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산상수훈

산상수훈(40) 그 양식에 배고픈 자, 세상에서 굶어 죽다 (마6:11)

은바리라이프 2013. 10. 17. 09:30

산상수훈(40)

그 양식에 배고픈 자, 세상에서 굶어 죽다







(6:11)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가 구해야 할 일용할 양식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일용할 양식은 위에 있는 양식, 안식의 나라의 양식이라 했습니다

그 양식은 고기적 양식이어서는 안 되고 떡으로서의 양식이어야 한다고 했지요

고기는 애굽에서 나올 때 한번 먹고 마는 것이고, 광야에서는 떡을 먹어야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기를 저녁의 양식이라 하시고 떡을 아침의 양식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저녁의 양식으로 아침이 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저녁의 양식만을 고집하면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런 연유에서 하나님은 고기를 원하는 이스라엘에게 저녁의 양식인 고기를 내려 주시고는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저주를 퍼 부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에피소드를 통하여 그 떡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구해야 하는 내일의 양식은 바로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말씀이 양식으로 주어져야 우리는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의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이름(말씀)이 거룩한(깨끗한) 자가 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섬김(말씀으로 섬김)을 받아 그분이 섬기는(통치하시는) 나라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 ‘나’라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주기도문 서론의 그 상태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양식이 바로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늘의 양식을 올바로 받아먹게 되면 그 자리에 용서가 일어나고(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시험과 무관한 자가 되며(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악과도 상관없는 이(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의 핵심 키는 바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양식’인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바로 그 양식을 건네주러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진짜 생명을 위한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죽은 아담을 살아있는 아담 ‘그 사람(하 아담)’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양식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주린 자로 살게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4:32~34)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 이니라


이 땅의 양식을 내미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하늘의 양식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그 양식은 하늘의 뜻을 행하고 하늘의 일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양식이랍니다. 주기도문의 언어로 옮기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잖아요?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진리’라고도 하셨고요. 그러니까 그 양식은 진리의 말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의 양식은 ‘세메론(오늘날)’의 양식입니다. 그 단어는 ‘호’라는 관사와 ‘헤메라’라는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단어라 했지요? 그래서 직역을 하면 ‘그 날들에 따른 양식’이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그 날들에 따라 내게 양식을 주세요.’라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건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라는 양식을 부어주시는 단계가 세단계입니다.

첫 번째 단계가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고기로서의 양식이고(율법, ), 

두 번째 양식이 광야에서 먹는 무교병, 즉 떡이라는 양식이며(예수), 

그 양식은 오순절 이후 성령의 때에 진리로 우리에게 먹여지게 됩니다. 그게 세 번째 날의 양식입니다


물론 그 셋은 다 같은 것입니다. 성도는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대하며 하늘의 참 양식인 진리의 말씀으로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율법), 광야에서 쏟아지던 하늘의 만나, 그리고 그것과 함께 먹던 무교병이라는 떡, 그리고 성막 안에 진설되어 있던 진설병 등을 통하여서도(예수) 하늘의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성령의 때에는 마땅히 그 진리의 말씀을 마음으로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기와 떡과 성령, 이렇게 각각의 날에 쏟아지는 다른 형태의 떡을 완성의 떡, 진리의 떡으로 먹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그런 말이 ‘오늘날(세메론)’이라는 단어가 가진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아브라함 같은 이는 쪼개진 제물의 의미를 진리의 씨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고, 모세는 광야의 만나를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할 때에도 무엇을 먹고 탈출합니까? 무교병, 즉 광야의 떡을 먹고 탈출을 합니다. 아직 율법이 주어지기 전인데 그들이 그 날들에 따라 주어지는 양식을 전부 진리로 받아먹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세 날의 떡을 완성 떡이라 말하고 주님은 그 떡을 세 떡이라고 표현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주기도문의 병행 절인 누가복음 11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11:2~5)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주님께서 주기도문을 말씀해 주신 후 그 말씀에 붙여서 비유를 하나 말씀하십니다. 5절의 ‘또’라는 말이 ‘카이’라는 접속사입니다. 앞의 문장과 이어지는 한 맥락의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 비유에는 세 친구가 등장합니다. 여행 중에 있는 친구와 그 친구에게 먹을 것을 전해주는 친구, 그리고 그 떡을 가지고 있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고, 구하고 있고, 전해주는 떡이 ‘세 떡’입니다. 그건 단순히 세 덩이의 떡이라는 말이 아니라 완성의 떡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주기도문의 맥락에서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성도가 하늘의 양식인 진리의 말씀을 받아 친구에게 용서를 전하고, 시험을 파하며, 악에서 구하는 ‘프로슈코마이(진리를 흘림)’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그것을 기도의 핵심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떡을 빌리러 간 친구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친구에게 세 떡을 빌려서 그 세 떡이 필요한 다른 친구에게 전해주는 이 그림은 진리를 구하고 간직하고 전해주어야 하는 우리 성도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건 진리를 마음으로 품어 하늘 백성이 되는 성도의 신앙 여정을 그려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떡이 필요한 자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그 떡을 간절히 구하는 자의 상태로 진일보하게 되고, 그 세 떡을 받아서 열심히 먹고 그 떡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전달해 주는 자로 살게 되는 겁니다. 물론 그 떡의 일차적 발원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로 일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소리를 빌려 전하시고 우리의 몸을 빌려 표현을 하십니다


