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기본교리

16. 구약과 신약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00:02

16. 구약과 신약

 

(고후3:1-6)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자격을 주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문자)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오늘은 우리가 옛 언약과 새 언약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은 도대체 무엇인가? 조금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잘 들어주세요.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전체가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경륜해 가시면서 인간들을 대하시는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언약이라는 말이 이백 아흔 두 번이 나오고 약속이라는 말도 예순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렇게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은 39권이고 신약은 27권입니다. 그 많은 분량의 구약은 무엇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은 또 무엇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둘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제가 자주 구약은 영화의 화면이고 신약은 영화 자막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연관성은 어떤 것일까요

구약과 신약은 서로 떨어 뜨려놓고는 절대 이해 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구약과 신약은 전체가 다 일관성을 가지고 어떤 단일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엇일까요? 잘 공부해 보자고요.

먼저 성경이 말하는 옛 언약이 무엇인가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1:1-4)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가라사대

2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고하라

3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 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것이 구약 전체에 흐르는 옛 언약입니다. ‘내 목소리를 듣고 나의 명한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이렇게 율법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옛 언약인 것입니다.

그럼 새 언약은 무엇일까요?

(8:7-13)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 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9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 하리라 하셨느니라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7절을 잘 보시면 옛 언약이 흠이 있는 언약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이 흠이 있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실수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옛 언약은 그 언약 홀로 완성품이 아니라 어디로 향하고 있는 언약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옛 언약이 흠이 있어 새 언약을 세우셨는데 그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남편이 되어서 손을 잡고 끌고 나왔는데도 이스라엘이 그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 불순종하였기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뚫고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심비에 직접 기록을 해놓으시겠다는 것이 새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결론되어지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흠 있는 언약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옛 언약, 구약은 율법이요, 새 언약, 신약은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기본으로 깔고 오늘의 본문을 열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 후서 3장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거짓 사도가 잘못된 것을 밝히기 위한 공격 방법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면서 공격을 전개해 나갑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을 옛 언약의 대표로, 자기 자신을 새 언약의 대표로 올려놓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지요?

그러면 “거짓 사도와 옛 언약, 참 사도인 바울과 새 언약” 해서 옛 언약이 거짓이라는 Logic이 성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잠간 언급해 드린 것처럼 그 옛 언약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거짓일 수가 있는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언약이 거짓이 될 수 있습니까?

조금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 언약이 없는 옛 언약은 거짓이다”입니다.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결론지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옛 언약 홀로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약의 그 많은 율법과 제사제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구약을 주실 때 새 언약을 염두에 두시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구약에만 머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유대교는 불완전할 뿐 아니라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토요일이면 검은 정장차림으로 할리우드 거리를 활보하는 그 많은 유대인들이 저는 참 측은 합니다. 옛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나를 청종하고 내 말을 지키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계속해서 죄를 지었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제도와 율법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구약은 그렇게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을 지적하기 위한, 은혜의 필연으로 향하는 사다리였던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와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림자였고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3:24)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제사제도는 죄 없는 제물이 죄인 대신 죽임을 당하고 죄인의 죄가 용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그림자로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10:1-5)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명확하지요? 이렇게 하나님은 새 언약을 위해 구약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질 그 은혜를 설명해주시고 이해시켜 주시기 위해 구약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이 지어지지 않는 구약은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시원한 생수를 약속하지만 그 곳에는 끊임없는 모래바람과 뜨거운 햇빛만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의 삶에 오아시스가 있었나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그들은 어떤 처지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자들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아닙니까?

