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26)
구원은 집행유예가 아니라 사면입니다
(눅13:6~9)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법률 용어 중에 집행유예라는 것이 있습니다. 판사가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서 일정한 기간 동안 형의 집행을 보류하며, 그 기간을 아무런 사고 없이 성실하게 무사히 넘기면 선고의 효력이 없어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피고가 그 기간 동안에 또 다른 죄를 짓거나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했을 때에는 그 즉시 유예되었던 형이 집행 됩니다.
많은 분들이 성도의 신분을 집행유예 상태의 피고로 생각하고 계신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일단 형의 집행은 유예시켜 주셨지만 그 집행유예의 기간 동안에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 집행유예는 무효가 되고 형이 집행이 될 수 있다는 식의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아주 편만하게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비유도 마치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곧 찍어버려야 할 무화과나무에 대한 형의 집행을 일 년 간 뒤로 미루어주신 사건 정도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만일 그 집행유예의 기간 동안에 열심히 노력해서 열매를 맺지 않으면 도끼에 의해 찍히는 참혹한 형의 집행이 이루어진다는 식의 협박용 비유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는 때로 그런 짐을 지워 주신 하나님을 원망도 하면서 꾸역꾸역 열심 있는 종교행위와 억지스러운 선한 일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하기 전에 KBS 대학 가요제에 장난삼아 출전을 했다가 예상치 못하게 대상을 수상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상을 받고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교수님들과 선배님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당시는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대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학우들이 정권타도를 외치며, 심지어 분신까지 하고 있는 때에 어떤 놈이 국영방송국이 주최하는 대학가요제에 나가 대상을 받은 것입니다. 교수님들과 선배님들의 강력한 만류와 저지로 저는 방송활동을 거의 못했기 때문에 역대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자 중 가장 안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기독교 방송국 프로듀서로 일을 하던 선배의 부탁을 받고 그 선배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코너 이름이 ‘김성수의 코 팝스’라는 코너였습니다. 당시 유명한 영어 강사였던 박현영씨와 공동으로 진행을 하던 코너였는데 열혈 청취자가 꽤 많았던 그런 코너였습니다.
청취자들의 사연도 소개를 해 주고 제가 매주 기타를 치며 청취자들의 신청곡을 즉석에서 영어로 바꾸어 라이브로 불러주던 그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직 대학을 졸업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삼아 열심히 방송을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 전 세상을 떠나신 유명 디자이너께서 저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소식을 방송국 피디들에게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케이블 티브이의 제작 여건이 별로 좋지 못하던 때라서 라디오 방송을 생으로 찍어서 케이블 티브이로 내보내곤 했었는데 저희 프로그램에도 매번 케이블 방송국의 카메라가 들어 왔었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내내 제가 방송하는 장면이 티브이로 중계가 되었습니다. 그걸 그분이 보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연락을 하고 만나보니, 제가 김현식 씨의 ‘사랑 했어요’라는 노래를 영어로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정말 소리 내어 펑펑 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패션쇼 피날레에 와서 라이브로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흔쾌히 수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노래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노래가 시인 양중해씨가 가사를 쓴 ‘떠나가는 배’라는 노래였습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그 노래를 자신의 마음에 와 닿게 애절하게 불러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바로 제가 그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구상한 반주 편곡을 적어 놓은 노트까지 제게 보여주시면서 당장 녹음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던 한국 최고의 트럼펫 주자가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고 그분이 아시는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대거 호출이 되어 드디어 그 곡을 녹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그 곡에 대해 얼마나 애착을 갖고 계셨는가 하면 그 곡의 맨 앞에 들어가는 파도소리를 직접 동해에 가서 녹음을 해 오셨을 정도였습니다. 트럼펫 전주가 울려 퍼지고 제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그분이 녹음실 밖에서 계속 울고 계셨습니다.
