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기본교리

20. 성찬이란 무엇인가?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00:05

20. 성찬이란 무엇인가?

 

(6:1-15)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저는 매일 새벽 새벽기도를 위해 집을 나서기 전에 우리 아이들의 방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불을 차내 버린 녀석이 있으면 이불을 잘 덮어주고 그 자는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한 녀석씩 뽀뽀를 해주고 집을 나섭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너무 좋아서, 너무 기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어떤 모임에서 스바냐를 함께 읽던 도중에 3장의 내용을 읽는데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도 나를 그렇게 예뻐하시는구나.’ 하고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했습니다. 여러분도 너무 잘 아시는 구절이지요? 한 번 함께 읽어 볼까요?

(3:17-20)(표준 새 번역)

17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18 축제 때에 즐거워하듯 하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

19 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는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겠다.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고, 흩어진 이들을 불러 모으겠다. 흩어져서 사는 그 모든 땅에서, 부끄러움을 겪던 나의 백성이 칭송과 영예를 받게 하겠다.

20 그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모으겠다. 그 때에 내가 너희를 고향으로 인도하겠다. 사로잡혀 갔던 이들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데려오고, 이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너희가 영예와 칭송을 받게 하겠다. 나 주가 말한다."

어떠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너무나 좋으셔서 우리의 이름만 부르시는 것으로도 그토록 감격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성찬에 관해서 함께 공부해 볼 텐데 바로 이 성찬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매달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고 오늘 설교를 마친 후에도 성찬을 들 텐데 여러분은 정말 그 성찬의 의미를 잘 알고 드시는 것인지 오늘 확인해 보세요.

여러분 신학에서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으로 어떤 것이 있다고 했지요? 말씀, 기도, 성례입니다. 그렇지요? 그 은혜의 수단인 성례 안에 세례와 성찬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성찬과 세례도 말씀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찬과 세례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찬은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오해를 하시면 안 되는 것이 로만 카톨릭에서처럼 미사 중에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들고 축성기도를 하면 그 빵과 포도주가 실제적이며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초자연적으로 바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찬을 중요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 교리문답서 제 2편에 보면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카톨릭 신앙을 요약하여 선포한다. 우리는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내어주시는 것은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이러한 확신을 지녀왔으며 공의회는 이를 다시금 선포하는 바이다.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실체변화라고 불러왔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역시 2 1333항에 보면 ‘성찬례 거행의 중심인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 청원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 된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럼 사제가 축성기도를 한 다음 떡을 받았다가 땅에 떨어뜨렸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수님의 살을 떨어뜨렸으니 큰일 나는 것 아닌가요? 포도주를 마시다가 사래가 들려서 기침이 나서 포도주를 뱉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피를 뱉어 버렸으니 그럼 큰일 나는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자고요. 그 빵은 어느 시점에 예수님의 살로 변하는 거예요? 입에 넣었을 때인가요? 그럼 살 씹는 맛이 나야 하지 않나요? 포도주를 입에 넣었을 때 예수님의 피 냄새가 나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슨 식인종도 아니고 예수님의 진짜 살을 씹어 먹는 다는 게 언뜻 생각해도 그것은 억지 같아 보입니다.

그러면 왜 성찬은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되는가? 말씀드린 대로 성찬은 바로 골고다 십자가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진 것을 기념하는 것, 즉 가슴 벅찬 복음을 확인하는 의식이기에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고전11:23-25)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2:19)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이렇게 성찬은 갈보리에서 하나님의 교회에 부어진 그 선물을 기억하라는 것이지 성찬을 먹을 때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이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찬을 먹고 마시면서 예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 그 사건을 다시금 떠올리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감격하는 시간이 바로 성찬식을 거행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감동이나 감격이 없기 때문에 괜히 잊었던 술 생각이나 나고 밥 생각이나 나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성찬식은 천국에서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과 교회가 한 상에서 만찬을 나누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우리 교회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따라주시고 천국에서의 만찬을 이야기하십니다.