따라서 그 떡을 옳게 받은 성도는 그 떡을 구하는 자에서 시작하여 그 자신이 떡을 전해주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떡에 의해 용서가 일어나고, 시험이 파쇄 되며, 악이 삭제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프로슈코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 떡을 어떻게 구하라고 합니까? ‘강청’하라고 합니다. 그 ‘아나이데이아’라는 단어는 ‘뻔뻔함’이라는 속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내 놓으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 단어를 바로 밑에서 ‘구하라(아이테오)’로 받습니다.



(11:9~10)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 이니라


마땅한 채무변제를 요구하는 채무자의 요구처럼 뻔뻔스럽게 구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왜요? 그거 없으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프토코스)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난민촌에 식수 차나 식량 배급차가 들어가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그 식량 배급 차에 매달리는 그런 형국으로 진리의 말씀에 갈급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거긴 체면 같은 거 챙길 여유가 없잖아요? 그건 우리가 요구하기 전에 이미 주시기로 언약이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요구해야지요.



(6:8)

8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보세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구할 것을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목표지점만 제대로 정하면 기도 응답은 100% 되어 지는 것입니다.



(16:23~24)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요구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늘의 양식을 진리의 떡으로 받아먹는 그 날에는 이전에 육신적으로 구하던 것을 구하지 않고 다른 것을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단어가 ‘아이테오’입니다. 제대로 된 것을 마땅하고 뻔뻔스럽게 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구하는 모든 것을 무엇으로 주신다고해요? ‘내 이름’으로 주신다고 합니다. 내 이름은 내 말이라는 말이지요? 구하는 모든 것을 ‘말씀’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진짜 양식이니까요


그날(진리의 성령이 오시는 날)이 되기 전에는 말씀으로 구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어 말씀(내 이름)으로 구하면 반드시 받게 되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달라는 것입니다성도는 그렇게 다급하고 뻔뻔스럽고 마땅하고 간절하게 하늘의 양식을 가진 이에게 그것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진 이는 그러한 구함 앞에 기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1:8)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여기에서 ‘벗됨’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필로스’입니다.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의 친밀함, 호감, 우정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달은 이들이 가장 먼저 자기가 가진 그것을 나누어 주고 싶은 상대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가족, 친지, 친구, 이웃, 등등. 그런데 그런 관계 속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을 전해보면 아무리 친밀한 관계가 바탕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잘 안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그러한 벗됨(육적 사랑의 관계)을 근거로 하여 전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없으면 난 죽습니다.’라는 각오로 달려드는 이들에게는 스펀지에 물 스며들 듯 잘 스며듭니다. 아니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반드시 그 양식에 주리고 목마른 자리로 인도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이 떡으로 떨어지면 진리로 스며듭니다.



