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41. 하늘 양식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 용서
마태복음 6:12-13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되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제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이 내용들은 전부 앞에서 말한 하늘 양식인 ‘셋’이라는 떡, ‘셋이라는 떡이 무엇인지 이제 충분히 이해가 가시죠? 그 ’셋‘이라는 떡게 갖게 되었을 때에,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그런 현상들과 또 이루어지게 되는, 성취되는 그런 현실들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용서’에 관한 내용만을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앞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주님은 모든 율법을 살인하지마, 간음하지마, 거짓증거하지마의 셋으로 축약을 해서 설명을 해 주신 후에, 그 모든 것을 올바로 이해해서 마음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이웃에게 흘려 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아가페다라고 말씀하셨죠? 그게 사랑이야! 에스카톨로스 고드란테스. 그 넷의 마지막, 그 사분의 일, 우리가 해야 할 그것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셋’으로 완성된 자들이 ‘넷’의 존재, 그 사랑을 하늘 그런 존재로 살게 된다고 하셨죠. 그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 ‘완전’이다. ‘델레이오스(Teleois)'다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5장 마지막을 하나님이 운전하신 것 처럼 너희도 온전해야 된다. 그런데 어떻게 온전해져야 되느냐? 그걸, 모든 율법을 사랑, 그 넷으로 이해하여 마음으로 가지면 그걸 온전이라고 해줄게 이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어떤 도덕적 속성, 이런 것들을 닮아가는 게 ‘온전’ 아니란 말입니다. ‘온전’의 비스무리하게가 아니에요. 그저 온전해라 그랬다니깐요. 닮아가라 그러지 않고. 그러고는 그런 성도의 역사 속 현실, 그것을 이제 ‘프로슈코마이(proseucomai), 기도라는 것을 예로 들어서 다시 풀어 주는 거에요.그게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니까 5장 앞에 그거, 그 내용들을 이렇게 떡으로 너희들이 갖게 되면, 이렇게 흘려주게 될거야, 그리고 너희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실, 성취되는 현실은 이런거야 라고 설명해주는 게 주기도문이에요. 그리고 그걸 통틀어 그냥 기도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기도는 성경이 말하는,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기도는 사실은 아닌거죠.
성도는 그 사랑으로 완성이 되는 말씀을 양식으로 받아서, 그 하늘들 안에 아버지를 모신 자가 되는 것이며,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이 되는거죠? 그래서 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되는 것이 이니라. ‘하늘들’ 그러니까 ‘호 우라노스’, 우리가 하늘들이 되면 그 안에 그 진리라는 아버지가 계시는 것이고, 그 아버지가 우리를 아들로 낳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라고 이야기를 하는거고, 그리고 그것이 그 이름이, 그 말씀이 거룩하게 되는거죠? 그건 다른 말로, 그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주세요.라는거죠. 그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현실이죠. 그 말씀, 그 진리로 우리는 깨끗한 자, 그게 ‘하기오스’, 성도라는 단어가 그 뜻이거든요. 그 깨끗한 자, 거룩한 자가 이미 됐단 말이죠.
그리고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섬김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섬기잖아요. 그 섬김을 받는 나라가 되는거고, 내가, 그 ‘바실레이아(basileia)’가 섬기다라는 뜻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를 섬겨주면 내가 나라가 되는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의 뜻이 땅인, 흙인 나에게서 이루어지는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한 영의 양식으로 받아 먹게되면 우리에게서 일어나게 되는 현상과 이루어지게 되는 현실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냥 다같이 이야기에요. 본문 12절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되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옵소서라는 청원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하늘의 양식을 올바로 받아먹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용서’라는 현상이라는 이야기에요. ‘용서’, 그게 구원의 핵심 아닙니까? 용서. 그런데 이 구절을 원문으로 보면요. 죄라는 단어가 ‘하마르티아(hamartia)’가 아니라 "오페일레테스‘라는 단어로 쓰였어요. 신약성경에서 죄라는 단어는 거의 ‘하마르티아’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단어의 의미는 ‘과녁을 벗어나다’ ‘제 짝이 아니다’ 그랬죠? 그 단어 자체가 과녁을 벗어나다는 뜻도 있지만, ‘하’라는 부정 접두어에다가 ‘메로스’, ‘메로스’가 창세기로 가면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에 그 ‘첼라(צלע/H6763)’라는 단어가 갈비뼈가 아니라 부분이에요. 반쪽. 이런 뜻이거든요.그것이 ‘메로스’라는 단어인데, ‘하’하고 ‘메로스’에요. 그 짝이 아니다. 그러면 죄에요 그것이. 그 단어가 ‘하마르티아’거든요. 그러니까 내 짝을, 내 남편을 엉뚱한 것으로 붙들어서 나하고 붙여버리면 그게 죄에요. ‘하마르티아’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엉뚱한 대상, 그 대상을 내 남편으로 붙들어 버리면, 거기에서 발생되는 엉뚱한 열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지않고 율법으로 받아 버리면, 그래서 그걸 내 남편으로 삼아 버리면, 그 율법은 나를 열심히 어떤 행위를 하게 독려를 해준다니깐요. 그리고 독려뿐만 아니라 협박을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그 남편에 의해 강요된 행위를 내가 하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을 다 죄라 그래요. 그게 ‘하마르티아’란 단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이 아닌 그 다른 대상, 내 짝, 진짜 짝이 아닌 다른 짝, 그걸 내게 붙여서 그걸 숭배하는 것이거나, 거기에서 발생되는 엉뚱한 과녁을 향하는 그런 열심, 이런걸 죄라 그래요. 그러니까 그것이 세상에 속해있는 그러한 상태에 대한 인간 실존의 현주소, 이게 ‘하마르티아’에요.죄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 우리의 인식 수준에 맞는 아래의 것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있죠? 그거, ‘호코스모스’의, 세상 아래의 모든 것들이 다 그거란 말이에요. 그걸 그냥 표피 그대로 인식함으로 해서, 잘못된 짝으로 그걸 취해버리거나, 그 표피적 말씀을 몸으로 열심히 행해 버리면 그걸 죄라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그것만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죄는, 그것과는 다른 죄에요. 말씀드렸다시피, 오늘 본문의 죄는 ‘하마르티아’가 아니라 ‘오페일레마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단어는 빚이에요. 채무자가 진 빚. 빚이라는 의미와 함께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는 뜻도 있어요. 마땅히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거에요. 갑자기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 같죠? 하지만 그런 이야기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마땅히 해야 할 어떤 일은 그런 율법적인 행위를 말하는게 아니에요.