그럼에도 구약에만 머물러 있는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네들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이 쓰는 구약 성경의 순서는 우리의 구약의 순서와 좀 다릅니다. arrangement이 좀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약은 역대 하에서 끝이 납니다. 역대하가 어떻게 끝나지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만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는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그들은 이제 메시아가 와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사무엘하의 다윗의 언약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약은 어디서 끝이 납니까? 말라기에서 끝이 납니다. 말라기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가나안에 돌아와서도 끝까지 옛날 버릇 못 버리고 범죄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들 드릴 때도 성의 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하면서도 제일 쓸모없는 것들을 가지고 와서 유세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봐라, 너희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지? 너희는 내게 저는 것 흠 있는 것 엉터리 같은 것 가져다가 바치고는 제사지냈다. 십일조 했다 하는데 너희 총독에게 그런 거 가져다 줘봐라. 사람도 안 받을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조롱하느냐? 너희는 나의 요구 조건을 절대 충족시킬 수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제 내가 한다.”하시고 구약을 닫으십니다. 그게 말라기입니다. 인간의 완전한 실패로 구약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없는 구약은 거짓이라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유대교만을 전하는 자들은 모두 거짓사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오셔야만 한다는 것을 구구절절이 피력하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3:9)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보세요. 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구약의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사탄의 회”라고 까지 하십니다. 그만큼 우리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이 예수로 결론이 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해서 예수를 부인하고 옛 언약의 우월성을 주장하던 자들을 가리켜 거짓 사도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은 옛 언약의 성취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는 처음 창조와 새 창조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있던 무질서 속에 빛을 창조하시면서 창세기의 창조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둘째 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시고 셋째 날 물과 뭍을 나누시며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 까지 열심히 그 셋째 날 까지 만들어 놓으신 그 틀에다가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그리고 완성된 창조를 일곱째 날 안식하시면서 즐기시는 것이 창세기의 창조입니다. 그 창조는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우리 죄인들의 마음에 예수라는 빛을 보내셔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실 것인가를 힌트해 주시는 사건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묘사를 하지요?

(고후4:6)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분명하지요? 창세기의 첫째 날 빛이 있으라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었음을 바울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과 2장의 이야기가 바로 그 창조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익히 살펴  보았다. 첫째 날 빛이 오시고 그 이튿날 세례를 받으시고 그 이튿날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묵었습니다. 정확하게 창세기의 셋째 날까지의 창조가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가 오셔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갈리는 것으로 상징이 되는 세례를 받으시고, 물이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이신 주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셋째 날까지의 천국의 틀에 당신의 백성들을 채우시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천국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상징하는 가나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와 요한복음 12장의 사건들은 바로 예수께서 그 새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내실지 미리 힌트해 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새 창조를 상징하는 창조이기에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면을 보여 줍니다. 빛이 창조되었는데 빛과 함께 어둠이 공존합니다. 그렇지요? 그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빛으로 가득 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날에도 역시 궁창과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하늘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궁창과 궁창 위의 물은 후에 성막의 물두멍으로 또 휘장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마치 놋을 망치로 쳐서 만드는 물두멍처럼 만드셨다는 표현과 커튼처럼 치셨다는 표현들이 구약에 여러 번 나오지요? 그것은 바로 휘장이신 예수의 몸이 하늘로부터 아래로 찢겨져 궁창과 궁창 위의 물이 물러가고 죄인들이 하늘로 들어가는 길이 열릴 것임을 담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궁창 아래의 물은 바다가 되는 것이고요. 셋째 날도 마찬가지죠? 물과 뭍이 공존합니다. 성경에서 물은 저주의 물, 심판의 물, 죄악의 물을 가리킨다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할 때 ‘다시 바다가 있지 않겠고’라 묘사한다 했지요? 성경은 그 모든 악의 물이 물러가고 다시는 바다가 있지 않은 뭍이 반드시 완성 될 것이라는 것을 셋째 날의 창조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의 창조는 그 속에 하나님의 언약을 담지하고 있는 새 창조의 그림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그 어둠이 어떻게 물러가며, 그 물이 어떻게 말라버리며, 그 궁창이 어떻게 뚫리게 되는지, 다시 말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다시 무질서인 카오스의 상태로 떨어져 버린 그 벌거벗은 아담이 어떻게 의의 세마포를 입은 천국 백성이 되어 가는가를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통해서 설명을 해 주시는 것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able to sin에서 not able to sin으로 바뀌게 되는지를 설명해 주시는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격적인 존재들은 모두 그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천사들도 probation을 거쳐서 그 시험을 통과한 자들은 영화의 삶으로 가는  것이며 통과하지 못한 자들은 저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있는 천사들은 probation을 통과한 존재들이라 이제 not able to sin의 상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시 나중에 천사들이 도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기에 거기에는 이제 반란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는 알려고 하지 말자고요. 하나님께서 그 이상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시니까요. 천국에 가면 알 수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인간들도 그 하나님의 probation을 통과하면 바로 천국의 삶을 not able to sin의 상태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사랑하심으로 예수를 보내셔서 그 probation을 통과하게 하시고 그들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제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해요. 저는 지금 하나님이 계획도 없이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시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인간의 처분을 기다리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택한 것  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미 십자가를 창세전에 준비해 놓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고 선악과의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인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로 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원리, 즉 나를 비워 원수의 유익을 구하는 삶의 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저와 공부해 나가시면서 점점 클리어하게 정리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오늘은 이 정도까지만 하자고요