(7:9)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돌이 뭡니까? 돌비에 새겨진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의 예수를 돌이라 합니다. 구약에서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묘사할 때 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 돌이 떡으로 오셨지요?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린 떡’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떡을 누가 먹었나요? 아무도 안 먹었습니다. 먹긴 먹는데 육신의 배를 불리는 떡으로 먹습니다.



(6:26~27,32~33,48~51)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 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이로라 하시니라


26절의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다’라는 어구에서 ‘보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호라오’입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표적으로 내린 것이라는 말이고 그 만나는 단순히 떡이라는 표적으로만 보면 안 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 떡은 ‘호라오’라는 안경 너머로 이해가 되어 져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만나를 인간들의 육신을 살리고 살찌우는 떡(율법)으로 먹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해요? 멸망입니다


27절의 ‘썩는 양식’이 직역을 하면 ‘멸망하게 하는 양식’이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나’라는 존재의 유익이나 성숙에 필요한 것 정도로만 받아버리면 그 말씀이 그를 멸망시키는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9절에서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다’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만나를 모세가 주는 율법으로 먹으면 그렇게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똑같은 만나를 말씀으로 먹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그 말씀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떡은 반드시 진리의 말씀, 즉 성령으로 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 떡을 돌(율법)로 주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저주요 심판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라면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로 주냐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품은 아들은 떡을 주면 진리로 받아먹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성경 말씀을 전부 돌(율법)로 전해 주고 있는 것 같이 보여요. 그 돌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서로 마구 돌팔매질을 해 댑니다. 말씀은 그렇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건 나를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어야 하는 것이지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선악의 도구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고기, 즉 돌은 떡으로, 떡은 진리의 말씀으로 완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셋은 모두어 하나인 것입니다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우리를 정결케 하는 물로,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해갈하는 생수로, 그리고 그 물은 성령으로 완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


이렇게 피는 물로, 물은 성령으로 완성이 되어 그 셋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5:7~8)

7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8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그렇지요? 그래서 주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물로 만들어 내셨던 것입니다. 그게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입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의 신랑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피의 포도주를 내는 신랑이고 다른 신랑은 물 포도주를 내는 신랑입니다. 둘 다 신랑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신랑은 피의 포도주가 아닌 물 포도주를 만들어서 잔치집 사람들을 먹입니다. 유대의 관례에 의하면 잔치집의 포도주는 신랑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잔치가 시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처음에 나왔던 포도주가 떨어진 포도주 항아리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굳이 물을 담는 정결 예식을 행하는 여섯 개의 항아리를 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물이 없어요. 율법은 절대 사람의 더러움을 씻어내지 못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주님은 거기에 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물 포도주(휘도르 오이노스)를 만드십니다. 둘 다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물로 된 포도주가 아니라, 강세가 ‘물’에 있는 ‘물 포도주’라는 의미입니다. 포도주는 죄를 씻어내는 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물이 바로 성령인 것이고요.



(2:9~10)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제물의 피라는 포도주보다 예수의 말(진리의 말씀)이라는 물 포도주가 훨씬 좋은 포도주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피는 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피 자체가 섬김과 칭찬의 대상으로 내 밖에 존재해 버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물은 반드시 성령에 의해 진리로 깨달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전체의 이야기가 바로 예레미야(31)서나 에스겔서에 기록된 새 언약의 내용인 것입니다.