노래 녹음이 다 끝나고 그게 CD로 출반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분과 여러 차례 만나서 패션쇼에 관한 상의도 하고 일상의 이야기도 두런두런 나누는 그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그분이 그 노래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사람을 너무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늘 배신을 당했고 자신은 항상 피해자로 남겨지는 일을 너무 자주 겪어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떠나가는 배’라는 곡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무언가 부족하고 모자라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노력해서, 떠나가는 배의 가사처럼,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세상이 나의 부재를 너무나 안타까워하며 슬퍼할 만큼 더 착하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게 그분의 인생 목표였습니다. 괜찮은 인생 목표지요?
그렇게 인생의 목표를 정한 후부터 사람들에게 무례한 언행을 절대로 삼가 했고, 아무리 경제적으로 힘이 들어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돕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며,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인물이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노래를 수시로 들으며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떠 올리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착하게 살다보면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을 수 있고, 극락왕생도 할 수 있고, 적어도 이생보다는 더 나은 생으로 환생을 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앙이 그분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더 착하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짐하셨다고 합니다.
CD가 출반이 되던 날, 저는 그분께 CD를 전달해 드리러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그냥 전달해 드리기는 싫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교회에서 전도폭발 훈련이라는 것을 받고 청년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폭발 훈련 교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주 교회 앞에 있는 고속버스 터미널에 나가 ‘만일 당신이 오늘밤 이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것을 확신 하십니까?’라는 복음제시 질문 1번을 시작으로 매주 적어도 수십 명에게 복음제시를 하고 결신기도까지 시키던 열심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CD 속지에 장문의 편지를 써서 그 편지와 함께 CD를 전달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선생님,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사람을 기다리는 두 세계가 있는데 그곳이 천국과 지옥입니다. 선생님은 제게,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세상이 선생님을 존경해 주고 사랑해 줄 것이고, 오래오래 기억해 줄 것이며, 그 공로로 선생님은 극락에 가실 수 있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배우기를 사람이 아무리 착하고 훌륭하게 살아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에덴동산 위의 아담 안에서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는 절대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바라옵기는 선생님처럼 선하신 분이 저와 같이 예수를 믿고 꼭 천국에 함께 갔으면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편지를 CD와 함께 전해 드렸습니다.
며칠 있다가 그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미스터 김, 미스터 김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어요. 미스터 김의 말대로라면 우리 인간들은 지금 집행유예 상태인 거네요. 선악과를 따먹고 죽어야 하는 이들이 아직 형이 집행이 되지 않아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무서운 하나님이라도 그 집행유예 기간 동안에 인간들이 착하고 선하게 잘 살아내면 당연히 용서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게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저는 그분께 즉시 대답을 해 드렸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인간은 지금 집행유예의 기간을 살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재판관이 원하는 수준의 착하고 선한 삶을 잘 살아내면 당연히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늘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에게 사형 선고를 받은 인간들은 아무리 착하고 선한 삶을 살아낸다 해도 그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착한 삶은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거룩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모두가 사형 집행 장에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값없이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을 믿어야만 집행유예의 상태에서 완전사면의 상태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회답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이 시간의 세상을 벗어나서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영원의 세계에는 천국과 지옥만이 존재합니다. 그분이 어디로 들어가셨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면령을 감격 속에서 듣지 못한 이들은 아무리 열심히 집행유예 기간을 잘 살아냈다고 하더라고 반드시 사망이라는 형 집행 장소로 향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사망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고 사는, 집행유예 기간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집행유예는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 형을 모면할 수 없는 운명적이며 제한적인 집행유예입니다. 그 끝에는 반드시 사망이라는 형이 집행됩니다. 그러나 그 집행유예의 기간 동안에 하늘로부터 사면령을 받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톰 행크스가 주연한 ‘그린마일(green mile)’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그린마일이라는 것은 사형수들이 갇혀있는 감옥에서부터 사형집행 장소까지의 초록색 바닥을 ‘그린마일’이라고 합니다. 사형수가 일단 그 초록색 바닥에 발을 딛게 되면 한걸음 한걸음이 다 죽음의 발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전부 그 그린마일 위를 한발 한 발 걷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매일 매일 죽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그린마일에서 마지막 발걸음을 떼는 순간 모든 인간은 다 영원한 사망이라는 형 집행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모든 인간들이 처한 상태는 집행유예가 아니라 형 집행 장소로 한발 한 발 가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수들에게 붙들려 형 집행 장소로 향하고 있는 도중에 사면령을 가진 특사가 찾아와 ‘너, 너, 너, 사면’하고 그 자리에서 수갑과 포승을 풀어주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참혹한 비극에 관한 이야기 뒤에 붙여지는 비유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러 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빌라도가, 제사를 드리고 있던 그들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일로 제단 위의 제물에,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의 피가 섞여 버린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배를 드리던 사람이 갑자기 천정에서 떨어진 조명에 맞아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실 것 같으세요?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에게 저런 벌을 받지?’하지 않으시겠어요? 사람들이 바로 그 질문을 갖고 예수님에게 온 것입니다.
