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비유강해

비유(30) <끝> 떡 하나 주면 정말 안 잡아먹을까?(III) (막13:28~37)

은바리라이프 2013. 10. 21. 13:17

비유(30)

떡 하나 주면 정말 안 잡아먹을까?(III)

 

(13:28~37)

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3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1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 이니라

34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한국 예술학교의 윤영선 교수가 쓴 ‘키스’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그 희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통의 부재라는 대 주제를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하여 차분히 풀어갑니다. 작가는 소통의 부재라는 주제를 한 마디로 축약해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하여 반복하여 외치게 하는데 그 대사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입니다. 작가 김태웅씨가 윤영선 교수의 희곡을 읽다가 그 말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윤 교수의 양해를 구하고 자신의 희곡 ‘이()’에 그 대사를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 그것을 영화감독 이준익씨가 자신의 영화에 사용하여 공전의 히트를 칩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그 대사가 나올 때마다 극 중에는 두 명의 맹인이 등장합니다. 두 맹인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는 확인 작업을 통하여 ‘나 여기 있음의 상태’ 즉 자신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자신이 부르고 있는 그 대상이 거기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너 거기 있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은 맹인이라 상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맹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이런 식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모든 인간은 ‘나 여기 있음’이라는 자기 존재의 실존 감각을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만한 확실한 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고는 전부 ‘나 여기 있음’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존 세계의 주인공인 ‘나’의 상대편에 예수가 있음을 가정하고 ‘너 거기 있는가?’를 연신 외쳐 대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가 보이지 않거든요. 그래서 ‘나 여기 있음’의 자기 존재성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는 인간들은 그 불확실한 ‘너 거기 있음’의 현실을 확고히 하기 위해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하고 선한 일에 힘을 써 보기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나 여기 있음’의 자리에서 ‘너 거기 있음’이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거기 있는 너’라는 대상이 ‘나’를 불러 주도록 치성을 다 해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앙이라고 오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더욱 견고히 하고 자신의 ‘나 여기 있음’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임을 확보하기 위해 부르는 신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상을 부르는 데에 사용되는 모든 행위를 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 여기 있음’의 가치와 의미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피조물 인간의 죄의 본질이며, ‘나 여기 있음’의 가치와 의미를 챙기기 위해 내가 주관적으로, 심리적으로 수용한 신은, 내가 수용한 신이기에 언제든지 나에 의해 퇴출이 될 수 있는 우스꽝스럽고 무력한 가짜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바로 ‘나 여기 있음’의 자리를 공고히 확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전 역사를 통하여 바로 그것을 깨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의 원래 상태, 즉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 아래에 있을 때에 비로소 존재일 수 있고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때 비로소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서 죽은 자로 항복되어질 때 비로소 창조의 은혜 안에서 가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인간의 이름이 ‘흙’입니다. 흙은 창조자 앞에서 죽은 자여야 하는 인간의 존재 양식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담은 ‘흙’과 ‘사람’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함께 품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이어야 비로소 존재일 수 있다는 엄청난 진리를 그 아담이라는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가 발산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뭡니까? 창조의 은혜가 부어지기 위해서는 창조되어 살아있는 것이 없는 상태여야 그곳에 창조의 은혜가 발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 여기 있음’을 챙기는 자들에게 과연 창조의 은혜가 부어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가 아닌 ‘나, 예수 여기 있고 너 죽었음’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걸 아는 자만이 창조의 은혜 안에서 비로소 산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처럼’의 삶을 삽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단절이 진짜 죽음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처럼’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 절대 의존자의 자리에 앉을 때 비로소 창조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인데 모두들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게 진짜 죽음 속에 들어 있는 가짜 살아있음, 즉 좀비의 세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오셔서 ‘너희는 거기 있는 게 아니다. 너희는 죽었다. 살았다고 우기지 마라. 살았다고 우기는 그것이 바로 죽은 자의 행위인 것이다. 너희의 죽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어라’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나 여기 있음’의 가치와 의미를 위해 일로매진하고 있던 세상 사람들이 ‘너 죽었음’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너 죽었음’을 외치는 그자만 없으면 ‘나 여기 있음’의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살아나 버리셨습니다. 이제 인간들은 큰일 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도 다스리시는 진짜 하나님을 살해한 죄인임이 들통이 나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걸 인정하는 자들, 자신이 하나님을 살해한 죽은 흙에 불과한 자임을 아는 자들, 그들 위로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바로 그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죽은 흙이, 먼지가 풀풀 나는 마른 뼈가 낸 헌금이나 봉사나 헌신이나 선행 등을 근거로 그들을 살려 내시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는 마른 뼈에, 죽어 있는 흙에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가 폭포수처럼 부어지는 것이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있지요?’라는 개별자로서의 자신의 존재성과 가치와 의미를 챙기는 삶이 아니라 ‘나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 내 안에 계신다’는 ‘나 여기 없음’의 진리를 깨달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성도의 깨어있음은 그렇게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내 안에 사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비로소 난 산자로 여겨짐’이라는 갈라디아서 2 20절 말씀을 깨달은 자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우리 성도의 ‘죽은 자 인식’이 깨어있음의 내용이라는 역설이 성립이 되는지에 관해 사도 바울의 견해를 인용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8:10)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여기에서의 ‘몸, 소마’는 전인(全人)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으며 몸은 곧 인간 자신’이라는 명제를 꼭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8 10절을 이해하기 쉽게 풀이를 하면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성도) 성도라는 그 인간의 전인격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 이니라’

