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기본교리

19. 캘빈주의 오대 강령으로 본 하나님의 사랑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00:04

19.  캘빈주의 오대 강령으로 본 하나님의 사랑

 

(3:14-16)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금준미주는 천인 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 고라, 촉루 낙 시 민 루 낙이요, 가성고처에 원성 고라‘

가렴주구를 일삼던 변 사또의 생일잔치에 어사또 이몽룡이 남루한 옷을 입고 들어가 써 내려간 시입니다. 춘향전을 보면 이몽룡이 이 시를 일필휘지로 잔치 상에 던졌을 때 이 시의 의미를 알아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슬슬 도망을 가서 살았지만 무슨 소린지 관심도 안 두고 못 알아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암행어사가 불시에 출두하듯이 그렇게 예수님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변 사또의 잔치 상에 떨어졌던 경고의 메시지처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해서 경고의 계시를 내리고 계십니다. 그러데 그 경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잘못 알아듣고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처참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50 100독을 하고 심지어 성경을 외우는 사람도 있는데 그 진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읽고 있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정말 성경이 무슨 주제로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잘 알고 계신가요?

우리가 오늘 공부할 본문인 요한복음 316절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성경구절은 없을 것입니다. 일전에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어떤 절에 갔더니 절 입구에 이 말씀이 붙어있었습니다. 중들도 이 말씀은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구절은 그만큼 잘 알려져 있고 우리에게 힘이 되기도 하는 성경구절입니다.

시카고의 무디 교회에 초청되었던 영국의 젊은 복음전도자 무어 하우스가 요한복음 316절 한 절만 가지고 두 달을 설교를 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 구절에는 깊고 심오한 복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바른 이해가 조금 아쉽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캘빈주의 오대 강령 중 하나인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과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에 초점을 두고 공부 할 것입니다. 오늘 공부할 내용을 잘 이해하신다면 나머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도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먼저 16절에 나오는 “세상”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의 이해가 교파 간에 이견이 많습니다.

칼 라너 같은 보편 구원론(universalism)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는 말씀을 가지고 “거봐라, 하나님은 어차피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하실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한 인간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실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두 번째로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전 인류를 위해 일단 아들을 죽이시고 그것을 믿어주는 자들을 기특히 여겨 구원을 해 주시는 것이라고“주장을 합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3 16절에서의 ”세상“은 보편 구원론 자들의 그 말처럼 전체 세상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모든 인간에게는 선행적 은총, 즉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사담이지만 만일 그렇다면 정말 저는 자신 없습니다.

그럼 과연  그 “세상”이 과연 보편 구원론 자들과 알매니언 주의자들이 말하는 전 인류를 말하는 것일까요

신약 성경에 “세상”이라는 말이 185회나 나옵니다. 그 중에 105번이 요한의 글에 나옵니다.

요한은 이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 살펴보고 오늘 본문의 “세상”은 그 중 어디에 속하는지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이 쓴 세상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헬라어로 “코스모스”입니다. 이 말은 원래 잘 꾸며진 “장식”이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는 다시 말하면 요모조모로 잘 꾸몄거나 잘 조화되어서 아름답거나 우아한 사물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여기서 "cosmetic"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이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시간 속에서 우주를 묘사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우주는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질서를 잡아 놓으시고 조화 있게 만들어 놓으신 아름다운 곳이니까요. 예전에 대학1년 때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UFO에 심취해서 UFO사진을 찍으러 다니곤 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보고 싶었으니까요. 아니 저에게는 성경의 하나님만 없으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그 혈기 왕성한 대학 시절에 하지 말라는 것은 왜 그리 많고 하라는 것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정말 너무 불편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고 마음 편히 놀고 싶어서 UFO를 연구하기 위해 우주를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주를 알면 알수록 누군가가 만들어 놓지 않으면 이렇게 질서정연하고 변함없이 그 거대한 우주가 매년 매달 매일 매시 매초를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일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주를 공부하면 할수록 정말 “아름답고 거대하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질서를 잡으시고 운행하고 계시는 이 우주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의미 있는 곳이 당연히 지구이고 그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세상” “코스모스”라는 단어가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세상”의 의미는 대부분 하나님과 관계없이 이 땅을 살아가는 전 인류를 “세상”이라 표현했습니다. 제가 알매니언 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이나 보편 구원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지요? 끝까지 들어보세요. 헬라어에 능통했던 히브리 사람들에게 세상이라는 말은 그렇게 그리스도에 대적하는 인류를 지칭할 때 쓰였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과 대조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말이 그렇게 아담 이후로 태어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지칭하는 것이면, 16절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아담을 포함한 전 인류인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구속사를 그렇게 보는 보편 구원론 자들은 그렇게 어차피 모든 인간은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는 아주 낙관적인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는 조금 다르지만 알매니언 주의자들은 이미 우리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예수님은 모두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가 의지를 발동해서 믿기만 하면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먼저 보편 구원론 자들의 의견에 대한 반박을 해보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독생자를 보내셨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독생자가 전 인류의 죄 값을 모두 치러 놓았는데 지옥 가는 사람은 뭡니까? 지옥은 그냥 인간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만들어 낸 거짓 개념인가요?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23:13,15)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3:28-29)