(눅13:1)
1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여기에서 ‘그 때’란 누가복음 12장의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는 예수님의 일갈이 떨어지던 바로 그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오신 이유가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그 불이 떨어지면 구약의 진술대로 어떤 이에게는 심판의 불이 될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의 불이 될 터인데 왜 사람들은 그 하늘의 심판과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천지의 기상으로 읽혀지는 일상에만 관심을 두고 있느냐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마치 펌프의 마중물처럼 이 세상 불 심판의 마중불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누가복음 12장 마지막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눅12:58~59)
58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지금은 천지의 기상에나 관심을 가지며 일상에 착념하여 살 때가 아니라 너를 고소하러 오는 그 고소 자와 화해하는 데에 힘을 써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를 고소하는 이는 호리(로마의 가장 작은 동전)의 선처도 없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고소 자가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고소자의 마음에 들지 못 하면 너희들은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유일하게 살 길은 고소 자와 화해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고소 자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학살 사건과 실로암 망대 사건인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갈릴리 나사렛 사람들을 아주 경멸을 했습니다. 사마리아는 주전 721년에 앗수르의 사르곤2세에 의해, 살던 곳을 완전히 점령당해 2만 7천명의 북 이스라엘 핵심 인사들이 메소포타미아 북쪽으로 끌려가고 앗수르와 바벨론과 하맛 사람들이 북 이스라엘 지역으로 이주해와 혈통이 뒤섞여 버린 그런 곳이어서 경멸을 했었고, 갈릴리 나사렛은 이방과의 접경 지역으로서 가난하고 무례한 자들이 살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경멸하고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을 때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을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누가복음 13장 서두에서 그 갈릴리 사람들과 그들을 경멸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을 공히 등장을 시킵니다. 그리고는 그 두 지역 사람들의 예기치 못한 죽음을 이야기의 주제로 뽑아 올립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다가 이방인의 칼에 맞아 죽었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히스기야가 전쟁을 하기 위해 기혼 샘에서 끌어다가 만든 실로암 못 가에서 수로 공사를 하다가 실로암 못을 지키던 망대에 깔려 죽었습니다. 둘 다 이방인의 괴수의 모형인 빌라도가 관여한 사건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죽음의 본질이 죄의 경중이나 다소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죄라는 것은 많고 적음의 구분이나 크고 작음의 구분, 그리고 무겁고 가볍고의 구분에 의해 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이고(시51) 그 죄는 다소와 경중의 구분을 막론하고 모두 사형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살면서 호리의 죄라도 지은 사람은 전부 사형입니다. 그 말은 모든 인간은 자동적으로 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사망에 처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되지 않는 티끌들의 운명입니다. 그럼에도 자기들은 마치 그 지옥의 형벌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닥친 불행이나 비극을 죄와 결부시켜 갑론을박하는 것 자체가 무식한 짓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대노하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눅13:5)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은 12장 말미에서, 호리의 죄라도 있는 자들은 절대 감옥에서 못 나온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고소 자와 화해하라고 하셨지요? 그리고는 곧이어 ‘회개하라’로 말씀을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제 불을 던지러, 심판을 하러, 고소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쌓아서 그 앞에 내어 놓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는 회개하는 자로 주님 앞에 서야, 주님과 화목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러티브가 그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야기 하는지 볼까요?