그래도 조금 혼란스럽지요? 죽었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살았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요?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하여 성도는 살아난 존재라고 분명하게 선언을 합니다.

(2:1,5)

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성도는 분명히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있는 존재인가 하면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죽은 성도 안에 들어가 계신 방식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4 7절의 표현으로 바꾸면 질그릇 안에 보배를 품은 형국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성도의 몸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계심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 10절의 ‘산 것’으로서의 ‘영’은 인간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 10절의 주제를 설명하는 부분을 패러그래프로 자르면 1절에서 17절까지로 한정할 수 있습니다. 그 열일곱 절에 ‘영’이라는 단어가 열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중 15절의 ‘종의 영’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든 ‘영’이 다 성령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8 10절의 ‘영’은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 안에 살아계신 성령에 의해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 그 성령이 떠난 상태의 성도는 역시 죽은 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은 질그릇 안에 산 보배이신 성령을 담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맥락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6:63)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여기에서의 영은 분명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그 영과 대척점에서 비교되고 있는 육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전인(全人), 즉 인간에게 속한 인간의 전인격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 그에게서 도출되는 그 어떤 사유나 행위도 인간의 살아있음에 무익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살게 하는, 살리는 것은 그 안에 들어가시는 성령 때문인 것이지 육의 그 어떤 부분도 인간의 살아있음에 전혀 기여할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로마서에서 ‘여겨주심’이라는 단어로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6:11)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그렇지요?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겨지는 것이지 우리의 ‘소마’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의 모든 서신서 안에서 입버릇처럼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하나님 나라의 구조, 성전의 구조를 반복하여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2:20)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잘 보세요. ‘나’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논리가 성립이 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 목적지인 ‘죽음’이라는 운명을 만 천하에 공포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은 다 죽은 자들이고 죽어야 할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살아있다고 하는 모든 존재는 다 죽은 것이고 그렇게 죽어 있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곳이 영원한 죽음의 장소인 지옥인 것입니다. 인간들의 ‘자발적 살아있음’이 하나님에 의해 영원한 죽음으로 내 몰리는 곳이 지옥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두 지옥의 영원한 사망으로 던져져야 할 자들 중에 얼마를 창세전에 선택을 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지옥이 아닌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안에서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몸은 죽고(죽은 자임을 인정하게 하고) 예수의 몸으로서 다시 살게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두 부류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한 부류는 여전히 ‘나 여기 있음’의 산 자 행세를 하는 죽은 자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린 예수 안의 성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죽은 흙이며 티끌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자들의 삶 속에서도 똑같이 좀비 같은 ‘나 여기 있음’의 삶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것을 제가 순환논리 적으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성도가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가 에베소서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죄와 허물에서 살아났다는 것이지요? 그 죄와 허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요구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 뭡니까? 율법이지요? 그런데 도저히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낼 수 없는 성도가 죄와 허물에서 살아났다는 것은 율법의 요구를 누군가 충족시켜 버리고 그것을 성도들에게 거저 주었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방법으로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버렸는가 하면, 그 율법에 대해서 죽어 버리는 방식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에 대해서 진짜 죽으신 분은 예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죽음조차 사유화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한 번도 인간은 살아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고 우겼을 뿐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사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 진짜 죽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놓을 수도 있고 다시 취할 수도 있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와 허물에서 살아나신 분도 누구밖에 없어야 합니까? 죽은 분이 하나니까 살아난 분도 하나여야 하는 것이잖아요? 죄와 허물에서 살아나신 분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분과의 관계성 안에서 산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죽이셨던 예수가 홀로 살아나셔서 그 예수의 공로 안으로 우리를 끌어 당겨, 우리는 거저 살아있는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걸 복음이라 합니다.

