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29)
떡 하나 주면 정말 안 잡아먹을까?(II)
(막13:28~37)
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3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1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 이니라
34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혼인잔치에서 돌아오시는 주인을 맞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하는 성도의 삶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깨어있음이란 우리의 행위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며 종교 행위에 열심을 내는 그런 유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신랑만이 우리의 구원의 주체이심을 확실하게 깨닫고 모든 관심을 우리의 신랑에게 돌리며 그에게만 영광과 가치를 돌리는 삶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자신들의 일상의 풍요에 도움이 될 기름을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는 데에 쏟아 부었던 것이라 했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일상은 인간의 가능성 과시의 장이기 때문에 그 인간의 가능성을 차압당한 이들에게는 일상보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더 관심이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병행 구절이라 할 수 있는 누가복음 12장으로 가면 주님은 제자들의 일상을 다 차압해 버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눅12:36)
36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종들은 다른 할 일들이 많습니다. 집안일도 해야 하고 밭에 나가서 밭일도 해야 하고 가족이 있으면 가족도 챙겨야 하고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문 앞에 서서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자리에 대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일 하다가 주인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다른 일상에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오직 주님이 오시기만을 오매불방 바라며 자신들의 일상이 자신들을 존재케 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모든 기대와 희망을 내려놓고 주인만이 나의 생존의 근거가 되시고 주인만이 나의 행복의 근원이심을 공고히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의 섬김, 즉 십자가 은혜를 받은 자들이고 현실 속에서도 주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참 성도라는 것입니다.
(눅12:37)
37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보세요. 주인이 왔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얼른 문을 열어 준 그런 종을 주인이 띠를 띠고 종들을 앉힌 후 수종을 든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어디서 본 그림이지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을 앉힌 후에 그들의 발을 씻기시잖아요? 그러자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어찌 주님께서 저의 발을 씻기시게 놔 둘 수 있냐고 만류를 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요13:8~10)
8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 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는 이미 목욕을 한 자들이므로 온 몸이 깨끗하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그 온 몸에는 발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발을 씻기시는 것일까요? 주님은 지금 그들의 온 몸이 어떻게 해서 깨끗하게 되어진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온 몸이 깨끗하게 되어 거룩하게 구별이 된 것은 그들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발 씻기심, 즉 십자가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지만 이제 십자가를 지게 되면 주님에 의해 택해진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한 예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발 씻기심은 주님과 제자들의 관계성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발을 씻기시는 주님과의 관계성에 의해 깨끗한 자가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열심, 공로, 자격, 업적 등은 그들의 깨끗함에 조금도 기여를 할 수가 없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길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겨주라’고 하시지요? 그게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처럼 서로를 위해 죽어주라는 말인가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 대목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어구가 나옵니다.
(요13:14~15)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5절을 보시면 ‘본을 보였다’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그게 중요한 어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본을 보이시고 그대로 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본이 무어라 했습니까? 성도의 거룩, 성도의 깨끗함은 쌍방 간의 협력사역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방적 희생인 씻기심에 의해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 예수님의 발 씻기심입니다. 씻기는 이가 오히려 씻김을 받는 이보다 낮아져서 일방적으로 씻김을 받는 자에게 은혜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발을 씻기지 않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일방적 공로에 의해 깨끗함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로 깨끗함을 입을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가 바로 상대의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의 무용함과 불가능함이 진정으로 고백이 되는 사람 안에서는 누구만 드러나게 될까요? 예수님의 가치와 영광만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걸 자기부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무어라 하겠습니까? 바보, 천치, 허약한 자, 줏대도 없는 자 등등의 비난을 쏟아 붓겠지요. ‘난 이런 사람인데 예수님이 이런 나도 구원하셨대요’를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발을 씻는 자 아닙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세상은 그런 사람들 보고 업신여김과 모멸과 천대를 부어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상대의 발을 씻기는 자를 보고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요13:20)
20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 이니라
이건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발을 씻기는 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을 영접하는 변태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늘의 눈과 귀를 선물 받은 세상 속 변종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오직 주님의 은혜만이 나의 생존과 존재의 근거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이들이 서로를 대할 때 어떻게 대하겠어요? 서로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요, 죄인이요, 못난 자라는 진심어린 고백을 하는 이들이 무엇에 소망을 두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자기의 발을 닦으심으로 자신을 신부로 깨끗하게 씻어주신 신랑만 바라보며 그 신랑만 기다리게 되겠지요? 우리가 바로 그 자리로 조금씩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깨어있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들인 것입니다.