(롬2:4)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 하느뇨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천지의 기상을 분변하여 일상을 예견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에 의해 이미 불이 던져졌으며 이 세상은 지금 심판의 불바다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을 하고, 이 불붙은 심판의 세상에서 살아날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길밖에 없음을 확실히 붙들어 그분의 의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를 더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비유 하나를 더 보태시는데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열매 맺지 못 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인 것입니다. 비유는 이상한 모양으로 시작이 됩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어떤 주인이 등장합니다. 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을까요? 포도원의 포도를 유난히 중요시하는 유대인의 포도원에 포도가 아닌 다른 것이 심겼다는 것은 그 포도원의 포도나무가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못해서 주인이 포도를 걷어버리고 다른 열매의 소출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는 포도를 대신한 대체작물인 것입니다. 대체작물이란 이미 앞선 실패를 전제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실패와 무능력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주님이 굳이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를 비유의 소재로 쓰시는 것일까?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을 줄곧 포도와 무화과로 비유를 하십니다.
(호9:10)
10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 졌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뜨거운 광야에서 만나는 싱그러운 포도처럼 여겨주셨고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열매를 보는 것처럼 사랑스럽게 보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포도와 무화과나무 열매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에게 몸을 드려 우상과 같이 가증해졌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나’라는 우상을 섬기게 된 타락한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의 끝없는 자기애의 욕망이 얼마나 집요하고 더러운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사야서 5장 1절 이하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기름진 포도원에다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망대까지 세워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극상품 포도나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들 포도를 맺어 버린 것입니다. 이사야서 5장 4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탄식을 하시는데 ‘내가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하고 장탄식을 하십니다. 마치 최적의 환경인 에덴에서 ‘하나님처럼’되어 보겠다는 육의 욕망을 따라 불순종이라는 들 포도를 맺어버린 아담의 모습 같지 않으세요?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모습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서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버린 티끌들의 실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낱낱이 폭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시80:8)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 칭하십니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들이 가나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나요? 우리가 수요일마다 사사기를 공부하는데 정말 가관이지요? 하나님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가나안에 심으셨는데 그 포도나무가 계속 들 포도만 맺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의 자력으로 절대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 속에서 구원의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덮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주인이 무화과나무 실과를 3년간 기다렸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눅13:7)
7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사실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의 율법에서 인용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레19:23)
23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과목을 심게 되었을 때 삼년 동안 열리는 과실은 절대 먹으면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삼년 미만의 과실은 할례 받지 못한 것, 즉 부정한 것으로 여겨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년이 지난 과수에서 열린 과실은 먹어도 된다는 이야기인데, 그 과실들을 먹을 수 있는 근거가 뭐가 됩니까? 삼년 뒤에는 다른 과실이 열리나요? 똑같은 나무에서 무슨 다른 과실이 열리겠습니까? 같은 나무에서는 같은 과실만 열립니다. 그런데 삼년 뒤에는 그 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는 근거가 뭡니까? 삼년 뒤에는 그 과실나무가 할례 받은 나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할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무가 애를 써서 받아낼 수 있는 것입니까? 할례라는 것 자체가 그 당사자의 쪼개짐 대신에 어떤 다른 존재의 쪼개짐이 일어나고 그 다른 존재의 대신 쪼개짐이 당사자에게 전가되는 언약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가나안에서의 과실나무가 삼년이 지난 뒤에 먹을 수 있는 과실을 맺게 되는 것은 그 과실나무의 수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과실나무에게 은혜를 베푼 어떤 존재의 배려 때문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할례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달려 쪼개져야 할 십자가 위에서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쪼개져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쪼개짐이 우리에게 전가가 되어 2,000년 전에 이미, 미래에 우리에게 집행될 사형이라는 형이 집행이 되어 버린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인생은 집행유예의 인생이 아니라 이미 형이 집행이 되어 버린 무죄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린마일이라는 영화에 보면 악독한 교도관이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당한 인디언의 시체를 모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선한 교도관이 그를 밀치며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은 이미 전기의자에서 자기의 죄 값을 다 치룬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이다. 더 이상 이 사람을 모욕하지 마라’ 그렇지요? 전기의자에 앉기 전의 그 사형수는 악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전기의자에서 그 죄 값을 다 치렀습니다. 그때 그의 육신은 죄 값을 다 치른 순결한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육적인 차원에서의 비유를 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지요?
