약성서가 없었다면 기독교 교회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성서의 역사가 걸어온 길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길을 내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미래도 역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오신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 사실이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그는 세상을 심판할 자가 오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변변치 못한 직업을 가진 목수의 아들이 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유유히 내달려야할 길로서의 역사는 하나님의 길을 건설하는 우리의 생각과는 항상 다르게 흘러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길을 건설하지 않으면 그 역사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써 건설해야할 그 길을 우리가 신뢰함으로써 그 길 자체인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건설해야할 그 길은 이미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옳은 길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해주기 위해서 오늘도 자신의 몸과 피를 통해서 우리와 연합하려고 합니다. 이 길은 자신의 삶을 순교로 끝낸 세례 요한에게서 볼 수 있듯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이 길의 목표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의 영광인데, 이 영광은 곧 우리와 온 인류의 미래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됨으로써 우리는 우리 삶의 무상성(無常性)이라는 광야에 가로질러 있는 우리의 길을 왕의 길로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의 생명을 일으키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이 왕의 길을 유유히 개선행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온 백성에게 위로가 임하고, 종살이가 끝나고, 면책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1962년 성 요한 축일, 마인쯔 대학교회)

고난 위로 임하는 빛

사 52:7-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뻐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순절의 한 복판에서 이 말씀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이 걸어간 고난의 길을 기억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기뻐하라는 요청은 별로 적절한 말씀이 아닌 게 아닐까요? 오늘의 이 말씀은 이사야 66장에서 일종의 후렴으로 불린 찬송처럼 들립니다. “예루살렘아,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아, 기뻐 뛰어라.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통곡하던 자들아, 이제 예루살렘과 함에 기뻐하고 기뻐하여라.”(사 66:10).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이번 주일은 교회력으로 “래타레”(기뻐하라)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기뻐하라는 이 요청은 예수님이 걸어간 고난의 길을 간과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예수님의 길을 비추고 있는 비상한 빛을 보아야합니다. 이 빛의 원천인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의 어둠으로 인도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인간적인 대(大)파국에서 겪은 절망의 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계시와 그의 통치가 개시되는 길입니다. 그것은 어둠의 길을 밝힌다는 구약의 약속이 허락해주는 빛입니다. 이 빛에서만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그의 승리로, 그의 계시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구약성서의 말씀이, 즉 이사야가 포로기에 선포한 큰 구원의 예언이 오늘의 설교와 사색의 출발점입니다. 이 말씀의 빛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길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걸어간 고난의 길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구원의 길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 충분하게 고민해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사실 구원과는 정반대입니다. 구원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난 게 아니라는 전제에서만 예수님의 길은 구원의 길로서 타당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구원이며, 그것이 곧 그리스도가 신뢰한 새로운 현실성입니다. 바로 이 하나의 사실에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에게 현실성이 되어버린 새로운 생명에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죽음의 극복입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만 그 이외의 모든 기독교적 사실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이 걸어간 고난의 길은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집니다. 바로 이 부활절로부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길을 구약성서의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이러한 성취는 예언자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릅니다. 제2 이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스라엘의 국가적 해방으로 생각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유대 지도자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킨 페르시아 왕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국을 건설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예언한 구원은 몇 세기가 지나서 이루어졌는데, 국가의 해방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2 이사야는 이 사실을 예감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구원을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로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부활은 제2이사야 다음에 등장하는 묵시문학자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역시 이 구원의 길을 고난의 길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제2 이사야는 유대백성이 걸어야할 고난의 길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 예언자는 어두운, 불길한, 유한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포는 분명히 성취되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세계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순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의 부활로 인해서 어느 정도로 신적(神的)인 의미를 부여받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난과 죽음에서 예수님의 길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임한 고난과 죽음이 곧 생명에 이르는 길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고난과 죽음으로 인해서 더 이상 구원으로부터 나뉘어져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삶은 분명히 고난이나 죽음과 상관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 모두의 형편은 대체로 좋습니다. 우리 각각의 사람들은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국 우리 모두는 좌절하고 죽게 될 것입니다. 기술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이 자기의 희망대로 되어가려니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물의 과거를 한 번만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인생의 모든 위대함과 아름다움이란 게 겨우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도 트라클 같은 시인은 오늘 우리에게 놓여있는 완벽한 삶에서 이미 죽음의 향기를 맡곤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임하는 고난과 죽음을 돌파하고 새로운 생명에 이르는 길이 제시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절망적일 것입니다. 이 길은 곧 예수님의 길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뚫고 새로운, 그리고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생명으로 돌입해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부활절에 그에게 현실성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죽음이 더 이상 최후의 선언이 되지 못합니다. 죽어야만 한다는 우리의 운명이 가능한 최대한도로 확실하게 예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에서 그와 연합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에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현재 그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연결될 수는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부활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세례 받을 때 물 속에 잠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성만찬을 통해서도 일어납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며, 또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의 피와 연합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결합됨으로써 이제 그의 새로운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을 희망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맞아야할 파멸과 죽음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맛보는 거대함과 아름다움도 역시 덧없다는 이유 때문에 공허하거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 모든 것은 새로운 빛과 새로운 타당성을 갖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걸어간 고난의 길은 우리가 걸어야할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해주는 이 생명은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모든 인간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왕권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한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늘 구원을 동경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구원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은 하나님이 왕 노릇 하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오직 그곳에서만 참된 평화가, 혼란스럽지 않은 평화와 참된 쉼이 보장됩니다.

예수님과 연합되어 이루어진 이 구원은 하나님의 왕권과 분리되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모든 사신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완전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일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사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품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도 역시 오늘날과 진배없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린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감각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내심은 너무나 쉽게 고갈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손에 잡힐 수 있는 삶의 현실들을 선택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가 함께 읽은 설교 본문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시하는 파수꾼이 필요합니다. 이런 파수꾼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미래를 기억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오늘도 역시 모든 기독교 예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미 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멀리 떨어진 바벨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심부름꾼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급히 길을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성의 망루에 서있던 파수꾼은 왕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서 서둘러 달려오는 심부름꾼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발생한 하나님의 통치와 그가 가시적으로 우리에게 오실 그때와의 중간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예언자는 하나님이 일으킬 구원 사건들의 선취를 기대합니다. 아직은 페르시아 제국이 건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선 예수님의 길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사신에도 역시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함으로써 스스로 그 일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이런 일 때문에 그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왕 같은 통치의 일들을 확증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왕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통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신약성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 권세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즐거운 사신을 급히 알려야할 우리 심부름꾼은 서둘러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심부름꾼들은 하나님의 승리를 알리고, 또한 승리자의 비밀스러운 지하운동을 전 세계로 확장시켜야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 일에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지하운동은 그의 십자가로부터 세상으로 돌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 세계의 제국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역시 그의 통치가 완전히 드러나기를 기다립니다. 지하운동으로서 말입니다. 이미 교회가 감당하고 있는 바로 그 지하운동으로서 말입니다. 이미 오늘날 많은 파수꾼들이 이 지하운동에 참가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파수꾼들은 우리의 세속적 활동의 한 중심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기억하게 하는 이들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 미래를 줄기차게 견지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를 선포함으로써 그의 신탁은 절정에 달합니다.

야훼께서 만국 앞에서

그 무서운 팔을 걷어붙이시니,

세상 구석구석이

우리 하느님의 승리를 보리라. (사 52:10).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신성이 온 세상의 만민들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 즉 그의 계시에 관한 언급입니다. 이 계시는 틀림없이 예언자가 앞서 언급한 그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과 생각을 사건의 진행을 통해서 증명한다는 전체 구약성서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왕이라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구원을 온 세상의 만민 앞에서 권위적으로 계시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이 사실에서 성취됩니다. 이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전대미문의 신뢰가 발생합니다. 모든 이들이 각각 그 계시를 보아야하고, 또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열리고, 또한 시작된 하나님의 왕권과 그 구원에 대해서 실제로 이런 확실성을 갖고 선포합니까? 우리는 이런 인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건 아닙니까? 우리는 부활절 사건의 진리를 신뢰해야합니다. 그래야만 기독교 신앙은 세상과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으며, 또한 부활의 기쁨이 우리의 가슴을 충만히 채우게 될 것입니다.

(1961.3.12, 부퍼탈 엘버펠트, 콜크 교회)

너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사 52:7-10

매년 마다 강림절은 우리를 찾아옵니다. 강림절은 바로 교회력이 시작하는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상품을 사고파는 소란스러움 가운데서도 우리 인간의 마음에 있는 이런 기다림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은 도대체 무엇을 준비하는 걸까요? 성탄절 기간에 경험할 수 있는 축제의 기분을 준비합니까? 아니면 의미심장한 고요입니까? 말구유 안의 아기 모습을 본 감동인가요? 아니면 성탄노래의 은혜로운 울림이 그것인가요? 이 모든 것들은 강림절의 특수한 기다림으로 공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보다 훨씬 숭고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림절(Advent)이라는 단어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즉 아드벤트는 오심(Ankunft)입니다. 대강절의 기다림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세상에 오시는 것을 준비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매년 구유의 아기를 기리며 성탄절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세상과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오심과 그의 통치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베들레헴의 아기를 통해서 은폐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탄생의 주변 상황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 세상과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빛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이런 사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세계,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통치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 통치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王)적 통치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 곧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 사신의 중심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강림절은 베들레헴 아기의 출생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성인으로 성장하신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 사신과도 관계되어 있습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의 복음을 요약했습니다(막 1:15). 에방겔리온이라는 단어는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적 통치는 하나님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어둠과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통치하기 위해서 오실 때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강림절은 회심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서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 6:33).

하나님의 통치가 개시되었다는, 그리고 하나님의 강림하신다는 이런 구원의 복음을 예수님이 단순히 고안해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복음을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사 52:7-10)에서 발견했습니다.

반가와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외치며

“너희 하나님께서 왕권을 잡으셨다”고

시온을 향해 이르는구나.

들어라, 저 소리, 보초의 외치는 소리.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야훼와 눈이 마주쳐

모두 함께 환성을 올리는구나.

예루살렘의 무너진 집터들아,

기쁜 소리로 함께 외쳐라.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도로 찾으신다.

야훼께서 만국 앞에서

그 무서운 팔을 걷어붙이시니,

세상 구석구석이

우리 하느님의 승리를 보리라.

기원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에 활동했던 제2 이사야의 말씀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그는 지금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달려온 사자(使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사자는 바벨론 제국이 무너졌다는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달려왔습니다. 제국 바벨론은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초토화시켰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들의 친척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라는 세계 제국의 함락은 세계사적 전환인데, 이사야에 의하면 이 사건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페르시아의 왕 키로스(Kyros)가 바벨론을 정복할 것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국을 세우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페르시아 왕을 선택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언자는 바벨론에서 달려오는 기쁜 소식을 갖고 달려오는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은 페르시아 키로스가 왕이 되었다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고 달려오는 사자의 발걸음이 억압받다가 이제 자유를 되찾게 될 백성들에게 얼마나 사랑스러웠을는지 우리는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예언자의 기대는 제2 이사야가 희망했던 것처럼 완전하게 성취되지는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왕 키로스는 그의 제국을 유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통치는 다른 제국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새로운 억압이 발생함으로써 자유를 향한 열망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미래를 열렬하게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개시를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전하는 복음 사신을 새롭게 전합니다. 기쁨의 사신, 즉 복음을 전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이르렀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통치가 이미 개시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것에 관심을 기울여야합니다. 하나님만을, 하나님의 미래만을 철저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는 인간의 구원입니다. 제2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도 이것이 바로 핵심 사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왕권을 알린다는 것은 기쁨의 소식, 즉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 하나님의 왕권의 개시는 제2 이사야의 경우와 달리 더 이상 세계사적 변혁과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에서 일어납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왕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에게는, 즉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문제를 그 왕권 밑에 굴복시키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現在) 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서 완전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함께 하십니다. 이런 일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은폐의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예수님의 복음 사신의 활동으로서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그의 왕권의 도래를 다시 믿기만 한다면 우리의 마음에서 그 통치는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들은, 즉 소유욕과 시기심, 사랑 없이 일어나는 성욕중심의 삶, 무한정의 방종을 자유와 혼동하는 일 등등, 이 모든 것들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의 삶에서 궤멸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눅 11:20).

우리의 마음에 신앙을 불러일으키시는 예수님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왕권이 현존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해석하고 있는 복음서의 내용입니다. 이 복음서의 말씀은 대강절 첫 주일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바로 종려주일에 해당된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주제는 대강절, 즉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일종의 상징 행위였습니다. 예언자 스가랴가 하나님의 왕권의 도래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한 상징이었습니다. “보아라, 네 임금이 폭력 없이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 9:9). 하나님은 익명으로(inkognito) 통치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준마를 타고 오시는 게 아니라 나귀를 타고 조용하게, 그리고 폭력 없이 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 사신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유한 활동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이러한 자신의 복음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폭력 없이 오신다고 말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하나님의 왕권이 예수님의 인격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즉 그가 사람들의 마음에 새긴 신앙을 통해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왕권이 이미 현재 합니다. 이 하나님의 왕권은 은폐의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이 은폐성은 곧 예수님이 한 마리의 암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의 익명성, 또는 베들레헴 구유의 빈궁 속에 있는 익명성과 같으면, 또는 믿는 마음의 고독에 있는 익명성과 같습니다.

강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이 준비는 단지 성탄절에 먹을 빵을 굽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왕권의 개시를 위해서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마음 속 깊이 준비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다림은, 매년 반복된 것처럼 단지 구유의 아기만을 준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생명이 단지 세계에 빛을 비추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왕권의 미래가 이미 열렸기 때문입니다.

(1998년 강림절 첫째 주일, 뮌헨, 마태우스 교회)

하나님의 부재와 현재

겔 36:22-28

오순절은 하나님이 여기 계심으로써 일어난 기적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자비와 평화의 하나님이 시기와 전쟁, 자기 열망과 고독, 알 수 없는 고통으로 험하게 일그러지고 찢겨진 이 세상에 현재 함께 하시는 게 틀림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비록 이 세상이 험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이 첫 오순절을 경험한 이후로 계속해서 오순절을 맞을 때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축하합니다. 예수님은 승천 이후로 그의 공동체 앞에서 사라졌고, 그의 재림에 대한 희망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상태지만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 우리에게 현재 하십니다. 인간이 자신들끼리 갈라놓은 울타리를 극복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현재는 드러납니다. 오순절의 역사는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인류 사이에서 서로간의 이해를 곤란하게 만드는 언어장벽을 극복함으로써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일단 완전히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역이 가능한 한 우리 모두는 여러 종류의 말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사실상 우리가 상호간에 얼마나 자주 부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각자가 하고 싶은 말을 스쳐지나가듯이 내뱉어버리고 맙니다. 이런 모든 울타리는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는 곳에서 극복됩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사소한 개인적인 관심거리를 초월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하나님의 현재라는 이 기적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실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초대 교회가 성령이라고 일컬었던 현실성에 대해서, 또한 그 안에서 교회가 하나님을 인식한 그 현실성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정말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하나님의 현실성과는 전혀 다른 경험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경험에서 형성되는 분위기는 모든 측면에서,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로부터 우리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소리를 울려댑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호소를 듣기는 합니다만, 이 소리는 하나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당당한 소리에, 그 승리에 찬 큰 소리에 압도당합니다. 정말 하나님은 죽었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부재중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일상적인 생각이나 판단에서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진행됩니다.

여러모로 차이가 있긴 해도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바벨론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상황이 요즘의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침묵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형편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도시와 성전을 유대인의 원수들에게 맡겨버렸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무능한 분으로 증명된 게 아닐까요? 아주 무기력한 자로, 그래서 결국은 현실적이지 못한 자로 증명된 게 아닐까요?

무력한 겉모습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그 명예를 잃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겔서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이 명예를 잃은 것일까요? 고대 세계에서는 신의 능력과 권능에 대한 기준이 그 신을 신봉하는 자들을 어떻게 지켜주는가에 따라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왕조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파손 당하는데도 그들을 단 한 번도 옳게 지켜준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야훼는 당연히 바벨론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인간의 삶과 운명을 주관하는 분으로 믿지 않는 오늘의 이 시대에도 역시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들에게서 능욕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오늘날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하나님과 그의 행위가 개입할 그 어떤 영역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에스겔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재를 호소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상황이 곧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자기 백성들에게 충고합니다. 그들의 죄로 인한 결과라고 말입니다. 선택받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능력을 과신함으로써 바로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마법에 걸린 듯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는 사실상 우리에게도 이미 하나님의 징벌이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을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에 근거해서 계속적으로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인간의 자기 해방과 자기 구원이라는 징표를 내다보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흡사 인간의 자기 실존을 실현되지 못하게 한, 수천 년이나 오래된 환상을 이제야 다시 인간이 쟁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해방의 열정은 애초부터 참된 자유와 인간성의 해방이라기보다는 그 끝장이었습니다. 그것의 매혹적인 광채에서 우리는 개인의 삶을 내적인 공허와 사회의 억압적인 제도화로 몰아가는, 그리고 사회가 독재자의 먹이가 되거나 외부 세력의 간섭에 먹이가 될 때까지 만인이 만인과 싸우게 만드는 죽음의 싹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는 하나님이 무력하다는 징표가 아니라 심판의 공적인 선포요 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부재는 인간이 독자적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욕망과 그 결과에 내버려두십니다. 우리는 이런 결과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어떤 강제력 없이 살아갈 때만 흡족해 한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 시대의 가장 유해한 광기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모든 면에서 잘못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소위 말하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게 좋다는 허영심이 자극됩니다. 그게 지나쳐서 이제는 기독교 시민들이나 기독교 정당들도 기독교적인 됨됨이를 증명하기는커녕 기독교적인 이름을 부끄러워합니다. 육체대로 뿌리는 사람은 그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바울의 이 말에는 신비주의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상한 것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그리고 무상한 것에 자기의 삶을 걸어두는 사람은 이 무상한 것들과 더불어 몰락할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이 무상한 것들이 종종 그에게 그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그에게 남아있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판의 두려움은 오순절 설교로서는 결코 즐거운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이런 두려움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입만 열었다하면 늘 하나님의 부재나 하나님의 죽음만을 되풀이하는 사람은 그 심판의 두려움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해줄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재는 무서운 일이니까요. 하나님의 부재는 끓어오르는, 혹은 이미 시작된 심판의 징표입니다. 하나님의 부재라는 외침을 심판의 징표로 읽어낼 줄 아는 사람에게만 오늘날 성령의 현재라는 오순절의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예언자의 말씀은 변함없이 영에 대한 약속을 향해 움직여나갑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우리에게는 그 심판이 여전히 앞에 놓여있습니다. 참된 자유를 허락하지도 못하는 인간해방과 자기구원에 대한 어리석은 교만으로부터 우리가 적시에 돌아서지 않는다면 현실로 일어나게 될 그 심판이 말입니다. 에스겔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당시에 야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내팽개치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은 교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 때문에 교회를 돕습니다. 교회를 향한 비판은 너무 많은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적습니다. 교회는 과거의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영을 계속해서 부정합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의 조직들이 교회가 자랑하는 사랑의 봉사에 대한 징표가 아니라 오히려 지배의 징표로 남아있습니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인들과 교권자들의 자화자찬입니다.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뢰보다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소문 앞에서 일으키는 발작과 체념의 영이 다층적으로 확산되어 있습니다. 체념과 자화자찬이 오늘날 교회 안에 아주 당연하고도 아주 분명하게 혼합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기독교의 영이 분리의 영이지 일치와 사랑의 영이 아닌 것처럼 기독교인들을 계속해서 분리된 교회의 현실에서 안주하도록 부추긴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것을 극복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교회를 교회가 행하는 악에 의해 파멸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 악을 극복하는 능력은 은폐의 방식으로 교회 안에 살아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 예언자의 상황과 다른 가장 큰 차이입니다. 이 차이는 영이 이미 현존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세례를 통해서 영에게 맡겨졌고 정화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분, 그리고 부활하신 분에 대한 사신은 사랑의 거룩한 영이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늘 거듭해서 갱신하는 원천입니다. 그 영이 현재 함으로써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이 자유가 없다면 인간의 모든 자기 해방은 망상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영의 현재를 상실해버리지 않고 숙고하기만 하면 그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어떤 능력입니까? 우리가 언급하는 영(Geist)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단체나 학급, 혹은 가족의 정신(Geist)이라는 어법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말도 씁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수년간 시대정신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바람은 다른 방향에서 불어옵니다. 이것은 그 바람이 교회를 향해서 거세게 불어온다는 말입니다. 지난날 별 깊은 생각 없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꽃망울을 터뜨린 곳에서 이제는 사회주의 개념조차 일종의 금기가 되었습니다. 시대정신의 이러한 비약적인 변화에 따라 개인적인 삶의 기분과 정취도 그렇게 변했습니다. 이런 기분과 정취는 이유와 방식도 모른 채 변화합니다. 흡사 입김처럼 사람들에게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이르기를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악한 영을, 우울케 하는 영을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변덕스러운 유행의 시대정신처럼, 인간의 기분과 정취처럼 그분의 활동에서 파악될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게 비합리적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는 일종의 주관적인 기분 같은 어떤 것뿐이라면 우리가 신뢰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분 같은 어떤 것은 우리가 착각에 빠지도록 우리를 흔들어댈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언급하는 하나님의 영은 변화하는 기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창조하는 힘의 넓이와 능력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오순절 절기에 이렇게 축하하는 영의 임재가 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마도 훨씬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생명을 창조한 분입니다. 시편 104편은 피조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당신의 낯을 숨기시면 그들이 떨며, 당신이 그들의 숨을 취하시면 그들이 죽어 먼지로 돌아갑니다. 당신은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어 그들을 창조하시며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시 104:29,30)

생명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오늘 우리의 현대적 시각으로 볼 때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 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자기 생명의 주변세계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피안 세계를 향해서 뻗어나갑니다. 무기물의 세계에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타당합니다. 즉 무기물 사이에 벌어지는 변화 작용의 영역이 그것들의 형태를 결정하는 본래의 자리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도 자기 자신의 피안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유기체의 진화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생명체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뛰어넘게 하는 영의 작용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한 창조는 우리가 전혀 표상(表象) 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영은 모든 자연적 능력 안에서 작용하는 비밀이며, 모든 것에 생명을 공급하는 거대한 힘의 영역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생명체들은 영을 거절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죽어버립니다. 만약 모든 생명체가 자기 자신의 피안에 있는 어떤 능력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린다는 것은 곧 그가 생명으로부터 단절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영을 향해 열려있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도 역시 이런 영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채 생명을 확인하려고 듭니다. 우리가 자기에게만 열중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과 제 각각으로, 또는 반대로 움직인다는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이 왜 죽음이 죄와 고용관계에 있다고 진술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열중에 빠져서 단절시키고 있는 그것이 곧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죽음 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생명의 형상(形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그 근원으로부터, 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한 생명의 형상 말입니다. 창조자인 하나님은 자기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죽음을 마지막 사건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따라서 죽지 않을 이 생명은 죽은 자가 부활하는 생명이며,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영적인 몸, 즉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생명은 일종의 다른 세상, 즉 피안에만 속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여기서 시작하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영으로 현재 함께 하는 모든 곳에서 시작합니다. 예언자의 약속이 우리에게 실현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집니다.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리라는 약속이 실현됨으로써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대단한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사건이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항상 돌같이 딱딱한 마음으로, 자기 열망으로 자기를 폐쇄시켜 놓은 채 살아가는 게 아닙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이미 다른 생명을 생생하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만큼, 그리고 믿음과 세례를 통해서, 성만찬의 친교를 통해서, 더구나 사랑을 통해서, 기쁨과 자유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큼 우리 안에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죽음이 승리를 구가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보증해주는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당신들 안에 거하면 당신들의 죽을 몸도 당신들 안에 거하는 그의 영으로 인해 살게 될 것이오.”(롬 8:11)

어느 누구도 이 영과 그 새로운 생명을 자기 혼자만 간직할 수 없습니다. 이 영은 우리가 우리 삶의 자기 폐쇄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작동합니다. 하나님은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현재 하시는데, 이 영은 사랑이 활동하는 자리입니다. 또한 사랑에서 유래하여 우리 삶에 내재하는 이것만이 영원합니다. 영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울타리를, 인간들끼리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를 극복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영은, 아니 그 영만이 바벨탑을 쌓다가 자기 스스로 존립하려는 자기 열망에 빠져서 집단과 개인 간에 서로 다투던, 그래서 상호간에 더 이상 이해가 불가능했던 인간들을 하나로 묶어주십니다. 사람들은 공연히 자기 열망이라는 바벨탑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안 됩니다. 서로간의 이해를 불가능하게 하는 울타리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의 영만이 인간들에게 참된 자유의 세계를 열어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하나가 되지 못하고 사분오열 되어있는 마당에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교회는 갈기갈기 찢겨지고, 분열됨으로써 불신앙적 집단이 되었습니다. 이 분열이 계속되는 한 기독교인 스스로 하나님의 부재를 확인해주는 셈입니다. 오순절의 영은 그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이 일치를 이루어가도록 용기를 주시는 게 틀림없습니다. 서로 대립하여 갈라진 이 세상에서 교회가 일치의 한 전형이 되어 하나님이 다시 이 세상에 지금 함께 하신다는 징표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1971년 오순절)

회개하라!

마 3:1-11

강림절은 하나님이 어두운 이 세상을 밝히기 위해서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또한 이런 기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희망합니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모든 눈물을 마르게 할 하나님의 영원한 빛에 대한 희망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오심과 그의 구원을 희망함으로써 유대인들과 결합되었으며, 그리고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런 희망에 근거해서 유대인들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한가지로 우리의 하나님이기도 한 그들의 하나님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신앙과 희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의 최종적 현재가 아직 이 세상에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의 신앙과 희망에 분명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만약 메시아가 이미 오셨다면 이 세상은 무언가 다른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메시아의 평화가 이 세상을 통치함으로써 불의와 증오와 전쟁과 고난이 오래 전에 극복되어야만 했던 게 아닐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이런 질문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만약 나사렛 예수가 이미 이 세상의 메시아, 그리스도, 평화의 왕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면 메시아의 평화 왕국을 감지할 수 있는 그 어떤 흔적들이 확실하게 드러나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이 은폐의 방식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즉 그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메시아의 징표를 드러내지 않은 채, 그리고 화려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궁핍한 삶의 방식으로 지구의 한 구석에서 회개와 구원을 설교하는 메시아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계사의 중심에서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결국 십자가와 불의와 공포에 내던져졌지만 이미 그곳에서 은폐된 메시아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현재하고 있는 이 메시야성(性)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아직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의 영광과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여 이 세계의 모든 어둠이 극복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강림절에 유대 예언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 목소리가 세례 요한이 선포한 사신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그의 선포에 온전히 담겨있다고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는 희망에 가득 찬 것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강림절에 울려 퍼져야 할 외침으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의 설교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오심과 그의 통치를 가슴 설레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이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다그쳐 묻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나간 세상에는 하나님의 오심이 심판을 의미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심판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너무 빨리 속단하지는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버린 이 세상에 속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살아가야 할 우리의 세상입니다. 예언자들의 사신이 선포된 유대인들도 역시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과 맺은 계약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은 자기 백성들에게 주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상들의 하나님에게 성실한 자세로 살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임하리라는 이런 경고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또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면서 공동의 책임이 있는 이 사회의 삶에도 이에 해당되는 부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일종의 능가될 수도 있는 말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에서가 아니라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진부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그 말의 사용을 너무나 난처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날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종교와 기독교는 지난날 거들먹거리던 건달들에게나 어울리는 철 지난 옷 취급을 받습니다. 이런 옷이 다시 유행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죠. 기독교라는 이름을 내세운 정당들도 과거에는 득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기독교적인 이름의 여러 요소들을 이제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것은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이 사회에서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지난날 공적인 생활을 유지하려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시인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상황이 달라져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제도가 곧 말라 죽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정적인 관용을 보이는 정도의 태도가 만연해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아직도 교회 제도 안에서 신앙적으로 경건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생각과 말은 기껏해야 신앙생활에 흥미를 가진 집단들의 자기표현일 뿐이라고 냉대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종교에 대한 이런 냉담한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생각이 없는 탓입니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이 사회가 감당해야만 할 하나님의 심판이 멀리서 다가오는 침울한 울림을 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그것으로 이미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에 내맡기는 꼴이 될 뿐입니다. 이 심판은 이미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심판은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짐으로써 일어나는 결과이지 그 어떤 다른 것에 의한 결과가 아닙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분명합니다. 완전고용과 수입의 증가, 고객들로 만원인 상점, 관광, 문화생활, 개인 주택, 쾌적한 생활, 이 모든 것들은 공허한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서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늘날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는 그 어떤 노력도 역시 이런 위기를 극복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삶에 참된 의미를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가 우리의 삶에 완전히 현존할 수 있게 하는 평화로운 신뢰심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만이 참된 진리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깊은 채 하는 어떤 이들의 웃음 앞에서 난처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계몽된 것 같은 얼굴로 이런 미소를 보이면서 하나님과 기독교 신자들을 백화점과 전문점 시대에 여전히 한물간 잡화점에 매달려 사는 이들로 취급합니다. 이렇듯 종교 없이도 자기의 노력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심각한 자기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이 자기기만은 결국 자유와 반대되는 길로 흘러들어 가게 됩니다. 또한 쾌적해 보이는 삶의 중앙 무대 뒤편에 있는 삶의 공허감 속으로 점차 깊이 빠져들게 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에서 참된 의미를 찾아보려는 절망적인 외침이 점차 거세어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 있어야하는 곳, 즉 종교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믿음 안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마저도 완전히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계획된 사회 질서에서 얻을 수 있으려니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사회를 철저하게 제도화해야 한다는 이런 믿음이 단순히 행위만이 아니라 인간의 말과 사유를 지배함으로써 우리는 결국 자유와 상반되는 망상으로, 즉 현실성에 대한 억압적이고 광기 어린 망상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나간 역사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무엇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습니까? 무의미와 거짓 희망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원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의 부름만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이 세상이 회개해야한다는 부름, 하나님에게 돌아오라는 부름말입니다. 이런 부름에는 기성 교회의 이해타산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그 당시의 교회 신자라 할 수 있는 진지하고 경건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그 어떤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사신과는 분명히 달랐던 요한의 사신에서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당연히 선포해야만 했던 그 사신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선포한 사신은 오히려 그들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귀한 자리가 주어졌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찾기보다는 자기들의 전통과 경건의 형식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기들의 전통만 중히 여겼지 하나님을 소홀히 섬겼다는 이 문책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키려는 전통은 로마 가톨릭의 전통입니까, 종교개혁의 전통입니까? 앞으로 몇 달 안에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내부 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첫 걸음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아주 당연하고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로이엔베르거 종교협정(1973년 바젤의 로이엔베르크에서 81개 교회가 협정한 신학선언, 역주)은 겨우 첫 걸음일 뿐입니다. 이미 수세기 전에 진리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일어났던 종파적 충성 경쟁은 오늘날 대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이 인식되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만약 교회가 과거의 대립들을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교회가 자기 자신, 즉 자신들의 전통이나 상속된 구조들보다는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로이엔베르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오늘 교회에 요구되는 회개의 징표일지 모릅니다. 이것을 미루면 그때는 교회도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마비된 전통을 수호할 뿐이라고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빨리 일어날수록 교회는 그 수모를 벗어나기 위해서 오히려 세상 풍조를 따르려는 몸짓을 서두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주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만이 교회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설교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라고 설교하려면 오늘도 역시 우리는 광야로 달려 나가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 현실로부터 발길을 돌려버려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요한이 선포한 복음 사신을 통해서 참된 믿음을 호소하기 위해서는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교회는 교회가 선포하는 그 복음의 사신을 경멸하거나 오용하고 있는 이 세상과의 모든 연대를 단절하고 오늘 당장 광야로 뛰쳐나가야만 합니까?

예수님은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며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외치던 광야에서 다시 사람들이 사는 문화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으니 하나님에게 돌아서라는 세례 요한의 사신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과 저자 거리에서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요한과 똑같은 사신을 전했습니다만,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위협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으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말씀은 구원과 심판의 문제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임박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신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 돌아서라는 부름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버린 이 세상 안에서 살지만 이미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미 현존하십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람들의 거주지로 돌아옴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신 겁니다. 세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오늘날 이 세상을 통치하러 오실 하나님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선과 악을 구별함으로써 세상을 심판할 때가 임박했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물로만 세례를 받는 게 아니라 불과 숨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이 문화 마을인 인간의 거주지로 돌아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그를 통해서 이미 현재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세계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요한이 외친 그 심판이 말입니다. 그러나 세계 심판은 은폐의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아직 세계 통치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세계 심판으로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능력과 영광으로 세계를 다스릴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실은 모든 불의와 모든 고난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세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갈릴리 설교자의 능력과 영광이 아니라 그의 비천과 연약함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서라는 부르심을 따를 때 바로 구원이 임합니다.

그의 부르심은 개개인을 향하십니다. 그의 부르심은 이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향하십니다. 이 세상은 입으로는 평화를 노래하지만 점점 더 확실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탐욕과 시기와 적개심에 사로잡히고, 평화와 상관없는 길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질수록, 이 세상이 하나님과 종교를 이미 끝나버린 망상으로 간주하고 무시해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심판은 이 세상에 가까이 임합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을 위해서, 바로 이 세상과 우리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은 기독교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그 어떤 절박한 사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개시(開始)하심으로써 그 자유와 생명의 나라에 참여하게 된 기독교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말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자신의 무의미에 침몰 당하지 않으려면, 또한 절망 중에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미혹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사실 그런 사회는 구조적인 부자유만 생산해낼 뿐이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돌아서야 하며,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사신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통치만이 인간의 삶에 의미와 자유를 보장해줍니다. 평화의 나라는 인간에 의해서 달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시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 이 하나님의 평화만이 세상의 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1972년 대강절 둘째 주일, 로흐함)

여기 계신 하나님의 나라

마 4:12-17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복음서 기자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 사신을 두 문장으로 완벽하게 압축해 놓았습니다. “회개하라”와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문장 중에서 보다 결정적인 말씀은 하늘나라, 혹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훨씬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문장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것이 바로 회개의 근거입니다. “돌아서시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바로 이곳에 가까이 이르렀기 때문이오.” 이것이 바로 원어상의 의미입니다.

매우 보기 드문 형식으로 언급되어있는 이 말씀은, 즉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는 정말 코앞에 닥쳤습니까? 하나님은 원래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 주(主)가 아니던가요? 유일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모든 사건의 궁극적 근거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말은 별로 특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도대체 여기서 무엇이 관건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닐는지요! 하나님이 통치자라는 사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든 것에 작용하는, 알 수 없는, 비밀 가득한 근원으로만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따르기보다는 좋던 나쁘던 간에 다른 인생의 법정에 근거해서 살아갑니다. 다른 법정이 그를 다스리는 것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 밑에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과 계명을 알려주신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긴급한 질문이 됩니다. 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에 근거해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그렇게도 다른 걸까요? 왜 성공이 악인의 편에서 거듭되는 걸까요? 하나님이 세상의 주(主)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보다 잘되는 일은 왜 벌어지는 걸까요?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세력에 의해서 굴복 당하는 일은 왜 벌어지는 걸까요? 이런 질문들은 대혼란의 시기에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개인의 삶이나 시민의 삶이 대(大)파국에 빠지는 때 말입니다. 이런 질문은 기원전 733년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북쪽 지역을 자기들의 제국에 합병시켜버렸을 때에도 대단히 긴급했습니다. 게네사렛 호수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땅이 아시리아의 관할에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층은 추방당하고 대신에 아시리아 관리들이 들어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상황을 온 몸으로 생생하게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여호와의 도움은 어디에 머물러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그 땅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는데 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문제가 없었는데도 이런 대파국이 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마침내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국토가 나뉘었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 갈릴리와 해안지역으로 말입니다. 이제 여호와는 자기의 약속을 거두어들인 겁니까? 그는 왜 이런 일이 계속되도록 내버려두고 있습니까?

이렇게 혼란스러운 이 세상 속으로 얽혀 들어가는 일이, 그리고 이 세상에서 당하는 괴로움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당하는 괴로움은 이렇게 출구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일이 벌어질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거기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막막한 심정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하게 됩니다.

이런 어둠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긴장으로 인해서 피할 수 없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 사람들이 아시리아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억지로 이루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려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정복해나갈 수 없습니다. “밤을 지나 빛으로” 나아간다는 우리 거인의 길, 즉 베토벤의 교향곡이 가리키고 있는 현대인의 길, 이것은 하나님의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어둠을 밝히실 경우에만 우리는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빛은 우리 너머에서 와서 우리를 완전히 채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기쁨과 찬양을 드릴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대한 광채의 작용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히 잿더미가 된 이스라엘 위에서 빛나는 그 광채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은 오직 이사야 한 사람에게만 확실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과 회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기쁨 가운데서 발생하는 것이지 그 기쁨이 없다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홀로 통치하신다는 것은 그의 통치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예언자의 예측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통치가 언제, 어떻게 현실적으로 이루어질는지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불빛을 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곳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겁니다. 기독교의 소종파들이 그랬듯이 우리는 천상의 예루살렘이 임하는 장소로 득달같이 달려갈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이사야의 말대로 다윗 왕국을 다시 일으킬 한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통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인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이렇게 선지자의 예언을 완전히 간접적으로 성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빛이 어디에서 우리의 삶을 관철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변방에서 우리를 만나주실 겁니다. 우리가 어둠만 볼 수 있지 빛이라고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곳 말입니다. 어쩌면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가 일 년 내도록 혼신을 다해 추구했던 목표보다 훨씬 중요하게 작용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당연하지 않으며, 더구나 하나님의 통치를 전혀 느낄 수 없을 때가 많으며, 또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이미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이루어지는 도중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신앙적 사유를 시작해야만합니다. 우리는 도처에서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그러나 결국에는 그 본색이 드러나게 될 다른 세력들이 군림하는 걸 보아야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을 뛰어넘어 미래에 계시되리라는 사실만을 희망할 수 있으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미 현재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과 세례 요한의 설교가 다른 유일한 차이점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포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그곳에 빛이 임했고, 어둠이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라고만 외친 게 아니라 사죄를 선포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길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 한다는 사실은 전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요한과는 달리 광야에서 설교하지 않고 갈릴리를 향한다는 사실에서만 그것이 암시됩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이사야가 언급한 빛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내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입니다. 낡은 세력이 여전히 득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매 순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생명을 자신에게만 소용되는 열망과 지배욕과 타성에 묶인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어둠의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지난날 죄와 한 패를 이루고 살던 우리를 예수님은 사죄하심으로써 해방시켰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넘겨받기도 전에 이미 우리 마음대로 처리해버린 그 미래의 날들로부터도 역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경험이 찬란하게 빛나는 광채처럼 우리의 삶을 꿰뚫고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지난날 어둠으로 생각했던 그 한 측면으로부터 돌아서게 된다는 사실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분은 누구십니까? 이런 순간에 이유도 없이 찾아드는 기쁨 가운데서 우리가 모든 한계를 뛰어넘고, 모든 자기 집착에서 꿰뚫고 나와 참된 생명을 향해 다가간다는 사실을 아직 감지하지 못한 분은 누구십니까? 죄의 용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빛이 출현하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빛이 광채를 내도록 불을 붙여주는 이 기쁨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쁨은 자기 집착이라는 귀신을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1957.1.27, 하이델베르크, 대학예배)

권위의 근원

마 13:10-17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매우 특징적으로 각인된 이야기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복음 사신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 걸까요?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비밀을 말씀하실 때 제자들에게는 비유로 하지 않으셨지만 군중들에게는 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군중들은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듣는 것 말고는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군중들이 보고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끝 구절이 이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그의 사신을 들었기 때문에 복되다고 축복합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경험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던 그 구원의 성취를 보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알려줄 수 있었던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비밀은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예수님에게, 또한 그가 선포한 사신 안에 현재 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미래로부터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미래적인 것으로 선포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신을 듣는 자들이 지금 완전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하나님의 미래에 의탁함으로써 이들에게 지금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왜 이 비밀이,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군중들에게는 직접 알려지지 않고 오직 제자들에게만 알려진다고 보도하는 걸까요? 만약 예수님이 자신을 통해서, 그리고 그가 전하는 사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그 자리에 현재 한다는 사실을 군중들에게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마태복음이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듯이 이 문제는 순수 지성적인 오해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통치의 현재를 어떻게 오해했는지 예수님의 공생애 전 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비록 부분적이었지만 엄청난 불손을 발견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따라서 모든 전통과 전승을 상대화 시켜버리는 신성 모독적인 인간의 태도를 말입니다.

이런 오해를 막아보려고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자신 안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군중들에게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불손하게 보일 수 있는 그런 권위로 말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에 담겨있는 그런 권위는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선포한 사신의 내용으로 인해서 불가피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사실을 군중들에게 주장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한다는 구원 사신에 대해서 침묵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말과 인격 가운데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 한다는 사실을 피력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비유의 방식으로, 즉 간접적인 형식으로 알렸습니다. 자기 자신을 전하는 대신에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스스로 싹을 돋아나게 해야 할 종자로서의 사신에 대해, 또한 큰 나무로 자라나게 될 작은 겨자씨로서의 사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물이나 진주에 비교했습니다. 이것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숨겨있던 것들로서 어떤 값을 지불하고라도 즉각 손에 넣어야만 할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포한 사신을 곧 닫혀버리고 말 좁은 문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을 땅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의 현재는 비록 예수님이 자기 자신이라고 직접 말씀하지는 않았어도 그 분 자신 안에서, 그 사신의 선포에서 발생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논쟁의 도화선이 된 자신의 사신을 비유 형식으로 말씀함으로써 권위 문제를 사실성의 차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인격에 따라오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선포한 말씀과 그에 의해 발생된 사건들로 인해서 그의 인격이 사람들에게 불가피하게 결정적인 질문이 되었지만 그는 오히려 이런 걸 피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공동체는 예수님의 이 사실성이 의도하고 있는 바의 근본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군중들로 하여금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누가복음의 보도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보도는 우리가 예수님의 여러 다른 사신에서 알고 있는 모든 사실들과 상충됩니다.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목적은 군중들을 모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회심케 하기 위한,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인격과 구별되어 나타나는 예수님의 이런 사실성을 초기 기독교가 이해하기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다른 문제를 의미합니다. 신약성서는 이미 예수님에게 존귀한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 칭호들은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기 예수 공동체의 신앙에 의해 헌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회와 그 교직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권위를 이용했습니다. 그런 권위는 기독교의 사명을 수행해나가는 일에 별로 필수적이지 않은 것인데도 말입니다. 계몽주의 이후로 교권에 관한 이런 극단적인 형태들이 배척되면 될수록 이 교권을 행사하던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관리 체제를 더 많이 생산해 냈습니다. 교권을 행사하기 위한 이런 제도들은 대개 신학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듭니다. 교권을 앞세우는 일은 자신의 인격적 권위가 드러나는 것을 막아보려 했던 예수님의 정신에도 위배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실 그에게서 나타난 일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이런 태도와 달리 이 세상을 향한 기독교적 사명이 항상 사실적인 바탕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종종 교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습니다. 로마 교황 요한 23세는 아주 예외적인 전형으로 빛나는 인물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도 그와 필적될만한 어떤 전형이 있을까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의 기본 정신에 근거해서 교회의 형태를 갱신해 나가는 과업은 다른 게 아니라 교회의 관리 구조에 상존하고 있는 관료주의적 지배 형식들이 세상을 위해 수행되어야할 교회의 사명을 촉진시키기보다는 어느 정도나 방해하고 있는지 검증하는 일입니다.

기독교적인 사실성이 무엇인지를 굳이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비유 이야기에서 찾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 형식은 우리와는 다른 예수님의 상황에 속한 특수성이니까요. 그 어떤 기독교인도 자기의 인격을 구원이라고 세상에 선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를 통한 간접적인 수단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에 관한 사실만을 설명하는 게 기독교인들에게는 훨씬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사신의 사실성을 신실하게 전하려면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이나 인류와 관계된 일로 생각해야지 그저 교회를 경영하기 위해서 그 둘레에 장식품을 매달아놓듯이 오용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현재를 규정하는 능력”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의 문제와 현재적으로 관련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전승의 경건한 언어에서가 아니라 오직 세상에서 실질적으로 이해되는 진술에서만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으로 전승된 언어들이 세상과 맺는 관련성은 그 어떤 해석 작업이 없는 한 별로 설득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와 거리가 먼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전승된 언어에 밀착되어 있는 종교적 권위의 허상을 벗겨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단순히 세속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언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이 정치적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일의 성취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평화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과는 다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권위를 포기하라는 요청을 듣습니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통치 같은 단어를 아무렇게 마구 사용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권위를 자랑하는 집단은 두 곳입니다. 종교와 정치입니다. 권위를 내세운다는 것은 그 권위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인정되지 않으며, 그리고 실제적인 일로 증거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권위에 의존해서 강압적으로 자기를 주장하고 무엇인가를 관철하려고 들면, 예수님의 경우와는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불손하다는 의혹을 삽니다. 권위는 사실적인 근거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정치 영역에서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일만이, 즉 인간의 정의와 평화를 촉진시키는 일만이 그 정치적 권위에 토대를 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의와 평화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한 가장 본질적인 두 시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그것이 휴머니티를 얼마나 충실하게 담보해내는가에 따라 측량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통치구조는 공동의 행복을 창출해내기 위해서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충분한 합법성을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병들었습니다. 이런 결과를 빚게 된 데에는 여러 사건이 연루되었는데, 저는 여기서 우리의 정치 구조에 관련된 것들에 한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선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선도적 역할을 하던 한 정당과 한 그룹이 승리했으며, 그 결과로 그들이 계속 통치권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기에는 현대의 선거 유세 방식이 한몫 톡톡히 했습니다. 자기네 정당을 선전하는 그런 방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선전 방식의 목표였습니다. 그 덕분에 이번 선거 운동 중에는 일반적인 행복에 대한 거시적 담론이 너무나 미미했습니다. 그런 논의보다는 유권자들을 선거용 선물로 매수해야겠다는 생각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통치권자들은 다수를 차지해서 자신들의 통치권을 계속 유지시켜나가기 위해서 어떤 사안을 심도 깊게 논의하기보다는 단순히 돌아가면서 질문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끌어가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정치적 통치는 그들의 공적인 권위를 익명의 사회 세력과 이익 집단의 계속적인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데만 사용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형식적으로만 민주적인 것처럼 합법화된 통치의 이러한 정치적 권위 구조에 대항하기 위해서 분연히 들고일어난 우리 젊은 대학생들의 소요는 정당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탈(脫)이념화의 파고에서 우리는 어떤 수확을 거두어들였습니까? 당시에 우리는 개인들이 소위 절대이념을 통해서 비인간화되어버리는 그런 위험만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반(反)이념화에 기울인 그 열성으로 인해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그 사회 구조를 인간다운 정의로 채우고, 그 구조를 비판하고, 교정해나가는 모든 노력들이 위축되었습니다. 결국 사회를 비판하고 나름대로 구성해보려는 예술 행위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모든 노력들이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로 치부되었고, 소모품으로 전락했습니다. 세계관적인 연관으로부터 사뿐히 벗어나는 일은, 즉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탈이념적 현상은 오늘날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듯이 그것 자체가 이념적입니다. 이로 인해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삶을 갱신시켜나가려는 세력들의 태도가 완전히 비(非)이념적인 성격으로 변해갑니다.