아무튼 이 신약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사회문화적 관습을 고찰해보면,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하지 않는 것,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을 죄의 범주에 넣었던 것은 분명해요.그래서 주님께서도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라라고 이야기한 것이 일하지 않는 자는 못먹는 자라는 뜻이에요. 주님은 그 문제, 그 ‘오페일 레마타’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말씀하시고자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성도가 지니고 있는 그 빚, 그걸 지금 여기서 죄라고 하니깐, 다른데서는 빚이라고 번역을 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굳이 죄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둘 다 같은 뜻이에요. 그걸 먼저 확인해야 되겠죠? 그 빚, 그것을 갚지 않고, 그것에 대한 의무를행하지 않으면 죄라 그러니까, 반드시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하고 가야 된다 말이에요. 로마서 1장 13절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반드시 알기를 원한다는 뜻이죠?)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이게 같은 단어에요. 빚진 자다. 바을이 자길 빚진 자라고 그래요. 바꾸어 말하면, 내가 만약에 이걸 갚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죄인이다 이런 말이에요)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답이 나왔습니다. 그죠? 바울이 빚진 자로서 갚아야할 빚이 뭐라는 거에요? 복음 전하는 거라구요. ‘오페일레테스’. 바울은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되는거에요. 그리고 그 빚이 복음의 빚이라고 분명히 밝혀줘요.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복음의 빚을 갚는 자로 살게 되어있다라는 그런 말이에요.
오늘 본문에 그 ‘사하여주옵시고’, 그 ‘아페스도’, 앞에 동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제가 과거 명령형이에요. 그건 우리에게 반드시 완성이 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 아니 이미 완성된 그것을 청유하는 거라 그랬죠? 그게 과거 명령형 시제라고 그랬잖아요.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빚을 갚아 용서를 전해주는 삶을 살아야 되는 거에요. 아니 살게 되어있다 그런 말입니다. 자 그게 무슨 말인지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게요. 바울은 진리를 전해 받아서 그것을 마음으로 받은 자신을 빚진 자라고 표현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도 말을 합니다. 로마서 8장 12절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마찬가지에요. 같은 단어입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요.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잘 보세요.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다. 그러면 당연히 빚을 갚아야 되는데, 육신으로 빚을 갚으면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 이런 말이에요. 육신으로 빚을 갚으면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 영으로 그 육신의 빚 갚음, 그것을 죽여라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영은 ‘프뉴마’, 올바른 말, 깨끗한 말, 진리의 말씀을 가르키는거란 말이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그냥 너무 쉽게 간과해 버리는 것 같아요. 선악구조 속의 아담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의 자원과 열심과 애씀과 노력으로 자신들의 몸을 활활 태우는 삶을 살게 되죠. 그런데 주님은 뭐라 그러냐하면 너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꽝이다 이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자기의 그 빚, 그러니까 구원을 얻어내기 위해 자기의 몸을 활활 태워요. 이게 빚 갚는거에요. 모든 인간들이. 안 그러면 불안해서 죽죠?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 자신들의 빚을 갚으려고 안간 힘을 쓰게 되어 있어요. 아니 인간들이 그거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게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보편적 아담들의 속성입니다. 그렇게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율법의 빚을 진 자로 평생을 살 게 되요. 그래서 기부로, 선행으로, 선교로, 인격의 도야로, 자신의 빚을 갚아 나가요.이걸 다 갚으면 구원에 이르겠지라는 막연한 추측을 갖고, 그리고는 그러한 것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게 성숙한 모습으로 발전이 되고, 또 주위 사람들로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게 되면, 마치 채무자의 빚이 조금씩 탕감되어 가듯 좋아해요. 이 빚을 안져본 사람은 몰라요. 그 기분이 어떤지. 그렇게 모든 인간들이 빚쟁이처럼 살아요. 그게 율법주의의 세상이에요. 거기서는 끊임없는 섬김, 빚 갚기의 행위만 난무하죠.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빚을 갚겠다고 내려오셨어요. 땅으로. 모든 인간들이 자기들의 빚을 갚겠다고 열심히 채무자의 삶을 살고 있는데, 채권자인줄 알았던 그 신이, 그 분에게 우리 인간은 빚을 갚아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채권자에게 열심히 빚을 갚고 있었는데, 채권자가 내려오더니 내가 채무자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내가 너희들에게 빚을 갚아야지, 네들이 나에게 빚을 갚으면 그거는 진리가 아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려 온 게 아니라, 내가 섬기러 왔다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자꾸 니네들이 나를 섬겨? 내가 너희들을 섬기는 게 하나님 나라야 그랬단 말이에요. 내가 너희들을 빚을 갚는 게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법이야.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이 열심히 일해서 나에게 빚을 갚음으로 말미암아 운영되고 통치되는 곳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쏟아부어주는 그런 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거에요. 그리고는 당신에게 구하라고 하세요. 그 단어가 ‘아이테오(αἰτέωG154= 빚을 갚으세요)‘라고 그랬죠? 그 단어는 ’빚을 갚으세요‘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구하라는 건 뭐에요? 내가 채무자라는 거에요. 구하라라고 시킨 건. 그러면 내가 갚으리라 그랬단 말이에요.
인간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한 거에요. 우주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이 땅의 아담들은 피조물이 신에게 빚을 갚는 것이 마땅하고 올바른 신앙의 행위라고 철석같이 믿고 행해 왔어요. 그래서 모든 종교들이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 분은 섬김의 대상, 두려움의 대상, 그거 안 갚으면 나에게 해꼬지 할지도 모르는 그런 분. 모든 종교의 신이 다 그렇죠, 뭐.
그런데 신이 내려 오시더니, “내가 너희에게 빚을 갚는 것이 진리이거늘 왜 너희가 나에게 빚을 갚으려고 그래? 그게 교만이다”. ‘휘브리스', 이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그걸 ’휘브리스, 자기 자리 이탈‘라고 그래요, 성경이 그걸 교만이라고 번역했다니깐요. 너희가 아무리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어 나에게 바친다 할지라도, 심지어 예수와 방불한 자 처럼 성숙해서 내 앞에 온다 할지라도, 이 세상 것은 내가 안 받는다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대노하셨어요. 이 독사의 새끼들아, 욕을 하시면서. 당연히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듣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담들의 속성은 그 신에게 빚을 갚고 섬기는 건데, 하나님이 내려오더니 우리에게 빚을 갚는다하네? 그게 은혜잖아요? 그러니까 그 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아담이 한 사람도 없었다니깐요. 그런데 이 역사 속 아담들 중에 그 말의 뜻을 알아먹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오순절 이후부터, 그죠? 오십 이후부터. 희년이죠.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서 갚을 수 있는 그런 채무변제의 능력이 전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 이제 나타나기 시작한 거에요. 이걸로는 빚을 갚을 수가 없는 거구나, 이렇게.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약속하신 그 생명의 말씀을 받아먹고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이 ‘주마’하셨던 그 약속의 생명을 마치 채권자들 처럼 거저 받아먹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준다고 했으니 주세요”라고, ‘아이테오(aiteo)'하니깐, 그 분이 주셨다니깐요. 진짜로 빚을 갚아 주셨단 말이에요. 그게 약속 아닙니까? 내가 원하기도 전에 그 분이 주마하고 약속하신 그걸 나에게 주면 그 분이 나에게 빚을 갚는 거에요. 먼저 준다고 그랬으니까. 그게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양식이었어요.그 양식을 받아먹고 나니까, 진리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먹고 나니까, 그동안 자기가 갚아야만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 율법의 빚이, 하나하나 탕감되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어, 이것도 아니네, 이것도 나에게 갚으라고 한 게 아니었네,l 제사도 아니었네, 이 안식일 지킴도 아니었네, 이렇게 하나하나 탕감이 되기 시작한다 말입니다. 내가 갚아야 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당신의 그 약속, 그 빚을 내가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이다라는 진정한 자유가 그들에게 퍼부어진 거에요. 그것이 바울이 로마서 8장 12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는 “영으로써“, 그 ”진리의 말씀“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그 영의 말씀에 의해 내 빚이 이제 모두 갚아지는 결과가 나타나겠죠? 우리 율법의 빚이요. 내가 이거 안하면 하나님이 날 죽일지도 몰라, 벌을 내릴지도 몰라,해꼬지 할지도 몰라.라고 열심히 행했던 그 율법의 빚, 이것이 진리의 말씀이 내게 들어오자, ”어, 아니네, 하나님이 나에게 이걸 요구 하신게 아니었구나“라고 하나하나 알게 되면, 나중에는 완전히 탕감될 거 아니에요. 그걸 용서라고 한다니깐요.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내가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는, 바울이 자기보고 빚진 자라고 그랬잖아요? 그럼 내가 빚진 자에요. 그러면 내가 누군가에게 빚을 갚아 그 빚을 탕감해 주어야 되는데, 일차적으로 내가 빚을 갚아 탕감해 주어야 할 대상이 누구에요? 납니다. 나! 내가 생명의 진리를 양식으로 갖게 되면, “나”가 제일 먼저 그 빚을 탕감 받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인 거에요.
