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28)
떡 하나 주면 정말 안 잡아먹을까?(I)
(막13:28~37)
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3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1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 이니라
34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나라 전래 동화 중에 해님 달님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떡 장수 어머니가 장에서 장사를 마치고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호랑이가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연신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호의를 베풀며 어머니가 팔다 남은 떡을 다 빼앗아 먹습니다. 그렇게 떡을 다 빼앗아먹은 호랑이가 그냥 배를 두드리며 갈 길을 갔나요? 아닙니다. 호랑이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남은 떡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 어머니를 잡아먹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어린 남매가 남아 있는 집으로 가서 어머니 흉내를 내며 그 남매까지 해치려 합니다. 그때 남매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여 동아줄을 내려 달라고 해서 하늘로 올라가 해님과 달님이 되었다는 그런 동화입니다.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타고 남매를 잡으러 하늘로 올라가다가 동아줄이 끊어져 수수밭에 떨어지는 바람에 수수의 꼭대기가 벌건 것이라고 하지요?
제가 복음을 알게 된 후에 이 해님 달님이라는 동화를 소재로 한 뮤지컬을 보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이야기의 내용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떡장수 어머니가 호랑이의 그 호의를 가장한 속임수에 속을 때마다 참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결국에는 떡도 다 빼앗기고 심지어 잡아먹히기까지 할 텐데 그 어머니는 자기를 잡어먹지 않겠다는 호랑이의 꾐에 빠져 자신의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팔다 남은 떡을 계속해서 호랑이에게 제물로 바치는 모습이 꼭 지옥에 가기 싫어서 하기 싫은 종교 행위를 억지로 하고, 마음에도 없는 사랑과 섬김을 짜내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는 오늘날 교회의 교인들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은 강대상에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고 으르렁 거리고 교인들은 회중의 자리에 앉아서 ‘정말?’하고 맞장구를 치며 자기의 소유와 에너지를 털리는 형국, 그게 꼭 사악한 호랑이와 어리석고 불쌍한 떡장수 어머니 같지 않으세요?
성도는 열심히 떡을 바침으로 사망을, 지옥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자신의 수중에 호랑이에게 바칠 떡이 하나도 없다할지라도 어떤 이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삼켜서 파기시켜 버렸다는 그 믿음으로, 그래서 나에게 떡을 요구하는 지옥의 호랑이는 비록 내가 떡을 내 놓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수 없다는 믿음으로 지옥을 모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은혜의 현실을 당신 백성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때때로 성도의 삶 속에 내어 놓을 떡이 없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너를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열심을 성도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항상 ‘떡 하나 주면’이라는 인간 행위를 단서로 제시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이라는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처럼’이라는 자기규정의 유혹을 했던 에덴동산에서의 마귀가 똑같은 방법으로 역사 전체를 아우르며 인간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가치 있고 소중하고 능력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생산되어지고 만들어지고 축적이 된 떡으로 생존과 행복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근사한 부추김입니다. 왜 하나님에 의해 수동적이며 피동적으로 끌려만 가야 하냐는 것입니다. 너의 떡으로 너희 생존을 사수하라는 것입니다. 멋지죠?