제가 그 깨어있음의 삶을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성경 안의 예를 찾아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지 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과 잘 비교해 가면서 들어보세요.
(행1:6~11)
6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이 그림을 잘 보세요. 종들이 ‘주인님 언제 오십니까?’하고 묻자 주인이 ‘내가 언제 올 지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이 종들에게 무언가를 명령하시고 멀리로 떠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오실 것이랍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는 ‘깨어 있어라, 내가 돌아오거든 곧 문을 열어줄 채비를 하고 있어라’로 비유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그 일들이 밝혀집니다.
뭡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과 비교해 볼 때 ‘깨어 있어라, 내가 돌아오면 곧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그 자리에 있어라’라는 말과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같은 맥락의 명령임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그걸 요한복음의 표현으로 바꾸면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인대로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겨라’입니다. 그게 증인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발을 씻기는 삶을 살다보면 그 삶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가 생기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읽은 사도행전 1장에 의하면 그건 제자들이 자기들 힘으로 이룰 수 있는 명령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시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제자들의 명령 수행은 누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입니까? 성령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어있음의 삶은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들이 어린양의 신부임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래서 그렇게 깨어있는 자들이 발견 될 때 예수님의 발 씻기심의 은혜가 그 자리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주인이 깨어 있는 종들을 섬긴다는 구절이 이 비유 속에 들어가 있는지 아시겠지요? 주인에 의해 발 씻김을 받은 자들이 깨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렇게 깨어 있는 삶, 우리 자신의 자격과 열심과 업적과 공로를 다 비워 버리고 우리의 발을 씻기신 예수만이 드러나게 되는 삶이 통로가 되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걸 사도 바울이 어떻게 표현을 하는 지 보세요.
(고후11:2)
2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성경 참 빈틈이 없지요? 바울은 그렇게 서로의 발을 씻기는 삶, 자기 부인의 삶이 다른 이들을 주님의 신부로 중매하는 삶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자기 자신의 모든 육적 행위와 공로를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 자들이 바로 주님의 신부이고 그들이 신랑의 도래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깨어 있는 자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신부들에 의해 다른 신부들이 중매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라는 것은 우리의 가치나 인기나 명성 등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유혹해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함께 하고 싶지 않은 무력함과 불가능함의 장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불가항력적으로 끌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는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내가 쌓아 놓은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명성과 인기와 소유를 조금씩 털리면서 결국에는 몽땅 다 털리고 ‘예수님이 모든 것이고 나는 없음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자리로 끌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발을 씻기는 삶이되고 다른 이들을 예수께로 중매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평생에 걸쳐 진행이 되는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성도는 자기 자신을 계발하고 성숙시키고 발전시키고 업그레이드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자가 아니라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주여 저를 떠나소서’라는 통한의 고백을 하는 자로 낮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 사람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삶이 우리의 열심과 노력과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 내 안에 홀로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밖으로 언뜻언뜻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는 자, 사람들을 주님께 중매하는 자,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자들의 발을 주님이 씻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발을 씻기신 자들, 그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성 속에서 계속해서 은혜를 받고 있는 자들에게서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이 격발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예수님의 용서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의를 찾아야 하는 자들이지 ‘나’라는 존재를 중심에 두고 용서를 사유화 한 형태로 자신을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나의 역사’가 둘러쳐지고 그 ‘나의 역사를 품은 큰 원인 예수님의 역사가 성도를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역사는 모두 예수의 역사로 편입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은혜의 장입니다. 그게 이 땅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 나라의 구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언약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녹아 들어가 버리는 나라,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내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보상도 받겠다는 그런 기특한 생각들을 하는데, 인간은 원래 그런 목적으로 창조가 된 것이 아닙니다.