이 문장을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는 용서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우리 안에서 우리의 그 죄들을.' 다시. ‘우리의 그 죄들을 당신이 용서하셔서 우리 안에서 자유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이런 말이에요. '그리고 역시 우리가 우리를 용서합니다.' ’카이‘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우리가 우리를 용서합니다. 우리의 그 죄들을“. 이런 말이에요. 이 문장을 아람어로 보며는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합니다“.라는 그 어구가 완료시제로 기록이 되어있어요. 아람어에서 완료형은 동시적인 것들을 가르키거든요. 예수님이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러니까 그리로 가서 확인을 해 보면 금방 안다 말이에요. 따라서 이 구절은 이걸 먼저 할테니까 저 것을 해주세요라는 이런 순서적 청원이 아니라, 앞에 것과 뒤엣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얘기에요. 그래서 완료형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빚을 갚으셔서 나의 빚이 탕감이 되면, 나는 나를 용서하고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나의 죄에서도 완전히 자유롭게 풀어 날 수 있다'라는 말이에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셨나요? 그게 구원 받은 자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되면 제일 먼저 용서를 해야 하는 존재가 ‘나’란 말이에요. 나.그래서 그가 자유로와지는 거에요. 그러면 그는 그 자유를 갖고 다른 이들에게 그걸 쏟아부어, 흘려주어, 그 용서를 그들에게 전해 주는 거에요. 그래서 마치 내가 그를 용서하는 것처럼,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니까요. 나는 단지 나를 용서한 그 말씀을 흘려 준 것 뿐인데. 그러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을 용서하잖아요? 그러면 정말그 어디나 하늘나라에요. 그걸 행복하고, 기쁘고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건 미친 놈이구. 그 자유로 살 게 된단 말이에요. 그 율법의 빚에서 풀려 난 자로 살 게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지옥에 보낸다 할지라도 거기서 그 자유로 산다니깐요. 거길 천국이라고 그래요. 유치하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게 다 구비되어 있는 그런 곳을 천국이라고 생각하시면,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 말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이에요. 세상을 섬기는 것이에요. 그것이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물론 좋은 거에요.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좋음이 아니라니깐요. 상상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그 하늘을 텅 비워놓은 거라니깐요. 니네들이 상상하는 그런 하늘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모든 보편적 인간들이 이 율법의 빚을 갚기 위해서 일평생 그 짐을 지고 수고와 환란 속에서 사는 빚쟁이들이라면, 성도는 하나님의 그 빚 갚기의 섬김, 그 아가페, 사랑이라고 그러죠. 그 하나님의 빚갚기, 그 섬김, 그 사랑에 의해서 자신의 빚을 탕감받고, 다른 말로 자신의 빚을 스스로 탕감해 주고 자유롭게 풀려난다 말이에요.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이런 성경에 있지도 않은 것들, 뭐 성탄절, 부활절, 이럴 때 마다 이거 목돈해서 바쳐야 되는거 아니에요? 교회의 대목 아니에요? 그러니까, 없는 것들을 자꾸 만들어 낸다니까요, 교회에서. 교회에서 그거 없으면, 큰교회는 재정이 왕창 흔들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런데 원래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줬잖아요 제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다하고 있으면 그거 안하면 되게 불안하다니깐요. 혹시 나만.(웃음) 하나님이 나만 미워하시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그런게 어디 있어요? 그런 거 없어요. 아, 하나님이 절기 월삭 이런 것 갖고 아직까지도 논하는 놈들은 전부 저주받은 놈들이다 그랬는데, 그거는 다 찢어버린 것 같애 그 사람들 성경 책에서.
그러니까 성탄절에 다같이 모입시다. 이런 말 하지 마세요. 끼리끼리 모여서 노세요. 재미있게. 그 날은 태양신의 축일이었다니깐. 그 날을 왜 우리가 기념하냐구요? 그리고 그 예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아들의 대표인데, 나를 축하해요, 지금. 왜 그 예수가 오신 것을 축하해요? 자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의 빚을 탕감해주고, 또 빚을 갚으세요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아러한 이웃들에게, 그걸 거저주어, 또 빚진 자로서 내 빚을 탕감받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채무자는 거룩한 채무자에요. 거룩한 빚진 자.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들은 서로 서로 빚지면서 살아!”라고 이상한 말을 한 거에요. 로마서 13장 8~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그런데 어떤 빚을 져라 그러죠? 사랑의 빚이래요. 그것도 빚은 빚이잖아요? 사랑의 빚을 져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런데 너희들은 율법으로 빚을 갚으려고 하고 사랑의 빚은 아무 관심이 없니? 이런 말이에요. 너희들은 왜 율법의 행위로 그렇게 열심히 빚을 갚으려고하고, 왜 사랑의 빚이라는 거에는 관심이 없어?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된 건데, 니네들이 사랑으로 서로 빚을 갚으면, 그 율법은 너희들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것 산상수훈 아닙니까?)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걸 그 표피, 문자대로 지키면 안돤다는 거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그 말씀 안에 그게 다 들어있는 거야. 그게 그 말이야. 이런 말이잖아요.)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모든 그 율법의 그 세목들은 바로 그 것을 진리로 올바로 깨달아 사랑을 흘려주라는 얘기였지. 그래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거에요. 언제 그 율법을 하나하나 지켜서 빚을 갚으라 그랬어?그러는거죠.)
만약에 너희들이 그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그 빚을 탕감해 주는 말로, 용서의 말로 전해주지 못하면 너희들은 그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사랑이 이웃에게 어떻게 악을 행하니? 그러잖아요. 사랑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서로 흘려주는 것을 이야기해요. 서로서로 빚진 자로 사는 거에요. 이것이. 그러니까 빚진 자. 이게 나쁜게 아니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빚진 자는. 서로가 서로의 율법의 빚을 탕감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게 성도란 말이에요. 서로서로 빚을 갚는 형국, 그것이 진리 안에서의 교제라는 거에요. 코이노니아. 이게 서로서로 빚진 자로 사는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주어서 율법의 빚을 더욱 가중시키는 자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악을 행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이신 하나님을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깨달아서,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랬잖아요.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말은 무엇이겠어요? 그 사랑이신 하나님을 그 분이 어떤 분인지 내가 잘 깨달아 알면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것이요.