그래서 인간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들이 그 마귀에게 떡을 바치며 삽니다. 모든 인간이 ‘나’라는 왕의 안위와 구원을 위해, 그리고 그 위대한 왕의 자존심을 위해 마귀가 제시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려 혈안이 되어 삽니다. 눈에 보이는 ‘나’의 행위와 ‘나’의 소유가 마치 ‘나’를 구원 할 수 있을 것처럼 마귀가 요구하는 떡을 생산하고 축적하여 세상 신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게 인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을 소유한 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완전히 비워져서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의해 채워져야 비로소 존재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요?(고후4:4)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빌2:7)하나님의 뜻으로 채워 버리시는 삶을 사셨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올바른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완전한 자기부인이 전제가 된 말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0절과 31절에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막13:30-31)
3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1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렇지요? 마지막 때에 관해 묻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대답해 주신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만이 끝까지 남아 다 이룬다, 성취가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상이나 현실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완료된 미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과 현실이라는 것은 다 사라질 것인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성취될 것이니까요. 과거와 현재의 현상과 사건과 현실과 행위가 차곡차곡 쌓여서 미래가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결정된 미래가 있고 그 미래가 현재와 과거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이 겪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며 말씀인 것입니다. 그 언약 성취의 과정에서 인간의 구원이 재료로 쓰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에덴동산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인간이었나요?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중심은 동산 중앙에 심겨져 있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였습니다. 인간이 그 나무들보다 더 소중한 존재라면 그까짓 선악과 하나 먹었다고 그 소중한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나면 안 됩니다. 인간은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의 소중함을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얼마나 소중하면 그거 하나 따 먹었다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인간이 쫓겨나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에 있는 자이지 언약을 타고 넘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언약, 즉 복음을 담고 있는 모형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담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한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선악과 시험을 통과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출제하신 하나님 나라 입학 시험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하나님만이 통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들어 그 시험문제를 통과시켜 당신의 나라에 들여보내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그 선악과 시험문제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풀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 율법의 완성이 되셔서 선악과 시험을 통과해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그 합격자의 신분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먹여 주십니다. 그게 생명나무입니다. 그것을 은혜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을 사랑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구조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바로 그것을 증거 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나무실과, 즉 하늘의 떡을 얻어먹는 자이지, 선악과 시험을 스스로의 힘으로 통과하겠다고, 다른 말로 스스로 떡을 생산해 내어 살아보겠다고 자존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떡 하나 주어서, 선악과 시험 풀어서 생명나무 실과 먹고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떡이, 생명나무 실과가 나에게 무상으로 먹여지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대표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으로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떡 못 만든다.’에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떡을 만들어라, 너희는 떡을 만들 수 있다’라고 계속 채근 질을 해대는 자가 있으니 그게 마귀입니다. ‘선악과 따 먹으면...’
성경은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나는 떡을 생산하여 떡을 바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너스레를 떠는 그러한 상태의 인간을 ‘죽은 자’라고 선언해 버립니다.
(엡2:1~3)
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모습이 바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유혹을 하고 있는 세상 신에게 붙들려 그가 요구하는 떡만을 추구하며 사는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자들은 세상 신에게 속아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떡을 생산해 냅니다. 그게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을 이용해서라도 자신들을 살릴 바로 그 떡을 얻어내려 총력을 기울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 부릅니다. 그 말은 ‘죄의 종, 죄인’등으로 바꾸어 부를 수 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주인을 이루는 부속품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종의 행위는 그를 소유하고 있는 주인의 소유가 됩니다. 그러니까 죄의 종인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는 그게 어떤 모양을 하고 있다하더라도 죄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떡을 생산하고 축적하여 생존과 행복에 이르려 하는 모든 인간에게서는 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게 마귀에게 속한 자의 상태요, 죽은 상태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죽어 있는 이 세상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어떤 선택된 무리의 죽음을 삼켜 버리시고 그들을 깨워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해서 산 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각의 사무를 맡기며 깨어있으라고 명령을 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종 된 자들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가령 ‘하루에 세 시간씩만 자고 깨어 있어라’라든지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 있으라’는 등의 구체적인 명령은 얼마든지 인간의 능력으로 수행이 가능한 명령입니다.
그런데 ‘항상 깨어 있으라’는 명령은 억지입니다. 인간이 잠을 자지 않고 깨어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을 하달하고 가는 주인의 명령의 진의가 무언가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육을 갖고 있는 인간의 특성상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그 깨어있음의 주체가 종들이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겠지요?
너무 서둘러서 죽어 있던 자가 이제 깨어났으니까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로 살아내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라고 추측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우리가 떡을 생산해 내는 행위니까요. 그런 떡은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가는 어리석고 가련한 떡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공부한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서도 주님은 ‘깨어 있으라’는 권고를 하시는데,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자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깨어있는 자로서 혼인잔치에 들어갔단 말입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깨어있음은 우리가 생산해 낼 수 있는 깨어있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감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와 병행이 되는 비유가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그리로 한 번 가볼까요?
