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37)
이름이 거룩히 되게 하소서
(마6:9)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는 지난 주일에 로마서 8장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하늘의 초월적 존재로 살아야 할 자들이 그 초월과 결별하고 이 땅의 비 초월 속에서 하늘의 그 초월적 생명을 구현해 보려고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숭배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 만들어 입기요, 바벨탑 쌓기요, 율법 지킴이요, 성전 섬김이요, 희생제사인 것이라 했지요? 그리고 그 숭배의 근저에는 두려움과 공포라는 무시무시한 감정이 숨어 있다는 것도 아울러 공부를 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경고하십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이 그저 과거의 사건 속에서만 인식이 되고, 그 하나님은 그 과거의 사건을 근거로 미래에 만나 뵐 어떤 분정도로만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그 진리와 분리된 자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현재의 나’와 상관없는 그 과거의 예수는 나의 구세주(메시아,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것이고, 나의 미래도 보장해 줄 수 없는 그런 존재일 뿐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신을 지옥에 보내실 수도 있는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군대 귀신들린 돼지 떼의 에피소드 속에서 그 귀신(악한 영, 율법)이 주님에게 뭐라고 합니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를 괴롭히지(바사니조) 마소서’라고 하지요? 그 말은 ‘나에게 상관하지 말고(none of your business)지옥에만 보내지 마세요.’라는 의미의 간청입니다. 현재의 나와 상관없는 과거의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지옥에만 보내지 말아주세요.’라고 하는 신앙이 마귀의 신앙(귀신들린 자들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나와 관계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귀신의 말이요, 적그리스도의 말인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되어’ 죽은 것입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예수는 ‘나’라는 주인공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희생한 제물일 뿐입니다. 거기에서의 주인공은 역시 선악과 따먹은 ‘나’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을 하나님이라는 분이 도와주신 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예수에게 빚을 진 사람이 됩니다. 예수가 그렇게 인식이 될 때 우리는 그 예수에게 빚을 갚기 위해 이파리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종교 행위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러 차례 확인한 것처럼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께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갚는(아이테오) 형국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것,아래의 것을, 우리에게 빌려서 그것으로 우리에게 하늘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형국, 그것이 하나님의 빚 갚기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바실레이아)은 섬김의 통치입니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진짜 힘 있는 왕은 섬김을 받아 왕 노릇을 하는 자가 아니라 섬김으로 왕 노릇 하는 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 왕들은 백성들의 섬김으로 비로소 왕의 권력이나 체면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백성들이 그 왕을 버리면 그 왕은 언제든지 광야의 소처럼 버려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기 연예인들이 그처럼 대우를 받으며 의기양양 할 수 있는 것은 팬들의 성원이 그들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팬들이 떠난 인기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팬들의 박수와 환호가 인기인의 위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이 땅의 왕이라면 이 땅의 왕은 스스로가 능력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 밖의 어떤 힘에 의해 즉위도 하고 폐위도 되는 그런 힘없는 왕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왕이 그런 왕이어서는 안 되잖아요?
하늘의 왕은 섬기는 왕입니다. 그게 하늘 왕의 통치입니다. 섬김으로 통치를 한다는 것은 그 왕이 힘의 원천이요, 힘의 실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힘은 거기서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왕 밖의 그 어떤 움직임이나 상황들도 그 왕의 왕 됨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 왕은 섬기는 왕, 진짜 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약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아야 비로소 존재가 될 수 있는 피조물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생명력을 쏟아 붓는 은혜의 왕이 섬기는 왕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섬김을 받는 하늘 백성들의 찬미가 그 내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신이 하나같이 섬김을 받는 약하디 약한 우상임에 반해 오직 우리 하나님만이 당신 백성을 섬기는 진짜 힘 있는 왕이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 앞에서, 그 역동적인 섬김 앞에서 자신의 처음 자리를 올바로 인식하게 됩니다. 나는 그 앞에서 ‘없음’에 불과한 존재임을 뼛속 깊숙이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한 물리적 세계의 육적 자아의 죽음이 눈에 보이는 모형으로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비 초월 속의 ‘나’로 죽은 것입니다. 