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기본교리

18. 믿음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00:03

18. 믿음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부분은 믿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단어가 바로 이 믿음일 것입니다. 이 믿음만 가지면 우리는 못할 것이 없다는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아왔지요? 원하던 일이 안 이루어지거나 잘 못되거나 하면 “믿음이 없어서 그래”라는 말을 많이 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기도 합니다. 믿음을 달라고 금식기도를 하기도 하고, 백일 작정 철야를 하기도 하며 천일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심지어 삼각산 기도원에 올라가면 흔들바위가 있는데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 올라가서 기도하면 그 바위가 굴러 떨어진다는 전설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을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어서 밤에 몰래 올라가서 그 바위가 정말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열심히 기도해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바위가 꼼짝도 안하기에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담당 전도사님께 상의를 했더니 기도를 하면서 “믿습니다.”를 계속 반복해서 외치면 어느 순간 믿음이 생긴다고 가르쳐 주시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믿음은 분량으로 잴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마치 믿음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갈고 닦아서 좋은 것으로 만들어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왜 그런 오류가 있는가하면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을 “믿다”의 명사형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의 “믿다”라는 말은 “받들고 따르다”라는 뜻으로 다분히 내가 행해야 하는 행위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내가 행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믿음이 생긴다면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선물이 아니고 은혜도 아니며 당연히 받아야 할 대가인 것이지요.

과연 성경은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며 그 믿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오게 되는가에 관해 함께 공부해 보지요.

오늘 본문인 로마서117절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이야기 할 때 그 근원이 어디인지를 자주 간과(看過)하는데,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 끝까지 아버지의 노릇을 해주심”을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의()를 그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관계를 맺고 사는 어떠한 존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의()’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성실하게 해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버지로서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와 뜻이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좀 더 들어보세요.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福音)이라는 것이 뭡니까? 여러분을 복음을 어떻게 정의 하고 계세요? Good news, 무엇이 좋은 소식입니까? 로또 맞은 것? 아들이 좋은 대학 붙은 것?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들어 간 것? 그런 것들은 다분히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겨서 기뻐할 때 진 쪽은 복된 소식이 아닌 슬픈 소식에 눈물을 흘리겠지요? 그렇다면 영원토록 변치 않는 좋은 소식, Good news는 무엇일까요? 영원토록 변치 않을 뿐 아니라 절대성을 지닌 참 복음은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주시고 그 아들은 우리 하나님 백성들을 위해서 기꺼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살려내셨고 그 삼위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가 용서를 받고 나음을 입게 된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전체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믿는 자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복음이 진짜 복음(福音)이 되기 위해서는, 진짜 Good news가 되기 위해서는 그 소식이 자기와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강원도 삼척의 이 씨 아저씨의 아들이 서울대학엘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 씨 아저씨가 뛸 듯이 기뻐하는데 그 소식을 함께 들은 정 씨 아저씨는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것처럼 복음은 반드시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이 진짜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던져지는 복음이 정말 나와 관련한 진짜 좋은 소식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인가가 우리가 오늘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오늘 성경은 믿음이란 방법이 우리를 믿음이란 결과로 이끌어간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다소 이해하기 힘든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앞의 믿음은 무엇이고 뒤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먼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을 풀어 보겠습니다. 그 구절을 보면 마치 믿음이 두 종류가 있는 듯 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렇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그렇게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서 이해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으면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믿음에서 출발해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를 공부하는 데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만큼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을 대표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을 간단하게나마 짚어 보면서 그 구절의 진의를 풀어보지요. 먼저 히브리서의 한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11:8-9)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성경은 이렇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러워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잘 보세요. 정말 그는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떠났나요? 창세기로 가보지요.

(11:31~32)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여기 보시면 아브라함이 일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온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아브라함과 그 식솔들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분명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은 데라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 곳을 떠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7:2~3)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그렇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닌 데라가 여행의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숨은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요?