(눅12:35~40)
35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는 집 주인이 어디에 갔다 오는 것인지가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어디지요? 혼인잔치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혼인잔치가 언급이 되고 여기에서도 혼인잔치가 언급이 되고 있다는 것을 주의 깊게 보셔야 합니다. 깨어있음과 혼인잔치가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개역 성경에는 혼인집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면 그냥 ‘혼인잔치’입니다. 주인은 혼인잔치를 다 치르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혼인잔치의 주인공이었는지 아니면 하객이었는지는 별로 중요한 사안이 아닙니다. 어차피 비유니까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주인이 다녀 온 혼인잔치가 이미 완료된 잔치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인은 잔치를 다 치르고 돌아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이상 이어집니다. 따라서 그 혼인잔치에 갔던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혼인잔치에 가면서 종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억지를 부리십니다. 교대로 깨어 있으라도 아니고 그 명령을 듣는 모든 종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37절을 보세요.
(막13:37)
37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그렇지요? 주인을 기다리는 모든 자가 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그 깨어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을 해 보겠습니다.
35절에 나오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라는 어구를 보시면 구약의 어떤 명령이 생각나세요?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이 생각나시지요?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름으로 살아난, 공로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들고 신을 신고 급히 유월절을 먹으라고 하시지요? 그리고는 그들 앞에 등불로, 불기둥으로 서십니다. 이스라엘은 허리에 띠를 띠고 이제 광야 40년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복식은 치마 같은 겉옷을 치렁치렁 걸쳐 입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허리띠를 띨 때는 급히 어디로 출발을 하거나 중요한 일을 할 때였습니다. 그렇게 성도는 주님께서 혼인잔치로 떠나시게 되면 성도 또한 어떤 길을 열심히 가게 되는 것이고, 어떤 일에 투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잔치로 떠나는 주인이 종들에게 하신 명령은 성도의 광야 인생 전체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건너가야 할 여정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이 ‘깨어 있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논점일탈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이 비유의 배경으로 붙들어야 할 것이 바로 혼인잔치의 완료성이라는 점입니다. 종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신 주인이 주님이라는 것에는 별 이견이 없으시지요? 이제 그 주인이 다시 돌아오시는 그 가시적 귀환을 우리가 재림이라고 부릅니다. 그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는 주님의 강화의 내러티브 안에 이 비유가 들어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신 주님이 가신 곳이 혼인잔치라는 것이 이해가 가세요? 우리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먼 미래에 성취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혼인잔치에서 돌아오신단 말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와 오늘 본문의 비유를 합쳐보면 주님은 이미 완료된 혼인잔치에서 혼인잔치를 종결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요?
이게 바로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영원이라는 영역 속에서 완료가 된 어떤 묵시가 이 세상에 역사로 펼쳐지는 것을 우리가 예정이라는 어설픈 단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영원이 뭐라고 했지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이 된 개념을 영원이라 합니다. 그 영원이라는 개념 속에서 역사를 보면 에덴동산의 아담 안에 내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내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순서를 가지고 차곡차곡 쌓여 가는 것처럼 보이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에 의해 마치 럭비공처럼 스스로 생명력을 발휘하며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늘의 언약 안에 이미 완료되어 있는 것이 가시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이미 완료된 잔치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나라로부터, 가시적 역사 속에서 무언가 교육을 받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시는데 그들이 바로 깨어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이 근거가 되어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찾아오시는 그 자리가 바로 깨어있음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명령이라기보다 성령이 임한 자들에게서 나오는 필연적 자세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구원은 깨어 있음이라는 행위를 전제로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되기로 작정된 자들이 깨어있음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혼인잔치는 이미 완료된 잔치니까요. 떡 하나 주어서 안 잡아먹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잡아먹힐 수 없는 자로 이 세상에 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떡을 내어 놓아야 잡아먹힘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고가 죽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키면 살고 못 지키면 죽는다는 명령과 함께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제사라는 것을 주십니다. 마치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는 호랑이의 제안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율법지킴이라는 떡을 내어 놓으라는 주문이 아니라 ‘너희는 절대 떡을 내어 놓아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는 자가 아니니 제사의 제물로 내려 갈 내 아들을 의지하여 내게로 오라’는 은혜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율법과 제사로 떡을 생산해 내겠다고 수선을 피웠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절대 자신의 무용함과 무력함을 폭로당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율법을 오해시키고 악용한 것입니다.