2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에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29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렇지요? 이렇게 성경은 지옥의 존재에 대해 분명한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보편 구원론 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죄의 값이 다 치러지고 그들은 놓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럼 지옥 가는 사람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지옥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가게에 외상값이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다 갚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게 주인이 또 다시 나에게 외상값을 요구하는 것과 방불한 것입니다. 그렇게 가게 주인이 아버지에게도 받고 나에게도 그 외상값을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듯이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갚으신 죄 값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또 다시 지옥의 형벌로 갚을 것을 요구한다면 하나님은 나쁜 가게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보편 구원론 자들은 지옥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무슨 지옥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괴롭히시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어떻게 채워질 수 있는 건가요? 그들의 주장은 하나는 알고 둘은 생각지 않는 짧은 소견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알매니안 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을 해보겠습니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세상”을 위해 아들을 보내서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인간이 스스로 그 예수의 죽음이 자기의 죄를 대속 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잘 살아내면 구원을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넣어 버리신다고 믿고 있는 것이 알매니언 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을 냅니다. 착하게 살려고 열심을 내고 탈락하지 않으려고 전도도 최선을 다해서 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여서 죄를 사해 놓았는데 인간들이 하나도 안 믿어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괜히 죽으신 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 없이 인간의 선택과 의지에 좌지우지하시며 일을 하시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인간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됩니다. 그게 무슨 은혜입니까? 정당한 대가이지요. 구원은 선물이라면서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전 인류를 위해 오셔서 죽으신 것도 아니고 일단 전 인류를 위해 죽어 주셨다가 아무도 안 믿어주면 그냥 없던 걸로 해 버리는 허탈한 일을 하시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어떤 택해진 한 무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17:6)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예수님은 세상 중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을 위해 오신 분이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전체 세상이 아닙니다. 다른 곳을 한 군데 더 볼까요?

(17:9)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어떠세요? 예수님은 지금 세상을 위함이 아닌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신 자들만을 위해 간구를 하고 계십니다.

(17:14-16)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보시다시피 지금 예수님의 관심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어떤 한 무리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만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15:19)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전 인류인 “세상”을 위해 오셨다면 왜 제자들보고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은 세상에서 건짐을 받은 어떤 무리만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의 세상은 무엇일까요?

말씀 드린 대로 요한복음에서는 이 “세상”이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요한은 “세상”이라는 단어를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죄를 짓고 타락하여 영원히 영벌에 처해질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대 세력들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죄로 인해 영원히 죽어야 할 자들 중, 즉 세상 중에서 건져내어짐을 받은 무리를 향해서도 “세상”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오늘 본문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의 세상이 바로 그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같은 자들을 사랑하셨다는 데에 있는 것이지 누구를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사랑의 대상에 대해 초점이 있는 구절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세상이었으나 지금은 그 세상 중에서 건짐을 받은 바로 그 ‘세상’ 즉 교회를 사랑하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에 성령의 사역에서 살펴 본 것처럼 성령이 오시면 그 분이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 볼까요?

(16:8)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깨닫게 하시리라)

여기서 ‘책망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엘렝코”는 여기서는 깨닫게 하다는 뜻으로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것을 다 아시지요? 만일 성경에 쓰인 세상이라는 단어가 모두다 전체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 구절은 말도 안 되는 구절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절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러 오셨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아닙니다. 여기서도 세상은 죄악 된 세상에서 건져내어짐을 받은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29)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기도 보세요.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세상 중에서 건짐을 받은 소수의 구원 받은 세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전 인류를 위해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죄에서 건져내어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될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매니안 주의나 보편 구원론 자들의 오류에 빠지셔서 어떻게 살아도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는 허탄한 기대나, 구원에는 나의 의지와 선택이 상당 부분 적용이 된다는 이단 사설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총체적으로 타락을 한 인간들 중에서 (전적타락)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공로나 신분이나 노력이나 자격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해 창세전에 선택하시고 (무조건적인 선택) 그렇게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제한적 속죄) 그들이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요구하지도 않았을 때에 그들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불가항력적 은혜) 그렇게 은혜를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구원의 완성지점까지 반드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시지요? 여러분은 칼빈주의 오대 강령을 다 공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 사랑의 크기를 알려면 “누가” 우리를 사랑했는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과연 어떤 분이 죄로 말미암아 모두 파멸 당할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내셔서 얼마나 큰 사랑으로 사랑하셨는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요? 태초에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해 내신 우리의 이성밖에 계신 크신 분이십니다. 그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께서 멸망당할 자들 중에서 어떤 한 무리를 택해서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다고요?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16절의 이처럼은 무엇을 받는 것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큰사랑이기에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하셨는가요? 먼저 본문 14절과 15절을 함께 읽고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14-15)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14절과 15절의 내용이 바로 ‘이처럼’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처럼‘이라는 단어가 담지하고 있는 내용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이 들려야 한다.”입니다.