그런데 엉뚱하게 오해해가지고 그 분을 빚쟁이로 만들어버리면, 아니 채권자로 만들어 버리면, 나에게 빚을 받는 채권자로 만들어 버리면 그건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래니깐요. 열심히 섬겨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래니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분노하셨던 거에요. 그렇게 열심을 부려 제사드리고,열심을 부려 율법을 지켰던, 그 바리새인들에게 대노하셨잖아요. 왜 나를 모독해?
자 그렇게 그 하나님, 그 하나님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깨달아서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잘 전달해주면 그것이 나에게 빚을 갚으세요 하는 자들이니까, 내 빚을 갚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율법의 빚도 갚아 주는 거죠. 서로서로 빚을 갚고, 갚아주고 탕감해주는 그런 빚진 자, 거룩한 빚진 자들의 삶이다라는 거에요.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빚 갚으심의 일인 그런 자기 계시,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신 게, 은혜를 우리에게 흘려 주시는 거고, 그게 생명의 말씀이고. 그렇게 빚 갚으심의 일인 자기 계시, 즉, 진리의 수혈을 통해서 우리의 빚을 탕감 받고 하나님을, 내가 그 탕감을 받는 즉시 나의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채무자의 자리에서 내려 오시게 되겠죠? 그게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돌려드리는 거란 말이에요. 그 분이 나에게 그 은혜를, 빚을, 약속을, 언약을 주셨어요. 흘려 주셔서 내가 알았어, 깨달아 알았어요. 그걸 모르면 그 분은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채무자라니까요. 그런데 내가 받았어요. 받아서 해결이 됐어, 탕감을 받았어요. 그러면 그 분은 더 이상 나에게 있어서 채무자가 이니라 하나님이란 말이에요. 사랑이란 말이에요. 그 분은. 그 때부터.
그렇게 하나님을 채무자의 자리에서 해방시켜 드리며, 우리 자신을 용서하고, 그 용서의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율법적 채무를 변제받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또 거룩한 빚진 자가 되어서, 빚을 갚는 사랑의 매개체로 살게 만들어 줄 수 있어야 되는 거에요. 그들을 성도라고 한다.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셨던 겁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 보세요.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우리의 이웃의 죄를 자유롭게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이게 ‘아피에미’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용서의 이야기에요. 이것이. 자유롭게 형제의 죄를 풀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를 못 풀어준다는 뜻이에요.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그 빚 갚기에 의해서 진리의 말씀을 받고 그 용서를 받은 자는, 그 용서가 무언지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형제에게 자신을 용서하고,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말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으로 얽어매는 말을 전해주는 자가 있다면, 그가 어찌 하나님의 그 은혜, 하나님의 빚 갚기의 그 은혜의 그 사랑을 경험한 자이겠느냐? 이런 말이에요. 네 이웃이 너에게 해꼬지한 거 그거 용서 안하면, 하나님도 너 용서 안 한대. 그러니까 이를 악물고 용서해 버리는 거, 하나님은 그런 거 원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이를 악문 자들이 천국에 몽땅 다 들어간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평생 거기서 이를 간대니깐요.
자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의 결론인 줄 아세요? 일만 달란트 빚진 자. 그런데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멱살을 잡고 감옥에 쳐넣어버린 그 어처구니 없는, 그 어리석은 종의 비유, 천국의 비유, 바로 밑에 결론으로 붙어 있는 거에요. 일만달란트라는 것은 고대시대 때 아주 상상을 불허하는 액수라 그랬죠? 한 국가가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일년 동안 바쳤던, 나라가 바쳤던 조공이 800달란트니까, 일만달란트를 개인이 어떻게 갚아요? 못 갚는 돈이라는 것을 그냥 예수님이 예로 들은 거에요.그 때 당시의 사람들이 상상을 할 수도 없는 돈, 그 일만 달란트. 그런데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어떻게 빚을 졌는지 모르겠지만, 그 빚진 자가 채권자인 주인에게 뭐라 그래요? 한 번 보세요. 마태복음 18장 23~ 23 이러므로 천국은 (자, 천국. 섬김이라는 건 ‘바실레이아’가 섬기다, 통치하다는 말이지만, 섬기다라는 말이니까. 섬김이라는 건) 24 회계할 때에 일만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자 그게 그의 실존이에요.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게 없는 자. 이게 역사 속 아담들의 실존이라니깐요. 갚을 게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이게 하나님이 욥에게서 빼앗아간 겁니다. 그리고 그에게 진리 주신 거에요. 그가 이 땅에서, 이 역사 속에서 가치라고 갖고 있는 그것들 다. 이런 말이에요. 그걸 다 팔면 너는 나에게 빚 갚을 수 있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지금요. 그거 팔아봐야 얼마 된다구. 아니 자식, 마누라 팔아 봐야 얼마 받아요? 그런데 그거 팔면. 다 팔아 오면 빚 면제해 줄 게 이렇게 이야기한 거에요.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너 네가 가진 거 다팔아, ‘프토코스’,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나를 따라, 그러면 영생이야.'라고 이야기했을 때에, 그 ‘다 팔아’. 값진 진주를 찾아 다니는 진주 장사가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걸 사죠? 그 때 그 말이에요. 이게 ‘다 팔아’, 네가 여태까지 빚을 갚겠다고 네 소유로 갖고 있는 그 모든 율법적인 열매들, 다 팔아 내 빚 갚아 이런 이야기에요, 이게. ‘그럼 갚을 거야’라고 이야기 하죠? 그 때 그가 뭐라고 그래요? 마태복음 18장 26~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참아 주세요. 다 갚으면 될 거 아니에요.했다구요. 그걸 판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갚는다니까,참으세요’.그러는 거에요.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이 ‘크로노스’를 살아가는 이 세상, 이 땅의 아담들의 실존인 거에요. 이것이요. ‘아, 갚을테니까’. ‘내가 죽는다니까’. 그 때 이 임금이 그 나라,그 섬김, 하나님 빚 갚기가 무엇인지를 그냥 한 방으로 설명해 줍니다.)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냥 그 빚을 탕감해 줘요. 이걸 은혜라고 하는 거에요)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여기 불쌍히 여기다,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실 때 있죠? 민망히 여기사, 이게 다 ‘스플랑크니조마이’에요. 불쌍히 여기신다, 긍휼히 여기신다는 거에요, 긍휼의 마음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거반 죽은, ‘강도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할 때도 그 단어에요. ‘스플랑크니조마이’.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를 불쌍히 여겨’, 이것도 같은 말이고. 그러니까 이 불쌍히 여기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 불쌍히 여긴다니깐요, 그래야 살아요.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이 그 종에게 임하면, 그 종의 빚이 그냥 거저 탕감되는 거에요.그걸 천국, 하나님 나라의 섬김이라고 그래요. 구원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탕감을 받았다고 하는 자가 동관을 만나는데, 동관이란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그 동관도 빚이 있었어요.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종이 그 동관의 목을 잡았다 그러지요? 이 ‘프니고’라는 단어가 ‘숨막히게 하다, 질식시키다’는 말이에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숨, 호흡이라는 것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헤’라는 단어 자체가 ‘말’이란 뜻이에요. 소리, 말, 이런 뜻이죠.그러니까 숨을 못 쉬게 질식시켰다는 말은, 그 내면에 이런 말이 숨어 있는 거에요. 약한 말로 그를 숨 쉬지 못하게 죽이는, 그런 형국인 거죠. 목을 잡았다.