우리가 바로 그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쪼개져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그 가슴에 품으신 당신의 백성들이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함께 형벌을 받은 것으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할례입니다. 그 뒤로 그 할례 받은 자들에게서 나오는 열매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드실 수 있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 전과 열매가 달라져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그 사실이 좀 더 명료하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눅13:8)
8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포도원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과실을 맺지 못 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레위기의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면 그 무화과나무는 할례 받지 못한 부정한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원지기가 그 포도원 주인의 앞을 막아섭니다. 그리고는 일 년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반드시 과실을 맺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어떻게요?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과원지기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과원지기의 수고가 가입이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나무가 과원지기의 수고에 의해 할례 받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할례 받은 나무가 맺는 것은 그 모양과 내용이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인이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름, 코프리아’는 죽음이 함의된 단어입니다. 거름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의 죽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 안에 부활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 것이 거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셔서 거름으로 심겨지신 것입니다. 혹시 마음속으로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증거를 대 드리겠습니다. 그 거름이라는 단어 앞에 ‘그대로 두소서’라는 어구가 나오지요? 그 단어가 ‘압히에미’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는데 거기가 십자가 위입니다. 그리로 한 번 가보지요.
(눅23:34)
34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압히에미’입니다. 그 단어는 ‘면제하다, 용서하다, 버리지 않고 놔두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에게 사형을 받아 마땅한 자들을 막아서시며 ‘제가 그 형량을 다 채울 테니 저들의 죄를 면제해 주옵소서, 사면해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 단어가 오늘 본문에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비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에 관한 비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년간 열매 맺지 못했던, 아니 그 후에도 영원히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말라비틀어진 십자가 나무에 매달려 죽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게 우리를 살리는 거름이 된 것입니다. 그걸 아는 것, 그리고 그걸 믿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가셔서 바로 그 은혜의 십자가 복음을 이해시키심으로, 스스로가 신이 되어 ‘나’라는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는 악당들을 하나님의 발 아래로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포도나무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런데 그 극상품의 포도나무가 스스로 거름 화 되어 버리신 것입니다.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들 포도나무들의 가지를 스스로의 몸에 접붙여 버리신 것입니다. 그게 극상품 포도나무의 죽음입니다. 거름 화 작업입니다. 죽어야 할 들 포도들은 극상품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빌붙어 그 분을 양분삼아 겨우 생명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게 로마서 11장의 논지입니다.
(롬11:16~18)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 하니라
17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 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 이니라
성도는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일 뿐이므로 절대 자긍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돌 감람나무 가지는 참 감람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 감람나무들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도 자기들의 공로나 업적이나 노력을 근거로 하여 그리 된 것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돌 감람나무에 맺히게 되는 열매도 돌 감람나무의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열매는 뿌리의 진액으로 맺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참 감람나무에 붙어 겨우 생명을 얻은 돌 감람나무들이 자신들이 맺은 열매를 업적으로 내어 놓으면서 자신을 자랑하고 있다면 그처럼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이렇게 일갈을 하셨습니다.