(26:28-29)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서 아~나는 반드시 그 천국에서 예수님과 한상에서 만찬을 들겠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며 확신하며 지금 예수님과 함께 천국 만찬을 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성찬의 참 의미를 확실히 공부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천명을 먹이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께 작은 것이라도 정성껏 바치면 말도 못하게 큰 축복이 온다.” 라던가 “하나님은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육적인 양식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다” 라고 이 말씀을 푸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육적인 부분을 채우십니다. 그러나 이 오병이어의 사건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그 풍성한 하늘나라의 풍요를 설명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오병이어라는 소품은 그것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아주 보잘 것 없고 작은 것의 상징일 뿐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너희들이 무엇을 보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예수께서 자기의 살과 피를 찢으심으로 우리에게 그 천국의 풍요를 선물해 주시는 것임을 설명해 주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시작할 때 4절에서 유월절을 먼저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6:4)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유월절에는 어떤 일이 있었지요? 어린양의 살과 피가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 쏟아진 날입니다. 애굽의 장자들과 함께 죽어야 할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살아나게 되는 날이 유월절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예수께서 떡을 나누어주실 때도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행하셨던 유월절 마지막 성찬식 때 하셨던 그 모양 그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6:11)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같은 내용인 마태복음 1419절에도 이렇게 기술이 되어있습니다.

(14:19)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그러면 최후의 만찬 때는 어떻게 떡을 떼어 주셨는지 볼까요?

(26:26)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꼭 같은 모습으로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나누어주시지요? 이렇게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풍성한 복이 성도들에게 내려지게 되는 참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주제로 하고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그 오병이어의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설명을 해 주시지요?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날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따라왔던 무리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26-27)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6:32-35)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제 분명해 졌지요? 오병이어의 사건은 바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시기 위한 상징 적인 사건이었던 것이지 결코 이 땅에서 우리가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나, 작은 것을 바치면 크게 불려 주시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 오병이어의 사건이 가리키는 것이 성만찬이라면 오늘 본문을 보며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성찬을 대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1절을 보세요.

(6:1)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성경이 주님께서 굳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셔서 그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어둠, 심판, , 죄 된 세상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바다가 없겠고” 라는 말을 쓴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 바다를 건너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왜 갈릴리 바다를 굳이 디베랴 바다라고 표기를 해 놓았을까를 연구해 보면 왜 오병이어의 사건이 바다 건너편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지를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디베랴 바다는 당시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갈릴리 바다의 다른 이름입니다. 즉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상징으로 갈리리 바다를 디베랴(티베리우스)바다라 부른 것입니다. 이 데베랴 호수라는 말이 여기와 요한복음21장에 두 번 쓰입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고기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갔을 때, 즉 세상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에도 그 곳을 디베랴 바다라고 표기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시기 전에 디베랴 바다를 건너서 산으로 올라가셔서 그 군중을 먹이시는 것은 성찬을 먹을 자격이 있는, 구원받은 자들은 세상을 건너, 세상과는 상관없이 된 자들이 성찬을 먹는 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디베랴 바다를 건너서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그 곳에 앉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무엇을 상징하지요? 시내 산, 호렙 산, 시온 산, 모리아 산 등등 산은 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여 집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 베푸시는 것이 바로 성찬인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찬은 세상을 건너 영광스러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늘나라의 시민이 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리고 본문 10절에 보면 그 곳에 잔디가 많았다고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인 마가복음 6 39절을 보시지요.

(6:39)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왜 굳이 그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을 성경이 잔디와 풀이라는 단어를 동원하여 묘사를 할까요? 잔디와 풀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자와 양이지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실 때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시편78 52절에 보면 그 출애굽 광야의 생활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78:52)

52 자기 백성을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떼같이 지도하셨도다

그러니까 이 오병이어의 사건은 유월절이 지나고 거기서 건짐을 받은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살과 피인 만나를 먹여 가며 그 양떼들을 목자로서 이끌고 가시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병이어의 사건은 성도의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기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원의 현재성까지도 함께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떡을 먹고 구원을 얻은 자들을 주님은 그냥 내 팽개쳐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목자로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여가며 양육하신다는 구원의 현재성을 오병이어의 기적은 담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받고 난 후에도 하나님은 절대 타자로 저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역시 그분의 살과 피를 먹여 가며 우리를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이끌어 가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성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그 선한 목자가 이끄는 길은 어떤 길이라도 부족함이 없는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의 신앙을 공고히 다지는 것입니다.