비 초월의 세상은 피조물의 가능성과 자존감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세상 혹은 율법이라고 명명합니다. 그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한 피조 세계의 자기주장과 자기 가능성이 죽어야 진짜 생명인 하늘의 생명이 가치를 발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게 진짜 생명인가, 라는 물음 앞에서 한 쪽이 죽어야 다른 쪽이 진짜 생명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진리 앞에서 없음으로 부정되어야 하는 운명을 갖고 생겨난 것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의 육신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 ‘세상’이 되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어디로 가요? 십자가로 갑니다. 그 세상, 그 율법이 언약의 기둥에 매달려 죽지 않으면 피조물은 절대 산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명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요, 일방적 공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가 언약의 십자가(기둥)에 달리는 모습 속에서 중첩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너희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너희의 희생과 섬김과 숭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 안에서 함께 죽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함께 죽는다는 것은 현재의 우리는 그 죽음과 아무 상관없는 자라는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 예수가 너희를 품고 너희의 대표로 죽은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육을 삭제 당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비장한 선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물리적 세상의 무화과나무 치마 만들기 작업은 그 자체로 생명일 수 없다는 것을 구구절절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진짜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진리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가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고 가셨으므로 예수님은 ‘성경이 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럼 예수 안에서 그 세상 속 자기 부정의 삶을 그대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도 역시 성경에 기록되어 있겠지요? 그래서 요한이 자신의 묵시록에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생명책이라는 것은 천국 문 앞에서 베드로가 들고 있는 어떤 책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라는 책, 즉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성경이 ‘나’의 이야기로 경험되지 않는 자들은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자들이고 그들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 이름이라는 단어 ‘오노마’라는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이름’입니다. 제가 전에도 잠깐 언급을 한 기억이 있는데, 성경에서 ‘이름’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어떤 존재를 다른 존재와 구별하기 위해 붙이는 그런 호칭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름’은 그 존재의 내용과 본질을 축약하여 한 마디로 제시할 때, 그것을 이름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 이름은 내용으로 분석되어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그냥 들리는 소리로만 이해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예수에 대해 요약되어 기록되어 있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 안에서 그 예수와 연합된 삶을 살아야 하는 ‘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도의 이름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붙여놓은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그 이름이라는 단어가 ‘쉠’이라는 단어입니다. 의미는 ‘분석된 말씀’입니다. 그 ‘쉠’이라는 단어는 관계부사로 사용하면 ‘거기’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여기’가 아닌 ‘거기’라는 말입니다. 그 단어에 히브리어 ‘마임’의 복수가 붙어 버리면 ‘샤마임’, 즉 ‘하늘’이 됩니다. 그 단어를 풀어보면 ‘진리(물)가 있는 거기’가 됩니다. 그걸 하늘이라 부릅니다. 진리는 하나님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계신 거기가 바로 하늘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진리가 어디에 와 있습니까? 내 안에 와 있지요? 그러면 그 진리가 있는 거기가 어디입니까? ‘샤마임(하늘)’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진리가 마음으로 담겨 있으면 우리가 바로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우리를 아들로 낳아 버립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아버지’라고도 부르지요? 주기도문이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로 시작이 되지요? 그런데 그 진리는 말씀입니다. 이름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진리의 마음이 된 그 이름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하기아조’라는 말이 ‘깨끗하게 되다’라는 의미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들 안에서 깨끗한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거하게 되면 그게 바로 거룩이잖아요? 따라서 성도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의 상태가 되면 이미 ‘그 이름은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을 청유하게 되는 것이 부정과거 명령형이라는 시제의 용례라 했지요?