따라서 요즘 우리 대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소요사태를 단순히 안녕과 질서라는 기준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소요가 근본적으로 뜻하고 있는 바는 그 무엇보다도 이 사회의 모습에 대한 불안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다움의 의미가 더 이상 분명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회의 모습 말입니다. 이런 소요를 보고 그 본질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인간다운 삶의 토대와 명실상부한 민주질서에서 끝내 정착하지 못하다면, 그래서 이런 깨달음으로부터 정치 행위의 가시적인 성과들이 도출되지 못한다면 이 사회가 계속해서 해체의 길로 들어서게 되리라는 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상대적인 자유만을 누리면서도 모든 중요한 과업이 해결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정치 영역에서도 그 권위를 형식적으로만 합법화시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권위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점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대학 사회에서는 보직이라는 권위와 교수의 형식적 권위를 헐어내는 일이 시급합니다. 대학이 의미 있게 개혁되려면 단순히 그 구조의 변화에만 매달릴 수 없습니다. 대학의 새로운 모습은 교육의 근본적인 과업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 새로운 모습은 단순히 공격적인 자세로 임하는 상이한 집단의 힘겨루기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대학 교육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 실제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모든 집단들이 생각을 모아야합니다. 우리 교수들은 여기서 분명히 자기 전공 분야만을 위한 좁은 이기주의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이런 전공 이기주의라는 것은 끊임없는 전문화로 인해서 자기 세계에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첫 인상으로 모든 것을 재단해버리면 안됩니다. 여러 전문 분야 중에는 정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그러나 전체 사회를 구성하는 일에서는 본질적으로 공헌하는 분야가 많습니다. 따라서 대학의 모든 구성원들이 대학의 지적인 수준이 반드시 유지되고 향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 또한 이를 위해서 필요한 기구적인 예방수단을 강구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대학이 감당해야할 교육 기능의 붕괴는 불가피합니다. 학생들이 교수의 권위를 비판하는 것으로 대학의 교육과정에서 필요 불가결한 정신적 훈련이 면제된다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대학의 갱신으로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창졸간에 대학의 붕괴로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만약 교수직을 임명하는 새로운 방식, 즉 교수 채용 방식이 앞으로 교수들을 훨씬 싼값으로 채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면 결국 교수의 질은 향상될 수 없습니다. 이런 충고는 모든 세대들에게, 오늘의 문화 정치가나 교수들, 또한 오늘날 비판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들이 지금 그럴듯한 업적을 내고 있는지 아닌지 증명할 필요도 없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내디딘 발들은 이미 문전에 놓였습니다! 조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에만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대학생, 교육 행정가, 교수, 대학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아주 분명하게 판단 받게 될 기준은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 또한 이로 인한 휴머니티의 제고를 위해서 대학을 개혁하는 일에 우리가 어떻게 기여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교회의 문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교회도 역시 휴머니티를 제고(提高)하는 일에 어떻게 기여했는가에 따라 판단될 것입니다. 이는 곧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어떻게 증거하며 활성화했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교권이나 조직이나 전통적 삶에서가 아니라 바로 위에서 언급한 그런 사실에서 주님을 향한 교회의 성실성이 결정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활동은 이 교회에 속한 신자들의 개인적인 삶에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사회적인 삶과 그 구조에서 휴머니티에 관한 일을 자신의 고유한 업무로 인식해야만 합니다. 여전히 왜곡된, 여전히 자신에게서 해방되지 못한 인간의 얼굴을 구원하기 위한 업무로 말입니다. 교회가 이런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교회는 자신이 원하든 않든 간에 아주 간단히 자기를 확인하는 도구로, 단순히 사회 체제를 이념적으로 합리화시키는 안전장치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이 보도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큼은 비유로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자신에게 현재적으로 임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숨긴 채 선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신학적으로 전승된 언어들이 우회적으로 선포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명백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시대의 인간 문제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인 “현재를 규정하는 힘”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지시하고 있는 혁명적 능력을 우리 자신의 삶에 속한 문제로 여길 줄 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공동체로 모이는 곳에서 이런 일에 연합하고 있습니까? 이런 과업이 더 이상 단순히 교회의 부수적인 과업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가 감당해야할 사명의 특징으로서 교회의 형태를 규정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행했던 종파적 특수성에 대한 우상숭배를 물리칠 수 있으며, 또한 일치하는 기독교로서 인류의 미래에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자체가 인류를 향해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비유로 말씀만 하신 게 아니라 그 통치와 사랑의 비유를 삶으로 드러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1969.2.9,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예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기독교인의 십자가

마 16:24,25

우리 기독교는 처음부터 십자가를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대한 징표로 삼았습니다. 사실상 기독교 신앙에 속한 특별한 요소들 중에서 십자가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의 복음 사신을 전적으로 십자가에 대한 말씀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사신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특히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 죄와 죽음의 극복을 가리키는 게 확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기독교의 구원 사신이 자리 잡고 있는 그 깊이를 오해하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내려가셨던 그 깊이를,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그 깊이를 말입니다. 그 깊이는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심연과 같은 곳으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해주는 곳이며 모든 인간을 새롭게 해주시는 곳입니다.

교회는 매년 수난절 절기 때마다 예수님이 가셨던 십자가의 길과 그것에 연관된 사건들을 생각합니다. 오늘 수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심사숙고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에도 역시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알맹이로 작용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아무 사심 없이 듣는 사람은 분명히 이 말씀의 냉정한 요구 앞에서 당혹스러워질 것입니다. 이 냉정한 요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계속 고수됩니다. 이 말씀이 살아있는 한 예수님과의 일치는 순교를 준비하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죄인이라는 판결을 받고 고통스럽게 죽어야할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과 함께 그의 길을 갈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해야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베드로가 이를 만류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조심스러운, 그러나 어리석은 이 시도에 대해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으로 답변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행동에 대해서 매우 극단적으로 반응하십니다. 그는 베드로를 향해서 자기를 잘못된 길로 빠뜨리는 사탄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야할 길을 빗나가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사람의 생각을 마음에 두고 있구나.” 그리고 곧 이어서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바는 고난을 피하고 자기를 지키려는 행위는 인간이 생각하는 자기 보호의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려는 예수님의 사명은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기를 지키는 게 아니라 자기를 포기하는 게 바로 그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가야할 그 길의 원리를 제자들에게 천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편타당한 생명의 형식을 제시한 것입니다. 즉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은 자기를 잃어버리게 한다고 말입니다. 자기를 포기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을,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십자가를 짐으로써 자기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매우 사실적으로, 가장 직접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순교 당할 각오를 하라는 부르심으로 말입니다. 박해가 심했던 초대교회 때는 사실상 많은 경우에 순교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켜나가려고 할 때 지불되어야할 값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종종 가장 잔인하게 고통당하며 죽는 길이 되었습니다. 역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성을 자기 생명으로 지불해야만 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받는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에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은 기독교의 초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박해 상황은 기독교의 초기 역사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항상 거듭해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전혀 이렇지 않습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해 냉담하고 업신여기는 것 같은 주장과 행동들이 큰 물결을 이루기는 했어도 기독교의 신앙고백 자체가 박해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제도권 안에 들어와 있는 기독교는 오늘날 더 이상 이 사회가 요구하는 생활방식을 무조건 따라야만 한다고 강요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좋은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기독교인에 대한 적개심과 박해가 우리의 현재 상황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의 상황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또한 순교자들의 교회에 주어진 이후로 계속적으로 기독교 교회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의 의미가 오늘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아주 분명하게 밝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인으로서 곧이곧대로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순교의 운명이 닫혀져 있는 걸 보니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 부족한 기독교인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반대로 오늘 우리의 이런 상황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의 길이 무조건 예수님의 길이나 초대 기독교의 길과 똑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원시 기독교 시대는 그 이후 시대와는 아주 다른 특별한 상황이었으며, 이를 통해서 기독교 전체 역사에서 의미심장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상황과 아무리 다른 특수한 상황에서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에는 그런 박해 시대에만 적용되는 게 아닌 그 무엇인가 보편타당한 의미가 숨어 있을 겁니다. 이것을 알고 싶은 사람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들이 대하던 삶의 태도와 우리의 태도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직하게 생각하려면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야외예배를 드리러 나온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짐으로써 순교자적인 자세로 살아야한다고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배가 끝나기만 하면 불고기를 구워먹을 생각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기독교의 위대한 말씀이 무의미해질 때까지 그저 낭비되고 공허해집니다. 따라서 이 말씀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어떻게 대립해 있는지가 드러나야 합니다. 바로 이럴 때만 그 말씀의 빛이 우리의 삶을 비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전제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볼까요?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무언가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간과해버리는 사실입니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게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 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의 특수성과 기독교인이 가야할 길 사이에 놓인 차이는 이 말씀에 전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의 특수성은 오늘의 본문 이외에도 십자가를 언급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모든 사신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에서는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길이 바로 우리의 길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의 죄로 인해서 야기된 그 십자가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 때문에 지셨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를 돕기 위해 당한 십자가의 고난에는 모든 인류를 그 죄에서 해방시키셨다는 사실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대신하는 보상으로서, 혹은 인류와 맺은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의 희생물로서 선포되는 모든 곳에서 그의 죽음은 모든 다른 인간의 역사와 대립된 특수한 예수님의 길로 이해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다른 인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리워진 그림자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성공해야한다는 강압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고난당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가 물리친 이유는 그 고난이 그가 바로 앞서 고백한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을 파괴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파멸은, 즉 죄인으로 당한 죽음은 최후의 승리에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행위를 통한 모든 인간의 자기실현은 불확실해졌습니다. 행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실현해 볼 수 있는 선택과 가능성이 우리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의도를 성공시켜야겠다는 강압과 그 투쟁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해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당한 실패가 곧 무(無)로 몰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자기실현의 잠정성과 허약성을 견뎌낼 수 있으며, 우리의 노력이 실패로 끝나는 모든 것들을 유효한 것으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들의 삶이 불확실하고 허약하지만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을 예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선포한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입니다. 질병이나 궁핍이나 사회적 고립, 억압이나 박해, 그리고 합법을 가장한 불의한 사형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로는 국가의 판단이나 그 어떤 법정도 우리의 양심을 강제하는 마지막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고유한 혁명이며, 모든 지배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잠재력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로마의 카이저들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힘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예수님과 연합한 이들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확신할 수 있으며, 이로써 모든 지상 권위와 모든 생명의 성쇠에 전혀 매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과연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기독교적인 자유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가 숙고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자로 살아가는 기준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앞에서 기독교인의 길이 그저 단순하게 예수님의 길과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 기독교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자는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면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감당한 그 특별한 운명을 흉내 내는 게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삶으로 돌아가라는 지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감당해야할 그 고유한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삶의 모든 성쇠,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견뎌낼 수 있는 고난, 질병, 외로움과 죽음입니까? 기독교인의 고난이 그 어떤 정황적 설명 없이 종종 십자가와 동일시됩니다. 이럴 경우에는 그 어떤 결정적인 요소가 망각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에게 일어난 어떤 한 인간적인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결과로 인해 감당해야만 했던 운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자기의 사명에 성실하려면 그것 때문에 유발된 적개심을, 또한 그것 때문에 파생된 대파국을 피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시려는 예수님에게 생명을 걸지 말라는 베드로의 선의의 충고를 예수님이 왜 그렇게 야박하게 물리쳤는지 분명합니다. 이 충고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사명을 배반한다는 뜻이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틀림없이 자기에게 닥칠 그 모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오. 즉 자기 사명을 배신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그 생명의 의미를, 자기 자신을 잃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사명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 사명과 연결된 모험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 주어진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와 모험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그런 일에 과감하게 걸어두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는 인간이 자기를 실현해보려다가 부닥친 한계로 이해되면 결코 안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일을 성취하려는 모든 행위들이, 그리고 그런 일들 때문에 벌어지는 모든 모험들이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길과 상응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자기실현이 아니라 자기 사명과 관련됩니다. 분명히 인간을 위해 헌신하는 과업이라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생명을 얻는다고 약속해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포기하는 행위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아닌지는 우리의 생명을 어디에 걸어두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테오도르 쾨르너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쉴러의 시구 “이 전쟁에 생명을 걸지 않으면 당신들은 결코 생명을 얻지 못하리라”는 구호로 1815년 민족 해방 전쟁에 참가하라고 호소했습니다. 이런 구호는 오늘 우리에게는 쉴러의 시를 오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민족주의라는 우상숭배에 희생물이 되어 대량 학살된 이 사람들은 결코 이 희생을 통해서 참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뜻하지 않게 그런 사건에 얽혀드는 비극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차원에서 참된 생명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자기의 삶에서 고유한 사명을, 고유하고 인격적인 삶의 과업을 발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만 생명의 약속이 깃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마가복음은 “복음을 위하여”라는 구절을 보충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은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겉모습과 허위와 기만에 걸어두지 않고 영원한 것에,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할 하나님의 일에 걸어두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합니까?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떤 모험을 감당해야만 합니까? 이것은 곧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직결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이 자리에서 당장 답변될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은 일반적인 차원에서 답변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각자 자신의 고유한 인간적 삶의 과제를 심사숙고하는 가운데서 답변되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실존에 따라오는 모험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그것 자체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상 별로 모험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수동적이며, 또한 적절하지 못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사명은 사회적인 이슈에 참여하는 데서만, 즉 사회에서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이나 버려진 이들과 연대하는 데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명의 핵심은 하나님이 가까이 임했다는 사실에 놓여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그 사명이 역동적으로 추진되려면 모든 삶의 영역을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생각으로 집중시켜야 합니다. 인간의 삶에 속한 근본적인 주제는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게 아닙니다. 이 주제는 오히려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인류에게 이루어져야할 진정한 일치에 대한 최고의 상징은 역시 종교적 일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이런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역사적 유산으로 내려온 분열의 모든 울타리를 벗어나서 예수님 자신이 제정하신 공동 식사에 참여하고, 이런 축제를 기점으로 교회의 종교적 일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공동식사는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그의 재림에 대한 희망 안에서 일치시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최후의 만찬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새로운 인간성이 제시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살았고, 이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만찬과 성례전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해야한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사명에 신실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받아들인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명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을, 그리고 그 결과로서 자기 자신의 삶에 따라오는 모험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예수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있는 세력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땅의 모든 삶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는 죽음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며, 또한 부활의 약속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

(1972.2.20, 투트찡)

영원한 생명

마 25:1-13

교회력의 마지막 세 주일은 세계 종말에 대한 기독교의 기다림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죽음과 부활, 최후의 심판과 영생이 그것입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에 영생을 기다린다는 것은 고대 기독교 신앙고백의 마지막 항목이 가리키는 주제입니다.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이런 영생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명, 즉 죽어야 하고 지나가야 할 생명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곧 ‘다가올 세계의 생명’입니다.

이러한 영생은 그야말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홀로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된다면 우리는 그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생명에 참여하려면 죽어야 할 우리의 생명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죽을 몸이 불사(不死)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서도 여전히 우리 자신이, 지금과 같이 죽어야 할 우리의 생명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일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영원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할 심판을 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기다리고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것은 곧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써 들어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희망은 결정적으로 피안적인 희망입니다. 즉 죽음 너머에 있는 생명을 향한 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희망은 우리 시대정신과 대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오직 현재의 이러한 생명만 알고 있습니다. 교회와 기독교 신앙도 역시 오늘날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이러한 현재의 삶에서 수행해야 할 것의 기준에서만 평가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이 종교개혁에 의해서 첨예화된 것입니다. 즉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며, 또한 이 하나님과 더불어서 이 세상의 생명을 극복하는 영생입니다. 이런 일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삶에서,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 11:25). 영생에 대한 희망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위로하고, 그리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생명의 파멸과 죽음에 직면한 모든 고통에서 위로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고전 15:19).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파멸 당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이 땅에서 성취되는 생명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의 생명을, 즉 현재의 세상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 일은 부활한 분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보증해준 미래의 생명에서만 일어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루어질 생명에 대한 희망을 단단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이번 주일의 복음서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내용입니다. 이 설교 본문은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비유입니다. 우리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슈트라스부르크 대성당이나 프라이부르크 대성당을 가보신 분들은 그 출입구에 있는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상을 기억할 것입니다. 슈트라스부르크에는 미련한 처녀들이 자기들을 잘못 이끌어준 이 세상의 영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등불을 조심 없이 다루다가 꺼뜨렸습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처녀들은 등불에 불을 밝히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주제를 그림으로 설계한 것으로서 대성당 출입구 바로 위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과 그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틈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열 명의 처녀 비유는 사실상 마지막 심판에 관계된 것이며, 신랑과의 일치에서 벗어난 위험에 관계된 것입니다. 특히 이것은 끈기를 갖고 기다리라는 교훈이며, 또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비록 하늘의 신랑이 더디 온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벌써 2천년이나 지체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그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대한 희망을 굳게 잡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희망은 혹시 공연한 게 아닐까요? 일종의 환상일까요? 이런 질문은 우리를 타락시키려는 유혹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지체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원시 기독교에도 경험된 것인데, 이 지체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무능력하다는 징표가 아니라 그가 창조한 세상을 향한 그의 인내의 징표이며, 또한 새로운 세대가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려는 사랑의 징표입니다.

이런 비유의 중심에 있는 그림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만찬은 모든 시대를 걸쳐서 고양된, 강렬한 생명의 표현이며 총괄개념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개인이 다른 참여자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징표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동식사는 그 자리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약속의 백성이 하나를 이룬다는 징표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아론과 더불어 이미 가장 오래된 계약의 식사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유대의 안식일 식사가 그런 의미이고, 특별히 유월절 식사가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실 미래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일치도 역시 유대의 기다림에 의해서 식사로 표상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이나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눈 식사는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의 징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징표는 곧 하나님 통치의 구원이 개시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만찬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와 이런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미래는 이미 이곳에 지금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식사를 나누실 때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받게 되는 식사를 피로연으로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이 식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가장 밀접한 일치가 핵심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일치가 핵심이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식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이것은 이제 교회의 성만찬에서 상징적 선취의 방식으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날 때 완료되는 사건의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하나님 나라를 부단히 기다리는 사람들만 이런 식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등불을 밝히고 있는 지혜로운 처녀들입니다.

이 비유에서 지혜로운 처녀들이 자기들의 기름을 미련한 처녀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 했다는 대목은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전형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생명이 단 한번뿐이라는 사실을 의미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여전히 지체되고 있는 사실 앞에서 한눈팔지 말고 제대로 준비해야만 합니다. 신앙과 희망에 대한 우리의 준비는 믿음이 없는 이 세상의 어둠을 견뎌내기 위해서 훨씬 풍부해져야 합니다. 우리 등의 불빛을 보존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신랑이 오실 것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며, 또한 하나님의 미래와 다가올 세상의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입니다.

이렇듯 기대 가득한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이미 우리에게 현재 하십니다. 등불이 비췸으로 신적인 영광의 빛으로부터 어떤 것이 빛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어둠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믿음의 빛을 필요로 합니다. 20세기에 이런 어둠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단지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일어난 고통과 불행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2세기 전에 사람들은 이성의 빛을 통해서 계몽의 발전이 이 세상을 밝혀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이 여전히 어둡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의 생명을 값으로 치르고 자유를 오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단적인 예를 들자면 높은 낙태율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삶의 기준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것이 교회 내부까지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번 결혼하면 나뉠 수 없다는 가르침은 진부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기독교 자체가 이 세상에서 진부한 것으로 다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부활과 그 부활을 통해서 보증된 영생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취급됩니다. 그러나 이런 미래가 없다면 우리의 현재는 아무런 희망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과 그 희망의 빛을 굳건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그 희망의 빛은 세상의 어둠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방향을 분별하게 만듭니다. 다음 주일에 우리는 분명히 다시 대강절 양초에 불을 붙이고 성탄절을 향해서 나가게 될 것입니다. 목자들이 본 큰 빛을 향해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등은 그 빛을 받아서 새해에 이르는 길을 밝힐 수 있습니다.

(1997.11.23, 뮌헨, 마태우스 교회)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들

막 3:20-30

사랑하는 신학생 여러분,

마가복음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두 이야기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이야기의 요지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늘 이 아침 기도회 시간에 우리는 이 말씀을 세 가지 관점에서 잠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친척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완전히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판단은 어떤 한 사람의 행동이 그 사회의 관습적인 행태에서 벗어날 때 아주 쉽게 내려집니다. 물론 돌팔이 의사가 귀신들린 자를 고친다거나 혹은 어떤 사람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면 그런 행동을 완전히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것들과 의미 있는 것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약간 미친 것처럼 보인다는 건 당연합니다. 기독교가 오늘날 완전히 정상적이고 평범하게 보인다면, 이것은 곧 소금의 짠맛을 잃어버렸다는 걸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오히려 기독교인들을 무언가에 미친 것처럼 여기는 것이, 예를 들어 정치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대개 기독교인들에게는 훨씬 바람직합니다. 이 말은 곧 기독교인들이 현실 너머에 삶의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마가는 서기관이 품은 의심과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보도합니다. 마가는 두 가지 다른 반응의 전승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첫 반응은 자신을 향한 비난이 비논리적이라는 듯이 예수님이 완전히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치유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치유 행위에는 다층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사람들을 경악시켰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둘째 반응은 예수님이 오히려 적대자들의 논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활동에서 사탄과 싸운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이런 마당에 예수님 자신이 사탄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서기관들의 비난이 논리적일 수 있습니까? 이렇듯 논리적이지 못하고 실질적이지 못한 비난들은 교회를 향해서도 자주 제기됩니다.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저 합심 기도를 드리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예수님의 반응을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적대자들의 비난을 냉정하게 지적하는 것만이 실효가 있습니다.

셋째, 마가의 전승에 따른 예수님의 또 다른 하나의 대답은 가장 날카롭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신을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다고 비난하는 자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비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활동에서 자신을 알리신 영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어야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선포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인식하고 기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예수님의 운명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영이 실제로 활동하셨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논리 정연하게 제시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분명하게 바라보게 되고, 또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1960, 부퍼탈 신학교, 아침 기도회)

자유와 이성

막 5:1-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97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오늘 성서본문에 보도되어 있는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과 귀신 들린 사람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그리고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는 돼지에 얽힌 이 사건을 모든 게 사실이라고 믿어야만 합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볼만한 보도가 별로 없습니다. 이미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관한 전승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게네사렛 호수 근방의 가다라로, 다른 한편에서는 훨씬 내륙에 위치한 거라사로 거명됩니다. 저는 오늘 설교에서 일단 거라사로 부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신약성서의 다른 사건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서기자들은 그들이 보도한 그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복음서 기자들도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가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사건들은 어떤 다른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무언가 전형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곧 귀신을 제압하는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의 본문 사건은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치유 사건과 닮았습니다. 이러한 치유 사건들도 대개는 교훈이 될 만한 것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시각 장애인을 고치는 사건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의 시각 장애를 어떻게 고치시는가 하는 점이 설명됩니다. 그러니까 시각 장애인의 치유는 오늘 우리의 영적인 시각 장애도 역시 치유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마법사요, 엑소시스트로 일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은 평소에 볼 수 있었던 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연관된 이런 많은 치유 이야기 중에서 오늘의 이 이야기만큼은 어떤 분명한 사건을 정확하게 재현한 것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즉 오늘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는 어떤 사건의 전형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이 인간을 귀신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이 짧은 이야기에는 무언가 독자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다른 신약성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요소입니다. 기분을 풀어주는 이러한 내용에는 간혹 통속적인 익살이 포함됩니다.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나야만 했을 때 그 귀신은 비록 이 사람에게서 쫓겨 나오더라도 그냥 그 지역 어딘가에 머물러 있도록 간청했으며, 또한 새로운 처소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묘사입니다. 이런 익살스러움은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간 후 그 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죽는 장면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갔다는 이러한 묘사는 분명히 이 이야기를 듣는 유대인들의 기분을 흐뭇하게 만들어주었을 겁니다. 즉 이 사람들은 아마 거라사 지방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의 먹거리인 돼지가 손실되었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귀신들이 부정하고 하찮은 짐승과 더불어서 죽은 자의 세계인 오르쿠스(Orkus)에 빠져 죽었다는 상상으로 매우 즐거웠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유쾌한 이야기는 부활절 후 3번째 주일(유빌라테)인 오늘의 설교 본문으로 썩 잘 어울립니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은 곧 축제를 열어야할 기쁨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 안에서 자유의 영이 증거 됩니다. 기쁨이 없으면 그 어떤 참된 자유도 없습니다.

자유는 오늘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말하자면 귀신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약간만이라도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자유”라는 주제가 이 이야기의 초장부터 이미 확실하게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의 치유가 처음부터 언급된 것은 아닙니다. 귀신 들린 사람에게 이 자유는 이미 오랜 세월 이전부터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거라사 시민 사회가 그 사람에게 채워놓은 쇠사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이 귀신 들린 사람이 어쩌다가 운이 나빠서 이런 몹쓸 병에 걸렸다기보다는 이 사람에게서 어떤 보편적인 인간 속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자유와 해방이 긴급한 요청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귀신 들린 이 사람은 자신이 쌓아올린 교양 안에서 조금은 지루하게 살아가고 있는 거라사 시민들과는 달리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인간 속성의 상징이 되는 건 아닐까요?

여기 귀신 들린 이 사람을 아주 단순하게 정신병에 걸린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질적인 상황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귀신 들린 사람을 단순히 환자로만 생각한다면 건강하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이 사건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귀신 들린 사람의 모습에서 그것이 오늘 우리 현대인에게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합니다.

현대 심리학은 우리가 이런 문제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소위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람의 경우에도 자아가 자신의 행동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게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의 행동은 종종 자기가 대항하지 못하는 어떤 익명의 세력에 의해서 규정되곤 합니다. 인간의 공격적인 행동에 대해서, 즉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충동이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또는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인간에게 군림하는 돈의 힘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군림하는 자본의 힘을 얼마나 독특하게 악마적 색깔로 묘사해 놓았는지 보십시오. 돈의 익명적 힘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대적 삶을 어디서나 관통해나가고 있는, 우리가 포착해내기도 힘든 소외의 힘, 그리고 우리를 강압해 들어오는 광고와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어떤 힘의 지배,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신약성서 시대의 귀신 신앙으로 곧장 되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성서 본문이 다루고 있는 문제도 귀신 신앙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과는 달리 오늘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세력들의 작용에 대해 최소한 부분적일지라도 분석해낼 수 있습니다. 특히 그런 세력들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어떤 근원을 갖고 움직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세력들의 본성은 항상 초인간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한 행동방식이 그 개체의 행동에서 떨어져 나와 그 개체를 지배하고,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개체의 주변으로 전이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병적인 경우와 공격적인 힘이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본과 돈의 힘을 분석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만으로는 그런 세력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적인 분석만으로는 그런 종류의 세력들이 끼치는 파급력을 감당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민족주의적 망상이나 인종적 열광주의와 같은 매우 거대한 역사의 히스테리를 너무나 뒤늦게 알아차립니다. 그때는 이미 그 광기가 큰 불행의 상처를 남긴 뒤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면 귀신 들린 사람과 거라사의 유복한 시민들 사이에서 현저한 것으로 보였던 차이가 이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거라사 시민들도 역시 어느 정도는 귀신 들린 사람들이 아닐까요? 돈의 힘에, 그들의 공격성과 거짓 필요성에, 그리고 누가, 무엇이 예의 바른가, 혹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하는가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귀신이 들린 것은 아닐까요?

거라사 사람들도 귀신에게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 오늘의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귀신은, 혹은 수천의 귀신 집단을 뜻하는 레기온은 한 개인에게나 혹은 전 지역에 자리 잡고 활동했습니다. 아마 거라사 사람들은 귀신의 책동을 어떤 식으로든지 경험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책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든지 않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들과는 달리 귀신 들린 이 사람의 행동에서는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훨씬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향한 충동이 때로는 어떤 폭력성을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일단 자유를 향해 전진하고 있기는 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호흡하기 위해서 외딴 언덕에 나가 살고 있던 이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끔찍해 보였을 겁니다. 그는 분명히 정상적인 거라사 시민의 생활방식과 법칙으로부터 멀찍이 빗겨나 있었습니다.

조금 더 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그는 괴성을 지르고, 돌로 자기 몸을 내리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세심하게 주목해야할 현상은 그가 자기 자신을 돌로 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일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자기 만족감이 현저하게 부족했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방식에서 불행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거라사 지역의 전반적인 상황을 불행한 것으로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느낌은 당시 거라사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느끼고 있던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을 겁니다.

본문 말씀을 조금 더 읽다보면 이 사람이 입은 옷도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거라사에 살고 있던 교양인들은 이 모습을 보고 기절초풍했을 것이며, 그를 볼 장 다 본 사람이라고 취급했을 겁니다.

성서 본문이 끝으로 이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만약 자기 통제가 어렵거나 말을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병든 것으로 간주하고 요양소에 가두어 놓거나,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지만, 공식적으로 정신병에 걸린 것으로 판단해서 고립시켜버린다면 이것은 오늘 본문에 묘사되어 있듯이 곧 쇠사슬로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함으로써 그 증세가 훨씬 나빠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정말 아무도 놀라워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우리의 눈에 기이하게 보이는 그런 사람들의 현상을 무조건 병든 증거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쇠사슬로 채워버리는 조치는 그 당시 사회에서도 이미 가장 손쉽고 깨끗한 처리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귀신 들린 우리들은 쇠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서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과연 자유를 소유하고 있는지 아닌지 완전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전체 삶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귀신 들린 이 사람에게 오십니다. 이 이야기에 묘사되어 있는 예수님에 대한 설명은 다소간 그 당시의 역사적인 한계와 그 특징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할 내용이 못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완전히 대(大)엑소시스트로, 초능력적인 마법사로 등장합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벌벌 떨면서 싸움을 포기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위대성을 어떻게 드러내 보이고자 했는지 그 당시의 고대 청중들에게는 매우 분명하고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회에서 활동하는 귀신들은 유감스럽게도 주문 같은 것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대개는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도 그렇게 간단하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귀신들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정말 고집불통처럼 활개를 쳤으며 은밀하게 자기를 성취해 나갔습니다. 귀신들은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거나 너무 뒤늦게 무언가를 감지하게 될 때 가장 왕성하게 활동합니다. 이 귀신들은 우리 기독교 교회가 역사적으로 많은 악한 세력들과 타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일방적인 교리를 강요하고 선동적인 교회 정치를 강화함으로써 마녀사냥, 이단박해, 종교전쟁을 기독교 역사의 본질인 것처럼 몰아갔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 우리에게 붙어있는 이 시대의 귀신은 성서본문에 등장하는 귀신과 달리 그렇게 간단히 처리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자랑합니다. 바울은 이미 이 문제를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죄에 물든 우리의 육체는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회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위대한 엑소시즘(축귀)과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문제들을 순진하게 생각해버리면 언젠가는 마땅히 그에 상응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며, 우리 시대에 거듭해서 테러의 고통을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이따금 이곳저곳에서 미약하나마 약간의 엑소시즘이 이루어져서 우리의 기분을 풀어줍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는 완전한 엑소시즘은 이루지지 않습니다. 죄로 물든 육체는 곧장 죽음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죄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도 바울의 이런 생각에는 당연히 죽음이 최후가 아니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일어난 새로운 생명을 죽음에 맞서 희망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생명에 의해서 그는 이미 이 세상살이에서도 각각 새로운 생명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죽음의 공포가 휘두르는 힘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의 공포는 그 길이가 길면 길수록 우리를 더욱 확실하게 쇠사슬로 묶어놓으며, 또는 그런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경우라면 최소한 삶에 대한 욕망에 빠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 어떤 엑소시즘도 우리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해방 받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부활한 분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시며, 또한 우리가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생산해내는 현존의 과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그러나 부활한 분에 대한 이 믿음은 우리가 이미 모든 쇠사슬에서 면제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않습니다. 이 믿음은 희망의 방식으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이 희망의 방식은 언젠가 오리라는 막연한 시간을 통해서 값싸게 베풀어주는 위로가 아닙니다. 순전한 희망은 오히려 현재를 밝혀줌으로써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이런 변화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게 될지 오늘의 본문 사건에서 다시 한 번 배워봅시다. 비록 이 소외시키는 세력으로부터의 자유가 단순히 엑소시즘을 통해서도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을 우리가 그대로 따를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무언가 더 심원한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그의 생각을 존중해야합니다. 이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오늘 우리의 본문 사건이 가장 주목할 만한 요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자유를 갈구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어떤 방식이었든지 간에 그는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라사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일어난 일이 어찌된 것인지 호기심을 갖고 살펴봅시다. 거라사 사람들과 함께 그 현장으로 달려가 봅시다. 우리는 그곳에서 도대체 어떤 장면을 목도할 수 있습니까? 오늘 성서 말씀은 아연실색케 할 정도로 단순 명료한 답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평소에 잘 알고 있던 귀신 들린 사람이 이제 바른 정신으로 앉아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보도에서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이제 모든 게 정상적으로 되었고 모든 다른 사람과 똑같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거라사에 살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똑같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거라사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이라는 것, 그들의 이성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요? 귀신 들렸다가 제 정신을 차린 이 사람을 다시 보았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은 분명히 그 어떤 해명이 없는 한 이성적이었다고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서 올바른 이성을 찾아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지도 않았고, 그 일을 기뻐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거라사 시에 적합한 새로운 제도와 법을 제정해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통상적으로 현자에게 이런 법을 간청해서 사회의 공적인 생활이 정말 이성적이고 정의로운 규칙에 따라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거라사 시민들은 예수님에게 그 지역에 오래 머물러서 거라사 시가 이성적인 힘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것과는 정반대의 요구를 했습니다. 가능한대로 신속히 그 지역에서 떠나가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광란하던 사람을 정신 차리게 해준 것에 대한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반응일까요?

거라사 사람들은 분명히 무언가를 두려워했습니다. 한 인물이 미쳐서 광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들은 아주 익숙해 있었고 서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창졸간에 정신을 완전히 되찾아버린 것입니다. 거라사 시민들은 이 사실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세계의 질서가 혼란스럽게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거라사 시민들의 태도는 분명히 그럴만한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들의 의례적인 세계 구분에 매달려 보려는 사람들은, 특히 자기 집단에 속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구분하는 것에 집착하던 사람들은 늘 그렇게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그들이 이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렇게 된 상황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한 때 광란에 빠져 날뛰던 사람이 이제 정신을 차리고 앉아있다는 상황이 그들에게는 역시 그렇게 아주 익숙하거나 당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귀신 들렸던 우리의 이 친구는 이제 다른 사람들처럼 그곳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이제 정상적으로 옷을 차려 입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완전히 벌거벗은 채, 혹은 반쯤 벗은 채 이리저리 달음박질하거나, 전장에 나선 사람처럼 몸을 울긋불긋 치장하거나, 끊임없이 울부짖는 소리를 지르면서 자유를 달라고 시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이제 정말 자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앉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앞서 거라사 사람들이 전혀 이성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친구는 이성적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성은 매우 희귀한 풀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일이 이성적으로 진행되고 인간의 행동도 당연히 이성적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이성은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처신하는가에 대해서는 반문해보아야 합니다. 이성은 이 이성과 가장 가까운 관계인 사랑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나타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이성과 사랑, 이 두 가지는 모두 자라기 힘든 풀과 같아서 이성과 사랑으로 행동한 사람은 그 지방에서 추방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거라사 땅에서만 일어난 게 아닙니다. 이런 일 자체가 어느 정도 역사의 일반적인 진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도 여전히 부당하게 취급당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참된 이성은 찾아보기가 몹시 힘들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이성은 그 지역에 익숙한 옷을 걸쳐 입는 게 안전합니다. 그렇게 하면 유별나 보이는 일이 적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대학에서도 항상 이성이 작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별로 요긴한 일도 아니면서 돈이나 삼켜대는, 혹은 오히려 손해를 끼치는 비이성적인 연구 프로젝트가 적지 않습니다.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비이성적인 조직들도 있습니다. 또한 이곳저곳에 비이성적인 연구원이나 선생들이 있고,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개가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사실이지만 비이성적인 대학생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날 대학이 완전히 이성적으로 운영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학이 늘 이성의 활동 영역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변화되려면 그 주장과 요구들이 미사여구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대학이 이성의 보루이어야 한다는 말에는 의심의 여지가 추호도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이런 일에 기여해야합니다. 이곳 대학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것이 바로 대학에 주어진 최고의 명예이며, 또한 대학에 맡겨진 요청입니다. 어느 정도나 이런 요청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가시적인 성과가 있습니까? 대학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이성의 징표가 보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말씀은 최소한 한 가지만이라도 이러한 징표를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성이 괴이쩍어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사실적으로 나타났다는 말씀입니다. 이성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등장합니다. 이렇듯 어울리는 옷을 준비하는 일이 항상 최신 유행을 따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이것이 곧 이성을 차렸다는 충분한 표식이라고 결코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이 옷을 단정하게 입은 것만 갖고는 세련된 거라사 시민들과 외면적으로 전혀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질문해봅시다. 앞서 광란에 빠졌던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신을 차리고 그렇게 앉아있는 것 이외에 더 이상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오늘 성서 말씀에는 약간의 보충설명이 있긴 합니다. 치유된 이 사람, 이성을 찾은 이 사람은 예수님 편을 들게 되었으며, 쫓겨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렇게도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제자가 되기를 원했는데도 예수님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더 이상 깊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 짚어봅시다. 거라사 시에서 이성은 자명하지 못했습니다. 자유가 이성적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자유와 이성을 찾은 우리의 친구는 거라사 사람들에게 선교사, 즉 설교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과연 오늘날 어떤 설교자가 이럴 수 있을는지요?) 인간이 자유와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 설교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이 과연 거라사 시민들에게 충분히 이해되었을까요, 아닐까요? 그 말을 들은 거라사 사람들이 도대체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을 그냥 묻어두어야만 할까요? 그들이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시민이라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에게 그야말로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에 자유와 이성에 대한 이 사람의 말이 기이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종교적 장광설화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것은 특별한 종교적 요구 전반에서 본다면 아주 미미할 뿐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 배후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거나 경제적인 이해타산이 감추어져 있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으로 흥미를 가졌던 거라사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그의 이야기를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종교적인 대화에서 기대되는 것이 정말 마음 중심에서 울려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좀 더 신앙적이고 경건한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이성을 차리고 그곳에 앉아있듯이 말짱한 정신으로 대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 심연으로 침잠하고, 무언가를 고양시키는 것들이 언급되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한때 광란에 빠졌다가 자유와 이성을 찾은 사람의 말을 듣고도 그저 기이하게 생각해버리고 말았지만, 결국 거라사 시를 포함한 게네사렛 호수 부근의 헬라도시들은 뒷날 기독교화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성과 자유의 승리입니까? 아마 이런 승리는 기독교 자체가 이미 시대적인 사조가 되었을 때, 그러니까 콘스탄틴 대제 이후 시대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거라사 사람들은 결국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자유와 이성을 위한 그 무엇인가를 발견했을까요? 혹은 그들은 자유와 이성에 관한 것들이 믿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까요? 침울한 사실주의가 바라보듯이 세계 진행의 개연성은 확실히 이런 기대와 상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사건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유가 이성을 통해서 나타나는 곳에서는 무언인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개연성에 맞섬으로써 모든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며,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실행하는 방식으로는 이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이성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인간 세상에서 당연히 일어날 만한 일이 아니며, 이해될 만한 일도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라사 사람들이 기독교화 되었을 때 그들은 기독교적인 시대사조만 따른 게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 자신에서 자유와 이성을 발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성과 자유가 이 세상 안에서 특별한 사건이 되었다는 이 사실은 무언가 불가해한 일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것이 인간의 이해 능력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은 이성적인 일입니다.

모든 인간의 이해 능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아멘.

(1970.4.19,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 개강예배)

빈 무덤

막 16:1-8

우리는 오늘 기독교 절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날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이미 바울이 언급했듯이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 쓸모가 없을지 모르며, 우리가 축하해야 할 게 아무 것도 없을지 모릅니다. 부활절이 없는 성(聖)금요일은 예수님이 이 세상의 현실 앞에서 파멸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겠지요. 그러나 이제 부활절 아침의 빛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단지 하나님에 대해서 명명백백하게 언급하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 자체 안에서 말씀하셨으며 행동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극복하신 부활절 승리의 빛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더 이상 하나님이 무기력하다는 증거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향한 비밀 가득한 하나님의 우회로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 우회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부활절로 인해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소름 끼칠만할 뿐만 아니라 매우 복된 의미가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이렇듯 한편으로는 소름 끼칠 듯이 두렵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아주 복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죽음의 능력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허물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절 아침에 예수의 무덤에서 돌이 치워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무덤에 있는 돌들을 치워버렸습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인들에게 임하는 부활의 기쁨입니다.

이런 부활절의 기쁨에 대한 기다림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한 상태에서 앞서 제가 읽은 성서 본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여인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한 것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는 마가복음의 본문에서 이런 부활절의 기쁨이 전혀 느껴지지 않다는 사실 말입니다. 천사의 말만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이지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런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부인들이 놀랐으며 두려워했으며 전율과 공포로 인해서 무덤 밖으로 도망쳤다는 보도만 듣습니다. 이런 행동은 부활의 기쁨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백히 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기쁨에 토대가 되는 인식이 부인들에게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토대는 곧 부활한 분의 현실성을 말합니다.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무덤을 찾아온 부인들에게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런 사태를 서로 다르게 묘사합니다. 마가복음의 경우에 부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은 부활절 비밀의 초입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부활한 분의 계시를 향해서 훨씬 더 나가야 합니다. 이 부활 사건의 초입에는 분명히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부활절 기쁨이 밋밋해지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입에 발린 소리로 처리해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역시 부활의 생명을 향한 초입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또한 우리도 역시 재림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왜 놀라고 공포에 떨어야만 했을까요? 우리가 본문을 좀 더 정확하게 들여다보면 이 대목에서 두 가지 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논제는 여인들이 무덤에 당도했을 때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 논제는 천사들이 그 여인들에게 말했을 때에 관한 것입니다.

여인들의 반응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특별히 주목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천사의 복음 사신은 그야말로 즐거운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즐거운 소식 말입니다. 여인들이 이런 소식에 앞에서 공포의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무언가 곡절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우선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가서 보인 놀라움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여인들은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아직 놀라지 않았습니다. 무덤으로 오는 길에 이 여인들은 돌 때문에 걱정했었습니다. 그녀들이 무덤에 들어갔을 때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들이 기대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이 그녀들에게는 괴이쩍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더 이상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런 사건의 발전 과정을 알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순간에 여인들에게 모든 게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 가능성 중에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합니까? 여인들에게 괴이쩍은 것은 그 무덤 안에서 말하고 있는 천사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는 그 천사를 흰옷 입은 젊은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지나치게 목가적으로 상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개 천사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세기 화가들이 그린 여러 그림들을 생각합니다. 이들의 그림에는 천사들이 흰옷을 입고 무덤의 모퉁이에 앉아 있습니다. 실제로 천사와의 만남은 여인들이 여기서 경험했던 것처럼 매우 이상한 사건입니다. 이미 마태복음에서는 천사가 번개로 간주되었으며, 그래서 그들의 흰옷은 여인들을 눈부시게 했습니다. 늘 그렇게 묘사되고 있는 흰옷은 천사를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이 흰옷은 천사들이 나타날 때 눈부신 빛이 빛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마태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서 만난 바로 이상한 존재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상한 존재를 만나는 사람은 그가 만난 그 대상이 도대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가를 통해서 이런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천사였다고 말입니다. 그 천사의 말을 여인들이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들이 그렇게 공포에 질렸을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보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오늘 우리에게는 천사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인들이 발견한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거기서 무엇이 발생했는지 여인들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우리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이상한 사건을 경험하는데, 그들에게는 이것이 이성과 오성을 초월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다음에야 비로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그리고 왜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는지 분명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런 소식에 대해서 더 이상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오늘도 여전히 이런 소식들을 더 이상의 설명이 제시되지 않는 한 낯익은 사물의 질서 안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 일반적으로 자기의 무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결코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는 이런 세계에 단 한 번의 기회를 갖고 살고 있습니다. 만약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사람들은 분명히 시체를 도둑맞은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를 상상해본다면, 무덤에 묻힌 사람이 실제로 죽은 게 아니라 그냥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기 때문에 나름의 수단으로 무덤을 벗어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 세계는 애초부터 이런 방식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불안하게 할지도 모를 토대를, 그렇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어떤 토대를 거부합니다. 즉 사물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익숙한 사유를 벗어나게 할지도 모를 그런 토대를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토대는 우리 경험 세계에 있는 익숙한 궤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지금 예수님의 이런 빈 무덤에 대해서 더 이상 놀라지 않습니다. 그와는 완전히 반대로 우리는 그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인들이 기이하게 생각했던 그 사건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이 여인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은 분명히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나시어 나타나셨던 사도들의 복음 사신을 통해서 예수님의 무덤이 왜 비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복음 사신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빈 무덤을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어떤 사실을 명백하게 해명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발견이 안고 있는 애매성은 여인들의 충격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며, 또한 여인들에게 나타났던 그 이상한 존재의 느낌을 설명하는 데 필요합니다. 예수의 시체는 강탈당한 것입니까? 또는 예수는 죽지 않았던 것일까요? 또는 모든 익숙한 준거들을 무력화하는 어떤 것이 작동한 것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빈 무덤은 그것 자체로만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부활의 증거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부활절 신앙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자로 보이셨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빈 무덤은 우리의 부활절 신앙을 위해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의 발견에 대한 보도가 복음서에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결국 더 이상 단순히 순수 영적인 사건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한 이런 소식에 무엇인가를 첨부하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현현을 이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의 설명으로 간단히 끝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현현을 예수님의 무덤이 갑자기 비었기 때문에 벌어진 환각쯤으로 간단히 설명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이 육체를 가진 현실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명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 진술한 그 현실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육체의 현실성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는 차원에서 우리의 신앙에 그 의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의 토대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이러한 빈 무덤은 그것의 모든 애매성 가운데서도 우리 역사의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후기 공동체에 의한 전설일지 모른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이런 비판자들을 비판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주장들은 그렇게 믿을 만한 게 못됩니다. 1세기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빈 무덤을 사실로 인정했다는 사실은 매우 특기할 만합니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단지 다르게 해석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을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제자들을 의심했다는 사실을 듣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옮겨갔다고 말입니다. 요한복음서가 전하고 있듯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단 한 가지 사실만 논쟁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즉 기독교 편에 속한 사람이나 적대적인 사람이나 모두 예수님의 무덤을 알고 있었으며, 그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결국 여기서 논의 핵심이 되는 질문은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이런 무덤을 여전히 알고 있거나 또는 알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좋은 근거들이 있습니다. 기원 후 4세기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인들의 전승에서 예수님의 무덤이 있던 자리라고 여겨졌던 예루살렘의 한 장소에 무덤 교회를 세우게 했습니다. 물론 4세기라는 세월이 기독교 공동체의 기억을 혼미하게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직접 가서 무슨 다른 대안이 가능한지를 깊이 생각해본다면 예수님의 무덤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만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 콘스탄틴 황제는 바위를 깎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무덤 교회의 중심에는 묘실(墓室)이 있습니다.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는 제거되었고, 묘실은 성지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빈 무덤의 사실이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 경험의 전복입니다. 이 전복은 부활 복음에서 온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 생명에 관한 최종적인 말이 아니라면 우리 생명의 준거는 달라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구원을, 즉 참된 생명의 충만함을 모색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을 뛰어넘는 다른 세계를 더 이상 바르게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다소간 우리 시대의 이런 사태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생명의 완성을 분명히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이런 세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이 세상 안에서 생명을 완성시키는 도구적 기능의 공동체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 사신을 통해서 보다 나은 인간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 같은 것입니다. 만약 이런 시도들이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에 대한, 즉 죽음을 벗어나는 생명에 대한 소식에 명실상부하게 근거하고 있지 않다면 기독교의 복음 사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은 결국 죽음을 뛰어넘는 이런 소식에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이런 소식에 결집됩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 생명의 준거들은 마땅히 달라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단지 이 세상에서만 그리스도를 희망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모든 것들은 죽기 때문에 완전히 현실적인 것처럼 간주되는 것들도 역시 생명의 의미를 획득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죽음을 그렇게 지나치게 겁내는 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로 앞서 부른 찬송가 가사의 내용처럼 진리는 이 세상의 마지막 때 이 세상의 영주들의 힘으로부터 생명의 세계로 돌입하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진리를 명백하게 알고 있습니다. 즉 그는 우리 생명 너머에 있는 마지막과 그 위력을 극복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생명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죽음을 이기는 힘과, 또한 그 죽음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희망은 명실상부한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땅의 생명에 대한 거짓된 희망 앞에서 자신을 지켜야 하며, 참된 생명을 숙고함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가장 확실한 것들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이런 숙고야말로 애초부터 기독교인들을 다른 이들과 구별하는 요소였습니다.