(36:21~31)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 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 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29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30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이름(말씀)이 더러워지면 하나님은 물을 뿌려서 깨끗하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그 물은 새 영, 즉 하나님의 신(루아흐)을 마음에 두는 것이랍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기근이 해결되고 다시는 그들에게 기근이 임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피는 물로 물은 성령으로 완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게 바로 영적 기근을 해결하는 하늘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첫째 날을 원문으로 볼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 하신다’는 어절을 봤었지요? 그게 ‘루아흐 엘로힘 알 파님 마임’이었습니다. (진리)의 나타남을 가지고 성령이 일을 하셔서 땅으로 하늘의 물을 알게 하시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이 될 수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절대로 피에 머물러 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떡과 돌 이야기처럼 물이 피로 되돌려지면 안 되는 거지요? 그런데 애굽에서 물이 피가 된 적이 있어요. 애굽에 내린 첫 번째 재앙이 물이 피가 된 사건입니다. 그건 그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의 내용이 바로 물이 피로 주어지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재앙이 맨 앞에 제목처럼 등장했던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으로 주어지는 애굽의 현실은 그러한 재앙의 현장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애굽의 저주는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 그 고기의 피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고기’입니다. 율법과 인본에 머물면 그게 바로 저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첫 번째 재앙 이후의 재앙들이 전부 양식을 파괴하는 것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양식이 되지 못하고 율법이 되어 버리면 그게 바로 개구리 소리요, 기근의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그 열의 재앙이 말씀(십계명)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열의 계명이 율법에 머물면 애굽의 재앙이 되는 것이고 그 열로 약속을 깨달아 알면 그 사람들이 약속이 되어 그들의 땅, 즉 약속들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이 피가 되는 표적 앞에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어 애굽 술사들의 뱀 지팡이를 전부 먹어 버리는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율법을 먹어 버리고 진리의 아들로 낳는 그런 형국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러한 연유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애굽에서 나온 이들이 유월절 고기와 함께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7의 날 동안 무교병만 먹습니다. 유월절 고기, 즉 어린양의 피는 떡으로 먹어야지 고기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이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14:12)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 무교절의 첫날입니다. 유월절의 내용이 무교절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뭉뚱그려 유월절이라고도 하고 무교절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둘은 같은 내용을 하고 있는 다른 절기라는 그런 말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절기가 다 한 가지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무죄한 어린양이 피를 흘리고 죽는 날이고 그 양의 고기를 먹는 날입니다. 그리고 무교절은 사흘간 땅에 묻어 두었던 누룩 없는 떡(무교병) 7일간 먹는 절기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그 둘이 정확하게 같은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무교병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만나를 대표합니다. 그리고 그 두 절기는 성령이 강림하는 오순절과도 그 내용을 같이 합니다. 그러면 이제 그 떡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들어보세요성경은 무교절을 지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2:17)

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 지니라


이스라엘이 무교절을 지키며 무교병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뭐라고 해요? 너희가 애굽에서 나왔으니 이제는 애굽의 고기가 아닌 광야의 떡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광야로 나온 사람이 애굽의 고기, 애굽의 피로 돌아가면 그게 곧 뭡니까?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누룩의 떡, 즉 애굽의 떡(고기)을 먹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성 밖으로 쫓아내 버린다는 그런 말입니다.



(12:15)

15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 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그래서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에는 집안이나 가게에 누룩을 제거하는 의식을 행합니다. 가게에서도 누룩이 들어간 빵은 흰 천으로 덮어 놓고 팔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집안 곳곳을 샅샅이 뒤져서 누룩이 들어간 떡을 찾아오게 해서 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누룩을 제거하는 의식을 행합니다. 그 누룩은 애굽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애굽의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율법을 가리킵니다.



(16:11~12)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는데 그 누룩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 즉 율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교병이라는 것은 말씀을 율법이 아닌 진리로 받아 생명의 양식을 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반드시 자랑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고전5:6~8)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유월절 양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에 이른 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행위로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룩 없는 떡은 자기 자랑을 몰수해 버리는 떡입니다. 그래서 그건 맛이 없어요. 아담들의 입맛에는 누룩이 들어간 유교병이 훨씬 맛이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보편적 자존심을 살려주는 떡이고 존재의 만족과 의미를 찾게 해주는 떡이거든요. 그런데 그 떡, 그 고기는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고도 부르십니다.