성도는 떡을 내 놓아서 위기를 모면하는 자들이 아니라 내 놓을 떡이 없는데도 호랑이가 잡아먹지 못하는 은혜의 현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호랑이에게 통째로 먹혀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호랑이의 아가리를 찢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신부인 교회의 성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미 혼인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영원 속의 완료된 나라에 들어가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도대체 왜 우리와 예수님의 혼인에 예수님의 피가 필요했는지’를 확실하게 배우고 부활의 몸을 입고 다시 그 혼인잔치의 장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주인이 혼인잔치에서 오시는지, 그리고 혼인잔치를 위해 오신다고도 하는지 아시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already, not yet 이라면 옳습니다. 그러나 already와 not yet 사이의 갭을 인간의 떡 만들기의 행위로 채워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already, not yet 은 잘못된 성경이해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자기의 혼인잔치에 왜 신랑의 피가 필요했는지를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유학을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의 죄악상을 나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폭로를 당해야 하고, 수시로 넘어지는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처절하게 긍정해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는 마귀의 속삭임이 계속해서 들려오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내 놓을 떡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 됨의 폭로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에게 계속해서 떡을 내어 놓다보면 마귀는 결국 그 떡을 내어 놓는 자까지 삼켜버리는 것이 마귀 나라의 사악함이기 때문입니다. ‘떡을 내 놓아야 살 수 있다’는 것은 정확하게 ‘선악과를 먹어야 하나님처럼 된다’라는 마귀 나라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귀를 당황케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내 놓을 떡이 없는 자들을 당신의 죽음으로 받쳐서 무상으로 건져 버리시는 것입니다. 마귀가 당황하지요. 그걸 은혜라고 합니다. 마귀 나라의 원리가 사필귀정, 권선징악의 기특한 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어부지리, 무위도식의 원리로 운영되는 곳입니다. 힘의 원리 속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래야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앉게 되고 왕이신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수요예배 때 공부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구조는 속죄 소 밑에 증거 판, 즉 인간의 죄와 실패가 깔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 속죄소 위에 제물의 피가 뿌려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의 행위를 안 보시겠다는, 오직 당신 아들의 피만 보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은 계속해서 용서하는 자리에 앉아 계시고 피조물인 당신의 백성들은 용서를 받는 자리에서 그분의 은혜만을 바라는 자로 내려앉는 구조로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상태를 하나 됨, 연합, 혼인 등의 여러 단어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자각하고 수긍하는 상태를 깨어 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이라는 것과 혼인잔치가 항상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류 최초의 결혼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창2:21~25)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25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이라는 신랑을 잠들게 하시고 그 아담의 옆구리를 뚫어 심장을 지키고 있는 갈비뼈를 하나 뽑아내십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또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내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아담은 그 사람을 보고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사랑고백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랑고백과 함께 그 여자에게 무언가를 주는데 그것이 ‘여자’라는 이름입니다. 아담이 여자에게 사랑고백과 함께 이름을 주는 이 장면이 출애굽기에서 율법의 옷을 입고 등장합니다.
(출22:16~20)
16사람이 정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빙폐를 드려 아내로 삼을 것이요
17만일 그 아비가 그로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빙폐 하는 일례로 돈을 낼 지니라
18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지니라
19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
20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 지니라
여기에서 남자가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자가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여자 가족이나 여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이 있었는데 그것이 빙폐라는 것입니다. 납폐라고도 하지요? 그것이 요즈음에는 함이라는 것으로 여자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 폐백을 하는 것도 다 이와 상통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성혼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신부 집에 하는 것이 폐백입니다.
그렇게 남자는 여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 치러야할 대가가 있는데 그것이 아내의 가치에 상응하는 예물이었습니다. ‘내가 아내를 이만큼 사랑합니다. 그리고 난 아내를 끝까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빙폐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빙폐는 아내의 몸값이기 이전에 신랑의 사랑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바로 그 빙폐로 ‘여자’라는 이름을 준 것입니다. 그 이름 안에는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는 아담의 사랑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의 죽음을 근거로 하여 남편과 한 몸인 여자의 탄생이 바로 혼인인 것입니다. 죽음보다 깊은 사랑. 이건 하나의 모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랑 예수와 그 아들의 신부인 교회와의 혼인잔치, 연합이 어떠한 모양으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알기 쉬운 그림이 아담과 이브의 탄생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 크신 사랑으로 당신의 신부와 결혼을 해 버리십니다. 그게 구원이지요? 그런데 그 과정이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신부와 혼인을 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왔는데 그 신부가 싸늘하게 죽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와 허물로. 없음입니다.