(7:17)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23:1-5)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양임을 아는 자들이며 거기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이라 할지라도 그 목자와 함께 있으면 부족함 없이 만족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성찬은 그렇게 복음을 설명할 뿐 아니라 우리 신자들의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도 보여주는 것이며 그러한 성도의 삶을 복음으로 잘 견뎌내겠다는 성도의 다짐과 고백이 함께 하는 천국의 잔치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찬 상위의 것들을 한 번 떠 올려 보세요. 작은 잔과 시금털털한 포도주와 맛없는 떡입니다. 누룩도 들지 않은 정말 맛없는 떡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이 잔치 상 위의 것들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여기에 갈비나 탕수육 복 매운탕 이런 것들이 없는 것이 아쉬우세요?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복음과 아무 상관없는 진수성찬을 택하시겠어요? 복음을 아는 자들이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십자가의 원리로 살기 위해 세상의 진미를 마다하고 먹고 마셔야 하는 예수의 피와 살을 택하시겠습니까? 그 둘 중에 후자를 택한 사람들이 나의 선택이 잘 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시간이 바로 성찬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렇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으로만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들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의 살과 피만으로 넉넉히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나는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그렇게 흡족치 못한 것입니다. what is this? nothing!’그게 만나입니다.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힘으로 삼고 취해야 할 것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주님께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 우리의 목적지는 이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훈련하고 학습하고 양육 받아 잘 성숙하여 하나님 나라로 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 복음을 아는 자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잘 것 없이 보이는 만나뿐이라도 창피해 하거나 부족해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목숨처럼 여기는 자기의 소유를 비워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땅에 눈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성찬 상 위의 포도주와 누룩 없는 떡이 아주 못 마땅합니다.   뭐 좀 다른 것 좀 달라는 것이지요. 부추와 마늘과 고기 좀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따라가 줄 테니까 내가 원하는 풍성한 식탁을 좀 차려 달라는 것이지요. 광야의 이스라엘이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성찬을 먹으면서 비록 이 세상 시각으로는 부족하고 작고 모자라는 것 같지만 이 성찬 상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함께 나눌 천국 만찬을 약속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난 지금 부족함 없이 만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교회에 와서 기적이나 바라고 병이나 낫기를 바라며, 자기의 소원 성취나 바라는 자들, 부추와 마늘과 고기만을 찾는 사람들을 성경이 “예수님을 잡아 왕을 삼으려는 자”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세요.

(6:15)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을 억지로 왕을 삼으려는 자들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자기들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대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은 그런 것을 해주러 온 게 아니라고 하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예수를 죽여 버린 자들과 그 분을 세상 것이나 주는 왕으로 삼으려는 자와 똑같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셨습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교회 안에서 여전히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자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전히 예배당 안에서 예수를 세상 것이나 공급해 주는 세상 왕으로 삼으려 하는 자들은 예수가 지금 다시 오신다면 당장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자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디베랴 호수라는 배경에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일을 보세요.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떡과 고기를 구워 그들에게 주시지요? 오병이어의 현장과 동일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을 부탁하십니까?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 배 터지게 고기와 떡을 먹여 주라는 이야기인가요? 예수님은 지금 그 참 생명의 떡인 예수를 그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그 성찬을 먹는 자들인 제자들에게 부탁을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다녔지만 이제부터는 성령이 너를 이끄시는 대로 너는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1:18)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렇게 성찬을 먹는 자들은 두 팔을 벌리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 바로 성찬을 드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땅에서는 비록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듯한 삶을 산다 해도, 아니 푸른 초장을 거니는 듯한 풍성한 삶을 산다 해도, 어느 상황에서도 내게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삶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가슴속에 품고 사는 사람이며 지금은 이렇게 보이지 않지만 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찬을 반드시 먹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아울러 성찬을 받아먹는 사람들은 모두 평등함 속에서 다른 이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보여 지는 계급과 위치와 재산과 지식 정도는 다 다를 지라도 성도는 한 상에서 동일한 음식을 먹는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찬을 먹는 사람들은 빈부의 격차나 지위의 고하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찬 안에는 교회 론과 구원론과 신론과 인간론이 모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눈에 보이는 복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찬이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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