무덤가에서 여인들이 놀랐다는 사실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봅시다. 그녀들이 무덤에서 천사들의 복음 사신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전율과 충격을 받고 예수님의 무덤에서 도망쳤을 때 무언가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있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말한 것에 대해서, 즉 천사의 말로 들렸던 그런 것에 대해서는 그 여인들이 오늘 우리보다 훨씬 분명하게 인식했습니다. 말하자면 죽은 자들이 살아나기 시작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과 그들의 기대에 따르면 이것은 곧 세계 심판의 시작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똑같이 그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여인들을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도록 했던 그것은 예수님이 가까이 임한 심판 앞에서 느꼈던 전율이었습니다. 그 전율은 예수님이 절대의 심연에서 경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도 기독교는 부활한 분이 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서 있었던 그런 단계에 서 있습니다. 거기서 부활한 분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부활절 아침의 태양은 인간의 모든 불의를 파멸시키는 거룩한 심판이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의 불의를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이 처리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그 심판의 미래가 충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고 심판자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던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간들이 그에게 가한 모든 고난에 불구하고,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이 늘 거듭해서 그에게 가한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자신과 하나가 되도록 초청하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이 가하는 충격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복음서는 바로 그 부활하신 분이 제자들과 함께 할 만찬의 친교를 준비하셨다고 보도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님이 그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보고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무덤에 간 부인들이 서 있었던, 그리고 부활한 현실성이 아직 준비되지 못한, 그래서 그의 주권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여전히 전율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단계를 벗어나게 한 것입니다. 공동체에 있는 부활의 기쁨은 부활한 분이 우리에게 만찬의 친교를 계속해서 베풀어주셨다는 사실에서 성취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일치함으로써 죽어야 할 생명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이 만찬은 예수님에 의해서 처음에 베풀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1979년 부활절, 로흐함)

높은 곳에서 오신 귀한 분

눅 2:8-20

기독교 절기 중에서 성탄절은 매우 특별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유보되거나 훼손될 수 없습니다. 성탄 장식으로 반짝이는 네온등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대강절 화환에 담겨 빛나고 있는 촛불이 희미해질 수는 없습니다. 성탄절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단지 성탄목을 환하게 비추어주는 화려한 빛의 분위기 때문일까요?

고대 기독교에서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함으로써 세계가 변화되었다는 의미의 축제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한 해의 전환점으로서 태양이 새로 태어난다고 여겨졌던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킨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기독교 이전에도 사람들은 로마의 달력에 따라서 그 날을 축제의 절기로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구유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핏줄과 연결되셨다는 뜻인데, 고대 기독교는 이 하나님의 아들을 참된 태양으로, 즉 가시적 태양에서 참된 모상과 비유를 갖고 있는 구원의 태양으로 생각했습니다. 태양이 천체의 순환을 지배하고 있듯이 거룩한 로고스인 하나님의 아들이 전(全)우주를 통치한다고 말입니다. “모든 세계 순환을 유지시키는 분이 마리아의 자궁에 계십니다.” 그분은 이제 신적인 사랑의 깊이에서 한편으로는 거룩한 능력과 영광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구유의 아기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이런 사건에서 알려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를 대비시킴으로써 성탄절 절기의 특별한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성탄절은 최근에 점점 더 가족 중심의 축제로 변하고 있습니다. 구유의 아기를 중심으로 모여든 성(聖)가족 안에서 모든 인간 가족이 참된 가족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불빛을 통해서 고양될 수 있습니다. 이 불빛은 구유에 누인 아기의 얼굴에서 반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 장식을 한다, 선물을 산다 해서 지난 몇 주간에 걸쳐 떠들썩했던 그 소란스러움으로부터 격리되는 이 고요는 성탄 축제에 아주 잘 어울립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탄은 현대 기독교에서도 역시 세계 전환의 축제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이 세계 전환은 이 아기의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생기(生起)가 되게 합니다. 이것은 한 해의 소요로부터 하나님의 안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증오와 논란과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하나님의 평화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평화는 마지막 때 임하게 될 구원의 미래로서 인간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이 세계 전환은 이미 이 아기와 더불어서, 그리고 이 아기의 탄생으로 인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평화가 이미 현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세계가 여전히 전쟁의 외침과 인간에게 가해지는 모든 비열함과 잔혹함으로 채워져 있지만 말입니다. 구유에 둘러선 성 가족은 하나님의 평화가 개시되는 장소입니다. 매년마다 반복해서 모든 가족이 거기서 한 빛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은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구유의 아기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실입니다만,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생명으로부터 발생하는 생명의 기적은 새롭게 태어나는 모든 아기와 더불어 시작됩니다. 이런 아기와 더불어 이제 보다 심원한 의미에서 새로운 생명이 개시됩니다. 즉 하나님과 그렇게 오랫동안 분리되지 않은, 죽음의 밤에 떨어져버리지 않은 생명이 말입니다. 이 아기가 살아가는 길은 십자가와 죽음의 길만은 아닙니다. 이 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절로 이어집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죽어야 할 우리의 생명을 향한 약속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약속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 몸이 변화되고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늘 푸른’ 성탄목이 원래 이 아기의 탄생으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구유의 아기가 야기하는 구원의 미래는 비밀 가득한 방식으로 이미 베들레헴의 외양간에 펼쳐진 장면을 비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은 이미 성탄 전야에 하나님의 명성과 영광을 찬양하고 있으며, 목자들에게 땅의 평화가 임했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늙은 시메온은 이 아기에게서 구원이 시작된다고 예언합니다. 이 구원은 “민족들에게 계시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광이 임하게 될 빛”으로서 하나님이 모든 민족들 앞에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이 아기의 탄생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이 인간들은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만을 모색하거나 자기의 생명을 성취해보려다가 세계의 잘못된 유혹에 빠져서 결국 죽음의 밤에 떨어져 버린 이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아기를 통해서 모든 인간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에서 존귀한 분이 우리를 방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의 참된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성탄절을 맞아 선물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전통도 역시 이런 이유입니다. 이런 선물은 성탄절에 아들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향이며 그 징표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이 기쁨은 기독교인의 삶을 관통합니다. 이 기쁨은 매번 성탄 축제 때마다 갱신됩니다. 이런 기쁨은 세계의 슬픔에 의해서 결코 소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심으로써 인간에게 개시된 구원은 은폐의 방식으로 발생했습니다. 이런 사태는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인해서 기독교 신앙의 모순을 지적하곤 합니다. 교회는 이 세계를 파라다이스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처럼 선포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세계의 고통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생명을 뛰어넘는 희망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생명에게 빛과 신뢰를 주십니다. 인간은 이 좋은 시대에 외적인 복지를 향상시키고 시민사회의 안전망을 구축함으로써 흡사 하나님이 없어도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심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종종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아주 간단히 그의 약함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탄절 축제의 빛은 하나님이 매정한 세계의 겨울과 어둠 가운데서도 구원의 토대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왜 은폐되어 있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고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어둠은 미래에도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년 마다 다시 성탄절 축제를 기다리며, 가장 아름다운 성탄절 찬송을 부릅니다. “황혼이 찾아옵니다. 가장 아름다운 자랑거리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에게 머물러 주십시오. 이제 곧 저녁이 됩니다. 당신의 빛을 여기 땅에 사는 우리에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1992년 성탄절)

축복선언

눅 6:20-22

사랑하는 신학생 여러분,

오늘 이 아침 기도회 시간에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말씀에서 예수님의 축복선언이 제시하고 있는 강력한 힘은 정말 순수한 약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요구되지 않는 순수한 약속이라고 말입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은 아무런 부가적 행위가 없이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도 이 약속은 유효한 걸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 거론된 사람들처럼 정말 가난합니까? 굶주리거나 울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미움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당합니까? 우리는 오늘 예언자들이 당하는 운명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솔직하게 생각해본다면 결국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축복을 선언한 그런 이들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까?

이 축복선언은 기독교의 희망이 선포되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가난, 굶주림, 그리고 박해가 있는 곳에서도 항상 가장 강력한 빛으로 증거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 사신은 어둠의 시절을 관통해야만 가장 믿을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어둠이 짙은 곳에서 교회의 선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가장 분명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런 어둠의 시절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축복선언은 삶의 한계상황을 예비하는 비상식량이며, 몹시 예외적인 경우를 위한 위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는 일종의 불안이 엄습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좋은 조건에 자족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상황이 예수님이 축복한 이들과 결코 같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축복한 이들의 태도에는 과연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이 화를 선포한 이들의 태도에는 과연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 축복말씀은 이 세상에 처한 자신의 자리를 고향으로 여길 수 없는 이들에게 유효하며, 또한 돈벌이나 쾌락, 출세와 오락을 쫓아다니는 데서 비켜나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대망 하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또한 반대로 예수님이 화를 선언한 말씀은 이 세상에서 이미 자신의 부만 있으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이미 자기의 것으로 배부른 이들, 그리고 약한 사람들을 조소하는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화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것 같은 태도로 살아가는 시도가 오늘날 너무나 강력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오늘날 자신의 지상(地上)적 삶에서 가능한 최대한으로 생명을 채워보려고 노력합니다. 현대의 기술과 경제는 배부름과 오락의 수단을 풍부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이런 상품을 통해서 만족할 수 있으려니 상상하게 만듭니다. 이런 점에서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야할 기독교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 제공해주는 것으로 인해서 길을 잃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뛰어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지향해 나아가지 못하면, 즉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우리의 인간 실존은 상실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이것은 오늘날 이처럼 풍요로운 시절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환경 가운데서 명백해져야합니다. 즉 우리의 행복이 흡사 그것에 달려있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들 속으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축복말씀은 사실상 종말의 불빛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비추는 빛은 바로 종말의 불빛을 가리킵니다. 이 빛은 현현절에 많이 언급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미래에 돌입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더 이상 현실성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 구원을 모색합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 실존의 개방성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질식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자, 우는 자, 박해받는 자들이 복을 받게 되리라는 이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틀림없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축복말씀은 가난한 이들이 그 가난을 극복해나가도록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도와주기보다는 그저 그들을 말로만 위로해주는 매우 무책임한 태도이며, 어쩌면 오히려 그들을 우롱하는 처사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나님 통치의 미래를 확고하게 견지해야만 하며, 우리의 모든 행위에서 그 미래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가는 그 길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될 것입니다.

(1961.1.16)

이웃으로부터의 자유

눅 14:25-33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조급하고, 거의 불경스런 투로 깨어버린 인간적 연대는 사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친밀한 요소들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 친척과 형제 및 자매 상호간의 관계가 그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이 관계가 오늘보다 훨씬 공고했으며, 아주 기본적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그 이외에도 직업적인 사회관계나 여러 친목 단체를 차례차례로 열거하실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중에서도 가족 간의 관계를 두드러지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관계야말로 항상 특별하게 밀착되어 있으며, 거의 의무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계명의 다섯 번 째 계명에서도 보듯이 이 가족관계를 경홀히 여기는 행위는 중죄로 다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이 가족 간의 연대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변치 않고 증명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에 이런 말이 나돌았습니다. 부모, 자녀와 형제 및 자매로 이루어진 단란한 가정은 이 험악한 세월에서 안식과 인간다움을 제공하는 오아시스라고 말입니다. 이런 단란한 가정은 오늘날도 역시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출세를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삶을 의미 있게 지탱해주는 근본입니다. 부모의 행복이 아닌 자녀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부 상호간에 자신들의 삶을 성취해나갈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을까요? 가족은 분명히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안전한 울타리 노릇을 합니다. 이 안에서 자녀들은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주변 세계를 신뢰하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가족적인 삶의 편안한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종종 실망으로 변합니다. 가족 공동체에 대한 배려나 책임은 오히려 짐이 될 수 있으며, 자신이 누려야 할 자유가 제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개인들은 대개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가족 공동체의 따뜻한 관계 속에서 훨씬 풍부하게 삶을 실현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가족 간의 연결을 해체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은 더 할 나위 없이 매우 냉정하게 말씀하신 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병행구는 그저 이렇게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입니다(마 10:37). 그런데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 딸과 자녀들, 형제간의 삶을 미워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이 모든 관계를 끊어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듯 혹독하게 말씀하십니까? 이것은 원래 예수님이 선포한 사랑하라는 복음 사신과 나무나 크게 상반되는 말씀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이렇게 저렇게 밀착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요구일까요? 만약 우리가 이런 주변 사람들을 거부해버려야만 한다면 도대체 어떤 인간적 관계가 절대적인 효력이 있는 걸까요? 혹시 예수님이 생각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아무 생각 없이 들어주는 게 아니라는 뜻은 아닐까요? 만약 예수님이 가장 가까운 가족의 이런 요구를 거절하신다면 다른 사람들의 요구야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사랑은 우리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우리가 저항하지 못하는 연약함과 혼동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부인하는 일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는 저항할 수 없다.”는 니체의 진술은 예수님이 선포한 사랑의 사신을 연약한 무저항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물론 니체만 오해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답변은 니체 같은 이들의 모든 해석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기준은 분명히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따라주는가 아닌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하신 말씀도 이에 해당합니다. “누가 네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도 주며, 누가 오리를 함께 가자고 하면 십리를 함께 가시오.”(마 5:40,41). 이러한 가르침들을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서, 이웃이 요구하기만 하면 아무 망설임 없이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담긴 절대적인 연결을, 그 혈연적인 연결까지 깨어버리시는 걸까요?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적 관련들이 전혀 의미 없는 것들이라고, 또한 전혀 구속력이 없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유나 재물이 무조건 배척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어느 부자 농사꾼의 잘못은 그의 재물에 있었던 게 아니라 그것을 신뢰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가족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경우에 이 가족적인 연대는 그 가족 간의 삶에서 모색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가족의 삶에서 궁극적인 생명을 성취해보려고 할 경우에는 가족 간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부부 상호간에도 종종 갈등과 실망이 생깁니다. 또한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불효를 탓하며 실망합니다. 그 자녀들이 성장해서 독립적인 개체가 되면 부모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발달의 자연적인 과정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과도한 요구들을 다른 곳으로 돌리십니다. 인간이 규정되어야 할 심연을 실현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십니다. 삶의 의미는 부부나 가족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삶의 의미가 재물의 소유나 재물을 통한 즐거움에 담겨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의미를 궁극적인 데서 발견합니다. 이웃의 요구를 만족시켜주고, 또한 유복한 생활조건이 성취되어도 사람들은 내적으로 불안해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는 어떻게 심연을 성취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가장 우선적입니다.

가장 깊고 궁극적인 인간 생명의 의미가 성취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는 예수님이 전하신 사신에서 언급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늘 찾으려고 애쓰는 결정적인 평안과 생명의 성취를 하나님 안에서만 이미 지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전개되는 인간의 공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인간의 정의와 평화도 하나님이 인간을 통치하는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 우리의 시간과 능력, 그리고 우리 자신의 안락함에 대한 그 어떤 인간의 요구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매우 냉정하게, 그리고 매우 도발적이고 배타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예수님의 사신은 십계명의 첫 계명이 말하는 배타성과 같은 요구로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한 그 어떤 경쟁적인 요구도 참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무엇보다 우선합니다. 인간은 그의 부르심에 답하기에 앞서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이 비록 당장 처리해서 좋은 성과를 내야할 농사일이나 소를 파는 일이나 밭을 가는 일처럼 중요해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거나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경건한 예절의 의미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보다 우선적으로 실행되어도 된다고 결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첨예한 갈등이 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한번쯤 있게 됩니다. 그때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뒤편으로 제쳐놓아야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가까운 가족과 친척을 더 이상 자신과 관계없는 이들처럼 대하셨습니다(눅 8:19 이하).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따르기 위해서 어머니와 형제들과 헤어졌습니다. 이제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형제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이런 배타성은 이 세상에서 거듭해서 충격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짊어져야만 할 짐, 곧 ‘십자가’입니다. 이러한 배타성 요구는 어떤 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가에 대한 고백과 그 해명도 몹시 힘들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있었던 그런 충격이 이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배타성 요구를 과감히 실행하여 이 사회를 격분케 하는 경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납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기독교의 이런 배타적인 태도를 주로 비판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배타성 요구에 의해서 기독교가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이 힘을 통해서 기독교는 다른 모든 진리를 압도하고, 그리고 살려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시는 나머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소홀히 여기시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서 최우선적인 자리에 있을 때만 인간의 삶은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이 기독교의 유일한 내용으로 설명되는 곳에서 믿음은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그뿐만 아니라 결과적인 일이지만 사랑도 역시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이웃 사랑이 인간의 실존에 휩싸여버리기 때문인데, 이 인간 실존은 그 뿌리가 너무나 박약합니다. 하나님이 우선하는 곳에서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우선하는 곳에서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토대를 둔 세계의 미래, 즉 새로운 생명이 전개될 세계의 미래가 우선하는 곳에서만 다른 이들을 부패시키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하는 기독교의 인간 사랑이 역동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어떤 값을 지불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무언가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런 포기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는 자는 어느 누구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포기는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성을 쌓는 일과 전쟁을 준비하는 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포기와 금욕은 그것이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경우에만, 또한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수적인 수단일 경우에만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방랑 설교자였던 예수님의 길을 따르려는 사람은, 그리고 예수님과 연결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소유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가족에 대해서도 똑같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꺼이 감당해야만 했던 짐입니다.

세상의 여러 요구 앞에서 우리가 난감해지는 이유는 주로 우리가 그런 것들을 거절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데에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심각한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현재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우리가 확인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이것이 최소한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만은 확연했습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님이 선포한 사신 안에 현재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바친다는 것은 모든 길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은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현재 하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성만찬으로 현재 하는 공동체 안에서 말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요구는 교회에 완전히 헌신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오늘도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모습을 기독교의 공동체적 삶과 그 업무를 올곧게 세워나가는 데서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날 지역교회와 전체 교회는 새로운 사회와,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과 계속적으로 일치를 도모하지 않고는 더 이상 교회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삶을 교회라는 기구의 틀 안에서만 이끌어나갈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로서는 세상과 경쟁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특별한 기구로서 교회는 사회와 인류를 위해서 어떻게 온전하게 봉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적인 삶의 실현에서 그 현재적 모습을 획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에 대한 가장 오래된 성서 말씀은 이제 우리와 새로운 관련성을 맺게 됩니다. 전 인류를 포괄하는 평화의 나라에 대한 희망, 사회 정의를 올곧게 세워나가는 희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희망은 곧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유래하는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희망과 관계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하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데 어떤 값을 지불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법들이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서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혹은 너무 불확실하며, 또한 무계획적으로 진행됩니다. 이런 일은 이제 더 이상 개인 윤리로 넘겨지면 안 됩니다. 개인 윤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사이에 놓인 거리는 아주 명확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기독교 윤리의 한계라는 명분하에 너무나 안이하게 이 세상을 개인적인 행위의 영역으로 내팽개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적 실존의 값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모든 삶의 영역을 예수님의 사신이 말하고 있는 배타성 요구로 끌어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만이 아니라 직업적인 삶도 역시 그 중심을 하나님의 통치 안에 두어야 합니다. 삶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든 각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이 다른 것처럼 제 각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 삶의 순환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서 완전히 정리될 것이며, 우리의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그 미지근함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불신 받고 있는 바인데, 바로 그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결과적으로 대학 사회에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학문작업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학문적 방법론과 전문 영역은 하나님의 한 진리를 수행하기 위해서 유별난 법칙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영적인 삶에 대한 예수님의 배타성 요구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적 삶을 성취해나가기 위한 그 작용은 이미 이런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히 어떤 충격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학문 현장에 내재해있는 규칙을 방해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신의 배타성이 옛날부터 불러일으켜 온 분노에 상응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배타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학사회에 몸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당연하고도 구체적인 귀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65.7.18, 마인쯔, 대학예배)

도미누스 플레비트

눅 19:41-44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다 보면 깎아지른 것 같은 키드론 계곡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도시를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좀 더 내려가면 벽으로 둘러쳐진 예루살렘을 조망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비슷한 높이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장소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 도미누스 플레비트(Dominus Flevit, 주님이 우셨다) 교회당이 서 있습니다. 기독교의 첫 교회당이라 할 이 교회 건물이 기원 후 5세기에 이곳에 건축된 것입니다. 누가복음이 서술하고 있는 그 장면을 바로 이 장소에서 매우 리얼하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감정 변화에 대해서 거의 보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표현이 두 군데 있지만, 웃으셨다는 표현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결코 웃지 않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복음서 기자들이 보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온 신인(神人), 즉 인자(人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인의 웃음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감에서 나오는 게 결코 아니며, 또한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터뜨리는 감정 표현도 아닙니다. 앞으로 세계를 심판할 분이 사람과 세계에 대해서 웃었다는 것은 시편 2편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의미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워 웃으시다가”(시 2:4). 야훼는 원수를 가소롭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야훼 심판의 박장대소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사실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예수님이 우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왜 우셨습니까?

1.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우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했다거나 죄책감 때문에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세 번 울었을 때 자기 선생님을 배신했다는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자기 민족을 위해서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의 표현이며, 면박 당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말씀은 냉혹한 분노에서 나온 게 아니라 절망적인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랑했지만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민족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민족의 멸망을 바꿀 도리가 없었습니다.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4절). 예수님의 눈물은 단지 예루살렘에만 해당됩니까? 그의 백성인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요? 아마 오늘의 기독교에도 분명히 해당될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임하게 될 구원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원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2. 예수님은 그가 선포한 구원을 자기 민족이 거절했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본문에 분명히 이렇게 진술되어 있습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42). 우리는 평화의 길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평화’라는 단어를 주로 정치적인 의미로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해석은 곁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정치적 평화를 선포한 분으로 오해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과 평화와 행복을 구분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구체적이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민족이 로마의 식민 지배 세력과 평화스럽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적대자들이 원한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해서 죽는 게 전체 민족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말입니다. 요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이것은 제사장 가야바의 진술이었습니다. 무엇이 평화의 길입니까? 혁명을 막아보려는 정치적 억압과 예방 조치가 그것입니까? 젤롯당 당원들이 시도했던 해방투쟁입니까? 적대자들로 하여금 평화가 깨지는 경우에 당하게 될 결과를 꿰뚫어보고 충격을 받게 하기 위해서 군비를 확충하는 것입니까? 또는 이와 반대로 군축입니까? 이미 획득하고 있는 평화마저도 훼손될 수 있는 모험을 수반한 일방적인 군축 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신(使信)은 이런 모든 전략과 엇갈립니다. 예수님은 자기 민족이 다른 방식으로 평화를 얻기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평화야말로 하나님의 민족이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참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민족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으로 돌아서는 일이 그들이 가야할 평화의 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평화의 길이 그들에게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私)적인 삶이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공(公)적인 삶에서도 전혀 다른 토대를 두고 살아갑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런 정서에 영합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단지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정치적 슬로건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중심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점을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정당들도 이런 사실만이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예수님의 눈물이 우리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교회는 무엇이 평화의 길인지 알고 있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교회는 정치적 평화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토대를 둔 평화는 최소한 우리 기독교의 고유한 삶에서 구체화되고 있습니까? 뿌리 깊은 기독교의 분리를 극복하는 일에 우리가 무력하다는 사실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하나 되기 원하시는 우리의 주님에게 돌아서는 일이 관건인 곳에서 우리가 얼마나 타성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지를 아주 명백하게 증명하는 징표가 아닌가요? 교회가 분리되어있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현상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은 일치를 열망함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열망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일치는 곧 우리 안에 있는 분열을 극복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바로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로서의 존재와 비존재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실제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교회는 분열의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 이미 충분하게 깨끗해진 걸까요? 그렇다면 분열은 이미 극복되었을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으로, 즉 예수님과 그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행위로 돌아서는 일만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오직 그래야만 기독교는 주님을 믿고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한 징표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일치를 위한 징표와 도구 말입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42).

3. 예수님은 그가 사랑하는 민족이 멸망당할 것을 내다보시고 우셨습니다. “이제 네 원수들이 돌아가며 진을 쳐서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쳐들어 와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 네 성안에 있는 돌은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 있지 못할 것이다.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3,44). 이 말씀에서 우리 기독교는 예루살렘이 기원 후 70년 로마에 의해서 정복당한 사실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비슷한 예언이 복음서에 몇 군데 더 있습니다. 이 예언이 과연 예수님과 직접 연관되어 있는지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성전과 도시가 멸망하리라는 예언을 말씀하시면 안 된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 도시와 민족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운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달려 있다고 분명하게 생각했습니다. 옳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의 복음 사신에 귀를 기울였다면 순교적 방식을 택한 젤롯당의 망상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젤롯당은 하나님의 나라를 폭력으로, 즉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킴으로써 견인해내려고 했습니다.

근대 세계는 종교와 정치, 그리고 하나님 신앙과 전체 국민의 역사적 운명 사이에 있는 이런 연관성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 신앙이 사적인 문제일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면 국민들은 이데올로기에 귀속됩니다. 또한 국가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사신이 배척당하면 국민들은 결국 나라를 대파국으로 몰아가는 젤롯당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4. 예수님의 눈물에는 자신의 사랑이 인간적으로 무력하다는 사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자기의 죽은 친구 나사로 때문에 베다니에 왔을 때도 이런 이유에서 울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갖게 되는 인간적 무력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이런 무력감의 순간은 영이 예수에게 임하여 자기 친구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능력으로 가득 찼을 때 순식간에 극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전에 가졌던 무력감은 그런 것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의 핵심도 결국 자기연민이 아닙니다. 또한 죽음의 힘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현상도 아닙니다. 그것은 곧 보복하지 않는 사랑의 무력감, 즉 사랑의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무력감입니다. 위대한 사랑과 높은 뜻의 노력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이들의 고루한 적대행위와 무감각 앞에서 파괴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무력감을 단숨에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력감의 고통은 감람산으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예수님을 체념에 빠지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사랑이 무력하다는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마지막 무력감에 이르기까지, 즉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에게 생명을 가져온 다른 사랑이 그에게 왔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생명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즉 예수님 사랑의 무력감은 곧 파괴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능력에 대한 징표가 되었습니다. 사랑이 배척당함으로써 무력감에 빠지는 곳에서도 사랑이 식지 않는다면, 누가 그 사랑의 능력을 훼손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사랑의 무력감은 곧 사랑의 능력을 드러내는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즉 강압적이지 않는, 그러나 생명을 변화시키는 그윽한 능력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와 아기 예수의 오심

눅 21:24-33

강림절(Advent)이라는 단어는 독일어의 도래(Ankunft)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강림절 절기를 매해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와 죽음의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축하하는 날로 지킵니다. 강림절 절기는 이런 사건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곧 ‘아드벤트’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문자적 의미에 어울립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이미 발생한 도래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가까이 이르렀음을, 즉 임박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강림절의 운동은 임박한 미래와 관계됩니다. 독일어 단어 Zukunft(미래)는 문자적으로 아드벤트에 대한 정확한 번역입니다. 여기서는 단지 멀리 떨어지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핵심이 아니라 오히려 오심에서 파악될 수 있는, 그것에 따라 개시되는 미래가 핵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구원의 미래는 이미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인격에서 이미 개시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탄절을 맞아 구유에 오신 아기를 축하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기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구원이 이미 우리에게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춥고 어두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직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여전히 죄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기다리며, 또한 그가 우리에게 약속한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비록 이것이 인간 의식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매년마다 다시 성탄의 광휘에 대한 기다림으로 물러가지만 말이다. 우리가 구세주의 도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개시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구유에 오신 구세주의 도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미래가 오시기를 주기도문을 통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미래는 아기 예수가 누운 구유에 비친 하나님의 빛입니다.

이처럼 이미 구세주가 베들레헴 구유에 오셨다는 사실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키는 대강절의 기다림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심판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교회는 이 세상에 임할 심판의 미래를 강림절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림절 두 번째 주일의 특별한 주제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설교의 본문은 바로 누가복음 21:24-33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이며, 이로 인해서 인간이 곤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읽어봅시다.

“사람들이 칼날에 쓰러질 것이며 포로가 되어 여러 나라에 잡혀 갈 것이다. 이방인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은 그들의 발아래 짓밟힐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 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들려 주셨다. “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나무에 잎이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 세상은 지나간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앞에서 기독교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중요한 단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만을 기다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우선 우리 기독교인들이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사실은 이 세상이 살기 좋게 늘 발전되어 간다고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도 역시 가능한 대로 궁핍 상태가 완화되도록 진력해야 합니다. 또한 인간의 생활조건이 향상되도록 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평화로운 공생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죄와 죽음의 세력이 이 세상에서 군림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악이 늘 새롭게 개입하곤 합니다. 공산주의가 와해된 이후 1989년에 많은 사람들은 평화롭고 행복한 미래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보스니아를 비롯한 지구 곳곳에서 내전의 충격이 가해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국면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세계가 멸망의 길을 가며, 따라서 우리는 이런 세계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징표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과 일치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틀림없이 소멸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계의 심판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대대적으로 정화시키고 창조 사건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단지 화장술과 같은 교정이 아니라 심연의 전복과 충격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에도 해당됩니다. 즉 해, 달, 그리고 별과 하늘의 능력들 말입니다.

오늘의 이러한 세계가 언제 결정적으로 변화하게 될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것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기독교는 이 세계의 종말을 가까운 미래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가까운 미래에 대한 기다림이 거듭해서 간직되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간을 아버지만이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36). 교회는 이 세계가 이렇게 유지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내 때문이라고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하나님은 새로운 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벧후 3:9).

예수님이 종말의 징표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조심해서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징표에서 세계의 종말을 계산해 낼 수 있다는 듯이 곡해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화과나무 비유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의 병행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은 도둑이 밤중에 침입하듯이 갑자기 임한다고 말입니다(12:39). 그런데 인간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그리고 불현듯이 심판자로 다시 오십니다. 그 분은 번개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온 하늘을 밝히듯이 그렇게 아주 분명하게 오십니다(17:24).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종말의 징표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가 언급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마 기원 후 70년 로마의 식민통치에 항거한 유대인의 봉기가 제압당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은 이런 역사적 파국을 현재의 전체 세계가 파멸할 것에 대한 징표로 받아들인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의 위기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개시와 연결되어 있는 결정적인 마지막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화과나무 비유가 말하려는 의미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아직 잎이 돋지 않은 상태라고 하더라도 그 줄기에는 물이 오르고, 여름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계의 위기와 파국에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준비됩니다.

이제 저는 두 번째 요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상의 멸망은 두려움이나 고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로 인해서 신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심판자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이에 대한 신앙은 거듭해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역사의 파국에서 확고한 용기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이러한 확신이 바로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은 세계의 종말에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미 오셨던 바로 그분입니다. 앞으로 오실 세계 심판자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바로 그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그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일치함으로써 죽음이 없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믿음과 세례를 통해서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을 위해서 세계 심판자가 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과 지상(地上)적 생명의 마지막이라는 그 시점에서 바로 서서 머리를 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가까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엇보다도 미래의 세계 심판자가 우리를 자신에게 부르시려고 구유의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이런 생명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성탄절이 오지 않았지만 이 강림절 절기에도 역시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우리와 세계의 구원을 발견하기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또다시 크리스마스를 향해 달려 나갈 수 있습니다. 아멘.

(1996년 강림절 두 번째 주일, 뮌헨, 마태우스 교회)

마음을 드높이

눅 22:14-23

우리가 예배드리러 나올 때 무엇을 찾습니까? 아마 이 문제는 모든 이들에게 제 각각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올바르게 드린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양시키는 일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염려와 진부성을 뛰어넘는 일말입니다. 이것은 곧 죽게 될 우리 생명의 유한성을 뛰어넘어 하나님에게로 고양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양은 영원한 분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기도를 드림으로써 실현됩니다.

성만찬 예전문에서 초청의 말씀은 분명히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 여러분의 마음을 드높이십시오. 이제 우리 회중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높였습니다. 이런 요청과 회중의 대답은 찬양으로 울려 퍼집니다. 이 찬양은 개별적으로 나뉘어졌던 우리 마음이 한 분 하나님께 고양되는 순간이며 수단입니다. 이것은 단지 성만찬 예식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찬양은, 특히 함께 부르는 찬양은 우리가 고양되는 것입니다. 목청을 다하여 모두 함께 힘껏 부르는 노래는 우리를 개인적인 자아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물론 오용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고조된 감정과 일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게 하고 부추기는 수단으로 오용되었으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일치를 이루는 이런 감정에서 늘 긍정적인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의 찬양에서는 거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더불어서 영원을 향해 고양되는 게 관건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배를 시작하면서 부른 찬양에서 시작됩니다. 거기서부터 이제 예배의 전체 사건이 찬양을 통해서 성만찬으로 초대하는 말씀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드높이!

위대한 독일의 한 사상가는 종교의 본질을 가리켜 하나님을 향해 고양(高揚)되는 것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우리의 유한한 현존을 영원이라는 사상으로 고양시키는 것 말입니다. 예배는 이러한 종교적 고양의 총괄 개념입니다. 또한 예배는 찬양의 중재를 통해서 고양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고양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결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닙니다. 이런 지상의 삶은 수르숨 코르다(마음을 드높이)에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매일 새롭게 해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일어납니다. 하나님에 고양되는 것은 감사의 형식으로 성취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인 주님께 감사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현존을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신 창조의 선물을 감사합니다. 이 창조를 우리는 즐거워하며, 그 창조의 선물로부터 우리의 생명이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우리의 현존은 여러 차원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며, 억압받고 있으며, 더욱이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감사의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납니다. 감사함으로써 창조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갖고 있는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은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찬양은 우리가 모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그 분에 대한 기림입니다. 그리고 창조자를 찬양함으로써 우리의 감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뛰어넘어 전체 창조에 이르기까지 확대됩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드리는 감사는 아들의 오심이라는 사건에도 특별한 방식으로 해당됩니다. 그 아들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두려움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그 불안이 곧 죄의 원천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이끌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영원한 하나님과 일치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죽음을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고난을 통해서,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일치될 수 있도록 우리를 고양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고양됨으로써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감사와 기억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때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감사를 기억할만한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있습니다. 우리가 차라리 망각되기를 바라는 혐오스러운 기억도 있고, 우리를 충격과 수치심으로 몰아가는 기억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벌어진 사건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새롭게 회복해 보려는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에서 일어나는 기억은 감사의 동기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게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를 통해서 규정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모든 분리가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 예배는 옛날부터 감사의 마음을 아뢰는 것, 즉 성찬식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특징들이 비록 로마 가톨릭 미사의 핵심이긴 하지만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받아들이기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것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거나, 또는 우리가 참여하는 성만찬 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모든 값을 치렀다는 명분으로, 인간의 감사하는 행위를 예배의 중심에 자리 매김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아룀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행동하십니다. 이 구원은 모든 감사의 출처이기도 하고, 우리가 감사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거꾸로 하나님의 행위는 감사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우리에게 수용될 것이며 획득될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의 말을 통해서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서 하나님에게 고양되는데, 이 감사의 말은 분명히 성만찬 제정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이 성만찬은 우리 주님이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신 예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식사에 대해서 설명하신 다음에 빵을 들어서 감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주심으로써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곧 유대인들이 식탁 앞에서 드리는 기도를 예수님이 드린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식탁 앞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고서는 결코 음식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그 기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왕이신 주님이시여, 우리의 찬양을 받으소서. 당신은 이 땅에서 먹을거리를 자라게 하셨나이다.” 이런 찬양의 형식에는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은총으로 주신 창조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이미 예수님이 드리신 감사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그를 기억하며 그의 식탁 자리에 참여하는 매 순간 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서 창조에 대한 감사의 말이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에 대한 감사로 확대됩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이런 회상을, 즉 이런 ‘기억’을 간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식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눅 22:19). 바울은 이 말씀에 첨가하여 이렇게 진술합니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시오.” 예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만찬에,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는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성만찬 예식과 성만찬의 일치라는 징표에 현재 함으로써 성만찬적 특징이 된 것입니다. 이 성만찬은 곧 예수님이 지상에서 행하신 일이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를 담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식탁에서 이렇게 부가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여 나누는 빵에서, 또한 우리가 그를 기억하며 마시는 잔에서 인격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구원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다는 보증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그의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우리의 식탁에 현존하십니다. 또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역사를 기억하는 일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구원 행위는 예수님의 역사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기억은 전체 예배를 관통합니다. 그것이 단지 성만찬 예식만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귀를 기울이는 성경봉독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기억을 제공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는 설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 영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사신(使信)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영을 통해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약속대로 이 식탁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우리의 인간적 현존에 보내시고, 또한 아버지가 보내신 목적대로 예수가 자기 생명을 내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같은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기억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고양되는 매개 수단입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성서를 읽고 그 말씀을 들으며,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높은 데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에게 두었습니다.

(1996.2.25, 뮌헨, 대학예배)

생명의 의미

요 1:9-14, 16

이제 시나브로 성탄절기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성탄절 전야에 성탄 등을 밝히는 일, 성탄절의 조용한 축제, 이런 저런 행사 준비에 애를 썼던 일들이 정리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성탄의 소란이 드디어 물러갔다는 사실에 대해서 금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까요? 떠들썩한 송년 모임, 대목을 보느라 분주한 상점, 여러 종류의 감상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성탄절에 이러한 것들만 보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것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들의 영혼은 성탄절기가 끝나갈 때쯤 공허해지기 마련입니다. 물론 성탄절을 대충 그렇게 맞이하고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올바른 태도인지 아닌지는 주고받는 선물의 기쁨과 성탄 등의 풍성함 속에 심원한 의미가 여전히 숨어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도 거의 똑같이 적용됩니다. 쫓기는 일상에서 겪는 답답함은 보다 심원한 의미의 바깥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의미는 곧 우리의 삶을 채우고 그 내용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이 현대적 삶의 배경이라고 본 이 심원한 의미는 이 바깥 면 뒤로 종종 숨어버립니다. 이것은 곧 공허감과 그런 특징으로 표현되는 자아입니다. 이런 것들은, 즉 생명의 의미만이 아니라 무의미와 고독은 축제의 절기로서는 한해의 정점이라 할 이 성탄 절기에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 경험됩니다. 그러나 무의미와 고독에 대한 경험이 우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모든 인간적인 삶에 영혼을 불어 넣어주는 이 심층의 의미를 신뢰할 수 없도록 강제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성탄절이 끝나 가는 이 마당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게 무엇인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절의 의미는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노래하고 있는 그 말씀입니다. 요한은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노래합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셨다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년 성탄절 때마다 축제를 여는 그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의미에, 그리고 우리 일상의 단조로운 반복에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우리의 삶에 내용을 채우는 의미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서의 첫 문장을 거의 습관적으로 이렇게 번역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첫 문장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로고스(logos)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로고스는 단순히 언어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언어들을 통해서 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의미를 뜻합니다. 이 경우에 의미와 언어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습니다. 우리가 그 어떤 현상에서 경험하는 이 의미는 항상 개체 사건을 뛰어넘으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라든지 “즐거운 성탄절을!”이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시다. 이때 이 사람은 단지 이 순간에만 이런 친절을 베풀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인사를 할 때는 이 순간을 뛰어넘어 무언인가를 표현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의미는 그 순간을, 그리고 그 의미가 우리와 마주치는 개체 사건을 뛰어넘어 버립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다는 성탄의 소리를 듣는다고 합시다. 우리는 말구유에 누워있는 이 아이를 모든 다른 아이들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자기 부모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태어난 아이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건의 의미는 그 구체적인 현상을 통해 우리의 삶에 개입하면서 그 현상을 뛰어넘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일들만 보는 사람은 이 의미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성탄의 의미도, 생명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 의미는 그 내용을 채우는 현실성의 심연입니다. 모든 현상의 의미가 눈앞의 사건을 뛰어넘기 때문에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언어가 필요합니다.

“태초에 의미가 있었습니다.”는 말은 곧 태초에 모든 생명의 내용과 의미가 채워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에 언급될 수 있는 현실성의 심연입니다.

모든 다른 현상들의 내용과 의미(Bedeutung)를 채워주는 이 궁극적인 의미(Sinn)는 성탄 사건으로 인해서 세상에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세상과 연대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은 거룩한 한 아이가 탄생했다는 사실에서 끝나버린 것은 아닙니다. 이 아이의 탄생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징표이자 예표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난 강림절 기간 동안 내내 하나님의 오심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강림(Advent)라는 말을 두 가지 각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과, 또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오심을 맞으러 나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오심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무의미와 고독을 종식시키고, 모든 고난과 모든 불의를 끝장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심, 하나님의 강림은 세상의 마지막 미래입니다. 그리고 이 미래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한번 현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미래를 맞으러 나갈 뿐만 아니라 이미 그 미래로부터 현재를 향해서 나아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말할 때 우리는 단지 말구유에 오신 아이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분과 부활한 분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 아침의 불빛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구유에 오신 아이로 인해서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오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비로소 죽음과 고난과 고독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또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그 어떤 궁핍이나 불행을 당하더라도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의미를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탄 사건을 통해서 세상과 관계를 맺은 신(神)적인 이 의미는 실제로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은 신적인 의미가 생명을 담지하고 있다고 찬양합니다. 우리는 이제 의미가 실현된 생명이 생명이라는 말을 의미로 충만하게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가 어떻게 생명과의 연관에서 빛에 대해 언급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의미 충만한 생명은 인간에게 빛입니다. 우리가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곳에서는 우리와 관련된 것들이 밝히 드러납니다. 또한 생명의 내용을 채우며 그 생명을 의미 충만하게 만드는 한 의미가 우리 현존의 전체 도정에 그 의미의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아직 대답하지 않은 질문이 있습니다. 성탄 사건으로 세상과 관련된 신적인 의미는 도대체 어디서 발생합니까? 요한복음의 찬양은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게 구체적이며 명시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본, 그리고 “충만한 은혜와 진리”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언급함으로써 해석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의 설명에 의하면 은혜는 하나님이 충만한 사랑으로 인간을 대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는 곧 이 하나님의 사랑과 연관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모든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그의 선택된 백성의 역사를 통해서 충만한 사랑으로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연관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오신 신적인 생명의 의미에 담긴 영광이 은혜와 진리를 제공하는데, 이 은혜와 진리가 어디서 생성되는가에 대해서 요한은 다른 구절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기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주셨다고 말입니다(요 3:16). 또한 요한일서에서도 이르기를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로 하여금 그를 통해 살게 하신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요일 4:9).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만물의 의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 자신과 하나인 각각의 의미,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울타리를 허물어내시고, 멸망당할 사람들과 하나가 되심으로써 표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사죄를 선포하시고, 과거의 짐으로부터 새로운 삶으로 해방시키시는 사건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과 연결된 이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죽음이 의미하는 최종적인 유기와 고독을 감당하시고 폐기시켜 버렸다는 사실에서 빛을 발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심으로써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예수님이 탄생하던 순간에는 여전히 미래의 싹으로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탄생과 함께 하나님의 현재가 사람들에게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어디에서나 이미 이러한 의미를 가리키는, 또한 영원과 구원과 용서의 위로를 가리키는 인간 생명의 의미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의 본문이 언급하고 있듯이 은혜와 진리가 가득한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곳에서 유래하는 생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 말씀, 즉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말씀(요 2:3)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 다른 사람에게 현존을, 즉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지은 자를 향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절 신앙의 가장 심원한 의미입니다. 죽음을 이긴다는 의미는 각 개인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그리고 무상하지 않은 의미를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소명 받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세상에 마주 선 하나님의 크심에 참여해야합니다. 이 하나님의 크심은 만물의 근원입니다. 사실상 자기 삶의 현존과 그 고유성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의 본질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서 증거 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에게 나타난 신적인 생명의 의미가 모든 생명 일반의 빛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빛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들을 비춥니다. 이 빛은 말 그대로 생명을, 즉 그것 없이는 어느 누구도 아주 어린아이일 때부터도 살아갈 수 없는 생명을 신뢰할 수 있게 합니다. 현대 심리학은 인간의 근원적 신뢰심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인격 형성보다 앞서 있으며, 인간의 전체 생명 역사의 토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였을 때 이 근원 신뢰는 부모에게 집중됩니다. 나이가 들면 이런 연결이 해체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근원 신뢰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에 대한 이런 근원 신뢰에 근거해서 현존을 자신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것으로 전제합니다. 삶이 위기에 빠지거나 가련한 처지에 빠지게 되면 인간의 이 근원 신뢰는 무언가 흔들리고 요동칩니다. 인간의 삶이 이러한 근원 신뢰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또한 삶이 인간에게 항상 호의적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 근원 신뢰는 파괴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역사에서 비로소 결정되었습니다. 그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에서 말입니다. 인간의 근원 신뢰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늘 지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안에서 빛을 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악과 고난과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빛이라는 사실은 고대 기독교에서 그야말로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지상 세계의 빛인 태양 빛이 예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기독교에서 부활의 날이 어쩌다가 우연하게 태양신의 날로 정해진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존탁(Sonntag)을 주일(主日)로 지킵니다. 예수님은 요한 공동체의 찬양에서 참된 빛으로 불린 것처럼 고대 기독교인들에게 참된 태양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오늘도 많은 찬송가는 그렇게 노래합니다. 존탁(태양의 날)에 일어난 부활을 통해서 고대 기독교가 손에 잡을 듯이 확신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을 축복해주는 능력인, 그리고 날과 해(年)의 변화를 규정하는 능력인 실제의 태양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비유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창조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서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탄생을 동지 직후에, 즉 태양의 새로운 탄생 시기에 축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사실은 전 인류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정말 우주적인 차원에서 영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매년마다 태양을 세상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탄절 절기 동안 우리 앞에 놓인 초와 그 광채가 무언가 이런 것들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누가 과연 인식하고 있을까요? 초와 그 광채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예수님 안에서 비추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이 빛에 의존해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영을 거절합니다. 다른 이에게 현존을 내어주며, 인간 사이의 철책을 허물어내고, 인간의 과오를 눈감아주는 사랑의 영을 거절합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살아가고, 그 사랑이 우리 현존에 의미와 내용을 채워주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그 사랑을 밀쳐내 버림으로써, 즉 신적인 사랑의 우주적 운동에 깊이 침잠하지 못함으로써 세상의 어둠이 짙어갑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어둠을 특별한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으로 인해 그들의 주변으로부터 많은 편견을 받았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 큰 박해와 죽음 같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바로 이런 박해와 고통이 그들에게는 세상의 어둠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기독교의 첫 순교자인 스데반을 특별하게 추모합니다. 스데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로 고백했기 때문에 유대인 동료들로부터 신성모독자로 몰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빛은 세상의 어둠이 살해한 사람의 눈을 밝혀줄 수 있습니다.

