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칼럼&공부

Re:은혜 아래 삽자가 아래

은바리라이프 2013. 12. 10. 07:37

Re:은혜 아래 삽자가 아래| 성도의 이야기

강구만|조회 176|추천 1|2013.06.03. 10:34http://cafe.daum.net/smyrna-cafe/9obd/161 

죄인이 가장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이 '은혜'라는 것을 은혜를 입에 달고 다니는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모른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은혜마저도 내 자아의 확장에 이용해먹는 것이 교회에 열심있는 교인들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외에 다른 것으로부터 행복과 안전을 구하는 것을 죄라고 하시는데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계시지 않는 사람들이 그 불안과 결핍을 자신의 열심과 다른 이들로부터의 인정받는 것으로 메우려한다. 그러면서 늘 앞세우는게 하나님의 은혜란다. 이 사람은 한번도 십자가 앞에 서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죄는 머리속에서만 정리된 죄인이고 십자가조차 나를 통통하게 살찌우는 면죄부요 지식일 뿐이다. 그래서 자기를 긍정하는 가짜 은혜밖에는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열심을 중단시키면 벌컥 화를내고 발작을 하게된다. 반면에 그리스도로 충분한 성도는 일을 하나 안 하나 불만이 없다. 자신의 자리를 알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서신서에서 항상 교리(복음)를 먼저 전하고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고 이렇게 충성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권면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설치는 것은 오히려 복음의 대적자가 되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자들이 그랬고 유대주의자들이 그랬으며 영지주의자 오늘날의 인본주의자들이 그렇다.


이 모든 불법의 공통점은 바로 '나'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교회마저 '나'라는 존재의 확장에 이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언어의 선점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다. 언어라는 한계성을 누구보다 잘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유익을 위한 언어 선점으로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뜻과 상관없이 공동체라는 공동의 선을 앞세운 사람의 언어로 변조해버리는 것이다. 나르시즘 환자들의 기억조작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가지 착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지상의 가시적인 교회안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또 그 교회안에 갇힐 수도 없고 사람의 교회를 위해 계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언제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교회를 공격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증인된 성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게 하셔서 그 증인들의 핍박과 죽음을 통해 '피로사신' 교회 곧 묵시 안에서 완성된 거룩한 교회를 '선언'하시는 것이다. 공간이나 물질이 아닌 거룩하게 하신 시간, 즉 구약의 안식일로 예표된 하나님 나라의 침입이며 세상의 위기이다.


이 방법외에 역사속에서 세상 신이 장악한 사람의 회당을 고발하시는 하나님의 다른 권능은 없다.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 나라, 곧 피뿌림을 입은 교회의 권능이며 증인들의 땅끝이다. 이러한 증인의 고난 곧 복있는 자의 대열에 참가한, 그 피의 릴레이에 참여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지 교회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반드시 복음을 대적하고 파 묻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2000년 교회사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한국 땅의 밤을 밝히는 수많은 십자가의 네온등이 그렇다. 어쩌면 우주라는 공간에 설치된 모든 조명들이 꺼지기 전에 예레미아처럼 메머드 교회건물 앞에서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아니다!'라고 외쳐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땅의 교회에 하나님의 긍휼이 아직 남아있다면, 새 창조의 증인들이 아직 있다면 스스로 자신조차 판단하지 않는 무모한 자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2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