(엡1:11~14)
11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14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백성들을 창세전에 예정하셔서 구원을 하셨다고 하시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찬송하게 하시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착하고 선한 일을 열심히 살아내어 당신을 기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존재의 기반이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다’라는 철저한 자기절망과 자기부인 아래에서의 찬송을 듣고 싶으셔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43:7)
7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우리가 왜 창조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 영광을 받으세요? 우리의 찬송 속에서 영광을 받으세요. 쉬운 말로 하나님은 우리가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 앉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오롯이 드러내는 자리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때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속성인 낮아짐의 승리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광입니다. 그 찬미가 어떤 찬미인지 조금 더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엡1:3-6)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거룩하지 않고 흠이 있는 존재라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어 하나님이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요, 구원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방법이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렇지요? 혹자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구원을 받은 이후에 성도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리로 열심히 노력하여 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사랑 안에서’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은혜라고 하고 그 은혜는 거저주시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공로나 업적이나 열심의 보탬이 없이 은혜로 거저 주어지게 되는 것이기에 거기에서 감사의 찬송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낮아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속성이자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낮아짐에서의 승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 독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목적으로 하여 당신의 아들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훌륭한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찬송을 받겠다는 아주 악한 생각인 것입니다.
그게 성경을 그냥 문자로만 보는 사람들의 오류인 것입니다. 제가 수요 예배 때에도 잠깐 언급을 해 드렸습니다만 성경은 문자로 쓰여 있지만 문자 층에서만 이해를 해서는 안 되는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계시입니다. 계시는 인간의 언어의 한계 내에서 인간들에게 기록이 되어 전해지지만 그 문자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묵시로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는 문자가 아닌 그 속에 담긴 진의로 해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성경이 모두 ‘나’에 대하여, 즉 주님에 대하여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 반복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이 되지 않으면 그 어떤 해석도 오류이며 곡해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진의는 성령이 임한 자에게만 보여 집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들은 성경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는데 성령에 의해 진짜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닌, 종교로서 기독교를 믿는 자들은 성경을 그냥 문자로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법으로 보게 됩니다.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피조물들의 티끌 됨에 대해서만 기록을 하고 있는데 성경을 문자로만 보게 되면 ‘이거 하면 복 준다, 저거 하면 벌 받는다’등의 법적 교훈이 담긴 도덕책으로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눈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오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시면서 왜 ‘가서 그들의 눈과 귀를 막아라’라고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듣지 못하고 ‘안 지키면 죽인다’라는 표독스러운 폭군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내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지옥에 처넣겠다는 하나님 의지의 표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 역사를 아우르시며 그렇게 당신의 택한 백성들과 유기된 백성들을 구별해 내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문자적인 법으로 생각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던가요?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버리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 되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지옥으로 던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먹으면 죽이겠다’에 초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비록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킬 수 없다 할지라도 나의 용서와 은혜가 너희에게 임하여 너희가 살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거저 주어지는 생명나무란다’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메시지였단 말입니다. 거기에서 감사의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이고 그 찬송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약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율법이라고도 하지요? 그 속에는 수많은 하라, 하지 마라의 명령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가 항상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약의 율법과 제사가 인간에게 지키라고 주어졌던 것입니까? 율법과 제사는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생명나무실과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 했지요? 율법, 즉 선악과는 인간이 따먹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따먹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실과, 즉 어린양의 대신 제사를 이미 준비해 놓으셨고 그 어린양의 희생에 의해 죽어야 할 자들이 은혜로 살아나게 되는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날 것임이 그 속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율법을,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았지요?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애들아, 그거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걸 통해 나에게로 와서 항복하라고 준거야’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성경을 문자로만 본 자들이 그 성경을 주신 하나님을 때려 죽여 버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성경 역시 문자로, 법으로 보게 되면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짐이 됩니다. 도저히 안 되는 것들을 하나님은 반복하여 지키라고 강조하시잖아요?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께로 나아가는 것이지 우리의 열심과 노력을 발휘하여 하나님도 감동하실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성경에 의해 오히려 눈과 귀가 막히게 된 불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고 했을 때 ‘그래 지켜야지’하고 나선 사람들이 눈과 귀가 막힌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세요.