(16:3~4)

3 유교 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 이니라

4 그 칠일 동안에는 네 사경 내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 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어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며


무교병을 고난(오니)의 떡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고난의 내용이 ‘애굽에서 나옴’입니다. 육신의 세상인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에게는 ‘고난’으로 체감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떡은 애굽의 고기와는 다른 누룩 없는 맛없는 떡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광야에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고난의 떡이 되는 것인지 설명해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무교절에 먹는 무교병이 히브리어로 ‘마짜’입니다. 그 단어는 어원을 추적해 올라가보면 ‘빨다, 흡수하다, 묻어두다, 장례를 지내다’라는 여러 가지 뜻으로 흘러 내려옵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유대인들이 무교절에 사흘간 그 떡을 묻어두었다가 먹는 것은 예수라는 유월절 양이 유월절에 죽임을 당한 뒤 사흘간 땅 속에 갇혀 있다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활하실 때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어린양을 장사지내어 땅에 묻으면 그 누룩 없는 떡은 땅의 죄를 3으로 전부 흡수해 버리는 형국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먹게 되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7의 기간 동안에 무교병을 먹는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우리를 살리는 양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자신의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바로 고난(오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의 ‘애통’이 ‘펜도스’인 것입니다. 그 단어는 ‘파스카(유월절)’에서 나온 단어인데 그 단어를 아람어로 바꾸면 ‘페싸흐(유월절)’가 됩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는 자는 복이 있는 자인데(단순히 그 죽음을 칭송하고 기념하는 수준이 아닌) 그 복은 이 세상에서 ‘애통’으로 나타난다는 그런 말입니다. 왜요? 그 유월절 어린양 안에서 내가 죽는 경험이 바로 사흘간 묻어 두었던 무교병을 꺼내 먹는 것이니까요. 오직 그것만이 나의 양식임을 고백하는 것이니까요. 나의 자기 부인.



(12:39~40)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애굽은 나타난 것, 즉 표적만 있는 곳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애굽의 모습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칭하십니다. 그들을 그 악하고 음란한 곳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당신이 밤 낮 사흘을 땅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우리 성도와 함께요. 그게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먹는 무교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떡은 진리의 말씀인 것이고요. 그리고 그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먹은 이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그 죽음을 광야에서 죽게 되어 ‘애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광야로 나오는 길에 홍해가 갈라지는 상징적 사건이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홍해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애굽화를 죽여 버리시는 사건이었습니다. 홍해에 빠져죽는 애굽 군대는 이스라엘의 몸에 젖어 있던 애굽의 수치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6:26)

26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여기에서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라는 어구가 ‘군대로 애굽 땅에서 빼내라’는 말입니다. 왜 빼내요? 죽이려고요. 그래서 하나님이 일부러 이스라엘을 홍해로 몰고 가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까운 길을 놔두시고 일부러 이스라엘을 홍해로 몰고 가셨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속의 애굽을 단체로 몰살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죽이시는데 말씀의 물을 터뜨리셔서 죽여 버리십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 때 깊음의 샘이 터진 사건과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 정확하게 같은 단어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로마서 강해 때 설명해 드렸었지요? 그 깊음(테훔)이 뭐였습니까? 위의 물을 설명하기 위한 아래의 물이었습니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역사 속에 나타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 때, 기식 하는 것들이 그 터진 물(말씀)에 의해 다 죽은 것과 홍해가 갈라져서(바카) 애굽의 군대가 전부 몰살당한 것은, 구원의 여정 동안에 삭제되고 부정되는 우리의 육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유월절 사건 때 그 어린양의 죽음 안에서 이미 예표가 되었던 것이고, 광야의 무교병으로 다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0:1~3)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보세요. 모세에게 속하여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하고 그것을 신령한 식물()을 먹는 사건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그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는 것이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2:12~15)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2절의 ‘함께 장사한바’라는 단어가 ‘쉰답토’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함께 묻히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이 그리스도와 함께 묻힌 사건이고, 그것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과 함께 도륙당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죽여서 살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의문에 쓴 것(율법)’을 도말해 버리고 제해 버린 것이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율법으로 사는 우리의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홍해를 건넌 사건이고, 예수와 함께 3의 완성을 위해 땅에 묻힌 것이며, 그것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수와 함께 죽는 우리의 신앙여정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3이라는 떡을 제대로 먹는 자들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6:3~7)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 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3이라는 떡, 진리의 물, 그 세례로 말미암아 죄의 몸은 이미 멸해졌습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그 육의 종노릇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의 자랑에만 몰두하며 살던 그 삶에서 돌이켜 세상이 칭찬해주고 떠 받들어주는 그런 ‘나’를 만들려 전력질주 하던 그 삶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그 존재 자체로 의롭다 인정받은 자들이니 그러한 세상의 경주에서는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세상 경주 포기의 자리가 아픕니다.