그 질문은 잠시 간직해 두시고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우리가 또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을 찾아보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대단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어 팔던, 우상 섬기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이며 그도 역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의 덕으로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24:1~2)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잘 보세요. 언뜻 보면 다른 신들을 섬긴 조상이 데라 만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분명 그 앞에 ‘너희 조상들’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들을 섬긴 사람들은 데라 한 사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나홀과 데라를 모두 지칭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던, 심지어 우상을 만들어 팔던 집안의 자식이었으며 본인도 집안의 내력을 좇아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왜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을 택할 때 집안내력이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을 택했을까요? 그와 동시대 사람인 욥을 택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지 않으세요? 그는 하나님도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이었으니까요.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불가능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스토리를 엮어 이해하기 쉽게 각색을 한 번 해 보자고요. 어느 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어떤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갈대아 지방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이미 지금부터 4,000년 전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에게 거기보다 편하고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꺼림칙한 일은 불운을 가져온다는 생각에 젖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복’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받을 ‘복’에 흠이나 티가 있으면 액운을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데라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정체에 대해 모호함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정체가 모호한 것은 당연하지요. 그런데 우상을 섬기던 아브라함에게 어떤 신이 나타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그러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자들에게 이런 솔깃한 이야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신이 자기 말만 들으면 복을 부어준다는데 그걸 마다할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그 말을 안 들었다가 나중에 험한 꼴이라도 당하면 자신들만 손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가족의 통솔권을 쥐고 있던 아버지 데라가 자기 명령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서 길을 떠난 것입니다. 왜요? 복 받으러 떠난 것입니다. 보세요. 갈대아 우르라는 세상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은 이렇게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요구도 할 수 없었을 때에 하늘로부터 땅으로 부어지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자기가 살던 곳 이외의 다른 곳으로 가면 전혀 법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누가 때려 죽여도 말 못하는 자들이 바로 이방인이요 나그네였습니다.

그런 이방인의 삶을 살려니까 데라가 겁이 났겠지요? 그래서 데라는 갈대아 문명권 아래인 하란에서 머물다 죽습니다. 본토를 차마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까지 못 간 것이지요. 그렇게 데라가 죽자 하나님께서 그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12:1~6)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우리가 보았듯이 스데반의 설교에서는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에서는 하란에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등장은 두 번째 등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르에서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반복하십니다. 이렇게 75세까지 하란에 머물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끈질기고 고집스러운 권유로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그 땅에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곧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그 꿈속에 나타났던 영감에게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을 준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복은커녕 기근이 뭐냐고 투덜댔겠지요. 그러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애굽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애굽으로 가라 하지 않으셨거든요.

(12:10~13)

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믿음의 조상이라는 사람이 기근으로 그렇게 달랑 애굽으로 도망간 것도 가관인데 거기에 가서 자기 아내 때문에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 같으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다른 남자의 품으로 보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잘못을 한 아브라함은 놔두시고 애굽 왕 바로를 혼내주심으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당시 세계 패권을 쥐고 있던 애굽 왕 바로보다 훨씬 강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왜 아브라함을 혼내지 않으셨을까요? 그 때는 아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징계를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은 그랄 왕에게 또 다시 사라를 팔아먹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이 사라의 뱃속에 들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오직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사라를 팔아먹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여정 속에서 계속해서 실패하고 실수하며 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가르치시며 가나안으로, 모리아 산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계획과 목적대로 이루시고야 마실 것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으로 던지시며 그 길을 가십니다. 계속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고 세상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며 그렇게 복을 받은 너의 후손이 저 바다의 모래처럼 많고 저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사람됨이나 인격이나 능력이나 노력을 근거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홀로 지켜내시는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신 후 제물을 쪼개 놓으라고 하신 후에 그 쪼개놓은 제물 사이를 홀로 지나가시지요?

(15:12-18)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 장면은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언약 관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두 사람이 언약을 할 때에 언약 당사자인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잡고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감으로 해서, 둘 중 하나가 이 언약을 어기면 어기는 자가 이 쪼갠 고기처럼 쪼개질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히브리 관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홀로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 인간은 이 언약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아니므로 홀로 지켜 가시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인간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의 언약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역사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말라기에서 ‘너희의 힘으로는 나의 언약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겠지?‘라고 구약의 문을 닫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죄인들인 그의 백성들이 약속을 지켜낼 수 없었기에 쪼개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지켜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쪼개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탄생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그게 바로 여러분과 저,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계속 언약을 어겼으며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인생을 좇아가  보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언약을 하셨음에도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보세요. 이게 믿음의 조상의 알량한 믿음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얼마나 참으셔야 합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의 인생을 짚어 가시면서 아브라함 속에 있는 믿음의 후예인 여러분의 모습을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다면 이미 지옥 불에 던져지고도 남을 만한 자들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은 뒤 그로부터 13년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구십 구세였습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난 그 분 하나 믿고 가나안까지 왔는데 그 분이 십 삼년 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이 들고 외롭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십 삼년 뒤에 그 분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완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 하나님의 섭섭함과 노여움이 잘 나타나있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네 마음대로 하느냐는 질책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혼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구십 구세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습니다. 금방 하나님께서 당신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나를 신뢰하고 좇으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아브라함은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비웃었던 것입니다.