우리 현대 기독교인들도 대개는 이런 운명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의 시초와 끝자락에 버티고 있는 괴물을 우리 일상의 작은 궁핍이나 고통과 비교함으로써 그런 것과 비슷한 것쯤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오늘날 빛을 거스르는 가장 극단적인 어둠의 적개심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도록 도와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신적인 빛이 우리의 삶에서 찬란하게 빛나는지, 아니면 오히려 어두워지는지 경계해야만 합니다. 믿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만물의 존립기반인 그 심층적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현재 삶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보다는 말구유에 훨씬 가깝게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부활절 아침의 영광이 부족합니다. 또한 빛과 어둠의 대립을 명쾌하게 구별해내지도 못하고, 영들을 완전하게 분별해내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지도 못하며, 순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 기독교인들이 주로 살아가는 실존의 틀은 초라한 예수님의 말구유이며, 초라한 일상과 습관적 삶입니다. 그러나 말구유의 초라함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승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이 초라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명과 이웃의 생명을 밝혀주고, 완전한 의미에서 비로소 인간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그 의미를 우리에게 허락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우리의 삶을 비추십니다.

(1970.12.26, 함부르크, 베들레헴 교회)

와서 보시오!

요 1:45-51

만약 우리에게 귀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그곳에서는 어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데 말입니다. 특히 메시아가 오셨다는 사실이 널리 전해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빌립과 나다나엘만 그것에 대해서 언급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풍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는 것은 완전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실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나다나엘의 경우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었던 것에 대해서 종종 회의적인 상태에 빠집니다. 우리가 직접 본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반박될 수 없는 실제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직접 보시오!

이 말은 우리 프로테스탄트의 귀에는 거의 불신앙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듣는 게, 즉 말씀을 듣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신앙은 듣는 데서 나온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제 갑자기 다른 말씀이 등장합니다. 와서 보시오! 만약 이 말씀이 성서에 있는 게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것을 불신앙적인 외침처럼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나다나엘처럼 풍문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눈으로 확인해야 하고 들은 것의 현실성을 확증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시각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모든 감각으로 현실성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맛과 냄새로 경험하듯이 접촉을 통해서 아주 특별하게 직접적으로 감각적 현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눈은 특별한 방식으로 대상의 특성을 인식해냅니다. 그 대상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또한 상호 연관되는지 그 원래의 것들을 인식해냅니다. 이 경우에 눈은 다른 감각기관의 수고를 덜어줍니다. 우리는 대상을 봄으로써 일단 그것이 어떤 감촉일는지, 어떤 냄새일는지, 어떤 맛일는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종 보는 것만으로도 대상을 파악하는 일이 모두 해결됩니다. 나다나엘은 분명히 예수님을 만져보거나 냄새 맡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를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에서는 본다는 단어가 큰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에게 오는 사람은 그 분을 “봅니다.” 여기서는 겉모습을 본다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본다는 것은 곧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올바르게 보는 사람은 그 눈앞에 있는 것 그 이상을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까닭이 없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바로 핵심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도 보는 것이다”(12:45).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즉 아들로서의 복종이라는 상(像)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면 바로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물론 심연을 보는 것이 당연하거나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종종 피상적인 봄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을 단지 평면적으로만 인식합니다. 이것은 이미 예언자들의 경고였습니다. 인간은 눈을 가졌으나 보지 못하고, 귀를 가졌으나 듣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본질적인 것들이 종종 스쳐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충분할 정도로 세심하게 들여다보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람아, 너는 반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 가운데서 살고 있다(겔 12:2). 우리는 종종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실제적인 것하고는 다르게 인식하곤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생기(生起)와 사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가볍게 취급해버리고 만다는 것이 더 심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보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다음 구절에서 공교롭게도 오늘 본문에서 “와서 보시오!”라고 나다나엘에게 요청한 바 있는 빌립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빌립이 정확하게 직시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14:9).

물론 이렇듯 어떤 것을 명확하게 본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직면해 있는 것을 통해서 그 외면인 모습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배워야 합니다. 조형예술은 우리를 이렇게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미술이 그렇습니다. 화가는 풍경이나 꽃이나 인간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아직 조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식해낼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형상화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예술은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표현했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나다나엘이나 빌립처럼 더 이상 우리의 육체적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외적인 모습을 통해서 전반적으로 파악해낼 수 있을만한 본질적인 이것들을 우리는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적인 눈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그림이나 아이콘(聖像)들은 이런 내적인 시각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나다나엘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눈앞의 현상 그 이상의 것을 보았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옴으로써 그가 누구를 직면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오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나다나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스스로 찾아오기 이전에 이미 그를 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이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그 생명을 보십니다. 우리에게는 그 분에게 숨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에게 숨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를 알고 있듯이, 그리고 우리를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의 삶을 알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고 예수님과 친교를 나누는 사람은 나다나엘과 함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봅니다. 이런 봄은 이미 신앙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의 서곡은 이렇게 울려납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요 1:14).

그런데 이 말씀은 바울이 언급한 다음과 같은 주장과 상반되는 게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고후 5:7).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주는 게 아닐까요?(히 11:1). 요한복음에도 역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고 자기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본 후에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도마에게 부활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 20:29). 이러한 일련의 말씀들은 보는 것보다 믿는 것이 귀중하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개시된 구원의 성취를 본 것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런 봄은 우리에게 미래의 사건으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다나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곧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 1:50,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이미 봄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눈앞에 있는 사실 그 이상을 인식하는 봄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은 이미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아들을 보고 그 아들에게서 아버지를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어떻게 더 큰 일을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믿는 자로서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에게 반사되는 데서만 그 영광을 봅니다. 우리는 오직 그 영광의 반영(反影)만을 봅니다. 아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직접 보는 사람은 죽어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그렇게 배웠습니다(출 33:20). 우리의 죽어야 할 눈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발산되는 직접적인 빛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이사야가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을 때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첫 반응을 보였습니다.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 (사 6:5). 우리가 이사야의 이런 충격을 함께 느꼈으면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뵈면 소멸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빛을 굴절시켜 줄 경우에만 우리는 그 빛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아들의 모상(模像)을 통해서만 우리는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거울로 보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고후 3:18). 여기서 우리는 대상을 대충 반사시켜내는 고대의 동(銅)거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낱말 퍼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즉 모든 것이 성취된 그 미래가 되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완전히 명백하게 말입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있었을 때 예수님이 그를 알아보신 것처럼 우리도 역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며, 또한 그분 안에서 아버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우리가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에게 와서 그를 보고 그분 안에서 아버지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빌립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길을 함께 가야합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시나브로 예수님에게서 아버지를 보는 것을 훨씬 잘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천사들의 복음을 들었던 목자들처럼 성탄절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그들과 더불어서 베들레헴으로 갑시다.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한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사실을 보자.”(눅 2:15).

(1990년 대강절 두 번째 주일, 뮌헨, 대학예배)

하나님은 영이시다!

요 4:19-24

금년 들어서 기독교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신앙적 삶의 심연에 불안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이 담긴 언어들, 즉 하나님과 그의 구원, 아들을 보내심과 그의 성육신, 대속적 죽음과 그의 부활이라는 언어들이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신앙적인 언어와 더불어 신앙의 실체가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은 너무나 오랫동안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언어들은 이 세상이 급변하는 동안에도 예금 잔고 안에서, 바람 없는 온실 안에서 보존되어 왔습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 전승의 귀한 언어들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완전히 무능력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언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들은 이제 이 세상 현실성과의 관계를 상실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현실성은 한때 기독교적 언어들이 사람들에게 제공했던 그것인데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 전승에 대해서 무언인가를 여전히 기대하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이 전승의 내용들이 일상적 노동세계와 소비행태 안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우리를 해방시켜낸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모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언뜻 보면 성서 말씀은 ‘하나님’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새롭게 문자화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별로 도와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서 말씀은 각 경우마다 여러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불충분한 전통적 표상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 사이에 놓인 그 대립을 알고 있습니다. 이 대립이 바로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언급에서 표출되는 위기의 근본적인 의미가 아닐까요?

이런 주제는 요한복음서가 우리에게 보도해주고 있는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자와 예수님이 나눈 대화의 핵심입니다. 이 대화는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기준으로, 즉 참된 종교의 기준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이미 4세기 동안이나 종교문제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 분리는 북이스라엘 왕조와 남유대 왕조 사이의 대립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뒤에 유대 왕조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깨끗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배척되었으며, 유대 공동체로부터 밀려났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세겜의 그리심 산 위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 성전은 마카비 왕조 때인 기원전 128년에 유대 광신자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첫 종파 분리인 셈입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같은 야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며, 또한 유대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예루살렘에서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최소한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 사마리아 여자는 유대인인 예수님이 마실 물을 달라고 하자 매우 놀라워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세세한 사정을 밝혀내자 또 다시 충격을 받습니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그녀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하고,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논란이 일고 있는 종교문제를 제시합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에게 바르게 예배드릴 장소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대화에서 세 가지 요점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종교와 하나님 예배에 대한 질문이 어떻게 제기되는가, 둘째는 참된 하나님 예배는 종교적 전통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셋째는 참된 하나님 예배 자체에 대한 질문을 어떻게 제기할 수 있는가 라는 그 질문의 방식과 통로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겉으로는 숨겨져 있지만 무엇이 과연 원래의 사실인지를 지난날 다섯 남자와 살았던 이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그녀로부터 선지자로 고백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한 여자의 사생활을 들추어냈다는 사실에 너무 밀착시켜서 읽으면 안 됩니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숨겨져 있지만 원래는 참된 현실성의 심연들을 인식하고 해석할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의 이야기에서도 아주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현상의 고유한 의미가 은폐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무엇인가를, 즉 그것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이를 통해서 각성된 사람으로, 하나님에 의해 각성된 사람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이런 각성된 지식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 누가 우리로 하여금 현실로 드러나 있는 것과는 달리 사물의 본질을 알아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관한 대화에서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 인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하는 일을 망각했다고 말입니다. 교회는 이 과업을 다른 이들에게 방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현실성의 근원에 대해 언급할 적법성을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눈앞에 놓여있는 것들을 관통해나가는 능력으로부터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본질을 말한다는 것은 이렇게 당연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모든 사물의 근원에 대해서 능통해야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사마리아 여자가 자기 앞에 서 있는 유대인 남자에게 예배할 장소와 참된 종교에 대해서 그 순간에 질문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잘못된 형식으로 질문합니다. 그녀는 그 귀중한 질문을 종파적 선택의 문제로 던졌습니다. 이 대화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참된 하나님 인식에 대한 질문은 유대인이 옳은가, 아니면 사마리아인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참된 하나님 인식에 대한 질문이 오늘날 로마 가톨릭이 옳은가, 아니면 개신교가 옳은가에 대한 질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거의 똑같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마도 이 질문은 불교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길인가, 아니면 기독교가 그런가에 대한 질문과도 결코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어떤 종파적 전통에 서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오해했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질문을 존중하시고 대응해주십니다.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진지하고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 시대는 이것을 망각해버릴 위험에 봉착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일상이 세속화되면서, 소비적 삶의 행태가 압박해 들어오면서 질식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존에서 비상한 것들과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의 차원은 정말 간과되면 안 됩니다. 이런 차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맴돌 듯이 살아가는 현실성에서 정말로 소유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시각을 열어줍니다. 일상적인 삶의 한 중심에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들을 뛰어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생각들이 자라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구역질과 무료함,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초조감이 우리를 가득 채워버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사회적 삶에서도 불안이 엄습합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종교의 기본행위이며, 모든 현실의 심연에 대한 자각입니다. 겉으로 피상적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그 안에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면 말입니다. 이런 심연을 인식해 가는 것으로부터 모든 종교적 전통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배는 경우에 따라서 잘못된 길로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거짓 세력들을 붙잡고서 그것이 곧 모든 현실들을 심연으로 움직여 가는 힘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모든 개개인들의 삶을 국가에 묶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동질성과 대립은 혈통의 문제이며, 따라서 자신이 노력해야할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그리고 실제적으로 진지한 대상을 국가로 여김으로써 자신이 살아갈 여러 염려로부터 해방되고 자신의 행복도 최선의 방식으로 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도 이런 경배는 오류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즉 종교적 전승에 완전히 몰두함으로서 현실성과의 접촉을 단절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종교적 의무는 인간의 삶에 추가된 멍에와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바른 장소가 그리심 산이냐, 아니면 예루살렘이냐에 대한 선택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바른 경배와 하나님을 향한 바른 충성에 대한 질문은 이런 전통에 서는가, 아니면 저런 전통에 서는가를 통해서 답변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전통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이 사마리아인에게서가 아니라 유대인에게서 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요4:22). 말하자면 구원은 불교도나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라 기독교인을 통해서 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의 전통을 진리 자체와 동일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역시 참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비록 그들이 그 하나님을 잘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올바른 전통에 대해서 암시를 하긴 했지만 아직 참된 예배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로 하여금 경배하게 하는 놀라운 일들을 발견해야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심연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종교적 전통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일에서 눈을 뜨게 해줍니다. 만약 이런 종교 전통이 우리 자신의 삶에 있는 현실성의 심연에서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는 열쇠가 되지 못한다면 이 모든 전통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 전통 속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모든 양식들은 공허한 말이 되고 맙니다.

셋째, 위에서 언급된 사실에서 이미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특하게 설명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의미심장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영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기독교는 영이라는 말을 오랫동안 헬라 철학적인 의미에서 생각해왔습니다. 하나님을 차원이 다른 의식의 본질로서 표상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한계가 없는 인간의 혼과 비슷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표상은 오늘날 더 이상 고수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당연시되었던 이런 생각을 향해 제기된 무신론적 비판이 오히려 어떤 진리를 드러내는 순간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헬라 철학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영혼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몸에서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한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몸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은 아주 당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의식은 그 어떤 육체적 필요성으로부터도 벗어나 있으며, 현재 우리의 육체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공간적 제한과도 상관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혼과 몸의 연결로 인해서 파생되는 한계로부터 자유로운, 더구나 무제한적으로 인식하고 무제한적으로 실천해나갈 수 있는 하나의 의식으로 생각될 수 있었습니다. 현대 사상은 이러한 표상의 전제, 즉 육체와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의 독립성을 거부합니다. 오늘날 의식의 기능은 항상 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의식으로서의 하나님은 이제 인간이 확대되어 반영된 영상(映像)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에 전승된 ‘영’이라는 단어는 이와는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에 따르면 이 단어는 비상한 사람들, 기적을 행하는 사람, 그리고 예언자들에게 실현되는 놀라운 능력을 특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놀라운, 완전히 다른, 그리고 인간을 놀라게 하는 분으로 행동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분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합니까?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고대인들이 하나님을 곧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진지한 태도가 못되는 걸까요? 그리고 이런 현실성이 바로 행위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한 인격체라고 간주한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닐까요?

영으로 일컬어지는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놀라운 심연입니다. 구약성서도 이렇게 “영”은 생명을 창조하는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끝나버린 것 같이 보이는 몸을 다시 살려내고 마지막 호흡을 다시 소생시켜서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영에 대한 이런 이해는 무엇보다도 의식이나 사유와는 관계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가 신약성서의 배경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죽게 될 우리의 몸도 영에서 발원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영에서 떨어져 나오면 죽지만, 새로운 생명은 이와 달리 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주장은 영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에서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고대 기독교에서 이러한 영과 생명의 연결은 바울만이 아니라 요한의 경우에도 똑같이 발견됩니다(고전 15:45, 롬 8:11, 요 6:63 참조). 바울과 똑같이 요한은 영을 살리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생명에 대한 이해인데, 사실 오늘 우리의 이해보다 훨씬 풍부하고 심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도 아주 다층적인 차원에서 경험됩니다. 생명은 그저 살아 있는 단백질 덩어리로만 개념화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은 전체가 부분에서 현재하고 있듯이 거듭해서 놀랍게 나타나는 경험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명은 현존적인 것으로부터 이해되면 안 됩니다. 현대의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생명은 이미 단백질 덩어리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피안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변 환경에 의해 살아갑니다. 이것은 영적인 동물인 인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생명 현상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인간의 영에게 정확히 어울리는 말입니다. 영으로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피안에서 자신의 거점을 찾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체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서 거점을 찾는 게 아니라면 어디서 찾는다는 말일까요? 인간은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곳에 자리합니다. 또한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자유와 세상에 대한 인식을 획득합니다. 영과 자유는 상관되어 있습니다. 요한과 바울은 영이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일치합니다. 이것은 물론 인간의 의식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진리의 능력인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 진리의 능력 안에서 우리 의식의 외부에 있는 견고하고 창조적인 토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토대를 말입니다.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곧 우리의 생명 안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숨결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 숨결은 우리의 안과 밖 동시에 존재하며, 따라서 우리를 우리의 위로 끌어갈 수 있는 힘입니다. 동시에 모든 생명에 충만한 이 숨결은 우리에게 진리와 자유의 원천입니다. 이 숨결에 우리 자신을 안심하고 내맡기는 것이 우리가 미래에 얻게될 하나님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미래에 우리는 일상적인 데만 몰두해 버리는 천박성으로부터, 또한 거의 비슷한 현상이라 할 우리의 상이한 종교 전통의 편협성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미래는 예수님의 사건 안에서 이미 해방하는 현재입니다. “... 그때가 올 것이오. 지금이 바로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할 그때요.”(요 4:23).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통적으로만 주장되는 모든 하나님 표상을 딛고 넘어서라고 용기를 주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전승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비판을 몹시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비판도 예수님이 증거 하신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통해 이미 극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옳은 말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표상이 아무리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향해 나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1967.7.16, 마인쯔, 크리스투스 교회)

생명의 밥

요 6:48-51

여기 우리들 중에서 약간 나이가 든 분들은 전쟁 당시에 우리 국민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아주 엄격하게 듣고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겁니다. 생명은 최고의 선(善)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오용된 말들 때문에 서로 간에 불신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말들은 너무나 쉽게 권력자들의 철면피한 변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민족을 위해서 생명을 내걸어야 한다는 변명 말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우리에게 신성불가침입니다. 최소한 원칙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생명권에 대한 논쟁도 역시 뜨겁습니다. 이런 논쟁에 개입된 모든 입장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신성불가침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는 그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배격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태도가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생명은 그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강박 당하지 않으며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실질적인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말고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듯 단순하게 사는 것이 아주 쉬워 보입니다만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모든 노력들은 성취된 삶의 조건들을 이루어내는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대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역시 똑같습니다. 우리는 매 학기마다 이런 조건들을 만들어냅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는 일에 우리의 삶이 소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런 일에 너무나 쉽게 맡겨버립니다. 생명을 획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을 획득하기 위해서 노동만이 아니라 여가 준비에서도 역시 우리를 혹사시킵니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고유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아주 가까운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폭풍이 매 순간 불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폭풍이 우리를 거듭해서 생명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런데 내용적으로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과연 우리를 이런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을까요? 우리는 근원적인 생명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꽃을 든 아이처럼 말을 잃은, 그리고 자연적인 생명 방식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게 아닐까요? 문명의 조바심과 나름대로의 필요성에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속세를 떠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오늘날 간단히 망상으로 취급됩니다. 루터 시대보다 훨씬 간단히, 20세기의 청년 운동보다 훨씬 간단히 망상으로 취급됩니다. 인류에게는 이제 기술문명으로부터 탈출할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완벽한 파라다이스를 우리는 도저히 꿈꿀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에,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조건들이나, 따라서 염려와 걱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들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한 그 상태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주기도에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간구는 한결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는 밥 그 이상입니다. 이 간구는 영과 영혼의 양식을, 우리의 이웃들과 서로 돕는 삶으로의 전환을, 인식의 빛남과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전환되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전환을 간절히 원합니다. 인간은 밥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삶을 인간적으로 만들고 충만하게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로 하고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이 충만하게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렇게 많은 것들을 염려하느라 우리 자신을 소진시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염려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밥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궁극적인 필요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에 일용할 양식이 계속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합니다. 또한 영혼과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물질들이 아무리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것에서 생명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명 조건들과 그것에 대한 염려로부터 생명 자체를 기대하는 한, 우리의 생명은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거짓 필요성이기도 하는) 늘 새로운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냥에 나서느라고 공허한 상태로 머물고 맙니다.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든 향락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상태가 됩니다. “나는 온갖 향락에 취함으로써 또 다시 그런 향락에 대한 열망으로 쇠잔해집니다.” 이 괴테의 언급은 이렇듯 풍요로운 사회에서도 충족되지 않은 삶의 굶주림이라는 큰 물결이 모든 언덕에 흘러넘치고 그로 인한 파괴적 결과들이 파생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줍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생명의 조건들은 생명 자체를 생산하지 못합니다. 참되고, 온전한 생명을 말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즉 영혼의 양식이나 육체의 양식을 필요로 하긴 하지만,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소유물의 반복을 통해서는 생명을 획득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삼세계 민중들에게 밥보다 더 큰 것을 갚아야 합니다. 그 양식은 배고픈 사람을 단지 일시적으로만 만족시켜주며, 따라서 그 만족은 곧 새로운 굶주림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의 모든 굶주림을 밥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이 언급한 ‘생명’의 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입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입니다.”(4:34).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 당하고 있는 굶주림을 해결하는 생명의 밥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밥을 먹은 다음에 다시 허기가 져서 또 다시 밥을 찾아 나선다거나, 다른 약속을 찾아다니게 하지 않게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굶주림을, 내용이 풍부한 참된 생명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단 한 번에 만족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사건에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의 영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이의 뜻은 그의 음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모든 생명이 덕을 보고 있는 그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을 그 초보적인 수준에서 찾거나 생명의 세속적인 조건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6:63에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근원과 원천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전체 구약성서의 통찰을 다시 한 번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생명 현상에서 창조적 생명력의 일시적이고 허무한 모습만을 인식합니다. 이 생명력은 예수님에게서 나타났으며, 예수님을 통해서 사랑의 피조물들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밥이라고 일컬은 것으로서 지상적 밥이라 할 생명 조건만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 자체를 선물로 줍니다. 우리가 이런 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며, 또한 우리의 일상적 삶에 필요한 삶의 조건이 허락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조건에서 더 이상 생명 자체를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생명의 굶주림을 영원히 배부르게 하는 생명의 밥으로부터 성취되고 그 의미가 획득됩니다.

생명의 밥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을 배부르게 하고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돌을 빵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구원자로 축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탄의 유혹보다 더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사실상 인간의 위기와 고난에 참여했기 때문에 유혹을 당한 것입니다.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킴으로써, 또한 “세계를 위한 밥”을 통해서 세계의 고난을 제거하라는 유혹 말입니다. 그런 유혹에 빠져버렸다면 예수님은 생명의 굶주림을 영원히 해결하는 참된 생명을 인간에게 제시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만약 교회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업을 인간에게 밥을 해결해주는 것에서 찾는다면 예수님이 가져온 참된 생명을 인류에게 제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제 밥을 제공하는 일은 사실상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징표이긴 합니다만 본질적인 사안은 아닙니다. 교회는 인류에게 생명의 밥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가 음식으로 제공한 밥을 말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러한 뜻이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며 하나님을 통해서 참된 생명을, 즉 그 생명의 진리를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발견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몸’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그 사명으로 사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생명이며, 성취된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데 필요한 유일한 생명입니다.

생명의 밥을 예수님의 몸과 일치시키고 있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은 분명히 성만찬을 의미합니다. 성만찬에서 쪼개지는 빵은 생명의 밥입니다. 왜냐하면 이 빵은 바로 예수님과의 일치를, 즉 그의 ‘몸’과의 일치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만찬에서 쪼개지는 빵은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예수님의 사명에 동참하는 징표입니다. 그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굶거나 목마르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또한 그 하나님은 예수님의 양식이며 음료였습니다. 분명히 성만찬의 빵은 단지 징표일 뿐입니다. 성찬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상징적 사건이며, 상징적 실천입니다. 그러나 전체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상징적 말걸음이고 상징적 찬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체 피조물들을 대표해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찬양에 참여하고 여기서 이런 사건의 의미에 침잠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아주 가깝게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가깝게 계심으로써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의미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 성만찬은 결코 부록으로서가 아니라 기독교 예배의 핵심에서 예수님에게 속해 있습니다. 이 성만찬에서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 되려고 하십니다. 교회의 생명에 토대를 놓고 특징화하는 모든 것이 이 성만찬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 되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가 그와 하나 될 수 있는 토대를 놓아주십니다. 교회의 신앙생활을 설명하는 것 중에서 이것보다 더 시급하고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초청을 따르고 그의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이 생명의 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거기서 예수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럴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 되려고 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는 이 일치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밥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고유한 신적인 사명을 우리에게서 성취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도 세상의 생명을 위한 그분의 사명에 동참함으로써, 또한 그분과 연결된 모든 일과 일치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의 사명을 깊이 생각하도록 합시다. 이 생명은 곧 그분이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제공해 주신 최고의 생명 사건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말합니다. 이 사명은 곧 예수님의 먹거리였으며, 또한 예수님과 우리의 생명입니다.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아멘.

(1974.5.12,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예배)

세상의 빛

요 8:12

우리는 낮의 길이가 짧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도 빛을, 그 빛의 생생한 작용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화초를 키우거나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그런 빛의 작용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빛과 우리의 관계는 다층적입니다. 인간은 낮을 밝히는 빛이 태양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낸 적이 없습니다만, 이 빛을 다른 차원에서 인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경우에도 역시 빛의 의미는 물리적 성질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빛의 이면이 있습니다. 광명의 드러냄과 크기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빛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며, 눈이 닿는 먼 곳까지 보게 만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빛은 우리의 내면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침입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를 향해 길을 가다가 빛을 보았을 때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이 빛은 바울을 넘어지게 했으며, 이어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그에게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는 이 장면을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 유명한 유화 작품이 로마의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당에 있습니다. 말을 타고 가던 사울은 길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밝게 빛나는 말의 갈기 너머로 한줄기 빛이 사울을 비추었습니다. 그것은 곧 사울이 받은 계시의 수단이었습니다. 근대 초기에서 다른 화가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빛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컨대 렘브란트가 흑판에 그린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일련의 그림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흑판화를 뮌헨의 고대 회화관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제자들이 끌어내릴 때 그의 몸을 감싼 천에 초(超)지상적인 빛이 감돌았습니다. 끌로드 로랭의 풍경화나 윌리암 터너의 해양화(海洋畵)에는 빛이 거룩한 성질을 갖습니다. 즉 감상자를 사로잡는 초지상적인 능력이 그것입니다. 빛에는 모든 형상을 거절하는 하나님이 현재 하십니다.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은 하나님의 집입니다(딤전 6:16).

창조를 노래하는 시편 104편은 하나님이 첫 번째로 창조한 빛의 시작을 언급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입으실 ‘옷’이 거론됩니다.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는 하나님 자신이 곧 빛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입니다. 그에게는 결코 어둠이 없습니다.”(요일 1:5).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들도 역시 빛 속에서 삽니다(1:7). 그리고 모든 것이 완성되는 미래에는 그 어떤 다른 빛이 필요 없게 됩니다. 램프도 필요 없고 태양도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하나님은 자기의 빛을 모든 것들 위에 비추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와 그의 뒤를 이은 요한계시록 기자는 그렇게 약속했습니다(계 22:5).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미래는 이미 우리 앞에 당도했습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사 60:1).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그를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빛이, 즉 생명의 빛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빛은 처음부터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는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요 1:9). 모든 피조물들의 현존을 가능하게 한 그 창조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 8:12).

생명의 빛,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그 어떤 다른 빛이 아니라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과 빛은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식물과 모든 생물에게 생명 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 이상입니다. 생명 자체가 빛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죽음에 의해서도 한정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즉 죽음을 극복한, 그리고 우리의 현재적 지상 생명의 뿌리가 되는 부활절 아침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창조 말씀 가운데 뿌리를 두고 널리 널리 전개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복음이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그에게 생명이 있었으며, 이 생명은 바로 인간에게 빛이었다.”(요 1:4). 이런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교회는 매년 1월6일을 예수님의 현현절로 지킵니다. 현현(Epiphanie)이라는 말은 일종의 나타남, 계시됨을 의미합니다. 현현절의 핵심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계시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언제 일어납니까?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사건의 토대는, 즉 계시 사건의 토대는 영원한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과 모든 사물을 창조하실 때 사용한 그 언어가 예수라는 인간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되심을 예수님의 탄생과 연결시키는 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생기(生起)를 성탄절의 축제로 지킵니다. 물론 이 아기의 탄생이 갖는 비밀은 베들레헴의 외양간과 구유의 초라함에 은폐된 채로 세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들판의 목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알려졌습니다. 천사가 목자에게 나타났을 때 이 영광은 천사를 두루 비추었습니다. 목자들 이외에는 별 빛을 보고 동방에서 온 세 명의 현자들만이 이 빛을 경험했습니다. 이 별은 이 현자들이 순례의 고행을 마다하지 않게 만든 그 사건의 장소를 지시해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예수의 탄생은 은폐의 사건으로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인간으로서 공적인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으며, 스스로 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곧 이어서 그 분은 하나님이 가까이 임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참 빛을 가져다주기 시작했습니다. 계시 사건은, 즉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나타난 사건은 교회에 의해서 특별히 그의 세례와 연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이 보도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현현과 계시의 축일에 읽는 복음 말씀으로 전래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비록 예수님의 공적 활동 초기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승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인 빛은 그 분의 말씀과 활동에서 거의 인식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점점 더 심각한 저항을 받았습니다. 이 빛은 어둠을 비추었지만 어둠은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요 1:5).

여기서 말하는 어둠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빛에 접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살이의 일상에서 이렇듯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비록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 생명이 유지되고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런 사실을 오늘 이 세상에서 몹시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서 나이가 든 분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즉 대(大)재난의 쇼크 밑에서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을 향한 새로운 전환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살아남은 자들을 용서하셨으며, 우리 민족에게 또 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역사에서도 역시 풍요의 시대가 종종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간격을 넓혀갑니다. 이로 인해서 야기되는 파멸을 생각하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멀어짐으로써 발생하는 어둠입니다. 이 어둠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는 인간이 그것을 어둠으로 느끼지 못하고 자기 운명의 발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부담스러운 세계와의 연결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파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빛을 수용하지 못하는 어둠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역시 공생애 중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몰렸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한 세례는 그 분의 운명 앞에 놓여있는 죽음의 봉인(封印)이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어둠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빛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그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이런 생기에 의해서 이제 예수님은 자기가 걸어온 전체 길에서 세상의 빛이십니다. 바로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 생명은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그들이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 8:12).

(1999.1.10, 뮌헨, 마태우스 교회)

고난을 향한 예수님의 길

요 12:20-26

교회는 매년 봄기운이 만연한 이 절기에 우리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생각합니다. 온 세상의 만물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약동하기 시작하는 이 시기에 죽음을 향한 예수님의 길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고난과 죽음이 예고되었으며, 우리가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은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바로 그 거룩한 도시에서 보내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보도하고 있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세계 곳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유대의 순례객들은 무리들이 어울려서 환호하고 있는 이 예언자를 보려고 했습니다.

이런 축제 분위기는 분명히 봄을 맞는 우리의 기분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축제의 순간에 그들을 향하여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분적으로는 기이하고, 부분적으로는 냉정한 태도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때가 이르렀으니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이 곧 예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언급할 때 그 사람의 아들이 곧 예수님 자신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만 이 사태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할 때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대상은 다니엘 예언자가 예언했듯이 이 땅과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마지막 때 하늘의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오실 분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바르게 이해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얻는다는 이 선포에서 바로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유추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광은 일단 명예와 빛나는 광휘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는 흡사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했던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땅의 영광과는 정반대로 거의 모멸적인 사건이라 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길을 생각했습니다.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아버지는 예수님에 의해서 영광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바로 이 핵심적 진술은 밀알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뒤이어 생명을 잃는 것과 얻는 것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해명됩니다. 밀알에 대한 말씀은 비유입니다. 밀알은 땅에 심겨져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이 거기서 발생됩니다. 우리는 종자 씨앗에 대한 이런 말씀에서 신자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를 생각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거두게 된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억의 차원에서만 인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상황에서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 밀알에 대한 말씀은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길도 역시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밀알은 죽음을 관통해나갑니다.

이 말씀이 여기서 비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는 암호문으로 표현된, 또한 가장 강한 형식으로 표현된 그 다음의 문장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놀라자빠질 수밖에 없는 가르침입니다. 도저히 우리가 가깝게 느끼기 힘든 언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러한 생명을 감사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던가요? 이 생명은 창조자의 손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아버지처럼 제공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나요? 이런 마당에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이런 생명을 미워해야만 합니까?

생명을 잃고 얻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본문은 특별히 죽음에 이르는 예수님의 길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전승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병행구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연관되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자기 제자들에게 자신이 당해야 할 고난에 대해서 알렸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친구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반응했습니다. 근심 어린 마음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뜯어말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이런 일이 주님에게 일어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문장을 마태복음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들에게서도 생명이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엄하게 꾸짖으시면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만을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생각은 생명을 보존하는 쪽으로만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생명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무언가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이 준엄한 대답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이것을 미루어 헤아리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일은 공생애 시초에 예수님 자신에게 일어났었던 광야에서의 유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구의 입을 통해서 이런 유혹이 자기에게 다시 제기되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노여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포와 활동으로 인해서 어떤 원수들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원수는 예수님의 선포와 활동이 성공적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가 그의 활동에서 이미 개시되었다는 사실을 언어도단의 불손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으로 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다”는 비난이 그의 적들에게서 나왔습니다(요 10:33). 그리고 이런 신성모독으로 인해 그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핵심적으로 선포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맹세해도 신성모독을 벗어나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통치가 가까이 임함으로써 예수님의 활동에서 그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선포가 지속될 때까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비난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자리에, 그리고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 통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았다고 말이다. 예수님이 악마를 축출하고 이로 인해 그가 전한 복음 사신(使信)의 신뢰성이 획득된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차이가 그대로 유지되어야만 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이 차이는 창조자에 맞서 있는 피조물에게 어울리는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차이를 유지했을까요? 예수님의 적들은 예수님의 태도를 보고 그가 하나님 행세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사신의 선포를 포기해야만 이런 갈등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그 통치를 선포해야 할 사명에 순종하지 않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의 배경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참된 생명을, 즉 하나님과의 일치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에 신실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처럼 오래 살 수 있었겠지만 참된 생명을 잃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이 세상의’ 경계선 끝으로 끌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명령을 굳게 붙잡았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에 닥칠 모험을 감수했다는 뜻입니다. 자기 생명을 이처럼 “끝으로 몰고 가는 것”은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은 세계도피나 신경증적인 자기증오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상의 생명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순종해야만 할 하나님과 그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를 선포하고, 또한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요구에 마음을 여는 바로 그곳에 임하시는 복되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이 관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복음 사신을 선포하라는 명령에 늘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죽음이 그를 영원한 하나님과 갈라놓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바로 그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변용(變容)을 의미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에 대한 순종을 궁극적으로 확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말하는 새로운 생명은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순종에서 관철되고 보증된 영원한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한 이러한 변용을 의미합니다. 이 영원한 하나님은 모든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 자체입니다.

이 땅에서 유지되는 자기 생명을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순간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발생합니다. 이 땅의 생명을 하나님에 대한 순종보다 낮은 순위로 돌려놓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는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생명을 우선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집중한다고 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뒤따른다는 것은 물론 순교자의 죽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부인하는 값을 치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우에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상황은 교회의 역사에서 늘 반복되긴 했습니다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뒤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의 가족이나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동료를 떠나아야만 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예수님과 더불어서 유랑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를 따랐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원칙적인 점에서 그리스도를 뒤따름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할 그 특별한 명령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각각 다릅니다. 이런 특별한 명령은 바로 자기의 직업에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에 자기의 삶을 기울이는 것에 있습니다. 이 명령은 가족의 행복과 아이들과 손자들을 위한 어머니들의 희생에도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이 늘 유별난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견지하면 우리의 삶을 보존하고 확대 재생산하느라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을 뒤따르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일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설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그의 부르심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일도 역시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설정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확증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순종함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과 일치시킴으로써 지키실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극복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1996.3.17. 그래펠핑)

이웃 사랑의 근원

요 15:9-14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 세계가 여전히 기독교와 교회를 그런 대로 인정하고 있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의 활동에 있습니다. 즉 이웃 사랑은 무엇보다 교회의 봉사 활동과 교회의 그런 조직을 통해서 공적인 영역의 의식(意識)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인의 신앙 자체는 이런 공적인 영역의 의식에 별로, 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웃사랑이 기독교의 정수로 비쳐지면 질수록 더욱 심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웃사랑은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의무적인 윤리 규범으로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사랑의 명령은 날카로운 비판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미 칸트는 사랑을 명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명령을 크레도 크비아 압수르둠(credo quia absurdum, 모순됨으로 믿는다)과 비슷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왜 사랑의 명령을 모순이라고 주장합니까?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사랑할만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늘 선택적입니다. 사랑에는 사랑 받은 자가 다른 사람 앞에서 특별 대우받는 순간이 있습니다. 따라서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에게 낯선 것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판단에 따르면 이웃사랑은 개인의 태도에 나타나는 문화적 전통의 요청으로서 한편으로 우리가 표상할 수 있는 “인간적 공격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억제”입니다. 이런 명령을 진지하게 추구하려는 사람은 불행에 빠질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듭해서 이런 명령 앞에서 좌초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웃사랑에 대한 보편적 명령은 사랑 개념의 고담준론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위선의 풍토만 생산할 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이란 말을 고상하게 과잉 생산하는 것은 그 가치를 절하할 뿐이지 그 긴박성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런 비판은 그저 무시해버리고 지나갈 일은 아닙니다. 분명히 기독교의 활동 영역에는 이웃사랑이 과잉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에 다소간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웃사랑을 훨씬 자주 언급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지나친 만큼 그것의 지속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언급할 때도 역시 그것이 공연하게 과잉되지 않도록 튼튼한 뚜껑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프로이트가 보았던 이중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다. 말하자면 이웃사랑이 위선으로 작용한다는 사실로부터 방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통한 부당한 요구라는 사실로부터도 방어합니다. 이런 이중의 위험으로부터의 방어는 우리의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태도가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증거 해주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기독교적 사랑의 단초이며 토대입니다. 또한 사랑에 대한 기독교의 모든 진술이 근거해야할 토대입니다. 따라서 요한 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합니다.”(요일 4:19).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자기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그를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또한 그를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 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의 십자가와 연결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운동에 참여할 때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운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일서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요일 4:16).

요한복음에 의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사태를 훨씬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태도로부터 시작해서 하늘의 아버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했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 선택하신 사랑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응답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사명에 예수님이 순종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다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사명에 바치셨습니다. 바로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보내시기까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모든 복음서의 전승에 의하면 이 사명의 핵심은 예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부르셨다는 데에,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 아래에 두라고 부르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명백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현재 하시기 때문에, 또한 그에 따라서 구원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현재 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 자신의 복음 사신을 받아들이고 제자가 된 신자들을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부르심을 선포하심으로써 제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이것은 예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봉사였습니다. 치유와 식사는 하나님의 임박이 사람들의 구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대한 징표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해야 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함으로써 이제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을 자기의 친구들에게 내주었다는 사실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로써 아버지에게 순종하셨고 그 사명에 충실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통해서 예수님은 세상을 위한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명은 세상의 구원을 목표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위선적인 방식으로 가르치는 모든 달콤하고 낭만적인 것들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기독교적 진술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통치를 신뢰하라고 부르셨으며, 또한 이로써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에 놓여 있기 때문에 좋은 뜻에서 무언가 준엄하고 까다롭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요청을 염두에 둔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만날 수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랑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그 사랑의 역동성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게 됩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상호간에 사랑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우리가 서로 우리의 생명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억하고, 이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모든 용무와 관심을 하나님의 통치에 맡기도록 환기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더불어 신뢰하고 순종함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은 우리가 제 각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기억하고, 나머지 인류가 하나님의 통치를 기억한다는 사실에서만 실제로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이웃 사랑은 우리가 서로 간에 호의적으로 대하는 데 있는 게 아닙니까? 예수님이 들어주신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두 요소는 서로 간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가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핵심은 아버지의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계명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이와 똑같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계명과 다른 계명이 아닙니다. 형제 사랑이라는 새로운 계명에 대한 언급은 다음의 사실을 명확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즉 계명을 지키는 일의 핵심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지는 그 귀결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현재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함으로써 드러나는 귀결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옛 약속인 십계명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라는 첫 계명은 다른 계명이 따라야 할 가장 우선적인 계명입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대로 더불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인간의 공동 삶을 향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의 현재 하심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현재 하십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보호받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충만하게 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으로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랑이 출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랑 안에 머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기쁨으로부터 살아간다는 점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과 철저하게 하나가 되신 분이십니다.

이웃사랑은 그야말로 기쁨의 전조(前兆)에서 나옵니다. 이웃사랑이 계명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을 이루려고 기를 쓰다가 지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우리가 더 이상 종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칸트가 그것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 없다고 한 바로 그 자발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으로부터 나오는, 즉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기쁨과 그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는 기쁨으로부터 나오는 자발성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이기적인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의 구체적인 의미를 요한복음에서 충분하게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다른 진술을 참조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서간문 읽기에 나온 대목입니다(롬 13:8-10). 바울에 따르면 이웃사랑은 십계명의 완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이룬 것입니다. 이로써 바울은 소위 무엇이 이웃 사랑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즉 “사랑은 이웃에게 나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에 나오는 두 목록의 공통분모입니다. 십계명의 첫 목록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대한 것이며, 반면에 두 번째 목록은 이웃 사이에 있어야 할 태도와 관계됩니다. 즉 사랑은 부모를 무시하지 않으며, 경시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살인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간통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웃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으며, 이웃에게 거짓 증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계명을 정확하게 한 문장으로 요약했습니다.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사랑입니까? 물론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긴 합니다. 그것 없이는 동료를 향한 사랑이 가능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아주 철저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 ...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삼키고 하면 피차 멸망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갈 5:16). 사랑은 이웃을 물어뜯고 삼키지 않습니다. 물론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삼키고 싶어 하는” 사랑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이런 사랑의 이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기독교 사랑은 이웃을 물어뜯지 않고 오히려 잘 대해 줍니다. 기독교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악한 일을 하지 않는 일에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좋게 대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기회(카이로스)를 얻는 대로 모두에게 좋은 일을 하십시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가리키는 적극적인 내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많은 사랑을 베풀며 살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는(롬 13:8) 바울의 말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아직 온갖 좋은 일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의 가능성과 능력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 개념의 과잉 상태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말짱한 정신으로 이런 문제를 심사숙고하는 건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회(카이로스)를 얻는 대로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대목에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착한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죄가 됩니다.”(약 4:17). 이런 말씀은 아주 간단하게 도덕적인 것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그것 이상의 좋은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개인들은 어디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지 질문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것들을 증명해 보이고, 그렇게 행하고, 그리고 바울이 언급하고 있듯이(갈 6:10) 믿음의 동료들에게 이런 것을 우선적으로 실천함으로써만 우리는 부단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우선적으로 믿음의 동료들에게 좋은 일을 해야만 합니까? 이런 주장은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부당하게 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흡사 위기에 처한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크기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간주하고 대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하셨으며, 그리스도는 그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는 철저하게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상호적으로 작용되어야 할 사랑을 최우선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함께 읽은 오늘의 본문에도 해당됩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사랑의 새로운 계명은 기독교인 사이에 있는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이웃 사랑은 아닙니다. 물론 일반적인 이웃 사랑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만 교인 사이의 사랑이 우선입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남긴 계명은 완전히 특별하게 그 제자들의 관계에 상호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끼리의 상호적 사랑의 우선권은 기독교 사랑이 그 기준을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러한 일치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요한복음이 바로 이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함께 신뢰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함께 신뢰함으로써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의식으로 부름 받았으며,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 15:12, 참조 17절). 이러한 상호성은 예수님과의 일치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성만찬에서 이 일치를 기립니다. 이 일치는 교회의 일치를 위한 세계적 연대성에서 우리와 모든 기독교인들을 연결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는 이러한 기독교적 연대성이 매우 부족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라는 의무와 구별된 기독교인들 사이의 연대성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에 상응하는 기독교인의 특별한 연대성은 기독교인의 일치를 틀림없이 두드러지게 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미래에 일어나게 될 전체 인류의 일치에 대한 전조로서 이 세상에서 인식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탁을 기림으로써 교회는 전체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실적인 징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 없이 진행되는 기독교인의 일치라는 이러한 특성들은 결국 파손될 것이며, 또한 명백하게 드러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인류 역사에서 맡았던 이런 기능을 현재의 분열된 상태에서보다는 앞으로 훨씬 잘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려고 하실 겁니다.

(1993.2.14,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예배)

성령의 약속

요 15:26, 16:13-15

대학교에서 취급되는 일에는 진리의 영보다 훨씬 중요한 그 무엇이 있을까요? 앎을 추구하는 대학교의 모든 노력에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과연 핵심으로 작용합니까? 진리와 앎에 대한 노력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을 하나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이 자기의 특별한 목마(木馬)를 타지 않고 대신 진리의 가르침에 봉사하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연구와 학설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배우는 사람은 아주 명백하게 참된 것으로 증명된 학설만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판단 없이 배우면 안 됩니다. 그래야 배움을 통해서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됩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의미에서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 중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가르치고 있지만 말입니다.

물론 생각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무엇이 참인지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많은 경우에 거의 불가능합니다. 모든 우리의 판단은 아무리 상이한 기준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잠정적일 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근대 학문이론에서도 체념과 의혹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진술의 정당성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 정당성에 이르는 길의 방법론적 명백성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제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진리는 늘 극도로 위대한 언어로 나타납니다. 더구나 개인들의 경우에는 모든 다른 진리와 조화를 이루는 것만이 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는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따라서 어떤 주장에 대해서 단지 옳다, 또는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겸손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일상의 삶에서 진부한 주장을 쏟아내면서 진리라고 말합니다. 더욱이 완전한 진리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학문에서는 우선 진리의 바탕을 잃게 되면 그 어떤 인식도 없으며 주장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 진리에 대한 요청을 실제로 완전히 전체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면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엇이 우리에게 참된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아주 어렵습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끌어주는 진리의 영이 있는데, 이 영이 바로 해결책입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속임수를 벗어나게 하며 진리를 구별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이로써 동시에 우리가 판단할 때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안전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대학생활만이 고유한 과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자유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학문적 유행의 지배에서도 자유로워집니다. 실질적이지 못한 논쟁이나 야망, 원한이 지배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우리 인간의 삶 일반은 진리의 인식과 단단히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근대가 학문을 통해서 기대했던 바의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간적 학문은 여러 면에서 단절되었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일에 별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영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영에 대한 언급은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연구나 인식 추구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성서의 생각은 지적인 통찰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일반적 언어관용에서 ‘진리’라는 말은 이와 달리 지성과 인식에 일방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에 대한 개념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이런 관점으로는 요한복음이 보도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이 말하는 영과 진리의 관계에서 무엇이 핵심인지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영의 도래가, 그리고 진리에 대한 영의 증거가 예수님과 어떻게 관계되는 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만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주어진다고 약속한 것은 아닙니다. 예언자 요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진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당연히 전체 창조는 이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욜 2:28,29). 이것은 오늘날 여전히 모든 인간이 영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특별한 방식으로 이 성령강림 사건에서 기억해야할 약속입니다. 영의 활동은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여전히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이미 영의 완전한 다스림과 능력에 대한 값이 미리 지불된 것입니다(롬 8:23). 따라서 우리의 생명은 마지막 때 주어질 요엘의 약속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요엘 예언자에게는 영을 받았다는 것이 특별히 예언의 은사였습니다. 마지막 때 모든 이들은 하나님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길을 인식하는 예언의 은사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여기서 예언의 은사를 협의로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요엘의 경우에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 인식을 통해서 특징화 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엘이 말하는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포함합니다. 인식은 생생한 일치에서 발생합니다. 그 역도 옳습니다. 즉 인식은 인식하는 자와 그가 인식하려는 자를 일치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로 갱신됩니다. 인간 생명의 갱신은 일반적으로 창조의 궁극적 완성에서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임하게 된다는 사실의 선포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제2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는 목마른 땅에 물을 부어 주고, 메마른 곳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리라. 나는 너의 후손 위에 내 영을 부어주고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내리리라.”(사 44:3).