그러한 연유에서 성도는 예수의 공로에 의해 산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어있는 몸을 소유하고 있는 관계로 구원 받기 이전의 행사를 그대로 쏟아 놓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만을 위해 선택을 하고, 여전히 자기의 인기와 위상과 평판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도 합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난 성도들도 몸을 입고 있는 한 여전히 전인격적 타락 성을 그대로 담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저 어떤 구조 속으로 들어가 그 구조에 의해 하늘의 존재로 여겨짐을 받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죽은 몸’은 현상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래적이며, 끝까지 가는 구조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구조적이며 본질적인 죄의 총체인 인간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 아래에서 면목 없이 손을 벌려 하늘의 풍요를 선물 받는 그 상태가 천국의 구조인 것입니다.

(2:8-9)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 이니라

보세요.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구원에 조금도 기여를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구원받은 성도들의 죽은 몸 안에 살아계신 성령이 거하시는 방법으로 성도를 살아있는 자 되게 만드시는 것일까요? 이 역사 속에서도 몸까지 살려내어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멋지게 살 수 있다’를 세상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훨씬 통쾌하지 않은가요?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럴 때 드러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일까요? 아니면 그러한 삶을 사는 인간일까요? 100퍼센트 인간만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이나, 성공한 모습이나, 멋진 모습을 세상이 보이는 자가 아니라 그의 삶 속에서 일하셨고 일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일하심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가 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 속에서는 항상 예수가 흥하고 성도 자신은 죽은 흙으로 쇠하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이름을 흥하게 안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깨어있는 자들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살다가 가셨잖아요? 자신의 삶을 다 차압당하고 하나님의 뜻만 드러나는 그런 삶, 그게 바로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예수의 몸으로서의 성도의 삶 속에서 그대로 재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제가 성경에서 한 사람을 발췌해서 예로 들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권고를 하고 있는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어떤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속에서 잠자는 자와 깨어있는 자가 구별이 되어 드러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13:37-14:9)

37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1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3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 하였는가

5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 하였느니라

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십니다. 그때 한 여자가 매우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고, 요한복음 12장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7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누가복음의 이야기만 다른 이야기인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게 같은 이야기이건 아니건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향유 도유 사건에 동일한 두 부류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충분히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죽음에 부어버리는 부류이고 다른 한 부류는 가룟 유다와 바리새인 시몬으로 대표되는 인본주의와 실용주의에 빠진 자들의 무리입니다. 그 둘 중의 하나가 깨어있는 자인 것입니다.

 

먼저 9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온 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 여인의 행한 일이 말하여 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정말 그런가요? 여러분은 복음을 전해 들으실 때 항상 이 여인의 이야기를 부록으로 들으십니까? 그냥 비근한 예로 제가 매주 설교 때마다 복음을 전하면서 이 여인의 이야기를 함께 전하나요? 아니지요? 그럼 이 말이 무슨 말이겠어요? 바로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예수님이 행하신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품고 있는지 한 번 보지요.

