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칼럼&공부

복음의 회복 (김성수 목사)

은바리라이프 2013. 11. 17. 22:23

복음의 회복 (김성수 목사)


 


합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인간들의 새겨 만든 우상 즉 나를 높이고 나의 유익을 위해 나를 숭앙하게 만드는 '가르침'은 거짓스승이라는 겁니다. 

이게 오른 손 오른 눈이에요. 그래서 찍어라고 하는 겁니다.

왜? 간음케 하는거니까. 그게 간음케 하는거. 참된 선생은 예수를 보여주어야 해요.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참 선생은 예수를 보여줘야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되는지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게 선생 아니에요. 그거는 성령이 이끌어가는 삶이고 선생은 예수를 보여주고 예수를 설명하고 예수를 가르치는 자여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인간들의 보편적 자존심을 높여주고 독려하는 그런 설교를 좋아한단 말입니다. 그런걸 은혜받았다 그래요.  


그리고 예배 끝나고 두 주먹 불끈 쥐고 "그래, 세상에 나가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야지" 이러고 나간다니까요. 그러면서 '우리 예배는 이렇게 살아있는 예배야!'  강시들이 콩콩 뛰면서 살았대. 그게 죽은건데.  그리고는 영락없이 다음 주에 또 와가지고 "주여, 제가 나가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웠는데 이 꼴로 다시 왔습니다" 맨날 이거 반복이지 뭐예요? 대표기도 하는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다 그거야. 여러분은 설교를 듣고 두 주먹 불끈 쥐고 나가는게 아니라 "하나님 어찌 나같은 걸 위해 아들을 죽이셨습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나가는 거예요. 이 고백. 이 항복의 고백이 여러분을 이기게 하는 삶으로 끌고 가는겁니다. 디모데 후서 4장 3절 보세요.



디모데 후서 4장 3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게 인간 보편의 지향성이에요. 그래서 사람 많이 모이는 교회가 진짜 제대로 가는 교회일 것 같으세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른 손과 오른 눈을 찍어라. 그들은 너희들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 이 땅에서는 그들이 너희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너희들의 감정에 호소하여 너희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지만 그들을 조심해라"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조심해라! 


그런데 여러분 솔직하게 말해서 그러한 노력을 열심히 합니까? 우리 자신을 우상삼아 사는 삶을, 우리 자신의 영광과 가치상승을 위해 사는 그 삶을 그 열심과 노력을 진짜 어떻게 해서든지 이건 끊어내 버려야 하는 건데 하고 목숨걸고 한번 그것과 싸워본 적 있어요 우리가? 아니 싸워보기는 싸워보는데 싸우면서도 야, 어떻게 다른 사람 못하는 그걸 너는 어떻게 그렇게 하고 있니? 그렇게 그걸 하면서 또 간음하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때론 애써 보기도 한다니까요. 그건데 그걸로 자기를 다시 칭찬해준다니까요. 그게 간음이라면서요? 그렇게 우리는 어쩔 수 없는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찍혀 나가야지요. 나같이 불가능하고 더러운 게 지체로 예수님 몸에 붙어 있으면 안 되잖아요. 


여러분 전쟁영화 보셨지요? 다리 하나가 이제 썩어들어가요. 상처를 입어서.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야전병원에서 톱으로 그거 막 자르죠? 잘라야 산다고요. 팔 이만큼 뚝뚝 잘라 버리잖아요. 이거 붙여놓으면 얘 때문에 죽으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볼 때 우리는 그렇게 여전히 더러워요. 나로 말미암아 예수라는 그 교회 지체가 썩어들어가서 죽을 것 같아. 이 자각과 고백이 여러분에게 반드시 있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야, 나는 구원받아 마땅해~ 가 아니라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하나님, 하나님 저, 지옥 보낸다 할지라도 저는 진짜 아무 할말 없는 그런 자입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 저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저는 구원 이야기 요만큼도 할 수가 없는 자네요." 여기까지 내려가야 되거든요.  