하나님의 영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든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성서의 가장 오래된 창조보도에 의하면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숨’(Odem)을 불어넣었을 때 순간적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창 2:7). 하나님의 영은 인간을 살리는 숨입니다. 그 숨은 전체 창조에 임했습니다. 시편 104편에는 지구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적 호흡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시 104-30). 따라서 새로운 생명은, 즉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함으로써 얻어지는 생명은 영의 일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영을 통해서 예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로 인해서 얻어지는 새로운 생명을 희망하게 됩니다(롬 8:11).

바울에 따르면 이러한 새로운 생명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처럼 단지 영의 창조적 활동에서만 출현하는 게 아니라 생명의 영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따라서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희망하는 이런 생명을, 또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현실이 된 이런 생명을 일종의 ‘영적인’ 생명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생명의 하나님과 일치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핵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을 부어준다는 다른 성서 말씀의 약속에 담겨있는 의미입니다. 예언의 은사에도 역시 하나님과의 일치가, 즉 모든 예언의 토대를 구성하는 하나님 인식이 나타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갱신과 하나님 인식은 이제 요한복음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로 견인하는 영은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에서 언급된 영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니고데모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는 영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런 영은 예수님의 약속에서(요 15:26) 진리의 영으로 일컬어집니다. 요한에 따르면 우리 생명이 이렇게 갱신됨으로써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요 8:32).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사용된 언어관습과 성서의 언어관습과의 차이에서 볼 때 ‘진리’라는 단어의 이해에는 공동의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독립적이며 신뢰할만한 것으로 증명되는 것들을 가리켜 ‘참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우선 주장의 신뢰성이나 주장된 사태를 생각합니다. 이런 진술의 진리와 달리 성서에서 ‘진리’를 언급할 때는 완전히 포괄적인 의미에서 생명 일반에 있는, 그리고 인간 본질에 있는, 인간과 세계와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있는 ‘존재론적 진리’와 영속성과 신뢰성이 관건입니다. 여기서 통용되는 법칙은 스스로 영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이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에 대한 진술만이 제한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가 ‘참되다’고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무상하기 때문에 마지막은 영원한 하나님에게만 유효합니다. 우리는 그 분에게만 의지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단어는 그분에게만 해당됩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그 분은 참으로 영원하시고, 따라서 신뢰할 만하며, 우리의 생명을 존속시켜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속성은 그의 행위와 그 말씀의 신뢰성에서 증명됩니다. 이런 요소들이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서 상환되는 한에서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실성은 스스로에게서, 그리고 그의 창조에서 증명됩니다. 세계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은 이런 창조에 신실하지 않은 채 자기 자신에게만 신실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신실성은 그의 진리입니다. 즉 구약 말씀은 ‘신실’과 ‘진리’를 ‘에메트’라는 하나의 단어로 씁니다. 이런 기준에 볼 때 진리와 신실은 하나님에 대한 표현으로 적당합니다. 시편기자는 이미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말입니다(시 31:6).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를 증거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르기를 “나는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이 세상에 왔다.”(요 18:37)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에 육신이 된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의 생명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 했다고 말입니다(요 1:14, 17). 이 요한의 머리말에 따르면 이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즉 그의 명예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신실성이 계시되었습니다. 그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입니다. 여기에 바로 창조에 대한 신실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고 말합니다(요 14:6).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며, 이로써 생명과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들과 예수님을 진리로 간주하는 모든 말들을 아버지가 진리의 영을 보내서 예수님을 증거 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들어야만 합니다. 진리의 영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증거 할 것입니다. 이로써 이 영은 진리의 영으로 증거 될 것입니다. 물론 기만과 속임수의 거짓 영도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거짓 영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증거하고, 자신의 약속에 대한 신실성을 증거 하는 데서 확증됩니다. 따라서 이 진리의 영은 아들로서의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학의 학문적인 삶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탐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약속의 성취는 대학의 탐구와 학설 가운데 있는 진리 추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습니까?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은 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결정적인 언급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전체 창조는 모든 피조물들이 의지하고 있으며 눈여겨보아야 할 전체 창조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일에 집중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일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들은 영원을 갈망하며, 무상성의 짐에 눌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살아가는 한에서 피조물들은 이미 현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나오는 반사광을 피조물들에게서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은 모두 영에 의해서 생명을 유지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일로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일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전체 창조와 화해하심으로써 이제 하나님과의 일치로부터 출현하는 새로운 생명이, 또한 우리가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대학생활의 연구나 학설과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의 영 사이에 물론 연관성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 된 현실성의 진리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창조의 완성에 대한 그 현실성의 증거를 듣게 될 때 완전히 인식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단지 정당성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피조 세계에 있는 진리를 인식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광채가 창조 활동에 임하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아들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듯이(롬 8:22) 무상성이라는 멍에 밑에서 신음과 진통으로 시달리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죽음의 멍에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사건인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미 지금 하나님과 그의 신실성을 그의 행위에서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영을 받았습니다. 물론 영은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다시 거듭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즉 예수님과 더불어서 이미 시작된 창조의 구원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이 활동하시도록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진리를 인식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게 될 일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일치의 완성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눈 성만찬의 징표에서 우리에게 이미 현재적으로 축제가 된 것입니다.

(1986.5.11,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예배)

부활을 증거 하는 여인

요 20:11-18

우리는 오늘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절기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부활절 기간의 날씨는 늘 올해처럼 을씨년스럽고 변덕스럽습니다. 그러나 부활주일 아침의 태양은, 즉 새롭고 영원한 생명은 첫 번 부활 축일 이후로 모든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밝히 비춘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비추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유한하고 죽을 생명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서 그 생명 안에서 빛을 얻게 된다는 희망을 가득 품게 만듭니다. 이런 희망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대략 시작 부분에서, 즉 부활 산책을 다루는 부분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정신적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것처럼 들리는 이 말은 기독교인들의 부활절 신앙을 봄이 되어 자연이 기지개를 켜는 현상과 연결시킵니다. 파우스트의 이 말은 비록 위르겐 부쉐(Jürgen Busche)가 남독일 신문의 금년 부활절 단상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참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의미심장하게 보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절 신앙은 자연이 매년 기지개를 켠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에 반대입니다. 봄이 되어 자연이 기지개를 키고 가을에 다시 죽음을 반복한다는 이것은 단지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새롭고 영원한 생명의 현현에 대한 비유일 뿐입니다. 이것은 바로 썩지 않는 생명의 봄입니다.

이런 사건의 빛에서 기독교는 예수님의 탄생 이후로 예수님의 전체 길을 새롭고 심원하게 이해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즉 부활절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고상한 사람의 비참한 최후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 실패한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의 빛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죽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죽을 운명에 참여하신 분이십니다. 부활절 아침의 빛에서 기독교는 이미 베들레헴의 초라한 말구유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탄생이 세계의 구원자가 오신 사건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성탄절의 빛은 부활절 태양의 반사입니다. 이 부활절의 태양이 기독교인의 전체 삶을 두로 비추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매 주일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주일이 다시 오는 것을 축하했습니다. 매 주일은 일종의 작은 부활절입니다. 따라서 주일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대신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축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은 한 주간의 첫째 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세계 창조의 일곱째 날에 대한 원형(原形)이듯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간의 첫 날인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 영원한 생명이 새롭게 창조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전체 삶을 통전적으로 변화시켜나가는 기독교의 부활절 기쁨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도들의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이 사도들에게 생명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앞서 서간문 읽기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공동체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 서술된 이 사실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분이 나타나신 사례를 일일이 열거했습니다. 이 현현은 교회의 토대가 되었으며, 또한 예수님을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선교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분은 제일 처음으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에게, 이어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고보는 이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큰 무리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이들은 모두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써 부활하시어 하나님으로 올림 받은 주님의 사자이며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즉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들의 목록입니다. 교회의 토대는 바로 이런 증인들에게 있습니다. 바울의 이름은 이런 목록의 마지막 자리에 등재되어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분이 자기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바울은 공동체를 억압하는 입장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부활 증인의 목록에 여인들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들도 역시 교회의 부활절 전승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의 부활절 전승에서 이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갈릴리 출신들로서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몸을 숨겨야만 했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 중에는 모든 복음서를 통해서 간추려보면 세 명의 이름이 명시적으로 거명됩니다. 세 명의 여인들 중에서 한 사람의 이름은 오락가락합니다. 그런데 게네사렛 호수 부근의 작은 마을인 막달라에서 온 마리아는 모든 복음서에서 공히 세 명의 여인 중의 한 사람으로 언급됩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매장될 때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멀찍이 바라보았겠지요. 그러나 모든 복음서는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부활절 아침에 그곳에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녀들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이미 천사가 그녀들에게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사실을 보도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여기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부활하신 분이 직접 여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도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이르러서야 무덤에서 도망치는 길에 부활하신 분이 직접 여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온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 뿐이라고 진술합니다. 이런 이야기와, 또한 부활한 분이 그녀와 만났다는 이야기는 아마 원시 기독교가 서로 나누고 지켜온 모든 상이한 종류의 부활절 이야기 중에서 가장 섬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바울의 전승에 나오는 부활 증인의 목록과는 다릅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부활한 주님의 자기 알림이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교회의 신앙은 바로 바울이 증거 하는 이런 주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약간 다른 종류에 속합니다. 이 이야기는 부활한 분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한 인간에게서 발생하는가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를 예로 들면서 우리의 삶을 견인하는 이러한 신앙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특징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예수님이 그녀의 뒤로 오셔서 왜 울고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한 여자가 지금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부활하신 분의 외적인 현현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분명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정원사로 착각했다는 본문의 표현은 첫 기독교인의 부활 복음을 반대한 유대인들이 주장했던 일종의 풍자입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결코 만나보지 못한 채 대신 우연하게 그 자리에 있었던 정원사를 예수님과 혼동했을 뿐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주장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반론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 사람을 처음에는 정원사로 생각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녀는 어떻게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부활하신 분이 그녀와 만난 그 외적인 현현이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다시 인식할 수 있게 하지는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제 요한이 전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바로 두 번째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마리아가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갑자기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역시 부활하신 분의 현실성을 확신해야만 하며,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우리 모든 개개인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부르심을 우리는 너무나 건성으로 듣습니다. 세상의 소문은 너무 강하고 요란스러워서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시는 예수님의 조용한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음성이 우리 일상의 요란스러움을 꿰뚫고 다가오는 순간이 우리 모두의 삶에 있습니다. 흡사 다른 세계로부터 오는 음성을 통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는 것 같은 순간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런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마리아처럼 이렇게 대답합시다. 라보니, 주님. 우리의 삶은 이를 통해서 변화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관찰하는 모든 방식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예수님이 이런 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이름을 부르신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빛을 받아 빛나게 된다는 사실을 듣고 체험하는 일이 아직은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삶의 경험에서 우리를 부르신, 그래서 늘 모든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와 이렇게 만나시는 부활한 분의 현실성은 그렇게 명백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곧 오늘 이야기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나를 붙잡지 말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 기쁨으로 예수님을 얼싸안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걸 막으셨습니다. “나를 붙잡지 말라!”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신기하게 들립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직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못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이 그를 얼싸안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올라가신 다음에는 다시 그를 얼싸안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승천을 통해서 우리에게서 떠나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분은 마리아에게 가시적 형태로 나타나셨는데, 이 형태는 일종의 익명(Inkognito)입니다. 마리아는 그를 정원사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정원사를 얼싸안으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활하신 분의 생명은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얼싸안을 수 없습니다. 사태가 이랬기 때문에 마리아는 부활하신 분이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원사는 부활하신 분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요한이 전하고 있는 또 하나의 다른 부활절 이야기, 즉 믿지 못했던 도마 이야기와 완전히 대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은 도마가 자신의 상처에 손을 넣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도마는 이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했고 대신 정원사만 보았지만,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곳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얼싸 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변화하신 그 새로운 생명은 정원사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피상적으로만 좋은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마의 불신앙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분이 어쩔 수 없이 실제로 지상의 육체로 만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분이 왜 부활절 이야기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셨는지 대충 알만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형태를, 즉 영원성으로 변화한 생명의 형태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경우에 이러한 새로운 생명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얼싸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만찬의 초청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새로운 생명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이 만찬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가 먹는 빵처럼 포착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명은 그 자리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변화됩니다. 이는 흡사 그분의 말씀과 교회의 신앙이 고백된 다음에 빵과 포도주에 예수님이 현재 함께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부활절이 비추는 빛의 능력이며, 우리의 죽을 생명과 모든 창조를 비추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입니다. 아멘.

(1995년 부활절, 그래팰핑, 평화교회)

믿음의 의

롬 3:21-28

오늘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에서는 루터교 세계연맹 산하에 있는 루터 교회의 이름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칭의(稱義)에 대한 공동 선언문이 채택될 예정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가 기독교인의 분리, 신앙과 교회의 분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식적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종교개혁 시대 이후로 처음입니다. 교회의 분리로 인해서 사람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했으며, 교회의 기독교적인 증거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심하게 훼손당했습니다. 이번의 공동 선언문 채택으로 분리가 완전히 극복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런 목표를 향한 중요한 단초가 놓인 것입니다. 특히 그 당시 분리에 이르게 된 핵심 문제가 풀릴 수 있는 그 초석이 놓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양측은 오늘 이렇게 공동으로 고백합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의(義)롭다고 인정받습니다. 따라서 이제 16세기 이후 이런 문제로 인해서 교회 사이에 벌어지던 교리적 유죄 평결이 그 세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칭의(稱義)라는 것이 도대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여기서 왜 신앙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쓴 편지의 한 부분인 3장21-28절이 그것입니다. 사도의 진술들은 루터의 가르침과 루터교 교리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명시적으로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루터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는 ‘오직’이라는 단어를 첨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문장과 똑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상관없이”,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라는 이 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는 말과 같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삶의 질서라 할 수 있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거룩하다고 주장합니다. 계명은 “거룩하고 정당하고 좋은 것”이라고 말입니다(롬 7:12). 이런 계명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옳다고 인정받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당하다고 인정받습니다. 즉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입니다”(롬 2:13). 인간의 의는 인간의 태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에서 율법의 실천자들을 옳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슨 의미로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는 의로워질 자가 하나도 없다고(롬 3:20) 말하는 것입니까? 이 말의 핵심은 분명히 인간을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결정적인 요소는 좀 다릅니다. 즉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 자신과 그 행위만이 결정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고유한 하나님의 의(義)를 계시하셨습니다. 이러한 확증으로부터 이제 우리가 읽은 본문이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과 체결하신 약속을, 즉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맺으신 약속을 그가 신실하게 지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인류는 그런 약속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런 약속을 실제적인 삶 가운데서 지킬 것을 기다리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인간과 맺으신 약속을 지키십니다. 더구나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훼손시키는데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담지 되어 있는 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스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신실하게 대하십니다. 바울에 의하면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에 담긴 의미입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죽음에서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은 인간들이 그를 죽게 했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을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신실하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속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극복합니다. 이 분리는 죄를 난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복음 사신의 빛에서 볼 때 우리를 위한 속죄입니다. 죽음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역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각자의 생명이 처해져야 할 죽음의 운명과 결합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죽는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장차 당하게 될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가 연결된다면 우리는 결국 그의 생명에 참여할 것이며, 하나님과 영원히 연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사명과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을 향한 자신의 신실성과 약속의 의를 증명했습니다. 우리가 바른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그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 원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문제를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명에 상응하는 율법을 행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따르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을,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런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 자체를 신뢰함으로써 발생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간과한다면 그 어떤 선한 일들도 우리를 돕지 못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고 가치가 풍부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이 모든 것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의 사명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의로움을, 그리고 우리 인간과 맺으신 약속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요청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신앙을 통해서 발생하며,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이런 신앙으로 살아감으로써 발생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는, 즉 약속의 신실성은 우리에게서 그 목표를 이룹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롬 3:26).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이런 신앙의 모범과 전형으로 제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믿었던 약속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목표로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로움을 획득하게 된 원인입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 신앙은 의로움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연관해서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사실에(롬 4:5) 대해서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이 경건치 않았다는 말은 그가 그 당시에 율법 없이, 단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체결하신 약속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사람을 받으셨다는 말은 아브라함에게는 증명할만한 업적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에게 요청할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에게 요구할만한 자격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구원을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조건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의 죽음을 통해서 행하신 그것에 대한 신앙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오직 이렇게 믿는 사람들만 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오직 믿는 사람만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전체 삶을 포괄합니다. 왜냐하면 이 삶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왔으며, 또한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에 대한 신뢰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에서 흘러나오는 행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루터는 늘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루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루터를 부당하게 오해했습니다. 루터가 좋은 행위를 부정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계명을 성취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사건이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 자신의 신실성, 우리와 하나 됨의 확실성을 증명하셨습니다. 오직 이런 것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집니다.

우리는 자기의 생각대로만 살려고 하는 인간으로서, 즉 죄인으로서 결코 하나님과, 또한 그의 영원한 생명과 일치될 수 없습니다. 죄인은 죽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자기 삶에 있는 빛나는 모든 내용들은 사라집니다. 이것은 지난 모든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비록 인간이 지난 모든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자기 생명이 사라진다는 통찰로부터 도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태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우리의 생명은 영원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 됩니다. 따라서 믿음이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이 곧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의로워진다는 교리의 내용을 가장 짧게 요약한 것입니다.

(1999.10.31, 뮌헨, 마태우스 교회)

세례

롬 6:3-8

기독교가 시작한 이후로 기독교인은 세례를 통해서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세례는 물속에 잠김으로써 베풀어집니다. 강이나 세례 탕에 잠김으로써 말입니다. 세례 사건에는 세례를 받는 사람 말고도 세례를 베푸는 집례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 세례를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은 세례 집례자가 피세례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풂으로써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로 인해서 이제 피세례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탁됩니다. 이는 곧 피세례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세례에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겨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통해서 우리 생명의 주님이 되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의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면 말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믿고 있는 그분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문자 그대로 우리 자신을 비워내야만 우리가 신뢰하는 그분에게 의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의 행위에서 현재적으로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신앙의 행위는 늘 거듭되고 강화되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그분에게 단번에 위탁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결단에는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겠다는 사실이 포함됩니다. 세례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는 우리의 전체 인생에서 거듭 거듭 새롭게 각인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매일의 신앙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처럼 신앙과 세례는 상호간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는 왜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바로 그분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죽어야 할 우리의 생명은 보다 높고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들어갑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했다는 것은 그들이 어린 자녀들의 생명으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고 있는 분의 축복을 애초부터 받게 하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 의하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탁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그의 생각은 바로 유아세례가 베풀어질 때 좀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아세례에서는 이 어린아이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상에서 죽음에 해당되는 게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한다는 사실만을, 즉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심으로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약속에 참여한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예수님의 길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롭고 영원한 생명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도가 늘 강조했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 놓으신 일은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예수님과, 그리고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죽음은 경건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인간을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또한 이로 인해 결국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말입니다. “무덤에서 당신의 은총이 선포되며, 죽음의 나라에서 당신의 정의가 드러납니까?”(시 88:12). 시편 기자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만, 이에 대한 답변은 “아니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으며, 자기 생명으로부터도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려내셨으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음에서 그와 하나가 되도록 보증하심으로써 그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죽는 순간에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으며 생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래에 당하게 될 죽음은 세례에서 아주 특징적으로 제거되었으며, 대신에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서 살아갑니다. 이런 일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물속에 잠기는 사건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과거의 인간은 죽고 대신 우리 안에서 새로운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세례를 통해서 앞으로의 죽음이 상징적으로 선취되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사실적으로 진술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으며, “세례를 통해서 그의 죽음 가운데서 미리 장사되었습니다.”(4절). 그러나 우리는 아직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이 부활은 우리가 여전히 희망하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향해 나아가야 할 미래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우리는 그와 더불어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9절).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발현하는 새로운 생명의 미래는 이미 지금 여기 지상의 삶에 개입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진술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새롭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견인해 나가야만 합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됨으로써 우리에게 보증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더 이상 죽음의 두려움에 의해 규정되도록, 또한 제한적인 생명에서 가능한 최대한으로 확대시켜보려는 자기 모색에 의해 규정되도록 내버려둘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에 대한 죄의 통치로부터 자유롭다는 생각을 이런 사실과 연결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됨으로써 이제 죽음이 세례를 통해서 이미 선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은 상호 관련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죄의 마지막 결과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과 같은 장(章)에서 진술하고 있는 대로 죽음은 인간의 죄로 인해서 지불된 값입니다. 인간은 그 값을 지불해야만 할 존재들입니다. 죄는 왜 죽음을 불러옵니까? 왜냐하면 죄는 우리를 생명의 원천과, 즉 하나님과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죄에는 이미 죽음의 씨앗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은 죄를 지었기 숙명적으로 받아야 할 난폭한 징벌은 결코 아닙니다. 죽음은 단지 죄의 본질이 전폭적으로 작동하는 것뿐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격리, 우리 생명의 원천으로부터의 격리입니다. 죄와 죽음이 상호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에 처해진 우리의 생명은 늘 죄에 연루된 상태로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는 죄의 통제를 받습니다. 우리는 죽어야 그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에 당하게 될 죽음이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에,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해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력의 탐욕에 더 이상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제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신뢰함으로써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런 생각을 올바르게 명상해야만 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죽음이 선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길은 이제 우리가 받은 세례를 추가적으로 실행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에서 여전히 죽음을 맞아야 하는데, 이 죽음은 세례를 통해서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과거의 삶에서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빠져듭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마틴 루터의 핵심 사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진술을 1529년에 집필된 루터의 대(大)교리문답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세례의 능력과 기능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것은 “옛 아담이 죽는 것과 다른 게 아닙니다. ... 그 다음에 새로운 인간이 출현합니다. 이런 양자가 우리 삶을 오랫동안 끌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삶은 일상적 세례와 다른 게 아닙니다. 한번 시작한 다음에 늘 지속되어야 합니다.”(BSELK 704). 왜냐하면 세례를 통해서 “은총, 영, 그리고 옛 인간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간이 등장함으로써 강해집니다. 따라서 세례는 늘 그렇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옛 인간을 다시 자유롭게 제어해나갈 수 있습니다.”(706).

루터는 세례를 기독교적인 삶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즉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얻어지는 죄의 용서가 기독교인들의 일상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죄를 통해 상실될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반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생각에 빠지게 된다면 세례가 우리의 전체 삶의 길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간과되는 것입니다. 이 세례는 우리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죽음이 선취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기독교인의 전체 삶은 일종의 참회 사건이라고 할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참회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 우리의 전체 삶의 길에서 하나님에게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의미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회는 옛 사람을, 즉 죄의 사람을 철저하게 제어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른 것을 의미합니까? 따라서 당신이 참회하면서 살아간다면 당신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706). 세례를 통해서 한번 죄를 용서받는다면 “마찬가지로 사죄는 매일, 평생 우리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은 옛 사람을 목매다는 것입니다.”(707).

오늘날 개신교에서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너무나 쉽게 망각되어 있습니다. 이 의미는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그렇게 강조했던 바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세례가 단지 기독교적인 삶의 시작에 불과한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 시에 드리는 죄의 고백이 마치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못한 이방인인 것처럼 들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 받은 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세례 받은 것을 기억하는 형식에서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을, 즉 죄의 사람을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장사지낸 우리의 세례 사건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례에 대한 이런 기억은 일상적으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통해서 이미 들어간 그런 상태보다 훨씬 더 기독교인다운 삶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체는 부활의 새로운 생명을 획득하게 되며 지금 이미 그런 생명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1998.7.19, 뮌헨, 마태우스 교회)

죄로부터의 자유

롬6:3-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뜻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의 삶도 역시 일반적인 세상살이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세상 사람들 속에 파묻혀 익명으로(Incognito) 살아갈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세상 사람과 구별할 수 있는 확실한 특징을 찾아보려고 할 경우에는 자칫 자기의(義)와 경건성에 빠질 위험성이 아주 농후합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인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임재 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바로 우리의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의 삶에서 혁명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죄의 용서이며,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에서 자유롭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혹시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과장된 표현에 불과한 게 아닐까요? 우리가 바울의 이 어법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가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두 가지의 오해를 가려내야 합니다. 첫 번째 오해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범한 죄를 그리스도가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죄에서 자유하며, 죄에서 사면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죄를 우리의 현재적 삶과 매우 밀착된 관계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삶에서 손쉽게 떼어낼 수 있거나, 다른 이에게 넘겨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오해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지난날 범한 죄를 거듭해서 용서해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의 ‘새로운 삶’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통해서 완성해야만 할 도덕적인 긴장의 한 메타포일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죄의 심각한 깊이를 간과하게 됩니다. 죄가 우리의 삶을 그 뿌리로부터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게 그렇게 말처럼 만만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게 됩니다.

바울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위에서 지적한 첫 번째의 방식이나 두 번째의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롬 6:7). 죄, 이것은 곧 고집입니다. 이 고집은 인간이 죽어야 멈춥니다. 이것은 소위 자연적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죄의 작용이며, 죄와 ‘고용관계’에 있습니다. 바울은 ‘죄’라는 말을 도덕적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죄라고 부른 것은 우리의 자연적인, 생물학적인 구조에서 그 심연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홀로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려다가 치른 값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추구한 이 자유는 매우 특이하고 드문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더 이상 자유니 뭐니 하는 게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다음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어야만 죄에서 자유로워진다면 결국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출구 없는 이 상황에서 하나의 출구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홀로 죽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죄 문제가 끝나버리는 죽음 이후에는 우리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살아있는 한에서는 죄가 쉽사리 사라져버리지 않는다는 이 딜레마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어느 정도나 그 해결의 시야를 열어놓을까요? 죽음의 운명과 비슷한 것을 함께 나눈다고 해서 우리가 이런 딜레마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공동의 경험은 우리를 무언가로 묶어줍니다. 이것은 곧 동료관계의 경험입니다. 고난을 함께 나눈 일체감은 우리에게 신뢰의 마음을 허락합니다. 특별히 고난과 죽음 앞에서 우리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의 전형이 우리에게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한 다음의 경구가 해당되지 않습니다. “서로 나눈 고통은 반으로 줄어든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마지막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운명의 연대나 유사성도 무(無)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운명의 일치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동일시됩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의 죽음에서 그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실존철학이 몹시도 강조했던 사실과 전혀 다른 죽음입니다. 즉 각자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죽음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관계된 모든 것은 자신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와 더불어 부활하게 된다는 희망을 품는다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일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릅니다. 그것은 종착역이 아니라 생명으로의 전환입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통로라 할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가 참여한다는 것은 그렇게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이러한 동일시가 발생합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죽을 운명을 일반적인 차원에서 스스로 감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전액계산제로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의 개별적인 죽음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특별한 행위가, 특별한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한다고 말입니다. 이 동일시는 세례 받을 때 발생합니다. 세례는 아주 특별하게 개개인들에게 베풀어집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각자의 이름이 불리며, 그의 이름과 묶여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에게 속했습니다. 그와 관계된 모든 것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런 동일시는 예전적 마술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부활한 분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강하게 만든 분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죽어야만 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의 미래를 보장받을 경우에, 또한 우리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묶임으로써 그에게서 일어난 부활의 길에 설 경우에 우리는 해방된 자로 현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죄로부터의 자유와 우리가 죽음의 저편에서 얻게 될 미래가 우리에게 약속되어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일회적인 사건이며, 역사적인 사건이며, 단 한번으로 끝나버린 사건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에 편입되는 것도 역시 유일회적인 사건이며, 예수님의 죽음에서처럼 우리에게서 끝나버린 사건입니다. 이는 흡사 전쟁의 노예들이 이 세상에서 휘두르던 손이 끝나버린 것과 같습니다. 세례도 역시 우리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것 역시 우리 뒤에 놓여있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뒤로 물러나 버린 게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죽음은 선취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죽음은 우리가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죽어야할 그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감당해야할 바로 이 죽음은 세례를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고대 교회에서 사용되던 세례탕이 이를 증거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지금 죽음과 죄에서 자유롭습니다. 1945년 5월 마지막 날 쉴레스비히-홀스타인에서 여전히 군사훈련이 있었던 것처럼 세상에서의 삶은 뒷골목에서 절뚝거립니다.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과 죄에서 이미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군사훈련은 계속됩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군사훈련에서 뛰쳐나올 자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죽음이 이미 세례를 통해서 선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이미 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사라져버릴 세상의 사물에서 그 어떤 궁극적인 연결고리를 더 이상 승인할 수 없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 고집과 자기 성취가 자기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와 모든 세상에서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죽음이 우리에게서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경우에 이 세상의 사물은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죽음 안에 거함으로써 죄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부활한 자를 희망함으로써 우리는 오늘 이미 이런 자유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56.7.8. 하이델베르크, 대학예배, 목사 안수식 설교)

생명의 영

롬 8:1-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신(독일어 Geist는 ‘정신’과 ‘영’이라는 두 가지 단어로 번역될 수 있다: 옮긴이 주)과 정신의 세계에 대해서 말할 때 주로 예술, 문학, 학문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서가 영을 언급할 때는 인간의 의식이나 사상이 아니며, 또한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문화의 세계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공동의 삶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뢰할만한 언어관용이 영에 대한 성서의 생각과 연계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일종의 학급이나 전체 학교에 영감을 불어넣는 정신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우리는 단체정신(Geist)이나 흥겹게 노는 모임의 정신에 대해서, 또는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민족정신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우리는 성령강림절 사건에서도 역시 인간 집단을 충만하게 하는 영(정신)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에서는 개인들이 자기를 초월할 수 있도록 고양시키고 고무시키는 어떤 능력이 관건으로 등장합니다.

개인들도 자기 자신에게서 이런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를 능가하는 어떤 영감이나, 또는 우리를 밝혀주는 통찰,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는 강력한 느낌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일에는 늘 영이 힘으로 등장합니다. 그 영의 엑스타시로서 작용합니다. 이 작용은 우리를 일상성에서 일탈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선포한 구약성서에서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술가들도 자신들의 작업에 영이 특별하게 임함으로써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모든 영적인 삶에는 이러한 몰아(沒我)의 경험에 대한 그 무엇이 작용합니다.

그러나 영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모든 영감이 선한 것은 아닙니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꼼짝 못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짱한 정신으로 판단할 수 없도록 무엇에 취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선한 영은 우리를 고양시키며, 그 다음에는 그저 단순한 기분전환이 아니라 말짱한 정신을 차리게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이르기를, 그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영은 어떤 근거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듭니까?

1. 영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바울은 영이 생명을 창조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교회의 사도신경을 통해서도 역시 영을 고백합니다. 그는 “주이시며, 우리를 살린다.”고 말입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자들의 새로운 생명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피조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의 힘은 모든 생명체에서 활동합니다. 이 양자는 서로 연관됩니다. 우선 우리가 영을 모든 생명의 능력이라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또한 신약성서가 하나님의 영에게 돌린 그 특별한 활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 영의 작용에 대한 이러한 직관은 구약성서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생명’은 단순히 어떤 구체적인 질료에 담긴 특징이 아닙니다. 생명은 육체의 현존에 부가되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2장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의 창조설화에는 인간의 창조가 보도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선 흙에서 한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형태의 코에 호흡을 불어넣었습니다. 이 호흡은 생명이며, 영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영은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붑니다. 여러분은 그 소리를 듣지만 그 영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생명을 주는 호흡과 숨은 이런 점에서 동일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시편 104편에 등장하는 단어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시편 104편은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30절). 이런 문장은 요즘 우리 주변에서 느끼고 있는 이 봄의 계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청록색과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는 식물세계의 갱신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당연히 비와 태양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생기 있게 만드는 바람과 하나님의 호흡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하나님의 호흡이 세계를 관통하고 모든 곳에 생명을 불러옵니다. 사실상 모든 생명은 호흡처럼 우리를 관통해 나갑니다. 그 호흡은 우리를 생기 있게 하며, 또한 우리는 그 호흡에 의존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호흡을 단지 받아들일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자기 자신의 피안에 있는 어떤 것을 받아먹고 삽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를 초월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서 자기를 초월해나가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작용합니다. 우리의 학문은 여전히 이런 통찰의 깊이에 들어가기 위한 도상에 있습니다. 생명은 살아있는 세포 현상만이 아닙니다. 생명에는 주변 환경이 있습니다. 땅과 자연, 공기, 다른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생명은 이 모든 것에서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구약성서는 이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신앙 고백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영의 활동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2.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영은 죽은 자가 부활하여 얻게 될 새로운 생명의 원천입니다. 영이 모든 생명의 근원인 것처럼 기독교적 희망이 지향하고 있는 모든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식물과 동물의 자연적 생명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생명도 역시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성서는 이에 대한 근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영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 피조물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려고 하며, 자신들의 뿌리와 단절되려고 합니다. 따라서 피조물들은 죽습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에는 이런 독립이 자기 모색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바울은 이것을 ‘육신’에 속한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이는 곧 그가 우리 생명의 연약성을, 또한 그것과 연결된 탐욕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 탐욕은 자기 모색의 특징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연약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우리 자신에게 설정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을 놓치고 맙니다. 이것은 ‘죄’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번역입니다. 죄는 우리 스스로 생명을 모색하고 유지하는 방식을 통해서 생명을 놓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에 의지하지 않고 대신 이런 연약한 현존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자기 모색을 통해서 생명의 뿌리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생기 있게 만드는 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 이런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따라서 죽음에 떨어졌습니다. 생명의 근원과 연결된다는 것은 그것을 향해 개방된다는 뜻인데, 이를 통해서 구원받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한 분에 대한 믿음으로 그 영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바로 이러한 부활한 분에게서 이미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영원하고 새로운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우리 안에 갖고 있다면 죄와 죽음은 우리를 생명으로부터 더 이상 분리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롬 8:11).

성령강림절의 기쁨은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축제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짐으로써 늘 우리에게 머물고 있는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된 모든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이 성령강림절에 축제를 여는 것입니다. 또한 봄의 절정기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그렇게 빛나고 있는 그 모든 것의 완성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독교의 기쁨으로 돌입합니다. 창조물에 들어있는 허무의 슬픔이 여기서 사라집니다.

3. 이런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결국 평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이 이 평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6절).

생명과 평화는 분명히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평화는 생명의 부분들 사이에 있는 조화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생명에는 분명히 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조화롭게 살지 않는 생명체는 자기와의 갈등에서 쇠잔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당장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시나브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약속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떨어져 있는 동안에 살아남으려고 그렇게 발버둥 칠 필요가 없습니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훨씬 옳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중에서도 역시 우리는 우리 생명의 허무함과 화해를 이루었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잘못과 한계와 부끄러움과 화해를 이루었다고 말입니다. 또한 우리를 이리저리 휘감아 도는 운명과도 화해를 이루었으며, 늙음, 병, 고독과도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생명의 약속은 우리를 이러한 모든 한계로부터 해방시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게 하는 아들의 영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한번만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그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강림절의 영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서로 간에 평화를 이루게 합니다.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루게 합니다. 여기서 정치적 타협에 의한 평화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전쟁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나, 또는 세계가 주는 평화만이 핵심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이러한 평화를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인간은 이런 평화 없이 지낼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열매를 맺는 평화는 훨씬 심원합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이 영을 통해서 우리와 내면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자라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인간 공동체의 이러한 갱신을 역사의 마지막에 임할 하나님 나라로부터 희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아직도 이런 평화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서로 간에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친교와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축제입니다. 성령강림절은 특별히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모든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희망하고 기도하게 만듭니다. 이 분열은 역사의 진행 가운데 있는 교회를 갈라놓았으며, 또한 오늘날도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이 하나 되기 위한 이러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모든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성만찬의 축제와 늘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께 기도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빵과 포도주의 형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시며, 또한 그를 통해서 상호간에 일치를 이루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 일치는 바로 세상을 위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그리고 우리에게 그의 영이 보증해주는 영생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감사할만한 기쁨에 의해서 우리 자신과의 평화가, 하나님과의 평화가, 사람들과의 평화가 일어납니다. 또한 여기에 바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일어납니다.

(1982년 성령강림절, 로흐함)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

롬 11:32-36

오순절은 성령 강림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아버지의 계시가 아들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오순절이 지난 다음 주일인 오늘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라는 세 위격으로 계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들 없이,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하는 영 없이는 결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들과 하나 되게 하는 영의 영원성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교부 아다나시우는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아들 없이는 존재한 적이 없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또한 아들은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신성은 아들의 신성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은 아버지와 아들과 불가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영을 통해서 하늘의 아버지와 하나 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런 하나 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결코 해체될 수 없는 방식으로 한 하나님이십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우선 아버지만 하나님이었다가 그 다음에 아들과 영이 그에 의해서 야기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과 영을 창조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 없이 결코 아버지가 아닙니다. 따라서 한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한다면 이미 아버지이자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양자는 영의 일치를 통해서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세계가 창조될 때 이미 아버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말씀으로 창조 사건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의 호흡으로 그 피조물들에게 생기(生氣)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요 1:1). 이와 비슷하게 히브리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아들을 통해서 그 현존이 유지되게 하셨다(히 1:2 이하). 이는 곧 아들이 이미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행위에 참여하셨다고 말입니다.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과 영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질적인 일치는 신약성서의 증언에 포함되어 있으며 예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교리를 통해서 언급된 것처럼 명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아들이 아버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언급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과의 일치에서만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들이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하나라는 사실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아들이 아버지와 영과 더불어서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은 성서적 진술에서 볼 때 실체적 내용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영의 삼위일체는 무엇보다도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세례가 베풀어질 때 사용되고 있는 세례 예식문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세례는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입니다. 이 삼위성은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전승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마 28:19). 이 구절에 하나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에게 붙은 공동의 이름입니다. 이런 표현보다 더 정확하게 언급될 수는 없습니다. 셋을 연결하는 하나의 이름, 즉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전제되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수많은 논의를 거친 다음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형성할 수 있기까지 3세기가 흘렀습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다함께 한 하나님입니다.

신약성서의 여러 본문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단지 암시적으로만 언급될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평화의 인사(계 1:4) 말고도 오늘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한 바울의 편지도 역시 이런 자료에 속합니다. 사도가 이스라엘 민족과 여러 민족의 역사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그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룬 로마서 9-11장 마지막 부분에 오늘 본문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혹 자기 백성을 무감각하게 만드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은 다른 민족들에게 유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32절). 구원 역사의 은폐된 의미에 대한 이런 요약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방식을 크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찬양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에게 드립니다. 아멘.”(36절).

이 말씀이 바로 우리의 설교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유대교의 유일신론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양식(樣式)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경우에 이런 양식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행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서,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라는 삼중적 표현방식이 삼위일체론의 구도에서 해석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초기 기독교가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사도의 말씀은 아버지, 아들, 영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나온 바로 그분은 아버지이며 세계의 창조자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만물이 그분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는 바로 그분은 기독교적 복음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창조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한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에게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위하여 있는 그분은 또 다시 아버지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창조자를 지향하도록 이끌어내는 이 힘은 곧 성령입니다.

이것은 곧 이 세계와 인류의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이 활동은 사도가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은 이슬람교도들이 생각하듯이 이 세상의 피안에서만이 아니라 창조물을 고유한 생명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고 이 세상 안에 현재 하십니다. 이분은 “개입하는 것” 뿐이라는 괴테의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괴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단지 개입할 뿐인 하나님은, 즉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순환하게 만드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이 하나님은 이 세상을 내면적으로 움직여나가고, 자연을 지키고, 자연 안에서 자리를 잡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살고 활동하며 존재하는 것들이 자신들의 힘과 영을 결코 상실하지 않도록 하신다. 이런 일에 그에게 어울린다.” 괴테는 기독교 교리가 말하는 창조의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주라는 체제가 움직일 수 있도록 최초의 충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에 개입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 우주 체제는 스스로 굴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괴테가 살던 18세기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괴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경외한 하나님은 만물이 그 안에서 “살고 활동하며 존재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표현은 사도행전에 보도된 것처럼 바울이 아테네에 머물러 있을 때 설교한 내용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바울은 그 설교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살고 활동하며 존재합니다.”(행 17:28). 괴테의 자연 경외도 역시 스피노자처럼 하나님을 자연 안에서 발견하든지, 아니면 이 세계 밖에서 작동하는 첫 동인자로 간주하는 방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양자를 모두 포괄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뛰어넘는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며, 또한 이 세상 안에서 현재 활동하는 분으로서 만물이 그를 통해서, 또한 그를 향해서 가는 분이기도 합니다. 범신론이 말하듯 하나님이 단지 자연일 뿐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현존 너머에 있는 것을 공연히 열망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반면에 영원한 하나님이 단지 피안적인 분이기만 하다면 그는 우리의 잠정적인 생명을 그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 채워서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에 피안적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당신에게 끌어들이기 위해서 우리 생명의 중심에서 현재 활동하십니다. 이런 사건은 우리를 일치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우리의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 일치는 예수님이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야말로 고통과 죽음에서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는 아들이 될 수 있는 영을 받았는데, 이 영은 우리를 아버지에게로 불러주십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인, 그 아빠에게 말입니다(롬 8:15). 바울은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를 드리면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와 영원히 하나가 되는 사건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면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삼위일체론이 구체적인 기독교 신앙생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추상적 개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주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구체적인 성취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마음을 집중시키면 됩니다. 우리가 아들로서 충만한 믿음 안에서 아버지에게 마음을 돌리는 일은 영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적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내면적 생명으로 끌려들어 가는데, 이는 곧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인 그분을 통해서만 창조된 게 아니라 그를 통해서, 즉 우리를 아버지와 화해하게 하시어 영원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인 그분에게 오게 하시는 아들을 통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인 그분에게 영원한 영광이 있으시기를. 아멘.

(1998년 삼위일체주일, 뮌헨, 마태우스 교회)

삶의 차안과 피안

롬 11:33-36

삼위일체 주일은 기독교 교회력 중에서 별로 인기 있는 절기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주일의 동기는 성금요일, 부활절, 오순절, 성탄절과는 달리 어떤 한 사건이 아니라 한 교리,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교리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교회가 나중에 이 교리의 근거라고 생각했던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신약성서에는 이 교리가 아직 들어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세례 명령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직접 언급되고 있지만, 이 말씀도 역시 삼위일체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4세기에 열렸던 두 공의회를 통해서, 즉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확정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니케아에서 열렸던 첫 공의회에서는 하나님과 아들의 단일성이 기독교 신앙에서 포기될 수 없는 토대라는 점이 주장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 어떤 제한 없이 하나님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는 영을 하나님의 신성으로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그의 영을 통해서 교회의 삶에서 다시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었으며, 우리는 교회의 전승과 그 삶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 자신과 연관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완성한 삼위일체론은 영이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라는 교리입니다.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론은 오순절과 가장 밀접한 이웃 관계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우리가 앞서 언급한, 그리고 우리 교회가 거의 모든 대축일에 언급하고 있는 신앙고백을 축제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신앙고백입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주교단은 이런 신앙고백을 통해서 니케아의 신앙을 재확인하고, 강화하고, 그리고 보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공의회가 ‘니케아’ 신앙고백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이렇듯 뒤늦게 기독교 도그마로 형성되었지만 이 교리는 분명히 기독교가 이해한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록 뒤늦게 명확한 형식으로 발전했지만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선포에서 처음부터 핵심적인 기능으로 작용한 하나님 이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과 그에게서 유래하는 영이 하나님과 일치하며 짝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과 그의 영 안에서 관계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지 그 어떤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이 교리의 사실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우 오랫동안 습관처럼 하나님을 아버지와 창조자로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현실성이 완전하게 드러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신성과 영의 신성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본질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은 첨가물이나 혹은 단순히 하나님을 생각하기 위한 부가물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런 생각에 갇히면 삼위일체론은 아주 졸렬하게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교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유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나 세계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이라는 한계 안에서 이미 고갈되어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오히려 아들과 영 안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는 일이 몹시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 바로 그 모습으로 생각하는 데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의 은폐된 곳에서 땅을 관리하는 아버지요, 창조자라는 표상이 지난날에는 아주 오랫동안 당연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표상은 의심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전통적인 하나님 표상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오히려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인 구도에서 생각하는 우리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지 모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인식론적 통로라 할 이러한 삼위일체론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고대 기독교가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는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만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능력이 정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러한 연결이 교회의 신앙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과 그의 통치가 그저 우리에게 요원한, 하늘의 은폐된 곳에 숨어있는 현실성을 의미한다고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 안에서 하나님은 현재의 현실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 사상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실성이 피안의 세계에 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현실성은 자체적으로 확고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계시된 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약간만 꼼꼼하게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경우에도 이미 그 하나님의 실존은 그가 세상이나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밀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야훼라는 자신의 이름을 바꿔 부르게 했습니다. 신학자들이 일종의 퍼즐 게임을 하듯 해석한 그 유명한 문장은 이렇습니다. “나는 현존하게 될 자로서 현존하게 될 것이다.”(Ich werde dasein, als der Ich dasein werde.)(출 3:14). 이 문장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 현존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미래와 그 성취의 때를 수세기에 걸쳐 기다려 왔습니다. 기다림의 세월이 거듭되어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미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미래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아직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현실성은 단순 명료하게 이미 결정되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경우에만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대한 기독교 사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직 완료되어버리지 않은 역사로 인해서 여전히 논쟁적인 대상으로 머물러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현재적 현실성은 아들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현재는 그 미래를 통해서 이미 규정되었으며, 또한 그 미래의 지평에서 밝혀졌다고 말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시오. 그리하면 그 이외의 모든 것이 당신들에게 주어질 것이오.” 이렇게 하나님의 미래적 통치를 향해서 살아가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지금 이미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현재 그 사람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현재 통치하고 계십니까?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 통치가 온전하게 작용하지 못하고 왜곡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미래에 의해 완전히 규정되어버린 예수님의 선포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은 현재 우리의 이 세상에 함께 계시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기독교의 선포 안에서 하나님은 현재 생명의 영으로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영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현현 했으며, 교회가 선포하는 부활 사신을 통해 활동하는 그 분을 말합니다.

영, 이 분은 하나님이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는 현실성입니다. 다가오는 나라의 주(主)이신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그에게 임한 그 영을 통해서 이미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영은 예수님과 완전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한 예수님에 관한 사신을 듣고 영접하는 이들에게도 전달됩니다.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현재는 단순한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유지하고 밝혀주기 위해서 선포된 예수님에 대한 사신의 능력 앞에서 우리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일종의 현실성입니다.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듯이 영은 모든 진리를 추구합니다. 영은 우리 실존의 심연을 개방시킴으로써 모든 생명의 창조자로 증명됩니다. 그는 바로 배부름과 자기만족에서 머물러있지 않는 영입니다. 이 세상의 고난과 불의의 중심에서, 우리의 반목하는 삶의 중심에서 자유를 일구어내는 영입니다. 전쟁과 죽음으로, 무의미와 의혹으로 뒤범벅이 된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평화의 영입니다. 생명과 관계된 일들을 찾아보기 힘든 이 세상에서 고난과 죽음을 몰아내고 생명을 희망하며 신뢰하는 영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내재한 무상, 고통, 고난에도 불구하고, 또한 늘 미흡한 우리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기쁨을 몰아오는 영입니다. 그분은 사랑의 영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일을 도모하고 그 일에 관계하는 사랑의 영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이란 모든 인간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며, 이런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빠져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영이 활동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현실성이 지금 함께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그 현실성의 바람을 너무나 미약하게 감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피안에서만이 아니라 차안에서, 바로 우리의 이 세상에서 찾아야합니다. 하나님의 피안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실질적이지 않습니다. 항상 피안에서만 살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라면 참된 하나님이 아닐지 모릅니다. 피안의 하나님은 그가 모든 것을 창조했으며, 그 모든 생명 활동을 야기하고 유지시키며, 또한 우리 생명을 규정하고 밝혀나간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현실성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현재의 생명에서만 현실성은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이 이미 모든 현실성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모든 언급은 공연한 일이며 쓸 데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현재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이 작용하는 부분은 우리의 생명이 자신을 초월하는 모든 곳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훨씬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이 되게 하는 힘에 의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초월은 기쁨의 순간에 일어납니다. 고난과 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서 생명의 기쁨을 강탈해 가는 일상의 소심증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과 사물이 근본적으로 불안정하지만 생명을 신뢰하는 데서 이런 초월이 일어납니다. 그 초월은 우리의 이웃이 전혀 사랑 받을만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랑이 실현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모든 불안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평화를 경험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이 차안의 세계에 사는 우리를 붙들고 있는 이러한 피안이 없는 한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불합리하며, 참된 자유와 의미 실현과 내적인 평화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현실성이라는 비밀은 우리 자신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우리 인간 삶의 고유한 비밀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 내면의 심연을 개방시키는, 그리고 피안으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피안(彼岸)적인 분이며, 동시에 우리의 삶에 차안(此岸)적으로 현재 함께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피안적으로 현재하기 때문에 그는 바로 우리가 삶의 한계, 불의, 모순으로 고통당하는 곳에서, 결국에는 우리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고통당하는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위기를 당한 모든 이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해방의 능력으로 작용합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으로 우리는 고난과 위기의 근원을 극복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 삶의 현존에 나타나는 무의미성과 과도한 업무에서 찾아드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으로 우리는 인내심을 통해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으로써 우리의 현존은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에게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으로 말입니다.