우리 아버지가 주시는 하늘 양식은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양식입니다. 그리고 그 양식은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기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구원을 받는 이들인 것이지 우리의 열심과 수고와 노력에 의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55:1~3)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여기에서 젖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히브리어 ‘할라브’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헬레브’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최상의 기름’이라 번역해야 옳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지칭할 때에도 그 ‘하라브’라는 단어를 씁니다. 기름과 꿀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꼭 넣어야 할 것이 기름과 소금과 물과 포도주이고 절대 넣어서는 안 될 것이 꿀과 누룩입니다


기름, 소금, , 포도주는 당연히 말씀인 것이고 꿀과 누룩은 인간의 입맛을 돋우는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둘은 원래의 것을 변질시키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름으로 받는 이들은 이 세상을 약속의 땅으로 살게 되는 것이요, 그 말씀을 꿀로 받는 자들은 그 땅을 가나안(어두운 세상, 장사하는 세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서 젖은 떼어야 할 것이지 계속해서 먹어야 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젖을 떼자 아브라함이 잔치를 벌이는 그림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이고, 시편 기자도 젖 뗀 아이의 평온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며(131:2), 이사야도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아이를 젖 뗀 아이(11:8)라 묘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젖을 떼다’라고 번역이 되는 단어가 ‘가말’이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의 의미는 ‘성숙된 말씀으로 가르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숙한 말씀, 완성의 말씀으로 주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젖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서에서 성숙하지 못한 교회를 향해 어린아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그들에게 먹일 것은 젖이라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고전3:2) 히브리서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5:12~14)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보시다시피 젖은 성숙한 성도가 먹을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을 먹이기 위해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아래의 것이 젖입니다. 성도는 어느 순간 그 젖을 떼고 단단한 음식인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로 와서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말은 진리의 물, 말씀을 포도주와 기름으로 값없이 먹으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양식이 아닌 것에 값을 지불하며 여전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그 포도주와 기름을 ‘언약의 말씀’이라고 다시 한 번 재확인까지 시켜주십니다. 따라서 진리의 말씀은 절대로 인간의 육신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말씀도 덧 붙이셨습니다.



(14:21)

2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 지니라


‘스스로 죽은 것’과 ‘어미의 젖’이 대조되고 있지요? 여기에서의 어미의 젖도 ‘하라브 엠(어미에게서 나오는 말씀이라는 기름)’입니다. 스스로 죽은 것은 로마서 강해 때 설명해 드린 것처럼 ‘예수’입니다. 크로노스의 역사 속 예수는 우리가 먹어서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 예수는 그리스도의 영, 즉 말씀이라는 기름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셔야 우리의 양식이 됩니다


그런데 그 어미에게서 나오는 말씀으로 무엇을 삶지 말라고 해요? 염소 새끼를 삶지 말라고 합니다. 그 염소 새끼(게디)라는 단어는 ‘가드’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인데 그 단어가 ‘바벨론의 신, 행운의 신, 그 신의 군대’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어미의 젖, 즉 말씀으로 자신의 양식인 풍요와 행운이라는 신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이 현실 속에서 살게 되는 천국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던 것입니다.


(11:9~12)

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10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애굽이라는 땅은 우리가 열심히 농사짓고 추수하여 우리의 곳간을 채우는 땅이라면 이 세상 속에 들어와 있는 약속의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은혜의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진짜 하늘의 양식을 받아먹은 이들은 그 떡을 나누어주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실 이 땅의 진짜 왕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산 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양식을 소유한 사람이니까요. 그러한 성도의 모형이 요셉입니다.



(41:55~57)

55 애굽 온 땅이 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 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그렇지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진짜 양식을 소유한 하늘의 왕으로 사시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이 세상 다른 것으로 배부른 세상 부자로 사시길 원하십니까? 당연히 하늘의 왕으로 사셔야지요? 그러면 구하세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