내가 잘려나가야 교회가 살아요. 그게 진짜 성화된 사람 아닙니까? 나 때문에 남들이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 성화를 이야기 하는 사람 중에 진짜 이 고백하는 사람 몇명이 있냐고요? 전부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잖아요. 이런 설교를 듣고도 그 안에서 내가 원하고 내가 필요한거만 골라 듣는, 그래서 '우리는 너희들과 달라!' 라고 하는 그 내가 잘려 나가야죠, 그런 내가 찍혀 나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 십자가라는 나무에서 찍혀 나간 거예요. 내가 찍혀 나가야 되는데. 그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라는 나무에 가지로 붙어 있는 거에요. 이 모양인데. 그리고는 예수가 내 안에서 생명으로 열매를 맺어 주시는 거에요. 여러분 안에 생명이 들어가 있죠? 그게 열매에요. 그걸 아는 이들의 삶 속에서 진심으로 나 이외에 다른 이들을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하는 그러한 행위들과 지향성이 조금씩 보여 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또 넘어지기도 하고. 그러나 그들은 그럴 때마다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뭐 대단하게 꽤나 괜찮은 사람이 되었습니까?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는 그런 자격 있는 자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내가 건강한 교회의 그 몸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내가 가장 먼저 잘려 나가야 할 존재, 가장 먼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부터 이혼 당해야 할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아는 그런 이들이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첫번 째로 이혼 당해야 마땅한 자입니다.' 왜? '지금도 이렇게 나만을 사랑하며 간음하며 살고 있는데 내가 제일 먼저 이혼 당해야 할 자 맞습니다' 이 고백이 있는 사람에게 "그런데 나는 죽어도 너랑 이혼 안 한다" 이 신랑의 고백, 성도의 견인교리를 성경에서 들었을 때에 그에게서 어떤 고백이 나오겠냐고요. '찬송'이에요. 그게요. 


그런데 그런 고백이 없으니까 신랑이 나를 끝까지 붙들고 이혼시키지 않는다고 그래도 '그렇지 뭐 나 이쁘니까, 나 괜찮으니까' 이러고 있는데 무슨 찬송이 나와요. 나에 대한 찬송만 나오지. 그 상태 그렇게 이혼당해 마땅한 자가 나라는 그 고백, 그 고백이 있는 자에게 복음이 떨어질 때 그에게서 찬송이 터져 나오는 그거를 '독싸', 영광을 돌린다 라고 하는 거예요. 뭐 축구 골대에 골 한골 넣고 기도하는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게 아니라, 큰 예배당에 사람 많이 모아 놓은게 영광 돌리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 은혜를 찬송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란 말이에요. 



예레미아 3장 6절 

요시야 왕 때에 여호아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네가 패역한 이스라엘의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사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그가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 내게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오히려 내게 돌아 오지 아니하였고 그 패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쫒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북 이스라엘, 남 유대 다 간음한 여자라는 얘기죠? 그렇다고 이들을 죽여 버렸나요? 아니에요. 하나님의 신부들이에요 이들이요. 그렇게 그들의 실체를 확 폭로시키시는 것입니다. 이혼증서까지 주셨대요. 예수님도 이혼증서 얘기 하시죠? 이혼증서 써주면 이혼해도 된다 그런얘기 하는 거 아니예요. 이혼증서가 뭐에요? 너희들은 이혼당해 마땅하다, 너희들은 없음이다. 그래서 신랑이 죽고 그의 것으로 너희들은 신부로 탄생되어야 한다. 


이게 뭐에요? 너희들은 신랑으로부터 그 은혜가 부어지지 않으면 단절이고 이혼당한 자라는 거. 그렇기 때문에, 없음이기 때문에 신랑의 은혜가 그 생명력이 부어지지 않으면 너희들은 존재 아니다. 이게 성경이잖아요. 이게 이혼증서에요. 그런데 이혼증서를 우리에게 줘요. 그러면 그걸보고 '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이혼 당하면 절대 안 되는거구나' 하고 남편에게로 돌아가야 되는데 그걸 가지고 간음을 하더라는거에요 또. "그래 훌륭한 신부가 되어야지" 이렇게.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죠? 이게 찍혀 던지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이혼을 경험하시는 거예요. 그 연합이 깨지는 거에요. 한 번도 그 연합이 깨진 적이 없었는데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를 끊어낸 거라니까요. 이혼을 경험케 하시는 거에요. 왜? 간음한 우리 때문에, 없음인 우리 때문에 예수가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 버리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신부가 된 것을 구원이라고 하고 그걸 복음이라고 그래요. 그게 기독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