자신은 이미 구원에 이르렀다고 자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이 상대방의 빚을 탕감해 주기는 커녕, 잘못된 말로 그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율법의 감옥에 처넣어 버리는 그런 작태를 에피소드화 해 놓은 거에요. 주인이 나를 용서했대요. 일만 달란트 탕감을 해주었대요. 그런데 또 다른 빚진 자를 만나서는 그의 목을 졸라 감옥에 처넣어 버려요. 율법의 감옥에. 그 ‘프니고’라는 단어가 여기서 쓰였어요. 마가복음 4장 7절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떨기는 율법이죠?)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율법에 의해 기운이 막히다가 ‘프니고’에요. 이게 질식해 버리는 거에요. 율법은 사람들의 그 생명,호흡, 진짜 호흡인 ‘프뉴마’가 아니고 가짜 호흡이기 때문에, 그들이 숨을 못쉬고 질식해 버리는 거에요. 율법으로.그게 ‘프니고’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호흡을 주지 못한다는 거에요. 숨을 쉬지 못해요. 생명을 주지 못하고, 그를 질식시켜 버려요. 죽여버려요 오히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다고 하는 자가 그런 악한 말로 빚진 자를 감옥에 처넣어 버린 거에요. 임금이 그를 뭐라 그러죠? ‘악한 종’이라고 그래요. 아까 우리 바울의 이야기 속에서도, 그 악하다라는 말이 나왔었죠? 같은 말이에요. 그건 악한 거에요. 그게 악이라는 거에요.
아무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서 씨로 간직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용서하고,이웃들에게도 용서를 전하며, 그 빚을 탕감해주며, 그들에게 빚진 자로서의 자신의 빚도 탕감받는, 그런 서로서로 사랑의 빚을 진 자들로 살아야 되는 거에요. 그게 안되면 그는 악한 자에요. ‘포네로스’. 다음 주에 공부하겠지만, ‘다만 악에서 구해주세요’가 그 악이에요. 이 용서의 이야기가 왜 주어지게 된거죠? 베드로 때문이에요. 마태복음 18장 21~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490번?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의 죄를 얼마나 용서해 줘야 하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헵토 메쿤투케스 헵타’.(ἑβδομηκοντάκις ἑπτά) 이 말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이 아니라, 일흔, 70이라는 부사에요, 그건요. 그리고 칠 이라는 명사를 쭉 붙여 놓은 거에요. ‘칠십으로의 칠’이라는 거죠. 굳이 번역을 하자면, 칠십이라는 성격의 칠로, ‘아피에미’, 오늘 본문에 그 단어랑 똑 같아요. ‘용서해, 자유롭게 해줘’ 이런 말이에요. ‘쉬게 해 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칠이라는 건 안식의 숫자죠? 창세기의 칠, 그 숫자 이야기 하는 거에요. 당시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 그 칠을 어떻게 지내고 있었어요? 율법으로 지켜내고 있었죠? 그 칠을 율법으로 지켜내고 있었다니깐요. 십 으로,율법으로 칠 을 알아야 되는데, 이 칠이라는 걸 십 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거죠? 거꾸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거에요. 율법을 통하여 안식에 이르겠다라는 아담들의 욕망을 나타내 보여 주는 거에요. 그래서 칠 로 안식이 된니까? 칠 이면 됩니까? 라고 물은 거에요. 그 행간을 보면, 마침 베드로가 일곱 번이요?라고 하니까 주님을 그걸 받아서 당신의 이야기를 하시는 거에요. 너희들은 그 안식을, 그 칠을 율법으로 지키고 있잖아? 그 칠은 안된다는 거에요. ‘칠십으로의 그 칠’이어야 된다고 하시는 거죠.
그런데 이들은 구약에 능톤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았다니깐요. 여러분 칠십의 칠 이라는 게 어디에 나와요? 칠은 이레니깐? 하루, 이틀, 닷세, 엿세, 이레? 칠십이레 라는 말을 하신 거에요. 칠십의 칠. 이거 한 번 보세요. 제가 그 때에 숫자를 설명해 드릴 때, 성경에 나오는 숫자. 창세기에 칠(7)이라는 언약의 수, 안식의 수가 나온다 그랬죠? 그런데 이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어야 되는데, 이건(7) 우리가 몰라요 뭔지. 그 안식이 뭔지.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십(10),십계명, 율법을 주시죠. 율법을 주시는데, 이것을 갖다가 다섯 개, 다섯 개로 설명을 해주고, 주님은 이걸 두(2)개로 또 축약을 해주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산상수훈에서는 이걸 셋(3)과 넷(4)으로 설명을 해주죠? 살인, 간음, 거짓증거(3), 그리고 그걸 완성하는 게 사랑, 메시아(4), 이렇게 설명을 해준다 말이에요. 그래서 요게 되면 그게 칠(7)이다라고 설명을 해주신다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안 사람들이 12이라는 거죠, 그들이 아들이란 말이에요. 아들. 열둘(12)은 아들의 숫자니까, 베냐민, 이게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이라는 거고, 열둘의 벗번째는 누구에요? 르우벤. ‘르’가 ‘라’에서 온거니까, 아들을 봐라 내가 이제 아들을 설명해 준다. 그래놓고 열둘(12), 마지막에 베냐민, 이것이 아들이야. 그런데 그 아들이라는 단어가요, 이 단어가 송아지라는 뜻도 있어요. 황소의 새끼, 이런 말. 그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황소의 새끼, 이 송아지, ‘벤’, 이걸 잡았다라는 건 무슨 말이냐하면, 하나님이 그 육을 잡아서 죽여 버리고.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해요. 황소의, 진짜 그 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가 죽고 탕자가 살아나는 거거든요? 그거는 그 안에서, 그 탕자,둘째를 죽여 버리고 아들로 살려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베냐민,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 이게 열둘(12)이란 말이에요. 열둘. 그렇게 아들이 되면, 이들은 이 십(10)으로 이 칠(7), 안식을 안 자가 되는거죠? 그래서 십(10)으로 칠(7)을 안 자가 되면 (10×7), 이게 칠십(70)이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열두지파가 나와서, 거기에서 70 장로가 서게 되는거고, 열두(12) 사도가 나중에 70으로, 70명이 아니에요 거기보면, 원문에 보면 그들을 70으로 보낸다 그래요. 둘 씩, 짝으로, 70으로 보낸다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 70이라는 건 이 십(10)으로 칠(7)이 되는거지, 이 칠(7), 안식을, 이 열(10)로, 이걸로 도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러는 거에요. 용서라는 거, 안식이라는 건, 칠(7)입니까? 그가 알고 있는 건 율법(10)으로 칠에 당도하는 안식일을 열심히 지키는 것 밖에 없단 말이에요. 베드로가 알고 있는 건.