그때 신랑은 십자가를 지고 잠(죽음)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의 옆구리가 뚫리고 그의 심장을 막고 있던 갈비뼈가 적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랑의 몸의 일부로 신부가 새롭게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으로 ‘너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사랑고백이 우리에게 부어졌고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아들과 우리가 한 몸이 된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왜요?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산자’라는 이름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게 창세기에서 힌트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혼인을 하여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선악과를 따먹고 그 한 몸의 관계가 깨져 버렸습니다. 그게 신부의 죽음입니다. 남자에게서 나온 여자가 남자와 끊어졌을 때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장이 그 상태를 행음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혼인에 대한 결례에 갑자기 우상 섬김과 행음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핑계 대며 잘못을 전가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 것이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는 원시복음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라인인 여자의 후손은 뱀에게 발뒤꿈치를 물려 피를 빨리는 자로 살게 되는데 그 피 빨림이 바로 상대의 머리를 밟는 승리의 십자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뱀은 상대의 피를 빠는 방식으로(힘의 원리)살고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의 피와 살을 먹으라고 내어주는 방식으로(은혜의 원리)사는 것입니다. 그게 상대의 머리를 밟는 승리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 말씀을 알아듣고 다시 여자에게 이름을 줍니다. 빙폐로 주었던 ‘여자’라는 이름이 폐기가 되고 ‘하와’ 즉 ‘산자의 어미’라는 이름이 새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혼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여자가 신랑에 의해 다시 살게 되는데 그 신랑은 이제 육적 신랑이 아닌 여자의 후손이라는 새 신랑인 것입니다. 그 새신랑의 발뒤꿈치가 마귀에게 물림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여자가 살아 그 신랑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그 여자는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이름을 ‘하와, 산자의 어미’로 지었다는 것은 그 여자가 ‘여자의 후손’에 의해 살 것이라는 확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여자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가 산자가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십자가에서 실제화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아담이 새로운 하와, 즉 산자들을 위해 잠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을 신부의 빙폐로 지불해 버립니다. 내 신부의 가치는 내 목숨과도 같다는 신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신부에게 ‘산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해 주는 것입니다. 그게 혼인입니다. 그게 한 몸입니다. 그게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부는 떡을 생산해 내고 축적하여 신부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신랑의 사랑에 의해 거저 신부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지요? 가죽 옷은 부끄러움을 덮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남자의 옷이 여자에게 덮이는 것은 곧 혼인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룻기에서도 룻이 보아스에게 나를 덮어 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인의 혼인의 모형이 창세기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메리디스 클라인(Meredith G. Kline) 교수의
책을 보면서 창세기 3장에 아주 재미있는 워드플레이(word
play)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3:1)
1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 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기에서 ‘간교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아룸’입니다.
그런데 7절에 나오는 ‘벌거벗음’이라는 단어가 굳이 ‘에룸’이라는 단어로 들어가 있습니다.