5절을 보시면 이 여인이 예수님께 부은 향유가 300 데나리온이 넘는 비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00 데나리온이면 일반 노동자의 1년 치 연봉입니다. 당시 유대 여인들은 향유를 조금씩 모아서 병에 넣어 두고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팔아서 쓰거나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자신의 몸을 치장하는 데에 조금 덜어 쓰곤 했었습니다. 그렇게 여인들에게 있어서 향유란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300 데나리온이나 나가는 향유를 모으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세월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그 소중한 향유를 예수님께 다 부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당신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님의 죽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반 사람들의 상식으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죽을 사람에게 쏟아 붓는 것이 이해가 갑니까?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세상 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전혀 무가치한 것에 쏟아 붓는 것,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값비싼 향유의 희생으로 가치 있는 일이 벌어지는 것. 그게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여인은 향유와 동일시되어 무가치해 보이는 예수의 죽음에 부어지고 조롱의 자리, 비웃음의 자리, 털리는 자리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게 향유를 붓는 여인의 에피소드에 담겨 있는 그림입니다. 죽은 자의 자리로 몰려 내려가는 것입니다. ‘나 여기 있음’의 호기가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여 살게 됨을 그 여인이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신자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삶이 반복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그 말이 구원을 받은 신자의 삶이 바로 이 여인의 모양으로 드러나게 될 것임을 힌트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반대편 사람들은 어때요? 진짜 가치가 뭔지를 모르는 자들은 세상의 힘으로 세상이 정의한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자기들의 인식 속에서 자신들이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12:4-6)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게 폼이 납니까? 아니면 곧 죽을 사람의 머리와 발에 부어서 낭비하는 게 폼이 납니까? 어떤 게 더 가치 있는 행동 같아 보이세요? 멀리 가지 말고 개혁주의 성화 론에 근거하여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에게 돈이 만 불 생겼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그것으로 가난한 홈리스들에게 담요와 빵을 사다가 나누어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칭찬하겠지요? 그게 유다의 주장입니다.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돈을 예수님의 발에 부어서 낭비 하냐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좋은 일에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한은 유다의 정체를 이렇게 폭로해 버립니다. 그는 돈을 좋아하는 자이고,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지 않는 자이며, 도적이랍니다. 그 말은 자기의 유익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고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자기의 만족, 자기의 평판, 자기의 자랑을 위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 유다들의 선행의 실체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되듯이 어찌 되었든 좋은 일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까봐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서두에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다 죽은 상태입니다. 산 자 흉내 내는 죽은 자, 죽은 자임을 폭로 당하고 그 폭로에 수긍하는 죽은 자, 모두 다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다들 자기가 살았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있다고 우깁니다. 그리고 그 살아있음을 ‘선’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악입니다. 그러니까 그 살아있음에 힘을 실어주는 구제나 선행 등이 성도의 필수 조건으로 대두가 되는 것입니다. ‘나 여기 있음’의 힘으로 ‘너 거기 있음’의 존재들이 힘을 얻게 되는 것을 선이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 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그건 신자든 불신자든 인간이면 다 행해야 하는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제가 경계하라는 것은 그런 것을 해 놓고 자신이 영광을 챙겨 갖는 그런 교활한 자기 ‘의’ 쌓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유다란 말입니다. 엄밀히 말해 죽은 자가 죽은 자들에게 행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 생활 기록부에 전혀 기록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신 일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일은 순종의 항목에 기입이 되겠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은 그렇게 남을 돕는 것으로도 자신의 만족과 가치만을 챙겨갖는 그런 유다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자발적 선행을 기다리시지 않으시고, 성도를 예수님의 삶으로 몰아가십니다. 선행의 주체를 인간으로 삼아 인간이 내어 놓는 행위를 근거로 그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선으로 몰아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이라는 게 뭐라고 했습니까?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상태가 선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게 바로 ‘토브, 선’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선으로 몰아가신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 속에서 죽여 가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여인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인 것입니다. 만일 그 여인이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면 그녀의 행위에서 누구의 이름이 드러나게 됩니까? 그 여인의 행함이 칭찬을 받고 그 여인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됩니다. 그 여인이 자기 영광, 자기 이름, 자기 가치, 자기 평판을 챙기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향유를 그렇게 허비해 버리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여인에게 이 세상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하십니다. 값비싼 향유가 그냥 허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인의 이름은 묵사발이 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이 살짝 그 여인에게서 영광을 챙겨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영광을 챙겨 가시는 과정 속에서 그 여인은 세상의 조롱과 멸시를 받습니다. 마치 노아가, 바울이, 그리고 이 세상을 살다가 간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 세상의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죽은 흙의 자리로 열심히 끌려갔던 것처럼 그렇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어떤 공식도 없이, 여러 모양으로 당신 백성들의 삶에 개입을 하셔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을 박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소유한 여러 종류의 향유를 우리를 치장하는 데에 못 쓰게 하십니다. 예수께 붓게 하십니다. , 소유, 심지어 생각까지 나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건 예수님이 욕심이 많으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향유를 ‘나’라는 우상의 치장에 사용하게 되면 진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를 놓치게 되기 때문에 예수에게 나의 향유를 빼앗기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나 여기 있음’의 자리에서 ‘나 십자가에서 죽었음’의 자리로 몰아내시는 것입니다. 육은 무익하고 살리는 것은 오직 성령이라는 진리를 몸소 체휼하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래야 창조의 은혜 아래에서 진짜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향유는 우리가 자의에 의해 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성도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신들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실제 화하여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십자가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신의 향유 병을 채우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 여기 있음’을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성령에 의해 십자가로 인도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겠습니까? 목적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헌신을 하고 희생을 하고 선한 일에 힘을 쓴다고 해도 다 가룟 유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좇기 위해 많은 희생을 한 사람입니다. 가히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가정도, 일도, 일가친척도 다 놓아 버리고 예수님만 좇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목적은 보상이었습니다. 그러한 헌신 후에 자신에게 돌아 올 보상을 바라보고 열심을 부렸던 것입니다. 그게 물질적 보상이던 아니면 명예와 같은 비 물질적 보상이던, 아니면 자기만족의 보상이던 상관없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보상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다 유다입니다. 주님은 그 자를 마귀라 불렀습니다. ‘그자는 마귀니라’