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보충 설명이 필요한데 제가 다음 주에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차치하고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 왜 성경을 법으로만 보게 되냐면, 인간의 언어라는 것 자체가 바로 법을, 옳고 그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가끔 남자 화장실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소변기 앞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는 것은 ‘너 절대 바닥에 흘리면 안 돼’라는 법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흘리면 악이요, 안 흘리면 선이다’라는 판단이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판단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인간들이 역사를 통하여 합의해 놓은 것에 의해 어떤 행위가 선으로 판단이 되기도 하고 어떤 행위가 악으로 규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의 사회적 합의의 배경에는 인간들의 사회적 행동과 관습과 패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관습과 패턴과 행위에 의해 인간들은 서로 합의를 도출해 내고 그것으로 언어와 문자를 출산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들의 행위와 관습과 패턴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인간들의 마음 안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나’라는 존재의 ‘하나님처럼’의 삶을 성취하기 위해 욕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 중에 가장 더러운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행위를 하고, 그렇게 각자에게서 나온 행위에서 합의를 이끌어 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나’라는 존재의 유익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에 금방 합의가 됩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것을 법제화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법이라는 것은 행위를 올바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라 해야 옳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처럼’이라는 자신들의 가치와 위상을 챙기기 위해 훌륭한 행위를 하고 자기들이 선이라고 합의해 놓은 것을 법으로 확인도장을 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건 옳은 거고 이건 틀린 거야’ 멋지잖아요. 그렇게 법이 만들어지면 그 법에 의해
문자와 언어가 배태되고 출산이 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문자로만 읽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인간 행위의 정당성만을 찾아 챙기려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은 시간적 한계성과 공간적 한계성 안에 갇혀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여섯 살 생일에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모르지요? 시간적 한계성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네팔에 사는 9살짜리 ‘더만’이라는 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모르지요? 공간적 한계성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한계성에 갇혀 있는 인간의 인식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입니다. 그렇게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절대 이해가 불가한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그 속에서 예수만, 십자가만 꺼내어 전해주면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왜 ‘나’는 그 속에 없냐는 것이지요. 여러분, 원래 하나님의 구속사의 과정 가운데 인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마6:12~13)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 중 한 부분입니다. 이게 지금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해야 할 기도거든요.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성도는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는 왜 해야 하는 것이지요? 혹자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의 원죄만을 사하신 것이므로 자범 죄는 계속해서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옵시고’의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해졌습니다.
제가 전에 주기도문을 강해할 때 주기도문 안에 쓰인 동사가 전부 과거 시제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헬라어에는 부정과거 시제(aorist)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부정과거 시제는 과거의 일회적인 특별한(specific)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정과거가 명령형(imperative)으로 쓰이면 과거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와 종말론적 의미(eschatological meaning)를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따라서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에, 그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임하고 있고, 반드시 임할 것이란 뜻이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할 때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죄는 이미 사해졌으며, 사해지고 있고, 완전히 사해질 것이라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가 모두 뭉쳐서 그 기도 안에 들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는 이미 용서받은 존재이지만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도 용서하심과 용서받음이라는 용서의 구조(틀) 속에 들어가 있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미 씻김을 받은 자들이 계속해서 발 씻김의 구조 속에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의 전제가 뭐라고 붙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로 붙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준 것을 모범으로 하여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요구처럼 보이지요? 아닙니다. 그건 이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를 처음 받았던 유대인들의 상황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리로 죄를 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라는 행위에는 반드시 보응이 따릅니다. 살인한자, 간음한자, 부모에게 불효한자, 전부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안 죽이면 율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율법의 시대가 끝이 나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율법이 완성이 되고 이제 율법의 정죄가 무효가 되어 버리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한 자, 간음한 자, 안식일을 어긴 자, 부모에게 불효한 자, 등등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자들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살아날 수 있는 용서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행위의 양만큼 벌을 받고 상을 받는 그런 율법의 시대가 종식이 된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용서되었고, 그것처럼 우리가 용서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의 진의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는 용서의 청원이라기보다는 용서의 시대가 열렸다는 선포이며 그러한 용서의 시대 속에서 은혜로 구원을 받고 있는 성도의 현실에 대한 자각인 것입니다. 그걸 잊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나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덮임을 당해 이미 그 선악의 의미를 상실한 행위임을 잊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는 무슨 의미의 기도이겠습니까?