그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을 자세히 알아야 하겠지요? 그 내용이 어디에 나옵니까? 우리가 그 사건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이처럼 사랑하셨다”의 내용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민수기로 가보겠습니다.

(21:4-9) 

4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닌 지속적인 불평입니다. 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데 끌고 나와서 이렇게 고생시키느냐고 모세를 몰아세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의 불 뱀을 보내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불 뱀에게 물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아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하나님은 유일한 처방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쉽게 쳐다보았을까요? 아닐걸요? 당시에는 불 뱀에게 물리면 술이나 고약 등을 사용해서 치료를 했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은 놋 뱀을 쳐다보는 대신에 그러한 자신들의 처방을 더 신뢰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을 준비하느라 놋 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뱀은 죄, 죄인, 죄의 원흉인 사탄, 심판, 저주 등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이미 모세로부터 창세기를 배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짐승이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에덴동산의 뱀이지요. 게다가 그것을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놋은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놋 뱀은 그 자체가 저주 받은 자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장대에 달라고 하시고는 그것을 쳐다보는 자만이 살아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금방 떠오르는 것이 있지요? 골고다에서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의 죄가 되셔서 장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뱀이 되신 예수를 믿는 것만이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길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그 장대의 놋 뱀을 통해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1:23)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고후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즉 교회가 그 저주받은 장대위의 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는 것은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뱀을 놋으로 만들어서 장대에 달아서 그것을 쳐다본다고 뱀독이 없어지겠습니까? 그 놋 뱀에서 갑자기 레이저 광선이 나와서 쳐다보는 사람마다 뱀에 물린 자리에 광선이 쬐어져서 독이 다 없어지고 그러겠습니까? 이 놋 뱀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자세히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어떤 한 무리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저주받은 뱀, 심판 받은 뱀 즉 저주와 심판을 받은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들의 죄를 모두 도말해 버리시고 그들에게 영생을 허락하시는 구원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보태져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우리에게 허락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놋 뱀의 사건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우리의 행위는 단 1%도 보탤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게 ‘이처럼’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주도하에 당신의 아들을 저주의 장대에 매다시는 당신의 방법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그게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들이 뱀에게 물리고 고약이라든가 술등을 사용해서 독을 빼내려는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방법으로 살아난 사람을 단 한 사람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죄라는 것은 그만큼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처방이 있을 수 없는 불 뱀의 독 같은 것이 바로 우리의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해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뱀독, 즉 죄를 해결해 주겠다고 인간적인 처방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헌금을 많이 해라. 선행을 해라. 업적을 쌓아라. 금식해라. 기도해라‘ 그러면 그 죄가 상쇄되고 소멸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 동안에도 독은 점점 그 사람의 몸에 퍼져 나가고 결국엔 영적 죽음을 맞이할 뿐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뱀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 이제 불 뱀에게 물리지 않을 수 있게 앞으로는 원망도 말고 불평도 말고 조심하자” 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설사 그렇게 뉘우쳤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들은 불 뱀에 물려 있는 상태입니다. 독은 퍼져가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가고 있는 자가 앞으로 자기의 행위를 올바로 갖겠다고 아무리 결단을 해도 그것이 그 목숨을 건져 낼 수 있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15) 