성도는 어떤 행위를 하고 보상을 받는 자가 아니라 자신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 세상 역사 속에서도 계속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고 있는 자임을 아는 자여야 합니다. 그렇게 다 털리고 털리다가 결국에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 주님을 위해 나의 생명을 차압당한다 할지라도 괜찮다는, 하나님 절대의존자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과 나의 영광을 위해 그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는 자로 내 몰리는 것이 성도의 삶이고 그 속에서 예수님 은혜의 필연성이 심장에 새겨지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을 사는 자들이 깨어있는 자인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이 자신들의 죽었음을 확인받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라면 우리는 죽은 자의 삶만 내어 놓다가 가게 되는 것인가? 그럴 수 없느니라.

(6:1-2)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절대 죄 가운데서 살 수 없는 자라고 이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실존적 경험에 의해서도 아니란 게 분명하고 성경에서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일1:8-10)

8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하니라

(3:9~12)

9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건 단지 구원받기 전의 인간의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두에 살펴본 것처럼 인간은 몸을 입고 있는 한 죽는 날까지 죄만 쏟아 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3:21~28)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렇지요? 우리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의 요구사항인 율법을 지켜낼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사망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로마서 6 1절과 2절이 바로 그 율법의 이야기에 이어져 있는 진술인 것입니다.

바로 그 앞 절인 로마서 5 20절과 21절로 가보겠습니다.

(5:20~21)

20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재미있는 말이 나오지요?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랍니다. 우리는 율법이 죄를 못 짓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율법을 죄를 짓게 하기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성경이 말하는 죄는 사건화 된 개별적 행위들을 지칭하는 것 이전에 총체적이며 본질적인 국면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본질은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처럼 되어 자신의 의를 챙겨 갖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자기 자리이탈, 죽은 흙인 자들이 하나님 흉내를 내는 것이 죄입니다. 인간은 선악의 구분을 스스로 하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도 자신들이 판단하고, 자신들이 선이라고 규정한 것들을 많이 쌓아서 자신들의 가치를 챙겨갖는 그런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죄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이 죄를 더 짓게 만든 것이었다는 말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의 의를 의지하는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사악하고 교활한지 자신 안에 감추어진 그 죄의 본질을 교묘하게 위장을 하여 겸손한 척도 잘하고 신을 섬기는 척도 잘하며 신 앞에서 항복을 하는 흉내도 잘 냅니다.

그때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집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부모에게 효도해라, 거짓말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등등 율법이 주어집니다. 인간은 그러한 법이 떨어지면 그 즉시 그 법을 지켜서 자신을 자랑할 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율법이 없으면 자랑할 거리가 없어지지요?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이 없으면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고 안식일을 지켜서 자신의 기특함과 성실함을 자랑할 수가 없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안식일이라는 율법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안식일을 지켜서 자신의 의로 챙겨서 자랑을 하는 인간의 죄를 폭로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다른 율법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성도가 율법을 대하게 되면 ‘난 율법을 지켜낼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자야. 그 은혜에 감사해야지’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문자로 해석해서 지금도 그걸 지키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다면 아직도 자신이 십자가에서 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삶 속에서 그게 지켜지고 있다면 그게 누가 지키는 것이라는 말입니까? 내 안에 계시는 예수가 사는 삶이 밖으로 나오는 것으로 인식이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됩니다. 인간은 예수를 믿고도 자신의 기특한 행위를 어떻게 해서든지 칭찬해 주고 싶어서 못 견딥니다. 그래서 가끔 나오는 선한 행위 뒤에 나의 악함이 수시로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앞에서 큰 죄, 작은 죄가 있나요? 죄의 본질이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삶입니다. 그렇게 죄를 본질적 차원에서 생각할 때 만 불 사기 친 사람과 백 불 사기 친 사람의 죄가 다를 수 있습니까? 둘 다 자기 자신의 ‘나 여기 있음’을 확고히 하기 위한 인간의 추악한 죄에서 기인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죄라는 것을 크고 작은 것으로, 많고 적음으로 분류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죄가 무엇인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증거지요? 다시 로마서 6장으로 가보세요.