그러한 용서의 구조 속에서, 값없이 거저 얻는 구원의 의미를 왜곡하고 희석시키는 시험이 반드시 우리의 삶에 떨어진다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그러한 시험에 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수없이 그 시험에서 낙방을 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칭찬하는 당신 백성들의 찬송을 받아 내시고야 마실 것이니까요. 그래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가 부정과거시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은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죄에서 용서를 받았음에도 너무나 자주 주의 용서하심을 잊고 우리의 행위로 용서의 자리에 앉으려 하는 그런 행위를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게 바로 시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용서를 받고, 그때마다 시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기도가 부정과거이면서 청원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입니다. 완료 되었으나 삶 속에서 그 완료가 매순간 경험되는 그런 형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용서의 구조를 잊고 수시로 자기의 행위로, 율법지킴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 하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악에서 건져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수시로 시험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장에서 빠져나와 우리의 힘과 지혜와 열심과 노력, 그리고 이 세상의 재화의 획득과 축적 등으로 용서와 구원과 행복의 장에 입성할 수 있을 것처럼 삽니다. 성경은 그러한 시험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죽이려고 주시는 시험이 아니라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으로 들어오라는 은혜의 시험인 것입니다.
(전3:18)
18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이거 보세요. 우리는 인생이라는 시험장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있습니까? 짐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의 시험에서 죄만 쏟아내는 자로 폭로가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시험은 하나님이 완료시켜 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통과할 수가 없는 그런 시험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그 시험을 통과하셔서 우리에게 거저 전가 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 용서의 현실을 배워가고 깨우쳐 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거기에서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짐승이요,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그런데 ‘나도 이만하면 잘 하고 있지요?’라는 거만에서 무슨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이렇게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구조 속에서 거저 구원받았다는 것을 잊고 기고만장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인 되고, 네피림 되고, 용사되고, 유명한 자 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로 요약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수시로 용서받아야 할 일을 저지르며 괴로워하고, 수시로 시험에 빠져 하나님의 용서와 그 분의 은혜를 무색케 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나는 짐승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모든 것을 털리고 빈손으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십자가만 꼭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짐승의 자리로 내려가면서 우리 안에서는 죄만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와 함께 내주하시면서 그러한 낮아짐의 길에서 용서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하시고 시험의 의미를 간파하게 하시며 기고만장한 자리에서 자꾸 밀어내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밀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면 될수록 그 사람의 입에서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이 진심으로 터져 나오게 되는 이 역설을 여러분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으로서의 우리의 본질이 다르게 바뀌어 지는 것이라면 로마서 1장에 나오는 그 목록들이 절대 다시 나오면 안 됩니다. 본질이 바뀌었으니까요. 한 번 볼까요?
(롬1:28~32)
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이러한 것들이 여전히 우리 안에서 나오지요? 그렇다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 육의 본질이 바뀐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한 가망 없는 육의 본질을 여전히 갖고 있는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셔서 문득문득 그분이 우리 밖으로 터져 나올 때 우리의 삶 속에는 살아있음의 모습이 보여 지는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중에 그 육이 다 벗겨지고 그 안에 사시는 성령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자로 우리가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죽은 자의 삶과 산자의 삶을 수시로 경험하면서 죽음이 무엇인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배우고 그 죽음이 어떻게 삶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은혜 속에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세상 속으로 던져 넣으시고 그 탕자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셨지요? 그때 그 탕자에게 누가 간절하게 떠오릅니까? 아버지요. 아버지 집 안에서 아버지의 은혜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아버지가 그 자격 없는 자를 무상으로 용서해 주시지요? 그때 그 탕자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버지 찬양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원하시는 것예요. 그런데 맏아들은 어땠어요? 아버지의 법을 완벽하게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지킴이 전부 자기의 힘이 되어 버렸어요. 심지어 자기의 그 잘남으로 아버지까지 탄핵해 버리지요? 어떻게 이렇게 일을 처리 하냐고.
보세요. 인간은 법을 지키게 되면 그 즉시 그것을 자기 힘으로 축적을 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자신의 동생과 자신의 차이성을 확보합니다. 만일 그 차이성을 인정해 주지 않을 때 그게 아버지라도 즉시 탄핵을 해 버리지요? 왜 일을 이따위로 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맏아들 같은 자들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아버지 말 잘 들어서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겨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성을 드러내고 아버지마저 가르치려 드는 그런 자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탕자처럼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깨닫고 그 앞에서 티끌로 항복하는 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탕자처럼 먹고 마시고 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롬6:1-2)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사도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살란 말인가?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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