그러므로 첫 창조는 새 창조의 준비 단계일 뿐입니다. 첫 창조는 임시적이며 낡아지고 부서질 것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렇죠? 태양도 빛을 잃을 것이고 달도 기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어떨 때 이런 생각 안 드세요? ‘하나님이 이런 것은 요렇게 만드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 드시지요? 왜 그런지 아세요? 왜 하나님이 조금 아쉽게 이 세상을 이렇게 놔두실까요? 여기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첫 창조 속에서 우리에게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첫 창조는 임시적이며 잠정적인 우리의 주거지일 뿐입니다. 영광과 영화의 새 창조 때까지 인간에게 주어진 임시 주거지입니다. 그러나 새 창조는 영원한 것으로, 불멸의 것으로, 썩어지지 아니할 것으로 지어지게 되는 영적인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는 이렇게 새 창조의 모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9:23)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 지니라

제사나 율법 그리고 이 창조물들은 모두 새 창조의 모형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첫 창조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8:13)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영적인 새 창조를 목적으로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 하셨습니다. 여기는 이제 곧 낡아지고 부서지고 불에 타버릴 우리의 임시 주거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디에다 관심을 두고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이 옛 언약에 속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의 성취로 우리에게 주어질 저 하늘나라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를 가리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 정죄의 직분(유죄를 선포하는 직분)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율법 아래 있는 거짓 사도들을 공격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새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신의 직분을 의의 직분이라 하지요?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마세요. 구약인 율법이 아주 몹쓸 것이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격을 알게 해 주시는 좋은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는 자라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만큼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십계명 돌 판으로 상징되는 율법의 모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구약은 예수그리스도로 결론지어지지 않으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에게 소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잘 보시면 십계명 돌 판은 생명 없는 인간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17:1)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얼마나 그 죄인들의 마음이 단단하면 금강석 끝 철필로 그 죄가 마음 판에 새겨져 있다고 성경이 죄인들을 묘사하겠습니까? 성경은 십계명 돌 판과 죄인인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대조합니다. 그 돌판 같은 단단한 마음을 가진 죄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 버리시는 것이 새 언약인 것입니다.

(36:26-28)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성경은 그것을 이러한 대조로 확인시켜 주고 있기도 합니다.

(32:26-28)

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돌비에 새긴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때를 그들이 애굽을 탈출한 유월절부터 계산해 보면 정확히 50일 후라고 합니다. 유월절 이후 오십일이면 무슨 날입니까? 오순절쯤이지요? 오순절에 그 율법이 산 아래의 죄에 닿으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요? 삼천 명이 죽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신약에서 오순절 날 새 언약의 성취로 그 새 영이 내려오십니다. 그 새 영이 똑같은 죄인들에게 부어지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의 설교에서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지요? 성경은 정확하게 이렇게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삼천 명이 죽는 것으로 새 언약은 삼천 명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으로 비교를 합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판이하게 양상이 바뀐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되자 죽음이 삶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며 그게 바로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내용인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죄인들이 그들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버리시는 것, 그래서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을 우리는 새 언약이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부터 시작해서 계시록으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를 설명하기 위한 예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결론지어지지 않는 구약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며 그 율법을 전하는 자들을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를 성경에다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새 언약 아래에서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얻으신 성도 여러분 조금 있으면 낡아 없어질 구약적인 이 땅의 것들에서 눈을 들어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것을 바라는 새 언약의 백성다운 삶을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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