(6:1~2)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 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는 5장 말미에서 율법이 가입한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범죄를 더하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여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성도가 율법을 대하게 되면 ‘난 이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덮어서 나를 구원하신거야. 그러니까 난 죽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의지해야지’하는 ‘너 십자가에서 죽었음’의 고백이 나와야 한다는 의미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절입니다. 그런데 대뜸 ‘그럼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죄를 더 많이 지어야 겠네’라고 비아냥댄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이 여전히 죄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라는 말이지요? 여전히 자기가 무슨 행위를 함으로 죄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본질의 문제로 바라봐야지 사건 화된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해요? ‘내가 5장 말미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죄가 왕 노릇 하던 때와 같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마당이 된 것이라고 하지 않았니? 그 사람이 바로, 은혜가 아니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구나,를 아는 사람인데 어떻게 은혜가 왕 노릇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럼 이제 은혜를 더 많이 받기 위해 죄를 더 많이 지어도 되겠네, 라는 말이 나오겠니? 그 사람은 아직 은혜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야’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성도는 죄를 안 짓는 자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 은혜가 아니면 죽은 자에 불과해’라는 ‘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자기의 죽었음을 아는 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큰 죄를 지어서 큰 은혜를 받겠다는 둥, 작은 죄를 지어서 칭찬을 받겠다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왕 노릇을 하며 우리를 죄 속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포효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불가능함과 추악함과 죽었음에 탄식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더 꼭 붙드는 자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이 그렇게 우리 마음속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실패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그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한발 한 발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인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질문도 하십니다. 성도는 선한 일에 열심을 부려서는 안 되나요? 아니요. 열심을 부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불성실하고 더러운 삶에 욕지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한 마음이 열심으로 격발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열심을 부려서 선한 행위에 성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을 부려 은혜를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실패하던 성공을 하던 우리는 그 열심 속에서 은혜를 챙겨 가지게 됩니다. 실패하시거든, ‘난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하다’로 가시고, 성공을 하시거든 ‘진짜 내 안에 성령이 살아 계셔서 당신의 삶을 살고 계시는구나’하고 감사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선악과 따 먹은 ‘나’는 자꾸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만이 나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도의 자랑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설교자들은 때로는 열심을 부리라는 설교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그냥 살라는 설교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설교든 성도에게는 유익이 될 것이고 가라지들에게는 눈과 귀가 막히는 설교가 될 테니까요. 그러나 늘 십자가로 결론을 내야 함은 물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심을 부리게 하시면 ‘아 내 안의 은혜가 나에게 열심을 부려 은혜 붙들라고 하시는구나’하시고 열심을 부리세요. 한없이 게을러 지셨습니까? 그 속에서 ‘난 원래 이런 존재인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처소 삼아 들어와 계시다니 황공무지하다’하시면 됩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며 이끄시는 그대로 사세요.


(고전7:20~24)

20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보세요. 그냥 살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있으라고 한 그 자리에 그냥 있으라고 하잖아요?

여러분,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거나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술 마신 몸둥어리나 술 안 마신 몸둥어리나 다 죄의 몸둥어리일 뿐입니다. 술 들어간 육신은 더러운 육신, 술 안 들어간 육신은 깨끗한 육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위, 밖에서 들어간 것이 우리를 더럽게 못합니다. 밖에서 들어간 것이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도 없고요. 오직 예수의 피만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 앞에서 입장권 요구 하실 때 예수의 피 공로만이 입장권으로 유효한 것입니다. 성도는 그걸 배우는 것입니다. 극장 앞에서 직원이 입장권 달라고 하는데 ‘저 입장권은 없는데요, 어제 제가 착한 일 무지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들여보내 주세요’ 그러면 들여보내 주나요? 정확한 입장권이 있어야 해요. 예수의 피. 십자가. 그거 붙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