이렇게 우리가 그 진리의 하나님을 내 마음에 품고 그 하나님과 연합의 상태가 되어 버리면 내 밖의 하나님께 두려움과 불안을 근거로 한 엉뚱한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 단어 자체가 ‘깨끗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 땅에서 그 하늘의 깨끗함을 담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의 관점으로 볼 때 이 땅의 모든 것은 다 부정합니다. 그런데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연합이 되면 그 존재를 ‘거룩하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진리이신 하나님을 내 밖에 두고(과거에 두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 두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열심히 아뢰는 행위는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 이름이 거룩하게 된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거룩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그렇게 하늘들이 된 성도들 안의 그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아버지가 되려면 그 말씀은 반드시 하늘의 은밀한 것으로 올바로 깨달아진 말씀이어야 하는 거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이름’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의 내용이 진리이신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러니까‘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가 바로 ‘그 이름’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세상의 것과 구별되어 하늘의 은밀한 것으로(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그 거룩의 개념을 ‘성으로 두르다, 울타리로 두르다’라는 모양으로 설명을 합니다. 성이나 울타리 밖과 안을 확연하게 구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별된 것을 ‘깨끗하다, 성결하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이 ‘간’으로 둘러 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동산이라는 단어 자체가 ‘울타리’라는 말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구별된 성전을 상징하던 곳이었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한 울타리 안에서 그 분의 생명력으로만 존재하는 피조물의 상태가 바로 ‘거룩’인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의 거룩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연합이 전제되지 않고는 절대로 성립이 될 수 없는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거나 우리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연합한 그 진리의 말씀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설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 이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나 사회 규범 등의 것이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윤리나 도덕이나 사회 규범이나 착한 사람 되기의 매뉴얼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말씀은 우리 안에 들어 올 수 없어요. 그건 우리 밖에서 우리를 옭아매는 법일 뿐입니다. 그런 것으로는 우리가 아버지를 담은 하늘들이 될 수 없어요. 우리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로마서 강해 시간에 분명히 확인했잖아요? 따라서 그 아버지, 그 말씀, 그 이름은 반드시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말들과 구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계19:11,13)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 하더라
여기 보시면 하늘이 열리지요? 하늘은 곧 ‘나’입니다. 그리고 그 열린 하늘 안에 어떤 이가 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랍니다. 거기에 쓰인 단어가 ‘믿음(피스토스)’와 ‘진리(알레디노스)’입니다.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의 이름이 뭐래요? 하나님의 말씀이래요. 하나님의 이름은 ‘믿음’이요, ‘진리’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의 진리로, 믿음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서 어떤 일을 행한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들은 절대로 거룩한 이름을 가진 자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 믿음과 진리라는 이름,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우리 이마에도 새겨진다는 것을 아세요?
(계3:12)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14:1)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 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19:7~9)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어떠세요? 하나님 백성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고 그 이름은 ‘진리의(참되신) 말씀’이라고 하지요? 그들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깨끗합니다. 거룩(하기아조)입니다. 어떻게 깨끗해졌지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입혀주신) 깨끗한 세마포 옷(의의 겉옷)을 입어서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디카이오마)’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도가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거룩해 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깨끗한 세마포(의)를 입기만 하면 됩니다. 성도가 거기에 보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롬3:19~22)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계시록에서 성도가 입고 있는 거룩한 옷이 바로 이 ‘의’의 옷입니다. 그런데 이 ‘의’의 옷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옷이랍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옷입니다. 성경은 기특하게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의의 옷을 입으려 하는 아담 적 시도들을 전부 ‘육신의 일’로 묶어 버립니다. 그리스도라는 옷과 율법의 옷을 완전하고 분명하게 나누어 줍니다.
(롬13:14)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갈3:26~27)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렇다면 이렇게 육신의 일로 해 입은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몰수당하고 거룩한 의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우리의 아담 적 행위, 즉 육이 삭제 당해야 맞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밖에서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을 죽이시기 위해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이 열리면 그 안으로 들어가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풀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원래 ‘이름’이라는 단어 ‘오노마’는 히브리어 ‘쉠’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 했지요? 그‘쉠’이라는 단어는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그 ‘셈’이라는 사람, 이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떤 한 무리의 조상이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창10:21)
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여기보시면 이름, 즉 말씀이라는 이름을 가진 ‘셈’이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하지요? 그 ‘에벨(에베르)’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아바르’에서 온 단어로 ‘(반대편으로)건너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 단어에서 ‘히브리’라는 단어가 파생한 것입니다. 그 ‘히브리’라는 아들들(벤, 복수)의 아버지(아브)가 ‘쉠’이랍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간자,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간 자들이 ‘아들’이라는 말이고 그 ‘아들들’의 대표가 바로 ‘셈’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따라서‘셈(이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의 후손은 ‘건너간 자’, 즉 저주의 바다를 건너, 시험의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몽땅,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되었어요? 어린양 예수의 유월절(아바르, 페싸흐, 파싸흐)로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사망이 건너가게 되면(pass over) 그 사람이 저주의 바다를 건너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의지하여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 ‘건너가다’라는 단어와 ‘절름발이가 되다, 절뚝거리다’라는 말과 혼용되어 쓰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라메드)를 의지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을 ‘건너간 자’라 부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얍복(야보크, 요단의 동쪽, 실패하다, 빈 곳, 광야) 강가에서 절름발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요단을 건널 수 있다는 상징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옷 입어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게 하라’는 청유는 이미 완료가 된 현실인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구약 때부터 우리에게 약속하신 새 언약의 성취인 것입니다.