(1969.6.1, 로흐함)

기독교인다운 삶의 스타일

고전 9:24-27

인생에서 어떤 중요한 내용을 발견한 사람들은, 즉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런 일상의 과정 가운데서 본질적인 것들과 비본질적인 것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비본질적인 것들도 의미심장한 삶에 내포되어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런 의미심장한 본질들을 걷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한 목표를 정해놓는다면 여기서부터 그 어떤 목표 지향적인 윤곽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이외의 것들이 사소해지는 반면에 이 윤곽들은 오히려 더 또렷이 부각됩니다. 이런 현상은 실제로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학생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목표가 모든 것을 생명으로 집중시키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그 목표로 통전되며, 더 이상 잡다한 일로 분산되지 않습니다. 삶이 스타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스타일은 어떤 체계가 없는 산만한 상태로부터 구체적인 일관성이 생성되는 곳에서 늘 발생하는데, 이 일관성은 전체와 상호간에 조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바른 금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금욕은 절제를 위한 절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잔뜩 욕심이 생기는 일이지만 억지로 절치부심하면서 그 대상을 멀리한다고 해서 순수하고 올바른 금욕이 달성되는 게 아닙니다. 이런 금욕은 오히려 잘못된, 늘 그렇듯이 위선적인 태도에 불과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금욕 생활을 하던 내 친구는 결국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자고로 늘 절제해야 하는데, 죽을 때까지 그래야 한다네!”

잘못된 금욕은 무척 수고가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사실은 별로 큰 성과도 없습니다. 이와 달리 참된 금욕은 수월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금욕은 사실상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제는 어떤 분명한 목표, 즉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과업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당연한 귀결입니다. 인간은 놀랍게도 자신을 위해서나 자신에 관계된 일을 할 때 전혀 지루하게 생각하지 않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운동선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역시 아주 적절한 예입니다. 운동을 잘 하기 위한 훈련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때에 따라서 술이나 담배를 금해야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진정한 운동선수들에게는 이런 것들을 포기하는 일이 그렇게 결정적으로 힘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절제하는 고통이 그가 열심을 쏟는 운동에 의해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실제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마스커스 회심 사건 이후로 소위 완전한 헌신의 세계로 들어섰습니다. 그가 실천한 참된 초인간적 수고 뒤에 놓여있는 이 무조건성은 경탄할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서 수수방관하는 구경꾼으로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위대한 바울의 이 업적을 놀라워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우리 스스로 달려가야 합니다. 바울은 오직 한 사람만 상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계적인 육상 선수였던 짜토펙이나 헤리 같은 사람들과 함께 스타트 라인에 서있기나 한 것처럼 결과는 불문가지이니까 뛰어볼 필요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바울이 사용한 이 비유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용기를 잃거나, 그런 일을 시작하는 걸 몹시 두려워하게 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가 승리의 월계관을 얻을 수 있는 한 사람처럼, 또한 우리 모두 각자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처럼 달려야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달려야합니다.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도대체 우리가 어디를 향해서 달려야합니까? 이것은 현대의 모든 기독교 윤리 앞에 놓인 큰 난제입니다. 또한 오직 그럴듯하게 충고해주는 것으로 당장 눈앞에 놓인 목표에 대한 매혹과 그 자극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사람은 정확하게 달려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그 어떤 전형적인 힘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어떤 각인된 스타일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것은 일종의 결핍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결핍의 근거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서 스타일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향 없이 달리는 사람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그 모든 것이 될 그 목표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명명백백한 스타일을 허락했습니까? 바울은 자신으로 하여금 달려가게 한 썩지 않을 월계관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백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생명이며, 죽음으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다른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하나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 목표가 없다면 모든 것은 아무 쓸 데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오직 이 땅의 삶뿐이라면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불쌍한 사람입니다.”(고전 15:19). 그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과 구원의 미래가 없다면 기독교의 신앙은 공허합니다. 기독교인의 신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기껏해야 다만 무덤까지 이르는 미래를 희망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는지요. 다만 무덤까지 이르는 것이라면 현재의 삶을 즐기라는 오직 이 한 가지의 지혜만 타당할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면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고전 15:32). 바로 이 사실, 먹고 마시자는 이 사실이 현대인들의 비밀스러운 종교가 되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달음박질함으로써 재촉해갔던 이 목표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면 삶을 요령 있게 즐기라는 지혜 이외에는 남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지혜라는 것을 좀 더 정확히 주시하기만 하면 매우 시시한 것에 불과한데도 말입니다. 완전히 억압된 체념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온갖 수고를 다하게 될 뿐입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없는 한 기독교 윤리는 그 동기를 상실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도 역시 부활의 희망에서 솟아나는 그 능력이 없는 한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의 고통을 줄여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직면해야할 미래에 대한 불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만 합니까? 감옥에 갇히거나 박해를 당함으로써 겪는 괴로움, 혹은 우울증에 빠져버린 이들의 경우에 어떤 도움을 주어야만합니까? 이 모든 상황이 다시 좋아질 수 있다고 말해주면 됩니까? 그것보다는 확실한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행위가 중요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울 것이냐, 아니면 그 말씀 없이 도울 것이냐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돕는 일은 인간의 삶에서 필요 불가결합니다. 그런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결정적으로 도와줄 수 있으려면 무언가 다른, 거대하고 최종적인 것과 관계되어 있어야만합니다. 이는 흡사 예수님의 구원 행위가 거대하고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에서 일어나는 구원과 그 영원한 생명을 암시하고, 또한 그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희망이 없이는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 목표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세운 목표가 무의미해짐으로써 생기는 일종의 불안한 인간애는 죽음에 의해서 만사가 끝날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붙잡는 가장 극단적인 요소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적인 인간애의 근본은 역시 바울에 의해 영적인 힘으로 충만해진 부활에 대한 희망에 달려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확실한 것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지 모든 것을 좋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만을 막연하게 믿은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분명히 바울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을 향한 시각은, 그 부활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는 근거인데, 그 이외에서는 생명의 의미가 의문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모든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고 확실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길이 예수님의 고난을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우리에게 더 선명해지는 사실은 우리가 그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극복하는 승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죽음 이후의 미래를 인정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곧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경건한 요설(饒舌)로서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이 몸소 가신 길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이 입게 될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완전히 충만해져야합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 개인만을 위한 희망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며, 그의 우주적인 생명 세계에 대한 희망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위한 희망입니다. 이 희망의 표식에는 이웃에 대한 모든 봉사도 포함됩니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사랑의 행위는 그 행위를 동기화할 수 있는 목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목표에 완전히 충만해진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태도에서 이 목표의 윤곽이 또렷이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들과 구별됩니다. 우리 삶의 태도도 역시 일종의 스타일과 전형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세상 속에 빠져들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에 무조건 ‘동참하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소유했다고 해서 우리도 그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이 목표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바울의 태도를 견지하게 될 것입니다. “전혀 소유하지 않은 듯이 소유하는” 태도를 말입니다. 세상의 일이나 사물에 대해서 이렇게 간격을 두는 것은 종말론적인 희망 안에서만 타당한 말입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희망이 없다면 이런 간격은 허무한 일입니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은 명료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심으로 구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고, 우리가 실행해야할 그런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1962.2.18, 마인쯔, 대학예배)

교회의 토대

고전 10:14-21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매우 상이한 삶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기혼자나 미혼자의 삶에서 다르게 보일 것이며, 부모와 자녀들, 건축 노동자와 기업가, 여선생님들, 또는 간호사들의 삶에서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이며, 신약성서가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을 뒤따르는 것이며, 그에게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드린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라는 사실과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바울이 오늘의 본문에서 언급하려고 했던 핵심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런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다른 한편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기독교인들 사이의 일치를, 즉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토대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중심 주제입니다. 이런 일치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놓여 있는 많은 차이점들을 극복하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차이점들은 사람들을 분리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모든 분리를 극복한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분리 자체를,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조화되지 못하는 모든 것들과의 분리를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핵심적으로 말하려는 바는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에 희생 제물로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의 다른 대목에서 기독교인들이 거리를 두어야 할 삶의 태도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5장11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한 말은 만일 어떤 사람이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음행을 일삼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남을 중상하거나 술 취하거나 약탈하거나 한다면 그런 자와는 상종하지도 말고 음식을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무한정 관용을 보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기독교 사랑은 바로 이것을 요구한다고 말입니다. 기독교 사랑은 사실상 모든 것을 견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허용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용서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말은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용납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애초부터 예수님과의 일치를 위해서 어떤 것들과 분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가 예수님에게 속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것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요청합니다. 실제로 조화될 수 없는 것들을 동시에 행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예컨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동시에 이교도적 신들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은 이성적으로 볼 때도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지 말아야 할 우상숭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이교도적 희생제물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마당에 말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주제이지 정치나 경제적 주제가 아니라는 점만 지적하겠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 사이의 종교적 차이점들이 상대적일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명백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통해서 세속적 문화 세계의 선입견에 대해서 언급하려는 것입니다. 이 선입견은 곧 사람들 사이의 종교적 차이점들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곧 우리 세계의 공적 의식에서 믿음과 종교는 결국 삶의 실질적이고 중요한 주제로 간주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바로 이 점에서 다르게 판단하고 다른 결과를 견인해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속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에만 기인하는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와의 일치를 원하시고 허락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활동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설교함으로서 그런 제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도록 허락하신 분이 실제로 예수님이십니까? 교회의 그 어떤 신앙생활에도 성만찬만큼 그런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성만찬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초청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이 일찍이 이 땅에 계실 때 여러 상황에서 베풀었던 식탁에, 그리고 예수님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징표로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식탁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때에 식탁에 초대되어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그 식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또한 평화와 정의 안에서 갱신된 인간성에 앞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보증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됨으로써 이런 구원은 현재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현재 함께 하시는 사건은 식탁에서 기쁨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인간의 일치를 가리키는 이러한 식탁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제자들에 의해서 축제로 지켜지기를 아주 분명하게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빵을 떼고 포도주를 마실 때 그 자리에 함께 하신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에 현재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식탁 축제로서 우리와 현재 함께 하십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현재 함께 하십니다.

빵과 포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만 분명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에서 육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현재 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빵과 포도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스스로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 되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건입니다. 모든 각각의 사람들이 빵과 포도주를 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계된다는 사실은 불가시적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 상호적 연대성이 발생한다는 것도 역시 불가시적입니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고전 10:17). 이 사실은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가시적 일치는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가시적으로 표현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교회의 일치로 견인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이러한 일치를 목표로 합니다. 이것이 곧 애초부터 예수님의 봉사이며 사명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만찬의 축제에서 교회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자기 자신과 연결하시며, 이를 통해서 상호간에 교회의 일치로 견인하십니다. 우리가 그의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교회의 현존에 토대를 놓은 역동적 사건을 만들어 가는데, 그것은 곧 모든 이들이 한 주님과 연결됨으로써 자라나는 기독교인의 일치입니다. 이 일치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단일성은 교회의 본질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그의 식탁에서 우리 모두와 연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분리와 교회의 분리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징표이기 때문에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직업의 차이, 개인적인 생활환경의 차이,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와 대립,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차이에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이런 차이들은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한 주님을 공동으로 믿음으로써, 그리고 주님의 식탁에 참여함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일치를 통해서 간단하게 제거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차이들은 우리를 서로 묶어주는 보다 심층적 공통의 기반이 있기 때문에 상대화됩니다. 심층적 일치는 모든 그 이외의 차이들을 종속 변수로 만듭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언급이 가리키는 바입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 3:28). 물론 차이들은 남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독교인들을 더 이상 분리하지 못합니다. 믿음을 통한 연결은 그 차이의 의미를 교정합니다. 즉 믿음을 통해서 차이의 특성이 바뀌고, 차이의 내용적인 규정이 바뀝니다.

물론 기독교의 역사는 이런 차이들과 그것으로 인해 벌어진 대립들이 기독교인들을 분리했으며,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 상대방을 말살시키려 한 전형적인 예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야 할 믿음이 우리에게서 매우 무기력했다는 사실을 정말 부끄럽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늘 거듭해서 인간을 분리시킨 수많은 대립들이 믿음의 이름으로 자행될 때 이 위험성이 고조되었습니다. 믿음의 일치는 이러한 대립을 엄하게 다루어야만 합니다.

물론 사람 사이의 대립들은 지양되든지 아니면 최소한 상대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끼리의 서로 구별하는 모든 태도는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현대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것이 기독교인의 친교 내부에만 해당됩니다. 즉 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안에서 우리가 힘써 예수님의 식탁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서로 연결되는데, 이 연결의 기초에서만 그런 요청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과 하나가 될 수 없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라고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복음 사신에 담겨 있는 이런 양면성을 이해하는 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울에게 배워야만 합니다. 서로 구별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늘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반대는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를 상대화할 것입니다. 우리의 세속 문화 안에서 이런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치들은 신앙의 일치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인식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일에 동조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토대하고 있는 일치는 일반 사람들 사이의 그 어떤 공동의 토대보다 훨씬 중요한 게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과의 연대성은, 무엇보다도 지구 곳곳에서 억압받고 소외된 기독교인들과의 연대는 우리에게 그 어떤 연대성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바울은 가능한대로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며 살라고, 모든 좋은 것을 행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런 여러 일들 중에서 기독교인들과의 연대성은 가장 우선적인 일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합시다. 믿는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갈 6:10).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함으로써 연결되어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과 연대성은 나누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서로 속해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함으로써 우리를 분리하는 분열을 극복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의 단일성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사실의 가장 중요한 징표입니다. 이 징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갚아야 할 의무입니다. 교회의 분열은 교회의 역사에서 벌어진 많은 죄 중에서 가장 크고 그 작용이 가장 숙명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20세기에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을 실제로 하나 될 수 있게 하는 일은 한 주님에 대한 신앙의 능력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주님은 그의 식탁에서 빵과 포도주에서 우리에게 현재 하시며, 우리가 서로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한 교회로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모든 민족과 각 시대의 모든 기독교인들과 연결하신 분이십니다.

(1988년 대강절 넷째 주일,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예배)

그리스도의 몸

고전 12:12-18, 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 사람 메네니우스 아그립파는 한편의 우화를 썼는데, 이것으로 민중 폭동을 잠재웠다고 합니다. 그의 우화는 우리의 현대 사회에서 또 하나의 다른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지가 오직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나누이고 대립한다는 이 우화는 바로 현대 사회의 모습을 묘사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요? 현대 사회에서는 노동분화가 계속됩니다. 한 종류의 노동은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모든 사람들이 입는 것에서부터 생각하는 것까지 거의 균일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인간은 여전히 개별적인 특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공동이라는 것은 계속적으로 익명이 되어갑니다. 개체에게는 숨겨져 있습니다. 개체들이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는 전체와 어느 정도로 관계되는지, 즉 개체들의 구성력이 어떤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대단히 풍요롭고 안정적인 조건인데도 불구하고 불안과 현존의 공허감이 우리에게 찾아듭니다.

바울이 그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인 오늘 성서 본문의 이야기는 아그립파의 우화에 비견될 수 있는데, 이 이야기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우리의 문제에 훨씬 사실적으로 접근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 본문에는 아그립파의 우화가 겨냥하고 있는 폭동이 핵심이 아니라 각기 개체들의 고립화가 핵심으로 작용합니다. 여기서 이 개체들은 자기 혼자 스스로 전체가 되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의 세상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고립화는 경우에 따라서 피해볼 수도 있는,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작용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개체 인간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에게 다가오는 어떤 운명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사회를 구성하는 이들이 서로 자기 입장에서 ‘유기적인’ 일치를 갈망한다는 그런 상(像)때문입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들 사이의 일치는 계속적으로 요구되지만 항상 그대로입니다. 이런 유기적인 일치를 향한 갈망은 무언가 낭만적이기도 하고 비애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갈망은 근본적으로 산업사회와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망의 위험은 이것이 우리의 산업-기술 사회의 생명 현실성을 악마화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더구나 이 갈망 가운데서 사람들은 인간이 만족스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정치-사회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할 연대에 대해 언급하는 게 분명히 아닙니다. 바울은 몸과 그 지체에 대한 그림을 통해서 교회를 정치-사회적인 세상과는 다른 공동체로 생각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함께 관련을 맺고 있던 이들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흥미가 없던 종교 집단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종교적으로 열광적이었던 이런 집단들과의 평화와 일치가 중요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에 특별히 종교적으로 강화된 상황에 직면해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물론 당시의 고린도 교회와 우리의 상황 사이에는 명백한 괴리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독교 모임은 방언, 예언, 능력 행함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교회에는 특별한 종교적 은사를 배양하기 위한 일치가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일상적 삶을 위한, 또한 세상에서의 활동을 위한 능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적 삶을 이끌어주시고 우리의 삶에 선물을 주신다는 사실에 감사하기 위해 예배에 참석합니다. 교회의 기능이 이렇게 변화됨으로써 파생된 곤란한 문제는 실제적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일치가 우리에게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마 어떤 이들은 이 말을 틀렸다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무종교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들 합니다. 종교는 이 세상의 과업에서는 벗어나서, 스스로 순환하는 어떤 고립된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별로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는 옳은 말입니다. 사실 종교적 요구를 배양하기 위한 일치는 지나치게 많습니다. 만약 기독교 공동체가 이런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짐을 지우는 격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 모임과 예배는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되어 왔고, 그리고 오늘도 그런 생각들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근원적으로 이런 것과는 무언가 달랐습니다. 스스로를 중심으로 순환하는 조직으로 자처해서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세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그리고 세상의 단일성에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 가운데서 인간의 일치와 평화와 친교에 참여함으로써 교회의 친교를 이룹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은 교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울도 역시 종교적으로 유별났던 고린도 교회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각성시키고 비판적인 말을 적지 않게 했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골로새서에서 교회에 둘러쳐진 장벽을 그리스도의 몸이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전체 코스모스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사명을 세상의 평화와 구원, 분리된 이들과의 일치, 모든 갈라진 것의 구원에 두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일에서는 벗어난 한정된 일치에만 둔다면 그 사명은 빗나가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사명을 바로 현재의 세상에서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현재적으로 나타난 모든 일시적인 것을 뛰어넘어 인간 세상의 운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현재 번성하고 있는 이 재물과 부의 제한적인 의미를 말짱한 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번영은 결코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생명에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재물은 분명히 인간을 여러 가지 살아갈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유는 새로운 염려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핵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각 개인이 자신의 특별한 직업을 통해서 이루어 가는 활동도 역시 자신의 생명에 완전한 의미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생명의 의미를 실현하는 일에 부분적으로는 협동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총총걸음으로 수레바퀴를 돌리다가 삶을 소진시킵니다.

기독교인들은 현대사회가 스스로는 생산해내지 못하는 그 무엇을 세상에 선물로 줍니다. 이것은 곧 세상을 넘어서는, 그러나 세상과 화해하려는 우리 현존의 의미를 생각하는 일입니다. 파손되는 오늘의 삶을 치료하기 위해 이런 생각으로부터 어떤 능력이 이 세상을 비춥니다. 이렇듯 기독교 공동체의 특수한 현존은 의미심장합니다. 즉 평화의 묘목으로서, 다양성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일치정신의 묘목으로서 말입니다.

이런 과업은 우선 대학에 몸을 담고 있는 우리에게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여러 상이한 전공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결국은 하나의 동일한 진리를 찾기 위해 진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학문적인 연구는 그것이 모든 특수한 개체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진리와 관계되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헛수고입니다. 진리의 단일성이 없는 한 학문은 그저 기술적인 쓸모에서만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단일성에서만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적 열정이 생성됩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진리가 특별한 통찰과 방식들을 밖에서부터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특수하게 구별된 연구방향에서 하나의 진리를 향한 행진이 그 흔적을 남겨야만 합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리의 단일성을 향한 이 행진에 별로 나서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장 특수한 것에만 집중하면서 그것을 참된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철학 스스로 오늘날 진리의 단일성에 대한 의식을 지켜내는 과업에서 종종 용기를 잃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런 과업은 아마 특별한 방식으로 신학에게 위임된 것 같습니다. 다른 학문과 협동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신학은 정말 대학사회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이 사회 안에서 대학의 위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할 때도 결국은 상이성 가운데서 이루어야할 일치입니다. 오늘날 여기서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우리 사회 안에서 정신적 가치와 교육의 중요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고통스런 질문입니다. 말하자면 노동시간의 단축이 개개인들에게 예술적으로, 문화적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줄수록, 동시에 현존의 참된 실현에 대한 요청이 증가할수록 이런 중요성들이 더욱 더 늘어난다는 사실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런 증가되는 요구들이 보상만족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만 할까요? 흡사 티브이, 라디오, 영화, 신문, 잡지 등을 통해서 ‘즐거움’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루한 오락이나 즐기면서, 또한 심연의 의미에 대해 전혀 무감각한 채 말입니다. 교육과 정신적 가치는 모든 곳에서 큰 소리로 찬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다른 어떤 곳보다 우리의 교육 여건이 훨씬 낙후되어 있습니다. 서로 다른 학년의 학생들이 뒤섞여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한 학급, 혹은 두 학급으로 이루어진 초등학교가 우리 주변에 여전하다는 이 부끄러운 사실이 이에 대한 반증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땅히 참된 초등교육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환상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즉 우리는 무엇을 위해 교육을 받아야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독교 전승은 어떻게 공헌하고 있습니까?

오직 상호적인 관계에서만, 오직 계속적인 관계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이 사회 구성원들의 모습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이런 질문의 언저리를 뛰어넘어서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이 시대의 거대한 정치적 질문까지를 포함합니다. 난관이 닥치기만 하면 항상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소심증과 달리 유럽의 통일이라는 과업이 가시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무언가 지침을 받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동구권과의 화해라는 과업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우리에게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결코 비굴한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공동체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를 향해 진일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에게 토대를 둔 단일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분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게 아닐까요? 그는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세상의 주(主)가 아닙니까? 모든 갈라진 것들의 통일과 화해와 평화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세상 안으로 돌진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교회의 현존은 오직 세상을 향한 그 사명에서만 의미가 충만해지고 그 내용이 풍부해집니다.

예수님에게서 발생하는 일치의 능력은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서 제시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그 능력을 어둡게 만들어 버린다면 일치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어떻게 세상에 확산시켜나갈 수 있습니까? 지난 날 세상과 교회 사이에 놓인 이런 틈이 숙명적으로 불가항력적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오늘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틈이 남김없이 폐기처분되어야 할 그 때가 와야만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에 담긴 단일성은 논쟁적이며 신학적인 형식보다 훨씬 거대한 것에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각기 다른 전승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단일성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의지를 표명함으로서 서로 다른 관심과 확신 가운데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단일성이 가능한지 일종의 전형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마인쯔 대학교의 로마 가톨릭 교회사가인 요제프 로르쯔는 새로운 시각으로 이 공동의식의 위기를 지적했습니다. 즉 위대한 교황인 요한23세를 통해서,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공의회를 통해서 기독교 안에서 일기 시작한 기독교의 공동의식이 마비될 위험에 처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일치의식과 운동은 더 이상 마비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상이성 가운데서 이미 획득한 단일성을 줄기차게 인식해나가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기구변화가 너무 지지부진하기 때문에 이런 일치운동이 과연 달성될 수 있는가 하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그런 회의적 시각이 이 변화의 가속화를 방해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요한 23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갑자기 등장한 전체 기독교의 의식이 가톨릭의 자기 이해를 새롭게 하는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요? 교황 바오로는 기독교의 분리가 로마 가톨릭에게도 공동의 책임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이 고백 앞에서 개신 교회는 대답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대답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죄를 고백했으니까 우리 개신 교회도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한다는 자기 정당성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이 분리의 책임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걸까요? 우리는 아마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런 책임 의식을 덜 느끼는 것 같습니다. 물론 루터 자신이 스스로 로마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게 아니라 로마 교회가 루터와 그의 가르침을 추방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책임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 수백 년 동안 계속해서 이런 분리의 길을 걸어왔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모든 분리되는 상황이 잘 되고 있는 일처럼, 이것이 기독교 교회의 본질을 파손시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 육체가 잘게 나누이면 그 생명을 유지시켜나갈 수 없듯이 교회의 분리는 교회의 생명과 일치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교회가 여전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기적입니다. 종말에 가서야 분리된 교회들이 재결합될 수 있으리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내던지는 무책임한 말에 불과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오늘 바로 이 순간에 기독교인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분리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지켜내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의 단일성은 물론 교회 조직과 직제를 통일시키는 과업에 달려있는 게 아닙니다. 단일성의 원천은 우리 모두를 꿰뚫고 들어오시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 모든 각자를 자기 자신과 연결시키시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모두 한 몸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모두 한 영으로 물에 잠겼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모든 기독교적인 것들과 그런 일들 위에 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숙고함으로써 기독교의 일치는 자라나야 하며, 또한 기독교인을 통해서 세상으로 반사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치와 단일성은 원래 믿는 자들 사이에 숨겨진 연대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교회나 전체교회 안에서, 그리고 대학교의 모든 일에서, 기독교인들에 의해 공동으로 조성되는 사회의 각 영역에서, 그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에서도 역시 표명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와 연합하신 그 한 주님이 역시 세상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주님의 미래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1964.6.21, 마인쯔 대학예배)

사랑의 능력

고전 13:1-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어떤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에 그것이 사람들에게 잘 이해되기보다는 오히려 오해받을 위험성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그가 하는 말을 아주 정확하게 경청해야만 합니다. 그가 사용한 낱말 중에서 독특하거나, 오랫동안 익숙했던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근본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그 유명한 사랑 예찬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오는 사랑이라는 낱말을 들을 때 주로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관련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말을 듣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적 연대감과 일체감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또는 우리 마음의 빈곳을 채우고 우리를 완성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없다면 우리 삶은 풍요로워질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결코 풍요로워질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모든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이런 정도의 서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말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과 온갖 은사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랑을 잃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즉 세상의 좋은 것들과 더불어서 사랑도 역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그 이상의 것을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 말은 약간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요? 문학적 수사가 아닐까요? 그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다른 여러 가지 가치 있는 일들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육체의 건강과 외모의 아름다움, 지성적인 능력과 예술적인 재능, 손재주나 감각적인 기능, 순수한 마음이나 단호한 결단력 같은 것들은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런 은사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걸까요? 우리가 이런 은사를 통해서 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음악세계에서 무언가 의미를 추구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어떤 깊이들을 경험합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멜로디와 하모니가 충만해지는 걸 들음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영적 넓이를 발견한다고 말입니다. 또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적 세계를 개척하며, 더 나아가 그 세계를 한 걸음 씩 발전시켜 나갑니다. 음악이 없다면 그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해질는지요! 다른 은사들도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 본문에서 바울은 이런 자연적 은사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사랑과 절대로 비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적 은사의 광채는 우리의 육체와 더불어 스쳐 지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당분간 남아있는 희미한 기억일 뿐입니다.

이제 여기 또 다른 종류의 은사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은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계시하는 하나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자연적 은사가 우리의 자연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처럼 영적인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에 묶이도록 해줍니다. 이런 은사 중의 하나가 방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계몽된 시대에 낯선 말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임재해서 비밀스런 언어를 입 밖으로 내게 하는지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언제 진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 게 아닐까요? 이들의 방언에는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열광과 몰아의 경험이 수반됩니다. 이런 경험에는 확실히 영원성과의 일치가, 또한 거룩한 것과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방언이나 몰아 경험을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의 계몽된 이들이 이런 열광적 경험을 혐오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직접 이런 경험을 했다고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방언도, 그 어떤 깨달음도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마 위에서 말한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한 그 근거가 불확실한 좋은 것들의 목록에 여전히 어떤 것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방언이나 몰아의 인식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즉 돈독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무언가 다르고 위대하다는 말은 열광적 경험을 예찬하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덜 낯설어 보입니다. 분명히 기독교인의 삶은 신앙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심하지 않으며, 굳게 믿는다는 것은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도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한 행위를 통해서 믿음이 보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가 종교개혁자들을 반대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편을 드는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한 업적들, 자선, 전 재산을 내어놓는 희생, 순교를 통해서 자기 생명을 드리는 헌신, 이와 같은 모든 것들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업적과 행위로도 나는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돈독한 믿음도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강철 같은 믿음으로 무장해도 “열려라. 참깨!” 식으로 하늘의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이렇듯 믿음을 그럴듯한 업적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매우 부당하게 자기의 방패로 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사랑을 가장 종교적인 가치나, 영적으로 충만한 교리들, 혹은 은혜로운 깨달음, 믿음과 희생 같은 것들과 대립하는 것으로 피력하고 있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모든 선한 것들이 사랑의 뒷자리로 물러나야 한다면 과연 어떤 자리에 놓여야 합니까?

바울에게서 깨달음과 예언과 믿음은 ‘은사’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사랑은 ‘은사’라는 말로 일컬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떤 은사처럼 사람에게 주어져 있거나, 사람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거나, 혹은 사람의 소유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사가 아주 확실하게 그의 개성이 되며, 더 나아가 그의 소유물이 되어서 그 은사를 통해 그가 이웃과 구별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이 은사는 그를 다른 이들 가운데서 돋보이게 합니다. 이 은사는 사람들이 왜 이런 은사를 가진 이들을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더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런 이들을 친구로 선택하는지에 대한 근거입니다. 은사의 차이는 인간의 차이를 확대시킵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벌려나갑니다. 그렇습니다. 은사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떼어놓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로 연결합니다. 다른 이와 일치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깨달음과 지혜로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하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다른 은사에도 통용됩니다. 은사들은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하고 유별나게 합니다. 또한 이러한 차이를 밖으로 드러낼 때까지, 그리고 자기 명성에 이를 때까지 그것만을 고집합니다. 이 은사들은 교만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랑은 사람을 서로 하나가 되게 하고 친교를 나누게 합니다.

사람이 자신들의 은사를 통해서 서로 구별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점에서도 역시 이런 재능들은 사랑과 다릅니다. 은사의 열매를 맛보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은사를 열심히 돌보아야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음악적 재능이 없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재능을 타고난 사람도 역시 성실하게 음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내적 즐거움을 만끽하고, 음악이 그 사람의 삶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훈련을 거쳐야만 하듯이 말입니다. 모든 은사는 이와 같습니다. 즉 우리가 꾸준히 연습할 경우에만 이 은사가 우리를 풍요롭게 합니다. ‘영적인’ 은사라 하더라도 여기서는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한번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 깨달음은 확실하게 유지되어야합니다. 그것을 거듭해서 기억하고, 거듭해서 심화시켜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약 이 깨달음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버린다면, 만약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식을 모든 삶의 상황에서 예민하게 감지해나가지 않으면 그것들은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자비심을 증명할 수 있는 연습은 가능합니다. 매 주일이나 평일에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연습도 가능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제 선하고 복 받을만한 습관들이 참된 상태에 도달됩니다. 인생의 많은 부침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참되게 신뢰한다는 것도 역시 훈련을 통해서 익숙해질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느 누구도 연습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익숙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는 사랑이 우리 삶의 심층에 자리한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 놓여있는 매 순간들, 어떤 형태로든지 다른 이들과 연결시키고 있는 매 순간들은 유일회적이며, 반복이 불가능합니다. 그것들은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반복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대가가 되는 일은 가능합니다. 또한 어떤 기술이나 설교의 대가가 되는 것도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 감정과 종교적 깨달음과 신실한 믿음에서도 역시 대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대가가 없습니다. 아주 노련하고 교양 있게 산다는 것은 여기서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며,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도 연습으로 가능합니다. 남을 도와주거나 손님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일도 연습을 통해서 익숙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습관은 결코 어느 한계를 넘어서 행해지는 일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런 일에는 결정적인 요소들이 부족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일이 말입니다. 친절과 동정심은 가면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속에 숨어서 우리의 선한 양심을 유지한 채, 우리 자신은 내어주지 않는 그런 가면 말입니다. 이러한 이중성 앞에서 우리의 헌신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재산을 통한 헌신이나 자기의 삶을 통한 헌신도 역시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바울의 생각이 아주 예민하게 작동합니다. 자칫 헌신과 사랑이 하나인 것처럼,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보다 친구를 더 사랑할 수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남에게 헌신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능력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사랑은 헌신의 덕, 즉 자선에서부터 시작해서 자기 삶을 희생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헌신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헌신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랑이 그렇게 도달되기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의 마지막 전심전력을 통해서도, 우리 삶의 전적인 희생을 통해서도 사랑을 성취할 수 없다면 사랑은 과연 우리 삶에서 어떻게 실제적으로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능력을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은사들을 조정하고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사랑을 이루어내고 공고히 만들려는 모든 노력은 쓸 데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이루어보려고 시도해본 사람은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어느 누구도 사랑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우리를 소유는 힘이며, 우리를 강하게 하는 힘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은 은사와 구별됩니다. 은사는 우리가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재능을 활용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도록 내맡겨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바람처럼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불듯이 사랑도 그렇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무능력합니다. 완전히 사랑만 의지할 뿐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불어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공허할 것입니다. 우리의 은사는 죽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사를 통해서 이룩해 놓은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사랑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 깨달은 하나님은 이론적인 짜 맞추기에 불과할 것이며, 그의 독실한 신앙은 고집스러운 집착에 불과할 것이며, 또한 그의 헌신도 역시 자기 삶에서 자기를 채워보려는 불확실한 시도일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적 재능들은 역시 사랑을 통해서만 인간다운 가치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 그것들은 모두 살아 숨 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고 연습해야만 할 은사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우리를 이끌어가고 우리의 좁은 세계를 풀어내어 열어놓는 힘이라는 사실, 이것을 우리 기독교 공동체보다는 이 세상이 훨씬 잘 알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시인들이 노래하는 사랑,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묶어주는 사랑은 기껏해야 우리에게 임하는 자연 현상적 능력일 뿐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런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랑을 생각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중세기 때의 미술품들을 보면 하늘의 신성한 사랑과 땅의 세속적인 사랑을 뜻하는 두 여인상이 종종 나옵니다. 온전히 삶에 대한 흥미를 가진 땅의 사랑과 세상에 대해 관심을 끊어버린 하늘의 사랑으로 말입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그림들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사랑만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이라고 해서 이 세상과는 상관없이 그저 허공에 떠도는 주변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오히려 우리 삶의 매 순간에서 작동하는 중심입니다. 이 사랑은 사랑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충만하고 넘치게 실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이 기독교적인 사랑 안에 그 근원을 갖습니다. 프리즘을 통과하여 꺾인 햇살이 여러 색깔로 비추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의 현실성이 무한하게 풍요롭다는 말은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화를 보고 경험한 그런 사랑과는 완전히 다르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풍요롭고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집착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에게 내맡기기보다는, 사랑을 통해서 그저 쾌적하게 살아보려고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의 뜻을 따르도록 사랑의 이름으로 요구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손에서 갈망으로, 즉 가장 좋은 것들을 소유하려는 갈망으로 변질됩니다. 갈망으로 변질된 이런 사랑은 항상 이기적입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실제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내재한 갈망의 환영과 연결시킵니다. 더 나아가서 이 갈망의 환영 뒤에 숨어서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대방을 실제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갈망은 자기 자신을 추구해나갑니다. 상대방에게서 자기를 성취해내려고 합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어긋나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를 모색해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결코 은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길일뿐만 아니라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영원한 것에 맡기지도 않고, 사랑 자체에게도 맡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만족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결국 지나가 버리고 말 은사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도 쉽게 만족해버리는 걸까요? 만약 사랑이 선물처럼 마구 뿌려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랑으로 방자한 마음을 먹게 될 겁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가 틀림없이 차지한다고 믿는 경우에만 그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리운 사람이 떠나는 경우나 우리가 원하는 갈망의 환영이 실제로 성취되지 않는 경우에 우리는 초조해집니다. 우리의 갈망에서 질투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근거도 없이 도처에서 악의와 시기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기 파괴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를 사로잡고자 하는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우리의 갈망에서 빚어진 환영이 우리를 속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그 사랑으로부터 벗어나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을 자기 집착에 묶어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충만하게 넘쳐나는 사랑의 현실성 뒤로 무한정 숨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랑의 현실성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집요하게 자신에게 집착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거듭해서 사랑이 우리에게 발생한다는 건 얼마나 신기한 지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집착에 떨어지고,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거듭해서 사랑의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생각해봅시다. 우리와 함께 하는 이런 사랑은 어디서 실제로 구체적인 모습을 이룹니까? 바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고전 13:4-7).

이 사랑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한 예찬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죄인으로 죽는 길을 가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이 이 세상에서 그 모습을 획득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궁극적인 사실이 언급됩니다. 사랑의 현실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그 어떤 다른 형태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사랑이 모든 은사와 대립해 있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사랑, 이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집착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이 여하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서 항상 활동하고 있었다는 바로 이 사실에서 은혜로운 하나님의 현재가 불순종하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증명됩니다. 하나님의 현재는 우리의 생명과 모든 인간의 생명을 견인해 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덕성도 아니고, 우리의 감정도 아닙니다. 사랑은 물론 자연의 힘이 아닙니다. 사랑은 결코 세상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은사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감당해야할 과제로서 우리 손에 넘겨졌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은사는 우리가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통해서 생명을 얻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과 그 신뢰도 역시 우리의 깨달음과 우리의 신뢰에 불과하며, 그것 자체만으로는 무기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한 사랑은 우리와 우리의 모든 은사를 철저하게 영적으로 만들며, 우리를 살아있게 만듭니다. 사랑만이 완전하며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은사와 달리 영원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귀한 은사라 하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의 자기 집착을 극복해 주시는 그 길에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이 자기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은 곳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군데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만이, 지난 삶을 벗어버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가슴에 충만하게 공급하시는 성령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랑이 구체적인 모습을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1956.2.12, 하이델베르크, 대학예배)

살아 계신 주님

고전 15:1-11

1. 본문주석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고린도전서 15:1-11의 내용은 신약성서에서 이곳에만 나옵니다. 물론 이 본문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원시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복음 선포의 기본적인 의미는 명명백백했습니다. 이 기본적인 의미는 신약성서 곳곳에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부활의 사실을 제시한 특징적 표현은 그 어디에서도 비슷한 유형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루돌프 불트만은 이것이 역사적 실증을 시도한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옳은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이런 증명은 눈으로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있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의해서 거명된 증인들 가운데 멀찍이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오직 기독교 신자들만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런 실증의 무게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부활한 분과의 개인적인 만남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사건입니다. 이런 만남에서 예상된 어떤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 없는 사건 말입니다. 앞서 바울이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같이 불신자였든 사람들도 부활의 현실성과 조우함으로써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15장 전체에서 핵심은 죽음을 극복하는 기독교적인 희망인데, 이 희망은 고린도 사람들에게서 논란거리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기대하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바로 논란거리였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희망의 토대를 근거로 해서 그 희망을 변증하기 위해서 바울은 15장 서두에서 기독교의 선교 메시지에서 중심이 되는 신앙고백인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거론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선 자신에게 전승되었던, 즉 예루살렘 공동체로 소급되는 신앙고백 형식을 인용합니다(고전 15:3b-5). 그 신앙고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의 무덤, 그의 부활. 이것은 곧 부활한 예수님이 베드로와 열 두 사도들에 의해서 증언된 내용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한 다음에 바울은 부활한 분에 대한 더 많은 증인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오백 명의 형제들’, 야고보와 ‘모든 사도’의 무리들, 끝으로 바울 자신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부활한 분의 현실성을 목격한 사람들의 숫자를, 또한 이를 통해서 부활 사건을 증거 할 사람들의 숫자를 충분히 늘려 잡고 있는데, 이것은 이 사건의 사실성을 “완전히 확실한 것으로, 그리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H. v. Campenhasen) 설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의 부활경험은 사도의 첫 전승이라는 틀에서 임시로 언급된 것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바울이 언급하는 부활의 사실성은 그런 것들보다 훨씬 진지한 그 무엇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공허한’(고전 15:14) 것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복음 선포는 결정적인 내용을 훼손시킬지 모르며, 따라서 그 내용에 대한 신앙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만들지도 모릅니다. 즉 신앙은 더 이상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확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닐지 모릅니다.

바울이 부활한 분의 현실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오늘의 본문은 별 말이 없습니다. 다만 15장 마지막 단락에 이러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난 마지막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고전 15:45). 그 영은 현재 우리처럼 살고 죽어야 할 생명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외부적으로 부여받은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7에 따르면 첫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의 영을 불어넣으시자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간은 완전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영을 통해서 출현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일종의 ‘영적인 몸’(고전 15:44)입니다. 따라서 그는 죽지 않습니다(15: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사람은 죽어야 할 생명이 변화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15:53 이하). 이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바울은 15장4절에서 그리스도가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어떤 잘못된 결론을 끌어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도가 이런 전승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또는 그런 전승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 당시 유대의 세계관에 따르면 죽은 자의 부활은 실제로 무덤이 비어있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현대 주석학자들의 편견은 일단 접어두고) 바울이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15:3-5에서 인용한 고대 양식은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셨다는 사실과 부활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빈 무덤도 역시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제 15장을 좀 더 풀어본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매우 특별하게 강조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의 희망을 강화하는 기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되며, 또한 그의 영원한 생명에도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혼란에 빠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역시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15:14). 이것은 곧 흄과 라이마루스로부터 뤼데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부활 전승에 대해서 근대 비판가들이 줄기차게 반복하는 논증과 똑같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역시 부활할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이와는 정반대로 자기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15:20).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살게 될 것입니다.”(15:22).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연결된 모든 사람들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부활의 사실성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부활을 그 어떤 다른 현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 신앙이 토대하고 있는 전체 현실성에 대한 이해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고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5:1-11을 중심으로 설교할 때 바울이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논증 연관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설교가 이 본문을 중심으로 전개되려면 우선 우리가 선택한 본문인 1-11절의 특별한 의도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 부활의 사실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한 분의 현현에 대한 바울의 보도를 통해서 이 사실성이 어떻게 증거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주제에 관심을 집중시켜야하며, 그 주제의 중요성에 대한 몇몇 증언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부활의 사실에 연관된 많은 것들을 이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중심에는 여전히 이런 사실 자체가, 즉 부활 사실 자체가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한 주님에 대한 사도 바울 자신의 진술이(15:8-10) 중심 주제가 되면 설교는 오늘 본문을 정확하게 풀어낼 수 없을지 모릅니다. 차라리 바울의 이 문장 그 자체만으로 설교 내용을 구성하는 게 낫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의 사명과 다른 사도들의 사명이 동일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비록 부활한 분을 목도한 많은 이들 중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부족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동일한 구원의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바울과 나머지 사도와의 차이를 상대화합니다. 그들 모두가 똑같이 부활을 증거하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자들과 다른 이들 앞에, 즉 부활한 분을 만남으로써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 앞에 살아 계신 주님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은 당연히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의 주장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 선포는 이런 반대 의견과 싸웠으며, 부분적으로 이미 처음부터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이유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는 다시 살지 못하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이로써 15장 전체에서 발전하고 있는 바울의 논증도 역시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역시 부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15:13).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부활한 주님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고린도의 기독교 공동체가 이미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15:11). 오늘날 이런 논증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즉 이 부활한 분의 현현 사건에서는 수신자의 영적인 취향으로 해명될 수 있는 환각이 핵심일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이런 문제 제기의 타당성은 죽은 자의 부활이 도대체 있을 수 없다는 기본적 원리에 절대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즉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 없다면 이 예수의 현현은 어쨌든지 다른 방식으로 해명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비껴가든지 아니면 포기하든지 말입니다.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원칙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부활 현현에 대한 대안적 해명들은 극도로 손상 받든지 불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설에 관한 진술을 더 이상의 예방적 조치 없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으니까 오늘 우리는 기독교의 부활 전승을 다룰 때 전설적 요소를 중요한 것으로 다루어야 할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물론 바울도 고린도전서 15:1-11에서 예수 부활이 사실이라는 점을 훨씬 인상 깊게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 문제가 모든 사도가 선포한 의도이며 내용이라는 점을 진지하게 주장합니다. 오늘의 기독교 설교는 이런 요청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죽은 자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주장은 오늘날 논박의 여지가 없는 경험 원칙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런 경험 원칙 앞에서 바울의 요청을 어떻게 믿을 만 한 것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언급을 사도들이 부활한 분의 목격자들이라는 자신들의 증언과 애초부터 연결시켰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런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예수 부활에 대한 사도의 복음 선포를 이미 받아들였다는 점을 상기시켰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대목에서는 바울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게 하고 비존재를 존재로 부르시는”(롬 4:17) 하나님으로 설명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오직 무(無)로부터의 창조와 비견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또한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바로 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한 분을 목격한 사람들은 ‘거짓 증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고전 15:15). 따라서 여기서는 예수 부활이 고립된 사건이라는 주장을 판단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성(Wirklichkeit) 일반에 대한 이해가 핵심입니다. 세계 현실성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 훨씬 거대하고 비밀 가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은 기독교의 복음이 주장하고 있듯이 예수 부활의 사실을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세계 현실성은 이미 성서가 말하는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제시된 적이 있습니다. 거꾸로 예수 부활의 사실을 신뢰하고 긍정하는 데서부터 현실성 일반과의 새로운 관계가, 즉 우리 생명의 세계가 담보하고 있는 현실성과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세계와 우리의 고유한 삶은 더 이상 죽음의 마력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뛰어넘어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룸으로써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2. 설교

기독교는 오늘날 예수에게 일어난 놀라운 사건만을 기억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서 발현한 세계 전환점을 기억합니다. 그 이전에 인간들은 모든 희망을 괴멸시키는 죽음의 그림자 안에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이 없다면 한 인간이 자기의 삶에서 성취하거나 도달하게 되는 모든 것은 죽음을 통해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부자 농부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자기 재산에 만족스러워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눅 12:20).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을 알지 못하는 세계는 차안에 속한 삶만을 추구합니다. 바울은 이렇듯 위로가 없는 인간 삶의 형식을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고전 15:32)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이것은 곧 참된 희망이 없는 삶(엡 2:12)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차안에 속한 모든 삶의 의미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죽음을 뛰어넘는 삶이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이 땅의 삶은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차안의 일에 몰두함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소진시키는 사람들과 달리 참된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을 향한 세계사적인 전환점인데, 그 생명은 곧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삶을 확신함으로써 획득되는 참된 희망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기독교적인 확신에 기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인상 깊게 여러 목격자들을 열거합니다. 이 목격자들은 앞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생명을 얻은 분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신 분을 본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즉 부활한 분과 만난 자기의 경험을 제일 먼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만남의 경험은 바울로 하여금 첫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하던 입장에서 백성의 사도로 돌아서게 한 그것입니다.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의 토대는 자기만의 고유한 체험에만 놓여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독립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목격자들을 일련의 순서에 따라서 나열했습니다. 부활한 분의 현현 순서에 맞게 말입니다. 제일 처음에는 베드로, 그 다음에는 열두 사도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복음서의 보도에 어울리는 순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요한복음서에만 보도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오백 명의 형제들에게 현현 하셨다는 사실도 언급합니다. 그런데 이 보도는 이곳 이외에서는 다른 데서는 전혀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 중에 몇몇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물어보아도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뒤로 바울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셨다고 언급합니다. 야고보는 베드로가 44년 헤롯 아그리파 왕의 박해를 받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 ‘모든 사도들’ 앞에서 예루살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된 사람입니다. 즉 사도 무리는 열두 사도보다 상위의 집단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부활한 분의 현현을 통해서 선교 사명을 위탁받은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사도 무리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목격자 순서의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배치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부활한 주님을 통해서 사도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목격자를 열거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은 고대의 역사에서 가장 믿을만한 증거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며, 또한 모든 이성적 의심과 인간 경험의 모든 법칙으로부터 예외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기정사실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 현현 사건이 그것 자체로 비상한 것이 아니었다면 바울은 당연히 이성적인 방식으로 언급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경험이 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죽은 자는 죽어 있을 뿐이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바울도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지 자기의 경험만을 증거로 삼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경험으로 인해서 자기 삶의 방향이 전적으로 바뀌었지만 말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가 살아나셔서 만나주신 증인들의 전체 목록을 열거했습니다. 이 증인의 목록에 나오는 이들이 모두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그들의 신앙은 아마 망상일지 모른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습니다. 증인들 중의 일부는, 즉 최소한 바울 자신과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부활한 분의 현현 이전에는 신앙이 없었다가 그 이후에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 증인들의 증거를 편견에 불과하다고 무시하는 건 정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증언과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경험의 일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죽어 있을 뿐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일반 법칙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부활 복음에 대한 모든 반대는 바로 이 명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직접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한다는 말이 옳다면 그리스도도 역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부활 증인의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이런 선입견에 농축된 경험 원칙이 분명하게 잘못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서 세계 전환점은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죽을 운명의 마력은 파괴되었습니다. 우리의 세계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우리는 실제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까? 자연과학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조심스러워집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의 발전 자체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갑자기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자연 사건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지식 훨씬 너머에 모든 것을 창조한 분이 계십니다. 창조자의 권능을 믿는 사람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에게도 역시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자를 있게 만드시는 분이라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합니다(롬 4:17). 창조 행위와 죽은 자의 부활은 바울의 이 진술에서 밀착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놀랍게도 무로부터 세계의 창조와 똑같습니다. 거꾸로 창조자의 능력만이 그가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선입견에 동조해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일련의 증인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은 모든 것을 새로운 전망으로 끌어들입니다. 현실성과 우리의 삶에 대한 시각을 변화시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으로부터 이제 능력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마력이 분쇄되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파괴된다는 두려움에서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우리의 삶은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삶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고 그와 더불어 죽는다면 우리는 그의 약속에 따라서 그의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되며, 하나님과 하나 되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희망은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비판하고 있듯이 이 땅의 삶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새로운 빛으로 바라봅니다. 지난 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것들이 이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며, 거꾸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중요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 쫓겨 더 이상 숨 쉴 틈도 없이 이 땅의 삶을 즐기려고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있으며 확신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제로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 함께 노래하고 기뻐합시다. 아멘.