(17:17-18)

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히브리서에 믿음의 조상의 대열에 번듯하게 올라있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웃습니다.

(18:10-15)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그렇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사라가 믿음으로 이삭을 낳았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자체가 모순을 갖고 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이란 단어를 잘 못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부분은 결론 부분에서 자세하게 정리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세요. 우리가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았듯이 그렇게 어느 한 가지 제대로 한 적 없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징계와 교훈과 훈련을 거친 후 백세에 낳은 자식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는 실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22:16-18)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을 칭찬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반복해서 주신 언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이삭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믿음으로 바친 아브라함에게 마치 상으로 주시는 것처럼 이야기 하십니다.

(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15:5)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렇지요? 이미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론이 나옵니까? 하나님은 이미 이 복을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작정하시고 당신께서 직접 아브라함을 그 복을 받을 만한 자로 만들어 내신 것이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해서 그 복이 주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창세기22장에서 이삭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는데 아브라함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끌고 가시지 않았나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하시고 간섭하셔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의 해석의 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시켜 내시는 출발점에서부터 마지막 도착점까지 전부를 믿는 것을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하나님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먼저 배태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잘 이해하세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이 우리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와 계획과 언약 이 모든 것들을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삶에 뚫고 들어와 우리를 징계하시기도 하고 달래시기도 하고 설득하시기도 하면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덮쳐올 때에 우리는 그 인생의 질곡을 겪으면서 ‘아 하나님은 정말 전지전능하신 유일하신 분이시구나. 우리는 그 분을 의지할 때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구나. 어서 항복하자’라고 그 분 앞에 두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을 우리의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객관적 믿음이라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게 되는 것을 주관적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그래서 그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에 어떤 믿음의 소유자였습니까?

(11:18-19)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음 가운데서도 반드시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갈대아 우르의 형편없는 겁쟁이가 하나님의 이끄심과 인도하심과 가르침과 징계와 교훈으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백세에 낳은 자식의 가슴에 칼을 꽃을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믿음을 소유한 첫 번째 모델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지 그가 뭔가 대단해서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여러분 중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먹는 파렴치한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본받을 생각 마시고 그 나약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내신 하나님을 신뢰하시란 말입니다.

히브리서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을 때부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이란 말을 쓰는 이유가 바로 그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출발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4:1-2)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정확하지요?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에서 우리의 믿음이 배태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아직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그 객관적인 믿음이 어느 날 나에게 이해되어지고 인식되어지며 믿어지게 되는 주관적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의 진의인 것입다.

그래서 히브리서11장에는 모세와 기드온과 입다와 삼손과 바락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의 내용은 알았습니다.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는 말을 병행구로 같은 의미의 어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는 말씀은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이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서신 서에도 세 번이나 나오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을 구약의 어딘 가에서 인용을 한 것인데 그 구절을 밝혀보면 오늘 구절의 의미가 보다 선명해 질 것입니다.

(2:4)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도바울이 이 하박국의 내용을 인용했을 때는 하박국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럼 하박국의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알면 우리가 사도바울의 로마서 내용을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박국은 BC600년에서610년 사이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BC 600-610년 사이면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BC722) 남 유대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BC586) 바로 전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패역할 대로 패역한 시기였습니다. 하박국서를 잘 읽어보시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부도덕한 짓들을 자행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인 하박국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렇게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들은 잘 살고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하는 자들은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일을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하박국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묵묵부답입니다. 그랬더니 하박국이 내가 이렇게 부르짖는데 왜 주님이 듣지 않으시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1:1~4)(표준 새 번역)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5절부터 대답을 하시는데 “그래 내가 갈대아 인들을 들어서 너희 이스라엘을 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5~8)

5  "너희는 민족들을 눈 여겨 보아라. 놀라고 질겁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너희가 살아 있는

6  이제 내가 바빌로니아 사람을 일으키겠다. 그들은 사납고 성급한 민족이어서, 천하를 주름 잡고 돌아다니며, 남들이 사는 곳을 제 것처럼 차지할 것이다.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운 백성이다. 자기들이 하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권위만을 내세우는 자들이다.