15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아무리 앞으로 자신의 삶을 개선하여 잘 살겠다고 다짐해도 이미 지어 놓은 죄는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장사를 하고 있는데 몇 달 동안 외상값을 갚지 않은 손님이 와서 “지난 외상은 다 잊고 , 이제부터는 내가 꼬박 꼬박 물건 값을 다 낼 테니 다시 거래합시다.” 하면 그냥 거래를 하는 바보가 있겠습니까? 지난 외상값을 갚아야 거래는 기분 좋게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일시적인 도덕적인 개선이 우리를 불 뱀의 독에서 구해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불 뱀에 물린 자들더러 그 불 뱀과 싸워서 불 뱀을 없애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를 개선하고 정의를 구현하여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오게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환경이 개선되고 사회정의가 구현되면 죄는 없어지고 지상천국이 올 수 있을 거라 착각들을 합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독려하는 여러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참 좋은 일도 많이 하지만 자칫 이런 잘못된 신념을 성도들에게 심어줄 수도 있는 위험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불 뱀에 물린 자들은 사회정의를 외치며 촛불 들고 광화문에 나가서 시위를 하는 순간에도 그들의 몸에는 뱀독이 서서히 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회정의는 우리 성도들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잘 이해하고 그렇게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삶을 잘 살아내게 될 때 그들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향기로 퍼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기독교인들의 무조건 적인 사회 불 참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약자를 위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우리의 것을 희생해서 도와주고 섬겨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 못된 길을 가고 있는 위정자나 지도자들에게 올바른 권고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그런 것을 하면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슈바이처나 간디의 삶을 본받아 우리가 도덕적 윤리적 삶을 잘 살아내면 세상이 우리를 본받을 것이라는 착각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이 빠진 사회참여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당찬 기대는 빨리 접으라는 것이지요. 이 세상은 복음으로만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세상은 복음을 복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불타 없어지는 운명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지 그리스도인들의 열심으로 세상이 지상 천국으로 화하게 될 것이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놋 뱀 조각을 지니거나, 놋 뱀을 단 장대를 지니고 있으면 불 뱀의 독이 없어진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전 세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나무 파편이라고 팔린 것들을 합쳐 보면 커다란 성당 다섯 개는 지을 만한 분량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몸에 지니면 재수가 좋고, 자신에게만 좀 더 나은 은혜가 올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을 자동차의 뒤 유리 밑에다 두고 다니면 사고가 안 날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십자가 목걸이하고 다니면 왠지 거룩해 지는 느낌을 받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요? 그건 부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가지고 다니는 십자가는 부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날에는 십자가와 성경을 무슨 부적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드라큐라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요. 여러분 드라큐라가 십자가를 무서워 할 것 같으세요? 사도행전에서도 확인했듯이 예수의 이름을 댄다고 해서 귀신들이 전부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그 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은혜의 십자가를 정확히 이해한 자에게만 예수의 이름과 십자가는 위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귀신들이 범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그 사람 안에는 성령 하나님이 계신데 어떻게 귀신이 마귀가 범접을 합니까? 그런데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복음이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 그저 성경만 들고 다니고 십자가 목걸이나 하고 다닌다고 해서 그가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것이라는 생각은 어서 집어치우세요. 우리는 거기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은 놋 뱀에다가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원에 가거나 부흥회 같은데 가면 꼭 나중에 기도하는 시간에 앞으로 뛰어나와서 십자가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러면 왠지 기도가 잘 들어질 것 같아서 그런 거 같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놋 뱀을 보고 병이 나은 것을 신기하게 여겨 히스기야 왕 때까지 그 놋 뱀에게 분향했다고 합니다.

(왕하18:4)

4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왜 그런 걸까요? 놋 뱀에 신통한 능력이 있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 뒤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무시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열거했던 오늘날 잘 못 가고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종교행위는 마치 질병을 앓고 있을 때 그 질병의 근원과 그 질병의 증상을 헷갈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폐렴이 걸리면 열이 나고 기침이 너며 몸이 쑤십니다. 그런데 그 증상만을 해결하기 위해 해열제를 먹고 기침 멎는 약과 진통제만을 복용한다면 그것이 그 때 잠간 몸을 편하게는 해줄 수 있지만 그 증상은 약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재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치료가 되어지지 않으면 그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회정화 운동을 하고 촛불시위를 하고 고행을 하고 행위를 개선하겠다고 결단하고 하는 것은 그 죄의 증상만을 일시적으로 다스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근본적인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류는 여전히 그 어둠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죄를 해결했다는 것을 믿는 믿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아니 그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베푸신 도저히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선물인 그 십자가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5:8,10)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 것은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혹 정의를 위해 의인들을 위해 죽는 것도 우리는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재학 중일 때만 해도 학교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압제당하고 가난에 시달리는 민중의 행복을 위해 할복을 하고 분신을 하고 투신을 한 선배와 친구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우리도 명분만 분명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우리의 이성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우리가 뭔가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똑같이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맹렬하고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전적인 타락을 한 우리를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단지 우리 성도들만을 위해서 그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우리를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복된 소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달은 사람은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향기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사회참여의 시작이어야 하는 것이고 사회정화의 첫 걸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우리 성도들을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그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의 뜻인 거룩을 향한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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