(1998년 부활절)

새로운 인간(1)

고전 15:12-22

사랑하는 부활절 공동체 여러분,

오늘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교회로 오는 도중에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부활절이 지나면 이제 계절이 완전히 달라지겠지 하고 말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부활절 산책길에 나섰다가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겨울이라는 자연의 겨울잠에서 그들 자신이 깨어났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부활신앙을 그저 봄바람이 예수님에게 분 것쯤으로 생각하는 이런 오해가 올해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금년에 우리는 눈과 얼음 속에서, 여전히 고난과 불의와 전쟁으로 얼룩진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주님의 부활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봄을 보증하며, 죄와 죽음을 극복한 새로운 생명을, 그래서 마땅히 우리 모두에게 계시되어야 할 새로운 생명을 보증합니다. 이것은 곧 새로운 인간성의 탄생입니다.

정말 인간다운 새로운 인간, 이것은 영국과 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 이래로 근대사의 모든 노력이 경주해온 목표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소요에서도 들끓고 있는 갈망입니다. 자유주의적 휴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시스트들도 이런 목표를 당성하기 위한 여러 방식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옳습니다. 인간은 모든 억압적인 구조로부터, 정치와 경제의 억압으로부터, 또한 욕망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야합니다. 어떤 이들은 정치, 경제의 관리 형태들을 해체시킴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각각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달성할 수 있다고 희망하기도 합니다.

거의 모든 이런 노력들은 이 목표가 얼마나 요원한 것인지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황을 바꾸고 사회제도를 개혁하면 인간의 참된 본성이 자유롭게 확장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런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게 무엇인지 그렇게도 종종 도처에서 잘못 판단되고 잘못 처리된다는 사실은 그저 상황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 자신의 문제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죄입니다. 죄를 뜻하는 ‘하마르티아’는 목표가 잘못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에 대한 바른 규정,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규정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상황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구조의 변화가 항상 필요하지만 그런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인간성이 성취되리라는 기적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이 변화는 삶의 상황을 바꾸는 것으로는 아주 미미하게 일어날 뿐입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자칫 오용될 소지가 있으며, 그런 전례도 많습니다. 인간 자신이 변해야한다는 기독교의 요청은 곧 인간을 억압하는 통치가 필요하다는 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통치가 강조되면 인간의 공생적 관계에 속한 모든 것이 오도되어 과거 지향적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확신이 이렇게 오용되는 일에 종종 한몫 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상황의 변화가, 그리고 사회제도의 변화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진리입니다.

인간 자신이 변해야만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옛 사람과 맞서있는 새로운 참 인간으로 제시했다는 것은 이 변화가 얼마나 심원하게 실행되어야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모두는 옛 사람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 옛 사람의 특징을 가리켜 한 마디로 죽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늘의 본문말씀과 관련된 다른 대목에서도 죄를 옛 사람의 특징으로 언급했으며, 죄와 죽음이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잘못 규정해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이로 인해서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며, 또한 이 생명의 원천에서 떨어져나가는 것만이 죽음의 사실을 확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새로운 참 인간이 되었습니다. 실제적인 인간의 실존에는 죽음의 능력이 끊임없이, 남김없이 지배합니다. 이 죽음의 능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직은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삶 위에서 군림하는 죽음의 능력은 죽음에 대한 생각조차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획득하게 되는 날이 오면 확실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죽음의 능력에 대해 모른 체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능력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노동과 오락 사이를 번갈아 오가는 일로 마비되어갑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은 억압과 절망의 지하생활을 끝장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마비시켜버리는 다른 수단으로 도피하지 않았다고 해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하생활은 그것을 추종하는 이들과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구원과 자기 성취가 아주 가까이 있다고 눈속임하는 이데올로기로 하여금 절망적인 폭력을 휘두를 수 있도록 좋은 자리를 제공해줍니다.

우리의 삶에 드리워 있는 죽음의 이 그림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극복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무상하지 않은 생명이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새롭고 참된 인간입니다. 이 기독교의 복음은 멋진 피안만을 희망한다는 게 아닙니다. 이 복음은 세상을 도피하라는 호소가 아니라 생명을 향하라는 불빛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죽음의 그림자를 축출합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무의미하게 되고, 일상을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을 통해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는 토대가 놓입니다. 결국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 토대는 우리가 이미 지금 “새로운 삶으로 변화해가도록” 합니다. 부활절 사신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에서조차 무의미해지는 우리의 지상적 삶이 영원히 중요하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이미 나타난 새로운 생명은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생명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새로운 생명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일어나야 할 우리 생명의 변화입니다. 우리의 생명에 주어진 것과 그 생명활동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불빛에서 완전한 무게와 영원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거점이었으며 원천이었습니다. 부활절은 고대교회가 교회력으로 지킨 절기 중에서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와 비교해볼 때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전체 틀에서 부활절 사신이 차지하는 근본 의미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수년 전 주간 시사지 ‘슈피겔’이 독일인의 종교의식을 조사하기 위해서 “독일에서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 내용을 무엇으로 생각하는가, 라는 설문을 돌렸을 때 예수님의 부활은 그렇게 중요한 항목으로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현상은 우연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많은 신학자들도 역시 지난 여러 세대에 걸쳐서 매우 의도적으로 이 부활절 사신을 예수님의 인간성에 나타난 지상적 현상, 즉 전(前)부활절적인 현상의 배경으로 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기독교 사신에 연결되어있는 세계관적 난점들을 해결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구나 현대적으로 교육받은 지성인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활절 사신의 근본적 의미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오늘날 더 이상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지난번에 개최된 개신교 선교대회에서 많은 그룹들은 사회적으로 현안이 되는 주제에 열을 내어 그 논의에 참가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논의는 이미 유행이 훨씬 지난 일종의 땋은 머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사건은 단순히 골동품처럼 다루어도 괜찮은 교회의 교리문제만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못했다면 당신들의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것이오. 바울은 이렇게 계속합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여전히 당신들의 죄 안에서 사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죄나 세상의 용서도 부활 사신의 진리성에 달려있습니다. 부활절 사건이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생명이 좌초된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은 모든 지상적 삶이 쓸 데 없다는 절망 속에서 끝나버린 해프닝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이 죽음의 그림자는 모든 사람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도 역시 죽음이 모든 것의 종착역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 사신의 빛에 이르러서야 성금요일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계 구원에 대한 담보가 되었으며, 모든 고난과 버림받음을 극복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빛에서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으며, 우리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극복했다는 사실은 진리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향한 기독교인의 신앙은 이 부활 사신의 원천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기독교인의 하나님은 현재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상관하지 않는, 그래서 그를 통해서는 현재와 미래에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그저 멀리 떨어져서 관망하는 세계의 근원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능력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못했다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인들이 믿어온 그 하나님의 능력과 현실성은 별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을 용서하는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한 개인적인 대파국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못했다면 다른 그 어떤 사람들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더욱 가련한 사람들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자기 자신을 현실주의자로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그의 현실주의적인 사유에서 말하는 이 현실은 환상에 근거합니다. 기독교와 교회는 늘 그런 거대한 환상을 근거로 살아왔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환상을 좇음으로써 현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이 유일하게 붙들고 있는 그것을 빗나가게 하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이오.” 이것은 오늘날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절망적이고 슬픈 삶의 지혜입니다. 사실 먹고 마시는 일은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서 행해야할 그 어떤 다른 일들보다 훨씬 의미심장한 일이 못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불가피한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이런 슬픈 삶의 지혜에 머물러 있기만 할 뿐이지 이런 죽음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환상에 집중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아마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환상을 근거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무미건조한 삶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자체 안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 사신을 의심스러워합니다. 바울 시대의 사람들과 똑같이 죽은 자는 결코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법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들은 이런 부활신앙이 자신들의 모든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모순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기적을 값싸게 믿어버리는 신앙으로 웃음거리의 대상이 됩니다. 신학자들도 죽은 예수님에게 기적이 일어난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예수님의 일을 세상에서 지속시켜나가려는 신앙심이 발생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현대 세계 안에서 기독교 사신이 부담하고 있는 난점들을 피해보기 위해 둘러대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만약 예수님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신앙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명명백백하게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한 가지 점에서만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이론(異論)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그것은 곧 기독교의 부활사신에 대한 현대의 비판에서도 제기되고 있는 점인데, 즉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게 사실로 드러난다면 당연히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인간이 죽음으로 모든 게 끝장이라는 사실이 증명될 수만 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경우에도 결코 예외 없이 적용될 것입니다. 비록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증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곳에서는 거짓인 그 사실을 예수님의 경우에만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 우스운 일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보편적 진리에서 고립된 기적이 결코 아닙니다. 부활에 관한 사신은 오히려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과연 우리 인간들에게 현실성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손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것들만 실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낯익은 것들만이 그럴까요?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까? 우리가 늘 의식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삶의 매 순간에 현재 임재 하는, 우리가 도저히 측량해낼 수 없는 심연이 일상적인 사건에 의해 조성된 낯익은 것들을 휩싸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대부분 저 높은 곳에서 주어지는 운명의 선물을 받을 때, 혹은 심각한 고난 앞에서, 또는 그 어떤 느낌을 통해서 이런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항상 반복되는 삶에서, 그리고 우리의 손으로 생산해내는 것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실질적인 것들이 소진되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 삶의 현장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즉 우리에게서 멀어지거나 밀접해지는 그것의 비밀이 우리 삶의 어떤 순간에 갑자기 빛을 내다가 다시 신비의 세계로 사라져버리는 한 심연이 있는 겁니까? 또한 우리는 우리가 최후로 던져야할 궁극적인 질문을 통해서 비밀 가득한 이 현실성의 심연과 관계되는 건 아닐까요? “하나님”이란 단어는 죽음을 뛰어넘어 인간의 미래에 대한, 그리고 그것 없이는 우리의 현존이 무의미하게 될 미래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현실성의 비밀 가득한 심연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실질적입니까? 우리 눈에 낯익은 것들입니까? 비밀 가득한 심연입니까? 이것이 바로 부활절 이 아침에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의해서 확실해지는 사실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어떤 사람들의 솔직한 주장은 단지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주장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의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경험의 주변에서 사실상 이것과 똑같은 일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근거에서 제기됩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경험과 수천 번 반복된 익숙한 사건의 진행을 전체적인 현실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은 자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명제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상 경험과 사물의 낯익은 과정을 이렇게 일반화시키는 태도는 현실성의 신비로운 심연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정당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선입견이 학문적인 확실성의 대리자로 자임한다는 것은 허풍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역시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바울의 진술은 현실성에 대한 생각이 부활 사신을 받아들이는가, 거절하는가의 문제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부활 복음이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현실성에 대한 이해와 부활 사신의 이 양자 관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죽은 자가 결코 부활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신이 부분적으로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의심받았고 거부되었습니다. 이와 달리 이런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복된 소식을 어떤 경우에도 완전하게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복음서 기자들이 제자들과 부활한 분과의 조우에 대해 보도한 모든 내용을 그 과정의 문자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발생한 사건 중에서 핵심적인 것을 이야기 형태로 옷을 입혔습니다. 일종의 문학적인 서술이라 할 이 보도를 우리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들의 보도를 통해서 부활한 분의 영원한 생명이 어떻게 표상되었는지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오해를 막아내야 합니다. 이런 보도를 자세하게 살펴볼수록 이런 표상에 대해서는 그 비밀을 헤아리기가 더욱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이 기본 사실만은 여전히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자로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만약 죽은 자가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이 생각을 아예 처음부터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부활 사신이 말하고 있는 근본과 대립되는, 그것을 파기시킬 수 있는 그 어떤 논증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부활절 새벽에 사실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범주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불가사의한 사건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활절에 예수님에게 발생한 새로운 생명의 현실성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여전히 미래의 사건이지 지금 우리의 경험이 가능한 이 세계의 구성요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신이 보도하고 있는 새로운 생명이 우리의 현재적 이해범주를 뛰어넘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이미 이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됨으로써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반복해서 피력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발생했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이 예배의 성만찬으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의 약속에 의해서 예수님과의 일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에게 나타난 새로운 생명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희망은 예수님과 일치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확신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과 분리되어버린 죽음의 공포와 생명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무의미로 인해서 주어지는 고통스러운 느낌을 벗어나기 위해 그 어떤 것에 마취되어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인간과 우리 자신을 부활절 아침의 새로운 빛 가운데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여기서 사람들과 우리 자신과의 새로운 관계가 생깁니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우리가 현안의 척도로만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것은 곧 사랑 없이 대하는 게 됩니다.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의 관계에서 현안보다는 실질적인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부활절을 향해 열려진 하나님의 미래라는 빛에서 실질적인 것을 내다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서는 현재 이 땅에서 계속 존재하거나 없어지는 것이 최종적인 선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화해가 그런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화해를 통해 변화됨으로써 우리에게는 지금 새로운 인간이 비추는 반사의 불빛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비추는 불빛이 빛납니다. 이것은 곧 자유입니다. 우리는 세계와 인간과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게 속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걸 배움으로써 새롭고 참된 인간의 자유에 도달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무(無)에서 유(有)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눈입니다.

(1970년 부활절, 로흐함)

새로운 인간(2)

고전 15:45-49

새로운 인간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예컨대 마르크시즘에도 이런 기다림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희망은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을 실현해내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곧 더 이상 다른 이들과 반목하는, 또는 다른 이들의 희생에 근거해서 자기의 이기적인 관심을 성취하지 않는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추가적으로 질문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의 희망입니까? 또는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끝난 뒤 70년의 세월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마르크스의 희망이었을까요? 지난 70년 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증명되었습니다. 개인들은 사회주의적 국가에서도 역시 어떤 태도를 결정해야 할 때 여전히 개인적인 관심을 우선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마르크스와 수많은 철저한 공산주의자들이 희망한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은 탄생되지 못했습니다. 개인들과 시민들이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 목표로 인해서 분열되거나 억압과 상호간 폭력적인 갈등 가운데 빠져들지 않는 인류 사회가 도래해야한다는 열망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제 질서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기적을 바라는 신앙일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새로운 인간은 이기적인 관심이 지배하는 데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역사 과정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공산주의의 신앙을 반대한다고 해서, 이미 오늘의 삶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어떤 새로운 인간도 필요하지 않다는 서양 자유주의의 자기만족이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자기만족은 우리의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한정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다른 사람과의 갈등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갈등을 겪는 이 세상에서 자유를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존경하게 되는 이성적 상태라고 보는 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성적 도덕성이 작동되는 상태일지 모릅니다. 즉 도덕적 인간을 새로운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유럽의 계몽주의는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성은 이런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해관계의 갈등과 그것의 억압은 인간의 공동생활을 여러 방식으로 규정합니다. 늙어 가는 과정과 죽음에 직면해서 고독을 경험한다는 전망도 역시 이런 삶에 속합니다.

우리 인간의 훼손된 삶을 심층적으로 극복하며 새로운 인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도덕적 노력은 너무 무기력합니다. 그리고 사회 체제의 변화나 경제 및 정치 체제의 변화도 역시 역부족입니다. 인간의 갱신에는 훨씬 극단적인 변화가 요청됩니다. 성서는 이런 변화를 위해서 죄와 죽음을 극복해야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양자는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기적인 자세로 인해서 이웃이나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고립된 인간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역으로, 모든 이들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죽음은 우리의 생명을 이렇게 고립화시킵니다. 우리 생명의 내용은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모색함으로써 성취되는 게 분명히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자기 자신만을 모색하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들은 역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완성시키는 일에 관계됩니다. 죽음의 관점에서, 그리고 죽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따라서 죄의 힘이 극복되는 길은 다음과 같은 경우뿐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궁극적 미래가 아닐 경우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새로운 인간입니다. 그는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는 죽음을 극복했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입니다. 그가 죽음을 극복했다는 것은 곧 죽을 수 없는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즉 하나님의 세계로부터 온 인간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몸이라는 표상을 이해하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이 표상은 몸을 공중의 어떤 정기(精氣)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거나, 인지학(人智學)과 비슷한 어떤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완전히 하나님과 연결된, 하나님 영에 의해서 완전히 포착된 생명이라는 게 여기서 핵심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구약성서를 되돌아보아야만 합니다. 바울은 창조의 역사를 인용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자신의 숨을, 자신의 영을 그 코에 불어넣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지막 숨이 끝나게 되면 생명을 잃습니다. 우리는 살아있습니다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보도에 따르면 첫 번 인간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살아있는 혼’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은 영원한 게 아니라 일시적입니다.

생명에 대한 이러한 성서의 통찰은 오늘의 생물학을 통해서도 역시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무언가 궁극적으로 비밀 가득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명을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그 생명의 유지도 역시 우리에게는 아주 값비싼, 그러나 마지막에 다시 주어지는 낯선 선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은 우리를 살아있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호흡을 끝냄으로써 그 숨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이러한 상(像)은 생명을 아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생명과 다른 한 생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생명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단지 덧없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생명은 완전히 생명의 영을 통해서 통전되었으며, 또한 그 영과 불가분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영적인 생명, 영적인 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과 결코 나누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생명은 하나님처럼 결코 죽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연결은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나의 몸과 혼은 시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나의 바위이시며 나의 편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생명은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느라고 걱정을 한 순간도 쉬지 않습니다. 이렇듯 자기 모색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과 분리됩니다. 죽음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나누인 것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사건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달리 죽음을 극복한 새로운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으며, 하나님에게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자기의 편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새로운 인간이라고 진술했습니다. 로마서 5장이 바로 그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듯이 “그의 모양을 지니기” 위해서 우리가 그와 연결되었다고 말입니다. 아담을 넘어섬으로써, 즉 오늘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그런 인간을 넘어섬으로써 죽음이 극복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발생했으며, 이로써 우리에게도 역시 하나님과의 일치 가운데서 죽음 없이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희망의 토대가 주어졌습니다. 가까이 임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라는 사명에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으며, 따라서 죽음에 머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주님의 생명에서 우리는 이제 그의 십자가 죽음이 그를 하나님과 분리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기의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죽음을 당신의 죽음과 결합시켰으며, 그래서 우리도 역시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 게 틀림없습니다. 이런 사실이 세례에서 발생합니다. 세례는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미래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결합시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부활에서 예수님과 완전히 결합된다는 사실을 희망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피력합니다. 우리가 첫 아담의 상(像)을, 즉 죄와 죽음의 인간이라는 상을 지니고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오는 하늘의 인간이라는 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상과 동일한 형태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인간인 예수님은 새로운 인간성의 시작이며 마지막입니다. 이 인간성은 바로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일치를 기념하는 식사에 참여합니다. 이는 곧 그의 죽음을 기억하며, 또한 그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희망하는 가운데 준비한 성만찬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희망을 통해서 예수님과 연결됨으로써 신실한 마음으로 우리의 생명의 끝과 이 세상의 끝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강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교회가 읽어야 할 누가복음서의 성서일과는 이 세상과 우리 삶이 길을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기독교의 희망은 이 세상을 향상시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이런 저런 많은 처방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 있습니다. 이 책임감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창조 시에 인간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위탁을 잘못 가르치는 교회는 기독교인의 믿음과 희망이 이런 삶의 피안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인 우리가 차안에서, 즉 차안적 업무와 산만한 생각에서 허우적거림으로써 잘못 살아가는 잘못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허무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세상의 무상(無常)과 사람들의 두려움이라는 사태 앞에서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똑바로 서서 여러분의 머리를 드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구원이 가까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눅 21:28). 기독교 희망의 피안은 이 세상의 불충분성에 대한 값싼 위로가 결코 아니며, 이 세상의 삶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영원한 생명의 피안에 대한 신앙은 우리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삶을 지탱시켜 나갈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삶의 무상성을 대담하게 마주 대하며, 숙고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예배의 부름으로 낭독한 요헨 클레퍼(Jochen Klepper)의 강림절 노래는 이미 지나간 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을 향해 나가야 할 세상의 밤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설교가 끝난 뒤 함께 부르게 될 게오르크 바이셀(Georg Weißel)의 노래는 세상의 왕이 오실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이 왕은 구원과 생명을 가져오는 분이십니다. 바로 새로운 인간이 오십니다. 우리 모두 그런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 새로운 인간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해서 죽음을 극복하신 분입니다. 이런 왕의 오심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에, 그리고 베들레헴의 아기와 더불어 현재 이미 그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멘.

(1986년 강림절 둘째 주일,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예배)

하나님의 영광과 계시

고후 3:12-18

이번 주일로 현현절이 끝납니다. 이런 현현절에 기독교 교회는 고대로부터 ‘에피파니’(현현)를 가리키는 나타남에 대해서, 즉 예수님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생각해왔습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님의 삶에 개입해있는 특별한 사건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변화 산 사건에 대한 마태복음의 보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변용과 그것에 대한 찬양은 똑같이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단지 이 사건에만 제한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 현현을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에게 발생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서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계시되어 있다는 바울의 언급은 바로 이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변용 사건도 역시 부활한 자의 영광이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부활로부터 시작한 이 불빛은 예수님이 가셨던 모든 길을 비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완전히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언급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요 1:14).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 안에 나타났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 안에 나타났다는 말과 다른 게 아닙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현현절은 성탄절 주제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간되심은 오직 단 한번 이루어진 예수님의 탄생과만 관계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전체 역사를 휩싸고 있습니다. 수난절과 부활절은 이런 주제 아래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되심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났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이 문제를 이스라엘과 비교해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바울의 시대와 적지 않게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은 바울과 달리 우리 자신의 상황이 이스라엘과 대립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지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언급한 것에서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하나의 명백한 사실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분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숨겨져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무상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그들의 고집입니다. 율법에 충성함으로써 그것을 무언가 무상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종파적 전통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합니다.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특수성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것 말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경건하게 수행해나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는 사실을 구약성서의 오래된 암시로부터 추정해냅니다.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출애굽기 34장29절 이하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온 모세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덮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뒤로 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반사된 하나님의 영광의 불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율법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율법을 무상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무상한 율법을 무상하지 않은 하나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졌다는 바울의 비판은 그 본문을 주석한 현대 성서학의 도움을 통해서 훨씬 명백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가 자기 얼굴을 가린 “수건”을 종교의식 때 사용하는 일종의 가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종교의식 때 하나님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쓰고 하나님 역할을 연출하기 위해 사용한 가면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가면의 의미는 모세에 의해 선포된 율법이 하나님의 공인을 얻는다는 것일지 모릅니다. 모세는 이 가면을 쓰고 흡사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선포했을 것입니다. 무상한 질서에 신적인 권위를 빌려주어야만 했던, 그래서 그 질서가 절대적인 것으로 유지될 수 있게 한 하나님의 가면! 여기서 무상한 질서를 종교적으로 절대화시키는 그 대상은 예수님의 부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무상하지 않은 영광과 날카롭게 대립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절대화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있는데, 바로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이 지향하고 있는 그 질서의 무상함을 숨겨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를 들자면, 그 마력적인 능력을 이미 상당히 잃어버리기는 했습니다만 국가라는 게 바로 그 경우일 것입니다. 한 때 독일인, 프랑스인, 영국인들이 국가가 영원하다고 믿었다는 것은,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국가에 속한 개인들이 수 없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아주 믿기 어려운 현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었습니다. 주로 우리 남성들이 그렇게 열심히 성취해보려고 애를 쓰는 일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우리 주변의 익숙한 작업 현장에는 이런 착각이 비일비재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을 건설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말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활 영역에서 한 예를 든다면 아마 저술 활동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주부들의 활동에서는 자녀들과의 관계만 제외하면 이런 착각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상한 것들을 흡사 영원히 존속할 것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늘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는 태도에서, 즉 일상적인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대개가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건강이 늘 지속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미래를 그냥 묻어두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우리의 자비로운 운명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말한 인간의 고집입니다. 우리는 무상한 것 가운데서 그저 그것이 늘 계속될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 무상한 것이 나름대로 자신의 품위와 자신의 영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직업 세계나 가족이나 시민 세계에서도 유효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렇게 열정에 사로잡히게 한 율법의 세계에서 아주 확실했습니다. 그러나 무상한 것들은 절대적인 영광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영광은 무상하지 않은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처럼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율법을 부여받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에게로 선회할 수 있는 큰 가능성입니다. 이 가능성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늘 선명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이 가능성은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 종파적 전통이라는 우상 숭배로부터 돌아설 때 확실하게 주어집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질서를 철저하게 수행해나감으로써 그것이 곧 무상하지 않은 하나님과 관계된다고 여겨질 때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충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는 늘 은사를 그 은사의 제공자와 바꿔치기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교회 질서, 예배 형식, 경건과 교의, 그리고 성서 문자를 고수하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무상하고 허무합니다. 이런 것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영광을 갖고 있긴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반사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무상한 것들이 더 이상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그리스도는 무상한 것을 노예처럼 섬기지 않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계시됨으로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생명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계시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거울의 반사라고 묘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는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모세가 여호와의 영광을 반사해낸 것처럼 반사시켜야 합니다. 이 영광이 없는 한 우리는 무상한 것들에 의해 뒤덮여버리고 말 테니까요. 부활한 분에게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빛이 흘러나옵니다. 이 빛은 우리가 각성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쳐줍니다. 바울은 창조 첫날 선포된 “빛이 생겨라”는 말씀과 비교함으로써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고후 4:6). 이 빛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서 비추어 나옵니다. 모세가 마주 대한 구약성서의 주님,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주님은 이제 바울에게서 서로 맞물려 연결됩니다. 이 주님이신 하나님 자신은 영입니다. 부활한 분에게서 비추이는, 그리고 우리를 모든 무상한 것에서 성탄절과 부활절의 기쁨으로 해방시켜주는 빛입니다. 성령은 단순히 그 출처가 모호한(obskure),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부활한 분에게서 비추이는, 그리고 우리에게 반사되는 영원한 생명의 영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고후 3:18). 이것은 원래 바울이 종종 언급했던 생각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49절에서도 이르기를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된 새로운 인간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인간은 살리는 영입니다. 우리는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우리가 변화되어야할 영광의 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빌 3:21).

이러한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일종의 피안의 세계를 위한 위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계시는 지금 여기서 이미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상한 것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허락하는 자유를 얻음으로써 발생합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자신의 무상한 현존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이런 자유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사되어 비추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와 우리 모든 이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자기 현존의 중요성을 자기 자신의 염려에서만, 그리고 잘 먹고 잘 사는 데서만 찾으려는 이들이 떨어지기 쉬운 무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무상한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우리 모두가 견고한 사회적 기득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또한 이와 더불어 현재 가능한 인간의 새로운 영광을 자유롭게 현실화 시켜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새로운 영광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무상한 것을 섬기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모든 정신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기도 합니다. 국가와 그 통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의 자유, 권위적 전통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인간이 영원한 생명의 형상으로 변화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또한 그것은 강압적으로 선포되는 설교와 교육, 경직된 교의학과 성서문자주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드러나며 기독교인이 하나가 되기 위한 자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세상에 반사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고난과 십자가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이 고난과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받아들인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그 이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에 반사됩니다.

(1966년 현현절 마지막 주일, 마인쯔 대학예배)

자유를 향한 부르심

고후 3:17

우리는 자유를 모든 개인들이 자연적으로 준비해야할 기본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존 로크 이래로 근대의 자유사상이 언급되었으며, 또한 이런 이해의 뿌리는 스토아 자연법까지 소급됩니다. 로크는 1688년의 명예혁명 2년 후인 1690년에 정부 제도에 대한 아주 유명한 논문 두 편을 썼습니다. 여기서 그는 정치권력의 행사를 판단하는 기준의 토대가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자기의 행동과 소유물과 자기의 인격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자유의 천부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구 사회는 지금까지 인간의 일반적 자유라는 사상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럽의 자유주의만이 아니라 스토아 자연법 유산과 기독교의 유산을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사실상 자유사상은 원시 기독교의 구원 신앙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원시 기독교 저술가인 두 명의 위대한 신학자에게 해당됩니다. 그들은 바울과 복음서 기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스토아의 자유법이나 현대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르게 자유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영이 있는 그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이 그를 구속하고 지배할 경우에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경우에만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충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단지 최고 이성만이 아닙니다. 성령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부활절 복음 선포의 영으로서 모든 인류를 지향합니다. 그 영은 사랑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영에 연결되어 있는 기독교인들만이 자유롭다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요한이 그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은 노예로 태어난 사람과 달리 실제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일종의 망상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왜 망상일까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자기 생명의 중심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급기야 그를 살해함으로써 죄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죄를 행하는 자는 바로 죄의 노예입니다.”(요 8:34).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서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과 정반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부자유합니다. 이런 부자유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소유를, 그리고 우리의 고유한 인격을 마음대로 처리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해버리는 방식에 이미 길들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함으로써, 또한 우리가 우리의 고유한 의지를 우리 행동의 최고 기준으로 만들고, 그래서 거기서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함으로써,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결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자유를 필요로 하는 청중들이 실제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컨대 해방신학자들은 인간이 자기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인간이 해방되는 게 절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참된 자유를 자신의 업적이나 노력, 혹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혁명을 통해서 이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 해방을 성취하라는 약속과 호소는 인간이 내면적으로 이미 자유롭다는 사실을, 따라서 단지 외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외적인 한계는 인간이 자기 자유를 철저하게 사용하기 어렵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자기를 완전히 성취시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는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이 말은 성서의 선포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오히려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힘이 그 어떤 제한 없이 행사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역시 내면적으로 부자유합니다. 인간은 내적인 부자유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이 자유롭지 못함은 하나님과의 분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완전한 자유를 스스로 성취할 수 있다는 망상과 아주 손쉽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적인 부자유로부터의 해방은 요한복음의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아들이 당신들을 자유롭게 하면, 당신들은 정말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요한복음 8:36).

이런 점에서는 바울과 요한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부활한 우리 주님으로부터 오신 성령을 통해서만 자유를 획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통해서만 이런 자유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개의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또한 실제로 늘 거듭해서 자기를 결정할 가능성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없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 사신이 의미하는 바에 의하면 이로 인해서 곧 인간의 고유하고 참된 자유가 달성되는 것은 아직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선택과 결정의 자유는,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자유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자유를 자기 확대에만 소진하면서 종교적 주제를 모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과 요한이 언급하는 자유를 아무 말 없이 양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모든 각 사람들의 종교적 생활방식에 기초가 되는 선택의 자유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자유가 획득된다고 생각한 원시 기독교의 입장은 결코 이론적인 가능성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대의 인간 문화가 걸어온 길의 진면목을 가리킵니다. 자기의 행동과 소유와 인격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유를 인간이 명실상부하게 확보할 수 있다면,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해방을 확보할 수 있다면 이런 기독교의 입장을 허물어뜨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최고로 발전된 민주사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관계된 것들을 얻을 가능성이 증가됨으로써 인간이 결정해야할 부분도 증가되었는데, 이 증가는 근대적 삶의 조급증에서 아주 현저한 현상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 삶의 고유한 내용을 빼앗깁니다. 이 문제는 대개의 인간들이 생명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하기 위한 수단을, 또한 그 생명을 한 측면만이 아니라 모든 측면으로 전개시키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만 연관된 건 아닙니다. 자동차나 여행, 혹은 주택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시민의 자유 권리에 대한 형식적 성격을 비판하는 이들은 이런 관점만을 집중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최소한의 사람들만이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고 말입니다. 시민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가들이 생각하듯이 이런 이유로 인해서 자신들을 위한 선택의 자유는 공허한 형식이 됩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답변은 복지 사회를 달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질문은, 그리고 고유한 생명의 내용에 대한 질문은 이런 방식으로 제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삶의 많은 가능성은 생명을 갖가지로 달성해보려는 욕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가장 중요한 것을 소진시키게 됩니다. 밖에서 발생되는 조급증과 내적인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고유한 것과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런 것을 실제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아마 많은 부분에서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실행하거나 소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경우에 좀 더 심원한 차원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머물 수 있고, 따라서 우리 자신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에 고유한 내용을, 따라서 그 단일성과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고수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정체성을 향한 부르심은 오늘날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외형적으로 잘 살지만 자기 자신과는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정치적 자유 개념에서 실망할 때 강력한 반작용을 일으킵니다. 정치적 자유가 인간의 휴머니티를 성취시킨다고 선포되고 사람들이 그것을 믿도록 학습된다면 약속된 결과가 달성되지 못할 경우에 선택의 가능성과 자기를 전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된다고 하더라도 속았다는 느낌과 정치 체제에 대한 증오가 생산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 체제는 이런 자유가 근본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는 자기의 행위와 자기의 소유와 자기의 인격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유뿐이라고 여길 경우에 오히려 그 자유가 달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일상에 묶여 있는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정치 체제와 정치 행위에도 역시 해당됩니다. 자유와 휴머니티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고수해야만 한다면 자유사상은 분명히 훨씬 심원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일이 요한과 바울에게서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자유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일치함으로써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재물과 권세에 내면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면적인 비(非)의존성으로 인해서 급기야 순교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재발견함으로써 근대적 자유 역사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크롬웰과 밀턴 시대인 17세기에 일어난 영국 혁명은 바로 이런 기독교인의 자유를 세계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헤겔도 역시 하나님과의 연결을, 절대와의 단일성을 근대적 자유사상에 대한 고유한 토대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근대의 자유 파토스에서 자유라는 말이 인간 운명의 총괄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파토스는 이런 종교적 뿌리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결코 자기 소유를 마음대로 처리하고 선택할 수 있는 단순한 자유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정치가 기독교적인 책임감에서 형성되고 추구되는 곳에서는 자유의 심원한 의미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친교에 토대하고 있는 인간의 자기 정체성으로 자리를 잡게 되며, 또한 정치적 논의와 실천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아니면 최소한 이를 통해서 망상과 실망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망상과 실망은 자기 처리 능력과 자기실현이라는 의미에서 자유 권리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단지 소비하는 자유로 평가 절하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자유가 우선적으로 성서의 하나님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과 진지하게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신약성서의 자유 이해와는 정반대의 자리로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참된 자유와 그리스도 영의 연결이 정치적 행위 공간까지 진지하게 수용된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바울과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만이 자유에 관여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독일 사회에서 인간의 정치적 동맹은 기독교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유가 정치적 사유와 실천의 준거라고 한다면, 여기서 자유는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할까요?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는 기독교인만의 특별한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자유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인간이, 새로운 아담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像)에 따라서 우리 모두는 새롭게 지음을 받은 게 틀림없습니다. 로마서에서 이르기를, 모든 피조물은 무상성의 멍에로부터 하나님 자녀의 자유로 해방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불빛에서 자유를 얻습니다(롬 8:21). 기독교인의 자유는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 자유에 우주의 운명이, 특히 전 인류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이러한 운명을 억지로 강요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역사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제적이거나 참된 것처럼 생각되는 구원을 성취해나가도록 강제한 시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적인 구원이, 즉 하나님과의 참된 연결이 그런 것으로 촉진되는 게 틀림없다는 주장은 공허합니다. 기독교 교회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인간을 강제로 구원받게 하는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신앙의 강요는 자유와 일치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구원은 자유 안에서만 획득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증오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한가에 대한 징표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라는 부르심을 방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한 결과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도 이 시대를 향해서 이 부르심을 방기하면 안 됩니다. 그가 정치인일 때이든지, 그리고 정치를 기독교적인 책임감에서 수행할 때이든지 상관없이 언제나 이런 부르심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획득될 수 있는 참된 자유를 모색해야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형식에 대한 정치적 결단을 통해서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 개방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가 바라보는 인간 존엄의 근본 가치에 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적 의미는 우리 헌법을 최고의 기준으로 상승시키는데, 이는 정당합니다. 국가나 정치적 행위에 앞서 인간 존엄성의 신성불가침은 인간이 하나님의 궁극적 법정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 법정의 전체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사실의 다른 측면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미 도덕적 금지에 대한 구약의 하나님 법은 인간의 생명을 신성불가침으로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창 9:6).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존하는 인간 존엄성의 신성불가침에 대해 우리가 확신하는 뿌리가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인간의 인격적 존엄성입니다.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이해하는 우리의 생각은 인간의 신성불가침에 대한 이런 사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신성불가침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석하고 있는 계명에는 바로 인간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기독교적인 뿌리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져야 할 자유에 대한 권리는 근대의 인권 전통을 확고히 했습니다. 사상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우리를 인간으로 규정해주는 자유 자체의 고유한 내용을 충분하게 형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들은 여기서 없어서는 안 될 조건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유들은 인간의 고유한 운명에 공간을 확보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유는 주로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자유에 대한 민주주의의 법이 의미를 근본적인 의미를 확보하려면 그런 자유에 토대하고 있는 인간 운명에 대한 적극적인 지평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어야 합니다. 이 지평이 법조문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경우에 이 지평은 우리 헌법의 기본권을 해석할 수 있는 토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이 헌법의 기독교적 배경이 우리 사회의 공적 의식에서 퇴색되지 않아야만 할 경우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제는 특히 가정과 교육 정치에서 논란이 되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효력을 미칩니다. 당연히 국가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국가가 개인의 종교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과 혼동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종교 자유의 보장은 일종의 종교적 전제를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국가에 속한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인간 존엄의 신성불가침 사상에 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와 자연법, 기독교적 자유 이해와 스토아적, 혹은 자유주의자들의 자유 이해를 연결시켜주는 접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연결은 인권의 양식(樣式)이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했거나, 혹은 의무적인 인간 형상의 내용을 상실한 게 틀림없는 경우에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유대인들의 예배 시에 낭독되는 모세 율법과 연관됩니다. 이 말씀은 인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에도 유효합니다. 우리 헌법의 인권을 해석하고 있는 판사와 정치가들의 용모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덮개로 가려져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이 덮개로 가려짐으로써 백성들은 법의 고유한 근거이며 보증인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인 출애굽기에서 인용하고 있듯이 그의 얼굴에서 덮개가 벗겨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게 되면, 덮개는 우리의 마음에서 벗겨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자유에 대한 고유한 근거와 의미를 덮고 있던 그것이 말입니다. 즉 “주님의 영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1979.10.14, 바이커하임)

예수의 죽음과 사죄

고후 5:19-21

성(聖)금요일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절기는 성금요일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분의 부활을 기리는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감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축제를 벌여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로마 시대에 가장 잔인하고 가장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장 굴욕적인 처형 방식으로서 범법자를 나무에 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유대의 율법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신 21:23). 바울은 이 문장을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에 인용했습니다(갈 3:13).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저주받았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던 이들은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과 똑같아지려고 하다가 받은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모든 것은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했습니다. 말하자면 부활절 아침의 빛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확증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신성 모독 죄로 인한 자업자득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죽게 했다는 사실을, 더구나 치욕스럽게 죽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만 합니까? 이런 질문은 초기 기독교에서도 부활절을 회상할 때 매우 치열하게 다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와 연결된 일련의 대답들은 부활절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주제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사유는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제시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해서 죽은 게 분명히 아니라면 결국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과 더 나아가서 죄를 지은 전체 인류를 위해서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진술했습니다(갈 3:13). 하나님은 “죄를 전혀 모르시는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해서 죄 있다” 하셨으며, 죄인들과 똑같이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결정적인 분리로부터, 그리고 하나님과의 일치가 궁극적으로 단절되는 책임으로부터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일치는 바로 죄의 본질을 없애는 핵심입니다. 물론 이런 대리적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인간들은 각자가 죽어야지 누가 대신 죽어줄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또한 우리 삶의 모든 내용이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사실 앞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합니까?

사도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롬 5:10). 이 말씀은 유럽의 기독교에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대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희생당해 죽으셨다는 생각은 오늘도 여전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것은 성서의 진술에 합당하지 않으며, 사도 바울의 진술에도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그 결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주도적으로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인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롬 8:3). 하나님이 우리와 화해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해야만 했습니다(롬 5:10).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으며, 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습니다(고후 5:19). 이 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관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묻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희생이 결코 아니었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합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선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맥락과 연관된 중요한 진술이 로마서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을 향한 복종이라는(롬 5:19)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에서도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즉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입니다(빌 2:8). 이런 복종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은 복음에서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권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아버지에게서 위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명을 충실하게 지키셨습니다. 비록 이 사명이 예수님을 불확실한 상황 속으로 내몰고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왕권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으며, 그래서 그들이 질병과 귀신들림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선포함으로써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의 왕권의 시작을 위한 중재자로서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불손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하고 물었습니다(요 8:53). 예수님은 사람에 불과한 주제에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 한다는 것입니다(요 5:18, 10:33).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불가피하게 빠져든 불확실성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복음 사신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이미 여기서 완전하게 하나님의 왕권에 맡겼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님을 통해서 실제로 이미 현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는 예수님의 생명을 담보한 불확실성이 놓여 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명을 따르는 일과 그에게 위임된 복음 사신을 선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복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복종이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것 같이 보임으로써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유대 관원들에게 끌려가서 심문 받은 다음, 로마 사람들에게 양도되었다가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되었습니다.

부활절 아침 예수님의 부활의 빛에서 이제 이 불확실성은 제거되었습니다. 이 불확실성은 예수님의 지상 활동을 지배하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신 아들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왜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습니까?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어야 할 우리의 운명을 해결함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죽음에서 더 이상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 그리고 그의 영원한 생명과의 분리는 곧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하는 근원적인 죄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하나님과의 이런 분리를 확정합니다. 이런 점에서 죄와 죽음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는 것은 결국 이미 죽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에게서 끊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이런 죽음이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복종이며 동시에 그 귀결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다고 해도 더 이상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하나 되어서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참여한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통해서 발생합니다. 세례는 죽어야 할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즉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며, 하나님과 그의 생명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명, 즉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라는 사명에 복종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죽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단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는다고 해도 더 이상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으며 또한 그의 영원한 생명과도 분리되지 않는 게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죽음은 새로운 전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전망은 곧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 통치의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 즉 하나님에게서 받은 그 사명을 감당한 결과로서 죽어야만 했다면 여전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명에 복종하기 위해서 이렇게 비싼 값을 치르도록 내버려둔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결정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통로를 여셨습니다. 즉 죽음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새로운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 때 제자들에게 주신 이 약속의 토대는 곧 예수님의 피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책임을 면책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죽음에서 하나님과 최종적으로 분리되어야 할 그 필연의 길을 우리가 가지 않도록 우리의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점을 늘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여전히 죽음에서 우리와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희망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결국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데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곧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 하나님과 분리되는 모든 것을 돌파해서 하나님과 그 생명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죽음을 거듭해서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려주신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감사를 드리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으시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도록 보증하는 그 평화가 말입니다.

(2000년 성금요일, 뮌헨, 마태우스 교회)

성령 충만

엡 5:15-20

신약성서의 서신들을 읽다보면 마무리 부분에는 늘 충고가 나옵니다. 이런 충고들은 사람들에게 별로 사랑 받는 단락이 못됩니다. 직접 자기가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더구나 설교자나 그 설교를 듣는 회중들에게는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어느 누가 기꺼운 마음으로 충고를 듣고 싶어 하겠습니까. 따라서 이 충고 부분을 해석하려면 갑절의 수고를 들여야 합니다. 보통 ‘충고’라는 말에는 도덕적으로 편협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아주 쉽게 따라 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관심을 기울여야할 본문 말씀에는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리고 아주 거리가 먼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술(포도주)이라는 단어에만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즐기는 일이 금지되지 만은 않았으니까요. 오늘 본문은 세부적인 문제들을 언급하기 전에 완전히 일반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적인 삶의 기본 성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본문 말씀의 큰 틀과 일반적인 시각에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는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 중에서 시간적으로 제한 받는 것들을 핵심적인 것으로 다루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여러 가르침들은 우리 시대의 경험으로부터 적지 않게 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여자들은 예배드릴 때 베일을 써야한다는 바울의 지침 같은 것들입니다(고전 11:13이하). 오늘 본문에 묘사되어 있듯이 기독교적인 삶이 유별난 이상을 세워 나가는 게 아니라 평범하게 인간적인 것들을, 참된 인간적인 삶들을 생생히 그려나간다는 사실도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거시적인 틀에 속합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지혜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지혜로움에는 무언가 이론적인 것들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들도 매우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지혜로움은 삶의 예술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가지 각도에서 명확하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이 과연 어디에 삶의 예술이 내재해 있는지를 귀띔 해주고 있는지 아닌지 꼼꼼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삶의 예술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따라가겠습니다.

