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칼럼&공부

아들을 죽여 아들을 살리는 이기적인 그 사랑 (북가주 원찬연님의 전체 글을 다시 담아왔습니다)

은바리라이프 2014. 5. 14. 18:04

아들을 죽여 아들을 살리는 이기적인 그 사랑 (북가주 원찬연님의 전체 글을 다시 담아왔습니다)| 성도의 이야기

강구만|조회 189|추천 0|2013.05.14. 07:13http://cafe.daum.net/smyrna-cafe/9obd/130 

 

샬롬,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사 십년 광야의 길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자기밖에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의 모리아산 시험과 아담의 선악과 시험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역사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에서 '시험' 이라는 히브리어 '나싸' 라는 말을 
LXX 칠십인역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말이 '도끼마조' 가 아니라 '페이라조' 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도끼마조' 는 시험하는 대상이 반드시 참 임을 증명하기 위해 조사하고 연구하는 시험이고, 
'페이라조' 는 시험하는 대상을 반드시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는 시험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왜 하필,
아브라함에게 자기 독자인 이삭을 죽이라는 그 시험이라는 단어로 '페이라조' 가 쓰이게 되었을까요?

 

흔히들, 자기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먹은 자기밖에 모르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아들까지도 서슴없이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되어졌다고 ...
결국, 그가 진리를 알아 진리가 되어 그의 믿음을 드러내 보인 극치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아브라함을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내고 폭로하는 시험이었고, 
그 아브라함 옆에 어린양이 죽을려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이 아니면, 어린양이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에는, 
공짜로 가지라는 막벨라(양우리) 밭을 굳이 은돈을 지불하고 사서 그 굴 안에 장사되는 아브라함,
그 죽음의 자리까지 질질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아브라함에게서 오롯이 드러나게 됨을 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니,
진리로 되어진 나를 '도끼마조' 시험하여 이 땅에서 확증하신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 나의 불가능함을 어디까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이 정말 나의 밑바닥 인가요?
정말 자기가 깨달아 서 있는 거기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 처음 자리입니까?
인간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나오는 그 어떤 말이
그 어느 누구를 그 죽음 밖으로 끄집어 내어 살린다는 말입니까?
그 소리 가운데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 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두려워 떠는 가운데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아브람의 방패요 상급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랬더니만,
아브람이 대뜸 '나는 자식이 없어요, 나의 상속자는 엘리에셀로 정하고 싶어요' 라고 반문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만이 상속자이고, 하늘의 별과 같은 네 자손이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 자손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인 '그리스도' 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 갈대아 우르에서 나오게 될 때부터 25장 막벨라 굴에 장사될 때까지
줄곧 그리스도만을 계시하신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의 이삭을 죽이라는 모리아산 시험도 그 맥락 가운데에서 보면,
말씀의 완성인 그 죽음을 확증하는 시험과 그 죽음으로 반드시 넘어지기 위한 시험이 
아담의 선악과 시험 곧 반드시 먹을 수밖에 없는 선악과를 '먹지마' 라고 말씀하신 후부터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율법 시험 곧 '희생제물을 반복해서 도륙하지마' 라는 말씀이 
반드시 희생제물은 이렇게 죽이라는 수많은 방법으로 모세오경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그 모든 시험은 
아담, 아브라함,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을 만한 좋은 놈이다, 멸망 받아 마땅한 나쁜 놈이다,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 물로 깨끗이 씻어 위의 것으로 되어지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화목제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와 평강을 밝히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자기 독자인 이삭을 죽이라는 그 시험 안에서 
하나님이 중심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 보아야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자라게 하신 증거라는 둥 아브라함의 불가능을 끝까지 들추어내셨다는 둥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 것이 아브라함의 자기의 라는 둥의 나 중심의 자기 신앙으로 가면 안됩니다.

 

이삭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상속자 그 자손으로 잘못 알고 있던 아브라함,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너의 독자 이삭을 죽여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통해 '해마다 희생제물을 반복해서 죽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는, 칼로 이삭을 찌르기 전까지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시던 하나님께서
'손 대지 마라, 죽이지 마라, 네가 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반복해서 희생제물을 죽이는 제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는,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가시덤불에 걸린 숫양이 있었고,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보다' 라는 단어가 '호라오' 가 아니라 '에이도' 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그 숫양이 의미하는 진리를 알았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몰랐다는 말입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 대신에 그 숫양을 번제로 죽이라고 말씀했나요? 
아니요, 아브라함이 자기 스스로 '이삭을 죽여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끝까지 지킨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이 그 땅을 '여호와 이레' 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반복해서 희생제물을 죽이는 제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를
한 번만 보세요.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또 다시 창세기 15장에서의 그 자손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은 브엘세바 곧 언약의 우물 이라는 곳에서 거주하게 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이레' 라고 말했던 그 때는,
모리아 산을 오를 때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요?' 라는 질문에
'번제할 어린양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다' 라고 이미 말한 후 였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에 어린양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릴 줄을 예상하고 아브라함이 서슴없이 이삭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 전에 택정 받은 성도의 인생 여정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반드시 '도끼마조' 의 결론을 내포한 '페이라조' 시험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 말은 또한
하나님이 참이심을 확증하는 '도끼마조' 가 피조물에게는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으로 폭로되는 '페이라조' 로
믿음의 대상인 모든 성도에게 이 역사 가운데 차서대로 주어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긍휼로 가두신 그 무덤 밖으로 끄집어 내시는 그 영광만이 오롯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을 바라보았고 (쿰), 가시덤불에 걸린 숫양도 바라보았습니다 (쿰).
그걸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에 의하여 아브라함은 ..., 믿음에 의하여 누구는 ..." 이라고
믿음의 대상이 그 누구이든 간에 믿음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LXX 칠십인역을 보면,
말씀의 완성인 죽음 '무트' 라는 한 단어를 문맥에 따라 '네크로스' 또는 '다나토스' 로 번역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그 시험 이라는 '나싸' 도 문맥에 따라 '도끼마조' 또는 '페이라조' 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도끼마조' 그 시험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끼마조' 를 통과하실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분,
왜냐하면, 그 분만이 참이시니까요.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죽을 수 있는 이도 오직 한 분,
왜냐하면, 그 분만이 생명이니까요.
마침내 하나님 안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이도 오직 한 분,
왜냐하면, 그 분만이 죽은 자 가운데 처음 익은 열매 '모노게네스' 아들이니까요.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시면서 '의롭다' 라고 대언(Advocate 변호)해 주시는 분도 오직 한 분,
왜냐하면, 그 분만이 여호와,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 이시니까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천하 사람 중에 그 어떤 이름도 구원을 받을 만한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그 이름 안에서 의롭다 여겨질 뿐입니다.
그래야 우리 입에서 도무지 값을 수 없는 '은혜' 라는 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리아 산의 그 죽음이 막벨라 굴의 그 죽음으로,
어린양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게 되는 그 날,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심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들을 죽여 아들을 살리는 이기적인 그 사랑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 만 보시지,그리스도 밖에 스스로 서 있는 '너' 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 실체의 표적인 문자의 의미에 집중하기 보다는,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막벨라 굴에 장사된 아브라함까지 질질 끌려가는
우리네 인생의 여정 가운데
창세 전에 택정 받은 그 어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 물로 깨끗이 씻어 위의 것으로 되어지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와 평강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