그때 주님이 그 이야기를 받아서 우리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우리 교회에게. 아니지, 그 칠(7)이 아니라 칠십(70)의 칠(7)이지, 그래서 부사(70), 명사(78), 이렇게 쓴단 말입니다. 그러면 칠십의 칠, 칠십 이레가 뭔지 알면 주님이 저 용서를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알게 되겠죠? 다니엘서 9장에 보면 칠십이레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다니엘서는, 유다가 BC586년에 망하죠?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하칠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이 바벨이에요., 바벨론의 바벨. 거긴 탑이라는 말이 없어요. 그냥 바벨이에요. 바벨론, 바벨 같은 단어입니다. 그 바벨론에게 유다가 망하고, 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 기록된 거죠? 다니엘서가. 거기는, 이세상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여러분 생각하시면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 세상의 왕들은, 느브갓네살이 다니엘한테 뭐라고 그래요? “내가 무슨 꿈을 꾸었다. 그런데 생각이 안나, 너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맞추고,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도 좀 해줘”.그래요. 그런 황당한 요구가 어디있어요. 그 말은, 여러분 꿈이라는 게,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면 꿈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성경이 꿈, 환상, 그러면 우리에게 허락된 이 유한한 세상, 우리의 인생을 이야기해요. 그걸 꿈이라고 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환상을 본다 그러죠? 그게 뭔지를 안다는 뜻이에요. 이상한 걸 본다는 뜻이 아니라.
요엘서에 나오잖아요? 그렇게 이 꿈 같은 이 세상을 사는데, 이 세상 왕들, 모든 아담들 이야기하는 가에요. 그 왕들은, 그 꿈이 무언지도 모르고,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너는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고, 그건 하나님이 이런 이유로 준거야 라고 설명을 해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나라에 유다가 잡혀와 있으니, 얼마나 속이 터지냐구. 답답한 거죠.
자 바벨, 그 바벨이라는 건 ‘바랄’이라는 단어에서 나온건데, ;섞다‘라는 뜻이에요. 섞는 것은 항상, 그러니까 누룩이 어디에 섞이면 항상 술이 나오죠? 술, 그러면 성경에서 섞인 것이에요. 섞여서 창조된, 창작된 어떤 것, 인간 세상의 어떤 것. 섞으면 다 율법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런 걸로 줬는데, 인간이 자기의 마음을 섞어 버리면, 인간의 소위 양심이라는 걸 섞어버리면, 그거 술이 된다니깐요. 인간들을 미혹하여 홀려 버리는 술, 섞은 것. 그걸 바벨이라 그래요. 그래서 거기에서 언어가 섞이는 일이 일어나는 거에요. 상징적인 거죠. 그러한 곳에, 그렇게 섞이면 거기가 심판이에요. 그곳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갑니다. 들어가 가지고, 거기에서 그 섞인 자들과 방불하게 살다가 어떤 은혜에 의해 이제 그들만 나오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들이 그 안에서 사는 그 기간이 70이레에요.그거는 이 역사 전체를 가르키는 겁니다.
다니엘서 9장에 보면, 그러니까 이 역사 전체가 우리가 포로로 사는 기간이에요. 여기가.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요. 칠십이레, 그 때가 되면 너희들이 풀려 날거야, 그 유다가 BC516년에 완전히 풀려나죠? 조금씩 조금씩 잡혀가다가, 조금씩 조금씩 풀려나서, 나중에 계산해 보면 70년이에요. 그래서 70년 포로생활 그러는 거죠. 하나님은 유다가 안식년을 지키지 않아서, 그 땅을 쉬게 만들기 위해 70년의 포로생활을 그들에게 허락했다고 그래요. 성경은. 그러니까 쉬어야 되는데, 너희들은 뭔가에 쫓겨서 쉬지 않고, 안식하지 않고 열심히 달려 버리면, 하나님은 그걸 심판하신다 그래요.
그래서 70년을, 그 땅을 쉬게 하세요. 당신 백성들의 땅을. 그런데 안식년은 7년마다 한번씩 돌아오죠? 그러니까 70×7. 70이레가 거기서 나온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70번의 안식년을 너희들이 어겼다. 그러니까 매년이 안식년이에요. 거기는 그 포로생활 전체가, 거기에서 그게 뭔지를 알면, 그들은 이 바벨론에서, 바벨에서 안식을 할 수 있다라는 거에요. 그게 뭔지 알면. 왜? 그게 안식의 기간이거든요. 70이라는 것 자체가.
안식이라는 건 너희가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너희에게 찾아 오는게 아니라, 내가 강제로 너희에게 너희 땅을 혼돈과 공허로 만들어, 텅비게 만들어서, 그 땅을 부정해 버림으로 너희의 안식이 오히려 완성이 되는거다를 보여주는 거에요. 그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너희에게 허락한 시간이 바로70이레라는 거에요. 그러면 그 안식의 희년이 오는 거에요. 그 희년은 50일 해서, 오순절, 그 날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역사가 끝나는 거에요. 육신으로서의 역사가 끝나는 거에요. 그게 70이레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주님께서 칠(7)로 용서할까요“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로 용서를 하라라는 게 무슨 말이겠어요? 인생은 율법으로 용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가 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에요. 이 모든 역사가 사실은 용서의 역사라는 거에요. 용서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역사인데, 그걸 아는 자는 나올 것이고, 모르는 자는 그 바벨에 가서 죽는다 그래요. 그 용서를 여러분이 알아 먹어야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바벨, 지긋지긋한 야차들의 세상에서, 안식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이들이 있다니깐요. 누가 뭐라고 그러던 말던.
그래서 그 바벨이라는 단어가 ‘섞다’라는 뜻과 함께 ‘기름붓다’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어요. 그 바벨,그 섞은 것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에게 기름이 부어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바벨이 뭐 나빠요? 성도들에게는 거기도 천국이라니깐요. 거기서 기름받으면 되는 거에요. 진리의 말씀을 받으면 되는 거에요. 그러면 거기서 용서가 일어나는 거에요. 그런데 심판 때에 왕 앞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기다려 주세요 내가 갚을게요’라고 나선 거에요. 나는 7로 할 거에요, 끝까지 그런 거에요. '그러면 너는 용서를 모르는 거야' 그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런 70이레에 쏟아 부어진 그 용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인 거에요. 성경에 그런 말이 나오죠? 하나님은 모든 자가 구원 받길 원한다. 그게 그런 말이에요. 하나님은 이 역사를 그 용서를 위해 만드셨다. 당연히 모든 이가 구원 받길 원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 못받아, 그걸 설명해 주는 거에요. 모든 자가 구원 받길 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보편 구원론을 이야기하셨다고 이야기 하는데, 천만의 말씀. 성경은 그냥 그렇게 몇 구절만 뽑아 가지고 자기 신학을 만드는데 사용하면 안되요. 사람이 만들어낸, 창작해 낸 엉터리 신학이란 말입니다. 그건.