(요15:4-6)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예수님을 떠나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자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도 자신들이 맺는 것이 아니라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가 맺는 열매를 거저 전가 받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할례인 것이고 세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예수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되셔서 찍혀 버려야 할 우리를 변호하시며 ‘제가 그들을 위해 거름이 될 테니 그들을 면제해 주소서’라고 우리를 품어 안아 주신 바로 그 예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열매를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님은 바로 그 위의 구절에도 여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요15:1~2)
1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참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음에도 과실을 맺지 못하는 자는 제해 버리신다고 하시지요? 그 어구가 아주 오해가 많은 부분인데 여기에서 ‘제하여 버리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이로’는 ‘들어 올리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번역을 하면,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당한 자들이 열매를 맺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그 가지를 양지 바른 곳으로 들어 올리셔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지의 삶에서 열매를 맺으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들이 마치 선하고 착한 열매를 맺어 세상의 사랑을 받고 신의 사랑을 받아 낼 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을 하는 것이 바로 악인 것입니다.
(렘2:21~23)
21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22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23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여기에 명확하게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으셨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방의 악한 포도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 악한 포도나무의 정체가 그려지는데 그들은 스스로 잿물로 씻고 수다한 비누로 씻으면서 ‘나는 더럽지 않다’고 말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심겨진 자들이고,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에 의해 깨끗해 질 수 있는 자들인데, 그들이 자신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생하게 된 것이고, 스스로의 힘으로 깨끗해 질 수 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악한 가지이며 이게 바로 유대주의,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들의 티끌 됨과 더러운 죄인 됨을 올바로 직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걸해야 산 자가 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잿물과 비누로 스스로를 씻으면서 ‘우리도 이 정도면 깨끗하지?’하고 너스레를 떠는 자들이 바로 악한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는 ‘나는 예수라는 진짜 포도나무에 은혜의 접붙임을 받아 비로소 산 자가 된 사람이야’라는 겸손한 고백을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비유에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마15:11~14)
11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이니라
12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들의 힘과 노력과 열심으로 포도나무를 멋지게 심어 놓고는 ‘어때, 참 멋지지?’하며 자기들의 행위를 자랑할 지라도 그게 하나님이 심으신 것이 아닐 때에는 다 뽑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것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존재방식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으로 안의 것이 영향을 받는 그런 양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은 은혜입니다. 은혜로 존재하고 은혜로 경륜되며 은혜로 완료가 되어지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는 겨우 집행유예 정도만을 따낸 것으로 생각하고 그 집행유예 기간 동안에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열매를 맺어 내지 못하면 다시 형이 집행이 된다고 주장하는 일부 알매니언 주의자들이나 타 종교인들의 억지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구원의 완료성에 엄청난 흠집을 내는 악한 주장인 것입니다. 그런 데에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니 뭐니 하는 엉터리 잡 교리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가 노력하여 풀어내야 할 저주도 없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효력이 무효가 되는 그런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집행유예를 선고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받을 형은 이미 예수가 다 받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결하고 고귀한 하늘의 자녀로 이미 완성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밖의 그 어떤 더러운 것도 여러분을 더럽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성화론은 우리에게 교묘하게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라 할지라도 열심히 노력하여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지 않는 사람은 절대 구원 얻은 사람일 수 없으니 좋은 열매들을 맺어 내라는 것입니다. 좋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스스로 열매를 맺어 낼 수 없습니다. 오직 가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자신의 열매 없음이 폭로 될 때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꼭 붙드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 앞에 내려놓는 삶인 것입니다.
(눅11:46)
46가라사대 화 있을 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보세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등의 율법사들이 율법지킴과 선한 삶을 강조하면서 사람들 등에 짐만 잔뜩 지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짊어진 짐에 대해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더 지우는 것일 뿐, 그 짐을 내려놓는 것에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사람들이 나를 그리워 해주고, 나의 떠남을 아쉬워 해주며, 나의 부재를 오래도록 아파해 주는 것,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은 바로 그 죽음 뒤의 삶인 영원을 준비하며 살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영원 속에서 나는 천국과 지옥, 둘 중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거기에 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린 마일 위에서 하루하루 죽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죽음의 현장으로 대 사면령이 떨어져 하늘의 왕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은혜의 복음을 이해하는 이들만이 성도입니다. 고소 자로 오실 그 예수와 화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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