(창3:7)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여기에서 ‘벌거벗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룸’입니다. 클라인에 의하면 성경이 이 ‘아룸’과 ‘에룸’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인간의 벌거벗음이 바로 뱀의 간교를 입은 것을 설명하기 위한 히브리 문학의 워드 플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벌거벗은 부끄러움의 자리로 내려간 인간의 상태는 마귀의 간교를 입은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 마귀의 간교가 벗겨지는 것이 의의 옷이 덮이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끄러움이 덮이는 상태, 죄와 허물의 죽음이 은혜로 덮이는 상태가 한 몸 되기이며 연합이며 혼인잔치 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만들어지는 그 장면에서 혼인잔치가 거행 되었던 것이고 그 자리에서 ‘너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한 몸 사상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겔16:6~14)
6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7내가 너로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8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 이니라
9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10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11패물을 채우고 팔 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12코 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13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
14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 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 이니라
하늘 왕후의 혼인잔치 장면입니다. 벌거벗은 적신이었던 어떤 이가 하늘의 왕후가 되는데 그게 전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깨끗이 씻기고 치장을 하여 화려한 왕후로 재탄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시면 그 신부는 하나님의 옷으로 덮임을 받는 자입니다. 이것이 혼인잔치입니다. 하나님이 벌거벗은 부끄러운 자를 당신의 옷으로 덮으시고 치장을 시켜 신부로 세워내시는 것이지 신부가 자격이 있어서 신부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는 피투성이였습니다. 죽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옷이 덮여 그 죽은 자가 하늘의 왕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은 신랑의 죽음으로 만들어지는 옷입니다. 신랑이 피투성이의 자리로 내려가 피투성이의 신부를 하늘 왕후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아가서 8장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는 말이 바로 이 하늘 신랑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구절인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하여 사랑을 성취해 버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 신랑이 준비한 예복, 십자가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뱀의 간교를 입고 있는 자입니다. 그들은 절대 혼인잔치에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주인에 의해 쫓겨난 것입니다. 그도 무언가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훌륭한 옷을 입고 있던 그가 예수의 의라는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고 있지 않다면 그는 벌거벗은 것이고, 뱀의 간교를 입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자기주장, 자아실현, 자기자랑, 자아확장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 즉 호랑이 앞에 내어 놓은 떡인 것입니다. 그 떡으로는 절대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로 완료가 된 혼인잔치가 성대하게 베풀어지고 있는 하늘에서 오시는 신랑 예수를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그 혼인잔치의 본질과 그 혼인잔치의 중요성을 아는 자들만이 오매불망 신랑만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혼인잔치를 완료시킨 신랑 이외에 다른 방법이나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미 천상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혼인잔치가 완료되어 있음을 믿음으로 아는 자들만이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더 이상 자기들이 생산해 낼 수 있고 쌓을 수 있는 떡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 주인을 기다리는, 그 주인의 명령대로 살아내는 과정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벌거벗은 자신을 은혜의 옷으로 덮어버린 신랑에게만 집중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신랑에 의해 완료 되어 있는 천국 잔치의 실체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잔치에 초청을 받아도 못 가는 것입니다.
왜요? 일상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요. 소도 사야하고, 장가도 가야하고, 밭에도 나가봐야 합니다. 효율성이지요?
경제적입니다. 이성적이고요. 그러나 그게 호랑이 앞에 내어 놓을 떡입니다. 그 떡을 준비하느라 공짜로 초대받은 천국 잔치에 못 가는 것입니다. 떡은 우리가 생산하여 취하거나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떡을 주시는 분이지 떡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요6:33~35)
33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 이니라
34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은 자신을 증명하거나 자랑할 수 있는 세상의 힘을 떡으로 여기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것을 달라는 것이지요. 그 떡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철떡 같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순진하기나 하지요. 바리새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러한 속물스러운 인간 욕심의 표상처럼 여겨졌던 세리들을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돈이 아무리 좋아도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살 수가 있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눈에 보이는 물질적 욕망을 나무라고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은 다른 방법으로 그들의 만족을 챙겼습니다. 그게 바로 율법지킴, 착한 행위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도 역시 인간 세상의 떡이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인간은 그 어떤 종류의 떡으로도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말은 그 어떤 노력과 시도로도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방법으로는 죽음에 속해 있는 자들이 살아올라 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일상을 통하여 자신이 내어 놓을 떡을 만드는데 분주한 자가 아니라 신랑의 공로로 완료된 혼인잔치의 은혜 성을 알게 된 자들이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깨어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 보세요. 경제성과 효율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 볼 수 없지요?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기 위해 그 비싼 기름을 일상 속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일상을 살찌울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그리했습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이 세상의 떡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비효율적이요 비경제적인 바보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열심히 떡을 만들어 내라고 요구를 합니다. 소유의 떡, 물질의 떡, 선행의 떡, 열심의 떡, 착함의 떡 등등 많은 떡을 생산해 내라고 요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통하여 그 떡들을 생산해 내느라 동분서주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자기의 떡에 착념하는 자들은 하늘나라 혼인잔치의 초청을 경홀히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모든 육의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랑의 공로와 은혜로 우리가 살게 되고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하나님 나라의 완료 성을 믿고 그 신랑만을 기다리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깨어 있는 자입니다. 그건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을 부려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믿음에 의해서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세상과 함께 자고 있는 모습이 성경에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우리 인간이 챙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깨어있는 종들의 구체적인 일이 무엇이며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되는지에 관해 다음 주에 계속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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