지혜로움은 무엇보다도 깨어있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말하는 대로 자기의 삶을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눈여겨보십시오.” 염려와 일상의 반복, 혹은 필요한 것을 손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또한 피상적인 오락이나 즐기면서 매일의 짐을 벗어버리는 것도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는 어떤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며, 오늘 편지의 발신자가 말하듯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마치 격언 같은 어법으로 우리의 일상적 대화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살아가는 것에서 마이스터(大家)가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삶의 마이스터가 되는 걸 배우는 사람만이 완전한 의미에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삶을 마음먹은 대로 다룰 수 있는 마이스터가 되기는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바울이 그 당시에 말했듯이 “세월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 사이의 여상하지 않은 관계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계들은 인간성이 별 문제 없이 온전해질 수 있도록 그냥 놓아두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다움이 인간의 삶을 끌어갈 수 있게 해야 할, 그러나 실제로는 항상 그 길을 방해하고 있는 정치, 사회적 관계 같은 거대한 차원에서만 타당한 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유효합니다. 이는 곧 우리로 하여금 본질적인 것과 옳은 순간을 아주 쉽게 포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현대적 삶의 조급증을 말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한 해 한 해를 잡담으로 허송하지 않고, 또한 우리 인생을 염려와 근심에 억눌려서 파손 당하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래야만 우리는 적절한 순간에 정의를 실천하고, 매 순간에 완전히 충실함으로써 삶을 성취해나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그 길을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목표는 기독교적인 삶을 긍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세계를 도피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순간을 포착하고 세월을 ‘아껴라!’는 호소 보다 더 강력하게 삶을 긍정하는 태도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로 하여금 매 순간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확실하게 잡아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이에 대한 답변을 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실제로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곧 한편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역으로 우리 삶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도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 담겨 있어야할 귀중한 내용이나 그런 과업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과 상호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주님의 뜻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십계명을 상기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과 그런 이해에 바탕을 두고 살아가라는 요청입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지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단순히 규정에 따라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매번 마다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으며, 또한 당연히 그래야만 했습니다. 기독교인은 퀴리오스, 즉 주님이신 예수님을 주목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여러 상황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 사랑의 영에 깊숙이 현존할 수 있는지 스스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본문이 일반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이 요구를, 그리고 에베소서가 각론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이 가르침을 저는 이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정신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엡 5:21). 우리는 이 말씀을 왜곡된 교권을 강화시키는 단서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이 요구하는 바는 아주 간단합니다. 피차간에 그리스도의 영 안에 거 하십시오.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답변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은 일치를 이루고, 그 동질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어 바른 순간을 포착해가도록 합니다.

둘째,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며 참으로 지혜롭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앞에서 한번 언급한 바 있는 영,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영은 우리로 하여금 매사에 무엇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즉 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술(포도주)에 취하여 사는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은 영으로 충만해져야한다고 말입니다. 매우 특이하고 실감나는 비교이지요! 영의 충만과 술취함 사이를 비교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무조건 포도주가 영의 충만과 대립된다는 뜻으로 취급하면 위험합니다. 이 비교의 핵심은 술이 아니라 취함 그 사실입니다. 아마 에베소에는 맥주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편이나 환각제 같은 마취제도 분명히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든지 이것들은 하나님의 영과 공통되는 한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승화되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그 의미는 매우 다릅니다. 아주 즐거운 기분을 들게 한다는 이 마취제들은, 과연 포도주나 맥주나 아편, 혹은 환각제 같은 것들을 통해서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실과 현재를 망각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은 이를 가리켜 ‘방탕’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취로 인해서 자기를 망각하게 되면 결국 자기의식도 마비되어 버립니다. 이런 마취제를 의지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겠다는 생각이며, 삶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는 표현이지 삶이 완전히 고양됨으로써 우러나오는 생명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의미에서 자신을 초월하게 만듭니다. 이런 초월은 열광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사실 열광(Begeisternug)이라는 말에 공연히 영(Geist)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건 아닙니다. 모든 영적인 근원에는 열광적인 그 무엇이 숨어 있습니다. 모든 영적인 삶은 위로 고양됩니다. 예술적인 영감이나 예술품 감상도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초월하게 합니다. 학문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일도 이와 아주 비슷합니다. 이렇게 고양된 실존을 경험하는 것은 환각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훨씬 심원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영이 우리를 고양시킨다고 해도 우리가 자기 망각에 빠지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의식은 더 높은 단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에베소서는 영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 영에 충만 하라고 충고합니다. 이 영은 물론 예수님의 영을 말하겠지요. 에베소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예수님의 영은 영 일반에 속한, 즉 이 세상이 창조될 때 불었던 하나님의 숨결과 함께 하는 영입니다. 예수님은 곧 어떤 영이 참되며 해방시키는 영인가를 판단해주는 시금석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이 여기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려는 것은 어떤 유별난 기독교의 정서가 아니라 영입니다. 영이 중심 주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중재해주신 영으로 충만해질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는 이에 대한 대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찬양과 성례전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초기 기독교가 신뢰했던 예배 찬송의 의미에 대해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찬양할 때, 특히 공동으로 찬양할 때 일상적인 것들이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갑니다. 우리는 충만한 생명으로 고양되는 것을 느낍니다. 자유로워지고 즐거워집니다.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예전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한 마음을 갖게 될 때도 똑같은 경험이 일어납니다. 우리들이 예배 때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와 예전은 우리가 찬양할 때 어떤 영에게 충만해져야하는지 가르쳐줍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 그 사랑의 영, 하나님에게 감사를 돌리는 영에게 충만해져야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로 이 영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신 영입니다. 그 영은 모든 생명 안에 내재하며, 생명을 살아 움직이게 하며, 생명체들이 자기를 초월하게 하는 바로 그 영입니다.

셋째,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깨어서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 영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활동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가르칩니다. 찬양은 틀림없이 우리의 가슴을 충만하게 채워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영으로 충만히 채워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맑은 정신으로 올바른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온전히 깨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하실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감사는 분명히 우리가 예배에 참석해서 찬양하는 그 순간을 뛰어넘어 한 주간 전체를 그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모든 일에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엡 5:20). 모든 것을 감사한다는 것,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서, 즉 우리에게 부닥치는 모든 억압적인 사건과 고된 일에서도 여전히 감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물론 이 일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일상의 염려와 우리 인생의 온갖 수고에 휩싸여 있을 때 우리를 그런 것에서 해방시키는 영의 활동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을 망각하지만 않는다면 영의 능력이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삶은 역시 깨어있는, 지혜로운, 그리고 영에 충만한 삶이 될 것입니다.

(1968년 부활절 후 넷째 주일, 로흐함)

승천

골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대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이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가끔 신과 하나가 된다고 말입니다. 헤라클레스 설화에 그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황제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콘서바토리 궁(宮)에 양각(陽刻)되어 있듯이 황제들은 죽은 다음에 일정한 수순의 약품 처리를 통해서 하늘의 세계로 올라간다고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마리아의 승천을 믿는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은 이런 이야기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기적을 통해서 이룬 개인적인 우월성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그가 하나님의 우편으로 들림 받았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우편’은 무슨 뜻입니까? 고대 오리엔트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왕의 우편은 그 나라에서 서열 두 번째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왕의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역시 하늘나라의 왕인 야훼가 시온의 왕을 지상의 대리자로, 신적 권능을 집행할 자로 임명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승천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를 행사하도록 임명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면 하나님의 통치를 행사하도록 위임받은 이가 누구인지 생각해보아야만 합니다. 그는 바로 우리와 연합하시고, 또한 우리를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신 분, 즉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이처럼 그의 높아짐은 우리의 높아짐이며, 그의 영광은 우리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의 신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이 승천에서 온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속한 능력의 세계로 들림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를 완전하게, 실제적으로, 유일하게 신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능력들과 권세를 향해서 돌아설지도 모르며, 그들에게 충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에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찬양해야할 이유와 동기가 항상 충분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이야기를 기독교 공동체 안이 아니라 밖에서 하게 된다면 대개의 세상 사람들은 믿기 힘들다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댈 것입니다. 도대체 그리스도가 오늘도 통치한다는 흔적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주변을 돌아봅시다. 그곳에는 완전히 다른 세력들이 군림합니다.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초국가적 세력들, 자신의 입장만 관철시키려는 경제 세력들, 직업과 성공과 출세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찬 개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세계는 이런 일들이 점점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만 점점 막강한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의 통치’는 어떻습니까? 만약 그가 명실상부한 주(主)라면 다른 모든 세력들이 우리의 삶에서 활개 치는 걸 저지해야만 했던 게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발견됩니까? 오늘날 우리는 교회가 분리되고 교회의 활동이 위축되는 현실을 봅니다. 또는 동구권에서 보는 것처럼 교회의 활동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독일 사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명실상부한 주라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걸까요?

이런 모든 현상들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다스린다는 의미로 보아야합니다. 그의 생명과 그의 통치는 우리의 자연적 생명과 그 생명이 촉진되는 데서만이 아니라 그 위기와 죽음 가운데서도 증명됩니다. 우리의 생명에 관계된 그리스도의 생명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생명을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통치도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통치를 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촉진되는 일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이에 반해서 성서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시오.”(골 3:2). 우리가 과연 이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자기의 목표에, 그런 세계관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벗어나서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어야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더 이상 바꿔치기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죽음으로 빠져들어 갔다는 말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죽음이 선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낯설게 경험하는 것처럼 세상의 사물로부터 분리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사물과 우리 자신의 생명으로부터 이렇게 거리를 둠으로써 우리는 그 무언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오늘의 설교를 끝내도 괜찮을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도록 강요합니다. 그것은 곧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교회를 통찰하도록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 생명이 아직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가 우리 믿는 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이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승천 보도가 아닐까요? 그리스도는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부활한 분이 이제는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버린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까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은폐의 방식으로 존재하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곧 승천기사가 가리키고 있는 두 번째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인위적인 방식으로 현재화함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폐에 대한 경험을 피해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례전의 내용과 형식을 의도적으로 강화시킴으로써, 혹은 세상과 그 세상의 질문에 대해서 말문을 막아버리는 기독교 전통으로 퇴각함으로써 피해보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행사하고 있는 그런 흡인력이 이런 시도들과 상관되어 있는 건 아닐까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과업은 기독교의 내적 영역 속으로 숨어들어 가는 시도, 즉 우리의 이 시대 앞에도 여전히 분명한 하나님의 은폐와 그리스도의 은폐에 대한 경험을 피해보려는 시도와 분연히 맞서는 데 있습니다. 승천과 재림 사이의 이 중간 시대에 놓여 있는 이 은폐는 지속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사는 것이지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신앙 가운데서 우리는 무언가 세상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은폐된 통치를, 부활의 능력을 감지하게 됩니다. 세상의 사물에 대한 이런 거리는 우리가 참된 생명의 힘에 깊숙이 휩싸일수록 더욱 분명하게 감지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부퍼탈-엘버팰트)

살펴서 붙들라!

살전 5:21

1744년 당시에 신학생이었던 게르하르트 자무엘 힐가르트는 한 친구에게 작은 기악곡집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힐가르트는 4년 후에 바카라흐 교회의 2대 담임 목사가 될 예정이었으며, 동시에 바카라흐 시(市)의 연대기를 집필해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악곡집에는 라이프니츠의 어록과 더불어서 사도 바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편지에 들어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데살로니가 공동체에게 보낸 바울의 첫 번째 편지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21절에 기록된 그 말씀은 “모든 것을 헤아려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은 영적으로 성숙해지도록 자극하는 초기 기독교의 해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종교와 국가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 전통을 통해서 정당화된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종교의 영역에서 전승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특히 성서 말씀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정치적 영역에서는 이러한 권위에 대한 비판이 개개인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리라는 점에서 성숙한 판단력을 배양시켰으며, 공화주의적 성향으로 교육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화주의적 성향은 그 이상의 조치가 없이는 그 어떤 항구적인 정치 체제를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바울의 이 말씀을 칸트의 유명한 표현형식으로 바꿔보면, 자기의 오성(悟性)을 이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요구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전반적으로 바울의 생각과 어울립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대립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비합리적인 열심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적 시각은 이와 반대입니다. 우선 신앙적인 면에서 인간은 완전히 영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됩니다.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의 이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인간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신앙인들이 세계 사물에 대해서 사려가 깊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국가, 혹은 그 어떤 것을 하나님과 혼동하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신앙은 이 세계 사물이 그것 자체만으로는 주목할 만하지 못하다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대신에 세상의 사물을 하나님의 창조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 창조는 자기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이 원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개개 피조물에게 사랑으로 대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진지성과 영적인 성숙성에 이르도록 해방시킵니다. 그래서 바울이 “모든 것을 헤아려보고 ... ”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과 교회의 선포에서 더욱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헤아리라는 사도의 요청은 이 편지의 맥락에서 볼 때 우선적으로 교회 내에서 발견되는,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미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예언자의 말씀과 관련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바로 여기 교회의 선포라는 관점에서 이성의 판단을 통해서 냉정하게 헤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개신교회의 신앙은 신앙과 이성을 공평하게 연결하는 작업을 새롭게 펼쳐나갔습니다. 이성과의 결합이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진리라는 사실을 인식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르며, 또한 유지시킬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만약 참된 이성과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선교를 통해서 자신의 진리를 전(全)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증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확실성을 갱신시킬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가 자신을 설명함으로써 얻은 소득이었습니다.

신앙은 이성을 통한 비판적 시험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적 시험은 이성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그리고 실제로 선입견을 부추기거나 시각을 협소하게 만드는 교의나 ‘예언’과 관련되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바로 교회의 설교에서 자주 드러나고 있는 시대의 정신적 풍조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중요한 것은 특별히 심리학과 사회학이 제시하는 약속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논리에서 개인과 사회가 구원받기를 기대합니다. 개개인들의 인간적 정체성과 인간들이 사회적 공생을 통해서 이루어야 할 최고의 정의는 여기서 달성되어야만 할 목표로 여겨집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전혀 없이도 말입니다. 바로 이런 세속적 예언자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은 그 어떤 단순한 권위적 신앙에도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어떤 학문적 미신에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특별한 기준이 오늘의 본문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모든 것을 헤아려보고 ... ” 그러나 이성의 이름으로 실행된 하나님과 그 계시에 대한 비판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비판이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게르하르트 자무엘 힐가르트는 1792년에 계몽과 이성의 이름으로 등장한 하나님과 그 계시에 대한 거부 앞에서 계시 종교인 기독교를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 비판가들로 하여금 이성의 시험에 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 책의 제목대로 이신론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의 ‘어리석은’ 불신앙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는 이성을 신앙과 적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이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사적인 내면세계로 퇴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적인 내면세계로 퇴각하는 일은 유감스럽게도 기독교 신앙의 역사에서 종종 발생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헤아리라는 이 강력한 요청은 사도 바울이 기독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이 요청은 우리가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만할 대단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다른 곳에서 좀더 분명하게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세계를 판단하며, 더욱이 천사까지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고전 6:2,3). 이 말은 어딘가 도에 넘치는 발언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이성은 우리의 판단이 늘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바울에 의하면 사실상 그 시험은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즉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갈 6:3).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을, 즉 자기의 믿음과(고후 13:5) 자기 행위를(갈 6:4) 비판적으로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시험의 필요성은 신(神)적인 이성의 불빛에서 출발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시험하고 검증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체 인생은 우리의 신앙을 확증하는 길이며, 또한 시편 기자가 말했듯이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시험받는 길입니다(시 17:3, 139:23 참조). 특히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시련은, 그리고 우리가 감당해야만 할 어려운 결단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자신의 아들을 희생물로 바치라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시험받은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세 번에 걸쳐서 시험을 받았고, 또한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역사를 하나님에 의한 시험의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렘 9:6, 6:27이하 참조). 예레미야에 따르면 이런 시험의 결과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시험 앞에서 우리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일이, 회개가, 즉 하나님과의 새로운 일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과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이러한 일치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은 기독교인들도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시험을 받습니다. 우리의 일생에서 단 한 번의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돌아서는 일이 발생하지만 그래도, 또한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자기 시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불빛에서 우리 자신을 판단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 심판과 어긋하게 행할 때가 많으며, 그래서 그 심판의 불은 하나님의 뜻에 상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든 것을 삼켜버립니다(고전 3:16). 신적인 진리의 불빛에서 우리를 판단하는 것을 우리가 배우게 되면 그때에야 우리는 바로 그 기준에 따라서 다른 이들의 행위와 생각을 시험하기 위해서 필요한 냉정함을 획득하게 됩니다. 우리가 시험받아야 할 그 기준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인간의 죄는, 즉 참된 길의 상실은 인간이 다른 이를 판단하기 전에 하나님의 진리라는 불빛에서 자기 자신을 시험하는 게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모든 것을 헤아리라는 요청은 이 시험이 우리를 시험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불빛에서 일단 우리 자신에게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는 경우에 아주 쉽게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흡사 이성의 자유와 아주 간단히 교체되는 자기 영광이 이를 통해서 정당화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사물과 타인을 정당하게 대하는 일에서만 지장을 받는 게 아니라 이성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거절하게 되고 하나님에게 돌려야할 존경을 거부하게 됩니다(롬 1:28). 이미 게르하르트 자무엘 힐가르트는 이것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또한 매우 비이성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바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기 자신을 시험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을 시험하도록 요구된 이성의 냉철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이성은 신앙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집니다.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오.”(요 8:32). 그 진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그럴 때만 우리는 이성의 냉철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이 시험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만 할까요? 이 세계 사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관계는, 인간과 그 생각들은 어디서 시험받아야만 할까요? 단지 사물과 인간, 그리고 그런 관계가 우리에게 쓸모 있는가 없는가의 관점에서만 시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기준에서만 판단한다면 하나님과 그의 뜻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것, 이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것은 곧 우리 인간에게도 좋은 것이며, 공통의 좋은 것이며, 우리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성의 시험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공통의 이해와 타당성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성이 모두에게 필요한 토대를 형성하기 때문에 바울은 이성을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이성은 사랑이나 관용과 매우 가깝습니다. 기독교가 자신을 해명할 때 신앙과 이성의 결합을 갱신함으로써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난 관용에 대한 오랜 억압의 역사와는 반대로 관용의 새로운 연대기를 끌어냈는데, 이 일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오늘 여기 모인 가족들과 친척간인 바카라흐 목사의 조상들도 신앙 문제의 비관용과 열광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 경우에 바로 여기 바카라흐에서 벌어진 기독교의 유대인 증오와 기독교의 유대인 박멸이라는 부끄러움을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이 도시에 있는 파괴된 아름다운 교회당은 바로 그것을 기념하는 것인데, 바로 유대인에 의해서 살해당한 소년인 성 베르너 기념교회당입니다. 여기서 이제 신앙적 대립의 열광주의가 제거되었다는 것은 기독교적 계몽의 명예입니다. 이런 연관에서 볼 때 에라스무스 테오도르 엥엘만의 활동은 개신교 사이에서 출현한 대립을 극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것이 어디서 시작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늘 당연한 게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인이 ‘이성적인 예배’의 대상을 찾아내는가 하는 것이 시험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삶의 문제에 해당되며, 우리가 이 세상과 재물을 필요로 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또한 이것은 사회의 구성이나 정치질서에도 해당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에 기독교적인 해명은 좋은 것을 판별하는 기준이 전적으로 자주적 판단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이 기준은 우리의 외부에서 우리와 대면해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유는 좋은 것의 준거입니다. 이 준거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자라며, 또한 노력해서 얻어질 수 있고 보장될 수 있는 좋은 것을 명백하게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곳 바카라흐에서 하나가 된 두 가족사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가족사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즉 독일에서 시민의 자유사상이 억압받았던 1831년 이후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많은 엥엘만과 힐가르트 가문의 결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향한 추구는 그들이 앞서 있었던 사건과 연관해서 받아들인 신앙과 불가분리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후예인 우리들도 역시 값을 지불할 만한 자유를 계속해서 유지해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과 다른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와 인권의 원리는 이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아주 진부하거나 공허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상이 하나님의 진리나 복음으로부터 해체되는 바람에 단순히 자의와 방종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은 널리 확산된 무의미성이며, 또한 오늘 우리의 세계를 통해서 발생하는 의미에 대한 모색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서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자시 기억하게 합니다. 즉 참된 자유는 아들과 영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고후 3:17). 또한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자유를 무시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이 당신들을 자유롭게 하면, 그제야 당신들은 실제로 자유롭게 될 것이오.”(요 8:36).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획득한 자유가 확실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진리에 있는 모든 이성의 토대에 근거해서 새롭게 질문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을, 사랑에 봉사하는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일치와 평화로 이끌어갑니다. 자유의 가장 좋은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가족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모험을 통해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특히 우리로 하여금 성서의 하나님과 하나 되게 했으며, 우리 조상의 기독교적 신앙에 공고히 서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하나님 안에 이 시대정신과 변화무쌍한 유행과 달리 고유한 판단과 자명성에 대한 자유와 용기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좋은 것을 붙잡도록 하실 겁니다. 즉 우리 조상의 신앙을 우리의 가족 안에서, 우리의 시민들 안에서 견지해나가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아멘.

(1980.6.22, 엥엘만/힐가르트 가족의 날, 바카라흐)

기도에 대하여

딤전 2:1-6

지난 수년 동안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유가 위기에 빠졌다고 말들 해왔습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어졌고, 의심스러워졌으며, 불명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도 매한가지로 적용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유의 위기는 결국 기도의 위기에서 나타납니다. 그 현실성이 의문스러운, 혹은 우리의 일상에서 더 이상 고려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소원해진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가정에서 기도가 드려지지 않습니다. 식탁 앞에서 드리는 감사기도, 그리고 아이들이 잠자리에서 드리는 저녁기도조차 말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정말 우리의 삶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신 걸까요? 오히려 인간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건 아닐까요?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요? 우리 기독교인들도 역시 세상살이에 얽매여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어야할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에서는 경건 생활이 힘들어져서 우리가 기도를 드리게 않게 됩니다. 설령 기도를 드린다 해도 우리의 기도가 진부한 형식들로 굳어지거나,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기도가 고통스러워집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더 이상 하나님과 연결된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게 아니라 타성적으로 하나님을 향함으로써 유발된 하나님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위기에서 벗어나 보려는 노력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단절시켜버리는 것은 바로 요헨 클렙퍼의 노래에 있듯이 ‘죄의 마력’입니다. 하나님은 사실상 우리에게 가까이, 우리 모든 이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말없는 비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표상과 모든 개념을 초월해 있는 이 말없는 비밀에 대해서 주의 깊게 통찰하는 것을 배우려고만 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삶에는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을 오감으로 감지한다는 사실, 우리가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이루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실들조차도 분명히 당연한 게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남김없이 온전하게 이해한 사람은 매순간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종종 확인하듯이, 겉으로 볼 때 연민을 살만한 위기와 고단한 삶의 상황 가운데 빠진 사람들이나, 혹은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살아 있는 매순간을 진정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감사의 마음으로 인해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에 반해 오늘의 우리 시대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감사한 마음을 가질 줄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혹시라도 그 어떤 부족한 것이 있어서 아직 완전하지 않다 싶으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크고 작은 소동을 일으킵니다. 이런 소동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 주변에 대해서도 무리한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여기서 정말 부족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게 되면 당연히 불평과 불만이 늘어갑니다. 결국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지려고 발을 질질 끌면서 끊임없이 줄달음치듯 살아갑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영혼의 병에 그 뿌리가 놓여있습니다. 요즘 같은 풍요의 시대에 정신병이 더욱 더 늘어난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게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삶에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매순간을 감사할 이유와 동기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정신치료 같은 것은 결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즐거워져서 그 어떤 힘겨운 일이라도 능히 견딜 수 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이런 마음이 모든 기도의 실제적인 토대입니다. 기도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우선 간구를 생각하지만 사실 기도가 그런 간구와 무조건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기도에는 여러 다른 형식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에는 기도의 몇 가지 형식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감사기도, 즉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카리스티아라는 단어는 이미 원시 기독교에서 성만찬을 가리켰던 바로 그 단어와 똑같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일종의 감사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 안에 현재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임박은 교회 안에서 영속적인 형식이 되었는데, 이 하나님의 임박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의식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이러한 감사 의식이, 즉 유카리스티아가 어쩌다가 기독교 예배의 중심에 놓이게 된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명시적으로 드리는 감사기도는 많은 형식의 기도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사실 그 이외의 모든 기도는 이 감사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우러나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말로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가 감사해야할 구체적인 조건 없이도 가능합니다. 생명에 대한 소박한 감사의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절로 노래가 나올 만큼 기쁨으로 충만한 기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이미 기도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말없이 찬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는 우선 이런 감사하는 마음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감사의 마음이 정말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분명하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고, 또한 감사하는 마음속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아주 의식적으로 기도 속에 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사를 경배, 즉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과 연관시켰습니다. 우리의 생명에 대해, 하나님의 창조에 긷든 아름다움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와 고난과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이어진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모든 기도는 경배로 도달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에서 최종 목표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간구에도 역시 해당되는 말입니다.

간구는 감사와 경배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옵니다. 예수님은 오직 이런 간구만을 확실하게 들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구하시오. 그러면 받을 것이요! 요한복음이 밝히고 있듯이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과 그 통치의 도래와 그 사랑의 현재로 충만하셨던 것처럼 완전히 그런 예수님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몰두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만이 확실하게 응답 받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구로 시작됩니다. 또한 그 뒤로 이어지는 기도, 즉 일용할 양식과 사죄에 대한 간구도 역시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싶은 것을 주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채서 그의 뜻을 바꿀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개인적인 욕망에서 출발하는 간구는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소원과 의지가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간구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하나님의 뜻은 애당초 우리의 간구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던가요?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많은 말로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간구하기도 전에 당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들의 아버지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마 6:8).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늘 쓸 것과 필요한 것이 따라다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당연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의 이면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한편에서는 감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리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라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느끼는 필요성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보다 훨씬 먼저 알고 있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말없는 간구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서 우리를 황폐하게 할 어떤 것에서 행복과 만족을 구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할는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 주신다고 말했습니다(롬 8:26). 성령이 이처럼 우리를 대신해 주시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가까이 계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심을 우리가 감사하고 경배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어 있을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우리가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 건지 분간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해야 할는지 알지 못할 때 성령이 말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구체적인 방식으로 드리는 간구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기도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지닌 본래적인 깊은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과 매 한가지로 간구할 때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해명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간구할 때는 무엇보다도 자기 성찰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간구할 때 우리의 소원과 기대가 하나님의 뜻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수행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모든 성찰은 설령 구체적으로 표명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간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룀으로써 어떤 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지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구함으로써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소원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들이 정화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바로 이런 경험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운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신 후에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말로 마치셨습니다. 이것이 곧 기도의 투쟁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 자신과 싸우는 투쟁입니다. 간구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간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만 감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없는 곳에서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올바른 간구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 소원에만 맴돌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관계가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기도는 역시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즉 자기만의 빵과 자기만의 용서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은 이것을 간구할 때만이 아니라 모든 기도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던지 간에 우리의 삶과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추구하는 바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시며, 그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역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십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그의 생명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있는 세력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증해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의 본문은 속전이라는 상(像)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즉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이 속전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셨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다면 우리 기독교인들도 역시 모든 사람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와 경배와 간구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드려집니다. 이 예배 공동체에 속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근본적으로 예배는 몇몇 소수 사람들의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필요만을 채워주는 게 아닙니다. 예배에서는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관계된 일들이 수행됩니다. 예배는 구체적인 예배 형식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말없는 감사로 채워 가고, 또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함으로써 그 의미가 충만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지만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실천을 대체해버릴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쾌적한 대용물도, 무력한 대용물도 아닙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해지는 비판처럼 기도는 누군가를 돕는 실천적인 일과 관계없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오히려 우리가 살아갈 목표 설정을 해명하고, 우리가 행동할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특별한 방식으로 수행되는 선교적 과업과 병행되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예배 시에 우리가 드리는 감사와 간구에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점에서 선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임박에 대한 사신을 모든 이들에게 알림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에서 기쁨과 평화를 발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그 뜻을 실천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소원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향해 훨씬 더 많은 감사와 희망을 품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만드는 영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로 맺어주시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 있는 사소한 것들을 감사하기 시작할 때 이미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필요를 모든 인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우리의 모든 필요가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 우리의 모든 필요는 잠잠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모든 기도의 시작과 목표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기도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간구하는 것으로 집중됩니다.

(1973년 부활절 후 다섯째 주일, 로흐함)

예수의 복종

히 5:7-9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종이라는 가치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종이라는 것을 맹목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맹목적인 복종은 지난날 군대에서 요구되던 그런 복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복종은 이런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유로운 판단과 결단에 근거해서 기꺼이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 조직의 법에 복종할 필요가 있듯이 시민으로서 우리도 역시 이 나라의 감독 기관과 지도 기관에 복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도 역시 이런 정부의 지도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즉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인간보다 하나님에게 훨씬 분명하게 복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대 법정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말라고 명령했을 때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행 5:29).

오늘 우리들은 인간의 질서와 권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기인한다는 사실과 또한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복종 안에서 유효하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 두 사실이 아주 또렷했습니다. 즉 율법과 의로움의 기초는 하나님의 권위에 기인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취해야 할 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왕들이나 그 이외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살아가지 못했을 때 예언자들은 그들을 가혹할 정도로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임했다는 예수님의 선포도 역시 이런 전통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하시오”(마 6:33).

신약성서에 보도되고 있는 예수님의 전체 사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하나님에게 복종했다고 말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기록하고 있는 대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말입니다.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복종은 첫 사람인 아담의 불복종과 대비되는 상(象)입니다(롬 5:19). 이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복종하여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점이 핵심입니다(5:10 이하).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복종에 대한 오늘의 본문도 역시 특별히 그의 죽음과 연관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복종이라는 개념의 뉘앙스가 약간 색다르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복종을 ‘배웠다’고 말입니다(히 5:8). 예수님이 원래 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표현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도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자기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다고 합니다(5:7). 이것은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 26:39). 그가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는 이 잔은 고난과 고통스러운 죽음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려움 가운데서 그것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것은 분명히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겠다는 것입니다. 복종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즉 요한이 “다 이루었다.”고(요 19:20) 보도하고 있듯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학습되어야만 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복종은 특별히 예수님이 어떻게 고난과 죽음의 길을 따랐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는 이와 달리 예수님이 가신 길, 그 전체가 복종의 길입니다. 이 복종은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점에서 매우 극단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왜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행위였는가 하는 점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이런 명령은 갑자기 뜨거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향한 예수님의 길을 단절된 것으로 간주하면 안 됩니다. 흡사 고난으로 진행된 그 이전의 역사가 없이 하나님이 제멋대로 요구한 희생으로 간주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걸어오신 전체 삶과 연관해서 볼 때 그의 고난과 죽음은 그가 받은 사명에 의한 당연한 귀결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이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신 것처럼 보일 수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전체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대한 복종의 징표입니다. 이 사명은 곧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이르렀으니까 모든 관심사를 오직 하나님의 미래에 맡기고 살아갈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관심사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맡기라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신 것처럼 이런 선포의 사명에 충실함으로써 그 자신 스스로 하나님에게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임했다는 이런 선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이미 현재의 현실성이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사명은 자기 민족의 권력자들과 큰 갈등을 빚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 그의 요청은 엄청난 월권으로 비쳐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 가까이 임했다는 사실을 중재하는 자로 자처했다는 점에서 그럴 만도 합니다. 이런 갈등은 결국 로마 당국의 사법적 조치를 불러옴으로써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선포를 포기하고 목수라는 현장 노동자로 돌아갔다면 이런 죽음의 운명을 벗어나서 자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해야하는 자신의 사명에 복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이런 사명에 복종하는 사람이라면 갈등을 피해가지 말아야 하며, 결국 이로 인해서 당해야만 하는 고난과 죽음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종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를 반대하는 큰 세력이 억압해 들어오고, 결국 그로 인해서 생명을 담보해야만 할 경우였는데도 하나님에게서 받은 위탁을 방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임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구원으로 이끌어내고,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에 자기의 생명을 던졌습니다.

이 사건이 곧 예수님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간 예수님의 복종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나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7).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져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요구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명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흡사 예수님이 갈등을 회피하지 않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신 것과 똑같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이 요청은 제자들이 주님의 운명과 똑같은 것을 그대로 감당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으려다가 순교자처럼 죽어야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처럼 실제로 십자가로 죽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의 결과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특별한 사명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이 신앙을 고수해야만 합니다. 비록 세상이 우리의 신앙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하거나 이질적이라거나 더 나아가서 완고하고 편협하다고 말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기독교 신앙 때문에 우리를 피하는 일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각자는 자신의 특별한 사명이 무엇인지, 완전히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질문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사명도 역시 오직 한번뿐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사명도 역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한번뿐인 사명은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과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임박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예수님의 사명은 예수님을 우리 기독교인들과도 구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로서 완전히 홀로 자기의 길을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명에 투철함으로써 예수님은 적대감이나 비방과의 갈등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 고독과 고통과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에 여전히 진실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명으로 인한 결과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그와 연결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으며, 또한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 선포와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모든 것보다 우선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그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현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성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리고 오늘도 교회의 성찬식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예수님의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에게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고 자신의 사명을 거절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가까이 임했다는 사실을 선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더 이상 그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현재화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값으로 치르고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그는 단지 제자들만이 아니라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듯이 “그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자가 되셨습니다.” 그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은 곧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가까이 임한 하나님의 통치에 맡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즉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이런 구원을 소유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일치하며 영원한 생명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과거의 현존에서 벗어나고 죽음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됩니다.

(1998.3.29, 뮌헨, 마태우스 교회)

우리의 희망

히 10:22,23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특별히 세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 말씀은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피로 뿌림을 받아서 우리의 몸이 맑은 물로 씻김을 받았다는 이 증언은 곧 세례에 대한 서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세례의 물은 우리의 죄를 씻어냅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고 여기 계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졌다는 것도 역시 세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세례는 우리의 삶과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로 만듭니다. 세례와 죽음은 상호 간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막 10:38) 예수님은 자신이 받아야만 할 세례를 언급했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 완전히 물속에 잠겼습니다. 세례 받는 사람이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서 매장된다는 사실을 아주 특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이렇게 물에 잠김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발생한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에 대한 신앙고백은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듯이 희망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을 통해서 이제 세례에서 일어나는 똑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그가 고백하는 예수님과 연결됩니다. 징표 행위로서의 세례는 신앙고백을 언어로 진술하게 합니다. 즉 우리의 생명을 예수님에게 양도하는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양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고백과 세례는 기독교 역사에서 초기부터 서로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고백을 암송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세례 받은 자로 자리 매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식탁인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세례보다 훨씬 역사가 깊습니다. 예수님에게로 소급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신앙을 고백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누가복음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이 모든 기독교 신앙고백의 근원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신앙고백은 그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특별한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즉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식적 논쟁을 통해서 한쪽 편을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과의 일치로부터 우리를 어긋나게 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런 세력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너무 쉽게 망각합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자기를 양도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이 문제는 핍박의 시대에만 해당되는 예외적 상황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기독교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늘 믿음 때문에 억울한 재판을 당하거나, 그래서 개인적인 삶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처럼 평화스러워 보이는 이 시대에도 역시 우리가 어떤 점에서 예수를 편들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선택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공공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성격이 점차 희석되면서 신앙의 만성적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을 편드는 일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신앙 고백을 언급하실 때의 핵심은 교리가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예수님과 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연대성에 덧붙여 약속하시기를 앞으로 인간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이 면죄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고백은 상호적 연대성에 토대를 놓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편드는 용기를 가진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하나님의 미래가 임할 때 구원과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세례에 상응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신앙고백과 마찬가지로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즉 그분의 십자가와 하나 되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앞으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적 신앙고백의 근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세례에서도 역시 예수님의 인격과 하나 되는 게 핵심입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적 희망의 근거입니다. 더구나 세례를 받는 자가 진술하거나 또는 그를 대신해서 공동체가 진술하는 사도신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피력하는 신앙고백이며,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연관될까요? 인격적인 면에서 예수님의 편에 선다는 것은 예수님,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을 진술하고 있는 사도신경과 어떤 관계일까요? 이것은 물론 순수하게 교리적인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의 편에 선다는 신앙고백의 본래적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까?

이 문제를 명백히 하려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신앙고백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핵심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내용은 신앙고백이 우리를 구원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입으로’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는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바울에 의하면 고백의 내용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입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가 예수님을 부활한 분으로 고백하게 된 기도의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올림을 받은 하나님의 자리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곧 다음을 의미했습니다. 부활한 분에 대한 교회의 기도 초청에 응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부활절 이후에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한다는 주장은 실제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예언자로 숭배하는 사람은 교회가 말하고 있는, 즉 살아있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분을 고백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는 것은 당연히 그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두 부분을 이렇게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입으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로부터 부활시키셨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을 일컫는 ‘주’라는 단어의 특징은 그 단어 이상의 진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관건은 교회가 예수님을 주라고, 또한 살아있는 분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전제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죽어있는 한 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이 진술은 곧 기독교의 핵심 내용을 담은 사도신경 역사의 단초입니다. 후에 부가된 모든 내용은 바로 이와 똑같은 기능이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고 있는 이 진술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사도신경에는 교회가 주(主)로 부르는 그분이, 따라서 교회가 신앙을 고백하는 그분이 누구인가가 언급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특성들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신앙고백에도 역시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인격으로 고백한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는 사실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의 모든 진술은 우리가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가 누구에게 신앙을 고백하는지 말로 진술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고백의 역사에서 그 다음 단계가 여전히 신약성서에 있습니다. 즉 요한일서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요일 4:2). 여기서는 두 가지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한 가지는 교회가 주라고 부르는 예수님은 영원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인간의 형태를 갖고 나사렛 예수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가 영원히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주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즉 그는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셨으며,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시어 다시 하나님에게로 올림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에게 신앙을 고백하지 않은 채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천지의 창조자이십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부활 이후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은 성령과 교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절과 승천 이후로 교회에 의해서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교회에 의해서 선포된 바로 그분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미 바울에 의하면 신앙을 고백하는 자는 기도하라는 교회의 초청에 응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주님이라고 말입니다.

교회와 아무런 상관없이 예수님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배제한 채 일종의 신화적인 것을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교회는 나사렛 출신의 평범한 인간의 자리에 영원한 아들의 표상을 정립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모든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사도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면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성령과 영원히 일치해 있습니다.

교회와 더불어서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아들로서의 예수님이 아버지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발전된 신앙 형태는 니케아 신앙고백과 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우리는 오늘 예배 시간에 함께 고백했습니다.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이 사도신경의 내용을 적지 않은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대에 걸맞은 신앙고백문을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진술을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런 시도가 자주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서는 교회가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즉 부활했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을 더 이상 진술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빚을 뿐입니다. 신앙고백의 언어에 있는 교훈적인 내용은 자체적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언어들은 예수님에 대한 완전한 고백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고대 신앙고백의 진술들은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 대체되면 안 됩니다. 그 신앙고백을 확증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세속 시대의 영에 대항해서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계에 도전하지 않고 단지 세계에 적응하려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경험이 아닙니다. 이미 히브리서는 이렇게 주의를 환기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동요하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세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물과 예수님의 피로 죄에서 깨끗해지고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자기만을 모색하는 노력으로부터 죽었으며, 또한 이러한 자기 모색에 의해서 작동되는 세계로부터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적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다음의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세상을 따르지 마시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은 이런 생명을 뛰어넘는 희망을 전혀 제공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희망의 불빛은 이미 우리의 현재적 생명을 비추었습니다. 이 희망은 여기서의 생명을 변화시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세례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 신앙고백을 드릴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동요하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그 분은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1992.1.26,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예배)

굳게 지키시오!

계 3:1-6

우리는 오늘 성서 본문에 나오는 사데 교회의 어떤 행위가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행위가 잘못되었을까요? 사치스러운 도시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이웃의 궁핍을 잊어버린 걸까요? 또는 박해가 심한 시절에 신앙을 고백할만한 용기가 없었던 걸까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사데 공동체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호기심은 그저 허공을 울려댈 뿐입니다. 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오늘의 본문에서 몇 마디로 짧게 요약된 그 설명이 매우 절실하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왜냐하면 그 몇 마디가 바로 오늘 유럽 기독교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데 교회처럼 살아있다는 이름만 가졌습니다. 기독교인처럼 살고 있다는 그 명분만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의 뿌리는 현재 이슬람권에 속해있는 그 근동 지역입니다. 기독교가 그 지역에서 밀려난 이후로 우리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세계 기독교의 중심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살아있다는 이름만 가졌지 실제로는 죽었습니다. 뜨겁고 단호한 신앙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젊은 교회로부터 우리는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그곳에서 우리에게 오는 학생들은 우리 유럽 교회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고 실망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기독교는 놀랍도록 부흥했습니다. 지난 1940년 이후로 교회 신자가 50%나 늘어났다고 합니다. 전체 국민 중에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지난 100년 사이에 세배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우리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지쳐버렸습니다. 이 문제는 사랑의 행위에 관한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도 무언가 언급할만한 게 있지만 말입니다.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 신앙고백에 관한 겁니다. 신앙에 대한 확신이 내적으로 공허해지면 결국 사랑도 마비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행위가 개입되면 자칫 잘못해서 자신의 쾌적한 삶과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삶이 유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풍요로움에 자족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경고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심판의 경고를 우리가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고 해서 우리가 죽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 심판의 경고를 진지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원시적인 표상으로부터는 가능한 멀리 도망쳐 나오는 게 상책이라고들 믿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에 대해 그저 빙긋 웃을만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매우 지성적이고도 의미심장한 듯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이 심판의 경고를 예수 그리스도가 일곱 영과 일곱 별을 손에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그림은 예수님이 한 무리의 혹성을, 즉 우주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나타내는 우주론적인 상징을 손에 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에 우리가 이런 진술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가 선입관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화적’이라는 표제어 때문에 기독교 전승의 모든 지평을 성급하게 끝장내버리고 맙니다. 혹은 최소한 불확실하다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어 있습니다. 사데 교회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 우리와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세 번 외칩니다. 생각하시오, 지키시오, 극복하시오!

1.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 그것을 굳게 지켜라.”(3절). 이 말씀은 우리가 처음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한 번 가졌던 경험과 느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감상에 젖어 뒤돌아보는 어린 시절의 신앙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복음의 내용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그의 말씀, 그의 행위, 그의 죽음, 그의 부활입니다. 또한 이 한 인간을 통해 전체 인류의 역사 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온 그 전환점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과 관계된 대강절의 심층적 의미에 속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 대강절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인물이었던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세상에 한 번 오셨으며, 또한 신약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그 사건이 그에게서 한 번 일어났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이 사건은 예수의 역사적 유일회성에서 오늘 우리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늘 거듭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온전히 신뢰하게 만들고, 또한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증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너와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본질이 되셨다는 사실은 더 이상 시적(詩的)인 전환점일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인간관계는 그것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부터 유래하여 완성되고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아무리 많은 신화적 요소와 전설적 구조가 포함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한번 왔다는 사실, 그리고 이 사실이 단순히 신화와 전설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요점입니다. 한번 세상에 오셨던 그분이 우리 스스로는 유지해나갈 수 없는 우리의 삶을 오늘도 역시 이끌어주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바로 요체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관심을 유지시켜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사신에 대해서 질문할 때, 그리고 그 대답을 전혀 모르거나 잠정적으로만 알고 있을 때 기독교 사신이 무엇을 전승시켜왔는가에 대한 관심 말입니다. 이런 관심과 질문과 답변들은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고, 성서를 읽고, 그 내용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일어납니다.

2. “그리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3절). 전승된 것을 지키는 일은 오늘날 너무나 간단하게 비난받습니다. 그 전승은 무언가 시시하고 생각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가볍게 여기는 일이 허다합니다. 물론 기독교인들, 특히 신학자들은 기독교 전승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기독교에 적대적인 이들과 기꺼이 경쟁해야합니다. 이러한 자기비판은 분명히 여러 점에서 심층적인 의미가 있고, 게다가 필수적입니다. 날이 갈수록 현재의 삶에서 더욱 더 낯설어지는 전승들을 그저 막무가내로 고수해나가는, 정말 영적이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이 세상과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틈만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이지 못한 비판도 있습니다. 비판적인 주장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 전승을 무조건 확신해버리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전승된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넘겨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전승이 실질적인 차원에서 그 근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의 외경심을 갖고 대합니다. 그래야만 비(非)기독교인들도 우리가 이 전승을 우리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인정해줄 것입니다. 반면에 전승이 보도하고 있는 그 내용을 내다버리는, 그래서 그 전승 이외의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려는 재해석은 너무나 값싼 태도입니다.

전승에 대해서 무비판적인 자세로 대하지는 않으면서도 기독교의 사건을 명명백백하게 확증하고 고수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기독교 사건은 우리의 세상에 한번 오신 예수님에 의해 열려진 우주적 사건입니다. 이런 사건에서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과의 그 어떤 틈도 벌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모든 현실을 예수님 안에서 더욱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현재의 삶에 더욱 확실하게 침잠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오래 전 우리 인간과 함께 살았던 과거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위해 만물이 나아가게 될 미래에 오실 분이라는 사실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우선 ‘깨어 있게’ 됩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우리는 현실성에 대한 정당성을 확실하게 지켜나갑니다. 이것은 곧 “깨어 있으시오.”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기독교 전승이 언급하고 있는 현실성을 그것의 모든 문제점들과 더불어 아무런 편견 없이 인식하는 일에 깨어있게 된다면, 우리가 이미 잠자는 자처럼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과거에 오신 분으로만 생각했지 부활한 분으로나 앞으로 오실 만물의 주님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굳게 지키시오”라는 말씀은 우리가 무언가 어렵고, 불가해하고,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그 시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너무나 값싼 지침을 따르는 것만으로 만족해버리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전승이 유래하게 된 그 사건이 모든 안개 층을 벗어나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킬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이럴 때 올바른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며, 고유하고 순전한 회심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3. 마지막까지 관철되어야할 이러한 지켜내는 일은 오늘 설교에서 세 번째로 언급되어야할 극복입니다(5절). 극복은 물러서는 것과 반대입니다. 완고한 전통주의자는 모든 불안한 질문 앞에서 물러나 버립니다. 이들은 오늘의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종교적인 자연보호 공원으로 물러나 버립니다. 그러나 극복하는 자는 세상과 그 세상의 질문에 맞섭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세상을 재발견할 때까지, 또한 예수님을 세상에서, 바로 우리의 세상에서 주님으로 인식할 때까지, 일곱 별과 일곱 영을 손에 든 분으로 알아볼 때까지 그 전승된 것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사유와 행위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면 안 됩니다. 이 양자 안에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극복해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이미 기독교 전승에서 각인된 세상으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로 조형해내야 합니다. 이 작업은 물리학이나 경제, 그리고 정치 영역에서도 똑같이 진행되어야합니다.

극복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분의 그 현실성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요한계시록에 자주 언급되어있는 흰옷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명을 특징적으로 가리킵니다. 이런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되며, 또한 일 세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통해서 극복한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극복하는 사람들도 역시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적 예수 자신이 약속한 사실은 실현되어나갑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면, 예수님도 그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인정한다는 약속이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으면, 예수님도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이 죽음을 극복했다는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버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단지 이미 오셨던 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던 이분의 생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행하신 모든 것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그분은 다시 오실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우리의 죽음 저편에서 우리에게 오실, 그리고 죽음에서 난파당할 우리의 생명을 건져내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언제, 어떻게 우리 생명과 세상 생명의 미래가 될는지 아직은 모릅니다. 그가 밤중에 도적처럼 오신다는 말은 어느 시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오시는 방식, 즉 그의 미래와 현재 살아가는 우리의 이 생명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어둠 가운데서도 우리는 기다리고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있는 자로서 그 미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붙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963년 대강절 둘째 주일, 마인쯔 대학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