자 그래서 그 임금이 그 70이레를 이해하지 못한 그 종에게 빚 탕감을 선언해 주었음에도 그것이 뭔지 모르고, 다른 이에게 빚 탕감의 복된 안식을 전해 주지 못하고, 그를 오히려 목 졸라 감옥에 가두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듣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다 진리가 됐다라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야 내가 너희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혹시 버림을 받는 자가 될까하노라."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도 바울이 진리를 알고 나서, '혹시 내가 이렇게 내 몸을 쳐서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을까?'라고 걱정했다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들이 다 듣는다고 해서, 그 듣는 것이 너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런 말이에요. 아, 실제로 그렇다니까요. 사람은요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확신으로 막 말할 때는, 그 확신에 자기가 넘어갑니다. 내가 그걸 확신하고 있는 줄 착각해요. 자기가 그 얘기를 말할 때는 그런대요. 내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멈추잖아요? 그게 자기의 마음이 되지 않은 자들은 그 때부터 불안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루터나 스펄젼 이런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 혹시 나 이렇게 써 먹기만 하고 지옥 보내는 것 아니에요?" 이런 의심에 흔들렸다는 것이 그런 연유에서 그런 거에요. 그 단순히 여러분이 여기 와서 이걸 듣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착각하시면 안되요. 그것으로 여러분이 여러분을 용서했는가? 그리고 그 용서를 남들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가? 자꾸 자기를 묵상하고, 상고해 봐야 해요, 나를.
그렇게 동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그를 용서해 주지 못한 그 자는 바벨에서, 그저 바벨이란 섞은 재료로 열심히 탑을 쌓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거에요. 그것을 하나님이 용서라는 것을 주었는데, 그것을 진리로 읽어 내지 못한 사람의 모형으로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같은 처지의 동관을 자유롭게 풀어주지는 못할 망정 감옥에다가 처넣는 자가 된거죠. 바울은 이 땅에서 그 바벨, 그 섞다라고 그랬죠? 바벨을 통하여, 다른 바벨, 그름부음이라 그랬어요?거기에 당도해야 하는 성도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로마서 15장 25절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케도니아와 이가야 사람들이 (이건 이방이죠?)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빚진 자가 그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오페일레테스’)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얼핏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신령한 것을 받았으니까 그들이 어려울 때, 육신에게 필요한 구제 헌금, 돈을 보내는 게 마땅한 것 아니냐? 이런 말로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이걸로 헌금을 착취하는데 자주 쓰는데, 그렇게 보이죠? 여기에 무슨 구제 헌금, 돈이라는 단어도 없고, 무슨 동정했다 이런 말도 없어요. 그냥 교제했다 라는 말이에요. 코이노니아란 단어에요.
그리고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이 ‘페네스’가 아니고 ‘프토코스’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율법의 중심이죠. 거기에 있는 ‘프토코스’,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이야기 하는 거에요. 절대적 가난. 그들에게 이방적인 어떤 것들이 가서 오히려 예루살렘 밖의 어떠ㄴ 것들이 가서, 그들을 섬기는 그 일을 하는 거에요. 그 일을 위해 내가 가겠다라는 그런 말이에요. 이것은요. 헌금들고 찾아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서 27절에서 섬김이 어떠한 방식의 섬김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요. 이걸 원문으로 보면은요, ‘빚진 자들은 이방적인 안에서, 어차피 우리는 이 땅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로 해석되지 않으면 그걸 이방적인 것이라. ’에뜨노스‘가 여기선 중성으로 쓰인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방인이라 해석하면 안된다니깐요. 그러니까 중성으로 쓰이면, 그건 이방적인 것이라고 해석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방적인 것 안에서, ’프뉴마‘, 신령한 것으로 교제를 하는 자들이란 거에요. 우리는 그 아랫 것들 갖고, 내 말 갖고 성경을 가지고, 그 예수를 이야기 하면서 그 안에서 그 신령한 것으로 전달해 주는 자들이란 거에요.
그게 빚진 자들의 마땅한 이란 단어도 빚갚다라는 뜻이에요. 마땅하다, 당연하다란 뜻이 아니라니깐요. 빚진 자들은 그렇게 이방적인 것 안에서 영적인 것들로, 신령한 것들로, 교제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 그 육신적인 것 안에서 진리로 전해주는 그 행위를 하는 그것이 빚 갚는 거야 라는 말이에요. 이 말이요.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 안에서,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 진리를 설명해 주면 여러분이 그걸로 빚 갚는거라니깐요. 그들이 용서받은 자요, 용서하는 자란 말이에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란 말입니다. 내 안에서 그 빚이 탕감되게 해 주세요. 용서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면 나도, 나를 용서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뭐 과거에 무슨 일을 했던, 뭐 어떤 사람으로 살았던, 너무 자부심 갖지도 마시고,거기에 너무 묶여 있지돟 마세요. 그건 교만한 것 보다 더 나쁜거라니깐요. 성도의 목적지가, 아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했더니, 그냥 주구장창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어 그냥. 아니라니깐요! 그래요, 내가 죄인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사랑으로 나를 의인 만들어 주었다.까지 가야지, 그냥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그러구 앉아 있으면은, 그래 너 죄인이야. 그럴거에요, 하나님이.(웃음) 누가 뭐래?
아니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그 은혜, 그 사랑을 퍼부어 주셔서, 내가 이렇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까지 가는 거지,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하고 끝? 그래 너는 죄인이니까 지옥가라 그러실거아니에요.(웃음) 하나님이. 자 그게 ‘오페일레테스’, 빚을 갚는 것이라는 거에요.
그 ‘셋’이라는 떡을, 예수라는 문을 두드려서 받아낸 그 친구가, 자기를 그 떡으로 배불린 다음에, 용서한 다음에, 다른 그 떡을 필요로 하는 ‘아이테오’, 구하는, 빚 갚으세요 하는 또 다른 친구에게 전해주는 그 이야기가, 그래서 이 주기도문 밑에 붙어 있는거란 말이에요. 그게 용서야. 그게 떡 이야기야, 이렇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이고, 진정한 교제, 코이노니아이며, 그것이야 말로 성도의 사랑인 거에요.그런 면에서 이렇게, 우리가 구역 같은 것 나누어 주지 않았는대도 불구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바로 그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하는 그런 것들, 이건 정말 바람직한 거에요. 그러니 자주 모이셔서 서로서로 이렇게 빚진 자로서 그 사랑을 나누시면 됩니다. 그냥 교회 온 사람들 나가는 뒷구멍 막는다고 어떻게 조직을 만들어서 씨줄, 날줄로 엮어서 관리를 해야되라는 의미에서의 구역 이런 것은, 하나도 필요없어요.