하박국이 깜짝 놀랍니다. 갈대아 인은 바벨론 사람들입니다. 당시 앗수르와 비교해서 형편없는 약소국이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잔인한 자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악함을 치시는데 더 악한 자들을 들어서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갈대아는 이스라엘의 소유를 빼앗아다가 잘 먹고 잘살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하박국이 ”왜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데 가만히 계시냐“고 또 따집니다.

(1:12~16)

13 주께서는 눈이 맑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보고만 계십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삼키어도, 조용히만 계십니까?

14 주께서 백성들을 바다의 고기처럼 만드시고 다스리는 자가 없는 바다 피조물처럼 만드시니,

15 악한 대적이 낚시로 백성을 모두 낚아 올리며, 그물로 백성을 사로잡아 올리며, 좽이로 끌어 모으고는, 좋아서 날뜁니다.

16 그러므로 그는 그 그물 덕분에 넉넉하게 살게 되고 기름진 것을 먹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물에다가 고사를 지내고, 좽이에다가 향을 살라 바칩니다.

하박국은 지금 자신은 의로우며 이스라엘은 선민이라는 전제하에서 하나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대아의 야만인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시느냐고 따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2장으로 넘어가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들어보겠다고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말씀을 하시는데 “하박국아 너는 너와 이스라엘이 선민이고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스스로 의인인 줄 알고 있나본데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나 이스라엘이나 바벨론이나 똑같은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 자들만이 의인이며 그들만이 살아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을 교훈하고 가르치기 위해 들어 쓰고 있는 악인들은 정한 때가 되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밝히십니다.

(2:2~4)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갈대아 사람들이 어떻게 저주를 받을지 다섯 가지로 설명을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대답을 해주시자 하박국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아, 그런 것이 군요, 하나님. 우리는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선물해 주시는 믿음으로 살아난 자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오히려 악인들을 들어서 우리를 훈련하시고 양육하시는 것이 군요, 하나님 수년 내에 우리를 부흥케 하시고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3:2)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부흥이라는 말은 성경 전체에서 여기 한번 나오는데 “깨끗하게 교정하다”“악을 제거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것처럼 사람이 많아지고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부흥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지금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이 부자가 되고 사람이 늘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은 “하나님 그런 것이라면 바벨론을 들어서라도 빨리 우리의 악을 제거해 주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벌을 받고 있을 때라도 장차 임할 구원을 준비하게 하소서”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개념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분별하고 기억하세요.

하박국은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 홍해를 가르고 해를 멈추게 하시고 하신 역사적 객관적 사실들을 떠올리며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을 하박국은 확인합니다. 그게 하박국서입니다.

하박국서의 마지막을 보면 하나님의 계시로 자기에게 떨어졌어야 할 그 저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알자 하박국은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뼈가 썩고 몸이 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에게 떨어질 그 무시무시한 저주가 자기에게 떨어질 것이었는데 자기는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되어있음에 하박국은 기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위대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나보다 죄인들이 더 잘 살고 나의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고 나의 포도원에는 포도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도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나는 내게 믿음을 선물하셔서 나에게 이루신 그 구원만으로도 난 기뻐 할 수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16~18)

17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께서 마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렇지요? 믿음은 우리에게서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의 소산입니다. 그렇게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먼저 나온 것이기에 절대 실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객관적 믿음인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에게 반드시 주관적 믿음을 이끌어 내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건져내신 그 분이 실패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1:6)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걱정하지세요. 조바심 내지 마세요. 왜 나는 지금까지 이 모양이냐고 좌절하지도 마세요. 분명 하나님은 우리를 완성하실 것이고 우리 대적들은 모두 저주의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문이 닫히고 다시는 열리지 않을 그 곳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잘 참으시고 인내하세요. 믿음은 반드시 믿음에 이르게 하며 의인은 믿음으로 반드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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