(겔36:22-23)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 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열국(이방인) 가운데에서 더럽혀졌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름은 곧 말씀이며 하나님 자신이고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늘이(거기)아닌 땅(여기)에서 ‘더럽혀짐’의 상태에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 이름을 거룩하게 만드시겠다고 선언을 하세요. 이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엡1:3~7)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 사랑으로(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를 창세전부터 예정을 하셔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하심으로, 온 세상으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택함을 받고 그 뜻하심의 예정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은 그 거룩한 하늘로부터 비 초월의 땅으로 내려와, 마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쫓겨난 모양으로 이 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 위에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은혜로 부어져서 그들이 오직 은혜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늘의 존재가 되는 것을 역사 속에서 증거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그게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진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겔36:17~21)
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20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하나님의 땅에서 그들의 행함을 드러내려 하면 그것으로 그 땅이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월경 중에 있는 여자의 부정함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피를 생명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월경이라는 것은 그 생명을 땅에다 쏟아 붓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건 곧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땅에서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구원, 생명, 운운 하는 것은 생명의 피를 땅에다 쏟아 붓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이 세상(고이, 이방)으로 흩어 버리십니다. 그들은 이방 땅에서 이방 사람들과 똑같이 인간들의 행위(아리라)를 생명으로 삼아 삽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도 잘 새기셔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에 세 종류로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의 ‘엘로힘’이라는 이름과 창세기 2장4절부터 등장하는 ‘여호와 엘로힘’, 그리고 ‘여호와’, 이렇게 세 종류의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데‘엘로힘’은 우리가 감지 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여호와 엘로힘’은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고 감지되는 하나님(성전, 예수, 성경, 등)을 가리키며, 여호와는 ‘성령’으로 바꾸어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가리켜‘여호와’를 떠난 자들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거기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리(성령)를 떠난 율법의 이스라엘을 지칭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한 자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아끼셨다고 하지요? 그 아꼈다는 말이 ‘하말’이라는 동사인데 그 뜻은 ‘긍휼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의 자음 값은 ‘죄를 진리로 가르치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은 ‘죄를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그 더럽혀진 자를 건져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이름을 깨끗하게 만드시는지가 설명으로 나와야 하겠지요? 바로 밑 구절을 보세요.
(겔36:24-28)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어떻게 그 이름을 깨끗하게 한다고 하지요? 당신의 땅(언약)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맑은 물(진리, 말씀)을 뿌려 그 이름들을 정결케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새 영으로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라고도 표현을 하고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는 것’이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신을 그 백성들 속에 두어 그들로 하여금 그 율법을 행하게(아싸, 헬라어 ‘포이에오’와 같은 단어, 되게 하다)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게 은혜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즉 아들이 되는 원리입니다.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고, 새 언약이잖아요?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엡5:26-27)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물로 씻는 것을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과 동격으로 사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깨끗하게 되면 그것을 ‘하기아조’, 거룩하게 된 것이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걸 어떻게 설명하는지 볼까요?
(히10:22)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마음에 물 뿌림(진리의 가르침)을 받으면(흐란티조, 물을 뿌리다) 양심(쉬네이데시스, 도덕적 의식)이 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몸(소마, 육신)이 씻김을 받아 참 마음(알레디노스 카르디아)이 되고 온전한 믿음(플레로포리아 피스티스)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더럽혀진 이름이 어떻게 거룩하게 됩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더럽혀진 마음이 깨끗이 씻겨 지면 그 더럽혀진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우리 주님 홀로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사랑입니다. 그걸 인정하는 자는 똑같이 우리 주님과 함께 십자가(언약의 기둥) 위에서 자기 육신을 부인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10:6~14)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성경)에 나(예수, 말씀,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성도 모두에게 해당)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율법, 예수)을 폐하심은 둘째 것(은혜, 성령)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두루마리 책, 즉 성경에 기록된 것이 말씀이지요? 그 말씀은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예수의 이름이요, 우리 성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율법을 허물고 은혜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제사를 부정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 단번의 제물로 제사를 완성시켜 버립니다. 그렇게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이름들은 영원히 온전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름이 거룩하게 되게 하라는 오늘본문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진리를 올바로 이해한 성도들이 맞다 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를 품은 하늘의 성도들이 가장 먼저 구하게 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율법이 아닌 진리로 깨달아져 우리의 마음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율법으로 더러워졌던 그 말씀(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게(하기아조, 깨끗하다) 된 것이잖아요? 따라서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의 상태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청유 이전에 하나님이 완성하신 그들의 묵시 속 존재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거룩해진, 깨끗해진 하나님의 이름들, 하나님의 말씀들, 하나님의 아들들, 그들이 진정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대상들인 것입니다.
[출처] 산상수훈 [ 37 ] 이름이 거룩히 되게 하소서|작성자 봉한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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