그걸 관리해서 뭐할 거에요. 아닌 사람들은 빨리빨리 나가야지 뒤문으로.. 그러니까 그 진리에 연합이 되는 그런 이들끼리 모여서, 그 사랑의 나눔을 하시면 됩니다. 따른 건 필요없어요. 그러니까, 그래서 주님이 주인의 것으로 다른 이들의 빚을 막 탕감해 주는 그 불의한 청지기를, ‘어 너 지혜있다’그러는 거에요. 그게 지혜야. 주님의 것,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걸로 자꾸 이렇게 용서해 줘, 탕감해 주는 거에요, 빚을.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혜있어 이러신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그 일 하시면 되요. 많이 용서하시며 사십시오. 많이 탕감해 주며 사세요. 그걸 하나님이 빚쟁이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로 옮겨 드리는 삶이라고 하고, 그게 영광을 돌리는 삶, 영화롭게 하는 삶, 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엉뚱하게 섬겨서 사랑할려고 하지 마세요.
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조옵시고. 잘 아시겠죠, 이제? 다음 주에 그 다음 것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빚 갚음의 사랑, 빚 갚음의 은혜로 우리의 빚을 탕감 받았고, 우리를 용서했습니다. 그 용서,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또 흘려 주어 빚진 자로서의 나의 빚을 또 갚게 하시고, 그들이 그들의 율법의 빚을 탕감 받는 기적이 일어나는 그런 서머나 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산상수훈(41).하늘 양식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 ,- 용서...강해말씀기록...
바울은 이 땅에서 그 바벨(섞다)을 통하여
“다른 바벨(기름부음)” – 거기에 당도 해야 하는 성도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롬15:25-27)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프토코스(πτωχός/G4434/절대적빈곤)
기쁘게(유도케오εύδοκέωG2106/좋게생각하다,기쁨을 갖는 좋은 것이 되다) 얼마를
유εύG2095/좋은+도케오δοκέωG1380/생각하다.믿다..
동정(코이노이아κοινωία/G2842/교제)하였음(포이에오ποιέω/G4160/되게 하였다.간직하다.)이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신령한 것을 받았으니까
“그들이 어려울때에 육신에게 필요한 구제헌금(돈)을 보내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니냐?”
- 이런 말로 보이지 않나요?
그래서 헌금을 착취하는데 자주 쓰이는데 - 그렇게도 보이죠?
여기에 구제, 헌금 돈이라는 단어도 없고 무슨 동정했다는 단어도 없어요.
그냥 교제했다. “코이오니아κοινωία(교제)” 란 단어 입니다
여기에 예루살렘에 가난한 자들이
“페네스(πένης/G3993상대적가난)”가 아닌 “프토코스(πτωχόςG4434/절대적빈곤)” 입니다
예루살렘은 율법의 중심이죠? –
거기에 있는 프토코스 심령이 가난한(절대적 가난) 자를 이야기 합니다.
그들에게 이방적인 어떤 것들이 가서, 오히려 예루살렘 밖의 어떤 것들이 가서
그들을 섬기는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 “그 일을 위해 내가 가겠다”라는 말입니다.
헌금 들고 찾아 가겠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이방적인 것으로)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가졌으면(코이노네오κοινωνέωG2841/교통하다)
육신의 것으로(육신적인 것 안에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빚을 갚다/옵헤일로όφέιλω/G3784)
그 섬김이 어떠한 방식의 섬김인지 말을 하지요.
이것을 원문으로 말하면?
빚진자 들은 이방적인 것 안에서 어차피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로 해석 되어지지 않으면
그걸 이방적(중성/- 이방인이라고 하면 않됨)이라는 것입니다.
중성으로 씌여지면 이방적인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적인 것 안에서 퓨뉴마(신령한) 것으로 교제를 하는 자들이란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래 것들 가지고, 내 말 가지고, 성경을 가지고 그 예수를 이야기 하면서
그 안에서 그 신령한 것으로 전달해 주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게 빚진자들의 마땅하니라(= 빚을 갚다/옵헤일로όφέιλω/G3784)
-“마땅하다”, “당연하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빚진자들은 그렇게 이방적인 것 안에서 영적인 것들로, 신령한 것들로 교제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 육신적인 것 안에서 진리로 전해주는 그 행위를 하는 것
- “그것이 빚 갚는 것이야”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 진리를 설명해주면 여러분들이 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들이 용서 받은 자요 봉사하는 자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런 말입니다.
내 안에서 그 빚이 탕감되게 해주세요. 용서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도 나를 용서 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 합니다.
여러분들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했던, 어떤 사람으로 살았던, 너무 자부심 갖지도 마시고
거기에 너무 묶여 있지도 마세요. 그건 교만한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성도의 목적지가“아! 나는 죄인 입니다!”를 아는 것이라 했더니
그냥 주구장창 “나는 죄인 입니다. 나는 죄인 입니다”에 머물러 있습니다.아닙니다!!!
“내가 죄인이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사랑으로 나를 의인 만들어 주었다!” 까지 가야 됩니다.
그냥~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에 머물고만 있으면
– 하나님께서 그래 너 죄인이야! 라고 하실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그 은혜를 퍼부어 주셔서
“내가 이렇게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까지 되었습니다”.라는 데 까지 가는 자가 되어야지
“내가 죄인 중에 괴수 입니다”- 끝? =그래 넌 죄인이니까 그럼 넌 지옥가라!
– 하나님이 그러실 것 아닙니까!
그것이 빚을 갚는 것 입니다
그 세떡이라는 그 떡을 예수라는 문을 두드려 받아낸 그 친구가 자기를 그 떡으로 배불린(용서)
다음에 다른 그 떡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아이테오(/빚갚으세요)라고 구하는
또 다른 친구에게 전해주는 그 이야기가 - 그래서 이 주기도문 밑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용서야!. 그게 떡 이야기야!” – 이렇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이고 진정한 교제(코이노니아)이며 그것이야 말로 성도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서 구역 같은 것 나눠주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바로 그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하는 그런 것들은 정말 바람직한 것들인 것입니다.
자주 모여서 서로서로 모여서 그 사랑을 나누시면 됩니다.
그냥 교회에 몰려온 사람들 관리차원의 구역모임 이런 것 들은 하나도 필요 없어요 !
관리해서 뭐하실려구요?
그러니까 그 진리에 연합이 되는 그 분들끼리 모여서 그 사랑의 나눔을 하면 됩니다.
(다른 것 필요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주인의 것으로 다른 이들의 빚을 막 탕감해주는 불의한 청지기를 “지혜가 있다!
(그게 지혜야)”라고 하신 겁니다.
주님의 것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으로 자꾸 용서해줘, 마구 탕감해줘
- 하나님이 “그거 지혜 있어!”-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 일 하시면 되요.
많이 용서하시고 사십시요. 많이 탕감해주면서 사세요.
그걸 하나님을 빚쟁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로 옮겨드리는 삶 이라고 하고
그게 영광을 돌리는 삶, 영화롭게 하는 삶 이라고 하고 이것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 하는 것이지요
엉뚱하게 섬겨서 사랑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잘 하실 수 있겠지요? 이제부턴
기도하겠습니다.!!!(목사님의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빚 갚음에 사랑 , 빚 갚음에 은혜로
우리의 빚을 탕감 받았고 우리를 용서했습니다.
그 용서,
그 사랑을
다른 이 들에게 또 흘려주어
빚진자로서의 나의 빚을 또 갚게 하시고
그들이 그들의 율법의 빚을 탕감 받는 기적이 일어나는 그런 서머나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사랑의 교제,
그러한 은혜흘림의 교제,
그것이 충만한 서머나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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